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 돈 놓고 돈 먹기! (2)
지경전자 영통대리점은 두 개 층으로 된 건물이었다.
아래층에는 전자제품의 전시장이 주를 이뤘고, 2층으로 올라오면 절반은 AS를 위한 공간, 나머지는 사무실 공간으로 사용했다.
바깥에서 뭔가 고함이 들릴 때면 곽대출이 내다보곤 했는데 대개는 제품에 관한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나 싶었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지점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든 곽대출이 그를 바라본 직후였다.
“이사님! 지경전자에서 특별 감사를 지시해서 김준동 전무가 도착했습니다!”
급한데 속삭이듯 말을 하느라 지점장의 말투가 이상했다.
이것들이 진짜!
회장님이 지시하신 일에 반기를 들어?
이런 상황에서 특별 감사가 내려왔다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의도를 모를 리가 있겠나.
덜컹!
지점장이 채 상체를 들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고, 눈매가 사납게 생긴 50대 중반의 남자와 40대 한 명, 그리고 젊은 직원 두 명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얼른 몸을 일으킨 지점장이 책상에서 뒤로 물러날 때 곽대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지경그룹 그룹발전본부 곽대출 이사입니다. 누구십니까?”
들어선 남자는 말없이 독한 눈빛을 먼저 보냈다.
곽대출이 있을 거란 예상을 못 했던 눈치였는데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도 없는 느낌이었다.
적막이 커다란 해일처럼 사무실 끝에서 끝을 덮치고 지난 다음이었다.
“지경전자 김준동 전무입니다. 이곳 영통대리점에서 지점장과 직원들이 재고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물건을 빼돌려 덤핑 시장에 파는 행위가 있었다는 제보에 따라 특별 감사를 진행하려고 왔습니다.”
공무원처럼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김준동이 씹듯이 답을 건네주었다.
곽대출은 고개를 돌려 지점장을 보았을 때였다.
누군가 그의 볼 양쪽을 꽉 잡은 상태에서 억지로 돌린 것처럼 지점장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특별 감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곽대출 이사님은 밖으로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곽대출은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김준동 전무님. 내가 회장님께 보고 드리고 특별 감사에 관해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돌아가십시오.”
곽대출이 단호하게 만류하고 나섰으나,
“곽 이사님이 그렇게 앞뒤 안 가리고 감싸고도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각오하고 왔는지 김준동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품을 빼돌린 대리점에 대한 특별 감사를 뒤로 미루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대리점을 관리합니까? 이런 사고에 관해 곽 이사님이 전부 책임지시겠습니까?”
곽대출은 표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라리 지금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거라면 오히려 엄지 구부린 채 마음 편히 맞이했을 텐데, 이런 식으로 규정과 방식 따지자니 혹시 실수가 있을까 그게 조심스러웠다.
“회장님의 지시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표시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장서문 부사장은 직원들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해임된 겁니다. 그 점에 관해 대비책을 세워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잘 아시면 차라리 지경전자를 맡아서 관리하시지 그러십니까?”
곽대출의 말을 뚝 자른 김준동이 함께 온 직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뭣들 해? 얼른 자료 파악해!”
그의 지시에 40대 한 명과 젊은 직원 두 명이 안쪽으로 움직였다.
“그대로 있어!”
그러나 그들은 곽대출의 독한 음성에 걸음을 멈췄다.
“경고하는데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그룹발전본부에 주어진 권한으로 바로 해고조치 하겠습니다.”
곽대출의 경고는 무서웠다.
“해임이라고 하셨소? 그룹발전본부가 힘이 세긴 센 모양입니다? 어디 그럼 나부터 한번 해보시오.”
김준동의 말을 들으며 곽대출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인간이 뭘 믿고 이렇게 강하게 나오지?
다른 함정이 있나?
싸움이라면 절대 이럴 일이 없겠으나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라 곽대출의 고민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특별감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김준동의 다부진 음성이 곽대출의 정신을 번쩍 깨웠다.
나중에 산수 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순간에 우물거릴 수는 없었다.
“김준동 전무님. 당신을 해임하겠습니다. 지금 회장님께 직접 승인받을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곽대출은 휴대 전화기를 들었다.
지점장이 설마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김준동과 함께 온 직원들이 이제 어쩌지 하는 얼굴로 지켜보는 앞이었다.
번호를 찾아 누른 곽대출은 김준동을 노려본 채 휴대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중요한 회의 중이면 어떡하지?
괜히 너무 곤란하게 만든 거 아닐까?
신호음이 세 번쯤 울리는 시간이 곽대출에게 꽤 길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 여보세요?
