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교차】
4월 중순, 아직 바람에 찬 기운이 가득한 토요일 저녁이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며 집안일을 끝내고 헬스장까지 갔다 온 채훈은 외출 준비를 마무리했다.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하자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채훈은 붙박이장 속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상자 중에 하나를 도전적으로 빼 들었다. 금장에 검은 가죽줄로 된 시계는 심플했다. 채훈은 머뭇거리지 않고 왼쪽 손목에 시계를 얹었다. 익숙하지 않은 묵직한 무게가 왼손에서 느껴지는 것이 이상한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무겁네.”
반짝거리는 시계를 빤히 바라보던 채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로 열흘 만에 승건을 보는 것이었다.
약속은 약속이었고 채훈은 시계 같은 것에 크게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했다. 몇백, 몇천만 원짜리 시계도 시간을 확인하면 셔츠 소매에 가려지는 것은 똑같았다.
어차피 시계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대범하게 생각한 채훈은 외투를 입고는 강영환의 연락을 기다렸다.
오늘은 승건을 만나기 전에 강영환과 먼저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강영환이 지난번 일을 사과한다면서 한턱 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채훈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부득불 우기는 강영환을 이기지 못했다.
근사한 곳에 가니까 멋지게 챙겨 입으라는 강영환의 주문이 있었다. 덕분에 값비싼 손목시계가 위화감이 없었다. 승건에게 빌린 옷과 빈 그릇은 나중에 가져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강영환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착했어. 얼른 내려와.
“잠시만 기다려.”
7시. 약속 시간에 딱 맞췄다. 채훈은 얼른 집안 내부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는 1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 보조석 창문이 열리더니 강영환이 손을 흔들었다.
“형. 여기야. 여기 타.”
채훈은 강영환이 부르는 대로 뒷좌석에 탔다. 운전자는 예상대로 강영환의 친구인 김성호였다. 채훈은 그에게 오랜만이라고, 지난번에 본가에서 얼굴만 보고 헤어졌다면서 인사부터 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보조석에 앉은 강영환이 채훈을 뒤돌아보았다.
“형. 너무 딱딱하게 입었다. 어디 면접 가?”
“차려입으라며.”
“그래도 너무 아저씨 같잖아. 넥타이만이라도 풀어. 그게 낫겠다. 얼른 풀어. 셔츠 단추도 두어 개 풀고.”
채훈은 강영환의 재촉에 어리둥절했다. 차려입으라고 하고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라고 하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딜 가는데 넥타이를 풀래?”
“내가 한턱 쏜다고 했잖아.”
“그래서?”
“너무 힘주는 건 별로야. 얼른 풀라니까.”
“네가 이러는 걸 보니 평범하게 밥 먹을 것 같지 않다.”
“우리 형이 눈치 하나는 빠르네.”
웃음을 터트리는 강영환을 보며 채훈은 얼굴을 구겼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진짜 밥을 먹으러 가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 가는지 말해.”
“좋은 곳에 갈 거야.”
들뜬 강영환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강영환이 좋은 곳이라고 하면 정말 좋은 곳이라는 건 채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이 즐길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안 되면 빠져나오지 뭐.
채훈은 편하게 생각하며 넥타이를 풀고는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 그거 못 보던 시계다. 샀어? 형은 시계 잘 안 하잖아.”
채훈을 지켜보고 있던 강영환이 손가락질을 했다. 채훈은 동생의 눈썰미에 혀를 차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선물 받았어.”
“비싸 보이는데? 아니, 진짜 비싼 거잖아. 그거 기본이 2,000만 원대일 건데. 설마 그 부자 할아버지가 선물해 준 거야?”
“응. 지난번에 투자자들에게 돈을 다 갚고 나니까 주더라. 마지막 선물이래. 너도 들었지? 이제 더 이상 연락하면 안 된다는 거.”
거짓말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승건을 건물 부자 할아버지로 바꾸는 건 쉬웠다.
“에이,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주지, 왜 여기서 그만두는지 몰라. 그래도 형은 좋겠다. 비싼 시계도 선물로 받고. 나중에 그거 빌려줘.”
채훈은 부러움을 숨기지 않은 채 빌려달라고까지 하는 강영환을 보며 웃었다. 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안 돼. 넌 빌려간 거 잘 잃어버리잖아.”
“내가 뭘 잃어버렸다고 그래?”
“지갑, 열쇠, 휴대폰, 축구화. 더 말해 봐?”
“에이, 그건 별거 아니잖아. 비싼 건 안 잃어버려. 그럼 큰일 나게?”
“그러고 잃어버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닌 거, 너도 알지?”
“형.”
강영환이 애타게 불렀지만 채훈은 고개를 저었다. 강영환이 빌려가서, 혹은 그냥 가져가서 잃어버린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 시계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준 사람이 승건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적어도 1년 동안은 무조건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너도 좋은 거 가지고 있는 거 아니까. 그냥 그거 써.”
“에이. 됐어. 치사해서 안 빌린다.”
잔뜩 투덜거린 강영환이 토라졌다는 것을 티 내기 위해 몸을 홱 돌려 앞을 보았다. 채훈은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체훈은 다시 한번 시계의 무게를 묵직하게 느꼈다.
* * *
파티는 대성황이었다.
홀을 가득 채운 조명은 번쩍거렸고, 커다랗게 만들어놓은 이벤트 바에 올려둔 술은 넘쳐났고, DJ가 비트 빠른 음악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채훈은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고 적당한 구석에 서서 맥주만 홀짝거렸다. 강영환이 채훈을 데려온 곳은 보드카 론칭 파티가 열린 클럽이었다. 회원제 클럽이라고, 초대장을 손에 넣기 힘들었다고, 유명한 사람이 잔뜩 올 거라며 강영환이 떠든 만큼 파티는 훌륭했다.
하지만 채훈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곳은 좋아하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도 뻔뻔하게 돌아다닐 수야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럴 마음이 생겼을 때의 이야기였다.
가끔 혼자냐면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적당히 쳐냈다. 맥주는 공짜였지만 부실한 음식으로는 요기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말을 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출입구 위치를 확인하는데 뜻밖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박광호였다.
그와 왜 여기서 마주쳤는지 의문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건 박광호 역시 마찬가지인 듯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 옆에 있는 일행에게 무어라고 하고는 이쪽으로 향해 왔다. 명백히 채훈을 만나겠다는 몸짓이었다.
오지 마라.
채훈은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박광호를 피할 곳이 없었다.
“오, 뜻밖의 곳에서 만나네요. 강 주임님.”
“그러게요. 박광호 씨.”
“이름으로 부르는 게 낫지 않나. 이런 곳에서 씨라고 하니까 이상하네. 그래도 나는 주임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나……요? 그것보다 써니랑 아는 사이는 아닐 테고. 어떻게 왔어요?”
박광호와는 지난겨울에 한 번 크게 입씨름을 하고는 겨우 인사만 하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 박광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유들거렸다. 은근슬쩍 반말까지 하는 모습에서 이곳에서는 자신이 우위라 생각하는 내심이 드러나 채훈은 쓴웃음을 삼켰다.
