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자각】 (8/26)

  【07. 자각】

세모꼴로 변한 채훈의 눈이 꺼지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로 말을 한 게 아니라서 상대에게 통하지 않았다.

승건은 채훈의 옆에서 시비를 걸고 있는 덩치를 보았다. 윤종수. 학창 시절에 흔히 볼 수 있는 양아치였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크고, 싸움도 공부도 그럭저럭하고, 그리고 집안 배경을 믿고 일진 놀이를 하는 놈이었다.

윤종수와 채훈은 굳이 따지면 앙숙 같은 사이였다. 특히 윤종수가 일방적으로 채훈에게 시비를 걸었다.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였다. 두루두루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채훈이 반에서 유일하게 멀리하는 게 바로 윤종수 패거리였다.

2학년이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윤종수가 채훈의 필통을 떨어트리다 못해 발로 밟아버린 적이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전학을 온 승건은 그때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것까지는 단순한 실수였다고 다들 말했다.

하지만 윤종수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지 않고 지나치다 못해, 항의를 하는 채훈에게 그까짓 거 얼마나 하기에 그러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그 이후로 윤종수가 채훈을 못마땅해한 것이 1년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윤종수가 채훈을 심하게 괴롭힌다기보다는 사이 나쁜 반 친구들 사이에 알력 싸움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윤종수는 채훈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마치 유치한 어린애가 좋아하는 상대를 괴롭히는 것처럼 말이다.

채훈은 저런 녀석들에게 인기가 있는 타입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피부는 하얗고 눈동자는 검었다. 무심한 고양이처럼 생겼는데 웃으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활달하고, 분위기에 잘 녹아들어 티 나지 않게 사람을 잘 챙겼다. 그래서 윤종수 같은 이상한 놈이 꼬였다.

채훈은 윤종수를 무시로 일관했다. 옆에서 무어라고 떠들든 간에 길게 말을 섞지 않았다. 그래서 윤종수가 더욱 약이 올라 시비를 거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점심을 먹고 있는 채훈의 옆을 지나가면서 발로 의자 다리를 툭 치고는 달걀말이를 흘리게 만들었다. 채훈이 노려보자 미안하다면서, 쪼잔하게 그런 걸로 노려보냐고 킬킬거렸다.

승건은 그때 아주 진지하게 집안의 힘을 빌려 윤종수를 치워버릴까 고민했다. 재단을 압박할 수도 있었고, 그것도 아니라면 윤종수네 집안이나, 혹은 윤종수를 직접 타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고 배우고 자란 게 그런 것이라서 별다른 죄책감은 없었다. 지금껏 윤종수가 적당히 선은 지키고 있어서 어떻게 하나 두고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근 윤종수가 그 선을 넘고 있었다.

“씨발. 밥 먹는데 지랄하지 말고 꺼져라.”

채훈을 비호하고 나선 것은 남태호였다. 남태호 역시 윤종수 못지않게 덩치가 컸고 몸싸움도 곧잘 했다. 그가 나서면 윤종수가 마지못해 물러나는 형국이 반복되고 있었다.

“좆같은 새끼들끼리 잘 노네. 간다. 가.”

한 번 더 욕을 질펀하게 내뱉은 윤종수가 제 패거리들을 끌고 사라졌다. 채훈이 밥을 먹다 말고 웃으면서 이를 갈았다.

“아, 진짜 쥐어팰 수도 없고.”

“네가 패면 감옥 가.”

“우리 학교도 태권도를 교기로 배웠으면 좋겠다. 합법적으로 때리게.”

서주명이 말리자, 채훈이 합법적으로 때리고 싶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채훈은 화가 나면 날수록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는 타입이었다. 그러다가 진짜 화가 나면 냉랭해졌다.

승건은 채훈이 경찰대를 지망하는 것도, 그리고 오랫동안 무술을 배운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채훈이 장담하는 것처럼 윤종수를 쥐어팰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들 싸움이란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나 현재의 승건은 알고 있었다. 10년 전의 채훈이 얼마나 참았는지를 말이다. 채훈은 박광호와의 싸움에서 거의 날아다녔다.

“네가 작으니까 만만해서 그러는 거잖아.”

“야. 왜 갑자기 키 이야기가 나오는데.”

“맞는 말인데. 뭘. 네가 나처럼 크면 윤종수가 시비를 못 걸지. 그런데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 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

채훈을 놀린 것은 남태호였다. 승건은 물론이고 남태호도 서주명도 이미 180㎝를 넘은 상태였다. 같이 다니는 네 명 중에 채훈이 제일 작았다.

“내가 뭘 작다고 그래. 니네들이 큰 거지. 나도 곧 따라잡는다. 아니, 더 클 거야. 근육도 막 키우고. 두고 봐.”

2학년 겨울에 채훈의 키는 175㎝에서 아주 조금 모자랐다. 경찰은 간부라도 덩치가 좋아야 한다며 채훈은 성적만큼이나 키에 민감했다. 승건은 달걀말이를 철근같이 씹어먹는 채훈을 보면서 너는 근육이 생기는 체질이 아니라는 말은 차마 하지 않았다. 미래를 보는 힘은 없었기 때문에, 10년 후에도 너는 180㎝가 되지 않을 거라는 예언 역시 하지 못했다.

그저 채훈의 식판에 자신의 달걀말이 하나를 덜어주는 게 다였다. 채훈은 유독 달걀말이를 좋아했다.

“와. 달걀말이를 양보하다니. 사랑이 느껴진다. 사랑이. 위로를 하려면 이렇게 좀 해라. 입으로만 떠들 게 아니라.”

위로는 물질로 하는 거라고 외친 채훈이 승건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입을 다물면 찬바람이 불 것처럼 날카롭게 생긴 채훈은 웃으면 마치 여름날의 햇살처럼 환하게 빛났다.

*

*

승건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자신이 깨어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잠시 헷갈렸다. 기억을 되찾는 꿈은 늘 그랬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공중에 붕 떠서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느낌이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억지로 움직이기보다는 떠오르는 기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학년 겨울의 기억이었다. 잃어버린 4년의 기억 중에서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별것 아닌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입장에서 관조하듯 되짚어본 기억은 특별한 것 같았다.

지금껏 까맣게 잊고 있었던 윤종수를 기억해 낸 것은 뻔한 이유였다. 박광호의 모습이 윤종수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둘 다 채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시비를 거는 덩치 크고 멍청한 놈들이었다.

