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파트너라는 건 (2)
그날 밤은 결국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재혁은 모든 일정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방으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 죽어가는 꼴로 다니면서도 모든 테스트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존재가 너무 강렬했는지, 사람들은 오가며 나를 힐끗거렸다.
“그래서 두 분은 받을 겁니까, 말 겁니까.”
다만, 진짜 문제는 바로 오늘부터였다.
눈만 마주쳐도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놈과 함께 파트너십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
앞에 앉아 있는 평가원은 우리만큼이나 이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흘러내리는 안경을 끌어올렸다. 나는 파일에서 시선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평가원에게 물었다.
“선택 사항이었습니까?”
“필수 사항이죠.”
그는 인상을 한껏 구기며 대답했다. 대체 그럴 거면 왜 물어보는 건지. 그는 나는 안중에도 없고 옆에 앉은 놈을 보며 물었다.
“전재혁 님,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내가 쉬면서 체력을 쌓는 동안에도 열심히 땡볕에서 굴렀을 녀석은 눈에 띄게 몸이 안 좋아 보였다. 항상 여유롭던 모습도 없고 어딘가 초조하고 긴장되어 보였다. 간간이 다리까지 떠는 게 지금 당장 과호흡으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괜찮습니다.”
평가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설명을 시작했다.
“그럼 이틀 동안 진행할 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간단합니다. 설문 조사와 함께 상담사분과 면담 후 지정된 과제를 완성하시면 됩니다. 내일은 숙소가 아닌 24시간 녹화가 되는 방 안에서 그냥 평소대로 지내시면 되고요.”
마치 로봇처럼 속사포로 쏟아내는 일정은 편한 듯 불편한 일들만 가득했다.
“무슨 기준으로 평가가 되는 겁니까, 대체.”
“과제 달성률 50%, 전문가 의견 50%로 평가됩니다. 두 분 다 개인 평가는 좋으시니까 무난하게만 넘어가시면 될 겁니다.”
인위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평가원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들 파트너와 있어서 그런지 복도는 왁자지껄한 게 시장 통 같았다. 그 사이를 지나가는 내내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재혁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신경도 쓰지 않고 갈 길을 갔다.
남은 이틀을 대체 어떻게 버텨야 하나 고민하며 그의 뒤통수만 보고 걷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백유운.”
그 목소리를 못 알아들었다면 팔을 당긴 표성에게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오늘 팀장님한테 어머니 퇴원하셨다고 연락 왔어. 승아랑 원래 살던 집에 들어가셨대.”
“그걸 왜 저한테 안 전하고…….”
“너 전화 안 받는다고 나보고 전해달라 그래서.”
“알겠습니다.”
잡은 손을 놓은 생각이 없는 표성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대?”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을 왜 나에게 물어보는지 의문이었다. 애써 다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귀가 우리의 대화로 몰려 있었다.
“괜찮으니 저러고 다니겠죠.”
체크만 하면 된다길래 금방 끝날 줄 알았더니 문제는 자그마치 1,000개나 됐다. ‘당신은 여자냐’부터 시작된 질문은 ‘요즘 나는 매우 피곤하다’를 거쳐 점점 이상한 단계로 발전했다.
심지어 파트너와 관계를 맺는지,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도 묻고 있었다. 이런 질문이 있는 걸 보니 많은 사람한테 있을 법한 상황들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난 아직 대답해야 할 질문이 절반이나 남았건만, 일정한 속도로 체크를 하던 놈은 진작 다 끝내고 검사실 밖으로 나가 소파를 점령하고 누웠다. 참 재수 없어 보일 장면이었는데, 그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고 측은하게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상태를 왜 나한테 묻나 의문이었는데, 생각해보면 규정상 내가 진단서를 끊고 그에게 혈액을 얻어다주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인 듯했다.
저 정도로 골골거릴 정도면 굽히고 들어와서 혈액 팩 좀 달라든가 목이라도 조르면서 협박할 줄 알았더니 녀석은 무식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쯤 되면 관리 측에서 억지로라도 정상 범위까지 만들어놓을 텐데 왜인지 그는 아직도 빌빌거릴 뿐이었다.
자기가 괜찮다는데 내가 신경 쓸 이유가 뭐 있나. 쓰러지기라도 해서 안 볼 수 있으면 더 좋은 거지.
다시 설문에 집중해 대답하고 나니 생각보다 시간은 훅훅 지나갔다. 세 시간 동안 하얀 종이를 보고 있으니 눈이 다 뻑뻑했다.
“우왓……!”
검사실 문을 열자마자 날아온 보따리에 뒤로 넘어갈 뻔했다.
“빨리 좀 해.”
녀석은 언제 일어났는지 문 앞에 서서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이젠 숨을 쉬기도 힘든지 짧은 말을 하는 중간에도 거친 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녀석이 가는 대로 따라가니 다름 아닌 탈의실이었다.
자리를 잡고 보따리를 열자 안에는 운동복과 신발, 모자, 장갑까지 몸에 걸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얀색으로 맞춰놓은 세트가 들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주섬주섬 옷만 갈아입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본 재혁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몸은 알아서 보호해.”
“뭐?”
“네 몸, 알아서 챙기라고.”
평가원의 안내에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야외였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밟고 다닌 듯 풀이 짓무른 부분이 많았는데, 형형색색의 물감까지 범벅되어 있는 게 그야말로 자연 파괴의 현장이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가운데에는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상 위, 지우개 달린 연필을 보며 서 있는데 컴퓨터 음성이 흘러나왔다.
