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동거인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아침, 그리고 맑다 못해 순수함으로 가득 찬 새내기들의 어깨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퍼지는 기대감과 설렘이 운동장을 꽉 채웠다.
바람도 불지 않고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미동도 없이 서 있으니 누구를 위한 행사인가 싶었다. 그늘막에서 선서를 외치는 파릇한 아이들의 뒤통수에 앞날의 안녕을 빌어주고 있는데, 표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어제는 괜찮았어? 짐 옮기는 데 무슨 전쟁이 난 줄 알았다. 전부 너희 방에 귀 기울이고 있었던 거 알지?”
“다들 참 좋은 취미를 갖고 있네요.”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었다.”
표성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내 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밤 결국 관사를 합치라는 명령하에 마음대로 펼쳐둔 물건들을 긁어모아 그의 방으로 갔는데, 그 방은 마치 모델하우스에 온 것처럼 짐이 정리되어 있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컵 손잡이는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놓여 있었고 옷은 각을 맞춰 자리 잡고 있었으며, 약속을 잊지 않았는지 바닥으로 옮겨져 있는 이불은 주름 하나 없이 곱게 펴져 있었다.
곳곳에 영역을 나누고 짐을 푸는데 계속 눈치를 주고 잔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고성이 오갔다. 결국 침대에 커버를 씌우다 침대 옆에 있던 화분을 쓰러트리면서 그의 이불이 엉망이 되었고, 그러느라 엎치락뒤치락하던 소리가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전쟁이라도 치르는 줄 알았나 보다. 뭐, 전쟁이긴 했다만.
밤에 있던 일을 생각하고 있자니 무의식중에 고개가 돌아갔고 그곳에는 재혁이 있었다. 그는 단상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어, 태주.”
표성의 속삭임에 앞을 보니 수많은 놈 중 불뚝 솟은 태주의 모습이 보였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녀석은 각진 걸음걸이를 구사하며 전진하는 중이었다. 다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래 먼지가 풀썩거렸다. 앞줄에 앉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곳곳에서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일렬로 서서 파트너를 지정받는 놈들은 비장해 보였다. 뱀파이어 측에서 들고 나온 권총을 받아 든 인간들은 훈련받은 대로 바로 허리춤에 끼우곤, 단도를 꺼내 제 손가락을 그어냈다. 열댓 명의 인원이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봐도 대규모 사이비 집단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세상이 뱀파이어 놈들을 찬양하고 있으니 사이비 맞지 뭐.
할짝거리는 놈들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가 다른 사람들과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다. 눈꺼풀에 경련을 일으키며 억지웃음을 보내는 게 참 딱해 보였다.
표성은 오! 하고 감탄을 하며 말했다.
“이번엔 여자로 붙여놓을 줄 알았더니 또 남자네. 생긴 거 봐, 일주일 만에 도망갈 것 같잖아. 일처리 알려주는 거 지겨운데.”
“탈주가 그렇게 쉬운 거였나요. 그 탈주 저는 왜 안 시켜준답니까.”
“넌 너라서.”
“……참 설득력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진짠데. 그래도 오늘은 좀 여유 있겠다. 2주 동안 매일 야근시키는 바람에 죽을 뻔했단 말이지.”
그와 관사에서 같이 있을 바에 차라리 야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장장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짝짓기 행사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가만히 서 있었던 탓에 다리가 아파 허공을 걷어차며 운동장을 걸어야 했다.
“담배 피우러 가? 한동안 안 피우길래 끊은 줄 알았네.”
“못 피웠던 겁니다.”
“네 폐가 건강해지려면 다른 신체가 절규하는 방법밖엔 없는 거야?”
“그런 방법으로 폐를 건강하게 만들려고 했다간 그전에 죽겠…….”
“안녕하십니까!!”
뜬금없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우렁차게 인사하는 이는 허리를 잔뜩 꺾어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이번에 현태주 님의 파트너가 된 주하늘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태주는 옆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작은 체구의 남자의 목청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웅성거리던 운동장엔 정적이 흘렀다. 170센티가 될까 말까 한 남자는 태주의 옆에 있으니 태주가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 같은 모양새였다.
나는 힘이 잔뜩 들어간 신입에게 말했다.
“그렇게 목청 높일 필요 없습니다. 잘 들리니까.”
“이런, 목소리가 너무 컸죠? 많이 듣던 소리라 고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이른 시일 내에 시정하겠습니다.”
나의 말을 들은 신입은 아차 싶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속사포로 속닥속닥하다가 스르륵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왜 저러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내 바지 주머니에 쑥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손은 이미 여유롭게 나의 담뱃갑을 채간 뒤였다.
“헉! 안녕하십니까!”
신입의 쩌렁거리는 목청이 귀를 때렸다. 재혁은 과장되게 놀라는 신입에게 손을 내민 뒤 싱긋 웃어 보였고, 신입은 바들바들 떨며 그의 악수를 받았다. 태주는 잔뜩 얼어 있는 신입의 반응이 웃기는지 낄낄거리면서 목덜미를 잡고는 질질 끌고 가면서 외쳤다.
“팀장님이 부르셔서 바로 가야 해요. 좀 있다가 봬요!”
고생길이 열린 신입은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의 손에 이끌려 가고 있었다. 날뛰는 발걸음은 한껏 신이 나 있었다.
표성은 둘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글렀다. 오래가긴.”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습니까. 저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나의 말에 표성은 뒤를 흘겨봤다. 그러고는 울리지도 않은 휴대전화를 주물럭거리더니 무미건조한 말투로 탄성을 내뱉었다.
“아, 어제 파일을 잘못 보냈네. 어우, 들어가봐야겠다.”
“참 별일이네요. 그동안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으신 분이…….”
“아이고, 큰일 났네!”
어색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말투로, 빨리 가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중얼거리며 그들을 따라 건물로 들어가는 게 사람을 약 올리는 것 같았다. 재혁은 들어갈 생각도 없이 내 담뱃갑을 찬찬히 보고 있었다.
도둑질을 한 녀석은 돌려줄 생각 따위 없어 보였다. 내놓으라고 애원하느니 로또를 사고 망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아 나도 그대로 건물로 들어갔다.
“우리 팀은 별난 사람만 모아놓는 곳인가 봐. 나는 뭘까. 깍두기 뭐 그런 건가.”
“무슨 소리입니까. 표성 씨는 팀에 없어서 안 될 존재입니다. 표성 씨가 없으면 의사소통이 안 되잖아요.”
서연은 비장한 얼굴로 표성을 다독였다.
모두 행사 날이라고 룰루랄라 휴식을 만끽할 때 우리 팀은 팀장님까지 끌려 나와 전부 훈련장에서 신입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앞에서는 신입으로 들어온 녀석이 열심히 총질을 해대며 뛰고 있었다.
이런 귀찮은 일을 왜 하고 있냐 묻는다면, 기어코 현장에서 함께 뛰고 싶다고 호소하는 신입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주는 이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그냥 맡은 역할만 해줘도 생큐인데…… 팀장님, 그냥 안 된다고 해주시면 안 됩니까. 매일 저렇게 뛰어다닌다고 난리면 저 쫄쫄 굶어 죽어요.”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일 것처럼 생긴 놈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요구한 바를 해치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다들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눈으로 좇기 바쁜 와중에, 팀장님은 나와 신입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기를 반복했다.
“하, 왜 나한텐 죄다 뛰어다니는 인간들만 보내는 건지, 원.”
잘못한 것도 없이 죄인이 된 느낌이라 억울한 나머지, 팀장님부터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말했다가 총질이 오가는 한가운데로 내던져질 뻔했다.
“훈련이야 신경 안 쓰고 고집대로 보내주겠다만 그 정도로는 방해만 될 거 같은데. 같은 인간으로서 어때, 백유운. 희망이 있어 보여?”
팀장님은 헉헉대는 놈을 앞에 두고 나에게 물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신입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꼬리치는 강아지 같았다.
희망찬 눈길을 보내는 신입에게 물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합니까. 가만히 앉아서 일해도 저기 앉아 있는 분처럼 야근해야 하는데.”
내 말을 듣던 표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너한테서 들으니 참 신선하다.”