윤종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시비를 걸다가 2학년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자신이 손쓸 것도 없었다. 채훈이 잘됐다며 웃는 것으로 윤종수와의 인연은 끝나버렸다.

그리고 박광호는 아직 진행형이었다. 하지만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제 한 몸 사리려고 할 것이다.

“멍청한 놈들.”

가볍게 혀를 찬 승건은 숨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순한 얼굴을 한 채훈이 이쪽을 향해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날카로운 외모를 한 채훈이지만 잠에 빠지면 무방비해졌다.

승건은 가만히 채훈을 보았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반쯤 열어둔 암막 커튼 덕분에 침실 내부는 적당히 밝았고 채훈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듯한 이마와 눈썹, 짙고 긴 속눈썹, 모양 좋은 콧날과 입술. 채훈은 서른 살 먹은 남자치고는 섬세한 선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명랑함에 처연함이 더해졌다. 속에 든 것은 폭력적인 맹수인데, 겉모습이 멀끔해서 그런지 이상한 놈들이 꼬였다.

채훈을 클럽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보고서에는 채훈의 사생활이 꽤나 심심한 편으로 적혀 있었다. 집과 병원, 그리고 헬스장과 도장밖에 몰랐다. 취미 중의 하나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것이라는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

그런데 술과 약이 판치는 곳에서 그가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채훈은 클럽의 분위기를 즐기지 않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채훈에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절정은 채훈이 박광호를 쓰러뜨리고 난 다음이었다. 2층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환호를 질렀다. 짧았지만 수준 높은 배틀이었다며 다들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 써니는 채훈이 마음에 든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채훈이 양주를 단숨에 들이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광호만큼이나 써니 역시 만만찮은 성격이었다. 이상한 놈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야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온갖 페로몬 향기를 다 묻히고 다니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보통은 알파가 독점욕과 소유권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오메가에게 페로몬을 덧씌우곤 했다. 채훈은 베타였기에 자각이 없이 무덤덤했다. 반면에 승건에게는 채훈이 악취를 몸에 묻히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채훈과 함께 있으면 향기와 맛은 돌아오지만, 페로몬의 향기는 여전히 역하기만 했다.

“쯧.”

박광호와 써니의 것에다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것까지 뒤섞여 코를 찌르던 페로몬 향기를 떠올린 승건은 인상을 확 썼다.

역한 냄새는 씻으면 깨끗하게 사라지긴 했다. 그래도 애초에 페로몬 향이 묻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오메가였다면 자신의 향으로만 뒤덮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채훈은 베타였다. 그것도 특이한 체질의 베타 말이다.

“특이 체질이라…….”

승건은 채훈과의 인연을 생각했다. 채훈의 체질 때문에 그를 오메가로 오해하고 상상 각인을 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을 제약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납치의 순간에 채훈의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지금 자신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채훈을 향한 감정은 애증과 닮아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감성적으로는 그가 아니었다면 하는 원망의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거기에 소유욕이 뒤섞였다.

승건은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은 물건을 아끼는 타입이었다. 손에 익은 소지품을 오래도록 간직하며 썼다. 사람을 물건처럼 아낀다는 말은 건방졌지만, 채훈이 치료제 역할을 하는 동안만큼은 자신의 손에서 컨트롤되어야 했다. 제멋대로 튀어나갔다가는 빌미만 만들어주는 셈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인간관계를 떠올리던 승건은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신경을 거슬렸다. 기억을 되찾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머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이럴 때는 진통제도 크게 소용이 없었다. 짜증 나는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좋은 향이 맡아졌다. 그것이 자신을 향해 누워 있는 채훈의 숨결에서 나는 것이라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승건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채훈의 손끝에 코를 대었다. 채훈에게서는 체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맨살의 냄새가 났다. 인공적인 향도, 역한 냄새도 아니었다. 굳이 이미지로 표현하자면 햇살에 잘 말린 옷가지의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어딘가 바삭바삭했다.

두통은 여전했다. 그래도 날카로운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향기에 기분이 나아져서 승건은 웃으면서 눈을 떴다. 깊이 잠든 채훈은 미동조차 없었다.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승건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잠에서 깨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채훈은 반듯하게 누워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낯설고도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

여기가 어딘가 싶다가, 어젯밤의 일이 생각난 채훈은 허둥거리지 않고 자리에 앉아 일어났다. 곧 익숙한 실내가 보였다. 침실 안에 몇 없는 가구들은 모두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원형 탁자와 의자 두 개, 액자, 러그, 욕실로 이어지는 문, 짙은 회색 커튼. 그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햇빛 때문이었다.

지난겨울, 동창회 다음 날 아침을 제외하면 이곳에서 해가 뜬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별생각이 없었는데, 승건을 만나고 헤어진 것이 늘 밤이라는 것을 이제 와 깨달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암막 커튼이 반쯤 열린 창가에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멍하니 보던 채훈은 시간을 가늠했다. 그림자의 길이로 봐서는 조금 늦은 아침일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도 승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채훈은 천천히 얼굴을 문지르며 정신을 일깨웠다.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젯밤에 입고 왔던 옷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던 것을 떠올렸다.

저녁을 먹고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현관에서부터 승건과 뒤엉켰다. 쥐어뜯듯이 서로의 옷을 반쯤 벗기다가 말고 몸을 섞었다. 그것도 침대에 가지도 못하고 맨바닥에서 말이다.

옷을 빌려 입어야겠네.

현실적으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은 채훈은 우루루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에 쓰게 웃었다. 마치 섹스를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애송이처럼 굴었다. 침대에 갈 여유도 없이 맨바닥에서 일을 쳤다. 그때는 딱딱한 바닥도 개의치 않았는데, 지금은 허리가 아파서 괴로웠다.

“아이고. 허리야.”

채훈은 할아버지라도 된 듯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욱신거림과 둔통이 엉덩이와 허리를 따라 머리까지 울렸다.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눕고 싶은 것을 참은 채훈은 욕실에서 가볍게 세안을 하고 샤워 가운을 챙겨 입었다. 그대로 침실을 나서자 승건이 라켓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어.”

8시가 일찍은 아니었다. 얼마 못 자긴 했는데, 평소 일찍 일어나는 습관 덕분에 그냥 눈이 떠졌다.

“앉아. 샌드위치 차려줄 테니까.”

