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파트너라는 건 (1) (4/21)

3. 파트너라는 건 (1)

부러지고 꺾이고 피를 흘리던 몸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어서 곳곳에 붙여놓은 붕대와 테이핑으로 삐걱대고 있었다. 절대 안정을 취하며 제발 가만히 누워서 쉬라는 말은 사치였다.

“…….”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이 어린놈을 데리고 어린이집을 나오고 있는지.

내가 지방에라도 내려가 있었다면 이 어린이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아이는 부러진 뼈 때문에 딱딱하게 깁스를 둘러놓은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군인 아저씨.”

기껏 없는 옷장을 뒤져 가장 어려 보이는 옷을 입고 왔건만 아이는 처음 만난 날 내가 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 때문인지 매번 나를 군인 아저씨라고 불렀다. 어렸을 적에 군복 입은 햇병아리 군인들을 보며 왜 아저씨라고 불렀는지. 기껏해야 갓 성인이 되었을 아이들이었을 텐데. 갑자기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린이집 선생님께 들은 ‘아버님’보단 ‘군인 아저씨’가 낫지 않은가…… 하며 나를 위로했다.

“아저씨, 우리 엄마는요?”

군인이라는 단어를 자체 음소거를 안 해줬음 좋겠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병원에 실려 가셨어. 지금은 위세척하고 병실에서 자고 계신다고 하네. 그 와중에 난동을 부리느라 세간을 다 부숴놔서 집으로는 못 가. 주인아주머니 코뼈를 부러트려놨다니 아마 영원히 못 갈 수도 있겠다. 월세도 6개월이나 밀린 주제에 말이야.”

“돈 또 없대요……? 승아 때문인가 봐. 매일 돈 잡아먹는 년이라고 했거든요.”

아이는 이미 익숙한 일인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얼마나 이런 일이 많았으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저 좀 불쌍한 아이라고만 생각했지, 애정을 가진 상대도 아니라 대체 이런 어린 아이를 데리고 뭘 해야 할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디 갈까.”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병원이요.”

“병원엔 왜?”

지긋지긋한 병원이었다. 요즈음 얼마나 들락날락했는지 병원에서 나는 냄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쳤다.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엄마 돌봐주러 가야 해요. 엄마한텐 저밖에 없어요.”

“엄마는 다른 사람이 돌봐주고 있어. 병원 말고 다른 데 가.”

아이는 쉽사리 가고 싶은 곳을 고르지 못하고 바닥만 보며 나를 따라 걸었다. 어쩌다 보니 길을 빙빙 돌아 어린이집 앞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걷다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신호등 옆에 섰다.

대체 꼬마랑 뭘 해야 하지. 나는 그때쯤에 뭘 하고 놀았나 생각하려고 했지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만 떠올랐다.

“승아 보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

“……이요.”

“응?”

“군인 아저씨들이요!”

뭐 하러 몇 벌 없는 옷을 줄줄이 펼쳐놓고 어떤 걸 입고 가야 하나 고민하며 시간을 버렸는지 싶었다.

휴가 중에 직장에 찾아가는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물을 때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거절을 예상하고 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너무나 흔쾌히 오라며 오케이 사인을 줬다. 관대한 태도에 왜 그런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는 갓 학교에 입학한 쌍둥이를 키우는 아빠였다.

허락까지 다 받은 뒤에야, 부대가 애를 데리고 갈 만한 곳은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 작은 아이를 뱀파이어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데리고 가다니.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사고 능력도 많이 안 좋아진 게 분명했다.

그들이 달려들지 않을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냥 놀이터나 가서 그네나 밀어주든가, 하다못해 병원에 가서 제 엄마 간호나 해주라고 할걸.

고민이 무색하게 몸은 이미 부대 앞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다른 데 갈까. 미친 짓 같은데.”

팀장님은 무슨 생각으로 알았다고 하셨을까.

혹시 몰라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이 해맑은 아이는 그저 볼이 발그레해져선 입구를 멀뚱멀뚱 지키고 서 있는 대원에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만나는 이마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나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태주는 가림막 뒤에 숨어서 소리쳤다.

