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변화】
거울 속의 남자가 채훈을 향해 빙긋 웃었다.
머리는 깔끔했고, 셔츠는 구김 하나 없었다. 푸른빛의 광택이 도는 넥타이와 핀, 일주일 전에 승건에게서 받은 양복이 남자와 잘 어울렸다.
채훈은 자신이 들떠 있음을 인정했다. 마치 10여 년 전에 승건과 영화를 보러 갔을 때와 비슷했다.
당시 할리우드의 유명 블록버스터 영화 시사회 티켓을 구한 것은 서주명이었다. 그는 영화는 별로 안 좋아한다며 티켓만 넘기고는 빠졌다. 신유진은 시사회 3일 전에, 남태호는 하루 전에 각자의 사정으로 불참한다고 알려왔다. 결국 시사회는 채훈과 승건만 가게 되었다.
채훈은 놀이동산에 가기 전날의 아이처럼 완전히 들뜨고 말았다. 가지고 있던 옷을 모두 꺼내고 한 번씩 입어보다 못해, 형의 주먹질을 이겨내며 카디건을 빌렸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승건에게서 받은 양복을 입고 시계를 차고 머리까지 세팅했다. 꾸몄지만 안 꾸민 듯 보이려고 얼마나 신경 썼는지 모른다.
“미치겠네.”
채훈은 한숨처럼 탄식을 내뱉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다. 감정적으로 얽히지 말아야 할 녀석을 두고 이렇게나 들떠 있었다.
마치 데이트 같아서.
어젯밤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단어는 채훈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지난 수요일에는 그냥 섹스만 하고 헤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달랐다.
“어쩌냐.”
채훈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바보처럼 웃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고는 서주명이 나타났다. 야근을 하고 낮에 퇴근한 그의 얼굴은 피곤으로 절어 있었다.
“왔어?”
“어.”
비실비실거리며 안으로 들어온 서주명이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채훈은 눈 밑이 퀭하다 못해 어딘가 넋이 나간 서주명이 안쓰러웠다. IT 기업이 사람을 갈아 넣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서주명이 채훈의 집에 굴러들어 온 것은 화요일 밤이었다. 그는 절박한 얼굴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다.
사연은 복잡했다. 서주명이 사는 오피스텔 수도관이 노후되어 물이 새면서 그의 집이 침수되다시피 했다. 관리인이 기술자를 불렀지만 수도관 교체를 하려면 벽을 뜯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결국 서주명은 예정에도 없이 이사를 가야 했다.
하지만 서주명은 최근 주말에도 출근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 이사 갈 집을 찾을 시간조차 없었다. 결국 짐은 본가에 가져다 놓고 회사 근처의 고시원에 들어갔다. 계속되는 야근에 잠만 자고 샤워만 할 수 있으면 상관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며칠 만에 다량의 벌레가 나오는 바람에 채훈의 원룸으로 도망쳐 나온 것이 수요일의 일이었다.
벌레를 아주 끔찍하게 싫어하는 서주명은 당장에 고시원을 나왔다. 문제는 고시원 주인이 그런 이유로는 월세를 환불해 줄 수 없다고 배를 쨌다는 것이었다. 시간도 돈도 빠듯한 서주명의 사정을 알고 있는 채훈은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서주명은 밤늦게 퇴근해 씻고 잠만 자고 출근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데다, 깊게 잠들기까지 하는 채훈은 아침에야 서주명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게 전부여서 같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피로에 찌들어 퀭한 눈을 한 친구가 놀러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지 말고, 얼른 씻고 자.”
“잠시 멍 좀 때리고. 그런데, 너는 데이트?”
“으응?”
“뭘 놀래? 데이트 잘 갔다 와.”
채훈은 데이트가 아니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서주명은 눈치가 빨랐다. 승건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것보다는 그냥 데이트를 한다고 하는 게 나았다.
마지막으로 지갑과 휴대폰을 확인한 채훈은 서주명을 힐끗 보았다.
“늦을 수도 있어. 늦으면 연락할게.”
“외박은 안 해?”
“어? 아니. 돌아올 거야.”
“애인한테 나랑 같이 동거하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마. 눈치껏. 너는 그런 거에 약하더라.”
서주명의 아주 친절한 조언을 뒤로하며 채훈은 얼른 원룸을 빠져나왔다. 아직 약속 시간이 더 남아 있었지만 잘못했다가는 서주명에게 탈탈 털릴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채훈은 승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승건이 메시지를 읽었다는 흔적은 없었지만 채훈은 상관하지 않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물을 나서자 환한 햇살이 채훈을 반겨주었다. 계절은 봄. 날씨가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졌고 가로수는 생기 넘치는 연두색 잎으로 옷을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봄의 기운은 들뜬 채훈의 들뜬 마음과 비슷했다. 채훈은 뺨을 문질렀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얼굴에 다 드러날지도 몰랐다.
[곧 도착해.]
승건의 메시지를 확인한 채훈은 바보처럼 웃다가 일부러 얼굴을 굳혔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
*
우아하게 꾸며진 식탁 위에는 예쁘게 데코된 한입 음식이 선보였다. 메인 식사 전에 가장 먼저 제공된 아뮤즈 부쉬는 맛을 보기 전에 눈으로 즐기기 충분했다.
하지만 채훈은 눈앞에 놓인 음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여전히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외출하기 좋은 날에 승건의 차를 타고 프렌치 레스토랑에 도착해서는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완벽한 개인실은 아니었지만 벽돌로 된 파티션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가릴 수 있는 덕분에 단둘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지난주에 갔었던 테일러 샵에서 가봉한 슈트를 입어보고,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승건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모든 것이 데이트와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신 좀 차려라, 강채훈.
채훈은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가시밭길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그냥 즐기는 게 나았다. 바보 같은 짝사랑을 한다는 건, 자각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물론 이것조차 변명이긴 했다.
“어디 아파?”
이것저것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는데 승건이 아프냐고 물어왔다. 음식을 앞에 두고 손도 안 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널 짝사랑하지 않으려고 발악 중이었다고 사실대로 알려줄 수는 없었다.
“아니. 괜찮아.”
“그럼 왜 안 먹고 있어?”
“그냥, 갑자기 뭔가 떠올라서. 음. 이거 맛있네. 토마토랑 바질이랑 어울린다. 크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 너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그래?”
얼른 음식을 한입 먹은 채훈은 뭔가를 먹는 모습이 관능적이라고 했던 승건의 말을 떠올렸다가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레스토랑은 강남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고, 입구에는 방문 예약제라고 적혀 있었다. 찾으려면 꽤나 정성이 필요한 곳을 승건이 어떻게 알았나 궁금했다.
“심 실장님이 알려주셨어. 여기 괜찮다고.”
“지난주에 테일러 샵도 심 실장님이 찾으신 거지?”
“맞아.”
“심 실장님이 자리에 안 계시니까 하는 말인데, 재벌 비서는 진짜 유능해야 하는 것 같아.”
“유능하시지.”