채훈이 식탁으로 걸어가는 동안에 승건이 냉장고에서 샌드위치 1인분과 오렌지 주스를 챙겨 왔다. 식탁에 앉은 채훈은 자신의 앞에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내려놓는 승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유리그릇에 담긴 샌드위치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승건의 아침은 외할아버지댁에서 보내준 배달음식이라고 했다.

“이거, 외할아버지댁에서 보내준 거 맞지?”

“맞아. 그런데 왜?”

“어, 그럼 이거 네가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네 것까지 부탁했어. 난 이미 먹었으니까, 그건 네 거야.”

“응. 잘 먹을게.”

이미 먹었다고 하니까 채훈은 사양하지 않았다. 다만 당장에 먹는 대신에 외출복 차림을 한 승건을 보았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니트에 면바지라는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그 위에 재킷을 입은 것을 보면 어디 나갈 모양이었다.

“어디 가? 아니면 갔다 온 거야?”

“갈 거야. 일요일에는 스쿼시를 하거든. 같이 해볼래?”

“지금 상태로는 좀 그래.”

너는 네가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느냐고 뒷말을 붙이고 싶은 것을 채훈은 꾹 참았다. 왠지 뺨이 아니라 귀가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그걸 아는지 승건이 웃었다.

“지금 말고, 나중에라도.”

“그거 은근 힘들어.”

“구기 운동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어, 음. 아침부터 약점을 들쑤실 거야?”

이번은 약점을 제대로 지적당한 채훈이 도전적으로 웃어 보였다. 채훈은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자신 있었지만 동그란 공을 다루는 것만큼은 약했다. 축구는 공을 하늘 높이 차올리는 개발이었고 농구는 드리블을 하다 보면 어느새 공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건 테니스나 탁구, 심지어 배드민턴조차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학창시절 채훈은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지고도 축구를 하면 늘 골문을 지켰다.

아픈 곳을 푹 찌른 주제에 승건이 퍽이나 흥겨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구는 잘 사용하니까, 테니스를 해봐. 꾸준히 배우면 금방 잘할 거야.”

“생각해 보고.”

채훈은 승건의 그럴듯한 제안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운동은 충분히 하고 있으니, 재주도 없는 공놀이에는 관심이 없었다. 승건도 화제를 바꾸었다.

“늦어도 11시 전에는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편히 있어. 그릇은 그냥 개수대에 두면 돼.”

친절한 설명에 채훈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은 집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더러운 그릇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채훈의 성격이 아니었다. 깨끗하게 씻어두는 것은 집주인이 없을 때의 손님이 하는 일이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할 말을 전한 승건이 라켓 가방을 챙겨 들고 나갈 준비를 했다. 채훈은 샌드위치에 손도 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승건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승건이 몇 걸음 걷다가 전실 앞에서 뒤돌아보았다.

“왜 따라 나와?”

“배웅……하려고?”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채훈은 중간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의아한 승건의 눈빛에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누가 나가면 배웅하는 거잖아. 집주인님께서 나가신다는데, 하나뿐인 손님이 앉아 있으면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채훈의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성격으로 자식들의 예의범절에 엄격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집 안팎을 오갈 때, 손님들이 오가실 때, 마중과 배웅은 기본이라고 가르쳤다.

어렸을 적의 혹독한 학습은 나이가 들어서도 고스란히 몸에 배어 있었다. 집주인이 밖에 나가는데 멀뚱히 앉아만 있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었다. 속옷조차 입지 않은 채, 샤워 가운만 걸치고 있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랬다.

횡설수설한 설명이 통했는지 승건이 입술 끝을 올려 픽 웃었다.

“그래. 갔다 올게.”

“집 잘 보고 있을게. 조심해서 갔다 와.”

집을 지키는 경비견이 할 법한 말을 읊은 채훈은 부끄러워하는 대신에 씩 웃어주었다. 승건이 신발을 신고 나설 때는 손까지 흔들었다.

문이 닫히는 것까지 웃으면서 지켜본 채훈은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이제야 치솟는 화끈거림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하…… 하하. 미치겠네.”

희미하게 웃던 채훈은 결국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집주인을 배웅하는 손님이나 경비견 말고도, 남편을, 혹은 애인을 배웅하는 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채훈은 제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채훈은 연애를 쉽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과는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었고, 선 안에 들어오는 친인에게는 약한 편이었다. 승건이 자신의 선 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애매한 관계에서 살을 맞대는 것부터 시작했더니 거리감이 자꾸 애매해졌다.

특히 어제 승건이 박광호에게 백이라고 해주었던 것이 컸다. 도와 달라고 했더니 정말 시원하게 도와주었다. 유치한데 멋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렇게 실망하고는 거리를 지켜야겠다고 다짐한 주제에 다시 제자리였다. 자신이 이렇게 쉬운 남자였나 싶었다. 학습 능력도 없는 바보 멍청이라고 스스로를 욕했다.

“쟤는 텄어. 관둬.”

채훈은 스스로에게 자조적인 설득의 말을 들려주었다. 시작부터 감정이 얽히지 않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못부터 박고 계약까지 한 녀석이었다. 뭔가 기대를 하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학창 시절에 그를 짝사랑한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좋아한 거였고 잘될 거라고도 바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고, 가망 없는 짝사랑을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때는 애달픈 마음이 반짝거리기라도 했지, 지금은 가시밭길을 알고도 뛰어드는 짓이었다.

“모르겠다.”

사람의 인생이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남은 9개월은 무탈하게 보내는 것이 목표가 된 채훈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며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사정없는 손길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에 뭔가가 떠올랐다.

채훈은 휴대폰을 찾아 움직였다. 아까 일어났을 때, 침대 옆에 있는 협탁 위에 휴대폰과 지갑을 봤었다.

협탁 위에 잘 놓여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든 채훈은 영환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팝업 창을 모르는 척했다. 대신에 승건에게 전화를 걸지, 메시지를 보낼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승건과의 연락은 대부분 메시지로 해결했다. 서로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주말이었고 방금 전에 집을 나선 녀석에게 일부러 메시지를 보낼 필요는 없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방금 전에 웃으며 떠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쌀쌀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채훈은 이러니까 관둬야 하는 거라고 한 번 더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내 옷이 없어서. 아까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했어.”

―아, 그거. 세탁 보냈어. 구겨지고 해서. 오후에나 옷이 올 테니까, 옷장에서 편한 거 꺼내 입어. 새 속옷은 오른쪽 제일 아래 서랍에 있고, 양말은 바로 왼쪽 칸이야.

승건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럴 때면 또 다정해서 괜히 속이 쓰렸다.

