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처음 장 본부장이 발표 도중에 전무님의 지적을 받았을 땐 별 감흥이 없었다.
워낙 날카로운 분이시니까.
그리고 그 날카로움 끝엔 언제나 홍성의 이익이 걸려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지난 내 홍성 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소리였다.
‘왜 남의 지난 세월을 그냥 가져다 쓰려고 해?’
처음엔 그냥 ‘아, 저렇게 생각을 하실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대수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작은 울림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러다 역시 전무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깨어 계신 분이라는 뿌듯함, 나의 롤 모델로 삼기를 참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던 거 같다.
그러던 게 점점, ‘그래, 저게 맞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변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 한마디로 인해 내 지난 홍성 생활을 배신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랬다.
우린 우리의 지난 세월을 회사에 그냥 갖다 바치길 은근히 강요받아 왔고, 또 생각 없이, 그게 큰 실례인 줄도 모르고 우리가 그래 왔듯 또 후임들의 지난 세월을 그냥 가져다 쓰려고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뭐 잘해? 잘하는 거 뭐 있어?”
홍성 영업부에 입사를 했을 때 당시 내 첫 사수였던 사람이 내게 자기를 간단하게 소개한 이후 처음 던졌던 질문이다.
마치 군대 자대 배치를 처음 받던 날이 떠오를 만큼 난 주눅이 들어 있었고, 또 상대는 사회 초년생인 날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자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 큰 무기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투로 말을 했었다.
물론 그는 내가 홍성에 입사하기 전까지의 내 지난 세월들을 공짜로 가져다 쓰기 위해 체크를 했던 거였지만, 난 그가 내 직장 생활에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거 같다.
무엇을 잘하느냐는 질문에 당시 난 이것저것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마치 그게 의무인 양 열심히 나열해 나가기 시작했었다.
이미 내가 잘하는 것,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면접 자리에서 포장해서 보여주었고, 그래서 정식으로 입사에 성공한 거였는데, 그런 입사 후에도 난 이따금씩 상사들로부터 면접 아닌 면접을 봐야만 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매 순간이 내게는 면접이었던 것 같다.
그 면접에서 통과를 해야지만 안전하게 회사라는 집단생활에서 외롭지 않게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고, 그 면접에서 인정을 받아야지만 그 집단으로부터 외면받지 않을 줄 알았으며, 또 그 면접에서 계속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지만… 동기들에게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 회사에 나의 지난 삶, 그리고 지금의 삶, 앞으로의 삶을 매일같이 갈아 넣고 있었다.
그런데 상무가 만들어 놓은 작품에 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지급하고 제대로 사업을 진행시키라는 전무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렇게 말하는 전무님이 너무나 당연한 건데, 그런 말을 하는 전무님이 멋있어 보일 정도였다.
어쩌면 난, 그리고 우린 직장이라는 집단을 위해 우리의 지난 세월을 너무 헐값에 팔아넘기고, 또 때론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그냥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회사에 줘 오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모르겠다.
물론 안다.
그게 직장 생활이라는 걸.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장인들이 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우리의 지난 세월값이 지금의 우리 월급에 다 포함되어 있는 거라면… 조금은 서글플 거 같았다. 그래서일까.
남의 지난 세월을 그냥 가져다 쓰는 게 따지고 보면 비정상이라는 걸 몰랐을 때와 그걸 알아버린 지금은 크게 달랐다.
조금은 조심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조심이 어쩌면 내 직원들의 가치를 올려줄 수 있는 길이란 생각도 들었다.
장 본부장의 프레젠테이션이 모두 끝났을 때였다.
사장님의 만족스러운 표정 앞에 쑥스러워하는 상무님과 그런 부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전무님의 시선만으로도 폴앤크루는 대대적인 투자가 이뤄질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상무는 나와 장 부장에게 퇴근 후 같이 식사나 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장 본부장의 프레젠테이션이 있기 전까지는 자기 역시도 긴가민가했던 상무.
하지만 사장님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해 현재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눈치였고,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는 폴앤크루를 제대로 한번 띄워 보고 싶다며 나와 장 본부장에게 자신의 욕심을 드러냈다.
“고맙습니다, 본부장님.”
호텔 중식당이었다.
회전판이 끼워져 있는 라운드 테이블이었지만, 대형은 아니었고 룸 역시도 서너 명이서 사업을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기에 딱 알맞은 크기의 룸이었다.
그리고 독한 중국 백주나 소주 대신 레드 와인 한 병을 뜯었는데, 난 와인이 중식과 이렇게 잘 어울릴 수도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와인잔을 앞으로 내밀며 상무가 말했다.
그리고 나와 장 본부장은 상무의 잔에 잔을 갖다 대기 위해 조금은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 한 모금으로 입안을 살짝 적셔놓고 그 비싸다는 송로버섯 전골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을 때였다.
상무가 장 본부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장 본부장은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고민했을 뿐이고, 또 지금은 그걸 진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식으로 겸손하게 대답했다.
“뭔가를 새롭게 배우고 있는 느낌입니다.”
와인 잔을 빙빙 돌리며 그 와인 잔 안으로 붉은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상무.
