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11화 (111/315)

# 111

111. 돈 놓고 돈 먹기! (1)

인생 배팅을 결심한 박승양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회장님.”

그는 식물원 느낌의 제1접견실로 들어섰고,

“차는 지난번에 드신 거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부속실 직원이 나가기 무섭게 한숨을 푹 내쉬며 목을 좌우로 비틀었다.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무엇에 투자하는지를 들어보고 세부사항을 의논하러 왔다. 그런데도 박승양의 마음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개구리밥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내 돈 냄새가 난다며 꼬드기던 본능이 숨을 죽이자 이제는 의심이라는 놈이 불쑥 고개를 쳐든 채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잘해라, 잘! 늘그막에 투자 잘못해서 인생 한 방에 날아간 사람 여럿 있다!

똑똑똑.

그때 문이 열리며 천중명이 들어와서 박승양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박승양은 악수를 나누며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이 젊은 회장은 며칠 사이에 또 성장했다.

눈빛은 말할 것도 없고, 등에 무슨 전등을 매달아놓은 것처럼 은은한 아우라가 풍기는 느낌이었다.

봐! 돈 냄새 나지?

난다.

본능이 던진 확신에 고개를 끄덕인 박승양은 천중명의 왼편 1인석 소파에 앉았다.

부속실 직원이 차를 가져다준 다음이었다.

박승양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 회장님. 내가 투자합니다. 5조!”

“그러시군요.”

뭐, 뭐야? 그러시군요?

천중명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의 눈썹 사이가 단박에 좁혀졌다. 돈과 관련된 일에서 한 번도 선수를 빼앗겨본 적 없는 박승양이 불편한 심정으로 이를 지그시 물었을 때였다.

“남부증권 본점에 이명선 씨라는 직원이 있습니다.”

“남부증권? 거기 회장을 내가 잘 알아요.”

“그렇다면 더 잘됐네요. 파생상품 계좌를 여시고 그곳에 1조를 입금하십시오.”

“어?”

돈 이야기를 나누며 박승양이 이렇게 얼이 빠졌던 적은 결단코 지난 20년 동안 없었다.

“계좌에 출금 제한 걸어두세요. 그렇게 하면 마음 편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결국, 선물이나 옵션에 투자하려고 5조가 필요했던 겁니까?”

“선물과 우리 회사 ELW에도 투자할 생각입니다.”

“허! 허허허!”

박승양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웃음을 토해냈다.

“천 회장님.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선물시장에서 5조는 외국인 세력들이 딱 잡숫기 좋은 스테이크 수준이에요. 그것도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렇게 해서 뭘 얻는 거요?”

어쩐지 맥이 쭉 빠져서 박승양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홍콩에서 계속 선물지수를 매도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는 거요?”

“황채산입니다.”

박승양의 눈이 번득하고 튀었다.

“이번 목표가 그 인간이었소? 홍콩 물고기 황채산?”

“박 회장님과는 한편이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양반이 이미 선물지수 풋에 제법 많은 배팅을 해놓았습니다. 짐작하시죠? 이럴 때 가격이 오르면 어떻게 되는지?”

찻잔을 들었던 박승양이 급한 마음에 마시지도 않은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지난번하고 아예 정반대인 거구만. 이번엔 가격이 빠트리려는 홍콩 물고기의 배팅을 우리가 끌어올려서 잡아먹는 거, 선물이라 가격 제한폭도 없다고 보면 되고?”

천중명은 잔을 들어 차를 마실 뿐 특별한 대꾸는 없었다.

“홍콩 물고기라? 이놈이 걸려들까요? 펄은?”

움켜쥔 손으로 엄지와 검지를 매만지며 박승양이 질문을 던졌고,

“시장 변화에 따라갈 생각이고, 주가 조작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펄을 붙일 생각은 없습니다.”

천중명이 가볍게 답을 했다.

“그래도 뭔가 돈이 엄청 된다는 펄을 발표해야 개미들이 달려들지 않을까? 아니 그런데 우리 천 회장은 언제 선물까지 발을 넓히셨나? 지경증권 팀들이 달려드는 겁니까?”

“최근에 이론을 좀 배웠을 뿐입니다. 황채산 씨와는 안면이 있으십니까?”

천중명의 질문에 박승양은 손을 들어 흔들어가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말도 맙시다. 그 인간에게 당해서 거지 된 인간이 한둘이 아니오. 장흥 낙지라고 우리 선물 시장 초창기 멤버가 있거든요. 그 양반은 아예 폐인이 됐잖소. 홍콩 물고기에게 뒤통수 맞아서.”

그때 장흥 낙지에게서 돈을 회수하느라 죽을 고생을 했던 때가 생각나서 박승양은 입술을 삐죽였다.

“자, 그럼 담보는? 그것만 정해주시면 내가 오늘 중으로 바로 계좌 개설하겠소.”

