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너무 잘해도 됩니까?
파리 출장에서 타미 총게를 만나 미팅을 하는 동안 난 왜 안 팀장이 일을 이렇게까지 꼬아놓았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됐다.
안 팀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공부를 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만약 안 팀장이 파리 출장에서 있었던 타미 총게와의 만남과,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내게 전달했더라면 오히려 모리엘츠와의 계약은 훨씬 더 빨리 성사됐을 수가 있다.
모리엘츠의 입장에서 한국 시장은 비어 있는 시장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한국 시장에 대한 팝업 전시 권한을 가지고 있는 CGM 역시 몇 해 동안 한국 시장을 제외시키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모리엘츠는 CGM에게 한국 시장에 더 이상 팝업 전시를 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어볼 자격이 있고, 만약 거기서 CGM이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면 얼마든지 한국 시장에 한해서 다른 파트너를 구해 보겠다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수가 있다.
여기서 모리엘츠와 CGM 사이의 갑을 관계를 따져볼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굳이 갑을을 따지자면 당연히 모리엘츠가 갑이겠지만 내가 직접 타미 총게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모리엘츠와 CGM의 관계는 말 그대로 파트너의 개념이지 계약으로 묶여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CGM 입장에서도 모리엘츠 팝업 전시는 크게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었을 거다.
타미 총게를 만나보기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모리엘츠의 팝업 전시 권한을 CGM이 모두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알짜라고 할 수 있는 아랍 쪽엔 CGM이 아닌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전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CGM 역시 모리엘츠와의 관계 혹은 부수적인 이득을 위해 모리엘츠를 컨트롤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한국 팝업 전시 권한에 한해서만큼은 얼마든지 홍성이 비집고 들어가 볼 틈이 있었던 거다.
아무리 SC에 대한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홍성은 명색이 국내 1위 컨트롤 기업이다.
거기다 팝업 전시라는 것도 우리 홍성이 직접 하는 게 아니라 갤러리아 측 관계자를 통해 조금 알아보니까 디테일을 대행해주는 업체가 따로 있었고.
말 그대로 약간의 코스트를 감수하면서 모리엘츠와 팝업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유통 판과의 다리 역할만 해주면 되는 거였다.
판매가 하나도 되지 않아 마이너스 매출을 계속 찍게 되더라도 홍성의 입장에선 전혀 아쉬울 게 없다.
모리엘츠를 컨트롤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마케팅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부분이니까.
타미 총게와 미팅을 하는 동안 생각이 거기까지 발전이 되자, 왜 안 팀장이 타미 총게를 만나게 된 정확한 상황과 또 타미 총게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내게 전달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타미 총게는 이미 안 팀장과 커피를 한잔 같이 마시며 내게 오픈했던 내용들을 모두 이야기해 줬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홍성이라는 컨트롤 기업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한국에서 더 이상 팝업 전시를 하지 못하게 된 현재 상황이 살짝 아쉽다는 입장도 안 팀장에게 전달했다고 하고.
또 만약 CGM에게 한국 팝업 전시 권한을 다른 로컬 기업에게 맡겨보겠다고 통보를 하더라도 CGM은 그에 대해 섭섭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말의 책임감으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을 가질 거라는 자신의 짐작도 전달을 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
타미 총게와 미팅을 하는 내내 난 머릿속으로 안 팀장이 하고 있는 생각을 읽기에 바빴다.
타미 총게와의 미팅은 처음부터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거기서 난 타미 총게와는 달리 계약을 하자, 말자 하는 확답을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건 타미 총게 역시 잘 알고 있었고.
그저 난 안 팀장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던 타미 총게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 보기 위해 출장길에 올랐던 거지, 계약 여부에 관해선 아직 아무런 권한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의심이 들었던 거다.
모리엘츠의 입장이 이런 거라면, 그리고 그 입장을 이미 타미 총게가 안 팀장에게 밝힌 상태라면 왜 안 팀장은 나한테 정확하게 전달을 하지 않았던 걸까?
“….”
그리고 그때부터 난 안 팀장이 디테일은 조금 떨어지지만 진짜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부장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또 불안하시다면 그냥 없던 일로 해도 무관합니다.”
지난주 안 팀장과 함께 장 부장을 찾아갔을 때, 안 팀장은 자신이 잡아 온 모리엘츠 건을 앞에 놓고 고민을 하고 있던 장 부장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냥 없던 일로 해도 무관하다고.