채훈의 솔직한 감상에 승건이 동의했다. 심정민 실장은 승건의 사생활을 케어하는 비서였다. 각종 뒷바라지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개인 자산도 관리하고 있었다. 승건이 명령하면 심정민 실장이 현실로 만들어냈다. 그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렇게 식사가 계속되면서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채훈은 승건에게 전할 이야기가 많았다. 박광호의 근황부터 우선적으로 말했다. 다음 주부터 박광호는 인사지원팀으로 이동했다. 아예 출근하는 사무실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지난주 내내 시선이 마주치면 똥 씹는 듯한 표정을 짓던 박광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었다.
“사무실 사람들이 좋아했어. 이게 모두 다 대표이사님 덕분입니다.”
채훈은 진심과 농담을 섞어 가볍게 아부했다. 그러나 승건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은 불만스럽다는 뜻이었다.
“반응이 떨떠름하잖아?”
“네가 대표이사라고 부르니까 이상해서.”
“그럼……. 승건아. 고마워. 네 덕분에 다음 주부터 그놈 얼굴을 안 봐. 진짜 살 것 같아.”
이번에는 활짝 웃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제야 승건이 희미하게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표정 변화가 없는 녀석에게는 큰 웃음이었다. 그사이에 연어 카르파치오가 치워지고 달팽이 요리가 나왔다. 다음은 전복이었다.
이야기의 주제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박광호의 진상짓 때문에 누명을 쓸 뻔했던 것부터, 선호하는 커피에 이어, 친구들의 근황에까지 이르렀다. 채훈은 서주명의 불운에 대해 전했다. 이번 달까지는 서주명과 같이 살 거라고 마무리를 하던 채훈은 뭔가를 떠올리고는 승건에게 제안했다.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애들하고 만날 생각은 없어?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필요하면 내가 말할 테니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호의를 가지고 물었던 채훈은 순식간에 무안해지고 말았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승건은 여지를 두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꽤나 아팠다.
“네 말은 너무 날카로워서, 가끔 베일 것 같아.”
“부드럽게 말했어. 네 말대로 말이야.”
“그게? 원래는 어떻게 말하려고 했는데?”
“주제넘게 나서지 마. 이렇게.”
“확실히…… 순화했네.”
채훈은 어설프게 대답했다. 승건은 한 번씩 얼음으로 만든 송곳으로 푹푹 찌르듯 말을 하곤 했다. 방금도 그랬는데, 그게 순화한 거란다.
“주명이나, 태호, 유진이는 이름과 얼굴을 매치하는 게 다야. 만나봤자 할 이야기도 없어.”
승건의 설명은 차분하고 냉정했고 결국 채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기억이 없다면 얼굴을 대면하는 것 자체가 편하지 않을 것이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기억이 없다고 해서 불편하지는 않아.”
“그래?”
“응.”
기억이 없는 게 불편하지 않다는 말에 채훈은 조금 놀랐다.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싶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내 기억은 얼마나 있어? 거의 기억 안 돌아왔다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채훈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사고 이전에 3년 정도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의 기억에 자신이 없다면, 서로 얼굴을 대면했다 하더라도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뺨에 입맞춤하려고 했던 기억만 있다면 민망할 것 같았다.
대답을 바라고 빤히 쳐다보자니 승건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네가 입맞춤하려다가 그만둔 거랑.”
“야. 그거 말고.”
“축구공 맞고 코피 난 거, 윤종수랑 사이 안 좋았던 거, 감기약을 제때 안 먹어서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던 거. 신체검사할 때 키가……. 음?”
“알아. 알아. 거기까지.”
무덤덤하게 말을 잇던 승건은 키라는 단어를 언급하려다가 잠시 채훈의 눈치를 봤다. 채훈은 재빠르게 승건의 말을 막았다. 키는 고등학교 시절에 채훈이 가장 민감했던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친구들과 아득바득 싸워댔다.
이런 걸 쪽팔린다고 하는 거였다. 하필이면 잃어버린 기억 중에 그런 걸 되찾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거기다 승건이 희미하게 웃는 바람에 울컥해졌다.
“내 키를 뛰어넘겠다고 했었던 것도 기억해.”
“놀리는 거야?”
“다 사실이잖아.”
“웃고 있는 거 알거든.”
“네 반응이 웃겨서.”
“그것 봐.”
그렇게 유치하게 투닥거리고 있는데 승건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승건이 잠시 실례한다며 자리를 떴다. 혼자가 된 채훈은 물을 찾아 마셨다.
“진짜……. 왜 그런 것만 기억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결국 웃음이 나왔다. 10년 전의, 그것도 흑역사이긴 하지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은 특별했다.
승건이 돌아오면 네가 삼각김밥을 뜯는 방법을 몰랐던 건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 허술한 구석 하나 없던 녀석이 당황했던 것은 삼각김밥의 김과 밥이 따로 분리되었던 때뿐이었다.
그때는 그저 웃기에 바빴었다. 삼각김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승건에게 곰손이냐고 놀려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태화 그룹의 외손자인 그가 삼각김밥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승건이 금수저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알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혼자서 납득하고 웃고 있는데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승건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데다가 감정 변화가 크게 티 나지 않는 녀석이긴 했지만 조금 전이랑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안색이 별로인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어?”
채훈은 자리에 앉은 승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에 승건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승건이 자신에게 아프냐고 물었던 것은 그만큼 상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건 채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안 어른들을 상대하는 게 제일 까다로워. 귀찮고.”
말하다가 짜증이 났던지 승건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채훈은 승건의 입장을 대충이나마 이해했다. 채훈 역시 친척 어른들을 만나 덕담을 빙자한 온갖 잔소리를 들은 적이 많았다. 어렸을 때는 성적을 물었고, 대학에 들어가면 취업 걱정을 대신해 주었다. 그리고 요즘은 결혼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물론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인 승건은 레퍼토리가 다를 것이다. 아마도 이권 문제일 확률이 높았다.
“어른들이 어렵지. 말대꾸도 못 하고.”
승건을 위로하고 있는데 다시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번에는 승건이 정말 보기 드물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치지도 않는군.”
“뭔데 그렇게 끈질겨? 아, 그냥 넘어가. 캐묻는 거 아니야.”
채훈은 반사적으로 뭐냐고 물었다가 얼른 취소했다. 싸늘한 목소리로 계약 내용을 숙지하라고 하거나, 혹은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진동하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꾼 승건이 얼굴을 구긴 채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맞선을 보라는 거니까.”
“맞선?”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말이 안 통해.”
정말 별거 아닌 이야기였다. 요즘 시대에 서른 살에 결혼이라니 빠를 수 있겠지만, 어른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특히 승건이라면 더욱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승건은 알파에,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였다. 잘생기고 키도 컸다. 재벌들이 결혼을 어떻게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떻게 따지든 승건의 조건은 너무 좋았다. 맞선이든 정략이든 결혼상대로 최고였다.
본인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어른들이 옆에서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채훈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승건을 좋아하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고 했던 자신이 한순간에 우스워졌다.
