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대항마
“이제쯤 누군가의 대항마를 붙여 줘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판단을 내렸을 겁니다.”
“대항마요?”
김 차장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목적 없는 인사는 이해를 하더라도 명분 없는 인사는 인정을 하려 하지 않죠.”
“이번 인사가 명분이 없는 인사다…”
“타이밍상 그렇다는 겁니다. 폴앤크루가 분리경영을 한 이후에 총괄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 왔더라면 그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을 겁니다. 없는 명분을 만들 수도 있었을 거고. 여기서 말하는 명분은 알렌 강의 연봉을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타이밍도 아닐뿐더러 명분은 너무나 약합니다. 임원진들의 동요가 일어날 만큼 말이죠. 부장님께서 폴앤크루 총괄 대행을 하면서 나무랄 데 없이 브랜드를 띄우고 있었고, 또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폴앤크루 정도 규모의 브랜드를 차고 나갈 인사가 널리고 널린 상황이었죠. 그런데 상무님께서 알렌 강을 영입을 하신 겁니다. 그것도 아무도 납득할 수 없는 연봉에 말이죠.”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의심해 봐야 하는 부분은 상무님께서 그런 무리수를 두고 있는데, 그걸 아무도 저지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만약 진짜 상무님의 무리수였다면 알렌 강의 영입에 전무님이나 사장님이 컨펌을 주실 리가 없죠. 컨펌 없이 진행이 됐던 거라도 지금쯤 전무님 성격상 가만히 계실리가 없습니다. 뒤집어져도 진작에 회사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을 겁니다.”
“….”
“전무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끼리 하는 말로 사장님 결정도 뒤집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전무님이십니다. 그런 전무님이 저렇게 가만히 뒷짐 지고 지켜만 보고 있다는 건 그만의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살짝 적셔놓고 종이컵은 그대로 입술에 붙인 채 김 차장을 쳐다봤다.
“알렌 강이 이렇게 급하게 영입이 된 이유에 대해선 며칠 전에 양 차장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짐작이지 그게 팩트는 아닙니다.”
“보통 이럴 땐 가장 먼저 드는 의심이 곧 팩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팩트는 단순하지만 그 팩트가 형성되는 과정은 절대 단순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왜 지금과 같은 타이밍에서 상무님이 이런 실수를 하셨을까… 그리고 이게 과연 실수인 걸까….”
김 차장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머릿속엔 그가 먼저 언급했던 대항마라는 단어가 계속 떠다녔다.
“그냥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평소 부장님만의 업무 텐션을 유지하면서 버티시라고. 그러면 상대는 알아서 무너집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죠.”
“다른 방법이 있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 차장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뺀 다음 커피로 입안을 적셨다.
“어쩜 이렇게 똑같습니까?”
“뭐가요?”
“장 본부장이랑요. 아, 이쯤 이야기를 하면 대충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뭘…”
“상무님의 원래 생각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회사는 알렌 강을 부장님의 대항마로 앉힌 거라고요.”
“왜요?”
“하아… 야, 공 부장.”
“…!”
김 차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아무도 없는 탕비실 안을 스윽 훑어본 뒤 내게 말했다.
“아놔, 더는 못 하겠다. 우리끼리니까.”
“네, 뭐…”
“왜 이렇게 답답해? 일머리는 그렇게 휙휙 돌아가는 사람이 이럴 땐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느냐고.”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는데, 회사가 왜 저에게 대항마를 붙여줍니까?”
“회사도 불안하거든.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선 상대를 더 불안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거야. 회사 내에서 공 부장의 역할이 이 정도로 커졌음 회사는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도박이라는 걸 해야 돼. 이건 우리 홍성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회사도 다 똑같을 거다. 내가 지금까지 영업맨 짬밥 먹으면서 우리 회사뿐 아니라 업계 다른 회사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래.
“…!”
“만토바부터 시작해서 CGM 건, 모리엘츠, 거기다 링겐을 잡아온 것까지…. 지난 몇 년간 홍성이 만들어낸 굵직한 실적 중에 공 부장 이름이 빠진 실적이 하나라도 있어? H.I 편집샵, Kidshub… 뭐 그런 매출 디테일들 다 제외시키고라도 말이야. 회사는 이미 공 부장을 붙잡아둘 수 있는 어지간한 카드는 다 꺼내서 썼어. 업계 최고 연봉에 임원 차량까지 제공을 하고 있고. 지금부터 회사는 공 부장을 어떻게든 정신없게 만들 거다. 뜬금포로 채찍도 날리고 또 예상도 못 한 상황에서 당근도 줘 가면서….”
난 종이컵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정신없게 만들어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해야 하거든. 내년 연봉… 틀림없이 10퍼센트 이상 오를 거야. 회사에 서운해질 만하면 생각도 못 했던 당근 하나 던져주면서 그 서운함이 눈 녹듯 녹게 만들 거고, 또 그렇게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올라갈 만하면 또 일부러 쿡쿡 찌를 거야. 그 조절이 상당히 교묘하게 이뤄질 거야.”
“도대체 왜요?”
“그게 회사라는 집단이니까. 그리고 회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거든. 공 부장의 우직한 스타일을. 연봉 몇 퍼센트 더 올려주는 거보다는 적당한 타이밍에 자존심 좀 긁어주고, 그 자존심을 몇 배 더 크게 회복할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걸 아는 거지.”
“…!”
