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몰랐는데, 우리도 사자였다고
“그런데 본부장님.”
통화를 끝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뭔가 앞뒤가 안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지혜 씨가 별말 안 하던가요?”
-지혜? 무슨 말?
“나크리스가 원래 지혜 씨 담당이었습니다. 지혜 씨가 본사 영업부에 있었을 때요. 김형찬 그 사람이랑 잘 알아요.”
-아, 그렇겠네! 아니 나는 거기까지는 아예 생각을 못 했지. 그냥 김형찬 이 사람이 공 차장이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만 해서 나크리스랑 연관됐던 사람인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어. 그래서 그냥 바로 공 차장한테 확인한다고 전화를 걸었던 거야.
“아….”
그제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김형찬이 자신의 나크리스 이력을 숨기고 접근을 했던 거라면 본부장 입장에서도 이지혜를 떠올릴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처음엔 저도 잘 몰랐는데, 몇 번 정도 그 사람이 고의로 저한테 실수를 하는 걸 보니까 매사 모든 게 다 그런 식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 관계가 너무 쉬운 사람이에요. 모든 게 다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요.”
-실수? 무슨 실수?
난 그걸 김형찬이 나에게 해선 안 되는 실수라고 아직까지도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물론 내게 뭔가 피해를 끼칠 생각으로 했던 행동들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했던 행동들을 나에 대한 선의라고 억지로 이해해줄 마음도 없었다.
CGM의 한국 지부장과 날 억지 비슷하게 연결시키려 했던 그의 행동은 내 입장에선 불쾌 그 자체였으니까.
잊고 살았는데, 다시 그 존재로 인해 그때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래서 난 다시 또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래서 더 그가 내게 했던 행동, 그리고 나크리스에서 했던 무책임한 행동들에 플러스 괘씸죄까지 추가시켜 그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줬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멋진 친구네. 진짜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놓고 지금 나한테 공 차장 이름을 팔았다고? 아니,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본부장님도 곧 느끼시겠지만, 영업 일 하다 보면 상식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아요. 특히 이쪽 바닥에서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세다. 영업이 얼굴에 철판을 까는 건 기본이라지만 이 정도면 사이코패스야.
“근데 문제는 사이코패스가 얼굴에 자기가 사이코패스라고 써놓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제 생각엔 그냥 한번 찔러본 걸 겁니다.”
-뭘?
“그 사람이 홍성의 자세한 내부 사정까지는 다 모르지 않겠습니까? 본부장님한테 제 이름을 판 것 역시도 설마 확인을 하겠어? 하는 은근한 기대가 깔려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확인을 하더라도 운 좋게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을 거고요. 대충 그런 스타일입니다, 그 사람이. 찔러보고 들어간다 싶으면 계속 찌르고, 안 들어갈 거 같으면 그냥 안 되네? 하고 치워버리는. 자기가 찔러서 상대에게 난 스크래치 따윈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죠.”
-보통 그런 사람들은 관계로 인해 스트레스받을 일이 크게 없으니 그런 성격도 월급쟁이들한테는 복이라고 하면 복이지.
“대신 그런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나, 직접적으로 상대하지는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사람들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거죠. 저렇게 사람 관계, 거래처 관계를 막 해도 저 사람은 저만큼 계속 좋은 대우를 받아가며 이직에 성공해서 자기 몸값을 비정상적으로 올려가는데, 성실하게, 그리고 양심적으로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제자리걸음이니….”
-그건 또 그렇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일하는 게 미련한 게 되어버리는 세상이잖아.
“에휴… 또 그렇게 생각하니까 답답하기만 하네요.”
-안 되겠다.
“…?”
-공 차장이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박하게 평가하는 스타일이 아닌 걸 내가 잘 아는데, 이 정도로 공 차장을 울컥하게 만들었다면 내가 대신 교육을 좀 해줘야겠어.
“에이, 하지 마세요. 뭐 하러 그럽니까? 그런 인간한테 에너지, 아까운 시간 빼앗길 이유 없습니다.”