“하늘아, 그냥 얌전히 지내자. 난 유운 형의 지난 파트너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
“넌 뭐라는 거야!”
팀원들의 눈치를 보던 신입은 나를 보며 한껏 어필하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이 참 간절해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미흡할지 몰라도 뱀파이어 분들과 함께 훈련을 받는다면 저도 지금보다 잘할 수 있지 않……!”
“뭐야?”
뜬금없이 날아든 돌멩이에 모두 두리번거리는데, 재혁은 평온한 얼굴로 신입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게 칼이었다면 어깨에 구멍 났겠습니다. 30분 뛰고 그 상태라면 훈련받을 때에도 매번 낙오되시고, 현장을 뛴다고 하시면 같이 다니는 파트너 측에도 짐만 되겠네요. 다들 이 말 하고 싶으셨던 것 맞습니까?”
그 날과 겹쳐 보이는 건 그냥 착각이겠지. 어찌 되었건 그는 그냥 쉬어야 하는 시간에 운동장에 앉아 있는 게 탐탁잖은 듯해 보였다.
재혁의 지적에 반박할 말이 없는지 다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으니 신입은 풀이 죽어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팀장님은 축 늘어진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 팀장님은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아이들과 귀여운 것에 참 약했다.
“훈련이라면 넘어가서 해도 상관없는데, 방해된다는 말이 나온다거나 따라가지 못하면 바로 내려 보낼 거야. 대신 다음 현장은 함께 갈 수 있도록 해주지. 뭐, 팀에 온 기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군. 불만 있는 놈은 거수.”
팀장님은 정작 태주의 의견을 곱게 무시한 채 해산을 알렸다. 신입이 난리를 떠는 와중에 부대의 인원은 모두 빠져나간 뒤였고, 북적거리던 운동장은 한없이 넓어 보였다.
오랜만에 맞이한 한가한 주말이라 모두 건물 밖으로 발을 옮겼다. 표성은 밖이 아닌 건물로 돌아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
“할 일 다 끝난 거 아니었어?”
“확인할 게 있어서요. 들어가서 쉬세요. 오랜만에 해 보면서 퇴근하시잖습니까.”
“점심은?”
“나중에 챙겨 먹을게요.”
“냉장고에 바나나우유 있으니까 그거라도 먹어.”
표성은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도 이내 자유를 찾은 게 즐거운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갈 길을 갔다.
이 대낮에 관사에 들어가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갈 곳도 없었다. 허기가 져서 냉장고에 있던 바나나우유를 집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곤 자리로 돌아갔다.
불 꺼진 행정실에서 제출까지 끝낸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시간을 죽였다. 일상이 조용할 날 없던 와중에 혼자 남게 되니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불편한 의자를 억지로 쭉 뺀 뒤 앞으로 얼마나 이 생활을 해야 하는 건가 생각했다.
팔자에도 없던 날짜 세기를 하고 있으니 눈꺼풀이 절로 무거워지기에 거부할 필요도 없이 쪽잠에 들려는데, 책상을 뒤흔드는 진동 소리에 발작하듯 몸을 일으켜야 했다.
“여보세…….”
[학생! 어여 집으로 빨리 좀 와봐!]
“집이요?”
익숙한 중년 여자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참 뒤에나 보게 될 줄 알았던 아이의 소식을 이렇게 다급하게 받는다면 나뿐 아니라 아무런 연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처럼 달려갔을 것이다.
제 할 말만 하고 끊긴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어도 통화 중이라는 음성만 되돌아왔다. 고민할 시간도 아까웠다. 눈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몸으로 막아 세웠다.
“아이고, 나갈 때에는 문 좀 살살 닫아줘요.”
백발의 택시 기사는 선글라스를 낀 채 껄껄 웃었다.
“학생, 순댓국 좋아해요?”
“아뇨.”
“아이고, 아쉽네. 혹시 여자친구가 순댓국 좋아한다고 하면 저기 골목에 있는 가게에 가봐요. 기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인데 사람들은 모르더라고. 아, 순댓국은 데이트할 때 좀 그런가? 우리 집 딸은 좋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가던데.”
“그렇습니까.”
“다음 주 주말에 딸이 결혼하는데 식 올리고 바로 호주로 가서 신접살림을 차린다네. 당연히 항상 곁에 있을 것 같던 놈이 집을 나간다고 하니까 서운하기도 하고, 악착같이 돈 번다고 같이 시간을 못 보낸 게 왜 이렇게 아쉬운지.”
택시 안은 에어컨을 틀었는지 서늘하다 못해 춥게 느껴질 정도였다. 기사는 나의 미적지근한 대꾸에도 열심히 말을 이어갔다.
“자네 보니까 우리 집 아들이 생각나는구먼. 걔는 나랑 얘기를 안 해. 옛날에야 아들이 최고라고 했지, 키우고 나니까 딸이 최고야. 모임 가면 항상 하는 말이 있어. 자식들 덕 보려고 기대하지 말고 이제 우리 몸 챙겨야 한다고. 자네도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 챙겨드려. 이렇게 여럿 만나고 돌아다니다 보면 참 제멋대로인 젊은이들이 많다니까.”
손에 쥔 휴대전화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토록 상대가 전화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기사의 잡담은 가족 자랑을 거쳐 정치, 인종 차별과 경제 이야기까지 흘러갔다.
“그러니까 요즘 애들은 너무 돈을 쉽게 알아. 가끔 부모를 통장으로 아는 애들도 많고.”
정차하자마자 문을 여는 동시에 주머니 속 지폐를 몽땅 꺼내 기사에게 넘겨주었다.
“잔돈은 필요 없습니다.”
“어이구, 너무 많…….”
기사는 손에 들어온 지폐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나는 돈을 쉽게 아는 요즘 애들이었지만, 문을 살살 닫아달라는 기사의 부탁을 까먹지 않고 지켰다.
그녀가 말했던 집이라는 곳은 큰길에서 한참을 벗어난 뒤 언덕을 하나 넘어가야 있었다. 높은 건물이 즐비한 서울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저층 빌라 중에서도 반쯤 땅에 박혀 있어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하아…….”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철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청소한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입구엔 먼지 덮인 상자들이 줄지어 쌓여 있었고, 몇 주 전에도 봤던 쓰레기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처음 이사를 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입구에 널린 상자들은 여전히 테이프로 굳게 닫혀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과 음식물이 그대로 남아 썩어가는 플라스틱 통을 발로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모습을 보며 놀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착잡했다.
소란스러웠던 전화 통화와 다르게 방 안은 조용했다. 습한 공기와 어울리지 않는 향긋한 꽃향기가 그곳에 퍼지고 있다는 게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학생 왔어? 아유, 실제론 처음 보는데 인물이 훤하네, 아주.”
한숨을 푹 쉬며 밀대를 내려놓은 아주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주머니는 늘어진 옷과 어울리지 않는 금 액세서리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는 상자들을 익숙하게 피하면서 들어오더니 나의 등을 찰싹 때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 일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웬 남정네들이 들락날락하더니 애 우는 소리가 들리잖아. 경찰한테 전화했더니 하이고…… 또 미친 아줌마가 염병을 떠느라 그러는 거라고, 나보고 신경도 쓰지 말고 전화 좀 그만하라는 거 있지! 나 원 참, 경찰이 그래서야 어떻게 믿고 살라는 건지.”
그녀는 다양한 억양을 구사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이런 곳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올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고, 들어온다고 해도 잃을 것이 없는 곳이었다.
끝없이 말을 늘어놓는 여자를 두고 밖으로 나왔지만 동네는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드물게 창문 안에서 조심스럽게 나를 지켜보는 이들만 있을 뿐이었다.
급하게 뛰고 있는 나의 심장과 달리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여자에게 물었다.
“아이는 어디 갔습니까?”
“승아는 걱정하지 마. 그놈들 또 올까 봐서 집에 데리고 갔더니 울다가 지쳐서 지금 세상모르고 자고 있으니까. 그것보다 애 엄마는 애를 두고 대체 어디를 간 거야. 며칠째 들어오는 걸 못 봤네. 하여간, 학생도 고생이 많아. 참말로 그런 어미 밑에서 어떻게 이렇게 바른 청년이 나왔는지. 어휴, 땀 흘리는 것 봐. 시원한 것 좀 줄까?”