그런데 이건 안 팀장의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왜?
안 팀장은 애초에 만약 홍성이 모리엘츠를 잡게 되더라도 자신이 직접 모리엘츠 건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해도 돈이 안 되니까.
회사 차원에서야 무조건 모리엘츠를 잡으면 좋지.
하지만 그 프로젝트를 쳐내야 하는 담당 팀장의 입장에서는 굳이 할 이유가 없는 프로젝트다.
성과급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프로젝트.
그렇다고 그 프로젝트로 인해 파생되는 이득을 안 팀장이 조금이라도 가져갈 수 있느냐?
만토바 제품을 국내에서 컨트롤하는 게 주요 업무인 기획 2팀의 입장에선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업 기획부가 아닌 영업 마케팅부만 좋은 일을 시켜주는 거다.
모리엘츠를 홍성이 컨트롤하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그걸 무기로 더 많은 굵직한 브랜드들을 따와서 자기네 실적을 올릴 수 있을 테니.
생각이 거기까지 발전이 된 안 팀장.
하지만 모리엘츠는 절대 놓쳐선 안 되는 브랜드가 확실하고, 그래서 그걸 공 차장의 성과가 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보자… 하고 결심을 했을 거다.
차장이야 일반 팀장들과 달리 영업부 전체 매출 대비 성과급을 가져가니까.
아무리 같은 영업부라도 자신이 잡아 온 기회를 영업 마케팅부에 홀라당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또 모리엘츠라는 말도 안 되는 브랜드를 내가 내 성과로 만들어 성사를 시키면 아무래도 난 안 팀장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함께 가져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안 팀장이 간과했던 부분이 하나 있다.
난 절대 남의 실적을 내 실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부하 직원의 실적을 내 실적으로 슬쩍 바꾸는 건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한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꼼수를 쓰겠나.
아무리 안 팀장이 그린 큰 그림 속에 나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해도 그건 내가 사양한다.
내가 파리 출장에 안 팀장을 데리고 가지 않았던 건 안 팀장이 바빴기 때문이지 이걸 내 실적으로 만들기 위함이 절대 아니었다.
차장, 부장은 코치, 감독의 위치지 절대 플레이어가 아니다.
난 더 이상 중요한 경기에서 결정골을 넣어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트라이커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어떤 플레이어라도 결정적인 찬스가 왔을 때 그걸 골로 연결시킬 수 있는, 그런 멀티 플레이어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감독이 되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 안 팀장과 단둘이 회사 밖에서 점심을 먹으며 내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해줬다.
그리고 안 팀장이 그렸던 큰 그림 역시 내가 했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고.
“차장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제 생각이 좀 짧았던 거 같네요.”
“으으음… 아니에요.”
안 팀장은 평소 그답지 않게 진지했다.
그리고 난 그런 안 팀장에게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대답했고.
“난 오히려 안 팀장님이 절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고마운데…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만 또 아닌 건 아닌 거잖아요. 안 팀장님 역시 처음부터 모리엘츠를 어떻게 잡아 보겠다고 거길 찾아간 건 아니시겠지만, 어쨌거나 안 팀장님이 지금 이 판을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그럼 당연히 안 팀장님 프로젝트가 되어야지 제 프로젝트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차장님.”
“네.”
“다 맞는데… 차장님께서 오해하고 계시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
“뭐요?”
“모리엘츠가 매출이 안 올라올 거기 때문에 기획 2팀 성과급과는 무관한 프로젝트라 제가 그걸 안 하려고 했던 건 절대 아닙니다.”
“….”
“저 그렇게 잔돈에 목숨 거는 스타일 아닙니다. 그냥… 음… 이건 어쩌면 차장님은 이해를 못 하실 수도 있어요.”
“뭘요?”
“한 번씩 양 팀장이랑 둘이 같이 술 마시다 보면 이 부분에 대해 서로 격하게 공감을 하는 부분인데… 차장님은 아마 저나 양 팀장의 마음을 잘 모르실 겁니다.”
“…?”
“애초에 저나 양 팀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수 밑에서 일을 배우셨으니까요.”
난 도저히 안 팀장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양 팀장님은 사람은 좋지만 업무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수 밑에서 일을 배워왔고, 저는 또 중국 법인에 4년간 있으면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사들 속에서만 일을 해왔죠.”
“….”