보드카를 론칭하는 회사의 대표 이름이 써니라는 것은 팸플릿에서 읽었다. 일부러 써니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어떻게 왔냐고 묻는 것도 다 유치했다.
“써니라는 분은 모릅니다. 동생과 함께 왔습니다.”
“동생이요? 동생이 있었어요? 처음 듣는데?”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뭐, 모르는 게 그것뿐만은 아니니까. 확실히 사람은 직장 생활과 바깥 생활이 다르게 돌아가나 봐요.”
채훈은 박광호의 시선이 맥주병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목에 와 닿는 걸 느꼈다. 비싼 손목시계가 박광호의 주목을 끈 모양이었다.
눈치가 아무리 없어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깐깐하게 굴더니 밖에서는 비싼 시계 차고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느냐는 뜻이었다.
“세상 사는 모습은 다양한 거 아닙니까. 밖에서 새는 바가지를 그대로 안으로 들고 오는 사람도 있는데. 사회생활만큼은 제대로 하는 게 낫지요.”
채훈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대학 생활을 워낙 고되게 한 탓에 입 터는 건 자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미소 짓던 박광호의 입꼬리가 찌그러졌다.
“형. 나 왔어. 안녕하세요.”
잠시의 침묵을 뚫고 강영환이 끼어들었다. 채훈은 살갑게 인사하고는 자신의 옆에 선 강영환을 보았다. 분위가 살벌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영환이 채훈의 허리를 툭툭 쳤다.
“형. 소개 안 시켜줄 거야?”
“내가 다니는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박광호 씨야. 박광호 씨. 제 동생입니다. 강영환이요.”
“안녕하세요. 강영환입니다.”
“박광호입니다. 강 주임님에게 이렇게 잘생긴 동생이 있는지 몰랐네요.”
채훈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두 사람을 소개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마주 웃으면서 부드럽게 악수했다. 보기에는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박광호가 불에 덴 듯 화들짝 손을 거두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반면에 강영환은 활짝 웃었다.
“깜짝 놀라셨나 봐요. 박광호 씨?”
“형제가 쌍으로…….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갑니다.”
무어라 욕을 하려던 박광호가 인상을 쓰더니 그대로 뒤돌아 가까운 곳에서 있는 일행을 찾아갔다.
채훈은 박광호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이유가 궁금해서 강영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저 사람 알파야.”
“그래?”
“형한테 페로몬 풀풀 날리기에, 내가 받아쳤지. 몇 초도 못 버티는 거 보니까 열성인 모양인데.”
“……?!”
강영환의 말에 채훈은 깜짝 놀랐다. 지난번에 박광호가 형질자이지 않을까 의심하긴 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왜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을까 잠시 생각했었다. 형질자들 사이에서 우성과 열성은 일종의 힘의 차이이자 계급이었다.
열성의 경우 상대적으로 형질자의 특성이 약하게 드러났다. 일반인들은 알 수 없지만, 형질자들 사이에서는 매력을 끌지 못한다고 들었다.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는 박광호가 형질자임을 숨긴 이유가 있었다.
“형이 오메라가라고 착각한 거야? 어, 어? 왜 저기로 가는 거야? 형? 저 사람이랑 같이 일한다며? 그런데 어떻게 저기에 가? 응?”
“뭐가?”
“저기, 저기 가잖아. 저기는 아무나 못 가는 데란 말이야.”
채훈은 강영환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넓은 클럽은 복층 구조로,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에서 클럽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계단 초입에는 가드가 두 명이나 서 있었다. 채훈은 저곳이 VIP들을 위한 장소라는 것을 눈치챘다. 태화 병원의 이사장을 빽으로 둔, 그리고 파티를 연 써니를 아는 박광호라면 VIP일 것이다.
“어?”
박광호에게서 시선을 거두던 채훈은 또다시 뜻밖의 사람을 발견했다. 색색의 불빛이 번쩍거리고 있는 탓에 혹시나 싶어서 눈에 힘을 주었다. 주위의 사람보다 머리 하나 큰 녀석은 승건이 맞았다.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승건과 시선이 마주쳤다. 박광호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왜 여기에 있나 궁금해졌다.
아무리 계약을 하고 만나고 있는 사이이긴 하지만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터치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승건을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다. 딱딱한 클래식 정장을 입고 있는 그는 클럽과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거리도 멀었고 불빛 때문에 승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승건이 고개를 돌리고는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녀석도 VIP였다.
“형, 형? 뭘 보는 거야?”
“어, 왜?”
채훈은 겨우 정신을 차려 강영환을 보았다.
“뭐 하는 사람이냐니까?”
“2년 계약직으로 총무과에서 일하고 있는 것 말고는 나도 아는 게 없어.”
“소개시켜 줘.”
“했잖아.”
“그것 말고. 같이 일한다고 했으니까 휴대폰 번호를 알려줘.”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는 소리에 채훈은 인상을 썼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가까이 할 사람 아니니까. 일도 못하고 성격도 안 좋아. 신경 꺼.”
“누가 같이 일할 거래? 형은 사회생활 너무 못한다. 일을 못하든 성격이 나쁘든 서로 적당히 알고 지내면 되는 거잖아. 저런 사람이랑 친분 쌓는 게 나중에 다 도움이 된다고.”
쯧쯧 혀를 차면서 설교 아닌 설교를 하는 강영환을 보며 채훈은 한숨을 삼켰다.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어렵지 않게 사람을 사귀는 강영환이라면 박광호와도 잘 지낼지 몰랐다. 강영환의 말대로 적당히 알고 지내면 좋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 자신이 끼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저 녀석이랑 엮이기 싫어.”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안 괜찮아. 전에 말했는데, 내 이름 대고 간호사들에게 막말했던 놈이 저 인간이야. 내가 그때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그래 놓고도 사과도 안 했어. 그 뒤로도 한 번 더 싸워서 사무실에서는 말도 제대로 안 해. 그런데 네가 전화해서 친하게 지내겠다고? 내 처지는 둘째치고, 저런 인간이랑 엮이지 마. 질이 나빠.”
“그거야 별거 아닌데.”
질이 나쁘다고 해도 별거 아니라는 강영환을 채훈은 더 이상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안 들을 때는 강하게 나가는 게 최고였다.
“강영환.”
“에이. 됐어. 꼰대가 다 됐다니까. 흥.”
강영환이 꼰대라고 투덜거리는 순간에 클럽 내부에 딸랑거리는 종이 울렸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일변했다. 음악 소리가 작아지면서 DJ가 커다랗게 외쳤다.
“배틀입니다. 배틀!!”
배틀이라는 소리에 사람들의 호응이 놀라울 정도였다. 함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면서 플로어를 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플로어 가운데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남자가 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그에게 지목받은 남자가 찌그러진 얼굴로 플로어에 올랐다. 그러자 함성이 다시 커다랗게 울렸다.
채훈으로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뭐야?”
“배틀이야.”
강영환이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채훈 역시 배틀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게 클럽에서 나올 단어는 아니었다.
“그게 뭔데?”
“어휴. 형도 이제 진짜 아저씨야. 아저씨.”