[룰을 설명하겠습니다. 하나, 사격이 시작된 후, 흩어져 있는 질문지를 찾습니다. 질문지는 총 네 장입니다. 둘, 질문지에 적혀 있는 답변을 번호에 맞게 기재합니다. 셋, 뱀파이어는 머리와 가슴을 맞을 시, 인간은 다섯 발 이상 맞을 시 즉시 상황 종료입니다.]
룰 상태를 보아하니, 적절한 그들의 보호 아래 질문지를 모으고 협동심으로 문답 작성을 하길 원하는 듯했다. 그리고 재혁이 했던 말은, 널 보호할 생각 따윈 쥐뿔도 없으니 네 몸은 네가 챙기라는 뜻일 터였다.
곧 죽을 것 같은 그에게 경고했다.
“질문지는 내가 모아올 테니까, 그 상태로 날뛰지 마.”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했다. 그는 나의 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몸이나 잘 지키고 있어.”
[2분 뒤 사격이 시작됩니다.]
“네 상태 생각하고 말해. 이거 아웃당했다간 귀찮은 일만 더 생긴다고.”
그는 이제 대놓고 나를 무시했다.
[1분 뒤 사격이 시작됩니다.]
“질문지는 내가 모아온다니까. 들었어?”
“그만 말해. 시끄러워.”
아니, 듣기 싫으면 대답을 하든가.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무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읏.”
허벅지를 가격하는 페인트 볼에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기계가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감이 비교적 덜 튄 곳에서 페인트 볼을 피하며 길을 계산하는데, 녀석은 이미 다 파악이 된 건지 흐느적거리며 이미 출발을 해버렸다.
“야! 그냥 가만히…….”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건 동의의 표시가 아니라 거절의 표시였었나 보다.
아예 맞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네 발만 더 맞는다면 허망하게 끝이 나는 데다, 큰소리까지 쳐놓고 아웃당하면 비웃음을 당할 게 뻔했으니 절대 실수를 하면 안 됐다.
이미 종이를 들고 돌아온 녀석은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힘으로 몸뚱이를 굴리고 있는 건지.
거만한 놈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발을 뗐다.
“안 그래도 갈 참이었다고.”
풀숲을 달렸다. 나무 중턱쯤 걸려 있는 종이는 속도만 잘 조절해 간다면 아무 문제없이 얻을 수 있는 위치였다. 심장과 머리를 노릴 가능성이 다분한 터라 몸을 숙인 채 달리자니 허리가 뻐근했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 나를 대신해 물감을 맞고 집터를 잃고 있다는 사실에 불쌍하다는 생각도 잠시, 자비 없는 속도로 내리꽂는 페인트 볼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처음엔 싱그러웠던 풀 향기도 계속 맡고 있자니 쓰게 느껴졌고, 빨갛게 익어 화끈거렸던 살은 바람을 맞으며 제 온도를 찾아갔다.
이미 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가 다져진 흙바닥을 딛고 목표 지점에 손을 죽 뻗었지만 깁스한 손가락으로는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페인트 볼 자국이 낭자한 풀 길로 다시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가속을 얻은 몸은 무사히 종잇조각을 얻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숨을 고르고 다시금 길을 머리에 새긴 뒤 달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긴장시키고 10분 동안 씨름을 해서 한 장을 겨우 들고 왔건만, 녀석은 이미 책상 위에 두 장의 종이를 두고 있었다. 그는 거만하게 말했다.
“지혈조차 안 한 상태로 그렇게 뛰었다간 이미 과다 출혈로 죽었을걸.”
눈으로 나의 허벅지를 가리키며 말하는 녀석은 정말 손바닥을 제외하곤 깔끔했다. 넌 이미 손 하나가 날아갔을 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무시무시한 그의 재생력을 봐온 터라 근질거리는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리 빨리 다니나 했더니, 무식하게 손바닥으로 막아가며 달린 모양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지막 질문지를 향해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진흙과 가시덩굴이 펼쳐져 있는 게, 여기서 훈련을 시키지 뭐 하러 섬까지 가서 지옥 훈련을 하나 싶을 정도였다.
질퍽거리는 땅에 몸은 완전 군장이라도 한 듯 무겁게 느껴졌다. 찌걱대는 진흙이 신발 속으로 들어오며 불쾌감을 더했고, 간간이 발밑을 찌르는 돌조각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금방이라도 치고 나갈 줄 알았던 그가 나와 비슷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나란히 달리는 터라 한쪽을 신경 쓰지 않고 달릴 수 있어 편하다는 게 참 좋긴 했다만.
그는 가래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얌전히 기다리지그래.”
“너야말로 불곰이 되기 전에 진흙탕에 빠져서 반신욕이나 즐기고 있어. 곧 불타 죽을 것 같으니까.”
“내 몸을 걱정하다니 여유 있네. 오지랖 부리지 말고 앞이나 잘 봐.”
그의 말에 자동으로 앞을 보는 순간, 태클에 걸려 바닥을 굴렀다. 온몸에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중심을 잡고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도움이야 애초에 기대도 않았지만, 방해하는 일은 상상에도 없던 시나리오였다. 질퍽거리는 흙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그는 유유자적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버젓이 파트너십 테스트를 하는 상황에서 나를 왜 진흙탕에 구르게 하는 건지. 하얀 옷은 이미 더러워졌고 쏟아지는 페인트 볼들은 나를 가격했다. 찐득거리는 몸에 처맞기까지 하고 있으니 만신창이가 된 몸만큼이나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웃. 상황 종료입니다.]
기계는 눈치 없이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멍청히 서 있다가 진흙탕을 벗어나는 그에게 돌조각을 날리곤, 발걸음을 멈춘 놈에게 달려들었다. 나의 힘에 진흙 속으로 끌려 들어온 그의 몸이 내 위로 떨어졌다.