“뭔가 배울 게 있는, 혹은 장 부장님처럼 실력이 월등해서 부하 직원들을 동기부여 시켜줄 수 있는 사수나 상사를 만나는 것도 복입니다. 그런 상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 모든 스탠다드를 다 자기 기준에 맞춰놓고 부하 직원들을 쥐어짠다, 자기가 안 쉬는데 밑에 사람이 어떻게 쉬겠냐… 하면서 컴플레인을 걸 수도 있겠지만, 정작 진짜 업무 능력이 떨어지고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밑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행복에 겨워서 하는 투정 정도로밖에 안 들리거든요. 저나 양 팀장님은… 솔직히 차장님처럼 그런 상사 복은 없었죠, 그동안. 그래서 더 차장님을 응원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
“이제야 저나 양 팀장도 그런 상사를 가지게 됐으니까요. 그냥 저는 차장님이 지금보다 더 훨훨 나셨으면 좋겠어요, 이 홍성 안에서. 아까도 박 대리 있는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차기 영업부장 아니십니까. 그때 저희들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던 고민, 걱정. 차장님이 부장을 다셨을 때, 다른 부서장들보다 짬이 안 돼서 다른 부서들로부터 영업부가 무시당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하셨던 그 걱정 말입니다.”
“…네.”
“차장님이 모리엘츠를 잡아내시기만 하면 그런 부담과 걱정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지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스터 총게가 자신이 모리엘츠의 마케팅 디렉터라며 저한테 말을 거는 순간 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와… 안 팀장님이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니까 감동이잖아요. 하하하. 근데 안 팀장님.”
“네.”
“전 이미 그런 부담과 걱정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이 된 상태고요, 만약 여전히 그런 부담과 걱정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고 해도… 안 팀장님의 호의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홍성 생활을 배신하는 거거든요. 한 번도 그런 꼼수를 안 써가며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이제 와서 그런 꼼수를 쓰면 그동안 제가 해왔던 노력이 누군가로부터 부정당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전 그 부정을 안 팀장님이 하시면 정말 속상할 거 같습니다.”
”에이, 설마 제가…”
“아무튼, 잘 한번 진행해 주세요. 물론 이미 상무보한테까지 올라간 내용이라 계약 과정에서 안 팀장님이 크게 하실 건 없겠지만… 어쨌든 이건 안 팀장님이 물어온 프로젝트입니다.”
“네, 그럼 한번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너무 잘해도 됩니까?”
“푸하하하… 크크큭… 그렇죠, 이래야 안 팀장님이죠.”
“저 너무 잘한다고 나중에 뭐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제발요.”
모리엘츠 계약 건은 빠르게 진행됐다.
회사 전체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이미 말 많은 사람들로 인해 홍성이 모리엘츠와 접촉 중이란 소문이 업계에 조금씩 퍼져 나가기 시작할 즈음, 홍성은 전무님이 직접 지휘대를 잡고 파리 출장팀을 꾸리셨다.
홍성에서 전무님이 직접 브랜드 계약에 참여한다는 건 상대 브랜드에 대한 최고의 리스펙을 보이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모리엘츠라면 그렇게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전무님과 상무보, 그리고 장 부장과 해당 프로젝트의 건수를 잡아 온 안 팀장이 홍성을 대표해서 직접 파리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땐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성과가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중국 SC 권한도 함께 따 왔다고요?”
“그쪽에서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더라고.”
장 부장의 책상 앞이었다.
장 부장은 아직 파리 출장에서 홍성이 만들어낸 성과의 흥분이 다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모리엘츠 입장에서도 그동안 많이 기다려줬지, 뭐. 중국 진출을 하겠다, 하겠다 말만 하고 몇 년 동안 아무런 진척이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해 CGM만 믿고 기다려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이야… 저희가 이렇게 CGM 뒤통수를 때리는 날도 다 있네요. 자존심 꽤나 상할 텐데….”
“문제는 그렇게 뒤통수를 맞고 걔네들이 가만히 있겠냐는 거지.”
“그러고 보면 전무님도 진짜 싸움닭은 싸움닭입니다. 거기서 그걸 오케이해서 따오시네요.”
“나더러 그러시던데?”
“뭐라고요?”
“이제 난 모르겠다고. 너희가 알아서 해라… 라고 말이야. 하하하….”
“크크큭….”
“하하하…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씀드렸어.”
“뭐라고요?”
“공 차장이 알아서 하겠죠, 뭐. 저도 올해까지만 영업부 아닙니까… 라고.”
“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