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할 거면 제대로 해
폴앤크루
상무가 직접 정한 브랜드 이름이었다.
오래전 외국 유학 당시 자신이 썼던 영어 이름이 폴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 브랜드를 만들어준 동료, 친구의 개념을 브랜드에 꼭 함께 넣고 싶었다고 한다.
폴앤크루….
어감이 괜찮은 거 같았다.
“괜찮은데요? 폴앤크루… 전 상당히 괜찮은 거 같습니다.”
장 본부장 역시 다이어리에 상무가 만들어 온 브랜드를 영문으로 휘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드 이름이 결정된 이후부터 나와 장 본부장, 그리고 상무는 하루 대부분의 근무 시간을 함께 보내며 본격적으로 폴앤크루 론칭에 박차를 가했다.
“근데 그래도 명색이 브랜드 론칭인데 이렇게 쉽게 진행돼도 되는 걸까요?”
“굳이 어렵게 진행될 필요가 있습니까?”
장 본부장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렵게 일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나 공 부장은 그런 능력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경험이 부족한 상무는 매 스텝마다 걱정이 앞섰고, 그럴 때마다 나와 장 본부장은 상무를 안심시켜가며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갖춰놓고 론칭을 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장 본부장이 자신의 생각, 즉 폴앤크루의 마케팅에 대해 말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저희는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 본부장의 말에 상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장 본부장의 생각을 내가 대신 설명해줬다.
“저도 본부장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완벽하게 세팅을 해서 브랜드를 론칭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시작부터 지쳐서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건 구식 스타일이고, 저희는 유통이 확보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PL 상품으로 브랜드를 론칭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진행시켜 가면서 컬렉션을 늘려 가는 게 현재 홍성이 가진 소스를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겁니다.”
내 입에서 PL 상품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장 본부장은 무척 흡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상무 몰래 내게 윙크를 보냈다.
자신과 생각이 통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이건 조금이라도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PL 상품 기획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 건이었다.
“PL 상품이라면…”
하지만 상무는 여전히 감을 못 잡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PL(Private Label) 상품.
한마디로 유통업체의 유통 경쟁력과 상품 기획력이 합쳐져 생산되는 유통 자체 브랜드라고 보면 된다.
주로 대형 마트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대형 생산업체 브랜드들 틈에 끼어 마트 자체 브랜드를 달고 판매가 되는 상품들이 대표적인 PL 상품이다.
마케팅이나 유통비용을 획기적으로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좋은 건 물론이고 어느 정도 제품력만 보장이 된다면 자체 프로모션을 통해 대량 판매가 가능하다.
거기다 PL 상품의 제품력에 좋은 평가가 나오게 되면 유통기업 자체의 이미지도 함께 올라간다는 메리트까지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가격 포지셔닝을 낮게 잡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장 본부장은 상무가 오해하기 전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론칭 방식만 PL로 하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현재 차 팀장이 준비 중인 성인복 편집샵 브랜드까지 폴앤크루로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럼 그게 어떻게 PL 상품이 되는 건가요?”
나와 장 본부장이 함께 설명을 해도 상무 하나를 제대로 이해시키는 게 버거울 정도로 상무는 영업에 관해서는 재능이 부족했다.
영업에 관한 재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그만큼 사고의 유연함이 부족하다고 보는 게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PL 론칭의 이점만 가지고 론칭을 하자는 거지, 폴앤크루가 홍성의 PL 상품인 걸 시작부터 알릴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대형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PL 상품들의 경우는 주로 식자재나 소모성 주방용품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패션 쪽은 다르죠. 이미지가 곧 브랜드의 레벨이 되고, 또 그 브랜드의 레벨이 가격이 되는 게 바로 패션 쪽인데 굳이 유통 기업의 PL 상품이란 걸 알리고 론칭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장 본부장의 설명을 귀담아듣고 있는 상무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처음부터 모든 컬렉션을 다 갖춰놓고 론칭을 하려고 하면 컬렉션을 갖추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상무는 뭔가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되고 있다는 뜻을 담고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공 부장 말처럼 처음부터 많은 투자를 쏟아붓지 말고 시장의 반응을 봐 가면서 컬렉션을 늘려 가는 게 더 현명하단 생각이 듭니다. 처음엔 그냥 공 부장이 가져온 3D 샘플처럼 기본 맨투맨 티셔츠와 후드티 위주로 기본 컬렉션을 만들어서 시장의 반응을 본 뒤 차츰 컬렉션을 늘려 가는 방향으로 가보시죠.”
하나의 완성된 브랜드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생산비와 그 생산비를 훨씬 뛰어넘는 마케팅 비용이 필요하다.
판매가 안 될 것을 알면서도 구색을 갖추기 위해 생산, 진열을 해야 하는 잡화 쪽 아이템들부터 시작해 수요가 거의 없는 사이즈들까지 다 생산을 하려면 초기 투자비가 어마어마하게 든다.
거기다 컬렉션별 콘셉트를 만들어야 하고 그 콘셉트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투자가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성된 브랜드를 론칭하려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가는 건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이건 굳이 직접 해보지 않아도 그동안 홍성이 해왔던 유통 노하우만으로도 어느 정도 투자가 들어가야 제대로 된 브랜드를 론칭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바로 계산이 나오는 거다.
그리고 우린 안 하면 안 했지, 이왕 하기로 한 건 제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니까.
차 팀장이 준비 중인 성인 편집샵 브랜드 Show&Spirit(줄여서 SS샵)의 콘셉트만 조금 변형시키면 얼마든지 폴앤크루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킬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장 본부장은 폴앤크루의 브랜드 론칭 기획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통 관련해서는 공 부장이 따로 준비해 줄 거지?”
“준비할 거나 어디 있습니까?”