데이트 같다고 해도 이게 정말 데이트는 아니었다. 승건이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끝나버리는 관계였다.
아니,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모두 그랬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지 않은 이상에야 어느 한쪽이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서로 열렬히 사랑하던 연인조차, 혹은 결혼한 부부조차 그렇게 헤어지는 법이었다.
그래도 시작조차 제대로 못 하고 흐지부지 끝나는 느낌은 별로였다.
됐어. 얘랑 뭘 할 것도 아닌데,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승건과 사귄다거나 연애를 한다거나 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마음을 단속한다는 게 웃겼다. 결혼한다는 소리에 충격받는 것보다 그냥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좋아하는 마음만 안 들키면 그만이었다.
시니컬하고도 충동적인 결론을 내린 채훈은 포크를 도미에 쿡 찔러 넣었다.
“네 조건이 너무 좋기는 해. 그런 이유에서 독신주의면 더 골치 아프겠다.”
“결혼 제도에 믿음이 없다고 해도, 결혼하면 달라질 거래. 달라지기는 하겠지. 더 나쁜 형태로.”
어지간히도 시달렸는지 승건이 말 그대로 으르렁거렸다. 도미 스테이크를 잘라 먹던 채훈은 쓰게 웃었다.
채훈은 연애는 해도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동성혼의 허들이 높기도 했고, 몇 년 동안 연애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현실주의자였기에 열렬한 사랑 끝에 결혼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나길 희망할 뿐이었다. 친구들은 그게 더 현실성 없다고 한마디씩 했지만. 채훈의 친구 중에 유일한 유부남인 신유진조차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생각을 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아직 결혼 생각은 없는 채훈 역시 친인척들의 권유를 많이 받았었다. 그래서 승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도 시달렸나 보네. 나도 비슷한 소리 많이 들어봐서 알아. 정말 별로지. 그런데 전화 계속 오고 있어. 많이 화가 나신 모양인데?”
“상대가 기다리고 있다고 시위하는 거지.”
“기다리고 있다고? 지금?”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았어. 분명히 거절했는데도 귓등으로도 안 들은 거지.”
“와. 그거 너무한데. 일부러 그러는 거야? 너 골탕 먹이려고?”
채훈은 황당함에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거절을 했는데도 맞선을 잡았다니 너무한 게 맞았다. 그런데 승건의 반응은 차가웠다.
“파워게임이야.”
“파워게임?”
“내가 대표이사가 되면서 경영권 방어하는 데 작은할아버지들의 주식이 필요했거든.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았는데, 그걸로 만족 못 하고 새파랗게 젊은 종조카를 제 손으로 주무르고 싶어 하는 거지. 가능하기만 했다면 자기 손녀랑 결혼시켰을 거야.”
살벌한 이야기에 채훈은 인상을 썼다. 승건의 이야기는 대부분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것들이었다. 그냥 결혼 이야기가 아니라 역시나 권력 문제였다.
승건을 둘러싼 것들이 다시 보였다. 누구나 부러워할 빛나는 배경을 가지고도 사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너도 고달프게 산다.”
저도 모르게 위로의 말이 튀어나왔다. 사람마다 고민거리는 다 있는 법이었다. 집안 어른과의 파워게임이라니 채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한 말이었는데 승건의 반응이 이상했다. 눈을 크게 뜨더니 큭 하는 소리를 삼키며 웃음을 참았다. 승건을 기준으로 보면 진짜 크게 웃음을 터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채훈은 이게 웃긴가 싶었다.
“뭐가 웃긴 거야?”
“사는 게 고달파서.”
동문서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승건이 제대로 대답해 줄 눈치가 아니라서 채훈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전화 계속 온다. 안 받을 거라면 뒤집어놔. 화면이 번쩍거려서 정신 사납네.”
채훈이 손가락 끝으로 계속 특정인의 이름이 반짝거리는 휴대폰을 가리켰다. 그러자 승건이 여전히 웃으면서 순순히 뒤집었다.
다시 편안한 식사가 이어졌다.
*
*
마지막 요리 코스인 디저트를 다 먹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사이 한 번도 뒤집어보지 않은 승건의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 와 있었다. 승건이 이렇게 쉽게 끝날 리 없다는 불길한 예언을 했고, 채훈은 힘내라고 한 번 더 위로해 주었다.
다음은 예정대로 테일러 샵이었다. 제 몸에 맞는 양복을 맞추려면 가봉을 꼭 해야 한다는 게 승건의 주장이었다. 채훈은 프로인 테일러가 어지간히 잘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승건을 이길 수는 없었다.
승건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채훈의 주도로 간단한 이야기가 오갔다. 사실 승건은 그다지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말 자체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고, 스몰 토크에도 약했다. 다만 그는 성실한 청자였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때문에 채훈은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주제를 골라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지 않도록 했다.
10년 전에 짝사랑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름의 결론을 내린 탓에 마음은 가벼웠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급변하는 감정도 이렇게 된 거 짝사랑의 묘미라고 즐기기로 했다.
물론, 과감한 결단은 테일러 샵의 피팅룸에서 시험받았다.
가봉된 와이셔츠와 양복을 입고 벗은 채훈은 테일러가 내민 두 번째 슈트에 의아함을 느꼈다.
“이건 뭡니까?”
“가봉한 슈트입니다.”
“방금 벗었는데.”
“오늘 입어보셔야 하는 슈트는 모두 다섯 벌입니다.”
“―?!”
친절한 설명과 함께 테일러가 행거형 옷걸이에 걸린 양복들을 가리켰다. 옷걸이에는 방금 전에 채훈이 벗었던 양복 말고도 세 벌이 더 있었다. 원단이 눈에 익었다. 지난주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들이었다. 저게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채훈은 자동적으로 승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승건은 오늘도 조언을 이유로 피팅룸에 함께 들어와 있었다.
“네가 한 거 맞지?”
“응.”
“다섯 벌이라니. 너무 많아.”
“내가 준 건 다 받겠다고 한 지 한 달도 안 지났어.”
벨벳으로 된 녹색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던 승건이 아주 태연한 얼굴로 마법의 문장을 나열했다. 채훈은 이게 업보인가 싶었다.
“그리고 많은 것도 아니야. 제대로 입으려면 저걸로도 부족해. 여름 슈트는 한 벌뿐이고. 여름 슈트는 한 번 더 이곳에서 맞추고, 겨울 슈트랑 코트는 델레에 오더를 넣어뒀으니 나랑 같이 맞추면 돼.”
여름에 이어 겨울 양복까지 모두 계획한 승건 때문에 채훈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꾸며주는 게 즐겁다고 승건 스스로가 말하긴 했었다. 티가 잘 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것저것 설명하는 승건은 들떠 보였다.
재벌 3세이자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인 승건이 부자라는 건 알았다. 그래도 이러다가 어디까지 받아야 할지 겁났다.
채훈은 과거 자신의 입을 꿰매지 못했다. 대신에 최대한 수습하려고 했다.
“다 받겠다고 한 거 무르자.”
“겨우 이런 것으로 발 빼지 마. 아직 많이 남았어.”