“아저씨 맞아. 그래서 뭐야?”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을 따로 불러서 사람들 앞에서 싸우는 거야. 유행한 지 좀 됐어.”
채훈도 군대를 가기 전까지는 클럽도 다니면서 적당히 놀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별 이상한 것들이 유행했다가 사라졌다. 서로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는 것쯤이야 놀랄 것도 아니었다. 클럽에서 서로 시비가 붙는 일은 자주 있었다. 배틀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주먹질을 한다는 건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 배틀이 시작되었다. 잔뜩 기대하고 싸움을 지켜보던 채훈은 곧 실망하고 말았다. 거창한 이름을 붙이며 DJ가 흥겹게 중계까지 했지만 정작 내용이 별로였다.
견제를 하면서 잽만 날리던 두 남자가 마지막에는 서로 드잡이질을 하면서 바닥을 굴렀다. 사람들은 그것도 좋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제대로 격투기를 배운 채훈의 눈에는 기대 이하의 수준이었다.
테이크 다운 후에는 마운트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서로 체격도 실력도 비슷하다 보니 엎치락뒤치락하며 유효타를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상대의 턱을 후려쳐 날린 남자가 승기를 잡았다. 상대를 올라타고는 주먹질을 미친 듯이 했다. 결국 열심히 두들겨 맞던 남자가 항복이라고 외치면서 상황이 끝났다. 코피라도 터졌는지 항복한 남자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배틀에서 진 남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플로어를 내려왔다. 그리고 승자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호를 받았다. 유치하지만 잔인한 승자 독식의 장면에 채훈은 혀를 찼다. 어린애들이랑 어울리니까 에너지가 훅훅 깎이는 느낌이었다.
“나 이제 간다.”
“벌써?”
“재미없어서. 배도 고프고.”
“안 돼. 형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단 말이야.”
“뭐? 소개?”
처음 듣는 이야기에 채훈은 강영환을 보았다. 아까부터 부루퉁하던 녀석이 다급하게 굴었다.
“내가 아는 형님인데. 내가 우리 형 착하다고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 그러니까 형을 한 번 보고 싶어 해서. 그 형님도 정말 괜찮아. 잘생기고, 키도 크고. 그래. 돈도 많아. 성격도 좋고. 그래서 형에게 소개시켜 주려고.”
강영환의 설명을 간단하게 압축해 보자면 소개팅이라는 의미였다. 채훈은 한숨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 어린 동생에게 남자를 소개받는 것이 웃겼다.
“너는 그걸 네 마음대로 정해?”
“아니, 그게. 당장에 사귀라는 것도 아니고. 알고 지내면 서로 좋잖아. 그 형님이 사업도 하는 사장님이야. 자동차 튜닝을 해.”
“됐어.”
“내 체면도 좀 세워주라. 내가 주선자인데 형이 가버리면 곤란해지잖아.”
“그럼 나는 안 곤란해? 왜 내 의견은 안 물어봐.”
“왜 형이 곤란해? 통성명하고 알고 지내라니까. 헉. 설마. 사귀는 사람 있어? 그런 거야? 그럼 그냥 얼굴 도장만 찍어. 대충 인사하고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안 맞았다고 할게.”
제멋대로 오해한 강영환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채훈은 굳이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라고 정정하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고 승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강영환에게 물어볼 게 따로 있었다.
“네가 다 알아서 하기 전에, 나한테 할 거냐고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형이 안 한다고 할 거잖아. 정말 좋은 형님이란 말이야. 내가 괜히 소개시켜 주겠다고 여기까지 불렀겠어?”
“좋은 형님이고 뭐고 필요 없어. 네 말대로, 네가 알아서 해. 이참에 그 버릇 좀 고쳐야겠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뭘 그렇게 민감하게 굴어. 겨우 얼굴 한 번 보라는 건데.”
“그래. 나는 민감하고 성질도 나빠. 겨우 그것 때문에 동생 체면 안 세워줄 거야. 됐지?”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과 유치한 말싸움을 하는 게 웃겼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형제라고 하지만 제멋대로 구는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지난번에 방을 엉망으로 만들고 도망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가족이라고, 형제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하지만 강영환은 그 선에 대한 이해가 없는 듯 계속 침범해 들어왔다.
어렸을 때는 오냐오냐하고 봐주었더니 나이가 들어서는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남이라면 그냥 멀리하면 그만이었지만 가족이라서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따질 건 따져서 알아듣는 시늉이라도 하게 만들려고 노력 중이었다.
“아이,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오늘만 봐주라. 진규 형님이 정말 잘해준단 말이야. 형 왔다고 벌써 연락도 해놨고. 그런데 형이 없어지면 어떻게 해. 내가 욕먹는다고. 앞으로 진규 형님은 또 어떻게 봐.”
“그건 네 사정이고.”
“형. 내가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응? 딱 이번만 봐줘.”
강영환이 울상인 채로 매달렸다. 네가 벌인 일은 네가 수습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마음이 약해졌다. 정말 동생이 아니라 웬수였다.
“인사만 하고 갈 거야. 다음부터는 형님이고 뭐고 없어.”
“어, 응. 알았어.”
“그 사람 오면 연락해. 알아서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까.”
채훈은 강영환을 두고 돌아섰다. 속에서 열이 끓어올라서 맥주를 한 병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
*
[어떻게 온 거야?]
승건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채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곳에 오기 싫었다고 승건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복잡해.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채훈은 전송 버튼을 누르며 2층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는 2층 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 근사한 거 사준다고 해서 따라왔다가, 소개팅을 하게 생겼다고 설명하면 승건이 과연 웃을지 궁금했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드는데 웬 취객이 부딪혀 왔다. 운이 나빴다. 채훈이 들고 있던 맥주병에서 맥주가 쏟아져 재킷이 젖고 말았다. 취객이 미안하다고 사라지고 채훈은 화장실을 찾았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것이 무색하게 재킷에 커다란 얼룩이 생기고 말았다. 최대한 맥주 냄새는 씻어낸 다음에 화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문밖에서 뜻밖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랑 이야기 좀 하죠?”
박광호가 시비조로 말을 걸어왔다. 그의 옆에서는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기분 좋게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채훈은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동생이 오메가인 것 같은데?”
“그건 동생의 개인 정보니까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 짧습니다.”
“사적으로 만났는데 딱딱하게 굴 필요 있나? 요? 이러는 것도 웃기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동생은 오메가인데 주임님은 아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진짜 숨기는 거 아닌가?”
채훈은 이 새끼가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아까부터 반말을 섞어서 사람 속을 긁는 것은 우습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오메가인 걸 숨기는 게 아니냐고 넘겨짚는 것도 웃겼다.
지금껏 보통의 알파들은 우성 오메가인 강영환에게 관심을 가졌다. 강영환을 소개받으려고 채훈에게 잘 보이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박광호는 싸우자고 시비를 걸었다.
오메가인 걸 숨긴다고 의심하는 이유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이유일 게 뻔했다.
“아니라고 두 번째로 말합니다.”
“진짜? 거짓말 같은데?”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믿어도 된다면 진짜네.”
