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 섬뜩한 교훈 (2)
대표와 전무, 편집국장이 아무리 매서운 눈을 부릅떴더라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와달라는 서수미의 애절한 청을 현충기는 거절하지 못했다.
강남경찰서에 들어선 그가 현관을 둘러본 다음이었다.
“어! 여기!”
수사과장이 손을 들어 그를 부르고는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런 장면에서 망설인다면, 현충기는 기자 생활 더 해먹을 이유 없다.
그가 복도 안쪽으로 몸을 옮기자 수사과장은 이미 통로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 커피 하면서 말해도 되지?”
복도 끝의 직원 출입구로 나선 수사과장은 아예 경찰서 바로 앞에 있는 커피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이번 사건 가지고는 헛수작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와 같았다.
기자와 형사가 마주치면?
커피는 당연히 형사가 산다.
“날씨 좋다! 이런 날은 그저 테라스가 좋아!”
그렇게 현충기를 테라스로 안내한 수사과장은 불편한 표정으로 일회용 종이컵을 빙빙 돌렸다.
“위에서 직접 오더가 왔어. 이거 기사 나가면 나 지방에 가야 돼.”
“난 운 좋아야 대기발령입니다. 우리 회사 분위기 잘 알면서 그래요? 그나저나 지경이 오더 내린 건가?”
“아니.”
터무니없는 소리란 듯이 수사과장이 고개를 저은 뒤에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전에 허세직 의원이 직접 왔어. 지금 서장실에 있을걸?”
“허 의원이?”
“아 거, 참! 자기 아들 인생 망쳐놓고, 정치생명 끊어놓은 사람들 아냐? 그런 사람들이 줄줄이 마약 처먹고 긴급체포 됐는데 그 양반이 지금 뭘 못하겠어?”
허선영이 있으니 허세직이 나섰나?
일이 정말 더럽게 꼬였구나, 서수미.
현충기는 답답한 심정에 강남서의 건물 위 하늘을 향해 턱없이 눈살을 구겼다.
“그리고, 거! 서수미! 그 기자도 그래! 아니, 무슨 기자가 죽을 소리를 그렇게 해대?”
“그건 또 뭔 말이에요?”
“생각해 봐. 타워크레인 자빠트리는 거, 그거 그냥 살인모의 아냐? 그걸 영상으로 찍는 것만 담당했다고 우기는데. 나 참! 아니? 죽이려는 건 알았는데 저는 방송만 맡기로 했습니다, 하면? 법원이 예, 억울하겠네요, 하나? 어?”
“아후.”
듣고 나니 오히려 속이 더 답답해서 현충기는 아예 대놓고 막힌 속을 털어냈다.
“거기에 뽕을 한 것도 웃겨. 오지은이 허광렬이 작업칠 때 먹였다고 진술하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라니? 그럼 그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는 말이 되잖아? 그 기사 누가 썼냐고?”
손짓까지 해댈 정도로 수사과장은 서수미의 멍청한 진술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요즘은 신입 교육 안 시켜? 뭐야?”
“인터넷에 기사가 바로 올라가니까 감각적인 기사 쓰는 애들이 늘어요. 클릭 수 우선이라 일단 앞뒤 확인 없이 올려놓고 문제 생기면 삭제하는 수준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예 상식이 없어. 상식이!”
“만나볼 수는 있어요?”
“아직 점심시간이니까 차 마시고 들어가. 유치장에서 보는 건 그렇고, 내가 조사하는 척하고 방으로 불러줄 테니까 조용히. 문제없이. 부탁한다, 현 기자. 어?”
“알았어요.”
현충기는 씁쓸한 얼굴로 수사과장을 따라서 커피를 입에 물었다.
**
오상구는 건설회사 회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참 많은 조폭과 친분을 맺었고, 또 그만큼의 협박과 협잡을 양손에 두른 채 살았다.
그런 오상구가 오늘 진짜 자존심 팍팍 상한 것은 다른 것 다 떠나서 조용한 취조실이 아니라 잡범 상대하듯이 수사과 형사의 책상 앞에 그를 앉혀놓은 일이었다.
“진술 거부한다니까.”
“알았어요. 그럼 이거 한 번만 봅시다.”
그나마 그가 버티자 형사가 신경 쓴다는 투로 서류를 내밀었고, 오상구는 어디 해볼 게 있으면 해보란 투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기. 지난 4개월 전 사고를 포함해서, 과거 2년 동안 우리 오 회장님 건설회사 현장에서 무려 17명이 죽었어요이?”
말끝을 이상하게 올린 형사가 왼손에 든 서류를 오른손의 볼펜으로 두드렸다.
“여기 보면 원청이 우리 대교건설이에요. 맞지요?”
오상구는 아예 고개를 모로 틀었다.