-공 차장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인간은 무시만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피해 주니까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계속 저러는 거 아닐까? 그런데 난 이런 걸 잘 못 참아. 나한테 직접적인 피해를 안 줬더라도 말이야. 거기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지금 날 바보로 만들었잖아.
“…!”
-만약 내가 공 차장한테 그 친구에 대해 안 물어봤음 어떻게 될 뻔했어? 물론 뭐 중간에 공 차장이라는 존재가 끼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단번에 미팅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렇게 확인 전화까지 하는 거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농락당한 기분이네.
“그 사람이 그런 걸 참 잘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님 자기는 별생각 없이 하는 행동인데, 그 행동들이 상대로 하여금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 사람과 엮일 때마다 내가 바보가 되는 느낌을 종종 받게 되는 거 같더라고요.”
그리고 난 또 한 며칠 정도 김형찬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쳐내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았으니까.
박 이사는 이번 CGM 건에 자신의 홍성 생활을 모두 건 듯해 보였다.
수시로 영업 마케팅부와 영업 기획부 사무실로 내려와 각 브랜드 본사와 접촉 중인 팀장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나와 장 부장은 지금 잡은 승기를 최대한 활용해서 어떻게든 CGM에게 치명타를 먹여야만 하는 입장이었고.
그냥 한국 시장에서 쫓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CGM 본진에 폭탄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몰랐는데, 우리도 사자였다고.
그동안은 CGM 너희만 사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우리도 사자였다고.
그런데 그런 우리를 너희가 그동안 너무 무시를 해왔고, 그 무시의 정도가 지나쳐 도발로 이어졌다며, 그래서 이제 우린 더 이상 방어만 하는 게 아니라 공격이라는 걸 함께 해볼 생각이라는 입장을 정확하게 보여줘야만 했다.
“이렇게 전화 통화로 하는 사과만으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엔 귀사의 어정쩡한 입장으로 인해 한국 시장에서 저희 홍성이 감수해 왔던 피해가 너무 큽니다. 당장 매장 매출만 해도 얼마나 떨어졌습니까?”
CGM을 초토화시키기 위해선 브랜드 본사들을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브랜드 본사들의 입장에서도 홍성은 더 이상 한국이라는 작은 시장의 컨트롤 기업이 아니었다.
홍성이 CGM을 한국 시장에서 완벽하게 걷어내버리면 중국 시장은 만토바가 장악을 하게 되는 거다.
아직은 브랜드 본사가 직접 들어가는 걸 제외하고는 홍성을 통한 만토바 채널밖에 없으니 그동안 CGM만 믿고 CGM이 중국 채널을 뚫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브랜드들은 어쩔 수 없이 만토바 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는 그림.
꼭 중국 시장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CGM의 이미지가 추락하면 추락할수록 업계 내에서 만토바 창고가 가지는 파워는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런 만토바 물건들을 중국으로 센딩하고 있는 홍성이었기에 홍성은 더 이상 브랜드 본사들의 입장에선 일반적인 컨트롤 기업이 아니었다.
한성이 해왔던 마진 장난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브랜드들의 본사 고위 담당자들이 직접 홍성 본사를 방문을 하겠다고 앞다투어 일정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CGM 본진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릴 준비가 완성되어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며칠간 정신이 없어서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김형찬으로 인해 1차 웃음 폭탄이 터져버렸다.
쁘띠토널 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지혜가 보기와는 다르게 깡이 있네.
“네?”
-물론 내가 눈치 보지 말고 지르라고 하긴 했지만… 우와, 진짜 CGM 아동복 디렉터를 앞에 두고 입 한 번 뻥긋 못 하게 만들어버리더라.”
뭔 소린가 싶었다.
-내가 걔네들을 불렀어. 우리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진짜 만나셨습니까?”
-쌍판때기를 한번 보고 싶더라고.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지… 그랬더니 이 인간 이게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아동복 디렉터를 데리고 왔네?