박광호와의 대화는 벽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사이도 안 좋았기 때문에 채훈은 대꾸를 하는 대신에 그대로 뒤돌아섰다.
“아, 진짜 아니냐고 묻잖아!”
버럭 소리를 친 박광호가 채훈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하지만 채훈은 순순히 잡혀주는 대신에 박광호의 손을 역으로 붙잡았다. 동시에 몸을 돌리는 반동으로 그대로 박광호의 팔을 뒤로 꺾어 내리눌렀다.
“으악!”
순식간에 채훈에게 제압당한 박광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비겁하게 등 뒤에서 공격할 겁니까?”
“씨발. 비겁한 건 너잖아. 악. 아프다고!”
“손목을 낚아채는 건 명백하게 공격 의사라는 걸 모르는 모양입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외국이었다면 총 맞습니다.”
제대로 빡친 김에 채훈은 그대로 박광호를 힘껏 떠밀었다. 몸이 앞으로 굽혀 있던 박광호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나뒹굴었다. 약간의 소란에 사람들이 시선을 주었지만 곧 흥미를 잃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채훈 역시 박광호의 일행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기분대로 일을 저질러버렸다. 금수저인 박광호가 무슨 보복을 할지 아득해졌지만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소개고 뭐고 이대로 돌아가야지 싶어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데, 때마침 강영환이 채훈을 불렀다.
“형. 여기야. 여기.”
바로 옆이라서 못 들은 척하고 가버릴 수도 없었다.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차며 강영환에게 다가갔다. 강영환의 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형. 이분은 박진규 형님이야. 형님. 제 형이에요. 채훈. 이름 예쁘죠?”
“처음 뵙겠습니다. 박진규라고 합니다.”
“강채훈입니다.”
채훈은 박진규가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했다. 강영환의 말대로 박진규는 키도 크고 잘생겼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클럽이 아니라 밝은 태양 아래서 확인해야 할 것들이었다.
“영환이에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적당히 예의 바른 대화가 막 시작될 때였다. 또다시 클럽이 떠나갈 듯 커다랗게 종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시선은 플로어를 향하게 되었다. DJ가 다시 배틀이라며 외쳐댔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플로어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채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박광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 있었다.
“너, 너 올라와. 이 새끼야!”
박광호가 손가락 끝으로 정확하게 채훈을 지목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채훈에게 몰렸다.
채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망신당한 걸 되갚아주려고 일을 크게 벌이는 심정은 아주 조금 이해했다.
“형. 이거 꼭 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쫓겨나. 일행 모두 말이야. 이기든 지든 해야 해.”
강영환이 옆에 와서 속닥거렸다. 사실 채훈은 쫓겨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박광호가 문제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어차피 끝장난 관계였다. 회피해서 겁쟁이 소리를 듣느니, 싸워서 납작하게 밟아주는 게 그나마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정 안 되면 병원을 그만두고 딴 일자리를 알아보면 된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기도 했다.
채훈이 거침없이 플로어를 향해 걸어가자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만들어주었다. 박광호와 마주 선 채훈은 대충 거리를 가늠했다.
“비겁한 새끼. 씨발. 오늘 끝장을 보자. 내가 박살을 내줄 테니까!”
박광호가 커다랗게 소리치면서 재킷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채훈은 손목시계 줄을 끄르며 한마디 했다.
“이걸로 끝내죠.”
“뭐?”
“이기든 지든, 이걸로 끝내자고.”
“하하하. 그래. 이걸로 끝내자. 얼굴도 못 들고 다닐 테니까.”
채훈은 이걸로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피할 구석을 만들어두고는 재킷과 시계를 벗어 뒤에 있는 강영환에게 맡겼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다들 소리 질러!!”
DJ가 흥을 돋우자 구경꾼들이 호응하며 환호했다. 시끄러운 효과음과 함께 시작을 알리자 박광호가 두 팔을 올려 가드를 세웠다. 자세도 발놀림도 복싱을 배운 듯했다. 채훈도 적당히 겨루기 자세를 잡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박광호였다. 그가 권투의 기본인 잽을 날렸지만, 거리를 두고 간만 보는 것이라 채훈은 쉽게 피했다.
학창 시절에 전국체전에서 태권도로 메달까지 딴 적이 있는 채훈은 흔히 말하는 유단자였다. 경찰대학을 지원했기 때문에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채훈은 단순히 체력만 키운 게 아니라 정기적으로 대련도 빼먹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박광호보다 체격도 작았고 몸무게도 덜 나갔다. 개싸움에서는 무조건 무게가 무거울수록 유리했다.
길게 끌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채훈은 단숨에 끝낼 계획이었다. 박광호가 네 번째 잽을 날리는 순간에 단번에 거리를 좁혀 손바닥 끝으로 턱을 쳐올리고는, 연계로 팔꿈치를 휘둘러 광대를 때렸다.
순간 박광호가 휘청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채훈은 돌려차기를 날렸다. 박광호의 가드에 살짝 빗겨났다고 느끼자마자 바로 뒤돌려차기로 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다. 정통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박광호가 털썩 주저앉았다.
“굉장해. 한 방에 끝났습니다. 한 방에!!”
DJ가 소리 높여 외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채훈은 반쯤 정신을 잃은 박광호를 후려 차려다가 승자에게 박수를 달라는 DJ의 말에 그만뒀다.
“와. 형. 대단해. 멋져.”
제일 먼저 채훈에게 달려온 것은 강영환이었다. 채훈이 재킷을 입고 손목시계를 차는 동안에 온갖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멋지다는 칭찬부터, 자신의 휴대폰 번호라면서 명함을 주머니에 꽂기도 했고, 한턱 쏘겠다며 끌고 가려고도 했다. 채훈은 그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강영환과 함께 박진규를 찾았다. 적당히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낯선 남자가 끼어들었다.
“써니가 한 번 보잡니다. 2층으로 가죠.”
클럽의 가드로 보이는 남자가 2층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고개를 들자 2층 난간에 밝은 머리 색의 여자가 기댄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마도 저 여자가 파티의 주인공인 써니인 것 같았다.
“형. 우리 저기 가자.”
“이분만 초대받았습니다.”
“그게 뭐야. 왜 형만 가.”
옆에서 채훈을 부추기던 강영환이 화를 냈다. 그 때 다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너, 너. 나 좀 보자.”
이번에도 박광호였다.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박광호의 발걸음은 불안했다. 옆에 선 동행이 어쩔 줄 모르며 뒤따랐다.
채훈은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이걸로 끝내자고 합의는 봤다. 하지만 속 좁고 자존심만 센 박광호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으니 조용히 넘어갈 리는 만무했다.
이런 놈이 앙심을 품고 괴롭히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다. 마치 윤 사장이라는 인간처럼 말이다. 그래서 다들 성질 나쁜 금수저의 비위를 맞춰주거나 더러운 뭐라도 되는 것처럼 피하는 법이었다.
채훈은 자신이 병원을 그만두는 것으로 악연이 끝나기를 바랐다. 1억 6,000만 원이 통장에 꽂혀 있으니 부릴 수 있는 객기였다.
박광호가 이제 돌아가자는 동행의 손을 뿌리치며 이를 갈았다.