“…….”
“그렇게 돌아다녀도 못 찾을 거야~. 나가도 한참 전에 갔어.”
“봤습니까? 그놈들 얼굴이요.”
“아이고, 내가 눈이 어두워서 잘 못 봤어. 나이가 드니까 눈도 침침한데, 얼마나 빨리 돌아다니는지 볼 수가 있어야지~.”
집 안으로 돌아와 남은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뒤져보아도 지겨운 향만 남아 있을 뿐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건질 수 없었다는 것보다, 이 좁은 집 안에 아이를 위한 물건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나의 뒤를 밟으며 말했다.
“그렇게 뒤져봤자 나오는 건 없을 거야. 이 더러운 집에서 뭘 건지겠…… 하이고야, 그 방엔 아무것도 없을걸.”
안을 내보이며 열린 현관문과 비교되게 굳게 다물린 방문을 열었다.
“아이 좀 볼 수 있을까요.”
긴장을 한 것이 무색하게 방은 유난히 깨끗했다. 가구 하나, 쓰레기 하나 없이.
“그럼, 그럼. 당연하지.”
나의 말이 반가웠다는 듯 급하게 방문을 닫은 여자는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나를 연신 힐긋거렸다. 그러고는 잠시나마 다물고 있던 입을 다시 움직였다.
“그런데 학생, 밀린 월세는 잘 받았는데 이번 달 월세는 언제 줄 생각이야? 일주일이 넘도록 못 받고 있는데…… 거 지난번에야 학생이 와서 하도 사정을 했으니 내가 봐줬잖아. 아까 집 안도 봤지? 청소 비용도 꽤 나올 것 같은데 그건 어쩔 생각이고?”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아무렇지 않게 나의 몸을 툭툭 치며 말을 쏟아내기가 힘들었는지 자기 집에 올라가면서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제때제때 잘 내야 아줌마도 오늘처럼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도와주고 그러는 거야. 요즘 애 있는 집 받는 데도 많이 없고, 학생 엄마 같은 사람 받아주는 데가 또 어디 있어!”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이를 말없이 쫓아갔다.
“나도 사는 거 빠듯한데 자꾸 이렇게 날짜 넘기고 그러면 내쫓고 다른 사람 받을 수밖에 없지. 안 그래도 다른 데서 얼마나 항의가 많이 들어오는데.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이야기해주는 건데, 서울에서 이 값 주고 집 구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그저 갈 곳이 없어질 아이를 위해 쓴 선심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이는 그녀의 말대로 거실 한복판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덮어놓았던 이불을 발로 걷어찬 아이는 한참을 울었었는지 눈과 볼이 부어 있었다. 볼 때마다 후줄근한 옷만 입고 있더니 오늘은 웬일로 깔끔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려.”
가까이서 본 아이의 여린 팔뚝엔 선명히 상처가 남아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눈엔 무슨 상처인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몸에 있어선 안 될 상처였다.
“잠든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아마 좀 있어야 일어날 거야.”
외면하던 일들이 기정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예민해진 정신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만들어내며 손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내가 말이야…….”
“이번이 처음 온 거 맞습니까?”
“어, 어?”
“그놈들, 이번이 처음 온 게 맞냐고 물었습니다.”
내내 당당함을 잃지 않던 여자가 이번엔 말까지 더듬으며 처음 본 사람임을 강조했다.
“나야 모르지. 내가 두 번인지 세 번인지 알 리가 있나.”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뻔뻔하게 대답하는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내 감정을 그녀에게 드러내고 싶지도 않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지난번 그 계좌로 이번 달 월세는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제가 데리고 갈 테니 다음부터 저한테 전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돈 받을 생각 하지 마시고 다음에 만나면 그냥 방 빼라고, 알아서 살라고 내쫓으세요.”
나의 단호한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아주머니는 아이를 안아 올리는 내 손길을 막으려다가 아차 싶었는지 얼른 손을 뗐다.
“아니, 그래도! 그렇게 애를 데리고 가면 어떡하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 없지. 그래도 엄마한테는 아이 데리고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야지, 무턱대고 데리고 가면 어째. 학생은…….”
“알고 계셨습니까?”
“뭐, 뭘 말하는 거야.”
그녀는 나의 감정 없는 질문에도 마른 손을 바지에 쓱쓱 닦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아이의 상처로 눈길을 보내면서도 무슨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뚝 뗐다.
“조용히 끝냅시다. 저라고 크게 판 벌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요.”
“거 학생, 말이 너무하네. 내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면서…….”
“그럼 끝까지 모르게 입 다물고 살지 그러셨습니까.”
어쩌면 여자의 욕심에 감사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아이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어설프게 화내는 이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무턱대고 아이를 안고 나왔지만, 그 후의 일은 백지장이었다. 모든 일은 충동적이었다. 이렇게 한다고 아이의 인생에서 그녀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저 나와 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자신의 인생을 거들먹거리며 남의 인생을 함부로 들춰내는 이들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품 안에 꾸깃꾸깃 안겨 있는 아이의 얼굴은 제 엄마를 쏙 빼닮아 있었다. 아무리 귀엽다고 해도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다. 아이는 꿈에서 뭐라도 먹는지 이따금 입을 오물거리며 인상을 썼다.
“아…… 이제 오지랖 떤다고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 진짜.”
주말에 맞춰 놀러 나온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강공원은 돗자리를 펼 자리도 없이 붐볐다. 축 늘어진 아이를 들고 걸어가는 일이란 생각보다 팔을 혹사하는 일이었다. 뜨거운 햇빛 때문인지 내 겨드랑이에 파고들던 아이는 얼마 가지 않아 깼다.
아이는 땀 맺힌 얼굴로 잔뜩 얼굴을 구기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리 밑 그늘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경했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에 잠에서 깬 건지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난 아이는 나를 보기 무섭게 엄마를 찾았다.
“흐웅…….”
울먹거리는 아이 덕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이를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 탓에 결국 등에 둘러업어야 했다. 아이는 훌쩍거리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몰라.”
“엄마는요? 또 병원 갔어요?”
“내가 묻고 싶다.”
“아저씨 등이 울어요. 축축해. 내리고 싶은데.”
난 무슨 생각으로 애를 업고 있냐.
“안 돼. 신발 없어.”
“승아 버린 건 아니겠죠.”
차라리 그랬더라면 덜 신경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리 없어.”
잊었던 존재가 떠올라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갈 뿐 여전히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끝없이 울리는 발신음만 듣고 있는 동안, 아이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엔 열 오른 휴대전화를 귀에서 뗐다.
“엄마예요? 승아가 돌봐줘야 하는데.”
“제대로 좀 잡아봐. 떨어진다.”
아이가 어설프게 양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어 자꾸 주르륵 미끄러지기에, 고쳐 업어주며 말하자 얼른 두 손을 뻗어 목을 조여왔다.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전화기가 요란하게 진동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벽돌 바닥으로 떨어트릴 뻔했다.
[뭔 통화를 그렇게 온종일 하나. 어디 있어.]
“무슨 일, 났습니까? 윽, 잠깐……!”
양팔로 너무 세게 조여오는 탓에 목울대가 눌려 말문이 절로 막혔다. 팀장님은 세상 냉정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말했다.
[전화하면 안 되는 타이밍 같은데 받아줘서 참 고맙군.]
“아니, 그렇게 세게 안 잡아도……! 하, 무슨 일입니까.”
[그래. 뭐든 너무 세게 잡으면 안 좋은 법이지. 지금 어디야.]
“반포대교 아래요.”
[위로 나와 있어. 좀 있으면 지나가니까 하던 일 빨리 끝내고.]
“네?”
가차 없이 끊긴 통화에 당황한 것도 잠시, 메시지함에는 간략한 사건 정보가 떠 있었다. 이미 5분 전에 도착한 문자였다.
‘9분 전 사건 발생. 서울대공원 습격. 전 대원 복귀.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 바람.’
“일 났네.”
“왜요? 똥마려워요? 발을 동동 구르네. 승아 무거워서 그런가? 내릴까요?”