채훈은 고맙다고 하고는 통화를 끊고 바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적당한 일상복을 입으려고 했지만 키 차이 때문인지 바지도 소매도 길었다. 아무래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모양새였다.

거울을 들여다본 채훈은 아주아주 약간 우울해졌다. 경찰대를 지원하면서부터 큰 키와 단단한 체형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가리는 거 없이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도 모든 것이 평균 언저리였다.

평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학창 시절에 저놈의 키는 따라잡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던 승건의 옷을 입고 비교되니까 왠지 짜증 나려고 했다.

“도대체 뭘 먹어야 크는 거냐고.”

이미 성장기의 나이는 훌쩍 지났다. 자격지심 같은 건 키우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지만, 그래도 괜히 시비조의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일상복을 곱게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채훈은 트레이닝복을 골라 입었다. 품은 여전히 컸다. 소맷단과 바짓단은 두 번이나 접어야 했다.

드디어 제대로 옷을 입은 채훈은 식탁에 앉아 준비된 오렌지주스부터 한 모금 마셨다. 한숨 돌리자 집 안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첫날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그저 이미지만 남아 있던, 그 이후에는 해가 지고 난 다음의 풍경만 기억하고 있는 거실이 환한 4월의 햇살에 밝게 빛났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황량하기까지 한 거실이었지만 그래서 여유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 조금 웃겼다.

채훈은 물건에 대한 욕심은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좁은 원룸은 몇 되지 않은 물건으로도 가득 차버렸기 때문에 이런 빈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넓고, 조용하고, 깔끔하고, 화사하고.

이런 곳에서 살면 좋긴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난방비가 많이 들겠지.”

주상복합 아파트를 살 만한 돈도 없었지만, 유지비 또한 만만찮은 현실을 떠올리며 채훈은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버릇처럼 오늘의 일정을 떠올렸다. 10시에 승건이 돌아오고, 잠시 볼일을 본 다음에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다음은 정해진 것이 없었다.

느긋하고 한가로운 일요일이 될 것을 예감했다.

*

*

세 시간 후. 채훈은 가늘게 눈을 뜨고는 아주 값비싸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는 승건을 내려다보았다. 노려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승건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내가 주는 건 모두 받겠다면서.”

“그래도 이건 아니야.”

“뭐가 아닌데.”

“최승건.”

“너는 체형이 좋아서 클래식 정장도 잘 어울릴 거야.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

유창하기 짝이 없는 권유에 채훈은 아연해졌다. 승건에게 부드럽게 말하라고 조언을 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잘 어울린다고 하는 것만으로 다 통하는 건 아니었다.

“그 말만 하면 다 통하는 줄 알아?”

“네가 한 말은 지킬 거라고 믿고 있거든.”

너를 믿는다고 한 승건이 채훈을 올려다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명백하게 만들어낸 미소였지만 워낙에 잘생긴 탓에 그럭저럭 어울렸다. 그래서 채훈은 그냥 따라 웃고 말았다.

10시에 시간 맞춰 도착한 승건과 약속대로 같이 움직였다. 승건이 채훈을 실어다 나른 곳은 청담동에 위치한 테일러 샵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에 뭐냐고 물었더니 잠시 들를 곳이랬다.

순진하게도 채훈은 승건이 테일러 샵에 볼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승건을 따라 아주 멋지게 꾸며진 휴게실을 따라 들어왔을 때조차 말이다.

그러다 테일러가 나타나서 승건이 아니라 채훈에게 피팅룸으로 가자고 하고 난 다음에야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러냐고 했더니 승건이 말했다. 내가 주는 것은 모두 다 받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말이다.

10일 전의 자신을 매우 후려치고 싶어진 채훈은 억울한 심정으로 테일러 샵의 휴게실을 둘러보았다. 톤 다운된 꽃무늬 벽지, 엔틱 가구들과 양탄자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는 이곳이 아주 비싼 곳임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대기하고 있는 테일러조차 그랬다.

채훈은 패션에 관심이 없었다. 트렌드나 유행하고도 거리가 멀었다. 가능하면 직접 입어보고 구매하는 것을 선호했고, 무난한 디자인을 골랐다. 어떨 때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코디 그대로 구입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게 채훈에게 있어서는 쇼핑에 실패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패션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주워듣는 게 여럿 있었다. 수제 맞춤 정장도 옷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청담동의 개인 테일러 샵이라면 비쌀 게 분명했다. 물론 몇백, 몇천만 원짜리 시계를 마음대로 하라는 녀석에게는 별것 아닐 것이다.

채훈은 승건에 대한 호의와 별개로, 지금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녀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속에 있던 말이 소리가 되어 나왔다. 그런데 승건의 대답이 엉뚱했다.

“지금 여기서 대답하면 네가 싫어할걸?”

“……?”

“정말 말해?”

“……?!”

그제야 채훈은 승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휴게실에는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테일러가 채훈의 등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지극히 노골적인 허리 아래의 사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승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채훈은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건이 말을 이었다.

“말할까?”

“마음대로 해봐. 할 수 있으면.”

“여기 채광이 좋아서, 밤이 아니라 낮에 네 벗은 몸을 보면 좋―”

“야!”

하라고 했다고 진짜로 야한 소리를 하는 승건을 향해 채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식은땀이 흐르려고 했다. 그러나 승건은 진지했다.

“나는 기싸움하는 거 안 좋아해. 그리고 한 번 하면 이겨야 직성이 풀리고.”

“그래서?”

“그래서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지라는 소리는 제법 솔직해서 재수 없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채훈은 승건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승건은 자기 의견을 거의 내보이지 않았다. 하자면 하자는 대로 따라오는 편이었다. 다만 싫은 것만 싫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곤 했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승건도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꽤나 변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유치한 걸 아는데도 괜히 승부욕이 생겼다. 승건이 무엇을 주든지 그냥 받으면 그만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예감이 왔다. 부자라는 녀석이 무엇을 얼마나 줄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승건의 멱살을 잡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네가 들으면 싫어할 말을 하고 싶은데.”

“……?”

“가끔은 네 멱살을 잡고 싶어.”

채훈은 승건이 싫어할 말을 굳이 했다. 멱살을 잡고 싶다는 과격한 고백에 눈을 크게 뜨던 승건이 곧 웃었다.

“괜찮아. 나도 가끔 그래.”