“내가 2조5천억, 회장님이 2조5천억입니다. 분명히 하시죠.”

“한 달에 따블 맞지요?”

“그렇습니다.”

“나야 현찰을 계좌에 넣을 거니까 담보가 증명되는 거고, 우리 천 회장은 뭐로 담보를 넣으실 생각이오?”

“지경건설에서 증권사로 2조5천억을 예치할 겁니다. 오래 못하는 건 아시죠?”

박승양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에 내가 설정해도 되겠소?”

“법인 자금이라 곤란합니다.”

“믿고 가자? 그런 건 내 방식이 아닌데? 개인적으로 현금 보관증을 하나 써주는 건 어떻소? 내가 미리 초안을 잡아온 게 있는데, 여기에 그냥 이름하고 사인만 해주면 됩니다.”

박승양이 건넨 한 장짜리 현금 보관증을 읽던 천중명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회장님. 자꾸 뒤를 쥐려고 하시면 일을 함께 못합니다.”

“아니, 그냥 현금 보관증인데?”

“여기에 사인하는 순간, 나는 배임 확정입니다. 그걸 아시니까 여기에 계열사의 유보금을 통해서라도 손해금을 배상하겠다고 적으신 거죠?”

탁자에 현금 보관증을 내려놓은 천중명이 그걸 박승양에게 밀어냈다.

“자꾸 오해하시는데 지경건설의 대표인 내가 2조5천억 원을 선물 투자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나머지는 지경증권이 투자하면 되구요. 박 회장님과 손을 잡은 건 내가 전면에 나서기 싫어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승냥이처럼 눈을 치켜떴던 박승양은 천중명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상하게 천중명에게는 자꾸 눌린다.

그래! 돈 놓고 돈 먹기!

2조5천억, 한 달 던졌다가 2조5천억 먹기!

성공하면 신화인 거고, 망하면 뭐 슬픈 사연 남기는 거지.

“합니다! 해요! 내가 여기 나가기 무섭게 남부증권 달려갑니다.”

결국, 박승양은 각오를 내세웠다.

“그런데 천 회장. 내가 궁금해서 병이 날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할 생각인 거요? 그래도 한편인데 이건 돈 빌려주는 사람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지.”

“회장님. 일단 준비를 끝내고 하나씩 보시죠.”

마지막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던 박승양은 듣고 싶었던 내용을 끝내 듣지 못했다.

**

곽대출은 오늘 엉뚱하게도 천중명 회장의 특별 지시를 받고 지경전자의 영통대리점에 와 있었다.

“부사장을 해임했다. 이대로 조용하게 넘어가면 좋겠지만, 혹시 지경전자의 대표 조승필 회장이 그 직원을 개인적으로 노릴 수 있으니까 그걸 막아줘.”

천중명의 지시는 그랬다.

영통대리점의 사무실에 앉은 곽대출은 들여다보던 노트북에서 시선을 들어 창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지.

최근의 천중명은 날이 지날수록 부쩍부쩍 커버리는 괴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막말로 전에는 남들 시선 의식해서 존댓말을 썼다면 지금은 저절로 공손한 말이 나올 지경이니 이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기도 했다.

지금쯤 장서문 부사장의 해임 소식이 퍼졌을 테고 대리점마다 그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끌시끌할 거다.

‘정말 이래도 되나?’

곽대출은 이러다가 실적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냐. 그럴 일 없어.’

그는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경화장품, 지경건설만 봐도 이미 답은 얻었다.

시키는 대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곽대출은 굳은 의지를 품은 채 노트북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살다 보니 곽대출이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날이 다 있다.

그나저나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해내는 거지?

장관의 사촌동생인 조승필이 개인적으로 담당 직원을 압박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곽대출은 잡생각을 털며 다시 노트북에 집중했다.

**

박승양을 보낸 천중명은 곧바로 유진교를 집무실로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앉으세요.”

천중명은 소파로 움직여 ‘블루 크루드’와 관련된 자료를 꺼내놓았다.

“먼저 이 자료를 연구실에 넘겨서 상품 가능성을 확인해 주시고,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 계열사에서 제품 생산이 가능한 지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 회장님.”

확실히 유진교는 이게 어떤 거냐는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하기는 자료만 봐도 빤히 나오는 걸 여러 말 하지 않을 사람이 바로 유진교였다.

“홍콩 물고기란 양반이 있습니다.”

“혹시 황채산이 말씀이십니까?”

“예. 전에 형과 손잡고서 우리 ELW와 선물을 연계해서 우리 주가를 망가트리려 한 사람인데 형이 저렇게 되었는데도 혼자 계획을 진행하는 모양입니다.”

유진교가 묵직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승양 회장에게 반대 포지션으로 5조를 투자하라고 말해두었습니다. 괜찮다면 그전에 이 연구 결과가 나와서 우리 사업 아이템으로 만들었으면 싶습니다.”