존재한 적도 없는 파트너십을 어떻게 평가를 한단 말인가. 상황 종료고 뭐고 눈앞에 있는 놈부터 처리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눈에 튄 진흙에 앞을 보기 힘들었다. 그를 밀쳐내고 한쪽 눈에 의지해 주먹을 날렸지만, 허공을 가르고 애꿎은 땅만 쳤다.
“!”
상대도 당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는지 거침없이 내 몸을 집어 들어 풀숲으로 내동댕이쳤다. 곧장 자세를 바로잡고, 주먹을 휘두르는 놈을 피하며 소리쳤다.
“장난해?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목소리만 커선.”
발길질하는 그를 피해 정확히 명치를 노렸지만, 눈치 빠른 녀석은 금세 물러나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옷깃을 잡기 위해 뻗은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애초에 멀쩡히 가고 있는 사람한테 태클을 건 게 누군데?
[아웃. 상황 종료입니다.]
장내엔 기계음이 시끄럽게 울렸고, 말 그대로 진흙탕 싸움이 시작됐다. 이를 악물고 그의 팔을 잡아도 미끈거리는 탓에 잡히지 않았다. 겨우 놈의 옷을 잡았다지만 맥없이 북 찢어지며 오히려 옷 쪼가리를 잡은 내가 그의 힘에 딸려 가야 했다.
녀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들어 바닥에 짓눌렀다. 그가 평소보다 기운이 바닥나 있지 않았다면 생명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등을 짓이기고 있는 그의 뜨거운 손이, 이젠 불규칙적으로 내뱉는 숨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귓가에 대고서 속삭였다.
“네가, 아무리 발악해도, 이게 현실이야.”
까칠한 흙모래에 얼굴을 박고 있는 것이란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윽!”
나의 튼튼한 머리에 얼굴을 맞은 놈의 힘이 풀린 순간, 그를 뒤집어엎으며 깔고 앉았다. 나의 손 아래 깔린 그의 얼굴은 아마 좀 전의 나와 같은 감촉을 느끼고 있겠지.
“현실은 이게 현실이지. 굶주린 짐승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게.”
그의 새빨간 귀가 볼 만했다. 힘을 줄수록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녀석의 몸은 이제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꿈틀거리는 놈의 움직임을 막았다.
“어때, 그렇게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게. 마음에 들어? 네가 어떻든 나는 꽤 만족스러운데.”
멀리서 달려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꼬락서니가 꽤 웃겼다.
“윽, 비…… 켜.”
“매번 실실 쪼개다가 당해보니까 어때? 좋아?”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사람의 시선을 끄는 재주가 있었다. 봐도 봐도 신선하고 속이 시원해지는 얼굴이었다. 녀석이 항상 나의 이런 모습만 봐왔을 것을 생각하니 고소했다.
사람들의 피부를 포악하게 뚫으며 혀를 놀려대는 그들이 당할 땐 어떤 얼굴을 할까. 충동적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들었다.
“좋냐고.”
나뭇가지를 들어 그를 찍으려던 순간,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떼어놓는 놈들의 힘에 질질 끌려갔다.
“좋냐고 묻잖아!”
녀석은 다른 놈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서 피를 토하더니, 부축하는 이들의 손을 뿌리치곤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마저 말리는 놈들의 손에 의해 저지당했지만.
왜 저렇게 피를 토하나 했더니 그의 배엔 보기 좋게 나뭇가지가 박혀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를 뽑아 나를 향해 집어 던지며 말했다.
“하, 좋다면 어쩔 건데.”
힘껏 휘두른 손에 비해 나뭇가지는 힘없이 추락했고, 그의 상처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손끝까지 빨갛게 익은 그는 그렇게 끌려갔다. 구경 나온 이들 모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에게 달려드는 이들과 막는 녀석들로 엉망이 됐다. 얽힌 이들 틈에서 표성이 나에게 달려왔다.
“미쳤어?”
“제가 미쳤다면 저놈은 진작 죽었습니다.”
“그동안은 네가 얼마나 놈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지 아니까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 넌 선을 넘었어.”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제멋대로 사는 놈의 장단에 맞춰 춤춰준 것밖에 없는데 왜 이런 말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이젠 억울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나의 팔을 붙잡은 놈들을 뿌리치고 걸어 나왔다. 이젠 공기를 만나 말라버린 진흙이 갈라지며 몸에서 후두두 떨어졌다. 무거웠던 몸도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아직도 열이 오른 그의 체온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맑은 하늘은 끊임없이 따가운 햇살을 쏘아대고 있었고, 나를 불쌍하다는 눈으로 흘깃거리던 사람들은 이제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다.
뱀파이어 놈들은 곧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지만, 섣불리 뛰어드는 이는 없었다.
내가 그 녀석들에게 깔려 있을 때만 해도 손 놓고 구경하던 이들은 고작 나뭇가지를 배에 꽂고서 고꾸라지는 재혁을 보고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왜 그랬어. 너답지 않은 모습이잖아, 지금.”
표성은 걸어가는 나를 붙잡고 답이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무슨 대답을 원하든 나는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죽어가는 놈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잖아.”
“이 정도로 죽을 놈이 아니라는 거 알잖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죽고 싶어서 날뛰던 놈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굴어.”
“…….”
사람들은 어수선하게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고, 표성은 나를 따라오느라 바빴다. 무작정 발길을 돌려 건물로 들어섰지만, 바닥에는 그가 흘린 핏자국이 선명하게 이어져 있었다.
정신없이 터지는 일들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옆에서 계속 말을 거는 표성 덕에 심박 수는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계속 귓가를 울렸다.