“내가 너 가만히 안 둔다. 씨발. 후회하게 해줄 거야.”
“졌으면 가만히 짜져 있지. 삼류 악당처럼 말하네. 쪽팔리지도 않아?”
박광호의 시비를 맞받아친 것은 강영환이었다. 강영환의 도발에 박광호가 소리를 질렀다.
“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그런 말 하는 새끼치고, 제대로 된 놈 못 봤거든. 왜? 한 번 더 해보자고?”
“야. 이 새끼가!”
강영환에게 달려들려는 박광호의 앞을 채훈이 막아섰다. 가드 역시 그러면 안 된다고 밀쳐냈다. 박광호가 더 화를 냈다.
“안 비켜?!”
“보기 추하네. 광호야. 너 진짜 찌질하다.”
채훈이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2층에서 손을 흔들던 여자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박광호가 여자를 돌아보더니 인상을 썼다.
“써니? 넌 또 왜 왔어?”
“네가 찌질한 짓 하는 거 보려고. 졌으면 얌전히 꼬리 말고 물러나야 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건 또 뭐야. 네가 그럴 깜냥이나 돼?”
“야.”
“욱하는 성질머리하고는. 그러니까 할아버지 눈 밖에 나는 거야. 저기 이름 모를 오빠. 광호가 지랄이라도 하면 여기로 연락 줘요. 쟤네 할아버지에게 일러버리게. 쟤가 지 할아버지는 또 무서워하거든요.”
여자는 써니가 맞았다.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채훈에게 명함을 건넸다. 얼떨결에 채훈이 명함을 받아 들자 또다시 박광호가 소리쳤다.
“야. 그걸 주면 어떻게 해!”
“너 물 먹이려고. 저기 이름이 뭐예요? 같이 한잔하죠? 광호 물 먹인 거 축하하면서?”
써니가 활짝 웃으며 스스럼없이 채훈의 팔짱을 꼈다. 당황한 채훈은 그녀를 부드럽게 밀어냈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바짝 붙어 왔다. 결국 어정쩡하게 끌려가다시피 하는 사이에 박광호는 잇소리를 내며 물러났고, 강영환과 박진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채훈은 박광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써니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정말 연락하면 됩니까?”
“물론이죠. 광돌이가 깨지는 거 보고 싶거든요. 그런데, 오빠 오메가야? 아니면 알파? 알파는 아닌 것 같은데, 냄새가 이것저것 섞였어. 반응도 없고.”
“평범한 베타입니다.”
채훈은 굳이 자신의 체질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 게 있다고 이해시키는 것도 귀찮았다.
“이상한 오빠네. 뭐, 나는 베타면 더 좋지. 가서 한잔해요. 멋지게 싸우는 바람에 다들 궁금해하니까.”
써니의 행동력은 남달랐다. 채훈은 자신의 팔을 꽉 붙잡으며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써니를 따라 2층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강영환도, 그리고 박진규도 따라오지 못했다.
통성명을 하면서 계단을 오르자마자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채훈에게 닿았다. 채훈은 일련의 무리 중에서 승건을 단번에 찾아냈다. 그 역시 서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내가 누구를 데려왔는지 봐.”
“파이터!”
“완전 멋져!”
써니가 커다랗게 소리치자 박수가 잇달았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써니가 채훈을 포획물처럼 옆에 끼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승건과 가까웠다. 다행히 승건은 알은척을 하지 않았다.
채훈은 이런저런 질문세례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박광호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냐. 운동은 얼마나 했느냐. 전문적인 파이터냐. 가볍고 템포가 빠른 질문들은 대부분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몇몇 시선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었다.
차가운 품평이나 무시는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지만 비웃음은 별로였다. 적당히 어울리고 일어나야겠다 싶었는데 써니가 술을 반쯤 채운 잔을 내밀었다.
“오빠. 마셔.”
“받지 마.”
술잔을 막 잡으려는데 지금껏 가만히 있던 승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채훈도 써니도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승건 오빠. 뭐야?”
“이걸 마시는 게 좋을 거야.”
“오빠?”
써니를 무시한 승건이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아까와는 질이 다른 호기심 어린 시선에 채훈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솔직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승건이라면 별다른 이유 없이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승건의 시선이 아주 매서웠다. 자신의 잔을 마시라고 눈빛으로 명령하고 있었다.
채훈은 써니가 아니라 승건의 술잔을 받아 들이켰다. 독한 보드카였다. 원인 모를 기묘한 감탄성을 들으며 보드카를 모두 마셨다. 그리고 빈 잔을 승건에게 돌려주었다.
“따라와.”
승건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따라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아 채훈도 움직였다. 그런데 써니가 다시 팔짱을 껴 오면서 막았다.
“승건 오빠. 지금 가로채는 거야?”
“응. 마음에 들었어.”
“내가 먼저 찍었다고.”
“날 선택했잖아.”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채훈은 지금 상황이 치정 싸움 같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들의 대화도 그랬고,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랬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상대가 내민 술을 마신다는 게 그런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데 써니가 팔을 잡아당겼다.
“그냥 마신 거 맞죠? 응?”
“선택한 거 맞습니다.”
채훈은 망설이지 않았다. 술을 마실 때는 무슨 선택인지 몰랐지만, 몰랐다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러자 써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그쪽 취향이었어?”
이번에는 대답 대신에 웃어주었다. 써니가 됐다면서 입술을 삐죽거리고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승건이 따라오라고 눈짓을 보냈다.
이미 가시방석이 된 자리였다. 채훈은 타이밍을 놓칠까 봐 얼른 승건을 따라 움직였다.
*
*
클럽에는 VIP를 위한 출입구가 따로 있었다. 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뒤쪽 문을 나오자마자 채훈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액정에 강영환의 이름이 떴다. 2층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채훈은 전화를 받았지만 길게 끌지 않았다. 어디냐고 묻는 강영환에게 알아서 돌아가겠다고 하고는 끝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대폰이 울렸지만 채훈은 알림을 무음으로 바꾸고는 승건을 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이렇게 널 따라가도 되는 거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채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로 알은척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함께 움직였으니 괜찮은 건가 싶었다.
걱정이 되어서 물은 거였는데 대답이 아니라 싸늘한 질문이 돌아왔다.
“무슨 생각이야?”
“뭐가?”
“무슨 생각으로 술을 마시려고 했냐고.”
“술이 왜……. 아. 설마?”
채훈은 도시 괴담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술에 약을 타는 것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VIP라고 하는 이들이 하는 짓이 유치하고 악질적이었다.
“이런 데서 아무거나 마시지 마.”
“그럴 줄은 몰랐지.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기 때문에 채훈은 인사부터 했다. 승건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대로 약을 먹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온 거야?”
“동생이 한턱 쏜다고 했는데, 사기를 당했어.”
승건의 질문에 채훈은 소개팅이 있었다는 말은 빼버렸다. 그래서인지 승건은 웃지 않았다. 확실히 웃지 못할 일이긴 했다.
채훈은 승건에게 질문을 돌렸다.
“그러는 너는?”
“친척 동생이 사업을 한다고 해서 얼굴 좀 비췄어.”
