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19화 (219/325)

#219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해외 컨트롤 기업 리스트입니다.”

“폴앤크루는 아직 해외 진출을 시도해 볼 만큼 국내에서도 그렇다 할 반응이 안 올라왔는데, 이건 너무 성급한 거 아닐까요?”

상무님으로부터 해외 컨트롤 기업 리스트를 건네받은 장 본부장이 그 리스트에 적힌 업체들을 체크해 나가며 말했다.

“폴앤크루는 해외 지사 운영이 아닌, 컨트롤 기업들을 통해 해외 유통을 시켜야 한다는 내용 같은데…. 해외 진출 관련해서는 전사 운영본부 쪽으로 미리 다 넘겨놓고 관여를 안 하겠다는 뜻이야?”

“그럴 리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장 본부장은 전날 있었던 회의 때문인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양 차장은 전사 운영본부로부터 받은 양보만큼 전사 운영본부에게 양보를 해주기 위해 함께 고민을 했었다.

그래도 명색이 나의 오랜 사수이고, 또 영업부장 출신 아닌가.

전날 회의에서 장 본부장을 한 번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이번엔 장 본부장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 줘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나와 양 차장 모두 동의를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회사 일에 대한 마인드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 홍성에 입사를 해서 일을 배워 나갈 때엔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내게 주어지는 대로 물불 가리지 않고 다 했었다.

그러다 회사 일에 요령이라는 게 붙기 시작한 뒤부터는 내 일과 내 일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눈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내 일과 내 일이 아닌 걸 구별 정도만 할 수 있었지 상급자가 시키는 일이라면 그게 비록 내 일이 아니더라도 웃는 얼굴로 군말 없이 다 받아서 쳐냈었다.

그런데 팀장을 달고 비록 막내 팀장이었지만, 막내 팀장으로서 지켜야 할 팀원이 생긴 뒤부터는 나 혼자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보니 눈치가 보이더라도 업무의 영역을 정확하게 구별해야만 했다.

그걸 팀장인 내가 하지 못하면 막내 팀장의 팀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팀원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거기다 로또 당첨금이 내게 준 자신감과 용기는 다른 사람들 눈치 살피지 않고 딱 내가 해야 할 일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팀장을 거쳐 차장을 지내고, 부장을 달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선을 긋기보다 공동의 목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공동의 목표.

그 공동의 목표라는 건 회사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봤을 때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싶은 게 곧 내 일이었고, 부장인 내가 그걸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함께 나누면 그것들이 곧 공동의 목표가 되는 거였다.

회사로부터 받는 만큼만 일해 주면 된다… 하는 생각은 딱 팀장 때까지였던 거 같다.

팀장 때까지는 그렇게 일을 해도 되고, 또 그렇게 일을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하지만 차장부터는 하는 만큼 받아간다… 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받는 만큼만 일해 주면 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는 어떻게든 차장까지는 승진이 가능할지 몰라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부장 승진이 불가능하다는 걸 딱 차장에서 승진이 막혀버린 많은 선배 상사맨들을 통해 알아버렸다.

꼭 승진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차장을 달고 또 부장까지 승진을 하고 보니까 내 일 네 일 구분을 짓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은 거지.

부장이라는 타이틀은 주어진 일을 하는 타이틀이 아니니까.

주어진 일을 깔끔하게 쳐내는 건 팀장들의 역할이지, 차장, 부장의 역할은 결코 아니었다.

차장, 부장은 끊임없이 공동의 목표를 만들어 내고, 그걸 시도하고 수정해 나가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양 차장이 사전에 해외 쪽 컨트롤 기업들과 접촉을 좀 해보고 싶다고 합니다. 실은 어제 회의에서 왜 양 차장이 폴앤크루 모델로 배우나 전문 모델이 아닌 유명 K-POP 스타를 써야 하고, 또 왜 모델 홍보가 최대한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설명드리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갑자기 회의 주제가 삼천포로 빠지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뜨린 게 누군데 그래?”

장 본부장이 괘씸하단 표정을 지으며 눈을 흘겼다.

“한번 들어봅시다.”

상무님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본부장님 말씀처럼 폴앤크루는 절대 지사 운영으로 해외 진출을 해선 안 됩니다.”