“야, 최승건.”
“너야말로 부드럽게 불러줘. 싸우자는 것 같잖아.”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채훈은 승건이 능구렁이처럼 보였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무표정한 능구렁이일 것이다. 승건의 말대로 싸움을 할 수는 없었던 채훈은 숨을 가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승건아. 내가 생각이 안일했어. 네가 뭘 줄지 무섭다고.”
최대한 부드럽게 승건의 이름을 부른 채훈은 안 통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 찔러봤다. 사실 기세 싸움에서 이미 졌다. 채훈은 양복을 입고 벗느라 속옷만 입은 채 가운을 대충 걸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려, 라고 하면 화낼 거잖아.”
“당연하지.”
“그럼 버릴 수 없는 건물은 어때?”
“농담하지 말고.”
“농담 아닌데.”
“너…… 진짜.”
표정 변화는 크게 없는데 승건의 몸에서 즐겁다는 기색이 뿜어져 나왔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그게 왠지 귀여워 보여서 전투력이 바닥을 치다 못해 같이 기뻐졌다.
너, 나쁘다. 사람 설레게 왜 그래.
이래서 먼저 반한 게 문제였다. 20억이나 받았는데, 이깟 옷이 뭐냐 싶은 대인배의 마음이 다시 샘솟았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승건이 꼬투리를 잡고 넘어졌다. 이번에도 즐거운 기색이라 시비를 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채훈은 자신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생각했다.
“너 욕하려다가 참았어.”
“무슨 욕을?”
“바르고 고운 언어생활을 위해 조금 순화시키면, 너 고집 세다고.”
“음, 고집이 센 건 맞아. 그러고 있지 말고 확인부터 해. 잘 어울릴 거라니까.”
아주 잠시 고민하던 승건이 고집 세다고 인정하면서 양복을 입어보라고 손짓했다. 그제야 채훈은 두 번째 양복을 들고 조용히 서 있는 테일러를 보았다. 아주 유치한 실랑이를 다 보아놓고도 두 분이서 사이가 좋다는 말은커녕 영업용 미소만 짓고 있는 그는 진정한 프로였다.
승건에게 제대로 말려든 채훈은 무어라 더 따지지 못하고 테일러가 내민 양복을 하나씩 입었다.
그 와중에 승건이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테일러 샵이요. 지난주에 맞춘 양복 피팅하러 왔습니다. ……할아버지가요? 지금? ……그럴 줄 알았습니다. ……채훈이 데려다주고 갈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길지 않은 통화였지만 채훈은 상대가 심정민이라는 것과, 승건이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거라는 것을 알아챘다. 승건의 외할아버지는 태화 그룹의 회장님이었다. 작년에 쓰러진 이후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토요일에 갑자기 승건을 호출한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데려다주고 간다고 하니 아주 급한 건 아닐 것이다.
채훈은 이것저것 추측은 했지만 무슨 일이냐고는 실수로라도 묻지 않았다. 모르는 척하고 마지막 양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승건이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한데, 미술관에는 못 가겠어. 할아버지의 호출이야.”
“어.”
“작은할아버지가 고자질을 했나 봐.”
“이런. 작은할아버지가 구질구질하네. 너 곤란하게 만드는 게 취미신가.”
외할아버지이자 태화 그룹의 회장님에게 불려가는 것이 승건에게 어떤 의미인지 채훈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승건이 썩 내키지 않아 한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무조건 승건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법이었다.
“네가 고생이다. 그래도 너무 화내지 마.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니까. 그냥…….”
“그냥?”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고 생각해.”
채훈은 평범하고 흔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잔뜩 했다. 그러자 승건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짓다가 웃었다.
“그거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지?”
“힘내라고. 할아버지에게 혼나러 가는 것 같아서.”
“내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잔소리를 하시겠지. 그래도 힘은 났어.”
언젠가 채훈이 승건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소리였다.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어도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힘은 났다는 말에 채훈은 활짝 웃었다.
*
*
승건의 집으로 이동하던 와중에 잠시 대화가 끊긴 타이밍이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채훈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토요일 오후의 거리는 차량으로 넘쳐났다. 정류장에 줄지어 선 색색의 버스들과 바쁘게 오가는 자동차가 가득한 거리는 평소와 같으면서도 어딘가 주말의 느낌이 났다.
“차가 밀리네.”
승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채훈은 승건을 한 번 힐끗 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승건의 말대로 다음 교차로부터 차가 밀리고 있었다.
평범한 풍경을 바라보다 채훈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이 왜 승건을 좋아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말았다. 실없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에게 이유가 뭐냐고 따지고 싶어졌다.
그다지 좋은 성격은 아닌데.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나서야 승건의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 몸매, 돈. 흔히 따지는 외양적인 조건은 훌륭했다. 하지만 성격만큼은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가 애매했다. 굳이 좋은 점을 하나 꼽자면 의뭉스럽기보다는 직선적인 성격이라는 점이었다. 위선이나 거짓과는 거리가 멀었다.
채훈은 까다로운 기준으로 사람을 사귀었다. 물론 3년 전쯤에 헤어진 전 애인이 양다리를 걸치는 쓰레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매너만큼은 좋았다.
승건도 매너가 나쁘지는 않았다. 가끔 사람 속을 뒤집는 말을 하곤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중한 편이었다.
채훈은 자신이 승건의 좋은 점만 찾으려고 하는 것을 깨닫고는 쓰게 웃었다.
기대, 기쁨, 설렘 등등의 간지러운 감정이 심장에 가득 들어찼다. 마치 보드라운 털을 가진 작은 새들이 가슴 안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이렇게나 명확했다.
그래도 괜히 좋아서 웃고 있는데 재킷 호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채훈의 형인 강수찬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강영환과 달리 강수찬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채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안부 전화를 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채훈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형. 무슨 일이야?”
―너 어디야?
“밖에. 약속이 있어서.”
―언제 돌아오는데.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건데. 왜?”
―외박한다고? 어딘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 대신에 어디냐고 묻는 집요함에 채훈은 인상을 썼다. 진짜 징조가 나빴다.
“친구랑 어디 가고 있어. 급한 일이야? 전화로 말 못 해?”
채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면 승건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너, 심 실장이랑 연락해?
“아니. 심 실장님은 왜?”
―영환이 말로는 시계도 받았다며? 연락 안 해?
“그때, 그러니까 돈 다 갚은 다음에, 한 번 보자고 연락 와서 만난 게 마지막이야. 시계는 그때 받은 거고. 심 실장님은 왜?”
강수찬의 입에서 갑자기 심 실장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바람에 채훈은 긴장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강수찬이 심정민 실장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아. 씨바. 내가 방금 전에 심 실장한테 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라고 하잖아.
“형. 이제 연락 안 하기로 했잖아. 전화번호도 지우고.”
―숫자야 외우면 그만이지. 그것보다 한 달 전까지 멀쩡하게 통화했는데, 왜 갑자기 번호가 바뀌어?
“나도 모르지.”
