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저라면 절대 안 삽니다
퇴근 후 울산 식육집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장 본부장과 함께 들른 곳이었다.
평소처럼 장 본부장과 단둘이서만 술잔을 비우지 않고 양 차장도 함께 데려갔다.
“섭섭하기는….”
장 본부장은 피식하며 회의 때 나와 양 차장이 했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겼다.
“나는 뭐 어디 홍성맨 아니냐? 너희 둘이서 미리 짜고 상무님 계신 자리에서 내 뒤통수를 갈겼다는 게 좀 괘씸하기는 했어도… 따지고 보면 영업부 시절 때만 생각하고 너희를 믿고 무방비 상태로 그 회의 자리에 들어갔던 내 잘못이 크지. 그리고 마진 부분 때문에 섭섭하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 오히려 난….”
장 본부장은 다시 한번 피식하고 웃으며 술잔을 비워버렸다.
“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끼리 영업부를 이렇게까지 잘 이끌어가고 있는 게 더 섭섭하다.”
“….”
“삐걱대는 모습도 좀 보여주고, 막히는 모습도 보여줘야 그래도 아직은 영업부에서 내 빈자리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모양이네… 하면서 속으로 뿌듯할 거 아냐. 근데 이건 뭐 내가 영업부에서 책상 빼준 뒤부터 너희끼리 더 날아다니니까 상무님 보기에 민망할 정도야.”
“본부장님도 참….”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 친구들아. 진짜 좀 살살 해, 살살. 뭘 그렇게 상무님 계신 앞에서 연기까지 해가며 목숨을 걸어? 이 차장도 아까 회의 끝나고 그러더라. 이거 지금 자기가 말린 거냐고.”
“제가 조만간에 따로 자리 한번 하겠습니다.”
양 차장의 말에 장 본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빈 잔을 채웠다.
“이 차장이 그런 거 하나 이해 못 해줄까. 따로 자리를 하긴 뭘 따로 자리를 해? 그럴 시간 있음 양 차장 넌 연애나 좀 해. 내일모레 마흔이다, 너.”
“무슨 그런… 저 아직 서른여덟입니다.”
“그게 적냐? 앞자리 바뀌는 거 금방이다. 마음만 있으면 뭐할 거야? 회사, 집. 회사, 집… 사람을 안 만나는데.”
“술 잘 마시다가 그 이야기는 왜 또 갑자기 하시는 겁니까?”
“일 마치고 우리끼리 한잔하는 건데, 계속 일 이야기만 할 필요 있어? 거기다 이젠 타 부서 아냐. 내가 너네 둘 잡아놓고 화이팅을 하자고 하겠어, 아님 군기를 잡겠어? 그냥 편하게 마시는 거지. 그러고 보니까 영업부 전체 회식 때 말고 이렇게 양 차장이랑 따로 술자리 해본 게…”
“네, 이번이 처음입니다. 영업부 계시는 동안 저한테 너무 소홀하셨습니다.”
“그러게. 그랬네, 내가….”
“그냥 웃자고 한 말인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까? 농담한 사람 무안하게…”
“요즘 들어 그냥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어. 영업부에 있었을 때 조금만 더 재미있게 일할걸… 어차피 아무리 적성에 맞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해도, 월급 받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은 일 자체가 재밌을 수가 없잖아.”
“…그렇죠.”
“일 자체가 재미가 있을 수 없다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라도 좀 더 재밌게 지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들어. 승진, 성과만 보고 달릴 게 아니라 한 번씩 주위도 돌아보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 재밌게 일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하시면 되죠.”
“영업부만큼 다이나믹할 순 없지. 어느 부서든. 폴앤크루도 봐라. 내가 기획했던 프로젝트야.”
“….”
“내가 어디 띄우는 방법을 모르겠어, 아님 마진 지키는 요령을 모르겠어? 영업부가 아니면 안 돼. 회사 시스템이 그래.”
“…네.”
“내가 영업부에 일을 밀고 싶어서 미는 게 아냐.”
“알고 있습니다, 본부장님. 회의 땐 제가 그냥….”
“나도 알고 있어. 쌓이기 전에 미리미리 풀자는 뜻이야, 내 말은. 이해해 줄 게 있음 이해해 주고, 또 인정해 줄 게 있음 인정해 주고… 너희가 예전처럼 내 새끼들이면 내가 뭐 하러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 속에서 장 본부장은 고기를 한 점 집어먹었고, 양 차장은 돌판 위로 남은 초리구이용 고기를 모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난 새 소주 한 병을 돌려 땄다.