“이거요. 당시에 사고 났을 때 산재처리 안 하려고 달려온 구급차 돌려보내고, 상황 지켜보다가 하청업체 직원 차에 태워서 늦게 보내서 사망했다는 진술도 다 있거든요?”
이를 꽉 깨문 채 시선을 돌렸던 오상구가 움찔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허세직 의원이 왜 여기 있냐고! 이거 모함이지? 지경그룹에서 나를 쳐내려고 모함한 거잖아!”
“어어? 이 양반이 갑자기 약을 자셨나? 앉아요!”
상황을 이용해보겠답시고 오상구가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댔고, 그 소리에 허세직이 안으로 들어섰다.
“봐! 서장하고 함께잖아! 정치인이 이런 사건에 개입했어! 그런 거야!”
서장이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는 옆에서 허세직은 태연했다.
그런 그가 덩치 큰 오상구를 위로 노려보는 것처럼 치켜뜬 눈으로 다가왔다.
“오 회장이라는 분이시구려. 나, 이번에 정계 은퇴합니다. 그러니 사건에 개입할 힘도 없지요.”
“뭐? 그럼 지경그룹에서….”
“그 입을 좀 다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내가 진짜 바삐 뛰어다니면서 따님을 오 회장이 있는 곳까지 밀어 넣을 것 같으니까.”
“내 딸이 뭘 잘못했어! 세상 물정 모르는 게 죄야?”
허세직은 감정이 없는 듯 보이는 눈으로 웃었다.
“동일 범죄가 아니라 부녀간이라도 두 사람 모두 구속될 수 있다는 건 아시지? 계속해 봐. 이제부터 세상이 누구 말을 믿는지 보자고. 당신일까, 아니면 지경의 배경 안에 선 나일까?”
“그게….”
허세직은 손을 들어 오상구의 재킷 앞섶을 만져주고 이어서 셔츠의 깃까지 바로잡아 주었다. 그런 허세직이 오상구의 어깨를 털어주는 척하며 상체를 기울였다.
“공사가 다 망해서 이제는 쉬는 수밖에 없겠네. 그러게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야지. 알았어? 이 건방진 피라미야? 넌 이제 정말 인생 끝났어.”
마지막으로 귀에 속삭이듯 말을 전한 허세직이 야비한 미소를 픽 던진 후에 상체를 가져갔다.
“우리 오상구 회장님이 얼른 나오셔서 이 사회의 올바른 건설문화를 세우는 데 공헌해 주기 바랍니다.”
그는 어느새 정치인 특유의 근엄한 표정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
황성규는 오늘도 11시 50분쯤에 부속실에 도착해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천중명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그쪽으로 앉으세요.”
“예, 회장님.”
천중명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이 소파 앞에서 기다리던 황성규는 10페이지 정도 분량의 파일 두 개를 배낭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천중명이 보기 좋게 자료를 놓아준 뒤에 뒤따라 소파에 앉았다.
“말씀하셨던 박승양 회장의 자료입니다. 저 위치에 오르기까지 정의롭게 살지 않았던 거야 짐작하실 테고, 그 외에 특별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의외네요. 뭔가 다른 사람하고는 다른 음흉한 구석이 있다거나 아니면 괴팍한 부분이 있을 것 같았는데요?”
“박승양 회장은 돈 냄새가 나는 걸 본능으로 알아차린다는 말이 있기는 했는데 그 정도 인물이라면 응당 붙는 수식어쯤 될 테고 다른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부속실 직원이 도시락을 가져다가 늘 먹는 방식대로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고마워.”
인사한 천중명은 두 번째 자료를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보았다.
내용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성태환 씨 자료? 이게 뭡니까?”
“어제 찾아냈습니다. 확실히 국내에서는 누군가 철저하게 자료를 숨기려 애썼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자료는 독일에서 직접 뽑아낸 원본입니다.”
“식사하시죠.”
“괜찮습니다, 회장님. 많지 않은 분량이니까 잠시 보시고 드셔도 됩니다.”
도시락이 바로 상할 것도 아니어서 천중명은 5분쯤 내용을 살핀 뒤에 협탁에 자료를 놓았다.
이미 감정을 정리한 뒤여서 그런지 확실히 처음 성태환이라는 자료를 받았을 때처럼 가슴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자료에 나온 블루 크루드(Blue Crude)가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천중명이 젓가락을 들며 질문을 던졌고, 물을 가볍게 마신 황성규가 역시 젓가락을 들며 입을 열었다.
“이미 독일에서는 생산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이산화탄소와 물, 전기만 있으면 매연과 추가 질소화합물의 발생이 거의 없는 클린 디젤이 생산됩니다.”
“그런 걸 혼자서 20년도 전에 우리나라에서 특허를 냈었다는 게….”
