11. 바쁘니까 비켜 (1)
“아...씨발. 팀을 바꿨는데 또 이 지랄이네. 도움 안 되는 새끼들...”
“입 닥쳐 윌리엄. 네가 사고치고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창피는 안 당했어. 우리는 OMA에 대해 아무 감정도 없다고.”
플레이어명 서서. 본명 윌리엄.
그는 아주 남 탓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LOH에서 남 탓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딨겠냐만은, 윌리엄은 팀원들을 짜증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네 쓰레기같은 플레이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 이거냐? 너의 미래를 위해서 말 하는 건데, 지금이라도 기술 배우러 가라. 내가 생각할 땐, 유다. 넌 재능이 없는 것 같거든.”
OMA에서 방출당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상당한 팬덤을 갖고 있는 윌리엄을 방출하는 것은 구단 입장에서도 무척 난감한 일이었지만, 트러블메이커는 일찌감치 제거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낫다고 판단했다.
가끔 막 나가긴 했지만, 윌리엄도 바보는 아니었다.
구단에서 방출당한 뒤, 다른 구단으로 옮기게 된 윌리엄은 한동안 그런 성격을 죽이며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걸린 개막전 매치에서 패하고, 또다시 그 버릇이 나온 것이다.
윌리엄은 경기가 끝난 뒤.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뜨는 구단주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에이 시발. 보너스는 다 날아갔네.’
팀원들과 한바탕 한 뒤. 윌리엄은 입을 꾹 다물고 LOH 커뮤니티 레딧을 찾았다. 그의 팬, 그리고 그의 편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이곳이니까.
레딧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정명과 서서의 사진이었다.
정명은 얼굴에 여유만만한 웃음을 띤 채로, 그리고 서서는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서로 악수를 하고 있었다.
윌리엄은 금연건물인 연습실 안에서 담배를 태우며 길게 한숨을 뱉었다.
‘후, 협회의 얘기만 아니었어도, 이딴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는 안 하는데.’
대회 관계자들은 적당히 싸우는 것은 분위기를 업 시켜서 흥행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싸우는 것은 제살 깎아먹기라고 판단했다.
때문에 협회는 각 구단에게 두 선수가 화해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 요청했고, 구단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결국 정명과 서서는 실제로는 어떻든지 간에 화해의 악수를 보여줌으로써, 이 사건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팀원들과 싸웠으니, 팀 연습은 자연스레 흐지부지 되었다. 어차피 경기에서 진 다음날이라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윌리엄은 손이라도 풀 겸, 방송을 켜고 솔로 랭크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뒤. 게임을 시작한 윌리엄은 눈을 크게 떴다.
@@@
OMA의 연습실.
홀로 숙소에서 인터넷을 하고 있던 정명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같은 팀 동료이자 정글러인 조시였다.
“어, 조시. 의사는 뭐래?”
-가벼운 탈진이래. 나보고 마라톤이라도 뛰었냐고 하더라. 쉬면 낫는다는데, 술담배 하지 말고,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래. 당연한 소리를 들으려고 그 멀리 있는 병원까지 갔다 온 건가 싶더라.
“뭐 어때. 알았으니까 쉬어. 당분간 경기도 없으니까...”
전화를 끊은 정명은 빈 연습실을 슥 돌아보았다.
오늘 연습은 없다. 팀원들이 전부 몸살이나 근육통에 걸려서 도저히 연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구단 측에서는 오늘 뿐만 아니라 이번 주 까지. 그러니까, 3일 정도 선수들에게 휴가를 내 주기로 했다. 아직 리그 초반이라서 여유가 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홀로 숙소에 남은 정명은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인터넷을 끄적였다.
“에이, 서서놈은 더 능욕해줬어야 했는데.”
화해 요청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정명도 마찬가지였다.
정명은 서서와 화해를 해 달라는 요청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것이 정명에게 차라리 잘 된 것이라는 코치의 조언을 듣고, 마지못해 수락했다.
1부리그로 막 올라온 선수가 부정적인 쪽으로 이미지가 구축되면 앞으로의 선수생활에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다.