“……됐다. 꽉 잡고 있어.”
당당히 데리고 나온 주제에 길거리에 내버려둘 수도 없고, 일단 아이의 다리를 꽉 부여잡고 무작정 뛰어 올라갔다.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 시간은 개뿔, 난데없이 일어난 사건에 평화로운 한강 변두리에서 피난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뛰었다.
“아, 아, 아, 아…… 군인 아저씨 이거 봐요. 아! 아, 아…….”
아이는 격하게 뛸 때마다 목소리가 뚝뚝 끊기는 게 재미있는지 까르륵 웃었다. 무게 중심을 잡느라 얼마 나가지도 않던 무게가 두세 배는 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아! 아, 아.”
“하아…… 진짜 가만히 좀 있어주면 안 돼?”
도로엔 새까만 작전 차량이 몰려오고 있었다. 쉬라고 풀어놓은 이들을 전부 불러들일 정도면 작은 사건은 아니라고 짐작했지만, 도로를 채운 차량의 행렬을 보니 자동으로 몸에 긴장감이 퍼졌다. 열린 문으로 냉큼 탔더니 다들 못 볼 거라도 본 사람들처럼 나를 봤다.
살벌한 분위기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난리를 치던 아이도 딱딱하게 굳어선 나의 목을 졸라왔다. 조그만 놈이 힘은 얼마나 센지 턱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이없다는 표정의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말아주십시오. 너무 긴 이야기라.”
에어컨을 얼마나 튼 건지 차 안이 서늘하기에 바닥에 널브러진 담요를 들어 덮어주었다.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뻔히 상처가 눈에 띄었을 테니.
시선으로 떠들썩한 것에 비해 차 안은 조용했고, 팀장님은 나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굳었던 얼굴을 펴고 아이를 받아 드셨을 뿐이었다.
아이는 한때 친분을 쌓은 얼굴이라 안심이 되는지 순순히 팀장님의 무릎으로 넘어가 다른 이들을 등지고 앉았다.
“옷부터 갈아입어.”
팀장님의 말과 함께 재혁이 무식하게 던져주는 가방을 받으며 물었다.
“물개는요?”
“본부로 갔습니다. 중요 인력에 펑크가 났다고 해서 팀장님이 보내버리셨습니다.”
“아…….”
서연의 칼 대답을 들으며 복장을 갖추기 위해 스스럼없이 땀에 젖은 티를 벗어버렸다. 더운 날씨에 몸을 꽁꽁 싸맬 생각을 하니 벌써 숨이 턱턱 막혔다.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했더니 표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입이 앉아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가며 나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우어, 몸이…… 문신…….”
신입은 열심히 나의 몸을 스캔하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의 부담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곤 자리에 앉았다. 콜트의 빈자리를 툭툭 치며 재혁을 보니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인이어를 통해 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치 확인 바람. 도착 시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
“C팀 확인 완료.”
[팀장님, 선두 팀 상황을 보아하니 신입은 오늘 말고 다음에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차 안의 정적도 잠시, 이제는 속속히 도착하는 정보들로 귀가 시끄러웠다. 다들 청각에 집중하는 사이, 신입은 승아보다 더 해맑은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자식이 있으신 줄 몰랐어요. 결혼을 되게 일찍 하셨나 봐요.”
표성의 말이 안 들린 게 분명했다. 전투 복장을 입혀놓은 신입은 아빠 양복을 걸친 초등학생 같았다.
“네. 젊을 때 사고를 좀 쳤네요.”
순백의 질문에 답을 하니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으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댔다. 끼리끼리 잘 붙여놓은 건지 태주는 역시 자기가 처음 봤던 게 맞았는데 왜 그렇게 성을 냈냐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재혁은 시끄러워지는 차 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두덩을 꾹꾹 눌러가며 불편함을 표했다. 칼이라도 내던지는 건가 싶어 그의 손에 집중하고 있는데 조용히 있던 승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군인 아저씨 우리 아빠 아닌데요!”
이 분위기 속에서 똑 부러지는 걸 보면, 안 데리고 왔어도 잘 살지 않았을까.
[확인된 제로 40.]
“승아는 아빠 없어요. 엄마가 술 먹고 사고 쳐서 낳은 년이라고 했…….”
폭로를 멈추지 않는 아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얼마나 얼굴이 작은지 손안에 다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팀장님의 무릎에 앉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에게 오라고 손짓하니 얌전히 나에게 넘어왔다.
멀뚱멀뚱 앉아 있던 아이는 나를 쿡쿡 찌르고 더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얼굴을 들이밀자 나의 귀에 얼굴을 박으며 말했다.
“화났어요?”
“……아니.”
[확인된 제로 46.]
“저기 앉아 있는 아저씨요.”
귓속말을 해오는 것과 상관없이 손가락을 쭉 뻗은 덕에 모두가 아이의 손가락 끝에 걸린 이에게 눈을 돌렸다.
재혁은 팔짱을 낀 채 승아를 쳐다봤다. 보이는 거라곤 눈뿐이었지만 잔뜩 성난 눈매가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다.
“화 안 났어.”
귀도 밝아라.
어떻게 들었는지 재혁은 양손을 들며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동물원에 가까워질수록 긴급하게 오가는 음성들로 몸이 긴장되고 있었다.
[확인된 제로 53, 1급 발견.]
“잡담 끝이다. 도착 3분 전이야. 단체로 움직이는 만큼 독단적인 행동과 판단은 절대 금지고. 신입, 오늘은 나가서 돌아다니지 말고 차에서 대기하면서 아이 보고 있어. 오늘 임무다.”
“예에?! 갑자기 왜요?!”
한껏 들떴던 신입은 풀이 죽은 채 막바지 준비를 하는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현장에 나가면서도 이상한 별명을 붙여놓지 않은 것만 봐도 아직 그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아이도 불안을 느끼는지 점점 더 달라붙었다. 나는 한껏 나를 끌어안는 아이를 떼어냈다.
“여기 이 아저씨랑 같이 있어.”
“어디 가는데요?”
“조금 있다가 올 거니까 여기서 나가지 마. 알았어?”
“같이 가면 안 돼요?”
이마에 걸쳐놓았던 고글을 쓰고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입을 삐쭉 내밀면서도 순순히 내 곁을 떠나주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차가 완전히 멈추자 다들 각 잡힌 상태로 돌아왔다.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과 본부에서 날아드는 상황 보고 소리만 들어도 꽤 힘든 시간이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오늘은 2급 이상만 생포, 나머지는 죽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괜히 동물들한테 치이지 말고. 아직 대피가 절반 정도밖에 안 이루어졌다고 하니까 무리해서 뛰지 말고 사람들 대피를 최우선으로 한다.”
들이치는 햇빛과 동시에 눈에 들어온 풍경은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종일 울타리 안에서 먹고 자기만 반복하던 동물들은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밖으로 나온 얼룩말은 소란에 휩싸여 사람들에게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대원들의 통제에도 눈앞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울부짖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 날뛰는 제로, 그리고 그 뒤를 쫓는 이들까지 얽혀 난리였다.
“C팀 5포인트 도착.”
팀장님의 보고와 함께 옷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살짝 굴리자 옆엔 재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상체를 조금 숙인 채 말했다.
“아이한테 향이 배어 있어. 어떻게 된 거야.”
“…….”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서 있으니 녀석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신호를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다 네놈처럼 냄새를 구분할 수 있어?”
“일일이 구분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유독 예민하게 군 이유가 그런 거였다니.
“몇이나 돼.”
“뭐가.”
“아이한테.”
그는 뜸을 들이더니 다시 한 번 묻는 나에게 대답했다.
“다섯.”
“……젠장.”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다섯 놈이라니. 내키지 않아도 그냥 빨리 떨어트려놓아야 했을까. 내가 개입해야 할 일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죄책감에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지금 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재혁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싫다고 할 거 뻔히 알지만, 내 손 닿는 위치에서 다녀. 그게 싫으면 여기서 애랑 같이 있고.”
“또 왜.”
“사방에서 널 찾는 것 같으니까.”
“좋네. 잡으러 가지 않아도 알아서 나한테 몰리고.”