“지경은 그런 공격에 쉽게 당할 수준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회장님께서 직접 대응하시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거대 자본의 공격에 대비하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이번 일을 마치고 나면 그룹의 기본 틀을 바꾸는 작업에 집중하려 생각 중입니다.”

“기본 틀을 바꾸는 작업이라 하시면…?”

“인수합병을 통해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생각입니다. 그 외에 통신사업과 인공지능 분야에 투자를 집중할 계획도 있구요.”

유진교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해한다. 충분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꾸는 것도 정신없는 판국에 쉽지 않은 투자를 진행하겠다는 요구가 벅찰 거란 사실을 말이다.

“우리 지경은 독자적인 기술이 부족합니다. 국내 시장에서 올리는 매출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외에서 올리는 매출 역시 상당 부분이 기술 사용료로 다시 나갑니다. 그 점을 개선하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특별히 생각해 놓으신 것이 있으십니까?”

“우선 전국에 LTE급 와이파이를 무료 개방하는 방식을 고민해 주세요.”

유진교가 놀란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통신망 서비스가 당장 황금알을 낳는다고 해서 언제까지 낡은 방식으로 우려먹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개방된 통신망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생각입니다.”

“회장님. 말씀하신 부분은 관련 법규부터 규제까지를 검토해야 할 사안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다만, 이 시장을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의 싸움이라는 것만 잊지 마세요.”

유진교는 아무래도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눈치였다.

“데이터 사용료 수입이 상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포기하는 대신 부가수익을 노릴 겁니다. 그렇게 데이터 무료 시장을 선점하게 된다면 방송 콘텐츠를 비롯한 부가사업 등이 무궁무진합니다.”

“혹시 누가 조언해준 분이 있으십니까?”

“우리 경제연구소에 올라온 리포트를 참조했습니다.”

천중명의 답을 들은 유진교가 아차 하는 얼굴을 만들었다.

이 양반도 놓치는 게 있기는 있구나.

그런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여서 천중명은 좋았다.

“우리 기업의 전기차 수준이 오를 때까지 전기충전소를 미루는 것은 이해합니다. 통신만큼은 국가기간산업으로 지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분명하게 있을 겁니다.”

천중명은 내친김에 아예 말을 계속 이었다.

“미국의 기업이 전 세계에 무료 데이터망을 준비하고 테스트 단계에 있습니다. 그 작업이 끝나는 순간이면 우리는 향후 몇 십 년간 그 기업이 지시하는 방향대로 끌려가야 합니다.”

이 부분은 알고 있었던 건지 유진교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료 데이터망을 이용한 통화, 콘텐츠, 그리고 부가사업에 세금징수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일 텐데 우리는 계속 비싼 데이터 사용료를 걷는 것에 안주해서 우리 국민의 목을 조르며 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먼저 개선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이번 계획은 별도의 팀을 운영해서라도 본부장님께서 직접 지휘해 주었으면 합니다. 수익의 실현은 10년 뒤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잠시 말을 끊었던 천중명은 유진교의 눈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시장에서 선두를 차지하면 앞으로 100년은 지경을 상대할 기업이 없습니다.”

“먼저 말씀하신 리포트들을 살펴본 뒤에 세부 계획을 작성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뻑뻑한 사업 이야기가 지났다.

“차 드세요.”

천중명이 손으로 권하고 잔을 들자 유진교가 뒤늦게 잔을 잡았다.

“회장님을 모시는 일이 점점 숨이 막힙니다.”

“그래요? 그건 별론데?”

무슨 의미냐는 투로 유진교의 시선이 건너왔다.

“난 좀 인간적인 냄새가 풍기는 그런 경영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직원들에게서의 인기는 아마 어느 그룹의 회장님과 비교해도 상대할 분이 없을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임원들만의 비애쯤으로 들어주십시오.”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었는데 이상하게 유진교가 하면 웃긴 것처럼 들린다.

“말씀하신 내용을 최선을 다해 검토하고 준비하겠습니다.”

“드린 자료도 서둘러 주세요.”

“예, 회장님.”

유진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천중명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리포트도 아직 볼 게 많았고, 직원들의 고충을 담은 이메일은 끝없이 쏟아졌으며, 천중명의 결재를 바라는 서류들이 줄줄이 밀려들었다.

천중명이 결재서류를 펼쳤을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며 곽대출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여보세요?”

- 회장님. 곽대출입니다. 지경전자의 전무가 영통대리점의 특별 감사를 직접 내려왔습니다.

곽대출의 화를 누르는 목소리를 듣자 상황이 단박에 머릿속에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해.”

- 김준동 지경전자 전무의 해임을 요청 드립니다.

천중명은 픽 웃으며 의자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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