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그게 어렵습니까?
나도 모르게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힘든 직장 생활 참 뭐 같이 어렵게 하네….
김 차장을 향한 욕이 아니었다.
오히려 김 차장이 내놓은 분석에 신빙성이 충분했기에… 그래서 욕이 튀어나왔던 거 같다.
“그런데 아까 그건 무슨 말씀이셨습니까?”
“뭐가?”
“강 대표.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고, 알아서 무너질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지금은 자기 몸값 정도는 충분히 증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그 이상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하시고….”
“대항마니까. 결승마가 아니잖아.”
난 미간을 좁히며 김 차장을 빤히 쳐다봤다.
“대항마들의 특징이 있어. 초반 스타트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 왜? 오로지 그걸 잘하기 위해 길들여진 존재들이니까.”
“그것만 잘하는 존재를 영입하기 위해서 2억 2천이나 썼다는 건 제 상식에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네요.”
“가지고 있는 소스의 가치를 따져봤겠지. 파리에서 대형 브랜드 본사 임원 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채널을 확보해놨겠어? 폴앤크루를 국내용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거였음 사실 필요한 존재가 절대 아니지. 하지만 이걸 해외로,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풀기 위해선 2억 2천이 아니라 3억, 4억 2천을 주더라도 잡아야지. 그리고 그런 전 세계 다양한 채널을 확보하고 있는 대항마라면 한 번 쓰고 버릴 순 없지, 회사 입장에서. 꼭 대항마로서만 쓸 것이냐. 그건 좀 더 지켜본 다음 천천히 결정해도 되는 문제일 거고.”
“흐음….”
“처음엔 앞서 나가는 거처럼 보일 거야. 하지만 내가 말한 것처럼 거기에 초조함을 느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 대항마들의 초반 스피드는 반드시 떨어진다. 그러니까 공 부장.”
“…?”
“만약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내가 내린 분석이 틀릴지라도… 공 부장은 그냥 딱 지금 텐션만 유지해 줘.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 영업부가 이렇게 하나가 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장 본부장도 못 했던 거야, 이건. 비록 장 본부장이 영업부장 일을 오래 한 게 아니라 그것까지 해놓고 떠나기엔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공 부장은 어디 오래 했어? 강 대표가 공 부장 찾겠다고 영업 마케팅 사무실에 왔을 때 나도 솔직히 조금 놀랐다.”
“왜요?”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우리 영업 마케팅부 직원들한테. 그런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강 대표가 등장하자마자 하나로 똘똘 뭉치더라. 적으로 간주를 하더라고. 예전 같았음? 그런 거 없어. 다들 팀장들 중심으로 움직이는 개인 사업자들이나 마찬가지인 애들 아냐. 그런 애들이 하나로 뭉치더라니까? 그게 뭘 의미하겠어?”
“뭘… 의미하는데요?”
“지기 싫다는 거야, 더 이상.”
“…!”
“리더 한 번 잘못 만나서 계속 영업 기획부에 밀리고 해외 영업부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던 애들이야.”
“뭘 또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십니까. 컨트롤 브랜드는 죄다 영업 마케팅부에서 케어를 하고 있으면서.”
“지고 밀리는데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애들이지만, 영업부 안에서만 하겠다는 뜻 아니겠어? 우리 홍성 영업부 안에서만. 기저에 깔려있는 애들의 그런 마인드가 그 순간 내 눈에 보이더라고. 영업 기획부, 해외 영업부만 끼고 도는 공 부장에 대한 감정이 아직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공 부장을 미워해도, 공 부장을 미워할 수 있는 자격은 자기들한테만 있다는… 자기들은 미워해도 되지만 공 부장을 다른 사람이 미워하는 건 보기 싫다는 모습들이더군.”
“제가 왜 영업 기획부, 해외 영업부만 끼고 돌겠습니까.”
“내가 말했잖아. 리더 잘못 만난 애들의 유일한 자기 합리화. 그것까지 못 하게 하지는 마라. 그런 분출구라도 있어야 공 부장 씹는 맛에 힘든 직장 생활 버틸 수 있는 거 아니겠냐고.”
“푸훕….”