“헉, 유운 형…… 숨겨놓은 딸…… 그래서 그렇게!”

그냥 세트로 오는 게 신기한 거였구나.

“그래서 그렇게 뭐? 그리고 딸 아니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얼마 가지 않아 다른 팀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시끌벅적해졌다. 덕분에 인공포육실에서 새끼 동물을 돌보는 사육사가 된 기분이었다. 뱀파이어 놈들은 그렇다 치고 평범한 인간들도 왜 그렇게 서 있는 건지.

막상 군복 입은 덩치들에게 둘러싸여 모든 시선을 독점하자 승아는 겁을 먹은 채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서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입도 뻥긋 못 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울먹울먹했다. 툭 치면 곧 울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눈치 없는 태주가 당당하게 외쳤다.

“대체 정체가 뭐예요? 혹시 저희 간식…… 악!”

“분위기 봐라, 살벌한 거. 애한테서 좀 떨어져! 안 울고 있는 게 기적이다.”

태주의 뒤통수를 거침없이 날리면서 나타난 주인공은 다름 아닌 팀장님이었다.

“피 먹는 놈들, 타 팀들 싹 나가! 퇴근 시간이라고 다들 물러 터져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의 호통에 뭔가 아쉬워하며 한껏 처진 어깨로 나가는 꼴이 정말 간식인 줄 알았나 싶을 정도였다.

이제 방 안엔 소문을 듣고 온 의무관과 팀장님, 그리고 표성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팀장님은 파마머리 여자를 보며 말했다.

“의무관?”

“전 밥 먹는 무소속입니다만.”

당당하게 내뱉는 논리 있는 말에 아무도 딴지를 걸지 못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널찍해진 장소에 숨통이 트였고, 아이를 혼자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삐걱거리는 몸을 의자에 널브러뜨리고 앉았다. 팀장님 의자처럼 폭신한 의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녕? 이름이 뭐야?”

팀장님은 생전 처음 듣는 상냥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비록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골목에서 아이에게 돈을 뜯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승아. 채승아요.”

나와 성이 다른 꼬마를 보며 살짝 당황한 듯싶었지만, 팀장님은 다시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승아는 몇 살이야? 군인 아저씨 보고 싶다고 했다며.”

“다섯 살이요…… 어떻게 알았어요?”

의외로 아이는 주눅 들었던 아까와 달리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팀장님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적극적으로 말을 걸며 대화를 주도했다. 오히려 아이들과 잘 지낼 것 같던 표성이 쭈뼛거리며 소극적이었다. 그는 결국 무리에서 벗어나 나에게 말을 걸었다.

“팀장님이 저렇게 방긋방긋 웃으면서 이상한 말투 쓰니까 무서워. 꼭 적의 허점을 노리고 있는 것 같잖아. 갑자기 웃다가 막 급소를 노리고…….”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말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에이, 너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표성, 다 들린다.”

작은 경고를 날린 팀장님은 아이를 들어 목말을 태우고 사방팔방을 돌아다니질 않나, 놀이기구 역을 자처해 애를 돌리고 던지고 뛰고 오만 난리를 쳤다.

팀장님은 아이를 번쩍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나에게 물었다.

“승아 왜 이렇게 가벼워? 몸무게 너무 적게 나가는 거 아니야?”

반년 만에 만난 아이의 몸무게가 왜 내 책임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무식한 힘에 아이가 천장에 머리를 박는지 안 박는지 신경이 쓰여 시선이 자꾸 위로 향했다.

표성은 나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동생은 왜 데리고 온 거야? 친동생은 맞지?”

“돈이 없어서 집에 못 들어가요!”

승아는 그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까르륵 웃으며 외쳤다. 그리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설명까지 덧붙였다.