승건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도 그렇다고 말하는 바람에 채훈은 그냥 웃고 말았다. 10년 전에도 하지 않았던 유치한 말싸움을 지금 하고 있다는 사실이 웃겼다. 고등학생이 아니라 초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서로 마주 보며 웃다가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채훈이었다.

“내가 한 말은 지킬 거야. 피팅룸에 가죠.”

채훈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테일러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병풍처럼 조용히 서 있던 테일러가 활짝 웃으며 앞장섰다. 그런데 승건이 의자에서 일어나 따라왔다.

“너는 왜 따라와?”

“나도 가려고.”

“네가 왜? 치수 재는 건 내가 하는데? 너도 하려고? 나중에 하면 되지 않아?”

“네가 치수 잴 때 옆에 있으려고 하는데.”

“……?”

“옆에서 조언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게 나아.”

승건의 말에 채훈은 잠시 망설였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맞춤 양복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승건이 옆에서 뭐라도 거들어주면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 채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

*

승건은 그의 말대로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신체 치수를 재는 것은 금방 끝났다.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옷감을 고르는 일이었다. 그때 승건이 활약했다. 선호하지 않는 색깔과 무늬를 제외하라는 승건의 조언을 듣고 난 다음에야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양손과 양발의 본을 뜨고 치수를 쟀다. 장갑과 구두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승건이 우아하게 웃으면서 장갑은 신사의 기본이라고 하는 바람에 채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외식하러 가는데 몸에 맞지도 않는 운동복은 아니지 않냐면서 샵에서 미리 만들어둔 기성복을 권했다. 테일러는 승건의 말에 얼른 맞장구쳤다. 채훈의 체형이 늘씬한 표준 체형이라면서 이것저것 추천하기까지 했다.

채훈은 10일 전으로 돌아가서 제 입을 꿰맬 수 없었다. 스스로 놓은 덫에 걸린 결국 채훈은 새로운 양복에 구두까지 신고는 중식당에 앉아야 했다.

“머리가 아쉽군.”

뚱하게 앉아 메뉴판을 살피고 있던 채훈은 승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승건의 시선에는 탐색의 기색이 가득했다.

머리가 아쉽단다. 어젯밤에 감은 머리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평소에 딱히 머리에 손대지 않는 채훈은 메뉴판을 든 채 승건을 경계했다.

“머리는 건드릴 생각하지 마. 난 이게 편해. 아니, 왁스 싫어.”

“확실히 시간이 빠듯하긴 해.”

승건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시간이 있으면 머리까지 만졌을 거라는 암시였다.

이 녀석이 작정했구나.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다른 것에 집중했다.

“다른 약속이 있는 거야? 일?”

“바쁜 때니까.”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진짜 일이 있다는 대답에 채훈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거대 그룹의 대표이사라면 일이 넘칠 것이다. 아무리 정 회장의 외손자라고 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고생하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밤낮없이 일하는 데다가 주말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은 너무했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다니. 무리하는 거 아니야?”

“여긴 인맥이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어.”

인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승건의 말투에서는 야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누구보다 막강한 인맥과 친인척을 가지고 있을 승건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채훈은 신기해서 되물어야 했다.

“인맥? 네가 챙겨야 할 인맥이 있어?”

“많지. 이권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까. 챙겨야 할 경조사가 많아.”

“아아, 경조사. 그것도 일의 연장인데. 그게 더 힘들지 않아?”

“맞아.”

“주말에도 일하는 고달픈 직장인은 다 똑같네. 뭐,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님께 이런 말 하면 웃기지만.”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를 일반 직장인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주말에 상사나 거래처 사장님의 경조사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고달픈 일이었다. 직장인이라는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승건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가운데 채훈은 종업원을 불렀다. 승건이 메뉴 선택에 대해서는 온전히 채훈에게 맡겼기 때문에 가장 비싼 코스요리를 시켰다. 통장에 꽂힌 1억 6,000만 원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사치였다.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술까지 주문한 채훈은 만족스러웠다.

“술은 한 잔만 받아. 마시지는 말고.”

“확실히 맞춤보다는 못하네. 셔츠 목깃이 커서 주름졌어.”

술을 싫어하는 승건에게 잔만 채우고 있으라고 했더니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승건의 말대로 셔츠 목깃의 둘레가 조금 여유롭긴 했지만 넥타이로 꽉 조인 덕분에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뭐. 괜찮아. 이 정도는.”

“자신의 몸에 꼭 맞는 물건은 느낌이 다를 거야.”

확실히 채훈은 맞춤 의상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몸에 꼭 맞는 옷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의 느낌보다는 승건이 왜 이렇게 입고 걸치는 것에 집착하는지 궁금했다.

“솔직히 물어보자.”

“……?”

“무슨 생각이야? 아까처럼 농담하지 말고. 내가 다 받는다고 하기는 했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시계는 그렇다 쳐. 그런데 갑자기 양복은 또 뭐야?”

딴소리 못 하게 미리 경고까지 한 채훈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네가 어디까지 받을까 궁금하다면?”

“어디까지 줄 수 있는데?”

“글쎄. 시계는 별로인 것 같으니, 차는 관심이 있으려나?”

“놀리지 말고.”

채훈은 설마 싶은 마음에 승건을 노려보았다. 옛날과 달라진 승건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었다. 정말 차를 가지라며 내밀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에 깨달은 건데, 널 꾸미는 게 재미있었어. 흥미롭기도 했고.”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채훈은 눈을 크게 떴다. 대학을 다닐 때 여자 동기들 중에 누군가가 남자친구의 옷을 골라 사주는 게 재미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선임 중에서도 부인이 코디해 주는 옷을 그대로 입고 온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맥락이라면 아주 이상하지는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승건과 어울리지 않았다.

“취향이 많이 독특하네.”

채훈은 무어라 더 따지지 않고 간단하게 결론 내렸다. 손목시계를 선물하더니, 모양 좋은 손을 좋아한다고 한 것이 바로 10일 전이었다. 정장을 사 입히다가 취향을 깨달을 수도 있는 법이었다. 승건도 독특한 취향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은 채 웃었다.

진짜 주는 건 다 받아야겠네.

