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저한테는 안 통합니다
퍼니 가이…
모리엘츠의 마케팅 디렉터, 타미 총게는 지난주 그가 만났던 안 팀장을 퍼니 가이라고 부르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던지, 그저 그 웃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함께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비즈니스로 만난 상대에게 그 상대의 동료를 무슨무슨 가이라고 부르는 건 어쩌면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난 그렇게 배웠다.
물론 그것 역시 한국 사회를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한국 직장의 구닥다리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그렇게 배웠고, 그럼에도 안 팀장을 퍼니 가이라고 부르는 총게의 태도는 절대 무시가 아닌 오히려 안 팀장으로 인해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홍성에게 무척 호의적인 입장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햄버거를 들고 남자 둘이서 부티크 입구에서 한참을 서 있는 거 아니겠어요.”
“…네?”
순간 뭘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그걸 먹으면서.”
“아…”
하지만 이내 안 팀장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총게 앞에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어째서 그 부끄러움이 내 몫이어야 하는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였다.
“저러다 가겠지… 했어요. 종종 있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10분, 20분… 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하하하… 그래서 제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드에게 무전을 쳤어요, 앞에 뭐냐고. 웨이팅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린 그 웨이팅이 대기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예약을 말하는 거거든요.”
“…네.”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것 같다는 사실이 날 더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냥 들여보내라고 했어요. 입구 앞에서 그렇게 버티고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 보기에도 별로 안 좋잖아요.”
“…하, 하, 하하하…네, 그렇죠.”
“정장 차림인 걸로 봐서 어디에서 출장을 온 거 같긴 한데, 난 업계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그냥 지나가다가 호기심에 한번 들어와 보려고 하는가 보다… 하는 정도로만 생각을 했지. 보통 그런 사람들은 들어와서 가격 보면 놀라서 금방 나가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들여보내라고 한 다음에 잠시 업무 볼 거 보고 다시 내려왔는데, 그때까지도 계속 샵에 있더라고요? 그것도 우리 직원이랑 장난까지 쳐가면서.”
그래, 이런 그림이어야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그런데 정말 다행이었던 건 총게가 그냥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안 팀장을 호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뭔가 이상해서 우리 매장 직원이랑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옆에서 가만히 들어 보니까 업계 사람이더라고요.”
“하하하… 종잡기 힘든 사람입니다. 악의가 있거나 뭔가 계산이 있어서 그랬던 건 절대 아니었을 겁니다.”
“난 아주 보기 좋던데요?”
“…?”
“물론 이게 생각하기에 따라서 상당한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이잖아요.”
“네, 그렇죠.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요. 전 그날 하루, 미스터 안 덕분에 상당히 유쾌할 수 있었어요. 사실 미스터 안의 말이 맞지.”
“무슨….”
“대기를 해야 한다고 해서 부티크 입구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대기를 했고, 또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해서 예약을 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왜 처음부터 예약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냐면서 가드한테 농담을 할 때엔 아무도 당황해서 대답을 못 했다니까요? 하하하… 웃는 얼굴로 우리 시스템을 크게 한 방 먹인 거지. 재밌는 사람이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먼저 커피 한잔 같이 하자고 했고.”
“아, 네… 그러셨군요.”
정말 안 팀장이라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별생각 없이,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항상 자신이 있고 또 그 상대가 누구라도 크게 주눅 들지 않는 안 팀장이니까.
나?
난 절대 못 그러지.
난 얼굴이 얇아서 절대 안 팀장처럼 못 한다.
양 팀장은 더더욱 못 하고.
이게 우리 편이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좋은 결과를 이끌어 냈으니까 망정이지 자칫 회사 얼굴에 똥칠을 할 수도 있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총게는 내가 속으로 얼마나 식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려가며 말을 이어갔다.
“현재 제가 여기 부티크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는 마케팅 디렉터라고 밝혔더니 자기 명함을 하나 주면서 홍성 인터내셔널 소속이라고 하는 거예요.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던데, 정말 죄송스럽게도 그 순간엔 기억이 잘 안 나더라고요. 그런데 미스터 안이 해주는 설명을 듣고 나니까 작년에 몇 번 정도 CGM 측 관계자한테 들었던 기억이 나는 거예요. 내가 기억하는 홍성이 그 홍성이 맞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하더라고요.”
한참을 지난주에 있었던 해프닝을 내게 설명하던 총게가 웃음을 간신히 지워내며 말했다.
“샵에서 고객을 상대로 품위를 지켜가며 제품을 소개해야 하는 리테일 세일즈가 아니라면 밖으로 돌아다니는 세일즈는 미스터 안처럼 조금은 즉흥적인 판단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어요. 그럴 수 있는 열정이 부러워질 나이가 되어서인 건지 예전엔 그런 유형을 체질적으로 꺼렸는데… 그 퍼니 가이에겐 참 이상한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러셨군요. 상당한 무례하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좋게 봐주셔서 정말 다행이고 또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
“홍성의 이런 빠른 실행력에 살짝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때론 과연 저 높은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이리 재고 저리 재며 계산을 하고 있는 도중에 내가 그 앞에 서 있단 이유만으로 문이 열릴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무작정 넘으려고만 하면 꽤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높은 벽인데, 저 아래에 문이 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벽이란 건 뛰어넘어야만 하는 거란 생각에 높이만 측정해 보고 있었는데, 안 팀장은 어딘가에는 그래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고 다른 시각으로 그 벽을 살폈던 건 아니었을까.
그게 비록 운이었을지라도, 그 운은 내 기준에선 실력이다.