“엄마는 술을 너무 드셔서 병원에 있고…… 근데 돈이 있어도 집에 못 들어가요. 주인아주머니랑 싸워서 쫓겨날지도 모른대요. 근데 예전에도 몇 번 그런 적 있어서 괜찮아요. 다른 집에 가서 살면 돼요. 승아도 커서 군인 될 거예요. 제 친구 하은이라고 있거든요. 하은이 아빠가 군인인데 돈이 그렇게 많대요.”

아니, 잠깐만.

아이는 횡설수설하고 있었지만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들떠 있던 방 안이 조용해졌다. 표성은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었어?”

“그냥 사실만 말했을 뿐입니다.”

다들 나를 힐긋거리는 통에 죄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그간 못 쓴 휴가 좀 쓰려고 하는…….”

“안 돼.”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건만, 그 순간 팀장님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네?”

확고한 거절에 당황해서 삑사리까지 내며 대답을 했다. 그동안 그렇게 휴가 좀 쓰라 그럴 땐 언제고?

“내일부터 개인 평가랑 파트너십 평가 있다는 거 잊었어?”

아.

“이 몸으로요?”

팔과 다리를 휘적휘적하며 대답하니 의무관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몸을 훑어봤다.

“인간 기준 점수만 넘으면 되니까 상관없지 않나.”

3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평가의 날은 5월 초로, 최소 사흘에서 최대 일주일까지 걸리는 대대적인 평가 기간이었다.

신체검사부터 심리 평가, 총술, 검술, 체력 검사까지 거의 모든 항목을 망라하는 동시에 파트너와의 호흡은 어떤지,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심지어 둘 사이의 사적인 영역까지 침투해 평가하는 기간이었다.

3년 전엔 파트너를 반쯤 아사 상태로 만든 뒤 이성을 잃게 해 사관학교 졸업반 아이들 사이에 섞여 섬에서 5일간 구르다 온 터라 참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가 기준인지 알 리가 없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중요한 건 인생에 한 번만 경험해도 되는 그 훈련에만 가지 않으면 됐다.

“못 넘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사학 애들 마지막 지옥 훈련에 같이 가서 땀 좀 빼고 오겠지. 내가 여기서 일한 지가 20년은 된 거 같은데 사람 중에서 그곳에 가는 놈은 딱 두 명 봤으니 넌 별문제는 안 될 것 같군. 파트너를 칼로 찌른다거나, 콜트로 몸을 뚫어버리거나, 달리는 차에 뛰어드는 고라니 짓만 안 한다면.”

괜히 뜨끔했다. 그나저나 고라니라니?

“군의관님, 뭐라고 좀 해주십시오. 예를 들면 안 된다거나 부적절하다거나 불공정하다고요.”

그녀는 아이를 안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했다. 이런 몸을 두고서 과연 저렇게 고민을 할 일인가.

“손바닥을 가른다거나, 몸을 뚫는다거나, 죽기 전까지 피를 쏟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듯하네요.”

방긋방긋 웃는 게 그동안 귀찮게 굴어서 복수라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녀는 곧이어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여기저기 많이 얻어터지긴 하셨는데, 실질적으로 걱정할 건 부러진 손가락뿐이에요. 나머지는 그냥 참고 이기면 되는 근육통이나 멍뿐이니까요.”

참으로 고맙고 친절한 설명이었다.

표성은 말없이 퇴근 준비를 할 뿐이었다.

***

버스 안은 조용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도 붙이지 못하고 끌려온 곳은 다름 아닌 춘천이었다. 논밭이 펼쳐질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아파트가 줄줄이 들어선 곳에서 무슨 테스트를 할까 싶었는데, 버스는 멈출 생각이 없이 계속 달리더니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빙빙 돌며 쿵덕거리는 버스에 절로 한숨이 나올 때쯤, 갑자기 트인 공간엔 낡은 건물이 우뚝 존재를 드러냈고, 이런 게 왜 여기 있을까 싶은 정도로 큰 호수와 일부러 산을 깎아놓은 듯한 평야까지 펼쳐졌다. 뜬금없는 곳에서 구색을 갖추고 튀어나온 건물과 공간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전국에서 긴급히 투입될 대원들과 파트너가 없는 대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인 터라 도착한 버스만 거의 스무 대였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군기는커녕 캠핑이라도 온 이들처럼 왁자지껄하게 서로를 소개하느라 바빴다.