놀리는 게 아니라 승건이 좋아서 주겠다면 뭐 어떠냐 싶었다.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테이블이 세팅되고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냉채부터 시작해서 송이전복 수프로 이어졌다. 제대로 된 중식을 오랜만에 맛보게 된 채훈은 금방 얼굴이 풀어졌다.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반짝반짝 눈을 빛낸다는 것을 본인은 몰랐다. 승건이 그것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채훈은 승건이 전처럼 제 몫의 음식을 채 반도 먹지 않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팔보라조와 농어튀김도 모두 맛있었다. 어향동고는 표고 향과 해산물이, 그리고 강한 소스가 어우러져 맛을 냈다. 피망도 아삭아삭해서 식감이 좋았다. 그래도 승건은 한 개를 네 조각 낸 것 중에 반만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맛은 있다고 하는데 먹는 건 영 시원찮았다.

채훈은 문득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해.”

“뭘 물어보려고 뜸을 들이는 거야?”

“옛날에 다쳤을 때, 소화기관을 다친 거야? 그러니까 위를 다치거나 하면 소화력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잖아. 중식이 기름지니까 부담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돌려 말하는 것은 채훈의 성격이 아니었다. 혹시나 실수한 게 있다면 사과하고 바로잡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승건이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겉으로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 박자 대답이 늦는 것을 보니 그랬다.

“그런 거 아니야. 적게 먹는 게 버릇이라서 그래.”

“그럼 다행이고. 너무 내 생각만 한 게 아닌가 했거든.”

채훈은 몇 번이나 그때를 떠올렸었다. 납치범이 자신을 향해 휘두른 칼을 막아준 것은 승건이었다. 혹시나 자신 때문이면 이중으로 괴롭히는 게 되는 거였다.

“괜찮아. 그러니까 의식하지 말고 먹어.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 조금…….”

“조금?”

이번에는 승건이 말을 하다 말았다. 채훈은 그게 뭐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좋아할 건데.”

“뭐가?”

“먹는다는 행위라는 게 관능적이야. 섹시해. 그래. 이것도 이번에 깨달았어.”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데 채훈은 사레들린 것처럼 쿨럭거려야 했다. 왜 이 녀석은 모든 것을 그쪽으로 연관시키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얼굴 표정만큼은 무심하고 경건해서 더 그랬다. 차라리 웃으면 같이 웃어줄 텐데 이번에는 진지했다.

“어. 음. 알았어.”

조금 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맛있게 먹는 게 부담스러워져 버리고 말았다. 채훈은 어향동고의 마지막 조각을 집어 들고는 에잇 모르겠다 하며 입에 집어넣었다. 이미 할 거 다하는 사이인데,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 말고, 다른 건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다른 거? 뭐?”

“납치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뒷수습은 어떻게 되었는지 하는 거 말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승건의 말에 채훈은 의식적으로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켰다. 궁금하긴 했지만 캐묻지 말라고 차갑게 말한 것은 승건이었다.

“네가 캐묻지 말라고 했었잖아.”

“그러긴 했지.”

“지금은 물어도 돼? 대답해 줄 수 있어?”

채훈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반응을 보니 설명을 해줄 것 같았다. 승건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별거 아니야. 유산 문제였어. 외가 말고 친가. 자세히 설명하기는 복잡한데. 그때 내가 죽어야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손을 쓴 거였어.”

“뭐가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면 안 되거든. 게다가 넌 칼에도 찔렸다고.”

채훈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일으킨 것은 생략했다. 여하튼 목숨이 위험한 일인데 별거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돈에 눈이 멀면 무모한 짓을 저지르기도 해.”

승건이 정말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돈에 눈이 멀어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경우가 흔하긴 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다 보면 돈과 관련된 온갖 추악한 일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된다. 사기를 당해 빚을 지고, 유산 상속 때문에 죽을 뻔하고, 돈 때문에 1년이라는 시간을 팔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건이 일상의 일이 되었다. 그런데도 별문제 없이 살고 있다.

채훈은 씁쓸한 웃음을 삼키는 대신에 화제를 살짝 돌렸다.

“지금은? 지금은 괜찮은 거야? 유산 문제 같은 거 없어?”

“내가 받아버렸으니까 끝났지. 내가 죽어도 그 인간들한테 안 가니까.”

건조하게 울리는 승건의 목소리에는 딱히 원한 같은 느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옛날 일이라고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누군지는 알아?”

“아니.”

“몰라?”

“납치범 넷 중에 셋은 시체로 발견되고, 하나는 행방불명이 되었거든. 배후는 대략 다섯 명 정도인데, 누군지 특정은 못 했어. 그래서 다섯 명 모두 박살 났지. 내가 아니라 외할아버지가 했지만. 아, 모두 살아 있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살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승건과 달리 채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배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

승건이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네. 젓가락이 멈췄어.”

“하나 더 물어도 될까?”

“말해.”

“그때. 그 사고가 일어나고 난 다음에, 왜 연락을 안 했어? 그게 제일 궁금했는데. 괜찮다면 그것도 알려줘.”

채훈은 아주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을 꺼냈다. 따지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고의 배경을 들으니, 또 다른 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승건의 동작이 잠시 멈췄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대답하기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설명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

“사고 직후에 반년 정도 혼수상태였어.”

“―!!”

“깨어났을 때는 약 3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상태였고. 납치 사건에 대한 것도,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도 없었어. 네 연락처도 몰랐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명에 채훈은 할 말을 잃었다. 승건은 성격대로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심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채훈의 상상력으로는 태화 그룹의 외손자인 승건이 일반인 친구를 멀리하려고 그러는 건가 하고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친구도 가려가면서 사귀냐고 원망했었다.

그런데 반년간의 혼수상태 후에 기억상실이라니,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멍하니 승건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다시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날 어떻게 알아본 거야? 내가 널 좋아했다는 건? 기억이 돌아왔어?”

“고등학교 시절은 거의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몇몇 사건만 기억났고, 네가 가장 많이 등장했어. 그 전에 너에 대한 것은 기록으로 먼저 알고는 있었지.”

기억은 부분적으로 돌아왔단다. 그중에 하필이면 자신이 승건의 뺨에 키스를 하려다가 말았던 기억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사고 당시의 기억은?”

“안 돌아왔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몰라.”

채훈은 복잡한 기분이었다. 민망함과 함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성인이 되지도 않은 아이가 겪기에는 감당하기 힘든 재난이었다. 또한 1년 반 동안 함께 쌓아온 추억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도 아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것도 모르고…….”

“모르고?”

“나쁜 놈이라고 욕을 엄청 했지. 걱정할 거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채훈은 자신이 품었던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이제 오해도 풀렸으니까 섭섭했었다고 하고는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가당찮은 오해야.”

“응. 오해라는 걸 이제 알았어. 욕한 건 반성할게. 그나저나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네. 기억을 잃었다니. 정신 차리고는 많이 황당했겠다.”