“저는 이렇게 빨리 만남이 이뤄질 거라고는 며칠 전에 답장 메일을 쓸 때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저희 제품들을 SC 대행을 해주는 업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네요. 아무리 빨라도 다음 주에나 오겠지… 했는데….”
“SC를 대행하고 있는 업체들이라면… 현재 CGM이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음… 유럽과 한국, 일본 그 외 홍콩, 태국이나 아시아 쪽은 CGM이 전담을 하고 있고 그 외에도 몇 군데 대행업체가 더 있습니다.”
몰랐던 사실이다.
이건 아마 나뿐만 아니라 장 부장, 박 이사 역시 모르고 있을 거다.
그만큼 모리엘츠는 브랜드 급은 월등하지만 우리 홍성이 주력하고 있는 브랜드들의 급에 비해서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브랜드였고, 그러다 보니 너무나 당연하게 그냥 저런 브랜드가 업계 탑이지… 하며 숙지 정도만 하고 있었던 게 전부였다.
“그리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모리엘츠는 아시안 테이스티가 아니죠. 주 고객은 아랍입니다. 7, 80퍼센트 이상의 매출이 모두 아랍 쪽에서 올라오고 있어요.”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CGM 역시 몇 해 전부터 한국과 일본 시장에 대해선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고… 몇 해 연속 매출이 제로를 찍고 있는데, 그 비용을 선부담하고 판매가 이뤄졌을 때에만 커미션을 가져가는 에이전시에게 팝업 전시로만 제품을 판매하는 브랜드 입장에선 강하게 푸시를 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거기다 중국 시장은 여전히 막혀 있는 상황이고…”
“그런데 어째서 아직 중국 시장을 못 들어가고 있는 겁니까? 모리엘츠 정도라면….”
“이게 숙제죠. 그동안은 홍콩, 마카오로 중국 고객들을 유인해서 매출을 올려왔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 길마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고… CGM이 몇 해 전부터 중국 시장에 진출을 한다, 진출을 한다 말만 저렇게 하고 있지 아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고…”
“아, 그러는 과정에서 한국이 자연스럽게 배제가 됐던 거군요, 그동안.”
“저희 입장에선 한국이나 일본은 없는 시장이나 다름없기도 하고요. 오히려 한국과 일본보다 한 번씩이지만 태국에서 매출이 잡힐 때가 있어요.”
“아까 CGM 말고도 귀사의 모리엘츠를 SC 대행하고 있는 업체가 몇 군데 더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팝업 전시 순서는 어떻게 정해지는 겁니까?”
“한 해 전시 스케줄은 저희가 정합니다. 그런 다음 업체들과 스케줄을 조율해가며 생략할 곳은 생략을 하고 또 기간을 연장할 곳은 연장을 하는 거죠. 절대 두 군데에서 동시에 진행은 못 합니다.”
“그야 당연하죠. 한 번에 움직이는 밸류가 얼만데…”
* * *
출장을 나와 있는 동안 이미 모리엘츠 측과의 미팅 내용에 대해선 장 부장에게 다 보고를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장 부장은 월요일 출근과 동시에 박 이사를 찾아가서 진행을 하라는 컨펌을 받아냈다.
물론 걸리는 게 한 가지 있긴 했다.
전 제품 컨사인먼트로 받기 때문에 재고를 떠안을 위험은 전혀 없지만, 팝업 전시에 들어가는 비용 부분을 우리 홍성이 부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매출을 올리지 못할 경우 마이너스 매출이 잡힐 수밖에 없고, 지난 몇 년간의 국내 매출이 제로였다는 점을 감안을 한다면 마이너스 매출을 피하기는 힘들다는 부분.
바로 이 부분이 재무 리스크팀이 줄 사업 불합격 등급을 피할 수 없는 요인이 되는 건데, 사실상 다른 브랜드가 아니라 모리엘츠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게 장 부장의 예상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너무나 당연한 거였고.
“안 팀장님.”
“네, 차장님.”
“모리엘츠 건 맡으세요.”
“네?”
“모리엘츠 건 안 팀장님이 맡아 나가시라고요. 재무 리스크 팀에서 아직 등급 판정은 안 나왔지만, 이사님이 무조건 진행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으니까 어떻게든 될 겁니다.”
“….”
“미스터 총게한테 메일 한 통 보내고, 프로젝트 진행하세요. 아마 다른 브랜드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할 겁니다. 미스터 총게를 한국으로 초대하는 것보다는 저희 쪽에서 넘어가는 게 맞지 않겠어요?”
“아니 전 그냥…”
“안 팀장님 프로젝트입니다.”
“에이… 차장님이 진행하셔야죠.”
“왜요?”
난 싱긋이 웃으며 물었다.
“차기 영업부장님 되실 분 아닙니까. 이 정도 잭팟 정도는 있어야 여러모로 타 부서 보기에도 영업부의 면이 살고… 또 부장 파워가 살아있어야….”
“박 대리.”
난 옆에서 나와 안 팀장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박 대리에게 말했다.
“잘 보고 배워요.”
“네? 뭘요?”
“상사를 자기 입맛대로 일하게 만드는 법. 이거 능력이거든. 우리 영업부에 그 스킬을 안 팀장님만큼 능글맞게, 그리고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안 팀장님 어떻게 합니까? 저한테는 안 통합니다.”
“…!”
“브랜드 따내는 것만 잘하면 뭐 합니까? 진행을 시킬 줄 알아야지.”
하지만 난 내 진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환하게 웃었다.
“오늘 미스터 총게한테 확인 메일 주기로 했습니다. 안 팀장님이 직접 컨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