“그야 당연한 거죠. 대형 브랜드들도 리스크가 있어서 가급적 피하려고 하는 지사 운영을 역사도 없는 폴앤크루가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현지 영업 유통 채널이 갖춰진 컨트롤 기업들을 끼고 진출을 하기 위해선 해당 컨트롤 기업에게 브랜드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우리 홍성만 해도 검증되지 않은 브랜드는 재무 리스크팀으로부터 일단 무조건 사업 보류 판정이 떨어집니다. 그걸 푸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죠.”

상무님과 장 본부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이야기를 해보라는 신호를 내게 줬다.

“보통 보류 판정이 떨어졌을 때 브랜드 본사 측에서 꺼내놓을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컨트롤 기업 입장에서 투자 비용이 필요 없는 컨사인먼트 계약 조건이나 높은 크레딧 노트 보장, 혹은 낮은 마진율 등인데, 사전에 작업을 잘해서 보류 판정만 피할 수 있음 굳이 그런 무기들까지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이유가 없죠.”

“사전 작업?”

“제가 맡았던 첫 단독 브랜드가 나크리스였습니다. 그들과의 첫 만남이 바로 마진 협상 테이블이었죠. 제 입장에서는 처음 해보는 브랜드 본사와의 단독 마진 협상이었지만, 이상하게 시작부터 여유가 있었습니다. 무조건 계약을 성사시켜야 하는 쪽은 홍성이 아니라 나크리스 쪽이라는 걸 시작부터 알고 들어갔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첫 만남이 마진 협상 테이블이 아니었다면 전 상대가 그렇게 급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나크리스가 한국에서 꽤 인지도 있는 모델을 쓰고 있었다면 브랜드 자체 인지도를 떠나 한번 해볼 만한 브랜드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절대 나크리스의 마진을 그렇게 기록적으로 낮추지 못했을 겁니다.”

“흐음….”

“그런데 지금은 반대 입장이 됐습니다. 이제는 홍성이 브랜드 본사의 입장으로 다른 나라 컨트롤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영업을 해야 합니다. 이제 막 론칭을 한 브랜드를 어느 컨트롤 기업이 먼저 찾아와서 브랜드를 달라고 하겠습니까. 거기다 한국 브랜드입니다. 객관적으로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그 어려운 걸 아직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접촉을 해본다는 게 제 느낌에는 더 어려운 일일 거 같은데요?”

“그렇다고 국내용 브랜드로만 만족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본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장 본부장이 잠시 망설이는 상무님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 부분은 단순하게 생각하시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브랜드 인지도가 없다, 아직 제대로 갖춰진 컬렉션이 없다… 지금 당장 개선하지 못하는 그런 약점들에만 함몰되어 버리면 영업 못 합니다. 영업의 출발은 찔러 보는 거죠. 그냥 한번 찔러 보는 건데, 거기에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한 번 찔렀는데, 안 들어가면 두 번 찔러 보고, 세 번 찔러 보고… 그러다 상대가 지쳐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주면 그때부턴 들어갈 때까지 계속 찌르는… 그게 영업 아니겠습니까. 지금 공 부장은 해외 영업을 통해 회사에 돈을 가져오자고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해보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있으니까 해보겠다는 거겠지요. 말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필요한 건요?”

“제대로 된 영업을 하기 위해선 제대로 된 투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상무님.”

“가성비는 이제 그만 따지고 싶다… 뭐 그런 뜻입니까?”

“자기네 브랜드를 한 번만 받아서 유통을 시켜 봐 달라고 참 많은 브랜드들이 매년 홍성 본사 영업부의 문을 두드립니다. 브랜드 인지도를 떠나서 그들이 가지고 오는 영업 무기들만 보고도 이 브랜드는 된다, 안 된다가 대충 보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브랜드 본사가 어떻게 딜을 넣어 줘야 컨트롤 기업 입장에서 흥미가 돌고 마음이 열린다는 걸.”

“알겠습니다. 뭐가 됐든 필요하면 요청하세요. 영업부 서포팀은 본부장님이 해주시구요.”

상무님 방을 나와 곧바로 박 이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뭐라고 하시더나? 해 보라고 하셔?”

“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너?”

진심이 느껴지는 박 이사의 걱정이었다.

박 이사의 영업 스타일은 말 그대로 불도저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해!’ 하는 게 바로 박 이사가 영업부장이었을 시절 영업부의 모토였다.

그런 박 이사조차도 한 발 뒤로 빠져서 몸을 사리게 만들 정도로 폴앤크루의 해외 진출은 홍성의 입장에선 모험이었고, 또 새로운 시도였다.

