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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75화 (175/325)

# 175

비교만 안 해도 맘 편하잖아

연말이라 뒤숭숭한 건 너무나 당연한 건데, 특히나 이번 연말은 해답이 없는 문제들로 더 뒤숭숭했다.

안 팀장이 박기태와 함께 모리엘츠의 연말 전시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 출장을 떠나 있는 상황이었다.

장 부장이 상무보를 모시고 떠나는 출장길에 안 팀장과 박기태가 포함이 된 거였다.

모리엘츠는 매년 연말에 연말 파티를 열고 그 파티에서 다음 해에 공개될 컬렉션들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 연말 파티에서 어라별 전시 순서를 정하고, 모리엘츠를 공유 유통하는 에이전시들끼리 인맥을 형성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홍성에선 이번이 첫 전시 참석이라 특별히 상무보가 직접 참석을 한 거였다.

모리엘츠가 별도로 카탈로그를 제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카탈로그라는 게 필요가 없는 브랜드다.

모리엘츠는 다른 브랜드들처럼 시즌별 컬렉션이라는 게 없으니까.

그냥 한 해 열심히 제작한 컬렉션들을 가지고 다음 해 열심히 판매를 하는 게 전부다.

모리엘츠는 복잡하지 않다.

복잡할 이유가 없는 브랜드다.

어중간한 브랜드들이나 작전이 필요하고 시장 파악도 함께 해야 되기 때문에 복잡한 거지, 모리엘츠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브랜드들은 유통이나 마케팅이 복잡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냥 브랜드 자체가 곧 마케팅이고 또 유통인 셈이니까.

컬렉션 대부분이 여성 이브닝 파티 드레스다.

결코 대중적인 디자인이나 가격이 아니기 때문에 1년간 열심히 다음 해 컬렉션을 준비해 놓고, 유통에 관해서는 에이전시에게 맡긴 뒤 곧바로 그다음 해 컬렉션 제작에만 집중을 하는 브랜드.

그게 바로 모리엘츠다.

물론 홍성의 최대 관심사는 그 모리엘츠 연말 파티에서 내년 전시 1순위가 홍성이라는 발표가 나는 순간 CGM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였다.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해서 상대의 썩어 들어갈 표정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내 입장에선 그것보다 장 부장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영업 기획부를 컨트롤하는 게 중요했다.

“미팅 한번 합시다.”

말이 팀장 미팅이지, 팀장 미팅에 참석한 진짜 팀장은 양 팀장뿐이었다.

2팀에선 안 팀장을 대신해 장향은이 참석했고, 해외 영업부에선 최 대리가 참석을 했다.

그리고 미팅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박 이사로부터 내려온 지시 사항 몇 개를 전달하는 게 전부인 미팅이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직원들 대부분이 뭔가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쳐내야 할 일은 연말이라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일이 손에 잘 안 잡힐 시즌이긴 하다.

그 부분에 대해 팀원들 관리를 당부하기도 할 겸, 팀장 미팅을 하자고 했던 거다.

“네, 신경 쓰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케이, 난 여기까지. 그럼 다시 올라갑시다.”

난 간단하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미팅을 끝내자고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

“저기….”

양 팀장과 장향은이 거의 동시에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투로 손을 들었다.

난 차례대로 두 사람을 쳐다봤고, 두 사람 역시 서로를 쳐다봤다.

“장 대리 먼저 해요.”

“아닙니다. 팀장님 먼저 말씀하세요.”

“아, 난 여기서 할 말은 아니고 차장님께 따로 드려야 하는 말이라서….”

“저도 그런데….”

난 다시 난처해하는 두 사람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저는 나중에 해도 됩니다.”

양 팀장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장향은의 표정.

힘들게 용기를 냈다가 그 용기를 낸 걸 후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장향은과 최 대리가 회의실을 빠져나간 뒤 난 여전히 장향은이 신경 쓰였지만, 일단 양 팀장의 말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뭡니까? 사람 겁나게.”

하지만 양 팀장은 피식하고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차 대리 말입니다.”

차 대리.

현재 양 팀장의 기획 1팀 대리다.