“아무튼 지금 영업부 안에서 공 부장의 입지가 그래. 장 본부장 때보다 더 단단한 결속력을 만들어냈어. 그런 리더가 됐다고. 그런데 여기서 별것도 아닌 일에 공 부장이 흔들리면… 다 흔들린다.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게 되는 거야. 쌓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공 부장은 결승마야. 그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팩트. 홍성 인터내셔널 입장에선 계속 출전을 시켜야 하는 결승마인 거고, 우리 영업부 입장에선 타부서를 상대로 영업부에 계속 홍성의 트로피를 가져다주는 우승마인 셈이지. 하는 짓이 얄미워도 어쩔 수 없이 믿어야 하는 우승마. 영업 마케팅부 애들을 달달한 설탕으로 꿰어낸 게 아니라 오로지 실력만 가지고 따라올 놈만 따라와! 하는 식으로 길들였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해주길 바라. 공 부장 스타일상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울게.”
그게 언제였는지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난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도 살짝 헷갈리고.
아무튼 예전에 상무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와 오래 가고 싶다면서, 나와 장 본부장이 자신의 옆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그 말을 내게 하기 위해 옛날이야기를 하나 꺼냈었다.
아직은 홍성이 스타트업 기업을 벗어나지 못했을 당시, 상무님은 아주 어렸었다고.
이제 막 홍성의 자리가 잡히기 시작하고, 사람을 좋아했던 사장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회사 직원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술을 마시며 밤새 일 이야기를 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집을 가장 많이 찾아왔던 삼촌(당시 상무님은 회사 직원들을 삼촌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사장님과 가장 가까웠던 삼촌들순으로 홍성을 떠났다고.
그때 난 그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었던 거 같다.
흘려들었는데, 이제 와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며 상무님이 아이러니라고 표현했던 상황의 진실을 알 거 같았다.
회사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걸 인적 관리, 더 나아가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직원들을 이렇게 쥐어짜면 과연 누가 회사를 믿고 붙어있을 수 있겠나.
상무님의 수가 경영인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둬야 했던 수라고 하더라도, 강 대표의 급한 영입이 만약 김 차장의 분석대로 정치용이라고 하면 내 입장에선 회사에 대한 없던 불신까지 생겨날 수밖에.
처음 상무님의 의도를 몰랐을 땐 도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그 이유라도 알면 속이라도 좀 시원할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의도를 알고 나니까, 더 정확하게는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이 가능해지니까 이젠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
고작 이런 이유였나.
고작 이런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자신의 사람이 되어달라고 그렇게 약을 쳐놓고 기껏 열심히 일해주니까 이제 와 이런 상황을 내게 던져주나 싶었다.
17층.
난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즐기며 잠시 머리를 식혔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도 머리는 계속 그 생각에 함몰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이해를 해보려고 했다.
회사는 분명 개인보다는 더 복잡한 계산이라는 걸 해야 하니까…그렇게 상무님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되돌아봤다.
과연 난 떳떳한가.
과연 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어느 누군가를 궁지로 몰고 또 궁지로 몰아넣었으면서도 날 계속 따라와 주길 바랐던 적은 없었을까.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냥 가만히 놔뒀으면, 만약 그냥 날 가만히 놔뒀으면 분명 난 상무님의 기대처럼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거 같다.
더 많은 일을 상무님과 함께하며, 그렇게 자연스럽게 상무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거 같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었다.
상무님은 내게 누가 뭐래도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였으니까.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 속에서 내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상무님에 대한 반발심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반발심의 주위엔 내가 그 반발심을 시원하게 표출할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만큼 빽빽하게….
이젠 70명 이상으로 그 덩치를 키워버린 영업부.
그 영업부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이 먼저 날 진정시켰다.
그리고 새로 이사한 집 근처에 편의점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인 누나와 매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홍성이 내게 준 여러 트로피들을 지금 당장 던져버릴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이 트로피는 눈에 보이는 트로피가 아니라 지금 던져버리면 남는 게 없는 트로피다.
국내 패션 컨트롤 업계 최연소 부장.
거기에 업계 최고 대우를 받는 부장이라는 트로피는 앞으로 최소 1, 2년 정도는 더 가지고 있어야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금의 생활 컨디션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함이 상무님에 대한 반발심을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돈이라는 게 자산에 여유가 있다고 생활에까지 여유가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안 되면 들고 있는 아파트 하나 팔면 되지! 하는 생각?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힘들다.
한 번 가져보니 그게 얼마나 하기 힘든 일인지 알겠다.
