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이건 뭔가…
그렇게 치밀하고 디테일하며 또 냉철하기까지 한 양 차장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여자 앞에서 말을 못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자에 직장 동료는 제외다.
일적으로 엮여 있는 여자들 앞에서는 자기 할 말 다 하고 또 매장 실장들을 접대할 때 보면 기가 막힌다.
예술이다.
접대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만약 실전 영업 접대의 정석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저런 거라고 자신 있게 소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들이댄다.
그.런.데….
그런데 참 신기할 정도로 자기가 이성으로 느끼는 여자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버벅거리다가 결국엔 식은땀까지 흘린다고 한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소개를 시켜줘 봤으니까.
벌써 영업 5팀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만으로 3년을 내 옆에 있어 준 동료다.
자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집사람인 강혜선보다 더 많이 붙어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나도 처음엔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에 그의 결혼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남이니까.
가족끼리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결혼인데, 그걸 직장 동료인 내가 뭐라고 코칭을 하겠나.
그리고 내가 딴것도 아니고 연애 부분에서 누굴 코칭할 실력이 되는 사람도 아니고.
거기다 본인은 자꾸 결혼이 늦었다고 하는데, 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요즘 같은 시대에 우리 나이면 그리 늦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 내게 양 차장은 항상 살짝 삐딱하게 이런 반응을 보였다.
“가진 자의 여윱니까, 뭡니까?”
말투만 보면 분명 농담인데 표정을 보면 살짝 살기가 섞여 있는 거 같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해가 바뀌고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 됐을 땐 나도 그 심각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이 회사에서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하는 거다.
자기는 계속 히스테리를 부리는 게 아니라며 펄쩍 뛰는데, 사실 옆에서 보면 히스테리를 부리는 게 맞다.
갈구는 상대를 보면 하나같이 현재 연애 진행 중인 팀원들뿐이다.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한번 물어봤다.
“아니, 도대체 그렇게 매주 선 자리에 나가는데 어떻게 성공을 한 번도 못 할 수가 있습니까?”
“매력이 없나 보죠, 뭐.”
아니다.
인물이 딸리는 것도 아니고, 키가 작은 것도 아니다.
집안이 안 좋은 건 더더욱 아니고.
거기다 홍성 정도면 반듯한 직장이라고 해도 될 거고, 서른여덟에 대기업 차장이면 겉으로만 보기에도 회사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어디 그뿐인가.
자기 명의로 된 집에, 그것도 혼자서 살고 있다.
이만하면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거 아닌가?
어지간하면 내가 직장 동료의 호구 조사 같은 건 잘 안 하는 편인데, 혹시라도 위로 시누이 행세를 할 누나가 많다거나, 아니면 집에 제사가 많은지도 물어봤었다.
오죽했으면 말이다.
그런데 누나도 없고, 어머니는 교회 집사라고 한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
처음엔 그냥 눈이 높아서 그런 건 줄만 알았다.
예전에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을 때, 자기는 스튜어디스를 만나고 싶다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 박혀서.
그런데 이젠 자기도 자기 처지를 아는지 스튜어디스가 웬 말이냐며 자기랑 말 잘 통하고 또 이해심 많은 여자면 충분할 거 같다고 눈높이가 정상 높이로 조정됐음을 밝혔다.
그래서 내가 평소 나답지 않게 오지랖이라는 걸 한번 부려 봤다.
마침 강혜선이 다니는 은행에 강혜선보다 두 살 어린 괜찮은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강혜선이랑 같이 나도 그녀와 몇 번 정도 밥을 먹어 본 적이 있는데, 괜찮았다.
미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눈, 코, 입 다 제자리에 잘 붙어 있었고, 차분하지만 나름 유머도 있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나가는 말로 그 여자한테 우리 회사에 나보다 한 살 많은 쓸만한 남자가 하나 있는데 소개팅 한번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봤었다.
내가 진지하게 부탁을 하면 상대가 부담을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지나가는 말로 물어봤던 거다.
그런데 내 걱정과는 달리 여자는 양 차장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었다.
그리고 난 지금껏 내가 지켜본 양 차장에 대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다 소개를 했었다.
그랬더니 여자가 하는 말이 양 차장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느냐는 거다.
상대가 생각이 없는데, 자기 혼자 준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출근을 하자마자 바로 양 차장에게 말했었다.
“우리 집사람이랑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 진짜 괜찮아요. 차장님만 생각 있다고 하시면 제가 다리 한번 놔 드릴게요.”
“사진 있습니까?”
사진으로라도 먼저 외모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런데 아무리 강혜선의 인스타그램을 타고 그 여자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강혜선에게 카톡을 보내서 그 여자의 사진을 구했고, 비록 실물과는 다소 다른 얼굴이 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지만, 분명 포토샵 처리가 되어 있는 거 같다는 사실까지 전달을 하며 만나 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봤었다.
“괜찮네요. 예쁘네.”
“근데 실제로 보면 이것보다는 좀 더 통통합니다.”
“저 통통한 여자 좋아합니다.”
그때 난 양 차장이 진심으로 급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이상형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 통통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진짜 부끄러움을 모르는 거다.
