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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74화 (174/325)

# 174

결국 남는 건 사람

“공… 차장아.”

“…?”

울산 식육집이었다.

목요일 저녁.

대형 브랜드 두 곳에서 홍성 본사를 찾아온 날이었다.

간단하게 그들의 난처한 입장을 전해 들었고, 우린 기계적으로 그들의 난처함에 유감을 표현했다.

난처함은 그들의 몫이니까.

우린 그냥 괜찮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별의별 일이 다 있는 거 아니겠냐, 다만 앞으로는 홍성이 귀사의 브랜드를 한국에서 컨트롤하는 데 다른 거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귀사의 스탠다드대로만 움직일 수 있도록 신경을 조금만 더 써달라 하는 정도로 한국까지 찾아온 그들의 성의를 인정해주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이미 한국까지 직접 찾아온 것만으로도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의를 보인 것이니까.

어떻게 CGM을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리냐가 관건이었다. 최소한 한국에서 CGM이 확보해 나가고 있던 일말의 시장 장악력까지도 이미 이번 건으로 완전히 공중분해 시키는 데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소한 축배라고 해야 할까.

가장 콧대가 높은 대형 브랜드 두 곳과의 미팅까지 홍성에게 유리한 쪽으로 끝내놓고 나니 살짝 긴장이 풀렸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에 장 부장이 오랜만에 둘이서 육회에 소주나 한잔 같이 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분명 언제 터뜨려도 어색하지 않을 축배였다.

하지만 난 장 부장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브랜드 본사들을 상대로 압박을 가하는 작업에만 집중을 했고, 장 부장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는지 둘이서만 간단하게 먼저 축배를 들자고 제안했던 거다.

“앞으로는 둘이 있을 때도 그렇게 부르려고.”

“뭘요?”

“더 이상 이름을 불러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

장 부장은 스스로 자신의 잔을 채웠고, 난 손만 살짝 들어 그가 기울이고 있는 술병에 손을 붙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장 부장이 내 잔을 채워주기 위해 소주 주둥이를 내 쪽으로 향해 보였을 땐 얼른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전사 운영본부가 영업부의 상위 호환 개념이 되면 안 되는 거 아니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장 부장이 전사 운영본부로 옮길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난 침묵했다.

“그냥 다른 부서야. 특히 홍성에서 영업부는 영업부 자체 독립성을 인정받아야만 하고.”

“….”

“이렇게 노선이 갈리게 되니까… 요즘 들어 공 차장한테 고마운 마음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더 커.”

“또 왜요?”

난 어떻게든 가라앉기 시작하는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장난스레 물었지만, 장 부장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래서 다시 진지 모드로 갈아타며 술잔을 살짝 입술에 붙여 반쯤 잘라 마셨다.

“왜 너에겐 그렇게 해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뭘요?”

“요즘 상무보님을 바로 옆에서 모시면서, 너한테 했던 거랑 백팔십도 다른 자세로 상무보를 대하는 날 보면서 한 번씩 후회가 돼.”

“어떻게 저한테 하셨던 거랑, 상무보님한테 하시는 걸 똑같게 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야 당연히 저는 부장님 새끼였고, 상무보님은…”

“지금 공 차장한테 묻는 게 아니라, 최근 내가 종종 나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했단 말이야.”

그렇게 말한 다음 장 부장은 자신의 잔을 말끔하게 비워버렸다.

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그의 잔에 첨잔을 하듯 술을 채웠다.

“처음 안 팀장이 모리엘츠를 잡아 왔을 때, 보고를 드렸더니 모리엘츠가 뭔지 모르시더라고.”

“상무보님이요?”

“응.”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홍성이 한 번이라도 컨트롤을 해봤던 브랜드도 아니고 또 상무보님이 저희처럼 현장을 다 꿰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충분히 그러실 수도 있는 거잖아. 모르면 알려드리면 되는 거니까.”

“그렇죠.”

“그런데 만약…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공 차장이 나한테 모리엘츠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면 난 공 차장한테 뭐라고 했을까?”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만약 내가 그랬다고 하면 아마도 욕은 욕대로 얻어먹고 또 무시도 무시대로 받지 않았을까?

“큰 위기 없이, 그리고 큰 경쟁자 없이 지금까지 쭉 에이스로만 승진을 해오다 보니까, 갑자기 뭔가가 시시해져 버렸어.”

“흐음…”

“그러다 보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곤 지나온 내 홍성 생활을 되짚어보면서 후회와 반성을 하는 것밖에 없더라고. 그런데 이게 꼭 나만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들어. 꼭 에이스로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냥 나 정도 나이가 든 직장인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싶은 거지.”

“….”

“별거 없잖아. 직장이라는 게 그냥 말 그대로 회사가 원하는 만큼 일해주고 그에 맞는 월급을 받는 곳일 뿐인데, 거기서 뭘 더 얻겠다고 매일같이 출근을 해서 회사에 내 삶을 갈아 넣고, 내 인격을 갈아 넣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셨으니 전사 운영본부장까지 올라가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막상 올라가 보니 별거 없더라는 거야, 내 말은. 내 삶을 갈아 넣고 또 내 인격까지 갈아 넣어서 도착한 위치치고는 내 지난 홍성 생활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별것이 없어서 당혹스러워.”

“쩝, 그래도 이건 잊지 마세요.”

“뭘?”

“부장님을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는 홍성맨들이 상당히 많다는 걸.”

“내가 아니라 공 차장을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는 홍성맨들이 많은 거겠지. 내가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기엔… 지난 시절의 난 너무 악착같았어. 악착같았고, 그래서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공 차장도 그중 한 명 아닌가?”