양 팀장이 내년 상반기에 차장 진급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팀장으로 승진을 시켜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차 대리가 왜요?”

“많이 버거워하네요.”

“버거워해요? 뭘요?”

“음…”

양 팀장은 입을 꼬옥 다문 채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될 거 같은데, 부담감이 큰 모양입니다.”

“…?”

“처음부터 영업부 소속이 아니었잖아요. 맨파워가 부족해서 급하게 영업부로 트랜스퍼된 친군데, 영업 실무를 다 배우기도 전에 영업부로 트랜스퍼된 지 1년도 안 돼서 팀장을 달아야 한다는 게 자기 입장에선 살짝 스트레스인 모양이에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양 팀장이 엄한 소리를 한 게 아니었다는 거다.

지금 현재 내가 부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양 팀장과 안 팀장, 이 두 사람뿐인데 여기서 양 팀장이 갑자기 어디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서 가겠다고 해버리면 내 입장에선 돌아버리는 거지.

물론 지금의 홍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이유는 전혀 없겠지만, 그만큼 내가 양 팀장에게 의지하고 있는 부분이 크다 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잠시나마 속으로 했던 모양이다.

“스트레스받을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지금 하던 대로만 해주면 되는 건데….”

“근데….”

양 팀장은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인 거고, 솔직하게 차 대리의 입장에 서서 차 대리가 왜 그런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지 인정할 건 인정해 주자고 말했다.

“지금이야 저라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꾸역꾸역 차고 나가는 거지, 저까지 차장 달고 빠져버리면 차 대리는 신입 둘만 데리고 팀을 이끌어야 합니다.”

“흐음…”

“한 명은 입사 1년 차, 다른 한 명은 입사 4개월 차 생신입…. 대리급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그 둘만 데리고 차 대리 혼자 H.I 편집샵과 Kidshub를 담당한다는 건… 사실상 무리라고 봐야죠.”

“지혜 씨 올 거잖아요, 곧. 어차피 지혜 씨가 내년 본사 복귀할 때 되면 계약직 기간 포함시켜 입사 3년 차예요. 우와, 시간 빠르긴 하다. 암튼, 지혜 씨 정도면 대리 승진 노려볼 만하지. 출발을 계약직으로 해서 그렇지, 어쨌든 해외 파견 근무도 한 번 해봤고… 그리고 차 대리 입장에서도 이 얼마나 좋은 기회예요? 회사가 커지고 있고, 커지는 만큼 사람은 필요하고. 여기서 자기가 조금만 욕심을 내면 다른 회사에 비해 1, 2년 정도 빨리 승진이 가능한 상황 아닌가?”

“저도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긴 했는데….”

“그런데요?”

“자신이 없는 모양이에요.”

자신이 없다라…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걸까?

보통 승진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남들은 못 해서 안달이고, 또 남들은 그걸 하기 위해, 그게 목적이기에 회사에 영혼까지 갖다 바치는데, 이 좋은 기회 앞에서 왜 자기 팀장에게 자신의 승진에 불리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을까?

“그… 차 대리가….”

“아, 쫌. 뭘 그렇게 뜸을 들여요?”

“조금 예민한 부분이라서요.”

“그냥 말씀하세요.”

“최근에 약을 먹고 있답니다.”

“약이요? 어디 아픕니까?”

“그… 공황장애가 있답니다.”

“…!”

정확하게 그 증상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심심치 않게 들어본 병명이었다.

“저도 어제 처음 들었습니다. 생전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술 한잔 사 달라고 하길래 뭔가 했더니, 어제 그 말을 하더라고요.”

“아…”

“근데 정작 술을 사 달라고 한 사람이 술은 입에도 못 대더라고요. 한 달 전쯤에 차 대리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전화도 안 받고 2시간 늦게 출근했던 적 있지 않습니까?”

“기억나요.”

“그때 출근길에 갑자기 공황을 맞아서 도로 한복판에 차 세워 놓고 한참을 가만히 있어야 했답니다. 그래서 응급실까지 갔다가 오느라 연락도 못 하고 2시간이나 늦게 출근을 했던 거라고… 저는 또 그런 것도 모르고 응급실까지 갔다 온 사람을 상대로 소리를 질렀으니….”