‘후, 어쩔 수 없지. 앞으로 더 출세하는 수밖에.’
짧게 한숨을 쉰 정명은 북미 커뮤니티를 벗어나, 오랜만에 한국의 LOH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했다.
물론, 한국에서 유행하는 전략을 배운다거나, 유행하는 챔피언을 찾아본다던가 하는 생산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혹시나 자신의 소식이 구석에라도 실렸을까봐 찾아본다는, 지극히 속물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정명의 기대대로, 한국에서도 북미 리그를 관심 갖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명은 그중 한 사람이 경기 결과를 정리해놓은 게시물을 클릭했다.
[대회 정보 - 북미 리그 개막전]
북미 리그 개막전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세한 것은 표를 참조.
사족 : 북미 개막전에서 OMA가 토베노를 2:0으로 꺾고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경기가 꽤 굉장했습니다.
이 경기의 하이라이트 경기 영상이 순식간에 레딧 인기게시물로 올라섰는데, 보셔도 후회 안 하실 듯.
글에는 짤막한 설명과 함께, 한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경기의 하이라이트인 OMA와 토베노의 한타 영상이었다.
댓글의 반응은 꽤 괜찮았다. 한국 리그를 매일 보기 때문에 눈이 높아진 한국 팬들임에도, 그만큼 높이 평가해준 것이다.
-백설 : 북미 클라스 비웃어주려고 왔는데, 와. 저거 뭐냐. 싸움 왜 저렇게 잘함?
-아카페라 : 캬. 역시 김치가 섞이니까 다른 팀이 되는구나. 한국인 선수뿐만 아니라, 다들 잘하네. (펄럭) 그리고 댓글 중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은 한국 프로 선수가 달아 놓은 댓글이었다.
김수봉 : 이 동영상 보고 깜짝 놀라서 전체 경기 영상을 한번 찾아봤는데요, 전체적으로 보니 그냥 평범한 북미의 구단 정도...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영상만 보고는 꽤 감탄했습니다. 북미팀들의 실력이 어느새 이렇게 늘었나 싶었거든요. 아마 이 팀이 계속 연습해서 이런 기량을 경기 내내 보여줄 수 있다면, 한국에서 경기를 뛰어도 괜찮은 성적을 내지 않을까 싶네요.
“흠, 그런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다만. 포인트가 워낙 쪼들려서.”
커뮤니티를 전부 둘러 본 정명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팀원들의 병가로 인하여 갑작스럽게 할 일이 없어진 정명은 혼자 연습실에서 인터넷 방송으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
“안녕하세요. 갑자기 시간이 비게 되어서, 주말이 아닌데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정명이 방송을 켜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한다. 정명도 이제 북미에서는 제법 인지도를 쌓았기 때문이었다.
정명은 퀘스트창과 현재 아이디를 번갈아 보며 마우스를 톡 톡 두드렸다.
[솔로랭크 퀘스트]
그랜드 마스터 리그에 올라가십시오.
보상 : 3000포인트
“빨리 그랜드 마스터로 올라가야 하는 데 말이에요. 그래서 포인트를...아니, 그랜드 마스터에 가야 솔로 랭크를 돌려도 프로들이랑 매칭 되는데.”
솔로 랭크는 올라갈수록, 팀을 짜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최상위권으로 갈수록 사람은 없고, 게임에 필요한 사람은 10명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었다.
정명은 매칭을 기다리는 동안, 채팅창을 읽으며 적당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서서랑은 화해했다니까요. 먼저 시비 걸지 않는 이상은, 저도 안 싸웁니다. 아, 환영술사가 밴이 아니네요. 이거 한번 해보겠습니다.”
정명은 오랜만에 환영술사를 플레이할 수 있었다.
정명의 주 캐릭터로 알려져 있는 환영술사는, 대회에서는 항상 밴 되기에 어지간해선 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뒤. 정명은 상대방 미드라이너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오, 저 아이디는...서서네요?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시청자들 또한 상대방 미드라이너 아이디를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채팅창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케에엨 : 리턴매치 떴다!! 이거 이기면 달풍선 1000개 쏩니다!