“그래? 써니가 친척이야?”
“묻지 마.”
“아, 미안.”
“미안해하기 전에, 계약 내용부터 숙지해.”
순간 뒤를 캐지 말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 채훈은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뒤이은 질책의 말에 무안해지고 말았다.
좋게 말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승건의 말투는 냉정했고, 그래서 날카로웠다. 먼저 잘못한 게 있던 채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승건이 한쪽에 주차된 자동차의 운전석에 자연스럽게 타는 것을 보며 채훈은 잠시 망설였다. 승건이 직접 운전하는 게 놀랍기도 했지만, 이대로 탔다가는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뻗대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보조석에 올라탔다.
운전기사 없이 직접 핸들을 잡은 승건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박광호와는 어떤 관계야?”
“묻지 마.”
“……?”
“나는 뒤를 캐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까. 내게 묻지 말고 네가 알아서 해.”
승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채훈은 되는대로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민망해졌다. 승건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준 것뿐인데, 막상 하고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날 세우고 긴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았다.
“에이. 못해먹겠다. 그냥 다 말할게. 박광호랑은 병원에서 같이 일해. 그 또라이 새끼가, 그러니까 박광호가 2년 계약직인데, 나랑 사이가 안 좋아. 박광호가 내 이름 사칭해서 사고를 쳤는데, 그걸 내가 수습해야 했거든.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좀 있었고. 이사장이 빽이라서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냥 어디서 개가 짖나 하고 참고 있었는데……. 이번에 폭발했지. 사표 쓰는 것까지 각오를 했거든. 이 명함이 쓸 만하긴 해?”
길게 설명한 채훈은 명함을 넣어둔 안주머니 위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앞을 보며 운전하던 승건이 한 박자 뜸을 들이고는 대답했다.
“박광호가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긴 하지. 그리고 써니랑 박광호가 사이가 나쁘기도 하고.”
“그래?”
“내 외할아버지와, 써니의 할아버지, 그리고 박광호의 외할아버지가 모두 형제야.”
“……?!”
“그리고 박광호의 할아버지는 꽤 명망 높은 사업가인데, 그분이 손자들에게 엄격하다고 들었어. 군대를 안 가는 손자가 있으면, 사회 경험을 하라고 2년 계약직으로 돌린다고. 그렇게 안 하면 상속 지분을 확 줄인다고 했다는데. 취지는 좋지만 효과는 별로인 모양이군.”
뜻밖의 관계였다. 따지자면 승건과 박광호, 써니가 서로 육촌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들 모두 태화 그룹과 관련된 핏줄이었다. 이럴 때는 끼리끼리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육촌인 거야?”
“응.”
“박광호랑은 잘 알아?”
“아니. 몇 번 만난 게 전부야. 왜?”
“네가 형이니까, 대표이사쯤 되니까 그 또라이 좀 말릴 수 있을까 싶어서. 그놈이 이사장이랑 행정부장을 등에 업고 있으니까 인사 발령이라도 이상하게 나면……. 아니,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정 안 되면 그만둘 거야. 네가 준 돈도 있으니까, 쉬면서 새 일자리 찾아보면 돼.”
어쩌다 보니 하소연과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려고 하던 채훈은 아차 싶은 마음에 재빨리 하던 말을 수습했다. 승건이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이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집안의 일이었다.
병원을 그만두면 며칠 제주도라도 놀러 갔다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갑자기 승건이 차창을 열었다. 그것도 운전석과 보조석은 물론이고 뒷좌석까지 끝까지 내렸다.
“왜 그래? 바람이 차.”
아직 4월 중순이었고 밤바람이 찼다.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날카로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들었다.
“냄새가 나서 머리가 아파.”
“무슨 냄새? 아, 아까 맥주를 쏟았어. 씻는다고 씻었는데, 냄새가 나는가 보다.”
“그거 말고.”
“……?”
맥주 냄새가 아니라면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채훈은 뭔가 이상한 거라도 밟았나 싶어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승건이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찼다.
“페로몬이 이것저것 섞여서 고약한 냄새가 나.”
채훈은 그제야 승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클럽에 얼마나 많은 형질자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영환과 박광호, 그리고 써니와는 직접적으로 살을 맞댔다. 아마도 그들의 향이 모두 묻었을 것이다.
형질자들은 각자의 고유한 향이 있었다. 보통은 향수처럼 느꼈다. 하지만 알파의 경우 같은 알파의 향기에 거부감을 느꼈다. 특히 상성이 맞지 않을 경우 고약한 악취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채훈은 베타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몰라.”
“이거 걸치고 있어.”
때마침 신호를 받아 차가 멈췄다. 그러자 승건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주었다.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니까 채훈은 별말 없이 재킷을 받아 제 몸을 덮었다.
“이러면 괜찮아?”
“조금 나아졌어.”
“괜찮아지면 창문 좀 닫아줘. 너도 추울 거 아니야.”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 꽤나 매서웠기 때문에 채훈은 재킷을 코끝까지 끌어 올리면서 말했다.
창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온기가 돌았다. 그러자 승건의 재킷에서 좋은 향이 맡아졌다. 남자 향수답게 시원한 숲의 향이었다. 그리고 차가운 꽃의 향기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거면 돼?”
“뭘?”
맥락 없는 질문에 채훈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승건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거면 된다는 거지?
승건은 대답 대신에 신호를 받아 차를 세우고는 박광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휴대폰과 연결된 자동차 스피커에서 통화 연결음에 이어 박광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승건이 형이지? 형, 강채훈이랑 어떤 사이야? 그 새끼를 왜 형이 데려가?
그 새끼가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박광호가 욕을 하며 시비를 걸었다. 채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건을 쳐다보았다.
설마 박광호를 말릴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자신의 말 때문에 이러나 싶었다.
“박광호. 너 지금 태화 병원에서 일하지? 총무과에서 강채훈이랑 같이.”
―그게 뭐? 설마, 그 새끼가 뭐라 그래?
“네가 부서를 옮겨. 위에 말해 적당한 곳으로. 그리고 강채훈에게서 손 떼고 마주칠 생각 하지 마.”
―아, 씨발. 좆같네. 형이 뭔데 그래? 형이 그 새끼 애인이라도 돼? 응?!
박광호의 언사는 더욱 과격해졌다. 그리고 채훈은 뜻밖의 단어 때문에 인상을 쓰고는 한 번 더 승건의 얼굴을 확인했다. 애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승건이 노골적으로 채훈의 편을 든 시점에서 관계성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강채훈이 빽이거든.”
―……뭐라고?
어이없어하는 박광호만큼이나 채훈 역시 놀라고 말았다. 쟤가 왜 저러나 하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번갈아 머릿속에서 반짝거렸다.
승건이 내 백이란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승건은 이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신호를 받아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누구 뒷배가 더 센지, 궁금하면 한 번 해보든지.”
―아이……. 씹. 내가 못 할 것 같아?! 형이야말로 허수아비 주제에, 뭐 그렇게 당당해?!
“허수아비라서 이번 신약 개발 계약이 내 손에 달려 있지. 박 회장님이 좋아하겠다. 일곱 번째 손자 때문에 수천억 원짜리 계약이 날아가면.”