채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심정민이 가족들에게 알려준 번호는 그의 세컨드 폰이었다. 효용을 다했으니 번호를 바꿀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채훈은 강수찬이 심정민에게 전화를 시도했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회장이라는 작자의 번호도 없는 번호라고 나오는 거 알아? 이 새끼들 진짜 사기꾼 아니야?
채훈은 잠시 숨을 삼키며 말을 아꼈다.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해 가상의 회장님 휴대폰 번호가 적힌 명함을 만들어준 것은 심정민이었다. 채훈이 회장님의 휴대폰 번호가 적힌 명함을 보여준 것은 딱 한 번이었고.
가상의 회장님이 내건 조건은 확실했다. 채권자들의 돈을 갚아주는 대신에 더 이상의 연락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강수찬이 약속을 어기려고 하고 있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이제 와 사기꾼이 아니냐고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그러는 거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약속대로 빚 갚아주셨잖아. 연락 안 하기로 하고.”
―이렇게 칼같이 연락 끊은 거 보면, 뭔가 있어.
“형.”
―아직 은행 대출이 잔뜩 남아 있는데. 네가 먼저 눈치껏 그것도 어떻게 해주십사 해야 할 거 아니야. 언제 돈 벌어서 대출을 갚을래? 응? 씨발. 이놈들은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주지. 겨우 그 돈으로 뭐 하라고. 회장님이라면서 자기 목숨값이 참 싼가 봐. 그리고 너도 그러는 거 아니야. 혼자만 시계 받아먹고. 아니, 됐다. 다 끝난 일인데, 구질구질하게 굴면 뭐 해. 끊는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채훈은 휴대폰을 든 채 잠시 굳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강수찬은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고자 전화한 것이었다. 회장님에게서 나머지 빚을 갚을 수 있게 돈을 받아내야 하는데 원천적으로 막혔으니 말이다.
강수찬이 화가 난 이유도, 그리고 화풀이 상대가 자신이 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아주 바닥을 쳤다.
“누가 회장님을 찾아?”
“형이.”
채훈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강수찬이 가상의 회장님과 연락을 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가족간의 복잡한 사정을 승건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이라고 하더라도 서로의 가족에 대해 자세히 잘 알지는 못했다. 채훈도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낸 서주명만이 대충 사정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형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승건도 방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기는 껄끄러웠다.
“너도 고달프네.”
“어, 응.”
조금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채훈은 승건을 한 번 보았다가 작게 대답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이게 뭐라고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별 이야기 없이 승건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채훈은 승건이 차를 지하 주차장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며 의아했다.
“할아버지 댁에 가는 거 아니었어?”
“갈 거야.”
주차장에 차를 세운 승건이 내렸다. 그를 따라 내린 채훈은 바로 옆에 주차된 차에서 심정민과 처음 보는 남자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심정민이 채훈을 보며 먼저 알은척을 했다.
“채훈 씨.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심 실장님. 여기까지 어떤 일이세요?”
“도련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
채훈은 승건과 심정민을 번갈아 보았다. 여기서 심정민이 도련님이라고 할 사람은 승건뿐이었다. 채훈의 소리 없는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은 승건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직접 운전하는 걸 안 좋아하셔.”
승건의 표정도 목소리도 차가웠지만 어딘가 투덜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른 살이 된 손자가 직접 운전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회장님이 운전기사와 수행원을 보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만스러워하는 이유 역시 이해했다.
그렇게 부루퉁거리는 승건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채훈은 풀어지려는 얼굴에 얼른 힘을 주었다. 여기서 웃었다가는 수습이 어려웠다.
그런데 승건이 그걸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차라리 웃어.”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걱정하시는데, 웃을 수야 없지. 조심해서 갔다 와.”
“늦을 수도 있어. 많이 늦게 되면 연락할게.”
“……응.”
평범한 인사였다. 그러나 그 순간 채훈은 자신의 승건과의 관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를 만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승건의 태도 역시 그랬다. 감정이 얽히지 않아야 한다고 확언했던 승건의 언행은 더 이상 사무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기 전에 승건이 차를 탔다. 채훈은 승건을 태운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번의 깨달음에 채훈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 생각해 보았다. 방금 전처럼 그저 인사만 하고 헤어진다고 상상하자, 마치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처럼 얼어붙었다.
“하아.”
채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축축하고 우울한 기분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럴 때는 달려줘야 했다. 채훈은 승건의 아파트에 있는 러닝머신과 아파트 서쪽에 있는 공원을 떠올렸다. 달릴 공간은 충분했다. 길 건너 상가 건물에 스포츠 의류 매장이 몇 개 있었던 것도 기억났다.
승건의 트레이닝복을 빌려 입을 게 아니라, 갈아입을 요량으로 편한 옷을 사는 게 나았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채훈은 움직였다.
달릴 때였다.
* * *
“네 할아버지가 요즘 말하는 진상인 거지. 주말에는 잘 쉬어야 하는데, 갑자기 오라 가라 하면 누가 좋아해? 으이구. 저 성격은 죽어도 안 고쳐질 거야.”
승건의 외할머니인 이수진이 우아한 목소리로 독설을 내뱉었다. 감히 태화 그룹의 회장을 향해 진상이라고 육성으로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이수진밖에 없었다.
정규완의 부인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재벌가의 안주인이도 한 그녀의 인생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중소기업 사장의 셋째 딸로, 열성 오메가로, 그리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으로 정규완과 결혼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후계자를 원하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 사랑의 도피까지 했으나 결국 헤어져야 했다. 이수진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정규완은 결혼도 하지 않고 후계자를 만든 다음에 결국 이수진과의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남편의 아이를 낳지 못하고,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는 시어머니가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진의 입지가 흔들림 없이 단단할 수 있었던 것은 정규완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파들이 흔히 그렇듯 그 역시 자신의 오메가에게 헌신했다.
대외적으로 우아하고 빈틈없는 재벌가의 안주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수진이지만 손자들에게는 약했다. 특히 승건에게는 더욱 그랬다.
부모의 이혼 후에 혼자가 된 승건을 키운 것이 이수진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낳지 못한 이수진에게 승건은 거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주말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불려 다녀야 하는 승건을 안타까워했다.
“오늘은 도대체 무슨 일로 널 부른 거니?”
“별거 아니에요.”
“잘도 별거 아니겠다. 너도 가만히 보면 할아버지랑 성격이 똑같아. 두 사람 다 말을 아끼니. 됐다. 네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마.”
승건은 이수진의 결론에 아무런 부언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입으로 설명하기에는 꽤나 긴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본가에 도착한 승건은 당장에 외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때마침 외할아버지인 정규완의 재활 치료 시간과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이수진은 이미 외출 중이었기 때문에 승건은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난 다음에야 정규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승건을 보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승건의 예상대로 맞선을 주선했던 셋째 작은할아버지는 직접 본가까지 찾아와서는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신세 한탄을 했다. 어린 종외손자 때문에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단다. 정규완은 그 일로 승건을 질책하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할 거냐고만 물었다.