[C팀 확인 완료.]
표성의 알림에 팀장님이 마지막 경고를 했다.
“2급 이상 발견 시 혼자 해결하려고 난리 치지 말고 바로 협조 요청하고, 지정 위치 벗어나지 마. 다치고 오는 놈은 한 달 동안 야근이다.”
[저는 이미 매일 하는 중이었는데요.]
표성의 맥 빠진 목소리에 팀장님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 오늘도 고생 좀 하자.”
팀장님의 목소리를 끝으로 모두 튀어 나갔다. 재혁의 고갯짓에 맞춰 달렸다. 왁자지껄하게 인파가 몰린 구간을 벗어나자 곳곳에 쓰러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도 다들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홍학사 앞, 어린이 확인 부탁드립니다.”
[구조 요청 완료했습니다.]
나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는 게 거짓은 아닌 듯, 갈수록 부담스러운 눈길들이 스치는 게 느껴졌다. 광장까지 가는 것마저 하나의 일이었다. 뜨거운 건 질색하는 녀석들이 왜 대낮에 활동하고 있는지.
햇볕 아래서 뜀박질을 하고 있으니 몸을 꽁꽁 싸맨 옷은 금방 젖었고, 얼굴을 압박하고 있는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비교적 정리된 지역을 벗어나자 놈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이미 배를 채운 놈들은 모두가 푸른빛 눈동자에 얼빠진 표정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꼴을 보니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놈들이 아닌 듯했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놈이 갑자기 방향을 틀기에 시선의 끝을 보니 겁을 집어먹은 사람이 쓰레기통 뒤에 숨어 무릎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기념광장, 구조 요청합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재혁과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먼저 치고 나간 그는 사람을 여유롭게 감싼 채 달려드는 적 하나의 머리통을 잡아 바닥에 그대로 찍어 눌러 박살을 내버렸다. 싸움조차 무식한 놈이었다.
[11시.]
재혁의 목소리와 동시에 날아오는 물건을 받아 들었다. 활성화된 권총을 받아 그대로 그가 말한 방향으로 총구를 향했다. 튀어 오른 녀석의 그림자 속에서 미간을 조준했다. 대낮에 시작된 폭죽놀이에 새카만 피가 튀었다.
“미리미리 주면 덧나?”
공황에 빠진 인간을 중앙에 두고 싸우는 일이란 발에 족쇄를 묶고 뛰어다니는 것과 다름없었다. 동물 우리 곳곳이 파괴되기 시작하니, 동물원은 아프리카 초원과 다를 바 없었다. 앞뒤 없이 직진하던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맛집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제 발로 모여드는 놈들 때문에 발이 묶인 채로도 적절한 몸 풀기를 할 수 있었다. 달려드는 놈들에게 보호구를 두른 팔을 제공해주고 난도질하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
내 삶이 어지럽게 변한 것에 대한, 아직은 누구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는 아이에 대한.
미쳐 날뛰는 놈을 총으로 겨누며 말했다.
“네놈 업보다.”
“적당히 하고 끝내.”
혼잣말에 대꾸하는 재혁은 맹수들에게 축 늘어진 제로들을 내던지고 있었다. 갈가리 찢기는 모습을 보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너한테 들을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나고.”
“잘났……!”
[오늘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거칠고 잡음이 섞이던 말들과 다르게 한 자 한 자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달려드는 놈의 얼굴을 보았지만, 말을 할 만한 급은 아니었다. 멍청히 우뚝 서버린 탓에 달려오는 놈에게 한 방 먹겠구나 싶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공기층 가운데서 폭발이 일어나며 먼지가 날렸다. 재혁은 나를 막아서며 말했다.
“뭐 해? 적당히 하랬지, 누가 정신 빼고 서 있으래?”
“……들었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구조팀의 손에 사람을 넘기면서도 귀에 집중했지만 차분하고 기계적인 목소리들만 오갈 뿐 별다를 게 없었다.
뛰어드는 놈들을 잡아 광장 한가운데에 쌓아놓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주위엔 새카만 웅덩이가 생기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생긴 놈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끝도 없이 기어 나왔다. 어디서 그 많은 피를 마시고 왔는지 투명해야 할 침은 빨갛게 물들며 늘어졌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몸은 무거워졌고, 땀을 얼마나 쏟았는지 입이 말랐다.
[꼬마, 근처에서 냄새가 난단 말이야.]
도발하는 목소리를 무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움직임을 구사하며 놈들을 뒤쫓았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 법이었고, 자연스럽게 흥분한 몸은 서서히 분노만 담아 그들을 쫓았다.
[네 어미도 참 한결같아. 너와 다르게 학습 능력이 좋은 걸 수도 있고.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간편하고 쉽게 살아가는지.]
“제발! 조용히 하라고!”
가슴을 깔고 앉아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몸부림치던 놈의 머리가 터지고 사방으로 튄 피가 옷에 스며들었다. 뒤에서 달려드는 놈에게 머리통이 깨진 놈을 던졌다. 날아간 총알은 두 놈의 가슴을 뚫고 덜덜 떨며 바닥을 뒹구는 놈들의 위로 떨어졌다.
재혁이 들고 있는 놈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나를 노려보며 바닥으로 녀석을 내던졌다. 신입에게 신호를 돌렸다.
“아이는…….”
[……니다. ……요.]
신호 상태가 엉망인 듯,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
“넌 왜 중요한 순간에만 한눈을 팔아?”
재혁이 나를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발끝에 박힌 검은 결정들이 나의 몸을 뚫었을 것이다.
익숙한 가면이었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불쌍한 아이들. 죽지도 못하고.”
일자로 빨간 선이 죽 그어진 가면을 쓰고 유유히 걸어오는 이의 동작에선 긴장감은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결정 조각은 우리가 아니라 바닥에 쌓여 있는 놈들의 몸 위로 떨어졌다. 짧게 파닥이던 이들의 움직임은 사라지고 시체들은 삽시간에 썩어들어갔다.
바닥에 고였던 피는 다시금 그녀의 손에서 결정으로 변해갔다.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검은 결정들은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1급 발견, 지원 요청합니다.”
심상치 않은 상대라는 걸 느꼈는지 재혁의 몸 주위로 옅은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진작 쉽게 끝내지, 지금에서야 산들바람을 일으켜.”
“땅 파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서.”
그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상대를 향해 튀어 나갔다. 한결 가벼워진 움직임이 마치 바람에 실려 가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몸은 부딪칠 듯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폭발을 일으켰다. 총알은 분명 그녀의 어깨를 뚫고 지나갔지만 잠시 비틀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덤벼드는 재혁에게 집중했고, 결정들은 재혁의 곁을 뚫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주위에서 달려드는 놈들과 바닥을 뒹굴면서도 불꽃이 이는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성급하긴.”
여자의 손동작에 일대가 새하얗게 뒤덮였다. 급하게 뛰어오던 대원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모든 것은 색을 잃어 바닥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뒤틀리는 공간 사이로 파고드는 역한 공기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으…….”
붉은 가루들이 몸을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 막 사이로 스치는 라벤더 향이 보호막의 출처를 알려주고 있었다.
귀가 먹먹했다. 눈앞에서 터지고 사라져버린 피는 방울져 그녀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뾰족하게 굳어가는 액체를 마주하고도 재혁은 주춤거리지 않고서 파고들었다.
[3시.]
재혁의 목소리에 맞춰 칼을 내던지니,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 꽂힌 칼이 달랑거리며 비틀거렸다. 다시금 달려오는 형체에 어림짐작으로 총을 쏘았다. 괴이한 소리가 울렸다. 흐르는 피는 어김없이 그녀의 손아귀로 들어갈 뿐이었다.
“이렇게 싸우다간 저놈한테 무기를 제공해주는 것밖에 안 돼.”
[힘 빼놓는 게 우선이야. 지금 이곳을 벗어나면 더 큰 피해만 불러올 테니 그냥 갇혀 있는 편이 관리하기 쉬워.]
“얼마나 걸려.”
[10분.]
10분에 미쳐버린 놈인가.
“하나만 묻자.”
[뭐.]
“오늘 배신할 확률.”