하지만 어쩌겠나.
자기가 자기 입으로 취향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두 사람을 소개시켜 줬다.
같이 나가 줄까요? 하고 물어봤더니 양 차장은 그건 또 싫다면서 그냥 여자 연락처만 달라고 하는 거다.
나름 남자답다고 속으로 살짝 놀라며 여자의 연락처를 건넸었다.
그렇게 만남이 이뤄졌고, 그날 밤 강혜선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와 거의 두 시간 넘게 통화를 했다.
통화 내용은 대충 이랬다.
양 차장이 말을 안 하더라는 거다.
인사하고 자기소개하고 기본적인 대화가 조금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뚝! 하고 끊겨 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불편한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다가 겨우 양 차장이 꺼냈다는 소리가 ‘저녁이나 같이 드실래요?’였다고 한다.
마침 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궁금한 마음에 양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왜, 여자가 마음에 안 들던가요?”
-아뇨, 전 마음에 들던데요?
“전 괜찮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진짜로요. 저는 진짜 좀 더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분이 절 좀… 별로라고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요.
“말씀을 전혀 안 하셨다고 하던데….”
-아, 그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항상 그렇습니까? 맞선 자리 같은데 나가면….”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오면… 좀 그렇게 되더라고요.
“아….”
-왜, 여자분이 뭐라고 하던가요?
“아뇨, 아닙니다. 그냥 양 차장님이 자기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제가 잘 한번 말을 전달해 볼까요?”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왜요?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냥 마음에 안 들었던 거죠?”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다시 만나게 돼도, 똑같을 겁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부장님 아내분 직장 동료인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실례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그렇게 흐지부지가 됐던 적이 한 번 있다.
그리고 그 후로 난 양 차장이 이성적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앞에 있으면 평소 이미지와는 달리 완전 숙맥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그 정도가 심각한 정도로 숙맥이 되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답답한데 본인은 얼마나 스트레스겠나.
그러던 어느 날….
폴앤크루 해외 영업 건으로 기획 1팀의 차 팀장과 이지혜를 불러놓고 미팅을 가졌다.
양 차장은 자기가 기획 2팀 인원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기획 1팀 전원 나가서 컨트롤 기업 쪽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지금 당장 뭔가 실적을 올려 오란 소리가 아닙니다. 그냥 가서 안면만 트고 오세요. 차 팀장이 도쿄 출장 일정 잡고, 이 대리가 파리 한번 다녀오면 될 거 같은데…”
“진짜 한꺼번에 다 가도 괜찮겠습니까?”
양 차장만 있으면 된다.
기획 2팀에서 막내 두 명 헬퍼 받아서 이리저리 돌리면 최소한 차 팀장이 복귀할 때까지는 업무에 차질없이 지켜 낼 수 있다.
그렇게 기획 1팀 전원이 해외 영업을 직접 뛰기 위해 사무실을 비웠을 때였다.
아주 이례적인 상황.
홍성 영업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다.
그런데 그때 때마침 로즈마리로부터 아이템 협찬 의뢰가 들어오게 된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이지혜는 이미 파리로 출장을 나가 있는 상황이었고, 기획 2팀에서 헬퍼를 나와 있는 막내들이 핸들링하기에는 다소 예민한 업무였다.
결국 양 차장이 로즈마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본사로 찾아오라고 말했다.
필요한 아이템의 레퍼런스 번호만 보내 주면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다고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을 못 했다.
구독자 70만을 돌파해 버린 인기 유튜버 로즈마리가 양 차장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게 될 거란 걸….
“어디 가세요?”
난 그때까지도 로즈마리가 본사에 오는지 모르고 있었다.
업무 과부하가 걸려 버린 양 차장.
양 차장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여성 이브닝백 하나를 들고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파워가 모두 빠진 상황이었기에 난 계속 기획 1팀 사무실 쪽을 주시하고 있었고,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양 차장과 눈이 마주쳤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양 차장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어봤다.
“또 로즈마리가 온다네요.”
“…또요?”
“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아… 씨, 진짜 바빠 죽겠는데 왜 평소 땐 가만히 있다가 딱 이지혜 출장 가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며칠 상간으로 아이템 협찬을 요청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전에 찍은 영상이 별로였나 보죠. 그때 가져갔던 스파이더 백 영상은 아직 올라오지도 않았더만.”
“아 놔, 진짜… 이거 돈 받고 해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인간적으로.”
“돈은 무슨… 해줄 수 있느냐고 그쪽에서 먼저 물어봤던 것도 아니고,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서 빌려 가라고 한 건데….”
“아, 그니까 왜 이런 귀찮은 일을 해주겠다고 하셨습니까?”
“저 부장입니다.”
“됐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이렇게 자주 요청을 할 줄 몰랐죠. 그냥 그거 저 주세요. 제가 대신 갖다주고 올게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차장님은 자리 지키고 계셔야죠. 어디에 있답니까?”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저 주세요.”
그렇게 양 차장 대신 내려간 로비에서 난, 날 발견하고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고 있는 로즈마리를 보고 이건 뭔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