“회사 입장에서 진짜 컨트롤하기 힘든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 줄 알아? 바로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이야. 뭘 원하는지 모르니 어떤 사탕을 줘야 말을 잘 들을지, 계속 졸졸 따라올지 연구를 해야 되거든. 이런 사람이 실세가 되어 버리면 위에선 골치가 아파지는 거야. 내 말이 맞을 거다. 상무님이 알렌 강을 그 말도 안 되는 연봉에 영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왜 전무님이나 사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오케이 사인을 줬을까? 분명 임원진에서 동요가 날 걸 뻔히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그 정도 동요쯤은 충분히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리셨던 거겠죠.”
“그렇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임원들의 동요야 얼마든지 잠재울 수 있는 거고, 그렇게 임원들의 동요가 잠잠해지면?”
“잠잠해지면?”
“공 부장은 열이 받는 거지.”
“제가요? 제가 왜요?”
“솔직해져. 내 앞에선 그렇게 해도 돼. 그때 공 부장이 나한테 그랬잖아. 공 부장을 상대로는 정치질하지 말아 줬음 좋겠다고. 공 부장을 위한 정치를 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
“나 지금 그거 하고 있는 중이잖아. 모르겠어?”
“흐음….”
“내가 그걸 잘해볼 수 있도록 만드려면 최소한 나한테는 솔직해져야지. 솔직하게 말해 봐. 임원진들이 알렌 강의 영업에 반발을 해 주길 바라고 있잖아. 아니야? 그리고 알렌 강의 영입은 누가 뭐래도 상무님의 실수였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주길 바라고 있지 않아? 내가 공 부장이라면 그럴 거 같은데?”
“…!”
“그런데 의외로 임원들의 불만이 빨리 사라지고 알렌 강이 자신의 몸값을 스스로 증명해버리면? 그때부턴 배가 아파지는 거야. 어쩔 수 없어, 사람이라면 그래. 내 말이 틀렸어?”
“푸흡…”
“그런데 참 재밌다? 처음엔 배가 아파. 불만도 생기고… 그러다 알렌 강이 사람들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그 몸값이 합당하다는 걸 증명해 버리면 그때부턴 공 부장은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돼. 나도 저 정도 몸값은 되지 않을까?”
“…!”
“그때 맞춰서 회사는 공 부장에게 연봉 인상이라는 당근을 하나 던져주겠지. 그 당근은 어떻게 보면 공 부장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당근인데,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야. 좀 더 열심히 하면 나도 저만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회사는 공 부장처럼 우직한 인재들에게 계속 욕심이라는 감정을 심어주는 거야. 그게… 공 부장 입장에선 정말 하기 싫은 사내 정치라는 거고, 내 입장에선 항상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살아남는 법인 거고.”
뭔가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다 하실 수 있는 겁니까?”
“간단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
“양 차장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 공 부장이 폴앤크루 프로젝트를 원래 회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크게 띄워 버리니까, 그 부분에서 상무님이 자신이 메인이어야 하는데 그 모든 공이 공 부장한테 쏠려서 시기를 하는 거 같다고.”
“사실 어제 장 본부장님이랑 술을 한잔 같이 했는데, 본부장님도 그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뭐라고?”
“상무님 입장에선 한 번쯤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푸흡…”
“왜… 웃으십니까?”
“장 본부장이 다 뛰어난데, 딱 하나 부족한 부분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처럼 감정에 솔직할 거라 믿는… 그러니 뭐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김 차장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지금 상무님은 상당한 용기를 내고 계실 거야. 매일매일 자기가 공 부장을 상대로 너무 강수를 둔 건 아닐까 불안해하시면서…”
“그게 무슨…”
“P3 창고에 무브 크랙을 설치하겠다고 폴앤크루 분리경영을 뒤로 미루신 분이야.”
“…!”
“직원들 안전사고 줄이겠다고 말이지. 회사를 상대로, 사장님, 전무님을 상대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게 중요한 분이셨음 폴앤크루 예산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고 무브 크랙 쪽으로 쓰자고 주장을 하셨겠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몰라도 회사 입장에선 보이지 않는 곳에 돈을 쓰는 건데… 그리고 공 부장. 공 부장이 봤을 땐 상무님이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분인가? 난 아닌 거 같은데… 사람이라는 동물 자체가 워낙에 복잡미묘한 존재가 되다 보니 내 생각이 다 맞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지금까지 회사에서 상무님이 보여주신 행동들을 다 종합해 보면… 글쎄, 양 차장 말처럼 과연 상무님이 공 부장을 상대로 그 능력을 시기하고 고깝게 봐서 이런 인사를 강행했을까? 난 아니라고 봐.”
“그럼요?”
“앞으로는 자기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걸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신 거지.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든든하고 두 명보다는 당연히 세 명, 네 명이 더 든든한 거 아니겠어? 어차피 상무님 입장에선 장 본부장과 공 부장은 하나로 볼 수밖에. 두 사람이 서로 경쟁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
“대항마. 장 본부장과 공 부장의 강력한 라인에만 모든 걸 의존하지는 않겠다는 뜻 아닐까? 그와 동시에 자기 사람일 수밖에 없는… 한마디로 경쟁자를 데리고 오겠다는 거지. 내가 봤을 때 상무님… 무서운 사람이다. 그리고 알렌 강… 분명 허접은 아닐 거야. 내가 봤을 때 자기 몸값 정도는 충분히 증명을 해낼 거야. 어쩌면 그 이상을 해낼지도 모르고. 그래서 찾아온 거야. 내가 아무리 영업부 안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신세라고 해도… 우리 영업부가 아직 국내에선 이렇다 할 족보도 없는 인사한테 밀리는 건 또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