그는 다시금 와인 잔을 입술에 붙여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처음 본부장님이 제 그림으로 브랜드를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을 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다 살짝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한번 해보고 싶다… 하는.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제 그림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사장님 컨펌까지 받아내시는 걸 보고 본부장님이 참 대단하단 생각밖에 안 드네요.”
“아닙니다.”
“일전에 사장님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한번 하신 적이 있어요.”
“….”
“마케팅, 특히 그중에서도 영업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나와 장 본부장은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면서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경력, 노하우는 도움이 될 뿐이지, 진짜 영업을 잘하는 사람들은 타고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특히 우리 홍성 같은 회사의 영업은 더 그렇다고…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제게 하셨던 건지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공 부장님.”
“네.”
“브랜드 론칭을 PL 상품으로 진행하자고 제안하셨던 건 신의 한 수였던 거 같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닌 누구라도 PL 상품을 떠올렸을 겁니다. 본부장님으로부터 함께 사업을 논의해 보자고 제안을 받을 정도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말이죠. 그 아이디어는 제가 뛰어나서 낼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영업 짬밥, 경험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습니다.”
장 본부장은 피식하고 말했다.
“결국 그런 짬밥, 경험, 노하우… 그런 것들도 다 버티고 살아남는 사람들의 몫이니까요.”
그렇게 식사를 진행하던 중 상무가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꺼냈다.
우린 알 수 없는 이야기.
홍성이 지금의 홍성으로 올라서기까지 사장님을 거쳐 갔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친구들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줄 알아요. 하지만 제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전 하루가 멀다 하고 할머니 댁, 외할머니 댁, 심지어는 이모들 집을 옮겨 다니며 살았어요. 집이 없었어요.”
나와 장 본부장은 거의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사장님이 홍성을 처음 차렸을 때에도…. 물론 당시 전 너무 어려서 사장님이 어떤 사업을 하시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때에도 전 외할머니 집에서 살았어요. 부모님이 절 돌볼 형편이 못 되셨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부모님과 정식으로 같이 살게 된 건 저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였어요. 아, 초등학교 3학년.”
“….”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가 밖에 나가서 일을 안 해도 되셨고, 그래서 다른 친구들 집처럼 어머니가 항상 집에만 계셨죠. 근데… 이해가 되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어서 참 좋았는데… 그러면서도 어색하더라고요.”
“그럴 수 있죠.”
장 본부장이 거들었다.
“저도 차장, 부장 달기 전까지 출장 자주 다닐 땐 며칠만 나가 있다가 들어와도 애가 절 어색해하더라고요.”
“전 오죽했겠어요. 근데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됐을 때 동생이 생겨요.”
“아, 지금 미국에 있다는….”
“네. 곧 공부 다 마치고 들어오긴 할 건데, 아무튼 그때 동생이 생겨서 또 전 부모님 관심에서 뒷전으로 밀리죠.”
“….”
“사장님 하시는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명절 때마다 집으로 들어오는 명절 선물이 많아지고… 또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고… 언제부턴가 집에 처음 보는 삼촌들이 자주 놀러 오셔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더라고요. 왜 우리 어릴 땐 어른들이 집에 와서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그런 거 자주 했었잖아요.”
“자주 했었죠.”
“사장님 스타일이 그러셨어요. 회사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식사하고 술 마시는 걸 참 좋아하셨어요. 참 많은 분들이 저희 집에 오셔서 함께 식사를 하고 또 어떨 땐 잠도 자고 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
“그 많던 삼촌들 중에 지금까지 홍성에 남아 계신 분은 전무님 한 분밖에 없어요. 이문 이사님이야 그 후에 홍성에 들어오신 분이니까 제외를 하고 말이죠.”
“흐음….”
“한 번씩 사장님한테 물어봤었어요. 그때 마이마이 카세트 사다 줬던 삼촌은 더 이상 집에 안 오냐고. 그때 나이키 운동화 사다 준 삼촌은 요즘 안 보이는 거 같다고….”
나와 장 본부장은 그 시절 순수했던 상무의 모습을 떠올리며 함께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과 당시 홍성의 초창기 맴버들을 곰곰이 떠올려 보면 진짜 사장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았고 사장님이 크게 의지를 했던 사람들 순으로 사장님을 떠났던 거 같아요.”
“…!”
“그래서 저는 지금 살짝 겁이 납니다. 지금 저에게는… 장 본부장님과 공 부장님이 제가 생각하는 유일한 저의 최측근이거든요.”
상무의 쓸데없는 걱정을 장 본부장이 재치 있게 안심시켰다.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홍성도 더 이상 그 시절의 홍성이 아니죠. 그만큼 회사 오너의 위치는 단단하고 또 저나 공 부장 입장에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제가 두 분을 참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상무님.”
“네.”
“미국에 있는 동생분. 한국에 들어오면 바로 회사로 출근시키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그놈은… 저도 아직 그놈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잘 모르겠어요. 본인도 모르는 거 같고. 그냥… 자기 하고 싶다는 거 하게 해주고 싶어요.”
“….”
“회사 일을 배워 보고 싶다고 하면 들어와서 일해 보라고 할 거고… 그냥 그놈만큼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