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대안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 난 그 자리에서 내가 보인 행동에 상무님이 살짝 겁을 먹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겁이었다, 겁….
내가 이렇게까지 깜빡이도 안 켜고 훅! 하고 들어올 줄 몰랐다는 식의 당황이 아닌, 뭔가 상황이 자신의 계산과는 달리 이상한 방향으로 번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걱정에 겁을 먹고 있는 거였다.
장 본부장은 상무님이 있는 자리에서 알렌 강을 물어뜯기 시작한 날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강 대표는 애써 경험 많은 사람이 돌발 상황 앞에서 침착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하는 것처럼 눈썹을 크게 위로 올렸다 내리며 미소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왜 그런 표정 있지 않나.
오… 제법 성깔 있네? 하는 식으로 마치 자기가 우위에 서서 상대의 공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듯한 표정.
딱 그런 표정으로 날 상대하고 있었다.
그 세 사람의 표정에서 난 내가 끌려다닐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그래서 침묵했다.
침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침묵을 두려워해야 하는 쪽은 아쉬울 게 없는 쪽이 아니라 뭐라도 아쉬울 게 있는 쪽이어야 하지 않을까.
난 내가 홍성을 상대로, 아니 홍성의 부장 타이틀을 가지고 이 세 사람에게 아쉬울 게 뭐가 있을까를 따져봤다.
없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내가 아쉬울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그 정도 아쉬움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란 사람의 이미지?
우직하고 성실하며 홍성이 필요할 때마다 한 방씩을 꼭 터뜨려 주는 홍성의 참일꾼이라는 이미지?
그 이미지가 뭐?
그 이미지는 내가 억지로 연출해낸 이미지가 아니다.
내가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서 따낸 결과가 만들어 준 이미지이지.
그리고 그 이미지를 변질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나의 욕심이나 야망과 같은 불순물질이 아니라, 바로 상무님이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상무님이 있건 없건 이 자리에서 내가 돌아이가 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은 계속 벌어질 거라는 생각.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 갑갑한 상황에 함몰되어 허우적거리기보단 이쯤에서 똥이 한번 되어 주고 박차고 나오는 게 맞는 거 같았다.
나라고 왜 젠틀하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나 혼자 젠틀해서 뭐 할까 싶은 거지.
나 혼자 성인군자인 척 굴어서는 절대 이 피로도 가득한 관계를 끝낼 수가 없을 거 같았다.
“인사부에서 지원자 모집 공문을 내렸음에도 지원자가 한 명도 안 나온 마당에서 제가 몇 명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인원을 맞춰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냥 차출 가능한 인원수….”
“컨셉입니까?”
장 부장은 이미 강 대표가 이죽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고개를 돌려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상무님 역시 강 대표가 그만하길 바라는 눈치였고.
“아니, 아니… 그 많고 많은 좋은 컨셉들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이런 컨셉을 잡으셨습니까?”
“콘셉트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바보 컨셉?”
“공 부장님!”
“허, 허허허… 하하하….”
난 크게 웃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이이….”
난 잠시 말을 끊어놓고 상무님을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난 강 대표가 아닌 상무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최소한 이전 회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일을 안 했을 거 아닙니까.”
“….”
“앞뒤 맥락도 모르고 일을 하는 사람한테 오퍼레이션 디렉터 타이틀을 맞기기엔…. 강 대표님이 근무하셨던 이전 회사는 대형 브랜드로 분류되는 꽤 탄탄한 회사 아니었습니까? 원래 이런 식으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 브랜드 본사 오퍼레이션 디렉터까지 역임했다는 것보다는 지금 하고 계신 행동이 콘셉트라고 이해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는 거 같아서 물어보는 겁니다.”
난 다시 시선을 강 대표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소파 아래로 손을 흔들며 제발 살살 하라는 사인을 보내는 장 본부장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살살 해선 안 된다 싶었다.
“나 지금 돈이 좀 필요한데 빌려줄 수 있어? 도와줘… 하는 사람한테 얼마나 필요한지 물어보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아니면 빌려주는 사람이 그것까지 미리 다 알아놓고 빌려줘야 하는 건가요?”
“…!”
“그 질문으로 제가 이런 비아냥거림이나 받아야 하는 거냐고요. 요즘은 일곱 살짜리 꼬맹이들도 이런 유치한 기 싸움은 안 합니다. 아닌 말로 제가 우리 영업부 직원들 다 불러놓고 지원하지 말라고 했다고 칩시다. 그럼 안 되는 겁니까? 왜 안 되는 건데요? 본부장님.”
난 목소리를 몇 톤 정도 높게 올렸다.
“…말해, 듣고 있어.”
“영업부장 역할이 영업부 매출 신장, 조직 유지 및 관리입니까, 아니면 타 부서 지원입니까.”
“그만, 알았어. 그만해.”
결국 장 본부장이 날 멈춰 세웠다.
“아니요, 본부장님. 갑자기 헷갈려서 여쭤보고 있는 겁니다. 그동안 제가 뭘 잘못 알고 영업부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나 싶어서요. 상무님이 생각하시는 영업부장의 역할은 뭡니까?”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공 부장?”