-알베르토 : 또 비등비등 하려나? 어제 경기에서는 그랬잖아.
확실히, 어제의 경기에서는 라인전은 비슷비슷하게 가져갔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환영술사를 선택했습니다.]
[환영술사의 숙련도 : LV 3 원소술사]
[피지컬이 60 + (3)으로 보정됩니다.]
정명은 서서의 아이디를 노려보며 씩 웃었다.
“어떻게 이렇게 또 만났네요. 근데 제가 환영술사는 진짜 잘 하는데...어제랑은 조금 다를지도 몰라요.”
정명은 방송을 할 때면, 이렇게 자신이 환영술사를 잘 한다는 것을 어필하며 떠벌리고는 했다.
자만심에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나 이거 진짜 잘 한다. 그러니까 나와 만나는 경기에서는 이거 꼭 밴 해라. 나는 다른 거 할 테니까.’ 라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정명을 포함한 프로들의 방송은, 상대팀의 전력 분석 팀이나 코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걸 수 있는 심리전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정글러 개입 없이 해보자고 할까요.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정명은 굳이 서서에게 직접 채팅을 보내지 않았다.
시청자들에게 이렇게 운을 띄우면, 알아서 여론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서서도 1:1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정명의 애청자들은 그런 정명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 주었다.
-시청자 003 : 지금 서서 방 갔다 왔는데, 서서가 정글러한테 미드 오지 말라고 채팅쳤음 ㅋㅋㅋ 1:1 매치 성사됨
“오, 그거 다행이네요. 이거 미리 말 해두지만, 싸우는 거 아닙니다. 재미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오해 마시길.”
경기가 시작되고, 정명은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영술사를 잡은 정명의 피지컬은 63. 어제 경기보다 살짝 높은 수치다.
작은 차이지만, 정명은 확실히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손이 잘 풀리네. 아니, 손이 빨라졌나?’
0.1초의 싸움.
정명은 스킬을 적중시키고, 서서가 반격하려하면 미니언 뒤에 숨어 스킬을 흡수했다.
누가 봐도 서서가 한 박자 반응이 느렸다. 어제와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것 같아도, 그 미세한 차이가 프로들 사이에서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는 점점 커져서, 마침내 펑 하고 터졌다.
[퍼스트 블러드. 적을 처치했습니다.]
“캬. LOH 재밌네. 이 맛에 LOH 하는 것 아닙니까!”
서서를 때려눕히고 난 뒤, 정명은 캐릭터의 도발 모션을 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명이 SHIFT+4 키를 누르자, 서서의 시체 위에서 정명의 캐릭터가 ‘깔깔깔깔’ 하고 웃기 시작한다.
“네? 서서랑 화해한 것 아니냐고요? 화해는 했지만, 그게 친해졌다는 소리는 아닌걸요.”
이미 미드는 끝났다.
1킬 차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은 팀으로 움직이는 대회에서나 그런 것이고, 팀워크따위가 있을 리 없는 솔로랭크에서는 라인전의 우위가 명백히 정해진 것이다.
물론 정글러가 운 좋게 갱킹을 성공해서 풀어준다던가 할 수도 있지만, 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플레이어 서서님이 게임을 종료하셨습니다.]
“아이고...이걸...그냥 탈주해버리셨네. 멘탈 깨지셨나보다.”
그와 동시에 채팅창이 ㅋㅋㅋㅋ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matilda 님이 달풍선 1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matilda 님이 달풍선 10000개를 선물하셨습니다.]
“앗, 달풍선 감사합니다 마틸다님. 좋은 곳에 쓸 게요!”
달풍선 2만개를 받은 정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전의 그 돈 많은 팬이 오랜만에 통 크게 달풍선을 선물한 것이다.
게임은 금방 끝났다. 서서가 탈주하고 나서 돌아오지 않자, 다른 사람들이 ‘미드 오픈’을 선언하며 게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쉬고 있던 정명에게 팝업 메시지가 떴다.
[matilda님이 1:1 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