“근데… 상무님 그림 말입니다.”
돌판 위에서 고기를 뒤집으며 양 차장이 물었다.
“상무님 그림이 왜?”
“도대체 얼마나 있는 겁니까?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길래 그 그림들로 브랜드를 만들 생각까지 하셨나 싶어서요.”
“이게…”
장 본부장은 고백하듯 현실을 털어놓았다.
“나도 처음에는 쌓여 있는 것만 보고 상당히 많은 줄 알았어. 실제로 많기도 하고. 근데….”
“…?”
“브랜드 진행시키면서 다시 제대로 하나하나 살펴보니까 상품화시키기 애매한 그림들이 훨씬 더 많아. 왜 그런 거 있잖아. 초창기 때 그렸던 그림들이랑 최근에 그린 그림들의 그림체가 완전 달라. 내가 디자인팀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게 바로 그 이유고.”
“브랜드 콘셉트를 바꾸겠단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아직은 상품화시킬 만한 작품들이 많아. 그걸로 최대한 뽑을 수 있을 만큼 디자인을 뽑아 보고, 안 된다 싶으면 고민을 좀 해 봐야지. 폴앤크루가 어디 고야드 같은 원 패턴 브랜드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굳이 분류를 하자면 준명품 카테고리에 걸리는데, 유행에 따라 변화를 주는 건 큰 문제가 안 될 거 같더라고.”
“저는 그림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어쨌든 상무님이 그린 그림으로 패턴을 뽑았다는 점이 독특해서 참 좋았는데요. 물론 그런 부분은 앞으로 디자인 전문가들이 더 디테일하게 신경을 쓰겠지만, 폴앤크루는 유행을 따라가기보다는 지금과 같은 브랜드 콘셉트를 계속 유지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 본부장의 고민에도 충분히 공감을 했지만, 난 양 차장의 말에 동의했다.
장 본부장 역시도 양 차장의 말에 동의를 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나도 유행 따라가는 브랜드를 만들 의도는 절대 아니었어. 그럴 생각이었음 폴앤크루를 만들면 안 됐지. 돈만 보고 진행시킨 브랜드라고 하기보다는 홍성만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 일단 브랜드에 스토리가 있잖아.”
“그 스토리라는 게…”
난 조심히 장 본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꼭 상무님 개인의 스토리에만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요?”
“…?”
“그리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무님의 스토리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솔직히 폴앤크루가 가진 스토리를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에 대해 조금 회의적입니다.”
우리끼리니까.
상무님이 앞에 계셨다면 당연히 꺼내지 못할 진심이었지만, 난 솔직하게 말해서 그림에 대한 상무님의 꿈, 그리고 그 꿈을 접어야 했던 당시 상황과 폴앤크루를 통해 그 꿈을 다시 실현시킨 것에 대해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분명 그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열정까지 있었던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상무님은 홍성을 물려받기 위해 자신의 꿈을 접었고, 그 꿈을 접게 만든 홍성이 가진 배경으로 그 꿈을 실현시킨 거 아니겠나.
내 기준에서는 상무님이 폴앤크루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무슨 노력을 어떻게 했는지, 그 열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별 감동이 없었다.
당장 나부터도 폴앤크루가 가진 정확한 스토리를 잘 모르겠는데, 그런 내가 무슨 수로 그 스토리를 마케팅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물론 일이라는 게 백 퍼센트 이해를 해야만 진행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진행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 번씩 장 본부장이 폴앤크루라는 브랜드에는 스토리가 있다는 말을 할 때마다 정말 폴앤크루에 스토리라는 게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장 본부장이 상무님의 그림을 보게 됐고, 꽤 수준급인 그림들이 창고에 처박혀 있는 게 아쉬워서 상무님을 살살 긁어가며 바람을 넣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거지, 상무님 본인 스스로 그림에 대한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증명한 건 아니니까.
만약 상무님이 진짜 그림에 대한 천재성이 있었다면, 예술가적 기질이 상당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전무님 밑에서 호되게 경영을 배울 수가 있었을까?
내가 보기에 상무님은 예술을 했던 사람치고는 자기 고집이 그리 강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 주관을 고집하기보다는 소통과 융통성을 더 중요시할 때가 많다.