승건의 외할아버지인 정규완은 뇌졸중의 영향으로 왼쪽 얼굴과 왼팔이 마비되면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신 승건이 대표이사 직함을 달고 전면에 나섰다.
후계자라고 불리고 있긴 했지만 사실 승건은 자신이 징검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규완에게는 딸과 아들 하나씩,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는 둘째이자 장남인 정세혁을 후계자로 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정세혁은 8년 전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었다.
후계자를 잃은 정규완은 딸이 낳은 외손자에게 눈을 돌렸다. 첫째이자 장녀인 정세아는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으로 아들 둘을 낳았다. 10여 년 전의 사고로 후유증으로 결함이 생긴 승건은 처음부터 논외였다. 후계자는 승건의 이부동생인 유찬혁이 되었다.
하지만 유찬혁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정규완이 쓰러질 당시에는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승건이 미국에서 돌아와 그 자리를 메꿨다.
그래서 정규완과 승건의 관계는 할아버지와 손자이기보다는 동업자에 가까웠다.
승건은 태화 그룹 자체에 미련 따윈 조금도 없었다. 귀찮은 일을 떠맡은 것은 이수진이 간곡히 애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승건은 정규완이 온전히 건강을 되찾아 회장님으로 복귀하기를 바랐다.
평생의 족쇄가 될 게 뻔한 정략결혼은 어불성설이었다. 아니, 정확히 승건은 아예 결혼에 뜻이 없었다. 형질자의 페로몬을 역하게 느끼고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지금껏 승건이 보아온 결혼 관계란 서로의 감정을 끊임없이 소모하거나 남처럼 지내는 피곤한 계약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승건의 가치관에도 불구하고, 승건과의 결혼으로 태화 그룹을 노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에게 한 번 여지를 주기 시작하면 일이 꼬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승건은 강경 대응할 것을 밝혔다. 그러자 정규완은 네 뜻대로 하라고 했다. 대신에 셋째 작은할아버지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르지 못하고 밟을 거라면, 철저하게 해라. 다시는 얕보지 못하게 말이다.’
동업자이자 어린 외손자에게 하는 충고는 살벌했다. 친척이 덕담을 빙자한 잔소리를 던지는 것까지야 용납할 수 있어도 주제를 모르고 나선다면 봐줄 필요가 없었다.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철저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정규완이 양측 모두에게 뜻대로 하라 한 것은 제대로 싸움을 붙이겠다는 소리였다.
승건은 정규완의 복심에 혀를 찼다. 능력이 되지 않으면 싫어하는 결혼도 해야 하게 생겼다.
그 모든 것을 이수진에게 설명하기란 복잡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승건은 그렇게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은? 간단하게 도시락이라도 보내줄까? 어떻게 할래?”
정원을 가로질러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수진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가족들 중에 승건의 후유증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한 손에 꼽았다. 그중에 승건의 의식주와 건강을 염려하고 챙기는 사람은 이수진뿐이었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승건은 귀찮을 때면 식사 대용으로 셰이크나 영양제를 먹었는데, 이수진은 그걸 끔찍이 싫어했다. 그래서 독립해서 살고 있는 승건에게 매일 아침마다 도시락을 보냈다.
아무런 스케줄이 없었다면 순순히 도시락을 달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저녁은 채훈과 불고기를 먹기로 했다.
새 운동복과 운동화를 사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는 채훈은 저녁 메뉴로 서울식 불고기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불고기 집 세 곳의 링크를 메시지 창에 올리고는 승건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승건은 밑반찬이 가장 괜찮아 보이는 곳을 골랐다. 채훈은 이번에는 자신이 산다며 기세등등했다.
가리는 거 없이 잘 먹는 채훈과 함께 식사를 하다 보면 승건도 얼떨결에 한입이라도 더 먹게 되었다. 식사량이 형편없는 승건으로서는 꽤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승건은 채훈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약속이 있어요.”
“그래? 그럼 내일 아침은? 지난주처럼 2인분?”
“네. 그렇게 해주세요.”
승건을 대답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지난주에 도시락을 2인분 시킨 것은 심정민을 통해서였는데 이수진이 어떻게 알았는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수진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활짝 웃었다.
“승건아.”
“예. 할머니.”
“조심해서 들어가라.”
승건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인사만 하는 이수진을 보며 웃었다. 이럴 때면 부처님 손에서 놀아나는 손오공이 된 듯했다.
“다른 건 안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대답은 해주고?”
“남자고, 베타예요. 일반인이고. 이쪽이랑 관련 없는 사람이고요. 나머지는 심 실장님에게 확인하세요.”
승건은 채훈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와 함께 주의점을 말했다. 이수진이 이대로 확인만 하고 끝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른 살이나 먹은 손자를 여전히 어리게 생각하고 있으니 보호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은 할 게 뻔했다.
그는 딱히 채훈의 존재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의 효용이 무엇인지만 비밀로 하면 그만이었다. 그건 당사자인 채훈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심할 것은 조심해야 했다. 채훈은 이쪽 세계랑은 관련 없는 일반인이었다.
“설명 한번 삭막하구나. 알았다. 심 실장에게 물어보마.”
“이제 갈게요.”
“조심해서 가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승건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뒤따라 탄 심정민에게 말했다.
“할머니가 물으시면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세요.”
“계약과 관련된 것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설프게 알고 계시면 그게 더 문제가 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승건은 이수진이 딱히 채훈에게 뭘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수진은 10여 년 전의 사건 이후 내내 승건을 불쌍히 여겼다. 특히 페로몬 향을 악취로 받아들이는 승건이 제 짝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채훈이 베타든 아니든 승건과 몇 달 동안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좋아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은 돈으로 거래한 계약이었다. 어쩌면 이수진은 승건에게 그러는 거 아니라고 잔소리를 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채훈과의 관계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채훈의 인성은 괜찮은 편이었다. 태화 그룹이라는 이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오랜만에 만난 성격 나쁜 동창 정도로만 대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오히려 더 다정하게 굴었다.
채훈과 만난 것도 벌써 4개월째였다. 채훈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지만 문제는 그동안 승건의 증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채훈과 함께 있으면 맛과 향이 느껴지지만 길어봤자 3일이 전부인 것은 여전했다. 주치의는 상상 각인이 변수라서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기에 4개월은 짧은 기간이었다. 그래도 승건은 다음을 생각했다. 책임감 없는 가설의 결론은 결국 섹스뿐이었다.
1년이 지나도 제자리라면 채훈과 다시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채훈의 욕심 많은 형제나, 혹은 늘어만 나는 빚을 약점으로 흔들 수도 있었다. 마음 약한 녀석은 제 가족이 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털어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채훈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것과 별개로, 그가 가족들에게 호구처럼 당하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도 그랬다. 일방적으로 화풀이를 하는 제 형에게 채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우울한 얼굴을 했다.
아마도 작은할아버지와 통화하고 난 후의 자신 또한 비슷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고달프다고 위로해 준 것일 터였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고 생각해.’