“3년이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부드럽게 대화가 이어지면서 식사가 계속되었다. 불도장에 이어 마지막 요리 선택은, 채훈이 승건의 몫까지 모두 짜장면을 시켰다.

채훈은 승건에게 네가 이걸 좋아한다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급식에서 짜장밥이 나오면 은근히 좋아했던 승건이었지만, 기억을 잃었으니 취향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온 음식을 모두 남겼던 승건이 짜장면은 모두 먹었다. 코스 요리를 마감하는 식사 메뉴인지라 일반적인 양보다 적기는 했지만 말이다.

“짜장면 좋아하네. 여전히.”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채훈이 말했다. 여전히라는 단어로 암시도 했다. 승건이 빈 그릇을 확인하고는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본인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이걸 좋아했었다고?”

“응.”

“그런 것 같네.”

승건이 순순히 인정했다. 짜장면의 기원과 변화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후식과 차가 나왔다. 승건은 차가운 푸딩이 맛있다며 모두 먹었다.

그렇게 점심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 * *

이거 데이트 같은데?

점심 식사를 끝낸 후, 승건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모든 게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는 불렀다. 차는 조금 밀렸지만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승건과의 대화 역시 평범했다. 차가 밀린다든가, 저 차는 운전이 너무 험하다든가, 날씨가 좋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신호를 받고 차가 멈춰 섰을 때였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채훈의 눈에 한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몸을 밀착해 팔짱을 낀 어린 커플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들고 있었다. 여자가 무어라고 하자 남자가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간지러운 데이트 장면이라고 생각하던 채훈은, 문득 자신과 승건의 오늘 일정이 데이트 같다고 생각해 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가기는 했지만 쇼핑을 하고, 점심을 먹고, 간식과 차를 마시고, 그리고 승건의 차를 타고 귀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데이트의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채훈은 저도 모르게 승건을 보았다.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자 차를 출발시키는 승건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신의 생각을 읽힐 것 같은 두려움에 채훈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데이트라니.

입 밖으로 소리 내었다가는 승건의 비웃음을 당할 일이었다. 승건은 만나자고 제안을 할 때부터 감정이 얽히는 건 바라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런데 자신은 자꾸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좋지 않은 징조였다.

승건에게 호감을 느끼고 끌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인데 말이다. 바보 멍청이 같은 짓이라는 건 아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채훈은 와락 인상을 썼다. 이번에도 짝사랑은 싫었다.

특히나 상대가 승건이라면 텄다. 뒷조사를 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궁지에 몰릴 때까지 기다렸던 인간이었다. 감정이 얽히지 않아야 한다면서 계약서까지 썼다. 무신경하게 신용카드를 건네기도 했다.

좋아하지 말아야 하는 조건은 넘쳐났다. 하지만 그걸 따지는 것부터 이미 문제였다.

쟤는 텄다니까.

채훈은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자는 게 지난주였다. 그런데 흘러흘러 도착한 곳이 영 엉뚱한 장소였다. 참으로 고약한 일이었다.

“어디 아파? 표정이 안 좋아.”

“어……. 아니. 괜찮아. 뭔가 생각하느라고.”

승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채훈은 대충 대꾸했다. 다행히 승건은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묻지 않았다.

그랬다면 난감해졌을 것이다. 널 좋아할 것 같은데, 좋아하지 않을 이유를 하나하나 손꼽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프면 아프다고 해. 너는 너무 참는 경향이 있어. 그건 안 좋은 버릇이야.”

말투는 차가운데 내용은 네가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옛날부터 그랬다. 말수는 적은데 핵심만 딱딱 짚어냈다. 그리고 행동으로 먼저 움직이기도 했다. 차라리 남을 이용만 해먹는 못된 놈이라면 욕을 하겠는데, 이런 애매한 다정함은 사람을 더 흔들어놓았다.

채훈은 승건을 탓하다가 관뒀다. 자신이 바보일 뿐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게…….”

“뭔데?”

“어……. 음. 동생한테 시달릴 것 같아서. 어제 클럽에서 동생이랑 같이 있었는데, 너랑 같이 움직인 걸 설명하기가 곤란해서 연락 오는 걸 계속 무시하고 있었거든. 이대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냐고 캐물을 녀석이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어.”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변명이었지만, 말하고 보니 그럴듯했다. 어제저녁에 한 번 짧게 통화를 한 후로 계속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두었다. 채훈은 강영환에게서 온 메시지도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늘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휴대폰 알림을 진동으로 바뀌었는데도 지금껏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채훈은 강영환이 이대로 포기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강영환은 한 번 꽂힌 것에는 꽤나 집요했다.

“계약 조건을 잊어버리지 마.”

승건이 계약 조건을 언급했다. 계약 조건 중 하나가 승건의 정체를 타인에게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 없는 거였다. 이번에는 조금 재수가 없었기에 채훈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투덜거렸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거든. 빌딩 부자 할아버지 손자라고 할까 생각 중이야.”

“강채훈.”

“그럼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할게. 내가 마음에 들어서 다짜고짜 같이 자자고 했다고 하면 되겠네. 사실이니까.”

앞을 바라보며 도발적으로 말하자 승건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채훈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씩 웃어주었다.

“앞을 봐. 사고 나겠다.”

“싸우자는 건지.”

“겨우 이걸로 싸워? 참을성이 약해진 것 같은데.”

가볍게 웃어넘기자 승건 역시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유치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차가 채훈의 오피스텔 원룸 건물에 도착했다. 승건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린 채훈은 차문을 닫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승건아.”

“응?”

“신용카드는 언제 줄 거야? 전에 준다고 했던 거.”

채훈은 승건의 눈빛이 가늘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화기애애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시비를 건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꾸 승건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아파트에 있어.”

“깜박했나 보네. 다음에 만났을 때 주면 돼. 나도 옷이랑 그릇 챙길게. 그럼 조심해서 가.”

채훈은 활짝 웃어주고는 보조석의 문을 닫았다. 지체 없이 떠나는 차의 뒤꽁무니를 채훈은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일부러 뾰족한 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형.”

괜한 짓을 했나 곱씹고 있는데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강영환의 부름이 들렸다. 채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강영환이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아? 간다면 간다고 해야 할 거 아니야. 진규 형님에게 내가 사과해야 했잖아. 그래도 형님이 사람이 좋아서 웃어넘겼지. 아니었으면 욕먹었다고.”