당사자도, 그를 숭배해대는 놈들도 아닌 표성이 왜 그렇게 그를 감싸고도는 건지 조금 배신감이 들었다.
“네가 말했잖아, 진작 죽였을 거라고. 그래도 넌 한 번도 죽인 적 없었잖아. 네가 왜 그들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해해. 그래도 선은 지켜야…….”
나를 잡아 세운 표성은 마치 나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 뭘 안다고, 뭘 이해한다고 함부로 말합니까.”
“알아. 네…….”
그는 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에 대한 파일. 정리하다가 봤어. 사건에 연관돼서 안 볼 수가 없었어. 근데 거기에, 너에 대한 사건도 있었을 뿐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열로 부글부글 끓던 머리가 급속도로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래, 난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이해 못 해. 그래도…… 그래도 너랑 5년을 넘게 부딪치면서 지낸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네가 걱정된다고.”
“5년을 함께 일했든, 10년을 함께 일했든 그런 걱정 따위 필요 없습니다.”
마른세수를 한 표성은 나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들어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마음껏 보라고 하세요. 힐긋거리는 눈길도 이젠 다 지긋지긋하던 참이었습니다.”
그에게 붙들려 몸을 숨기는 일 따위 하지 않아도 됐다.
“백유운 씨입니까?”
정신없이 움직이던 평가원의 손에 끌려가야 했기에.
따라오지 않는다면 바로 낙제점을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에 끌려간 곳은 포근한 침실도, 무균 상태로 만들어놓은 수술실도 아닌, 냉랭하기 짝이 없는 순백색 타일이 깔린 방이었다.
락스 향이 가득 찬 곳엔 얼마나 에어컨을 살벌하게 틀고 얼음을 많이 갖다놓았는지, 들어오자마자 입김이 뿜어 나오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재혁의 주위에선 그의 입에 피를 들이붓기 위해 혈액 팩을 들고서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들의 손길을 죄다 거부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사방에 튄 혈액이 바닥과 벽, 그리고 그들의 하얀 가운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 난리에 끼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을 리 만무했지만, 재혁은 그 와중에도 내가 온 걸 눈치챘는지 나와 시선이 스치기를 반복했다.
“우욱…….”
우리를 따라 쫓아온 서연은 결국 헛구역질을 하다가 밖으로 뛰쳐나갔고, 표성은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재혁을 보고 있었다.
“혈액에 대한 거부가 너무 심하셔서…… 지혈도 겨우 했습니다.”
파일을 들고 온 여자는 다짜고짜 나의 손목을 잡더니 울상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손을 달달 떨고 있는 게 그에게 꽤 시달리다 왔거나 이런 피바다를 처음 본 듯했다.
남들은 없어서 못 먹는 걸 저놈은 왜 저런 고집을 부려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건지.
“제풀에 지쳐 쓰러지면 그때 억지로라도 먹이든지 하세요. 괜히 저항하는 놈한테 아까운 피 낭비하지 마시고요.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아직 멀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끌었다간 뒷감당이 곤란하다고요.”
“본인이 괜찮으니 저러는 겁니다.”
“그래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면 밖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녀석의 먹이가 되길 자처하며 기다릴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나에게 달려든 녀석에게 밀려 더는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거칠게 숨을 내뱉는 놈에게 말했다.
“……뭐 하는 짓이야?”
당황한 남자의 손에서 미끄러진 혈액 팩이 찰박거리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벽으로 밀쳐진 나의 몸에서 나는 둔탁한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는 바득바득 이를 갈다가 멈춘 뒤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냉기가 가득 퍼진 공기를 사이에 두고 그의 몸에서 퍼지는 열기가 느껴졌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몸은 간헐적으로 나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얼음이 녹은 물에 젖은 그의 몸은 차갑기는커녕 여전히 나보다 뜨거웠다.
아직 닦지 못한 진흙과 누구의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을 피를 뒤집어쓴 그의 얼굴은 악이 올라 있지도, 화나 있지도 않았다. 매번 짓던 여유로운 표정도 아니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네 부탁을 들어줘.”
그렇다고 피부가 썩어 문드러지던 그때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의 근육들은 안절부절못하는 움직임에 맞춰 경련을 일으키며 움찔거렸다.
“사람들 좀…….”
자신의 몸을 제어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그는 초점이 나간 눈을 되돌리기 위해 고개를 저어대면서도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꼴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울대 역시 계속 움직였다.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그의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고, 더는 빨개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볼은 나름대로 피에 어울리는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미간을 한껏 구기며 힘들게 말을 이었다.
“사람들 좀 쫓아줘.”
‘색기를 띤’이라고 하면 적당할 얼굴이었다. 익어버린 그의 귀를 슬쩍 건드리자 신경질적으로 쳐내면서도 뜨거움 숨만 내뱉는 놈이었다.
“네가 뭔 짓을 할 줄 알고 내가 사람들을 내쫓아?”
매번 발악하는 나를 보며 미소 짓던 상대가 나를 향해 얼굴을 붉히며 애원하고 있는 모습이란 희열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백번을 소리 지르는 것보다 이 순간이 그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제 몸을 버티기도 힘겨운지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며 밀착해왔다.
“그럴 일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참 신뢰가 가는 상대야. 그렇지?”
나보다 그의 뒤로 보이는 사람들과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표성이 더 가슴을 졸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닥을 적신 액체가 조금씩 영역을 넓히며 우리 쪽으로 흘러왔다. 언제 이성을 잃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재혁을, 붉은 액체가 옭아매는 듯했다.
“으…….”
그의 마른 입술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나는 조금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한 번쯤은 믿음을 보여줘야……”
어깨로 전해지는 재혁의 힘은 형편없었다. 그런 그의 뒤통수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나도 안심을 하지 않겠어?”