“아니, 그런 일이 있음 솔직하게 말을 하면 되지.”

“일종의 정신병이잖아요, 그것도. 말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흐음…”

“그렇게 한 달 정도 혼자 끙끙 앓다가 도저히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던지, 어제 저한테 털어놓더라고요.”

“아니, 근데 공황장애라는 게 정확하게 뭡니까? 그거 막 엘리베이터같이 갇힌 공간에서 갑자기 식은땀 흘리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영화 같은 데서 보면 그런 거 같던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고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오는 거라고 하던데,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아직 정확하게 그 원인이 밝혀진 건 아니라고 하네요. 특히 자려고 침대에만 누우면 밤마다 호흡 곤란이 생긴다고 하네요. 가슴 한쪽이 뻐근해서 심장이나 폐 쪽 질환인가 걱정이 돼서 병원에 가봤는데, 검사를 해봐도 몸엔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나왔다고 하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평소 차 대리한테 스트레스 많이 주셨습니까?”

“성격 문제인 거죠. 워낙에 실수를 안 만들어 내려고 하는 완벽주의자가 되다 보니, 혼자 생각도 많고 퇴근 후에도 계속 회사 일을 생각하고… 거기다 승진에 대한 욕심까지 더해지다 보니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어제 차 대리가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하던가요?”

“뭘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 건 아니고… 일 욕심이 전혀 없는 친구는 아니니까… 근데 현재 몸 상태가 그렇다 보니 이해를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는 것도 알고, 또 그만큼 기회가 생겼다는 것도 알겠는데… 차 대리는 회사의 성장 페이스를 따라갈 자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우선 거기까지만 듣고 양 팀장과 함께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기획 1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업무 중에 있던 차 대리의 양쪽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살짝 안마를 해줬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 차 대리에게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건강을 잃으면 나가립니다.”

“…네.”

양 팀장과 눈을 마주친 차 대리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람이 그렇게 미련하다고 하잖아요. 잘 살아 보겠다고 열심히 일만 하다가 망친 건강. 나중에 그 건강 되찾는 데 번 돈 다 꼬라박는다고… 우린 그렇게 미련하게 일만 하지 맙시다.”

“네, 감사합니다.”

“차 대리, 좀 쉬고 오세요?”

“네?”

차 대리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이번에 나크리스 워크샵 있지 않나?”

“그거 티오 다 채워졌습니다.”

양 팀장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하나 더 만들어줄게요. 나크리스라면 우리한테 그 정도는 해줘야지. 차 대리,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한 며칠 쉬다가 와요.”

“하지만 지금 현재 저희 팀….”

“그냥 쉬다가 오라고. 차 대리 하나 빠진다고 세상이 무너지나? 차 대리 자리 비우는 동안 내가 커버하면 돼. 나 못 믿어요?”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근데, 차 대리. 그거 알아야 돼요. 차 대리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부담감 때문에 멈추잖아요? 그럼 차 대리 위에 사람들은 아무 상관 없어. 하지만 차 대리 밑에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지. 차 대리가 잠시 멈춤으로 인해 뒤에 사람들이 전진을 못 하니까.”

“…!”

“그게 회사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밀려가요. 자연스럽게 떠밀려갈 수 있는 것도 능력이고 운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만 내려놓으세요. 지금의 기획 1팀과 앞으로 차 대리가 맡아 나가야 할 기획 1팀을 비교하지도 말고. 그 비교만 안 해도 맘 편하잖아. 양 팀장이 너무 잘하는 거야. 그러니까 차 대리는 그냥 되는 대로만 하면 돼.”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획 2팀으로 가서 장향은을 불렀다.

“아까 무슨 말 하려다가 만 거였어요?”

“아닙니다, 차장님.”

“아니긴… 아까 뭔 말 하려고 했었잖아요.”

“아니에요.”

“…?”

“진짜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며칠이 흘러 파리 출장을 떠났던 안 팀장과 박기태가 돌아왔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서 안 팀장이 내게 개인 면담을 신청해왔다.

“뭔데요?”

“장 대리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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