채훈의 현학적인 말은 웃기게도 가장 현실적인 위로였다. 아무리 큰 사건 사고도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옅어지기 마련이었다. 죽을 뻔한 사고도, 기억을 잃은 것도, 향과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도 결국 적응했다.
하지만 당장에 욕심 많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었다. 채훈이 그걸 어떻게 참고 견디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는 중.]
진동하는 휴대폰을 확인하자 채훈이 메시지를 보냈다. 벌써 6시가 훌쩍 넘어 7시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해는 이제 슬슬 지고 있었다. 늦어지면 연락한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승건은 답장을 보냈다.
[이제 출발했어.]
[알았어.]
채훈의 다정한 성격과 달리 메시지는 대부분 사무적이었다. 평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오늘은 유독 그게 눈에 들어왔다. 승건은 한참 동안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다음 메시지를 적었다.
[조금만 기다려. 곧 도착할 거야.]
[응.]
여전히 답장은 짧았다. 승건은 그게 조금 못내 아쉬웠다.
*
*
강북에서 강남으로 건너가는 동안 해는 이미 완전히 졌다. 8차선 다리 위는 평소보다 유난히 밀렸다.
승건은 길게 늘어선 붉은 불빛의 행렬에 인상을 썼다. 아무리 교통 정체가 심하더라도 신호 한두 번이면 통과할 수 있는 곳인데 10분 넘게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무래도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승건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심정민이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상황을 설명했다. 대교 끝자락에서 5중 추돌 사고로 양방향 교통이 마비되었다는 기사가 속보로 떴다는 것이었다.
승건은 가볍게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길 위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반길 사람은 없었다. 토요일 저녁의 도로 정체는 예정보다 훨씬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승건은 채훈을 떠올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평소라면 이미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도 아직 다리 위였다. 차가 밀려서 늦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승건은 시간 약속에 민감한 편이었다. 채훈이 비를 맞고 돌아갔던 그날은 여러모로 운이 나빴다. 채훈에게 출장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비행기는 기기 고장을 일으킨 데다, 하필이면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이 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정민은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아파트의 비밀번호가 바뀌면서 상황이 엄청 꼬였다. 변동 사항이 있으면 미리미리 알려주는 게 낫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화면을 켜는 순간에 채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배고프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채훈이 딱 그것이었다. 양반은 되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나는 늦을 것 같아. 차가 밀려.]
거기까지 적어 보낸 승건은 통화를 시도했다. 연결음이 오래 가지 않아 채훈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채훈의 목소리는 선명한 편이었다.
―차가 많이 밀려?
“다리 입구에서 사고가 났어. 10분 넘게 제자리야.”
―그래? 너는 괜찮아?
“여기서는 사고 현장도 안 보여. 냉장고에 초콜릿 있어. 그거 먹고 있어.”
―오, 초콜릿. 그런데 곧 밥 먹으러 갈 건데.
감탄하던 채훈이 망설이는 바람에 승건은 소리 없이 웃었다. 채훈은 밥 먹기 전에 간식은 안 먹는 스타일인 모양이었다.
“배고프다며. 요깃거리는 아니니까 몇 개만 먹어둬.”
―어, 응. 그런데 초콜릿은 어디서 난 거야?
“선물 받았어.”
승건은 여러 루트로 간식 등의 가벼운 선물을 받곤 했다. 유명 파티셰가 만든 마카롱이라든가, 혹은 유명 메이커의 초콜릿 등이었다. 보통은 비서진에게 넘겼는데 채훈을 만나고 난 후부터는 직접 챙겼다. 무슨 맛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미각은 민감하게 맛을 잡아냈다. 너무 달았고, 달걀 비린내가 났고, 밀가루 맛이 났다. 그래서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채훈은 너무 까다로운 입맛이라며 한소리 했다. 그래도 채훈이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에 승건은 선물로 받은 간식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어제 받은 초콜릿도 마찬가지였다.
―어. 찾았다. 이거 좋아 보이는데. 적당히 먹고 있을게. 끊는다. 아, 그래. 천천히 와. 거기 저녁 늦게까지 하거든. 아예 늦으면 딴 거 먹어도 되고. 도착하면 연락해. 대기 타고 있다가 바로 내려갈 테니까.
“그래.”
통화는 짧게 끝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진동했다.
[예쁜 만큼 맛도 있음. 감사.]
감상과 인사가 뒤섞인 메시지와 함께 섬세하게 포장된 초콜릿이 찍힌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승건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먹음직스러워 보여야 할 초콜릿 사진이 어딘가 심령사진 같았다. 조명을 등지고 서서 찍은 탓에 전체적으로 짙은 그늘이 생겼고 화면은 흔들린 채였다. 아무래도 채훈은 사진을 아주 못 찍는 부류인 듯했다.
휴대폰을 보며 피식거리고 웃자 옆에 앉은 심정민의 시선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승건은 그걸 무시했다. 혼자서 히죽이는 것은 자신답지 않은 걸 알지만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못하는 게 없을 것 같은 녀석에게도 허술한 점이 있었다. 구기 종목을 못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진까지 못 찍을 줄은 몰랐다.
“초콜릿이라.”
심령사진을 한 번 더 본 승건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혀가 녹을 것 같은 단맛이 나는 간식들은 어딘가 채훈을 닮아 있었다. 당분은 일시적으로 인간의 뇌를 자극해 인생의 고단함을 잊게 했다. 자신에게는 채훈이 그런 존재였다.
세상의 쾌락을 되돌려주는 치료제.
승건은 채훈의 효용에 대해 평가했다. 그와 함께하면 세상의 맛과 향이 돌아왔다. 온전한 섹스의 쾌락을 느낄 수 있었다. 채훈의 단단한 몸을 끌어안고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 절정에 이를 때면 섹스 중독이 무엇인지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채훈을 떠올리던 승건은 목마름을 느꼈다.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갈증이었다.
지난 4개월여 동안 채훈을 만나면 늘 섹스를 했던 탓인지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그런데 성적으로 흥분한 것치고는 심장이 빨리 뛰었다. 승건은 이상 증상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맥박을 쟀다. 평소보다 빠르고 열이 느껴졌다.
승건은 인상을 썼다. 미열, 흥분, 그리고 빠른 맥박의 전조 증상이 가리키는 병명은 많았다. 과로, 감기, 감염 등등과 함께 러트도 있었다.
러트 시기가 아닌데.
승건의 러트는 아주 일정한 편이었다. 1년에 한 번. 기억을 잃은 사고가 났던 10월 말이었다. 빌어먹을 사고가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기도 했다.
평균적인 알파의 러트 주기보다 한참이나 길었지만 전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르몬에 지배당할 때가 1년에 한 번이라는 건 장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러트 주기가 앞당겨지려고 했다. 그것도 반년이나 더 남은 시기에 말이다.
승건은 이게 러트의 징조인지, 아니면 흥분한 것인지, 혹은 감기인지 아직 가늠하지 못했다.
어쩌나 하고 있는데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채훈이었고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라 음성 통화였다.
“무슨 일이야?”