“읏!”
늘어난 티셔츠에 훤히 드러나 있는 나의 목으로 그의 얼굴을 처박았다. 얼마나 가깝게 붙어 있는지 웬만해선 들을 수 없는 그의 심장 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짧고 빠르게 몰아쉬던 숨을 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의 입으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바들거리는 호흡이 목을 스쳤다.
그의 귓가에 또박또박 속삭여줬다.
“첫 번째, 난 네 백업 따위 할 생각 없어. 현장에서 결정은 내가 해. 두 번째, 팀장님한테 콜트를 돌려받아 와. 세 번째, 앞으로 나한테 이렇게 들러붙는 일 생기게 하지 마. 너든 다른 놈이든.”
치아가 닿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놈 덕에 그의 입술이 목 주변을 간질였다.
내가 굳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들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표성은 의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문을 힐끔거렸지만.
들러붙지 말라는 말에 맞닿은 몸을 떼어내기 위해 재혁의 팔 근육은 열심히 존재를 알리며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금방 맥없이 고꾸라졌다.
얼마나 이렇게 서 있던 건지 등이 시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조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말없이 고개만 처박고 있었다. 답 없는 그에게 한 번 더 말했다.
“싫어? 그럼 하나 더. 관사를 따로 쓰지 못하겠다면 침대는 내가 쓰도록 하지.”
지금 상황에서 내가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는가.
“……마음대로, 해.”
바닥을 뚫고 들어갈 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 이미 너덜너덜 찢긴 그의 옷 사이로 쑥 집어넣었더니, 앓고 있는 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단단한 근육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쓸데없이 근육만 많아선…….”
추위에 덜덜 떨면서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 질렀다.
“뭐 해요? 그렇게 닦달을 하던 분들이. 계속 서서 구경할 겁니까?”
죄송하다며 헐레벌떡 뛰어나가는 사람들과 다르게 표성은 나의 얼굴과 그를 더듬고 있는 나의 손을 번갈아 보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넌…….”
표성은 열었던 입을 곧바로 닫아버렸다.
내 손바닥에 닿은 그의 심장은 이젠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움직일 생각 없이 나를 보고 있는 표성을 향해 고갯짓했다.
“허, 참.”
다행히 중얼거리며 순순히 나가주는 표성 덕에 이 시베리아 벌판 같던 곳에는 재혁과 나 둘만 남게 되었다. 고요한 방 안에서 나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놈의 가슴팍을 향해 팔에 힘을 줬다.
저항 없이 나의 힘에 밀려 벽에 붙어버린 놈은 눈도 뜨지 못하고 헉헉대면서도 바닥을 흐르는 피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매번 날 보고 더럽다 더럽다 노래를 하길래 다른 ‘깨끗한’ 놈들의 피를 알뜰살뜰 먹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듯 보였다.
바닥에 흐르는 피를 정신 놓고 핥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판에 뭐 하러 고집을 부리면서 유난을 떨고 있는 건지. 바닥에 버려져 있던 혈액 팩을 던져주자 그는 힘없이 팔로 쳐냈다.
“어울리지 않게 궁상을 떨고 그래. 적당히 하고 마셔.”
열이 펄펄 끓는 그의 몸에서 벗어나자 왜 그들이 그렇게 심하게 떨어댔는지 알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지만, 으름장만 잔뜩 놓고서 다들 쫓아내고선 급하게 따라 나가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팔짱을 끼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으, 추워…… 냉동 창고도 아니고 뭐야.”
달달 떨고 있는데도 옆에 있는 놈은 여전히 등을 타일에 기댄 채 바닥만 보고 서 있었다.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다고 한들, 흡혈 없이 저놈이 갑자기 괜찮아질 리가 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가만히 있는 놈을 봤더니, 그는 귀신같이 알고 입을 열었다.
“10분만 기다려.”
10분은 무슨, 열 시간을 기다려도 저렇게 있을 것 같았다. 순혈이라는 놈들이 백 시간을 버티고 있겠다고 한들, 일말의 나아짐이 없을 거라는 사실쯤은 기억하고 있었다.
발치에 떨어진 혈액 팩을 주워 친절히 뜯어 그의 얼굴 앞에 들이밀어줬다.
“자연 회복은 인간의 피가 넘실거리는 놈들한테나 쓰는 말이야, 멍청한 새끼야. 빨리 마시고 끝내. 지금 그 상태로 나가면 내가 곤란……!”
백번 양보해서 선심을 썼건만 상큼하게 무시한 녀석은 나의 손을 잡아챘고, 마지막 남은 혈액 팩은 철퍼덕 떨어지고 말았다. 여길 본다면 얼마나 많은 놈이 절규하겠느냐는 생각도 잠시, 잡힌 손을 얼마나 세게 쥐는지 인상이 절로 써졌다.
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내 목덜미에 처박으며 중얼거렸다.
“……곤란한 일 안 만들 테니까, 조용히 좀 해.”
성질 나쁜 말투는 여전했지만, 쇄골에 코를 박고서 킁킁대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기억력이 3초인지, 들러붙지 말라는 약속 따윈 잊은 채 송곳니를 드러냈다.
“어휴.”