그냥 상무님이 미련을 가지고 있는 그림으로 충성심에 브랜드를 한번 만들어서 띄워 드리자… 하는 식이라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은데, 계속 거기에다가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섞으려고 하니까 거부감이 들 수밖에.
내가 장담하는데 그림에 대해 상무님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다만 상무님 정도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 뿐.
결국은 홍성의 배경과 돈으로 만들어낸 브랜드 아니겠나.
폴앤크루의 탄생에 사용된 상무님의 열정은 그저 그의 지난 과거가 전부였다.
그의 지난 과거 열정을 현재형으로 포장하기엔 분명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엔 장 본부장도 그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홍성의 영업력을 믿고 달리고 있는 중인 것 같았고.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스토리를 억지로 내세우기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폴앤크루만의 스토리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상무님의 스토리는 폴앤크루가 시작하게 된 계기 정도에서 그치는 게 더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상무님의 그림으로 폴앤크루의 스토리를 시작부터 끝까지 다 채우려고 하다 보니까 결국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써부터 한계가 드러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
“마케팅의 시작은 소비자들이 과연 뭘 원할까? 하는 퀘스천 마크에서 출발하는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본부장님. 정말 소비자들이 상무님께서 그린 그림으로 만든 패턴에 앞으로도 계속 호감을 보일 거라고 보십니까?”
양 차장은 눈알만 돌려가며 나와 장 본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난 장 본부장을 믿기 때문에 필터링 없이 내 속마음을 솔직하게 전달했다.
“제가 만약 일반 소비자라고 하면요. 폴앤크루의 브랜드 탄생 스토리를 모르면 모를까, 알고 난 뒤엔 그 돈 주고 폴앤크루 안 삽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겐조나 스톤 아일랜드를 사지.”
“…!”
“유명 아티스트도 아니고, 홍성의 상무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으로 만든 패턴의 맨투맨을 과연 누가 30만 원씩 줘 가며 사고 싶겠습니까?”
소주 한 잔을 반으로 잘라 마셔놓고 말을 이었다.
“패턴 자체는 무척 개성이 있습니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상무님의 그림으로 뽑을 수 있는 패턴에 한계가 분명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결국은 그려놓은 그림들 중 상품화시키기에 적합한 그림이 그리 많지가 않다는 게 문제지.”
“그렇다고 회사를 경영하셔야 할 분께 회사 경영 잠시 스톱하고 집에 가서 그림을 그려 오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정 그러시면… 차라리 재능과 열정은 있지만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숨어 있는 아티스트들을 꾸준히 발굴해서 그들의 개성 있는 작품들을 라이선스 비용 지불하고 상품화시켜 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숨어 있는 아티스트들?”
“말이 숨어 있다는 거지, 요즘은 인터넷으로 팝아트 검색하면 다 뜹니다. 저희 영업부 입장에서도 그게 훨씬 더 브랜드를 어필하기가 좋을 거 같습니다. 영업 포인트가 확실하지 않습니까. 양 차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솔직히 저라도 그렇습니다. 똑같은 맨투맨이라도 돈 많은 기업가의 과거 작품으로 만든 맨투맨보다 그런 기업가가 자신이 포기한 꿈을 아직까지 잡고 있는 젊고 느낌 있는 후배 아티스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맨투맨을 선택할 거 같습니다.”
“이건 꼭 저나 양 차장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본부장님은 어떠실 거 같습니까?”
“흐음….”
“쉽게 대답을 못 하고 계시지만,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우린 다양한 느낌의 개성 있는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통해 폴앤크루의 브랜드 이미지를 다양화시킬 수 있어서 좋고 또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을 가장 많이 컨트롤하고 있는 홍성의 자체 브랜드 폴앤크루와 콜라보를 해볼 수 있어서 좋고… 그냥 상품화시킬 수 있을 만한 상무님의 그림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셔서 갑자기 든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다음 날 오전, 근무 중에 상무님으로부터 호출이 들어왔다.
장 본부장도 함께 있는 자리였다.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상무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으셨다.
“진짜 공 부장은 절대 돈 주고 폴앤크루를 사지 않을 겁니까?”
농담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농담으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제 월급으로 사서 입기에는 비싼 브랜듭니다, 상무님.”
상무님은 환하게 웃으셨고, 그런 상무님 앞으로 양 차장이 뽑아준 해외 컨트롤 기업 리스트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