분명 과감한 투자와 결혼 후 강혜선의 현명한 관리로 충분히 여유 있는 자산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자산은 어디까지나 자산인 것이고, 현재 나와 강혜선이 함께 누리고 있는 삶의 퀄리티는 가지고 있는 자산이 아닌 매달 일어나는 수입으로 유지하고 있는 거였다.
물론 홍성이 아니라도 된다.
하지만 지금의 안정된 패턴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이젠 숨 쉬는 것만큼 편해져 버린 직장 생활.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이만한 일로 흔들려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 흔들리는 이유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외부 환경이 다가와서도 아니고, 이런 내부적인 변화 때문이라는 게 싫었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가 어쩌다 이직까지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스스로 의아할 정도로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데리고 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 그 정도는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 이직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날 궁지로 몰고 있는 건 아니다.
해보자.
그냥 한번 해보자.
내가 꼭 지키고 싶은 것들.
그것들은… 지금의 나라면 꼭 홍성이 아니라도 지킬 수 있다.
다만 난 그냥 한번 해보고 싶은 거뿐이다.
당당하게, 예의는 지켜가면서… 하지만 내 할 말은 해가면서 한번 부딪쳐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2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장 본부장을 통한 상무님의 호출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각자가 가진 패를 한 장씩 까며 강 대표와 제대로 맞붙게 됐다.
각자가 가진 패….
상대가 그 어떤 패를 꺼내더라도 난 그 패를 찍어누를 수 있는 다양한 패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서 와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이상한 자리배치였다.
분명 내가 오기 전까지 상무님과 장 본부장, 그리고 강 대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장 본부장과 강 대표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마치 강 대표의 맞은편 자리를 일부러 비워놓은 것처럼 말이다.
난 장 본부장과 강 대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아니 뭐 다른 건 아니고… 영업부에선 한 명도 안 나왔네요?”
상무님이 말했다.
“가장 많은 맨파워가 있는 곳이 바로 영업부인데, 그런 영업부에서 폴앤크루 셋업 멤버에 한 명도 지원을 안 했어요.”
지난주 인사부에서 전 부서를 상대로 공문이 하나 내려왔다.
폴앤크루 분리 작업이 곧 진행될 예정이며, 그에 따른 셋업 멤버 모집을 한다는 공문이었다.
셋업 멤버라는 타이틀이 가진 힘은 분명 작지가 않다.
맨파워 보강이야 따로 공채를 통해 모집을 하면 되는 부분이지만 셋업 멤버는 말 그대로 회사의 스탠다드를 잡는 업무에 투입될 인원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니, 나중에 자기 개인 사업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현재 업무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을 지원할 법한 조건이었다.
거기다 언제든 본사 복귀가 가능하단 조건이 붙었으니 꽤 괜찮은 기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상무님의 말을 들어보면 영업부에선 단 한 명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
그런데 난 정말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다.
상무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 대표가 씨익 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는데, 그 미소 속에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거 같아서 살짝 거슬렸다.
“그런데 인사부장님은 안 부르신 겁니까?”
내가 물었다.
“인사부장님은 왜요?”
“인사부에서 진행했던 내용 아니었습니까?”
난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상무님을 한 번 쳐다봤고, 다시 고개를 돌려 강 대표를 쳐다봤다.
“전 전혀 몰랐습니다, 한 명도 지원을 안 했을 거라고는… 몇 명이나 필요하십니까?”
“좀 도와주세요, 부장님.”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꼭 제가 일부러 영업부 직원들이 지원 못 하게 만든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리는 강 대표의 한숨이 날 더 자극하고 있었다.
“중국 법인의 손 차장님. 제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잘됐네요. 그만한 적임자도 없을 겁니다.”
“같이 가자고 하셨던 말… 부장님께서 하셨던 말인데, 기억하시죠?”
“무슨 뜻입니까? 저는 앞으로 직진만 할 생각입니다. 돌아서 오는 공격은 그냥 무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일 외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지 마세요.”
“….”
“제가 강 대표님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해버리면 그건 반칙이 되는 거고 또 텃새라는 게 되는 겁니다. 그거 제 스타일 아닙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냥 쉽게 말씀을 하세요, 몇 명이나 필요한지… 뭘 그렇게 의미 없이 돌아가는 걸 좋아하십니까? 그냥 몇 명만 붙여달라고 말하면 되는 거지. 부탁을 하란 말이 아니잖아요. 그냥 말만 하면 됩니다. 그게… 어렵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