천중명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뭐라 해도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문제는 전기에너지로 분해한 물을 800도에서 이산화탄소와 결합하는 과정에 있는데 개인이 그런 실험을 하려면 당시 기술로는 아무래도 폭발 위험이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폭발 위험이라는 말이 어쩐지 목에 턱 걸려서 천중명은 얼른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아무튼, 방치되어 있었고, 특허를 보셨다시피 연차등록료를 납부하지 않아서 현재 특허권도 오픈 상태입니다.”
황성규가 추가로 설명을 더 건넨 직후였다.
[회장님. 박승양 회장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꼭 통화를 원한답니다. 1번입니다.]
인터폰에서 부속실 직원의 보고가 들어왔다.
“잠시만요.”
황성규에게 양해를 구한 천중명은 바로 협탁에 있는 구내전화기를 들고서 내선 1번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 천 회장님. 나 박승양입니다.
“네.”
- 내가 인생 최대의 결정을 드디어 내렸습니다. 오후에 혹시 시간 됩니까? 나머지는 만나서 대화하고 싶소.
천중명은 잠시 시간을 살폈다.
“3시쯤 괜찮으신가요? 장소는 제 사무실로 하시죠.”
- 그럽시다. 그럼 내 그 시간에 찾아뵙겠소.
통화는 간단하게 끝났다.
“다행히 내게서 돈 냄새가 난 모양이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박승양 회장에게 5조를 빌려달라고 했거든요. 아마 그 결정을 내린 눈치인데 만나보면 자세한 걸 알겠죠.”
황성규는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황채산을 한번 잡아보려고요. 참! 이 자료를 우리 연구소에 넘겨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회장님. 그런데 죄송하지만, 황채산을 어떻게 잡으시겠다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황성규는 성태환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황채산의 일이 궁금한 눈치였다.
“우선 약을 올려볼 생각이거든요. 멱살을 거머쥐기 전에 적당하게 흥분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요. 이번에 건드려보면 황채산이 혼자 설치는 건지, 뒤에 누가 있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황성규는 모처럼 정보요원 같은 눈빛으로 천중명의 말을 듣고 있었다.
**
쭈뼛대며 수사과장실로 들어온 서수미가 포승줄에 묶인 손을 겨우 들어 눈가를 닦았다.
현충기를 보자 왈칵 눈물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힐끔.
현충기의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뒤편에 앉은 수사과장을 의식한 것처럼 눈치를 살폈다.
“수사과장님 협조 없었으면 너 못 만나고 가는 거야. 왜 보자고 했는지 용건이나 말해.”
“선배님. 내가 잘못했어요.”
“그거야 죄지은 사람이 당연하게 가져야 할 자세고. 하고 싶은 말이 그 반성이었어?”
“그렇지만 저는 억울해요. 그냥 방송만 하기로 했었지, 살인이니 그런 거에 전혀 관련 없다니까요. 마약도 마찬가지예요.”
슬쩍 현충기가 시선을 돌린 곳에서 수사과장은 저 미련한 꼴을 보라는 듯이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제부터 힘겨운 현실을 계속 마주해야 할 서수미와 툭하면 시달리게 될지 모를 현충기 본인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상황을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현충기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들어봐.”
“네, 선배님.”
“쉽게 가자. 사람이 죽는 걸 취재할 순 있어. 우연히, 아주아주 우연히.”
“네?”
서수미가 반문하는 뒤편 책상에서 수사과장이 뭔 쓸데없는 조언을 하느냐는 투로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런데 넌 아예 죽일 거라는 걸 알면서 그걸 찍었어. 그 차이를 아직도 모르겠어?”
“기자잖아요.”
서수미의 답을 듣는 순간에 현충기는 뜨거운 숨을 “푸우.”하고 토해냈다.
“기자는 판사, 검사, 의사, 경찰처럼 자격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력이 쌓이면서 이전의 기사가 신뢰받을 때 비로소 얻는 자격이야! 생각을 좀 해라. 범죄행위에 가담해놓고 기자라서 그랬다면 봐줄 것 같아?”
서수미는 눈만 껌벅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넌 대표님과 전무님, 편집국장님, 내가 그렇게 가서 매달린 덕분에 사자 입안에 있던 머리를 꺼내주었더니 바로 사자의 콧등을 때리겠다고 달려든 거야.”
비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우습게도 수사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수사과장이란 양반이 표정 변화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며 현충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구치소 넘어가면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계속 편지 써. 그걸 천중명 회장이 직접 볼 확률은 극히 낮지만, 그래도 그게 너한테 남은 유일한 방법일 거다.”
“그럼 나 진짜 교도소 가는 거예요?”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그런 짓을 벌였어?”
지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대는 현충기를 수사과장이 비슷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