나를 스치고 지나간 칼이 눈앞에서 멈췄다. 몸에는 분명 충격이 가해지고 있었지만 작은 틈을 두고 닿지 못했다. 손을 뻗어 놈의 목을 쥐었다.
몸부림치는 놈의 머리를 부수자마자 수챗구멍에 빨려 들어가듯 피가 또다시 그녀의 손으로 들어갔다. 손끝에선 바싹 말라가는 놈의 피부가 느껴졌다.
[없다고 해두지.]
잡담을 주고받는 우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얌전하던 여자도 성질을 드러내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맑게 부딪치는 결정들의 소리가 점점 커지며 귀를 난도질했다. 그 속을 뚫고 나오는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이 무의미한 싸움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들판에 핀 작은 꽃은 말했죠. 나는 언젠가 지고 말 거라고.”
재혁의 신호에 맞춰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이제 나를 표적으로 삼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구멍 사이로 빛나는 푸른색 빛은 맑다 못해 시선을 얽매어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눈을 맨눈으로 마주했다면 괴성을 지르며 죽어 나가는 놈들과 같은 신세가 됐을지도.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풀들은 대답했습니다. 너는 다시금 예쁜 모습으로 태어나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라고요.”
점점 좁혀지는 거리만큼 나의 가쁜 숨소리와 심장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감정이 없는 허여멀건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옥죄이는 눈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나의 손에 갈린 그의 가면 뒤로 미소를 띤 여자의 입이 드러났다. 나지막이 움직이는 입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꽃은 어찌 되었을까요. 다시금 햇빛을 머금고, 이슬과 입맞춤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이에 끼어든 재혁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를 촘촘히 감싸고 있던 공기층도 헐거워져 은은하게 구르고 있었다. 여자는 재혁을 향해 물었다.
“어때요. 당신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되레 재혁의 손아귀에 목을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결말은 당신의 몫이었잖습니까.”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미동도 없이 공중에 떠 있던 결정들은 재혁의 몸에서 퍼지는 바람을 맞으며 서로의 몸을 부딪쳐 반짝이며 소리를 만들어냈다.
손을 들어 가면의 중앙에 총을 겨누며 말했다.
“이해도 안 되는 말싸움하자고, 이 난리를 피웠다고 지껄이지 마.”
날카로운 소리 속에서 나의 목소리만 낮게 울렸다. 아직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못했건만 폭발음과 함께 쏟아진 결정들로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굉음이 울렸고, 주위는 먼지로 가득 찼다.
“으으…….”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매캐한 공기에서 빠져나왔다. 색을 되찾은 주위는 몇 년은 버려졌던 곳처럼 엉망이었다. 동상들도, 건물도 모두 부서져 있었고, 검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고 믿을 수 있을 만큼 피가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모두가 싸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서로의 죽음만을 빌며 달라붙고 있을 뿐이었다.
항상 비아냥거리며 들먹거리던 재혁도 어딘가 분노 서린 모습으로 그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땅 파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더니. 나를 감싸던 바람만큼은 아니었지만, 일정한 영역 안에 있는 이들을 방어하면서도 선두로 뛰어다니는 게 저 정도로 남아도는 힘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찮아요?!]
[살아 있어?]
“괜찮으니까 다들 소리 좀 그만 질러주세요. 고막 테러 수준입니다.”
[이 정도면 살아남기 책 써도 베스트셀러는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부업으로 인터뷰라도 뛰면 짭짤할 것 같은데요!]
“태주, 앞이나 잘 보고 다녀라.”
[으익!]
표성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을 해줘도 대답 봐라.]
“에피소드나 한 개 더 만들 예정이니까 돌아오라고 말 꺼내지 마세요.”
팀원들의 말에 무사함을 알린 뒤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재혁을 걱정하는 놈이 없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달까.
어느새 옆에 붙어온 재혁은 한 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달리며 말을 걸어왔다.
“너까지 도와줄 여유 없어.”
티도 잘 내지 않던 분노를 뿜는 이유는 저놈 때문인 듯했다. 재혁의 피부를 썩게 했던 놈이었다.
“저놈들, 약점이 뭐야.”
나의 질문에 그는 답이 없었다.
“알고 있는데 숨기는 거라면 뒷감당할 각오는 하고 있어야 할 거야.”
재혁도 열심히 달리는 듯했지만, 나와 속도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 그가 속도를 늦췄다기보단 내가 빨라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의 시선 끝에 걸렸던 놈은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도 개의치 않았다.
“……뒤처질 거면 빠지고, 아니면 붙어 있고, 하나만 해.”
“힘 달릴 예정이라면 네 바람 치워도 상관없어.”
“좋을 대로.”
상대에게 달려듦과 동시에 몸이 무거워졌지만, 한껏 휘두른 팔은 허공을 가로질러 바닥에 꽂혔다.
[응?]
[뭐야, 이건. 주변이 너무 깨끗해졌는데요? 현장도 그래요? 이거 시스템 오류는 아닌 게 분명한데…….]
“또야?”
난리를 피운 것이 허무하도록 눈앞에 있던 모든 놈이 자취를 감추었다. 힘 들여 싸우던 이들도 두리번거리며 황당해하고 있었다. 바닥에 박힌 칼을 빼 들었다. 아직 힘을 빼지 못한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그날처럼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가 반쯤 먹혀 붉게 물든 하늘엔 온통 노란 꽃잎이 흩날렸다. 너무 작고 가벼워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잎을 봤다.
재혁은 신경질적으로 고글을 벗어 들었지만, 예상이라도 한 듯 당황스러움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이상한 일들과 수상한 놈들의 출현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고 확신할 순 없었다. 다만 그들의 대화는 충분히 나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아 손가락으로 짓이기던 재혁이 나를 보았다. 터덜거리면서 내려가는 이들의 발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놈이 한 이야기는 뭐야.”
“궁금해?”
감정조차 읽을 수 없는 딱딱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그가 한껏 내뿜던 힘을 거둬들이자,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다시 피진 못했어. 처참하게 꺾이고 짓밟혀서 일어날 수조차 없어서. 너처럼 말이야.”
마스크를 벗어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의 소리도, 그들의 울음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신호가 끊겨 먹통이 되었던 통신 기기들도 다시 작동하며 목소리를 물고 왔다.
[……! 거기 있으신가요? 아이는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걸 보니 모든 이들에게 아이의 안부를 전해준 듯했다.
“……그런 건 개인적으로 말해줘도 괜찮아.”
앞서 걷는 놈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그의 등에 총구를 대며 물었다.
“현장에서 한두 번 마주치는 것도 큰일인 놈들이 연달아 나타나 우리를 뒤쫓고 있어. 내 착각이 아니라면 너 때문인 것 같은데, 맞아?”
“적과 아군을 구분 못 하는 놈한테 해줄 설명은 아닌 것 같지만…… 백 퍼센트 나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는데. 네 자신도 좀 돌아봐.”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직진을 했다. 오히려 주위에 있는 이들이 주춤거리며 피하기 바빴다. 맹세코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할 일을 벌이고 다닌 적은 없었다. 당당한 기억들과 달리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대답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난 아직 말짱히 피어 있어.”
총구를 여전히 그에게 향한 채 그대로 그의 몸을 쓸며 총이 있어야 할 자리에 꽂았다.
[―사망 19, 부상 135. 이상입니다.]
간단한 보고가 끝났을 땐 해는 완전히 넘어가 사위가 캄캄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대원들과 동물원 직원들은 이제 도망친 동물들을 잡기에 바빴다.
구급차란 구급차는 다 몰려와 시끄럽던 주변도 조금은 잠잠해졌고, 후처리를 위해 투입된 인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 안에 들어가자 아이는 신입과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들어오는 나는 안중에도 없고 까르륵거리며 웃기 바빴다. 태주는 빨리 자러 가고 싶다는 말을 반복하며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한숨만 내쉬고 있었고, 서연은 표성과 통화를 하는지 혼자 허공에 대고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매번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마지막에 튀어버리는 놈들을 잡지 못했다는 게 한이었다. 귀를 막고 있던 인이어를 빼내고 보호구들을 벗었다.