끝이 없는 싸움이란 없었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자 나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찍어 눌렀다. 헛구역질을 하던 서연의 행동이 과장된 건 아니었는지, 허우적거리던 놈은 바닥에 질펀하게 쏟아져 있던 혈액을 뒤집어쓰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를 둘러업고 문을 여는데, 와르르 쏟아져 들어오려는 사람들과 코를 틀어막은 채 눈을 번뜩이는 놈들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잠잠해진 건물에는 다시금 평범한 밤이 찾아왔다. 막바지에 다다른 일정에 다들 지쳤는지 다들 방 안에서 쉬거나 밖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도 그렇게 평범한 저녁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반강제적으로 감옥 같던 숙소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내 앞에선 아까 쓰러졌던 녀석이 미동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녀석은 사람이 맞으면 죽고도 남을 만큼 진정제를 맞고 억지로 피를 들이켠 뒤였다. 하지만 아직도 제 피부색을 찾지 못하고 붉은 기를 띠고 있는 게 무슨 플라밍고라도 되나 싶었다.
휴대전화를 켜도 팀장님이 걸어온 부재중 전화만 가득 쌓여 있었다. 주야장천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시간이 더 안 가는 느낌이었다. 눈이라도 붙여볼까 하고 누우려는데,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 자네.”
표성은 나와 누워 있는 녀석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바로 나의 침대로 몸을 날렸다.
“무슨 일입니까.”
“암살이라도 했을까 봐.”
표성은 실없는 소리에 자기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거리며 내 옆자리에 벌렁 누워버렸다.
“진짜 왜 오신 겁니까. 설마 싸웠어요?”
표성은 벌떡 일어나선 손사래를 쳤다.
“싸우긴 무슨. 그냥 대화 주제가 서로 안 맞았을 뿐이야.”
“그게 싸운 거죠.”
“그래, 그렇다고 치자.”
“이번엔 또 뭐였습니까. 말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걸 알면서 계속 도전하시는 것도 대단하시네요.”
이게 과연 내가 할 말인가 싶었지만, 표성은 맞지 않는 주제에 대해 괜한 토론을 벌이며 감정싸움을 할 필요 따윈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근 30분을 혼자 떠들던 표성은 제 할 말이 다 끝났는지 자는 재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겁 없이 한참을 여기저기 뜯어보고 나서는 참 별난 뱀파이어라며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순혈들은 다 이런 건가? 그게, 피도 때 하나 타지 않은 순수한 피만 먹어야 한다는 뭐 그런…… 막 기름기 끼고 담배랑 술에 절어버린 피에선 음식물쓰레기 같은 냄새가 난다든가. 너 요즘 담배를 너무 자주 피운 거 아니야?”
“매일 병원 들락거리느라 담배 구경도 못 했습니다. 애초에 많이 피우지도 않았는데요, 뭘. 그리고 그런 내용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럼 대체 지금까진 어떻게 산 거야? 매번 이렇게 난동 피웠을 리는 없을 거 아니야.”
흡혈이야 요즘은 워낙 대놓고 하는 놈도 없었고,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이나 어린 시절엔 팩에 든 피를 먹고 자라는 이들이라 흡혈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드물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를 적어도 6년은 봤는데도 그가 피를 마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살 만하니까 저러겠죠. 호사스럽게.”
아무리 순혈이라는 놈들도 한두 달 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돌아다니기 때문에, 때맞춰 공급받거나 사람들을 꾀고 다니며 부족하지 않게 먹고사는 걸로 알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그가 혈액 팩을 든 모습조차 본 적이 없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표성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내 주제에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이제 아셨다니 그것도 나름대로 놀랍네요.”
본인이 먹고살 일이나 잘 챙겨야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표성은 주머니를 뒤져 연고를 꺼냈다. 거리낌 없이 나의 웃통을 훌러덩 까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여기저기 치덕거리는 바람에 화한 느낌이 몸 이곳저곳으로 퍼지며 피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튜브에 든 연고가 얼마나 된다고, 끊임없이 치덕거리는 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기록돼 있던가요.”
“어?”
표성이 펄쩍 뛰는 바람에 싸구려 매트리스가 요동을 쳤다. 그 통에 상처가 표성의 손가락에 찔리는 바람에,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느꼈다.
“보셨다는 파일 말입니다. 저에 대해 어떻게 기록돼 있었습니까.”
“자세한 건 몰라. 순전히 네 아버지에 관련된 부분만 읽었으니까.”
팔꿈치에 새로운 반창고를 붙이던 표성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운이 좋았던 소년이라고…… 그들의 공장에서 탈출했다고 하던데.”
공장을 탈출했다니. 나름대로 어울리는 핑계거리였다.
“그게 다입니까?”
“16년 전, 연구원이셨던 네 아버지가 조사 중에 우연히 널 발견했다고 실려 있었어. 시체로만 발견되던 피해자들과 다르게 살아 돌아와서 이슈가 될 뻔한 걸 안전상의 이유로 막았다고 했고. 여기까지가 거기 있던 내용 전부야.”
표성은 기밀 사항이었을 파일 내용을 거침없이 술술 읊었다. 제3자에게서 듣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딱하기는커녕 토크쇼라도 나와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며 시시덕거려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함부로 열람할 수 없는 파일을 어디서부터 그들이 손을 봐놓은 건지, 이야기는 누가 기록을 해둔 건지. 그럴듯한 이야기에 나의 기억이 잘못된 줄 의심할 뻔했다.
“그래서 걱정하신 거였습니까? 제 과거를 알아서?”
표성은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네 과거가 어떻든 나야 아무 상관도 없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넌 언제든지 망가질 준비가 된 놈처럼 굴었다고. 옆에서 보는 사람마저 마음이 아슬아슬해지게 말이야. 다른 이들 눈에는 그냥 뱀파이어들을 죽이지 못해 미쳐버린 놈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가 보는 넌…… 그냥 외로워 보였어. 그래서 걱정한 거야. 네 목숨에 미련이 없어 보여서.”
표성은 정말 걱정이란 걸 했는지, 조금씩 높아지는 언성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곤 챙겨온 반창고를 여기저기 붙이며 말했다.