난 그저 어색만 미소만 지었다.

아니라는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 없는 자리였다.

본인이 인정을 하는 부분이었고, 또 이제 와 지난 일을 들춰낼 이유는 없었으니까.

“결국 남는 건 사람인 거 같다. 내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 같아. 돌이켜보면 우리 영업부에 진짜 내 사람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어.”

“저 있지 않습니까.”

“공 차장 덕에 영업부장 하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공 차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까 아찔해.”

“….”

“중국 법인에 가 있는 손 차장부터 시작해서… 충분히 내가 품으려고 마음만 먹었음 얼마든지 내 사람으로 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악착같아서 사람들이 그 모습에 질려 나가떨어지게만 만들었던 거 같다. 내 주위에 붙어있게 만들지 못하고 말이야. 공 차장은 그러지 마라. 그렇게 홍성에 내 삶, 인격을 다 갈아 넣어 봤는데, 막상 그렇게 해서 상무보님 옆자리까지 서 보니까… 부질없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부장님. 오늘 같은 날은 기분 좋게만 마셔도 될 거 같은데요. 하하하…”

“얼마 전에 이문 본부장님이랑 이런 이야기를 나눴어. 내가 어떻게 상무보님을 모셔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이쪽 업계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신 거 같아서 당혹스럽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러셔. 모신단 생각 하지 말고, 그냥 그동안의 경험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라고. 위에서도 어쩌면 그걸 원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흐음…”

“그런데 여기서 약간의 괴리가 생기는 거지. 그동안 공 차장을 비롯해서 나로 인해 직장 생활이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며 뛰쳐나간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날 거쳐 갔을 거 아냐.”

“그렇죠.”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어떻게 내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해 왔는지를 생각해 보니까… 부끄러워져. 그 스타일 그대로 상무보님을 대할 수가 없겠더라고. 그러면서 현타가 오는 거야. 내가 뭐라고 공 차장이나 다른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업신여기고 또 내 성질대로만 했을까… 그리고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 상무보님한테 뭔가를 알려드리듯,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쳤으면 지금쯤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을까…”

“흐음….”

“홍성이 뭐라고, 그리고 그 홍성 안에서 가진 타이틀이 뭐라고… 그것도 권력이라면 권력이라고 너무 거기에만 취해서 살아왔던 거 같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 나에게 매일같이 욕 얻어먹고 무시를 받았던 공 차장에게 오늘의 내가 너무 미안하네. 사과하고 싶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시는지는 잘 알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들 그렇게 직장 생활 하는 거죠.”

“내가 박 이사님처럼 부장 짬밥이 많아서, 이사님이 영업부를 떠날 때 해주셨던 것처럼 영업부에 큰 선물은 못 해주겠지만… 내가 공 차장한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해주고 가고 싶다. 잊어라.”

“…?”

“그동안 나와의 관계. 그 관계에 얽매여서 혹은 나란 사람에 대한 예우 때문에 전사 운영본부에 휘둘리지 말란 말이야. 앞으로 난 공 차장을 한때 내가 데리고 일을 가르쳤던 내 후임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한 부서를 이끌어가는 부장으로만 대우를 해줄 생각이야.”

“…네.”

“그렇게 해야 나도 오래 할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영업부장 출신이라고 전사 운영본부에 가서도 계속 영업부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음… 안 그래도 시시해지고 있는 홍성 생활, 더 시시해질 것만 같거든.”

그래서 내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 부분은 제가 언젠가는 조심스럽게 한 번 정도 먼저 부탁을 드려야만 하는 부분인 거 같습니다. 먼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푸훕…”

장 부장은 미소를 지었고, 난 그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이거 명심해야 된다, 공 차장.”

“네.”

“나는 전사 운영본부로 가는 순간 상무보님의 라인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거지만, 공 차장은 달라. 공 차장은 공 차장의 라인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펼쳐지는 거야. 그게 좀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배가 아프기도 하지만…. ”

“….”

“배가 아픈 상대가 공 차장이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기대가 된다. 나도 최근에 알았다.”

“뭘요?”

“처음엔 전사 운영본부장 자리가 공 차장에게 갈 자리인데 나한테 온 건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더라고. 예전에 내가 이런 말 한 번 한 적 있었나? 위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다 보인다고. 중국 법인 쪽도 그렇고, 또 프랑스 법인 쪽도 그렇고… 나보다는 공 차장이 훨씬 더 유연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하에 이뤄진 인사였던 거 같다.”

“에이, 무슨 또 그런 말씀을…”

“팩트를 부정하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상대를 기만하는 거야. 그래도 내가 아직 공 차장한테 기만을 당할 정도는 아니잖아?”

“부장님도 참…”

“민망해하거나 미안해할 필요 없다. 난 공 차장 덕에 아직 5년은 더 멀었을 승진을 벌써 해보는 거니까.”

“그게 어떻게 저 때문입니까. 회사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해서 그런 거지.”

“그 회사를 지금 누가 이렇게까지 급하게 키우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부장 연봉 협상할 때 차 한 대 달라고 해라.”

“…!”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 먹어야 직장 생활 하는 맛 나지 않겠어? 공 차장이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웃으면서 주실 거다. 공 차장이 받게 될 첫 부장 연봉은 이미 업계 최고로 측정해놓고 계신 모양이야. 상무보님 통해 살짝 들었어. 기록이라는 건 깨지라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어설픈 기록은 깨는 사람 입장에서도 쾌감이 덜해. 이참에 공 차장 몸값을 확 올려놔. 그래야 밑에 직원들도 덩달아 흥이 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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