“전무님 질문 날아오면 유통 마케팅 쪽으론 공 부장이 대신 커버 쳐 줘. 디테일하게 물어보실 거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장 본부장은 사장님까지 참석하신 자리에서 폴앤크루 브랜드 론칭에 관한 프로젝트 발표를 하게 됐다.
발표가 시작되고 폴앤크루의 브랜드 네이밍이 된 과정을 소개하는 순간 사장님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셨고, 협력 업체에서 뽑아준 몇 벌의 맨투맨, 후드티 디자인이 스크린에 올라가는 순간 전무님은 꽤 진지해지셨다.
“제작 의뢰를 처음엔 만토바 쪽에 있는 공장에서 하려고 했었는데, 그쪽에서 선을 긋고 있는 MG 금액이라든지, 물류비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국내에 있는 공장들 중 해외 명품 브랜드의 라벨 생산을 하고 있는 협력 업체 몇 군데를 선정해서 마진을 조율 중에 있습니다.”
“비용을 떠나서 국내에도 퀄리티 있게 생산할 수 있는 라인을 갖춘 공장이 많은데, 굳이 외국으로 나갈 필요는 없지.”
전무님이 말씀하셨다.
“거기다 현재 중국 법인 통해서 중국으로 유통되고 있는 국내 브랜드들 중 자체 공장 라인을 돌리고 있는 기업들도 많잖아. 그쪽으로 발주 넣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더 신경 써서 뽑아줄 거고.”
“네, 안 그래도 그쪽으로 발주를 넣어줄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그렇게 서로 도와가다 보면 서로가 만족할 만한 마진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거고… 그건 그런데 난 장 본부장이 발표한 내용 중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하나 있네.”
역시 전무님이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사업 아이템.
큰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보장은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지금의 홍성이라면 한 번 정도 시도는 해볼 만한 사업.
그리고 재무적으로 큰 리스크도 없는 사업이다.
하지만 전무님의 눈엔 여전히 구멍이 많아 보이는 사업이었던 모양이다.
사장님 옆자리에서 전무님이 특유의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시며 테이블 위로 양 팔꿈치를 올리는 순간 천하의 장 본부장도 움찔하며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 상무 작품들로 여러 패턴을 뽑아서 이렇게 개성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는 참 좋아. 시장성이 있건 없건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하니까. 크게 터뜨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걸 시작으로 계속해서 홍성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는 무척이나 칭찬해주고 싶어.”
전무님의 서론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 본부장은 선수를 쳐서 사장님과 전무님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이제 슬슬 나나 사장님이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자네들끼리 알아서 이런 사업을 구상한다는 것 자체도 무척 기특하고. 그런데… 셈이 조금 잘못된 거 같지 않나?”
“…?”
전무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와 상무 그리고 장 본부장은 서로의 표정을 훑었다.
“셈이 잘못됐다고 하면…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건지….”
“초기 투자 비용을 최대한 줄여서 최소 투자로 브랜드를 론칭해 보겠다는 취지는 무척 좋아. 그래도 줄 건 줘야지.”
“…?”
“전 상무 작품들 말이야. 그걸 왜 공짜로 가져와서 쓰나?”
“…!”
“돈을 주고 확실하게 작품에 대한 라이선스를 사서 써야지.”
순간 난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거 같았다.
상무와 장 본부장 역시 두 눈을 감았다 뜨며 전무님의 지적에 당황을 하고 있었다.
“이걸 왜 공짜로 쓰려고 해?”
“하지만….”
상무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전무님이 손을 들어 상무의 입을 막아버렸다.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
“아직 네 회사 아니야. 사장님이 여기 계신데 왜 벌써부터 네가 회사 사장인 거처럼 행동하나?”
“사장이라도 그러면 안 되지.”
사장님이 거들고 나섰다.
“사장이 곧 회사는 아냐. 계산은 정확하게 해야지.”
“…!”
그리고 전무님이 상무님을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뭐 네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브랜드 론칭을 해보겠다는 거야?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못하고 혼자 취미 생활 비슷하게 해왔던 네 작품으로?”
“아, 아닙니다.”
“그런 거면 하면 안 되지. 회사가 어디 네 한을 풀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도 아니고. 정확하게 시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고 뛰어들어야 할 거 아니냐고. 그런 거 때문에 해보는 거라면 회삿돈 쓰지 말고 네 돈 써서 개인적으로 해. 회사 차원으로 해보지 말고.”
“…네.”
“그런 게 아니라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거 같아서 해보겠다고 하는 거라면 제대로 해야지. 장 본부장.”
“네, 전무님.”
“내 생각엔 경쟁력이 있는 브랜드가 될 거 같아.”
“….”
“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사장님은 의미 모를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회의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콘셉트 자체가 나쁘지는 않네. 개성이 있다.”
사장님의 인정 아닌 인정을 받게 된 상무.
그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장 본부장.”
“네, 전무님.”
“진행을 할 거면….”
“….”
“전 상무한테 작품에 관한 라이선스를 사서 해. 그래야 나중에 작품 주인이 딴말을 못 하지. 왜 남의 지난 세월을 그냥 가져다 쓰려고 해? 아닌 말로 장 본부장한테 저런 작품이 있다고 치고, 내가 장 본부장한테 아무런 대가도 안 치르면서 네 작품으로 브랜드 만들어줄 테니까 작품 좀 공짜로 갖다 쓰자… 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어? 그런 게 바로 희망 고문이라는 거야. 잘못돼서 사업이 성공을 못 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작품 주인한테 뭔가 떨어지는 건 있어야 할 거 아냐.”
“…!”
“아무리 전 상무가 차기 홍성이라도 계산은 정확하게 해야 할 거 아니냐고. 우리 홍성이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아낄 걸 아껴야지… 할 거면 제대로 해, 시작부터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