“봐봐. 이 상처들, 이거. 최근엔 몸을 더 막 굴리고 다닌단 말이야. 멀쩡한 곳을 찾는 게 더 힘들 판이다.”
목숨에 미련이 없다니. 살기 위해서 이렇게 발악을 하고 다니는데.
“그런 걱정 할 시간에 밥이나 한 끼 더 드세요. 결혼하고 살 많이 빠지신 거 같은데.”
나의 반응이 나쁘지 않자 표성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서라. 신혼의 매력이란 거지.”
표성은 같은 일을 하는 이와 결혼을 해서 얼마나 편하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또 항상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구구절절 늘어놓더니, 역시 자신의 잘못인 것 같다며 벌떡 일어났다.
“난 잘못이나 빌고 좋은 밤이나 보내야겠다.”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표성은 키득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의연한 척 넘겼지만 조용한 방에 누워 있으니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창가에서 스며드는 달빛에 새근거리며 자는 녀석의 숨소리까지, 청승 떨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인간 공장이라…….”
차라리 공장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꼬마였다면 정말 좋았으련만. 그렇지 않다는 게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진짜 그게 더 낫겠네.”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으로 손을 잡고 간 그날 본 이들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습하고 비릿한 향이 나는 더러운 뱀파이어 놈들이었다는 건 코끝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평생 나에게 관심이 없던 그녀가 내 손에 쥐여진 몇 푼의 돈에 나를 자랑스러운 아들로 생각했으니, 꼬마였던 나에게는 참 달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몸에 난 모든 상처는 아물기도 전에 다시금 터지고 농락당하며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건만, 그때에는 엄마라는 게 뭐라고 돈을 주는 그들에게 웃어 보였는지.
혼자 터진 웃음을 참느라 달밤에 미친놈처럼 혼자서 끅끅거렸다.
***
새벽부터 방에 카메라를 설치하느라 난리였다. 덕분에 얼마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 침대에 멍하게 앉아 있었고, 앞에 앉아 있는 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직 새벽공기가 쌀쌀한데도 웃통을 까고 있는 걸 보니 내가 다 추워지는 느낌이었다.
할 얘기도, 할 것도 없는 썰렁한 방에는 여전히 침대와 관물대가 다였다. 휴대전화도 빼앗긴 마당에 새로운 거라곤 조금씩 움직이는 햇빛 정도였다.
이 답답하고 어색한 공기 속에서 뭘 해야 하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할 일은 잠자는 것밖에 없었지만 또 자려고 하면 잠이 안 오는 게 사람 아니던가.
“하, 진짜…….”
시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건만 볼 때마다 움직이긴 하는 건지 싶을 정도라 아직도 열두 시간을 더 이렇게 버텨야 했다. 애꿎은 벽만 보고 누워 있자니 답답해서 침대에 앉았다가 관물대를 한번 뒤져봤다가 샤워도 하고 나왔건만 고작 30분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정신 사나워.”
짜증을 표출하는 녀석이 차라리 다시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 주위의 소리를 들어보니 하하 호호 웃음이 넘치는 게 다들 나쁘지 않은 휴식 시간인 듯 보였다.
심심함에 돌아버릴 찰나, 개밥 주듯 나눠주고 간 도시락은 누구 코에 붙이라는 건지 손바닥만큼 담은 밥 한 그릇과 콩자반, 제육볶음, 계란말이 두 쪽이 다였다. 암만 바닥을 구르며 모래 묻은 주먹밥도 먹고 훈련을 받았다지만 내가 왜 이런 걸 먹으면서 갇혀 있나 싶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 암말 없이 꾸역꾸역 씹고 있는데, 옆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체할 것 같았다.
“씨…… 안 그래도 맛없어 죽겠는데. 밥맛 떨어지게, 진짜.”
그는 시치미를 뚝 떼며 눈썹을 으쓱거렸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카메라에다 대고서 하나 달라고 해. 죄 없는 사람 시선으로 고문하지 말고.”
“냄새부터 역겨운 음식을 뭐 하러 달라고 해. 조용히 밥이나 먹어.”
“네 코가 좋아하는 냄새가 있긴 해?”
“없어.”
낱알이 흩어지는 밥과 소금에 절인 반찬들은 결국 반도 먹지 못하고 문 앞에 두었다. 양치질을 10분을 넘게 하고 나와서 할 일이라곤 밥 먹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방에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까보다 더 왁자지껄했다.
“어떻게 그렇게 자고 나서 또 자고 있냐.”
성난 등 근육을 자랑하며 누워 있는 놈한테 말을 걸다니 진짜 심심함에 미쳤나 보다. 그는 나의 혼잣말에도 꿈적도 안 하고 누워 있었다. 진짜 자는 건가 싶어 고개를 쭉 빼고 봤더니 침대에 튀어나온 쇠에 제 손가락을 계속 상처 내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죽죽 베이는 손가락이 피가 흐르다 말고 아무는 걸 보니 어제보단 나은 상태인 듯했다.
기껏 회복되는 몸을 가지고 저게 무슨 난리인가. 그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나에게도 곤란한 일이 찾아온다는 건 이제 학습한 만큼, 눈 뜨고 코 베일 수 없으니까.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엿 먹이는 방법도 참 다양하다.”
내가 잡은 손에서 벗어나며 그는 나를 쳐다봤다. 몸과 별개로 다시 돌아온 그의 재수 없는 눈빛에도 이제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백업, 나도 필요 없어. 뛰어다니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침대를 네가 갖든 말든 신경 안 쓸 거고. 콜트는 보아하니 네 권총 같은데, 못 돌려받는다면 현장에서 언제든지 내 걸 쓰게 해줄게.”