“재밌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분명 영업부 입장에선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부장씩이나 달고 있는 놈이 넌 재미로 일하냐?”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지금 제가 하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나중에 되면 영업부에게 업무 공조 명목으로라도 손을 빌리려고 할 겁니다. 결국 도와줘야 하는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선수를 쳐서 영업부 실적을 챙기는 게 덜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하하….”

“자칫 재고 처리 안 되면 그거 다 네가 뒤집어쓸 수도 있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상무님이고 장 본부장인데, 그 책임을 제가 다 뒤집어쓴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너는 사람을 믿냐?”

“…믿고 싶습니다.”

“장가도 간 놈이… 왜 이렇게 겁 없이 덤벼? 너 그 뭐… 그때 상무님이 말씀하셨던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뭐 말씀이십니까?”

“그림에 대한 라이센스 수익을 너랑 장 본부장한테 쉐어를 해주겠다고 하셨잖아. 그게 욕심이 나서 이렇게 적극적인 거냐고.”

“맞네… 그게 있었죠? 진짜 제대로 해야겠네요. 하하하….”

“야, 공 부장.”

“그냥 진짜 한번 해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

“우리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우리 브랜드 들고 컨트롤 기업 쫓아다니면서 브랜드 영업을 해보겠습니까?”

“진짜 단지 그 이유뿐이야?”

“이유야 복합적이죠. 하지만 뭐랄까….”

“할 수 있을 거 같다?”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별로 어려울 거 같지 않은데요?”

“야, 인마… 네가 지금까지 본사에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브랜드 쪽 사람들이랑 해왔던 마진 협상이랑은 또 다른 세상인 거야. 항상 갑의 위치에서만 협상을 해오다가 말 그대로 이젠 을의 입장에서 협상을 해야 하는 건데, 그게 의욕만 가지고 잘될 거 같아?”

“예전에 이사님께서 영업부 부장으로 계실 때 팀장들 다 모아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뭐? 내가 뭐라고 했었는데?”

“한 번이라도 뭔가를 시도해서 자기 힘으로 성공을 해 본 사람은 누가 뭔가를 해 보겠다고 할 때 절대 하지 말란 소리를 안 한다고.”

“그거랑 이건 다르지, 인마.”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 뭔가를 성공시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 보내는 우려에 휘둘리지 말고 될 거 같다 싶은 게 있음 그냥 지르고 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때 저는 이사님만 제 뒤에 있으면 못 할 게 없을 거 같았습니다.”

“너 지금 하다 하다 이젠 나한테까지 약을 치냐?”

“크크크…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짜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난 단호하게 말했다.

단호한 내 눈빛에 박 이사는 미간을 좁힌 채 입을 다물었다.

“하나만 도와주십시오. 제가 직접 해도 되는 부분이긴 한데, 제가 직접 하면 상대 입장에선 협박으로 들릴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이사님이 중간에서 대신 교통정리를 해주시면 여러모로 보기가 좋을 거 같습니다.”

“뭔데?”

“중국 법인에 넘어가 있는 손 차장 말입니다.”

“…?”

“앞으로 주재원 근무 기간 1년 조금 더 남았습니다. 지금쯤 슬슬 한국 복귀 준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손 차장이 왜?”

“손 차장이 한국으로 복귀해서 다시 본사로 들어오면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본인은 영업부로 들어오고 싶어 하겠지만, 이미 영업부에 차장 티오는 꽉 찼고.”

“그래서?”

“중국 법인에서 폴앤크루를 받으라고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폴앤크루 분리경영 시작하면 어차피 폴앤크루도 자체 영업부가 있어야 합니다.”

“…!”

“그리고 전 현재 영업부의 차장 맨파워가 바뀌는 걸 원하지 않고요. 그 정도 결정권은 저한테도 있는 거 맞죠?”

“폴앤크루 영업부장 자리 약속해 주고, 폴앤크루를 받아서 제대로 띄워 보라고 하란 말이야?”

“아뇨.”

“…?”

“중국 법인에서 폴앤크루를 받아서 제대로 띄우는 데 성공을 하면 한국 돌아와서 폴앤크루 영업부장 자리 정도는 받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흘려 주시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야, 공 부장아. 이건 아무리 봐도 네 스타일이 아닌데?”

난 그저 미소만 흘릴 뿐 그게 양 차장의 머리에서 나온 계산이라고는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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