“헐… 양심만 없는지 알았는데, 생각에 눈치까지 없는 인간이었네요.”
-자기 딴에는 기회다 싶지 않았겠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기가 다리를 놓아서 홍성과 CGM이 파트너십을 형성하게 되면 어쩌면 지금 한국에서 터진 이슈가 조금은 덮어질 수도 있겠다고 기대를 했겠지.
“그래서요?”
-자기 윗사람을 하나 정도 데리고 올 줄은 알았는데, 본사 아동복 디렉터를 데리고 왔더라고. 그래서 난 지혜를 불렀지. 그랬더니 지혜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인지 대놓고 그쪽 디렉터 앞에서 김형찬을 디스하는데… 진짜 물건이다, 지혜.
“나크리스로 인해 정직원까지 달 수 있었는데, 그런 나크리스가 그 인간으로 인해 벼랑 끝으로 떨어질 뻔했으니까요.”
-그냥 난 이 한마디만 해줬어. 중간에 그런 에피소드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알았음 이런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거다. 상식적으로 우리 홍성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전적이 인물과 어떻게 같이 일을 하겠냐. 우리 입장에서도 CGM은 정말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난 이 사람이 했던 전적이 무서워서 당신들에게 우리 물건을 줄 수가 없다. 아마 나가리 될 거야, 김형찬은. 그쪽 디렉터 표정이 그랬어.
“그래서 진짜 나가리를 시키고 다시 컨택을 해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난 그 인간 때문에 같이 일을 못 하겠단 말을 한 거지, 그렇다고 그 인간 나가리시키면 같이 일을 하겠단 말은 안 했어.
“크흐…
-그건 그렇고 공 차장.
“네.”
-지혜 나한테 줘라. 딱 1년만 더 데리고 있자.
“아, 그걸 왜 자꾸 저한테 그러십니까? 본인한테 말하세요.”
-내 말을 안 들으니까 하는 말 아냐.
“본부장님 말도 안 듣는데, 제 말을 듣겠습니까?”
-아, 그러지 말고 쫌…
“다음 기수엔 더 괜찮은 직원들로 엄선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우와… 진짜 이럴 거야?
“그런데 참 듣기는 좋네요?”
-뭐가?
“본부장님이 지혜 씨를 보내기 싫어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말이죠.”
-지금 누구 약 올려?
“일 잘하죠?”
-일 잘하는 친구들이야 널리고 널렸지. 특히 여기에 있는 한국 직원들은 다들 에이스야. 그런데… 지혜처럼 중심이 바로잡힌 친구는 찾기 힘들어.
“…?”
-유혹이 많잖아,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대부분이 어떻게 하면 유럽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고 또 대부분이 유럽이란 곳에 있다 보니 고삐가 풀려. 그런데 지혜는 자기 중심이 딱 잡혀 있어. 자기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여기서 뭘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정확하게 잡혀 있어. 아직 내 앞에서 다리도 안 꼬아 앉는다. 여긴 한국이 아니니까 여기 문화에 맞춰서 좀 편하게 하라고 해도 자긴 그렇게 하는 게 편하대. 그러니 내 눈에 안 예쁠 수가 있겠어?
“그런 걸 참 잘하는 친구죠. 안 가르쳐줘도….”
-이런 게 어디 가르친다고 되나.
“저 역시 지혜 씨가 와주면 좋은 입장이기 때문에 제가 지혜 씨에게 거기에 더 남아 있으라는 말은 못 하겠지만, 본부장님이 정말 지혜 씨가 필요하다면 잘 한번 잡아 보세요.”
-됐어, 이 사람아. 내가 얼마나 꼬셔 봤게. 안 통해. 어디 본사에 꿀을 발라놓았는지, 이럴 거면 여긴 왜 지원해서 왔나 몰라.
“아마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
“계약직 출신도 해외 파견 근무를 할 수 있다는 걸… 그걸 이미 해냈으니 다시 돌아오고 싶은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