그 정신에도 나의 제안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독한 놈이었다. 다음 말만 안 했다면 손뼉을 쳐줄 의향도 있었다만.
“다만 내 쪽에서도 사정이란 게 있어. 싫든 좋든 난 이 바닥에 3년 동안 있어야 해. 남은 날짜 보면서 그냥 너도 버텨.”
“3년?”
“중요한 건 난 혈액 팩에 든 피는 못 마셔. 정기적인 혈액 공급도 끊긴 상황이라, 네가 때맞춰 밥을 못 처먹으면 비실거리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활동에 지장이 올 수밖에 없어.”
“그래서, 네 먹이통으로 쓸 사람 좀 구해다달라고? 그런 귀찮은 짓을 내가 왜…….”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내 밥 역할 좀 해.”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이야.
“더럽다, 냄새 난다, 지랄에 지랄은 다 떨어놓고 말 참 예쁘게 하네. 밥? 네 배는 네가 알아서 채워.”
“카메라 좀 신경 쓰지? 그런 식으로 했다간 미운털만 박힐 거란 거, 어제 겪어봐서 알 텐데.”
웬일로 까칠하게 굴지도 않고 멱살을 잡는 나의 손에도 별 반항이 없기에 아직 멀쩡해지려면 멀었구나 싶었더니,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던 것이었다.
“못 줘. 이미 거래 끝난 내용이야. 뭐가 아쉬워서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여?”
그는 힘이 들어간 나의 손을 감싸 쥐며 대답했다.
“엿 먹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며. 내가 상태가 안 좋아질 때마다 너한테 불똥이 튀고 곤란해지는 건 이미 겪어봤잖아. 억지로 피 빼앗는 취미는 없어.”
너무나 이 판을 잘 알고 있는 놈이었다. 서슴지 않고 자신의 제안에 내가 곤란해할 만한 일들을 언급하고 있었고, 또 다 맞는 말이라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 적어도 이 바닥에선 나뿐 아니라 너에게도 눈을 부라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물어뜯을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도 무식하게 참고 버티더니, 과연 이번엔 자기도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내 몸에 구멍 뚫는 짓은 안 돼.”
“그새 까먹었어? 직접 흡혈 빼곤 효과 없어서 안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 하라고 꾸짖고 싶었지만, 그 많은 혈액을 쑤셔 넣고도 이 상태인 걸 보니 완전 거짓말만은 아닌 듯했다. 그는 저항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갑자기 머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노려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분하지만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에 한 번. 그 이상은 양보 못 해.”
“상관없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과 오지랖 덕에 언젠가 한 번 크게 데일 날이 있을 거라 하더니, 오늘인가.
할 말도 없고 더 이야기하다간 나만 손해를 볼 것 같아 일어나는데, 당겨진 힘에 몸이 절로 돌아가고 매트리스에 무릎이 꺾여 보기 좋게 그의 침대에 다시 앉게 됐다.
“으…….”
뭐 하냐고 따질 틈도 없이 손목을 핥기에 팔에 힘을 줘봤지만, 녀석이 얼마나 세게 붙들고 있는지 꿈쩍도 않았다. 내내 반항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계속 스치는 말캉한 감촉은 내 몸을 더 팔딱거리게 할 뿐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손을 뿌리쳤지만 다음 순간 나의 몸은 맥없이 침대로 떨어졌고 그는 보기 좋게 나의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눈앞은 온통 그의 열꽃 띤 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조건에서 벗어나는 짓은…….”
다시금 내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 든 그가 이젠 완전한 이를 드러내며 손목을 지분거렸다.
“움직이지 마.”
“읏……!”
얇은 피부를 단박에 찢고 들어와 살을 헤집는 행동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얌전히 흘러나오는 피를 받아먹는 녀석은 팔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도 아까운 듯 핥고 있었다. 그간 봐오던 포악함은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행동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반쯤 감긴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이 어김없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조금씩 흥분이 되는지 거칠게 굴려고 하다가도 나의 움찔거림에 다시금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어딘가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 무식한 놈들이 강제로 피를 빼앗는 상황도 아니고, 피 좀 뽑힌다고 힘없이 처질 나이도 아니었지만, 녀석의 그런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딘가 울적한 기분이 치밀어 올랐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카메라의 렌즈 역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빨리 끝내기나 하라는 마음에 놀고 있는 팔뚝을 들어 눈을 덮어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깁스가 얼굴을 짓눌렀고,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눈, 가리지 마.”
팔뚝을 치우지 않으면 뼈를 두 동강 내버릴 듯 낮게 읊조린 그는 금방 입을 떼고 피가 흐르는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체온을 그대로 머금은 액체가 팔꿈치를 따라 흘렀다. 그는 내 얼굴을 덮고 있던 팔을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치웠다.
“…….”
그는 얼굴을 양껏 구기고 있었다. 입가에 축축하게 묻은 핏방울이 입술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다가 떨어지며 내 입술을 적셨다.
비릿한 입을 움직이기도 잠시, 그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얼마나 세게 손목을 쥐고 있는지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했다. 그의 손가락과 나의 피부를 타고 흐른 피가 바닥으로 투둑투둑 떨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은 건 분명했고, 나도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말없이 몇 분을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잠긴 목소리 그대로 그에게 말했다.
“착한 척하지 마, 역겨우니까. 하던 대로 행동해. 그냥 네 꼴리는 대로 함부로 대하라고.”
썩어가는 표정과 별개로 정말 나의 피가 효과가 있었는지, 빠르게 제 색을 찾는 그의 피부는 정직했다.
서서히 손의 힘을 풀며 미끈거리는 손목을 문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꿈틀거리는 상대의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갈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