―헐. 형 미쳤어?!
“두 번째로 말하는데, 부서부터 옮겨. 조용히 2년 채우고 나가.”
―씨발. 좆같은 소리 하지 마. 형이 그 새끼 천년만년 끼고 살 거야? 응?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래? 설마? 지금 강채훈이 그 새끼 옆에 있는 거지? 그렇지? 씨발. 너 잘 들어. 지금은 네가 이긴 것 같겠지만 나중에 내가 다 갚아준다. 이 새끼야!
“기회를 줬는데도 못 알아들으면 어쩔 수 없고.”
승건이 그대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지만 승건이 박광호 차단이라고 말을 하자 곧 조용해졌다.
채훈은 음성 인식의 위대함과 승건의 과감함에 놀랐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라는 직함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았다.
수천억 원짜리 계약을 빌미로 박광호를 협박하는 장면은 마치 드라마의 그것과 비슷했다. 멋지기도 한데, 유치하기도 했다. 그래도 박광호의 말처럼 천년만년 백이 되어줄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되는 거야?”
“뭐가?”
“수천억 원대 계약이 날아간다 만다 그러는 거. 네 마음대로 정하는 건 아닐 거잖아.”
“셋 중에 하나 고르는 건데, 셋 다 조건이 비슷해. 친인척인 것도 비슷하니까 어디를 선택하든 상관없어. 그리고 박광호 말은 신경 쓰지 마. 이번 계약이 그쪽 집에 꽤 중요해서, 박 회장님이 그냥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
“사고 치는 자식은 보통 바깥으로 내돌리지. 제대로 밉보이면 아예 한국에 못 들어오게 만들고. 박 회장님의 손자가 열네 명인데, 그중에 한 명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야. 박 회장님이 호락호락한 성격도 아니고. 나이를 먹으면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알아야 하는데 박광호는 그게 없어.”
채훈은 냉혹한 세계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걸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는 승건의 말도 차갑게 들렸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만 들었지 진짜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러다가 문득 승건이 납치 미수를 당했던 게 떠올랐다. 후유증 치료로 미국에 갔다고 했지만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취직까지 했다면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승건은 열아홉의 그때, 냉혹한 세계에서 표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추정일 뿐이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뜻하지 않게 씁쓸한 현실을 엿보게 된 채훈은 적당히 말을 이었다.
“나야 박광호 얼굴 안 보면 좋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써니에게는 연락하지 마. 연락이 와도 마찬가지고. 그쪽도 그렇게 성격이 좋지는 않아.”
“네가 빽이라고 하고?”
“마음대로 해.”
그걸로 대화가 잠시 멈췄다. 채훈은 승건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밤의 도로에 가득 찬 자동차의 붉은 미등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만둘 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승건이 박광호를 말리다 못해 백이라고 자처해 주니 고마운 일이었다. 월요일에 당장 박광호 앞에서 기죽지 않고 맞받아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궁금한 것은 여전히 많았다. 10여 년 전에 무슨 일로 납치를 당할 뻔했는지, 왜 20억이나 들여서 자신이랑 만나려고 하는 건지, 또 지금은 백이 되어주는 건지 말이다. 캐묻지 말라고 계약서까지 쓴 게 이럴 때를 위한 건가 싶었다.
조금은 섭섭하고 짜증도 났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오래 고민하는 취미는 없었다.
잠깐의 적막을 이용해 채훈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강영환에게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채훈은 나중에 설명한다고 메시지만 보내고는 여전히 알람은 무음으로 유지해 두었다.
그러다 보니 8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1시 이후로 먹은 거라고는 맥주 두 병이 전부였다. 이대로 내일 아침까지 버텨야 한다면 슬퍼질 것 같았다.
“승건아.”
“왜?”
“밥 먹었어?”
“먹었어. 너는…… 설마, 안 먹은 거야?”
“동생이 사기 쳤다니까. 아파트에서 뭔가 시켜 먹는 건 안 되겠고, 가다가 햄버거 세트 하나만 사가자. 뭐라도 먹어야 될 것 같아. 아니면 아파트 근처에 있는 편의점 앞에 세워줘도 되고.”
채훈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재빨리 나열했다. 아무래도 승건의 아파트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은 무리였다. 베스트는 햄버거 세트였고, 그것도 아니라면 편의점을 터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승건의 아파트와 같은 라인에서 작은 길 하나만 건너면 편의점이 있었다.
“편의점?”
“샌드위치나 삼각김밥은 금방 먹을 수 있으니까.”
“밥을 먹을 거라면 제대로 먹어. 삼각김밥 같은 거 먹지 말고.”
“그럼 적당히 내려주면 내가 알아서 할게. 10시에 맞춰 가면 되지?”
이미 저녁을 먹었다고 해서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건데, 삼각김밥 같은 걸 먹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으니까 괜히 기분이 상했다. 어차피 약속 시간은 10시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말이 딱딱하게 튀어나왔다.
“아파트 주변에 식당이 여럿 있으니까 거기 가자.”
승건이 뜻밖의 제안을 하는 바람에 채훈은 잠시 버벅거려야 했다.
“어……. 너도 가려고? 밥 먹었다며?”
“간단한 거 먹으면 돼.”
“어, 음. 그럼 아파트 뒷길에 일식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 가자. 전에 한 번 먹어봤었는데 괜찮았어.”
“그래. 거기가 낫겠네.”
확실히 삼각김밥보다는 제대로 요리한 음식이 좋았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같이 먹을 사람이 있다면 더 즐거워진다. 물론 승건이 얄미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붙긴 하지만 어쨌든 괜찮았다.
“내일 스케줄은 어떻지?”
“어? 왜?”
“내일 점심도 같이 먹게.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긴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어때?”
초밥을 잔뜩 먹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채훈은 갑자기 내일 점심도 같이 먹자는 승건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앞만 보며 운전하고 있었다.
당장에 급한 일은 없었다. 집안일은 모두 다 하고 나왔다. 내일 오후에 체육관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승건이 갑자기 점심을 먹자고 하는 게 이상했다.
계약서에는 주말 하루라고 명시되어 있긴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만났지만 그게 지켜진 것은 계약을 했던 그날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섹스만 하고 곧장 헤어졌다. 출근 문제도 있었고 감정이 얽히기 싫다고 하니 붙어 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승건도 딱히 붙잡지 않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냐고 물었다가는 좋은 분위기를 깰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럼 메뉴는 내가 정해도 돼?”
“뭐가 먹고 싶은데.”
“중식. 코스로 먹자.”
채훈은 아주 호기롭게 외쳤다. 중식은 의외로 챙겨 먹기 까다로운 메뉴였다. 많은 사람들이 짜장면이나 짬뽕으로 한 끼를 먹었다. 두 명 이상이면 탕수육도 곁들였다. 하지만 그것 외에 다른 요리는 인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채훈 주위의 사람들은 중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중식을 싫어했기 때문에 가족 외식 메뉴에서는 늘 빠졌다. 자주 모이는 친구들도 중식 코스 요리를 먹을 바에야 그 돈으로 소고기를 구워 먹겠다고 했다.