그제야 답답하던 몸이 자유를 찾았다. 내내 긴장했던 몸에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치니 식어버린 공기에 닭살이 돋았다.
자리에 앉아 있자니 피로가 쏟아졌다. 뒤늦게 돌아온 팀장님과 재혁이 차에 올랐다. 팀장님은 차에 타자마자 나에게 페트병을 던져주었다.
이미 식어버린 이온 음료는 찝찔하고 달콤한 게 역겨웠지만 땀을 실컷 쏟고 온 나에겐 생명수 같은 존재였다. 쪼그라들었던 위에 채워지는 액체에도 갈증은 가실 기미가 없었다. 금세 비워진 병을 본 팀장님은 부스럭거리더니 새로운 병을 꺼냈다.
“실컷 마셔라.”
“시원한 건 없어요?”
“차가운 거 벌컥거리다가 심장마비 온다.”
“예에.”
혼자 수분과 싸움을 할 때 찬바람을 쐬며 열을 식히는 놈들을 보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몸뚱이를 위해 열심히 액체를 들이켜는데, 승아가 의자에 앉은 재혁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저씨, 아직도 화났어요?”
모두 그가 어떻게 반응하나 구경하기 바빴다. 찰랑거리는 병을 입에 물고서 나도 집중했다. 그 와중에 옷을 벗기 시작한 재혁은 철저히 승아를 무시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역시 매정한 사람이구나 싶을 때쯤, 그는 아이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담요를 다시 둘둘 감아주며 말했다.
“화 안 났어.”
아이는 꿈쩍 안 하고 서 있더니 폭탄 발언을 던졌다.
“아저씨, 승아 아빠 할래요?”
“크흡!”
“푸붑……!”
이온 음료가 입에서 발사되며 바닥을 적셨다. 코로 역류한 음료수 때문에 숨 쉴 때마다 들척지근한 향이 났다.
얼굴에 잔뜩 묻은 음료를 닦아내며 이리 오라고 해도 아이는 집요하게 재혁을 쳐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경악하는 상황에도 정작 당사자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저렇게 큰 아들은 필요 없는데 말이지.”
그는 분명 나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싫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교를 떨며 그의 품에 안긴 승아가 이젠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흐흥, 이제 엄마한테 갈래요.”
왜 제 엄마를 안 찾나 했더니 새아빠를 찾자마자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다행히 늦은 시각인지라 얼마 안 가 그의 품에서 잠이 들어버린 덕에 오래 시달리지 않아도 됐지만.
“무슨 일인지는 안 물어보겠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키우기라도 하려고?”
“……팀장님, 막내딸 필요 없으십니까?”
“지금 쌍둥이 키우는 것만으로도 피곤해 죽어.”
“그러게요.”
아이도 있고 나가 살아야겠다는 말은 다 꺼내기도 전에 잘렸다. 결국, 최후의 결정을 내려 제안했다.
“오늘만 관사에서 좀 같이 자도 됩니까?”
“내가 아니라 당사자한테 물어봐야지.”
의외로 재혁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주섬주섬 바닥에 내팽개쳐놓았던 짐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너무 막 넣었는지, 아까는 공간이 남았던 가방은 꾹꾹 눌러야 겨우 잠글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행사와 갑작스레 터진 사건으로 다들 노곤해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기 시작했다.
“뚝심 하나는 칭찬해줘야 해.”
팀장님의 손에서 날아온 물건을 받아 들었다. 한참이나 내 손을 떠나 돌아올 생각이 없던 콜트였다. 나의 손에 잡혀 빛을 내는 철 덩이 하나가 이렇게 든든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해. 그래야 살아남지.”
나의 작은 끄덕임에 팀장님은 만족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진짜라니까요!”
태주의 외침에 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그건 제가 들어도 아닌 것 같네요.”
“대체 그거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건데.”
나의 물음에 태주는 당찬 표정을 지었다.
“특별 드링크요?!”
“그냥 마셔도 중독성 때문에 문제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되면, 그땐 네가 책임질 거야?”
그는 나의 말에 그렇게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승아를 봤다.
“애들 피를 고작 사기 충천하는 용도로 달라는 말이 받아들여지는 날은 내가 눈 뜨고 살아 있는 한 오지 않을 거야.”
“너무 차갑잖아요!”
가당찮은 변명을 늘어놓는 태주를 피해 재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이제 내가 들게.”
“됐어. 가.”
그가 든 승아는 솜뭉치같이 가벼워 보였다. 억지로 옮기다가 깨우는 것보단 그의 품에서 편히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갑갑한 차 안에서 벗어나자마자 기지개를 쭉 켰다. 입구는 한창 사람들이 몰려 시끄러웠다.
“무슨 일이야, 또. 조용할 날이 없네.”
팀장님이 무리 사이로 파고들었고, 태주와 신입은 신난 구경거리라도 난 듯 뛰어갔다. 퇴근을 하고도 남을 시각에 다들 입구에 몰려 있으니 궁금증이 몰려왔지만, 지금은 씻고서 쉬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난리가 난 무리를 지나치려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아니! 잠깐만 들어가면 된다니까.”
“그러니까, 그렇다고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니까요.”
“총각, 나도 총각만 한 아들이 있어. 지금 여기 안에 있을 테니까 잠깐만 만나면 된다니까 그래?”
빠르게 움직이던 발을 멈췄다. 군중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비틀거리며 손가락질을 서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며 무작정 사람들을 뚫고 가려 하고 있었다.
“하…….”
그녀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더 야위어 있었다. 언제나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해도, 안심하면 그때마다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푹 파인 볼과 공허한 눈도 그저 매일 봐온 것처럼 익숙한 모습이었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귀신같이 그 틈에서 나를 찾아냈다. 살집 없는 팔다리를 휘두르면서 달려와 다짜고짜 나의 뺨을 찰싹이며 웃었다.
“아이고, 얼굴 보기 귀한 우리 아들내미. 전화는 왜 안 받았니?”
그녀의 웃음소리가 몸속을 파고들어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제멋대로 얼굴을 주물럭거리며 반가움을 표하는 상대의 팔을 잡아챘다. 맥없이 비틀거리는 몸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시퍼런 멍이 든 채 부은 눈이 초점 없이 나를 훑었다. 어디서 맞고 온 듯 울긋불긋한 얼굴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모양새였다.
절로 힘이 들어가 손이 부들거렸다. 상대의 손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서 연신 웃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적시고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여기서.”
“오랜만에 봤는데 차갑게 그게 뭐니. 서운하네.”
어렵게 꺼낸 질문에 그녀는 재빨리 대답했다. 교태를 부리듯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녀는 나에게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를 설명했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손을 놓을 때까지도 나의 머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엄마!”
소란에 깬 승아가 재혁의 품에서 벗어나 단번에 달려왔다. 막아서는 나의 팔을 뿌리친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우리 예쁜 딸, 여기 있었구나. 엄마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
“그만 가세요.”
“승아는 안 뺏어 갈 거지?”
그녀는 나의 얼굴을 잡아 아이를 향해 돌렸다. 똘망똘망한 두 눈이 나를 보며 깜박거렸다.
“얠 봐. 이 조그만 애한텐 내가 필요해.”
그녀는 광기 어린 표정으로 나에게 매달려 속삭였다. 수치심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눈치를 채고 나온 팀원들이 사람들을 쫓기 바빴지만 다들 몇 걸음 뒤로 물러나기만 할 뿐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좋은 떡밥이라도 던져주듯 갑자기 나에게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다신 안 그럴게.”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휴대전화를 들자, 그녀는 한층 더 흥분하며 나의 손을 막기에 급급했다.
“돈 안 줘도 돼. 네 눈에 띄지도 않고 연락 가게 하는 일도 만들지 않을 테니까. 그냥 요 귀여운 꼬마만 나에게 돌려주면 돼. 내가 아무리 너한테 못 해줬다 해도 이렇게 건실하게 커서 잘살고 있는 거 보면 나도 한몫하지 않았겠니? 응?”
무시한 채 통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얼굴을 붉혔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필요에 따라 변하는 그녀의 태도에 아이도 익숙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를 처음 보는 이들만이 식겁하며 숨죽여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이가 나를 향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있어야 해요. 엄마한테 악마가 들어왔으니까.”