“그러니까요. 저도 지금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
“왜 각 부서장들을 통하지 않고 인사부를 통해서 다이렉트로 내리신 공문에 대한 결과를 저에게 물어보시는 건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피드백이 필요할 거 같으면 인사부장도 불러서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함께 알아봐야 하는데, 왜 이 자리에 인사부장은 없는 건지…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난 다시 강 대표 쪽으로 고개를 돌려 흔들리기 시작한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강 대표님. 그… 콘셉트 바꾸세요. 오래 못 갑니다, 홍성에서 그런 콘셉트 가지고는. 그동안의 터전이었던 파리 생활 정리하시고 좀 더 좋은 기회를 제안받고 한국으로 넘어오신 강 대표님의 도전, 그리고 입장…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홍성에 그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이런 결정 내리기까지 분명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더 잘 해내고 싶고 또 인정을 받고 싶으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고요. 이해 안 해줘도 되는 거까지 다 이해해 주고 있잖아요. 어차피 계속 얼굴 보고 지내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이러려고 오신 건지.”
“…!”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그 자세는 높게 보겠지만, 그동안 쌓아놓으셨던 알렌 강이라는 스마트한 이미지를 의미 없는 곳에 소모시키지는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도대체 뭘 위해서요? 이런 대립 관계라면 강 대표님은 계속 그 명분을 잃어가고, 저는 그 덕에 계속 퍼부어도 되는 명분을 쌓게 되는 건데… 진짜 모르시겠습니까? 그 어떤 작전을 쓰셔도 저 안 말립니다. 말려드리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된다고요. 문 팀장이랑 접촉하셨다고요?”
“그, 그걸 어떻게….”
“영업부에 홍길동 같은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저한테는 안테나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아무튼 뭐 저한테 팽 당해서 트랜스퍼된 전 해외 영업부 팀장한테 폴앤크루 영업부 차장 자리를 제안하셨다고요. 쓰세요. 누가 뭐랍니까? 저하고는 안 맞았지만, 강 대표님이랑은 잘 맞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때 저한테 궁금했다고 말씀하셨죠? 영업 기획부 사무실에서… CGM을 밀어내고 모리엘츠를 잡은 홍성 인터내셔널 영업부는 과연 어떤 스페셜한 곳일지. 지난 2, 3주간 지켜보셨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어떤 스페셜한 곳인 거 같습니까?”
상대는 이미 모든 전의를 상실해 있는 상황이었다.
“홍성 인터내셔널… 지금의 폴앤크루 입장에선 반드시 잡아야 하는 거래처 아닙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2, 3주라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아직 반드시 잡아야 하는 거래처에 대한 분석조차 제대로 못 끝내신 겁니까?”
“…”
“좋습니다. 어차피 같이 가야 하는 상대라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집중을 하지 않았다고 칩시다. 그럼 그 2, 3주간 맨파워 모집에라도 집중을 하셨어야 맞는 거 아닙니까? 제일 중요한 이 두 가지는 손도 안 대고 그동안 뭐 하셨습니까? 오케이, 오케이… 어차피 맨파워 어레인지도 홍성 본사가 알아서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고 치자고요.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폴앤크루 해외 영업은 어떤 방법으로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그걸 공 부장님한테 보고해야 하는 겁니까?”
“하셔야죠. 당연히 하셔야죠. 돈 빌려달라는 사람한테, 그 돈으로 뭐 할 건지 물어보는 게 잘못된 겁니까? 제 사람들입니다, 영업부 맨파워. 제 사람들 빌려주면서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진 리더 밑에서 또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건지 물어보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
“그리고 그런 거 다 떠나서라도 전 폴앤크루의 미래 방향을 알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여기까지 제가 끌고 왔습니다.”
“…!”
그 말에 상무님과 장 본부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이 이렇게 날 마주 보고 앉아서 날 상대로 그렇게까지 거만해선 안 되는 거라고.”
장 부장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고, 난 다시 상무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홍성 영업부… 대안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홍성 영업부가 왜 스페셜할 수밖에 없는지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 잘 들으세요, 강 대표님. 최소한 국내 패션 컨트롤 업계에서만큼은 홍성 영업부가 최고입니다. 그만큼 홍성 영업부의 맨파워는 검증된 고급 인력이란 뜻이고 탐을 내는 업계 기업 또한 많습니다. 우린 우리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좋은 조건을 약속받고 이직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우리끼리 지지고 볶습니다. 왜? 재밌으니까. 돈의 원리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애매한 그런 분위기가 깔려 있단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린 어쩔 수 없이 자신감이 넘칩니다. 상대가 누구든, 그 어떤 대형 브랜드든 들이받을 준비가 되어 있단 뜻이기도 하고요. 그 상대가 비록 CGM이더라도, 아니 그보다 더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하더라도 우리만의 대안이 있기 때문에 딱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날 장 본부장은 조용히 날 따로 불러서 내게 너무 멀리 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 장 본부장에게 그냥 피식하고 웃으며 ‘그런가요?’라고 되묻는 거로 나의 입장을 정확하게 밝혔다.
“내가 내일쯤 자리 한번 마련할 테니까 다 같이 술 한잔 하면서 오해 풀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오해한 건 없는 거 같고, 자리가 마련되면 그 자리는 분명 변명과 자기 입장 정리가 전부일 거 같습니다. 절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넣은 상대들에게 그것까지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지는 않네요.”
“공 부장.”
“절 오해한 사람으로 만들지 마시고요.”
“….”
“절 위해 정 뭐라도 하셔야 할 거 같으시면 차라리 모르는 척을 해주세요. 그게 더 지금의 저에겐 힘이 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