“미안. 내가 직접 사과할게.”

“됐어. 이미 내가 다 사과했는데, 형이 또 나서면 일이 꼬여.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아? 나중에 설명하겠다고만 하면 다야?”

채훈은 강영환의 푸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화가 나면 말이 없어지는 채훈과 달리 강영환은 분이 풀릴 때까지 쏟아내는 스타일이었다. 중간에 말을 끊으면 더 길길이 날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채훈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궁금해서 그런데. 저 남자, 같이 차를 타고 온 남자는 또 뭐야?”

강영환이 손가락 끝으로 승건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이미 차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지만 채훈이 같이 차를 타고 온 걸 봤다면 발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한테서 알파 냄새가 나는 건 알아? 어떻게 아는 사이야?”

채훈은 강영환이 갑자기 승건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의아했다. 그러나 의욕과 호기심이 가득한 강영환의 얼굴을 보자 뭔가 알 것 같았다. 강영환의 눈에 승건이 꽤나 괜찮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승건은 잘생기기도 했고, 키도 크고, 알파에다가, 클럽 VIP 구역을 오갔으니 말이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강영환이 승건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승건이 잘났으니 이목을 끄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괜히 속이 쓰렸다.

“응? 누구야? 형? 안 들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카페라도 들어가자. 날씨가 쌀쌀하네.”

채훈은 승건의 차에서 내린 자리에서 몇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원룸 오피스텔 건물 앞을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길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방금 저기서 나왔어. 그냥 누군지만 말하면 되잖아.”

강영환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째 타이밍 좋게 나타났다 싶었더니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채훈은 이런 집요한 성격의 강영환을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점잖은 성격 탓에 정색하며 싫어하지 못했다. 그저 좋게 잘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채훈의 최선이었다.

“동창이야.”

“동창?”

“고등학교 동창. 거기서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 만났는데 왜 둘이서만 사라진 거야?”

“여기까지 말했으면 됐지. 너는 내 사생활을 꼭 들어야 해?”

이번만큼은 채훈도 길게 설명하지 않고 적당한 곳에서 끊었다. 그러나 사생활이라는 암시에 강영환이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겨우 그것으로 꺾일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 뭐 하는 사람이야? 만날 거야?”

“집안일을 돕는다는데, 자세히는 안 물어봤어.”

“뭐? 왜?”

“그냥 잠깐 만난 거라서.”

승건과 계약을 맺어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것은 절대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적당히 둘러대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강영환은 채훈의 말에 납득하는 대신,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는 더욱 질문을 쏟아냈다.

“잠깐 만나는 건데, 차로 데려다주기까지 해? 옷도 바뀌었잖아. 어제 입은 것보다 더 좋은 거네.”

그제야 자신의 옷이 바뀌었다는 것을 생각해 낸 채훈은 강영환의 날카로운 눈썰미에 속으로 혀를 찼다. 동생이 아니라 수사관처럼 구는 강영환에게 말려들었다가 낭패를 볼 것 같았다.

“어제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었지?”

“……?”

“걔랑 썸 타는 중이야. 어제는 거기서 우연히 만난 거고. 됐지?”

아주 그럴듯한 거짓말이었다. 어차피 승건을 주변에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앞으로 9개월은 더 만나야 하니, 어제처럼 우연이든 뭐든 간에 강영환의 눈에 띌 때를 대비해 미리 연막을 쳐두는 게 나았다. 승건이 알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별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알파잖아. 베타인 형을 왜 만나?”

채훈은 강영환의 아주 당돌한 질문에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아무래도 강영환이 제대로 승건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채훈도 알파인 승건이 왜 자신을 만나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몰랐다. 마음에 든다고 했으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만 있었다.

“너는 성호를 왜 만나는데?”

오메가인 강영환의 애인인 김성호 역시 베타였다. 베타와 만나는 오메가인 강영환이, 베타인 자신과 만나는 알파에 대해 물을 일이 아니었다.

역질문을 받을지 몰랐던 강영환이 얼굴을 구겼다.

“난 경우가 다르다고.”

“내가 마음에 든대.”

“……?”

“그러니까 만나는 거야. 더 이상 설명도 힘들다. 나 이제 갈 거야. 너도 돌아가.”

“형.”

채훈은 강영환이 부르든 말든 그대로 원룸 건물로 향했다.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도 진이 빠졌다. 지금은 당장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강영환이 단숨에 달려와 채훈의 팔짱을 꼈다.

“형. 그러지 말고. 형의 애인이랑 잘되면, 애인 친구라도 소개시켜 줘.”

따지듯이 날카롭던 강영환의 말투가 어느새 부드럽게 바뀌었다. 아무래도 승건은 안 될 것 같으니까 노선을 변경한 것이다.

채훈도 강영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럴 때면 동생이 아니라 찰거머리 같았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타인이기에 강영환의 생각과 언행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내 가족이기에 포용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러나 강영환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제 욕심을 티 내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신이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럴 때는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승건이 아니더라도 채훈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데 아주 신중했다. 가족에게라면 더욱 그랬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난 그런 거 안 해.”

“형.”

“잘 가. 따라올 생각 하지 마. 아직 출입금지야.”

강영환이 애타게 형을 불렀지만 채훈은 돌아가라고 손만 흔들었다. 그러자 강영환이 고운 얼굴을 날카롭게 찡그렸다.

“작은형은 말이 안 통해. 바보 같으니라고. 어제 내가 진규 형님 비위 맞추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웃어넘겼다며.”

“씨……. 두고 봐!”

버럭 소리를 지른 강영환이 그대로 뒤돌아서 뛰어가 버렸다.

너무했나 싶던 채훈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서 마음 약하게 굴었다가 승건까지 엮이면 더 곤란해졌다. 이게 최선이라고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재킷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수요일. 10시.]

승건이었다. 한결같은 메시지에 채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인했어. 그때 보자.]

의도적으로 예의 바른 답장을 보냈다. 다음 주말에도 외식을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작업 걸 때의 멘트는 자제해야 했다.

그러나.

[토요일. 1시. 점심 먹자.]

채훈은 자신이 포기했던 제안을 승건이 먼저 해버린 사실에 웃음을 터트렸다. 녀석은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이 정도면 오해하고 싶어졌다.

“오해는 무슨.”

혀를 찬 채훈은 재빠르게 자판을 눌렀다.

[알았어.]

짧은 대답에는 들뜨고 복잡한 심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채훈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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