아이는 작은 손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자는 자신이 지킬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 분노를 표출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자해하며 악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악마? 이 쪼그만 년이! 네가 나랑 같이 못 사는 건 이 이기적인 놈 때문이야!”
재혁은 아이를 안아 자리를 피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막기 바빴다. 그녀의 남은 화는 이제 내게 향했고, 긴 손톱이 할퀴고 간 자리에 선명하게 자국이 남았다.
“그 미친놈한테서 데리고 와서 살아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홀라당 가버리더니만, 이젠 내 자식까지 빼앗으려고 해?!”
그녀는 아이를 향해, 또 자신의 마음대로 휘둘리지 않는 나를 향해 혼자 씩씩대며 분노를 표출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내가 틀리지 않은 걸 증명한 셈이었으니까.
“……당신을 보십시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를 맡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네 주제에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녀의 다듬어지지 않은 손톱이 가차 없이 나의 눈가를 할퀴고 지나갔다.
“네가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사는 거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차피 넌 내 그늘에서 못 벗어날 거야. 네 삶을 봐. 내가 너에게 그들의 달콤한 맛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지금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삶을 사는 거야. 아무리 내 탓을 해도 넌 그게 좋았던 거야.”
사람들에게 파묻힌 상태로 얼굴을 들이밀던 그녀는 키득거리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마치 그들이 목을 물어뜯는 시늉을 하듯이.
“지금도 그들에게 다리를 벌리고서 먹이를 자처하고 있잖아. 그걸로 돈을 벌고.”
기괴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아이는 저런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좋은지 엄마와 같이 가겠다며 떼를 썼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신경을 박박 긁었다.
언제쯤이면 이 연을 끊어낼 수 있을지, 나는 뭐가 아쉬워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건지. 이미 지쳐 있던 몸은 가빠진 숨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호흡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했다.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한 차량에서 사람들이 내리더니 조금은 거칠게 여자를 잡아끌고 갔다. 경찰에 연락한다고 해도, 잠깐 떨어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을 빌미로 그녀를 병원에 넣는 일이야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준비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낯선 광경에 웅성거렸다. 엄마를 데리고 가지 말라고 울부짖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잠깐이나마 그녀가 세상과 격리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면, 나는 나쁜 사람인 걸까.
화젯거리가 사라진 곳에 남은 사람들도 제 갈 길을 갔고, 따끔거리는 눈가를 닦아낸 뒤 그저 집이 된 관사를 향해 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멀어지지 않고 계속 들리는 걸 보니 재혁도 착실히 나의 뒤를 따라오는 듯했다.
뱀파이어 놈들에게 온전히 나를 내놓았던 2년간의 삶 끝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나왔던 그날을 생각한다면, 지금 흘리는 아이의 눈물은 한시적인 슬픔일 뿐 더 나은 삶을 위한 발판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저런 이에게 사랑을 갈구한 과거조차 부끄러웠다. 세상 전부라고 여겼던 생각조차 한스러웠다.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만들었는지는 나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관사에 들어와서도 울어 젖히던 아이는 결국 제풀에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커다란 침대에 홀로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아이는 새근새근 숨을 고르면서 자는 게 천사가 따로 없었다.
화장실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재혁은 입대하자마자 나누어주는 흰색 반소매 티셔츠와 검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머리까지 바싹 말리고 나온 모습이 평소보다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던져주며 말했다.
“샤워 좀 하고 와.”
땀에 절고 흙투성이인 나는 내가 봐도 더러웠다. 그가 던진 수건을 들고 군말 없이 일어나 화장실로 직행했다. 긁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던 몸이 잠깐 중년의 손에 잡혔다고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눈가에서 흐른 피로 눈은 징그럽게 물들어 있었다.
열 오른 머리에 찬물을 쏟아 붓자 처졌던 몸은 다시 빠릿빠릿하게 살아났다. 피부를 따갑게 때리는 물줄기에 몸을 내주며 얼마나 많은 물을 낭비했는지, 샤워가 끝날 때쯤엔 손끝은 쭈글쭈글해지고 손톱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그는 식탁에 태평하게 앉아 글씨가 빼곡한 책을 읽고 있었다. 표지를 보아하니 내가 항상 머리맡에 두고 있었던 책이었다.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는지 이미 페이지는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가방을 뒤져 펑퍼짐한 반바지에 부대 약자가 대문짝만 하게 박힌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새로운 티셔츠를 입었건만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천에 자국을 남겼다.
어둑한 방 안에는 그렇게 아이의 옅은 숨소리와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발코니 문 앞에 보기 좋게 펼쳐진 노란색 러그와 고목으로 만든 탁상은 어울리지 않을 법한데도 침침한 집에 나름대로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페인트 향과 그의 향이 묘하게 섞여 향초가 타는 냄새가 났다. 그새 이상한 자세로 자는 아이에게 이불을 살짝 덮어주고 주방으로 가서 목을 축였다. 이미 차갑게 식은 몸에 찬물까지 들이부으니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피로를 외치는 몸과 달리 열심히 구르고 있는 정신 덕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필요 이상으로 정돈된 방을 빠져나왔다. 꽉 막힌 집을 나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옥상에서 보는 하늘은 맑았던 아침과 달리 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하늘에 떠 있어야 할 별이 자취를 감춘 만큼 도시의 땅은 빛나고 있었다. 오밤중에 건물 옥상에 올라와서 하는 일이 고작 하늘을 보고 있는 거라니.
“으, 청승맞아.”
“잘 아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날아든 물건은 가볍기 짝이 없는 담뱃갑이었다. 얌전히 좀 주면 좋을 걸, 왜 다들 위험하게 던져서 주는 건지.
한 개비 꺼내 물자 자연스럽게 불을 내주는 녀석이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금세 익숙해진 연기는 폐를 통해 나의 몸을 돌아다녔다. 옆에 있는 녀석도 자신의 것인 양 자연스럽게 담배를 가져가 태우며 뻐끔거렸다.
깊은숨을 뱉으며 물었다.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들어나 좀 보자.”
한참을 고민하길래 무슨 대단한 이유를 대나 싶었더니,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너라서.”
“말 더럽게 못 하네.”
얼었던 손이 녹으며 간질거렸다. 바람에 날리며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눈가에 자리를 틀고 있던 딱지를 건드렸다. 피가 묻어난 손을 그에게 뻗으며 물었다.
“먹을래?”
구름 사이로 겨우 고개를 빼고 있는 달빛에도 그의 얼굴은 열심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봤다.
짧아진 담배꽁초를 비벼 끌 때까지 그는 그렇게 연기만 내뿜으며 나를 보기만 했다.
“말도 못 하고, 대답도 못 하고. 할 줄 아는 게 없…….”
불쑥 다가와 눈가를 스치고 간 축축한 감촉은 바람을 맞자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태연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담배를 무는 놈이었다.
“돈까지 주고 박으면서 먹을 맛인가.”
“너한테만 맛없나 보지. 다들 못 먹어서 안달하던데.”
“흐음.”
“나한테 돌아버린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구분할 수 있다며. 직접 세어보든가.”
그는 입가에 묻었던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알려줘?”
세어보라고 그랬지 언제 알려달라고 했나. 책이나 읽지 뭐 하러 올라와서 입을 털고 있는지.
“됐다, 동정하든 시비를 걸든 하나만 해라.”
“청승 한번 제대로 떨고 있던 게 맞나 보군. 내가 너한테 왜 동정심을 품고 있다고 착각했는진 모르겠다만.”
“잘났다, 그래. 그럼 마저 떨게 내려가서 잠이나 자.”
나의 말을 들을 리 없는 녀석은 새로 문 담배를 빼앗아 가며 말했다.
“동생, 갈 곳 없으면 같이 지내도 상관없어.”
어울리지 않는 발언에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하는 시간에 비해 처리 속도가 너무 뒤떨어지네. 무슨 속셈인가 머리가 안 굴러가면 그냥 아량 넓은 룸메이트구나 하고 생각해.”
그는 담뱃갑을 들고 홀연히 사라졌다.
“……기분 더럽네.”
저게 동정심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