―그게. 어떤 사람이 아파트에 찾아왔는데, 쫓겨났어.
채훈의 목소리에는 억누른 분노가 뚝뚝 묻어났다. 그러나 요약이 너무 짧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너무 짧잖아. 자세히 말해 봐. 다친 데는 없고?”
―문이 열려서 네가 빨리 왔나 싶었는데, 모르는 남자더라고. 이름은 몰라. 통성명은 안 했어. 어쨌든, 막을 새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하아. 나가라고 해서 버텼는데 경호원 같은 사람들에게 잡혀서 쫓겨났어.
“이런.”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아서 승건은 더 화가 났다.
―나 돌아간다. 아니, 돌아가고 있는 중이야.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가까운 호텔을, 전에 만났던 H호텔을 잡아둘 테니까, 거기 가 있어. 심 실장님이 메시지 보낼 거야.”
승건은 옆에 앉은 심정민에게 손짓했다. 눈치가 빠른 그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고 움직였다. 그런데 채훈이 응하지 않았다.
―꼭 봐야 해?
“강채훈.”
―네 잘못 아닌 건 아는데. 아, 진짜. 기분이 좀 그래. 그냥 오늘만 좀 보지 말자.
힘없는 채훈의 목소리에 승건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설마, 다쳤어?”
―아니. 멀쩡해. 괜찮아. 이제 끊는다. 연락하지 마. 전화 안 받을 거야.
채훈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의 기분이 엄청 상했다는 방증이었다. 승건은 얼굴을 찌푸린 채 통화 시간이 반짝이는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옆에서 심정민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승건은 울컥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내리눌렀다.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해온 일이었다. 분노는 조용히 표출해야 하는 법이었다.
“호텔 예약하고 채훈이에게 메시지 보내세요. 먼저 아파트부터 가겠습니다. 가까이 있는 경호원도 부르세요.”
빠르게 결정을 내린 승건은 채훈에게 계속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채훈은 말했던 대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대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채훈을 보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먼저 제집에 찾아온 불청객을 쫓아내야 했다.
*
*
도로 정체는 10분이나 더 흐른 다음에야 풀렸다. 아파트까지는 15분이 더 걸렸다. 경호원들은 이미 아파트 근처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승건은 심정민은 물론이고 일곱 명의 경호원들까지 모두 데리고 움직였다.
아파트 현관문을 연 것은 경호실장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오메가의 페로몬 향기가 훅 밀려들어 왔다. 그것도 히트에 접어든 오메가의 페로몬 향기였다.
변한 게 없군.
뻔한 상황에 승건은 차갑게 조소를 지었다. 히트가 온 오메가를 알파의 방에 집어넣는 것은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보통은 알파의 약점을 잡는 데 이용했다. 임신이라도 하면 더할 나위 없었다. 결혼의 빌미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돈이라도 뜯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미지의 손님을 밤새도록 기다리게 만들 수도 있었다. 사실 그편이 편리하고 온건했다. 하지만 승건은 제집에서 불쾌한 냄새를 내뿜는 불청객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또한 배후가 누구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알파는 빠지는 게 좋겠습니다.”
히트가 온 오메가의 페로몬은 알파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경호원 중에 두 명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며 승건은 안으로 들어섰다.
채훈이 앉아 있어야 할 소파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보였다. 셋째 작은할머니가 조카아들이라며 소개시켜 준 기억이 났다. 김주현. 우아하고 도도하게 생긴 우성 오메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페로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어필했었다.
승건의 외할아버지에게는 형제가 많았다. 그리고 모두 다 욕심이 많았다.
그들은 승건이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가 되는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따지자면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 법이었다.
태화 그룹의 젊은 후계자로 부상한 승건은 탐스러운 먹잇감이었다. 그를 붙잡으면 태화 그룹의 안주인이 된다는 사실에 다들 열을 올렸다.
이 바닥이야 원래 먹고 먹히는 복마전이었다. 서로 불법적이고 비인도적인 일을 저지르고 소리 없이 묻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확실히 선을 넘었다.
가장 안전해야 하는 자신의 집에 낯선 사람들이 흙발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들이야 귀하디귀한 우성 오메가를 선물로 보내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김주현의 옆으로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일어날 일의 목격자이자 증인이 되는 수순이었다.
하지만 승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히트가 온 오메가도, 시커먼 경호원들도 아니었다. 거실 탁자 아래에 떨어져 있는 작은 초콜릿 하나와 함께 쓰레기통에 삐죽이 솟아오른 검은 상자와 황금색 리본 끈이었다.
분명히 채훈이 사진으로 찍어 보냈던 초콜릿 상자였다. 그게 지금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
“늦었네요.”
승건은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김주현을 보았다. 히트가 온 오메가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승건은 반대로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들어왔지?”
“다 방법이 있죠.”
그들이 어떻게 아파트에 들어왔는지 승건도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보안이 뚫렸다는 사실에 화가 날 뿐이었다. 내부의 내통자를 솎아내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구경꾼이 많은 건 싫은데.”
짙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김주현이 승건에게 다가왔다.
불법 침입임에도 불구하고 김주현이 자신만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에 굴복하지 않을 알파는 드물었다. 하물며 히트가 온 상태의 우성 오메가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승건에게는 헛짓거리일 뿐이었다. 아파트 내부를 가득 채운 페로몬 향기는 달콤한 유혹의 향이 아니라 악취였다. 그것도 배향에 실패한 싸구려 향수 냄새. 그것도 알지 못하고 김주현이 여유롭게 웃었다.
“인내심이 강한가 보네요. 보통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하던데. 참는 거 어렵지 않아요?”
“글쎄?”
“각인 같은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거고. 왜 이렇게 뻣뻣한가 모르겠네? 응?”
김주현의 하얀 손이 승건의 넥타이를 잡으려고 뻗어 왔다. 승건은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손을 내쳤다.
“앗! 아프잖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거절을 당해본 적이 없는 김주현이 당황했다.
“작은할머니께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시는군.”
“도대체 무슨― 컥.”
승건은 와락 인상을 쓰는 김주현의 목을 한 손에 잡고 들어 올렸다. 김주현이 발끝으로 서다 못해 공중에 뜨기 직전이었다.
돌발 상황에 김주현의 경호원이 한 박자 늦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승건과 함께 온 경호원들이 그들을 막았다. 거실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미, 미친……. 이거 놔! 커억. 헉!”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김주현이 승건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힘을 주다 못해 마구 긁었다. 그러나 승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딱히 살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의 목숨 줄을 쥐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작은할머니에게 전해. 가진 거 다 토해 내시게 될 거라고.”
마지막 한 자까지 또박또박 말을 건넨 승건은 김주현을 내던지다시피 했다. 가차 없는 행동으로 거실에 한순간에 적막이 흘렀다. 승건은 김주현이 제 목을 붙잡고 기침을 하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돌아가는 것까지 직접 확인하세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 명과 움직이겠습니다.”
경호실장에게 직접 명령을 내린 승건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아파트에 남아 있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이제는 채훈을 잡으러 갈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