천중명의 음성이 들렸다.
“회장님. 곽대출입니다. 지경전자의 전무가 영통대리점의 특별 감사를 직접 내려왔습니다.”
곽대출은 화를 누르는 목소리로 현재 상황을 전했다.
- 하고 싶은 말을 해.
“김준동 지경전자 전무의 해임을 요청 드립니다.”
곽대출이 답을 건넨 직후였다.
- 스피커 통화로 바꾼 뒤에 말해.
“예, 회장님.”
천중명의 요구가 날아와서 곽대출은 스피커 통화 버튼을 누른 뒤에 휴대 전화기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스피커 통화입니다, 회장님.”
- 알았어. 거기 전자에서 나온 전무 있어요?
눈이 급하게 흔들린 김준동 전무가 마른침을 삼켰다.
- 지경전자에서 나온 전무 있어, 없어?
“네, 회장님. 지경전자 전무 김준동입니다.”
김준동은 고개를 숙여 가며 전화기에 대고 얼른 답을 건넸다.
- 그곳의 상황은 나중에 보고받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지경전자 김준동 전무 당신을 지금 시간부로 파면합니다. 그동안 수고해 준 점에 감사하고 앞으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김준동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천중명이 건넨 파면이란 말 때문이었다.
곽대출의 요구대로 해임되면 앞으로 1년간 현재 수령되던 봉급의 70퍼센트를, 그 뒤 1년간은 40퍼센트를 지원받지만, 파면은 국물도 없다.
물론 그가 다른 대기업에 취업할 수는 있겠다만, 파면된 임원은 다른 곳에 가서도 힘을 쓰기 어렵다. 그만큼 무시당하고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 곽 이사.
“예, 회장님.”
- 특별 감사라고 했었는데 함께 온 직원들은?
곽대출이 시선을 들었을 때, 40대와 젊은 직원까지 세 명의 직원 역시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모두 세 명입니다.”
- 그들에 대한 처분도 파면을 원하나?
지점장이 오히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였다.
“이들은 제가 나중에 조사해서 적당한 징계를 보고서로 올리겠습니다.”
천중명의 답이 건너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는 것보다 백만 배쯤 무섭고 두려웠다.
- 곽 이사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게 옳겠지. 다른 요구는?
“없습니다, 회장님. 바쁘실 텐데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픽 웃는 소리가 건너온 직후에 통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툭 풀리는 느낌이었다.
오전에 떠올렸던 모습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됐구나!
휴대 전화기를 집어 들면서 곽대출은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참! 저것들을 먼저 정리해야지.
곽대출은 애꿎게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시선을 들었다.
“돌아가시고, 거기 직원 세 분은 명함을 이곳 지점장님께 전해놓으세요. 내가 내일 중으로 연락할 수 있습니다.”
곽대출의 말하는 동안, 김준동은 시선을 떨군 채 움직임이 없었다.
저딴 놈 곽대출은 상관할 위인이 아니다.
“거기 세 분도 파면을 원하는 겁니까?”
“예? 아닙니다. 명함! 명함 여기 있습니다.”
직원 세 명이 서둘러 명함을 꺼내고 있었다.
**
남부증권이 벌컥 뒤집혔다.
천하가 짜르르 알아주는 박승양이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저축은행이나 작은 증권사 하나쯤 벌떡 일어날 수준이라는 말이다.
그런 박승양이 나타나서 회장실에 가 대뜸 찾은 사람이 이명선이고, 파생계좌를 열라고 하고서 예치한 금액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동그라미를 확인한 뒤에 숨 막히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기 회장님. 이러시는 이유가….”
“더 깊이 알려고 하면 다쳐. 그냥 그렇게 넣어두고 여기 이명선 씨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주문 넣을 수 있게 쓸데없는 일은 시키지 말고.”
“예! 회장님! 이렇게 도와주셔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격한 남부증권 회장을 무시한 채 박승양은 고개를 돌려 이명선을 보았다.
우선 얼굴 봤고, 다음으로 몸매 살폈고, 마지막으로 위아래를 다시 훑었다.
딱히 돈 냄새는 안 나는데?
그렇다고 천중명 회장이 홀딱 넘어갈 수준도 아닌 것 같고.
뭐지? 이 이상한 등장인물은?
“이명선 씨. 앞으로 잘 부탁해.”
“네, 회장님.”
“출근하면 다른 일할 것도 없어. 그냥 방 하나 달라고 해서 그곳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내 주문만 받아주면 돼요. 알았지?”
아직 직급이 부족해서인지 이명선은 고개만 숙여 보일 뿐 함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박승양은 잘 안다.