게다가 채훈의 기억으로 승건은 짜장면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승건의 대답이 없었다. 채훈은 승건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고는 혹시나 물었다.
“혹시 싫어? 싫으면 다른 거 먹고.”
“중식 괜찮아.”
괜찮단다. 채훈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내일 가야 할 곳이 어디야? 거기 근처로 찾아볼게.”
“강남 쪽이야.”
“알았어. 내가 예약할게.”
채훈은 당장에 휴대폰을 들고 강남 부근의 괜찮은 중식당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활동하는 카페에서 추천받은 곳이 여럿 있었는데, 다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나마 눈길이 가는 곳이 예전부터 찍어두었던 호텔 중식당이었다.
“호텔 중식당도 괜찮지? 응?”
“열의가 넘치는데.”
“맛있는 거 먹는 걸 좋아하거든. 아무래도 중식은 먹을 기회가 드물어서.”
채훈은 딱히 체면 차릴 것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주변의 친구들도 모두 아는 것을 승건에게 말하지 못할 건 없었다.
“미식?”
“거기까지는 아니고. 일종의 취미야. 맛집 찾아다니는 거.”
“옛날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그때는 뭘 몰랐고.”
집밥과 급식, 그리고 치킨, 피자, 햄버거가 전부였던 학창 시절에는 맛집이란 그저 단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자 세상이 넓어졌다. 팍팍하고 스트레스가 넘치는 일상에서 식도락은 자그마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게가 승건의 아파트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차는 주차장에 세워두고 가기로 했다.
“자, 여기.”
차에서 내린 채훈은 아까부터 덮고 있었던 재킷을 승건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재킷을 받아 입은 승건이 한 번 더 미간을 찡그렸다. 여전히 자신에게서 다른 냄새가 난다는 의미였다.
“아직도 냄새나?”
“그래.”
“그럼 씻고 올까? 씻으면 사라지는데.”
“그것보다는 이게 낫겠다.”
“―?!”
채훈은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승건에게 끌어안기고 말았다. 당연히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한 채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빼내려고 하는데 승건에게 손이 잡혔다.
“가만히 좀 있어봐.”
“뭐야?”
“냄새 덧입히게.”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하겠지. 네 체질이라면.”
그러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기 때문에 채훈은 힘을 빼고 가만히 있었다. 다 큰 사내 둘이 사람 하나 없는 드넓은 주차장에서 끌어안고 있는 게 웃겼지만 채훈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더라도 끌어안을 만한 일이 있으려니 할 것이다.
그러나 승건과 그런 관계이다 보니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아도 살갗을 맞대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채훈은 야릇한 느낌을 털어내기 위해 승건을 마주 안았다. 일부러 토닥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덩치 큰 승건에게 끌어안겨 있자니 뭔가 떠올랐다.
“고양이가 이런 거 하는데.”
“고양이?”
만족스럽게 냄새를 덧입혔는지 승건이 떨어져 나갔다. 채훈은 승건의 얼굴을 보았다. 그나마 미간은 제대로 펴져 있었다.
“태호네 고양이가 접대냥이인데, 손님이 오면 막 몸으로 비벼대거든. 자기 냄새 묻힌다고 말이야.”
“비슷하긴 하군.”
“그래도 네가 고양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긴 하다.”
아무리 그래도 승건을 고양이에게 비교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다. 거기다 남태호네 고양이는 뚱냥이기까지 해서 더욱 그랬다. 승건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채훈은 승건이 고양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지 못한 채 그냥 웃었다.
“이제 냄새 안 나지?”
“그래.”
“그럼 가자. 배고파.”
밥 먹을 생각이 가득한 채훈은 승건을 재촉했다.
* * *
“받아라. 받아. 받으라고.”
운전석에 앉은 박광호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는 간절하고 짜증 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딱딱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다섯 번째 듣는 멘트였다.
“씨바!!”
박광호는 욕설을 내뱉으며 종료 버튼을 거칠게 눌렀다. 여섯 번째 재다이얼을 누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전화를 안 받는 걸 보면 차단한 게 분명했다.
“개씹새끼!”
휴대폰이 부서지든 말든 그대로 내던진 박광호는 욕설과 함께 운전대를 후려쳤다. 분이 풀리지 않아 몇 번이고 두들기자 시끄러운 경적이 울렸다. 클럽 주차장에 커다랗게 소리가 울리자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봤지만 박광호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씩씩대며 운전대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러나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씨발. 지가 뭐라고. 허수아비 주제에!”
입으로는 승건을 비하해 보지만 머리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재벌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열네 명의 손자 중에 하나인 자신과 달리, 몇천 억대 계약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승건은 실세 중의 실세였다.
“미치겠네!”
박광호는 비명을 지르며 운전대에 머리를 박았다. 승건이 말한 계약이 무엇인지 박광호도 대충 알고 있었다.
망나니 재벌 3세로 살아왔지만, 나이를 어느 정도 먹자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귀를 열어놓고 있었다. 이번 신약 개발 계약은 박광호의 아버지인 박용운이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신약 개발은 거의 성공 직전이었고 이번 계약은 그저 이름만 슬쩍 걸치는 것뿐이었다. 셋째 아들이기에 후계자 경쟁에서 몇 발 뒤처져 있는 박용운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그 기회가 박광호 때문에 엎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했다.
이 바닥에서 나고 자란 박광호는 돈과 권력을 위해 사람이 얼마나 비정해질 수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만약에 승건이 계약 조건으로 박광호를 쫓아내라고 한다면 박용운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아들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원래부터 그다지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 번 도태된 작자들의 말로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 그저 그런 파락호로 전락했다. 최악은 한국 밖으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금 박광호가 딱 그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 씨발. 씨발. 씨발!”
억울함과 분함에 박광호는 발광을 하며 운전대를 몇 번 더 내리쳤다.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채훈의 뒷배가 승건일 줄 누가 알았겠냔 말이다.
“그 새끼가!”
박광호는 채훈을 떠올렸다. 모든 원흉은 그 새끼였다.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게 넘어갈 실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볼만한 건 얼굴뿐이면서 제 주제를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뻗댄 이유가 승건이라는 뒷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도도하게 얼굴을 쳐들고 있었지.
지금까지 채훈이 속으로 비웃었을 것을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지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새끼만큼은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채훈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은 쉬웠다. 병원에서 잘리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는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뒷감당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승건이 작정하면 자신은 어디론가 쫓겨날 게 뻔했다. 그것도 빈털터리로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괜찮았다. 그러나 거지꼴로 사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또 없었다.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수습할 수 있는 사고만 치는 것도 다 돈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승건이 채훈을 버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되갚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내일 당장일 수도 있지만 1년 후나 2년 후일 수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오늘이라도 채훈이 바닥에 나뒹구는 꼴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게 미칠 것 같았다.
“으아아악!”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박광호는 다시 한번 더 발광했다. 채훈 때문에, 승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자 다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든 시도라도 해보고 싶은데,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자존심과 돈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씨발. 진짜 내가 가만히 안 둔다.”
박광호는 돈을 선택했다. 그러면서도 복수를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