홱!
그가 날카롭게 남부증권 회장을 노려본 직후였다.
“당장 이명선 씨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직급이 일반인데?”
“대리로 올려놓겠습니다.”
“겨우?”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거기! 내가 작성한 서류 이리 줘 봐. 그리고 이따가 내가 전화하면 그쪽 증권사로 바로 건너와.”
“과장이 가능합니다.”
박승양은 그제야 이명선에게 내밀었던 손을 슬쩍 거둬들였다.
“이명선 과장님. 잘 부탁해.”
행운의 여신이 느닷없이 나타나 “사실은 내가 네 친언니였어.”라고 떠들고는 볼에 입을 맞춘 사람처럼 이명선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자, 그럼 나는 일어납니다.”
박승양은 그 길로 남부증권에서 일어났다.
평사원 한 명 이따위 증권사에서 과장 만드는 거?
박승양에게는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귀찮음을 감수한 이유는 오늘부터 5조 원이라는 자금을 사용한 첫날이라는 확인을 전해두기 위해서였다.
천중명이 지정한 여직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 들어갈 테고, 오늘을 시작으로 정확하게 30일이 지나면 박승양은 2조5천억 원을 손에 쥔다.
남부증권 회장실을 나서면서 박승양은 이상하게 온몸의 솜털이 짜르르 일어서는 묘한 경험을 했다.
그 바닥에서 닳고 닳은 홍콩 물고기와 새롭게 뛰어든 가물치의 대결을 직접 지켜보는 재미라니.
게다가 박승양은 그 재미를 극대화시켜 주는 배팅도 했다.
먹는 것도 짜릿하지만, 날리면 2조5천억 원이 사라지고, 그걸 메우려면 다시 길바닥에 뿌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200만 원, 신용이 어려워도 200만 원, 카드 대납 따위의 일감도 뺏어 먹어야 한다.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려고 박승양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남부증권을 나섰다.
**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끔 무서운 집중력을 보일 때가 있다.
“이명선 씨. 파생상품에 관해 얼마나 알지?”
“기본 교육만 받았습니다.”
“우리 신입사원 교육과정에 있는 거?”
“예, 회장님.”
남부증권 회장은 곧바로 구내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아, 납니다. 여기 이명선 씨 말이야. 오늘 중으로 방을 하나 준비해줘. 임원급으로. 아참. 과장으로 승진시킬 거니까…. 그래요! 과장!”
이명선을 힐끔 본 그가 계속 입을 열었다.
“그리고 파생상품 펀드 매니저로 과정을 만들어서 당장 오늘 밤부터 일대일로 교육해. 속성 알죠? 속성? 우리 증권사 명운이 이명선 씨 손에 달렸어요. 그거 꼭 명심해.”
전화기를 내려놓은 회장은 이명선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다.
“파생상품 힘들 것 없어. 오를 거냐, 내릴 거냐. 이것만 짐작하면 되거든.”
“예, 회장님.”
“미국에서 실험을 했어요. 원숭이에게 아침마다 빨간색과 흰색 깃발 중 하나를 들게 하고, 다른 쪽은 펀드매니저 다섯 명에게 물어본 거야. 오늘 선물 가격이 오를지, 내릴지.”
이명선이 바라보는 앞에서 회장은 오른손 검지로 허공에 있는 벨을 누르듯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원숭이가 무려 19퍼센트 더 정확하게 맞췄어. 실험기간 3개월 동안에 말이야. 대신 수익률은 당연히 사람이 높지. 변화에 대응하니까. 투자는 그래. 대응이 빨라야 살아.”
“네, 회장님.”
“이명선 씨. 지경그룹 회장님께서 이리 챙겨줄 때 당신이 할 일은 하나밖에 없어. 실력! 실력을 쌓는 거야. 어떤 실력이냐, 변화에 대응하는 법, 상대의 의도를 읽는 눈!”
광기가 아직 풀리지 않은 눈으로 회장은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짐작하지 마. 변화에 대응하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빨리 파악할 수 있도록 이명선 씨만의 데이터를 만들어. 외국인? 기관? 개미?”
독촉하듯 말을 뱉어낸 회장이 소파에 몸을 세웠다.
“악재가 쏟아져도 오를 놈은 오르고, 호재가 나와도 내릴 놈은 내려가. 이미 시장에 반영되었다는 멋진 이유가 있거든. 잘 기억해. 그 이유를 만드는 놈이 돈을 먹는 놈이야.”
“네, 회장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이명선 과장.”
말을 마친 남부증권 회장이 진심으로 부탁한다는 얼굴을 하고서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