숙면했는지 눈을 비비적거리며 내리는 표성에게 물었다.

“다들 왜 이렇게 신이 났습니까.”

“말이 테스트지, 쉬는 시간도 많고 잘하면 일주일까지도 꿀 빨다가 휴가까지 받아 갈 수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저쪽은 똥 씹었는데요.”

반대편 차에서 내리는 이들은 한껏 음침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이었다. 원래 빠릿빠릿한 그들이 굼뜨게 움직이고 있으니 보는 사람마저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쟤넨 부대에 있을 때보다 더 피땀 쏟으면서 갈굼당할 앞날이 기다리고 있잖아. 우리까지 왜 보냈겠어. 딱 답 나오지?”

“……아.”

그래서 팀장님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날 보냈구나.

시작도 하기 전에 다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익숙한 놈이 차에서 내렸다. 난 아직 부러진 뼈 하나가 붙지 않아서 손을 닭발처럼 고정해놨건만, 녀석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깔끔한 모습이었다.

재혁이 고개를 든 덕에 눈이 마주쳤다. 또 재수 없는 웃음을 보겠거니 싶었는데 그의 시선은 나에게 잠시 머무를 뿐 금세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이들에게 돌아갔다. 어딘가 맥없는 그의 태도에 흠칫했지만 지금 내 꼴은 저 녀석 때문이 아니겠는가. 표성이 들어가야 한다며 나를 끌고 갈 땐 나도 모르게 경직된 표정을 의식하고 풀어줘야 했다.

“으…….”

단양 훈련소가 공사 중이라 임시로 쓰던 춘천으로 왔다더니, 그나마 봐줄 만했던 외부와 다르게 내부는 심각했다. 벌레들이 밖과 안을 구분하지 못하고 돌아다닐 정도면 얼마나 자연 친화적인 건물인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보통의 부대에서 생활하다가 왔다면 그저 좀 더 낡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냥 낡은 수준이 아니었다.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같이 금이 간 벽과 아무리 낮이라지만 힘없이 빛을 내는 전구들이 그야말로 공포 영화에서나 보던 버려진 폐건물과 다를 바 없었다.

“야아, 벌레 나오는 것 봐라. 나방 하나만 나타나도 록 페스티벌을 연 것 같았는데, 오늘 자기는 다 글렀네.”

벌써 폴짝거리며 다니는 사람들을 보던 표성은 겁 없이 사마귀를 잡아 거미줄이 잔뜩 쳐진 구석에 내려놓았다. 나도 웬만한 벌레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손을 쫙 편 것보다 커다란 거미에 절로 헉 하는 소리가 났다.

정신없이 뛰어 들어간 덕에, 사마귀 한 마리에도 펄쩍 뛰는 사람들이 괴물 같은 거미를 보지 못해 다행이었다.

“다섯 팀으로 나눠서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뭐가 그렇게 급한지 먼지가 쌓인 바닥 한쪽에 짐을 쌓아놓고 바로 신체검사를 하러 끌려갔다. 빠르게 진행되는 덕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평가라는 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안일한 생각은 체력 검정을 하러 밖으로 끌려 나온 뒤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사실 체력 검정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었다. 분기별로 측정하고 있는 윗몸일으키기 2분, 팔굽혀펴기 2분, 그리고 3킬로미터 달리기가 다였다. 앞선 두 가지의 측정이 끝나고 달리기 차례를 기다리는데, 평화로운 이곳과 다르게 옆 사격장에선 한창 전쟁이라도 치르는 듯 총성 소리와 억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땡볕에 앉아 모래 먼지를 먹으며 앉아 있는데, 표성은 옆에서 하품을 뻑뻑 해댔다. 자연에 많이 노출되고 깔끔을 떨지 않을수록 면역력이 길러진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그의 몸은 아마 모래를 많이 먹어서가 아닐까.

괜히 유심히 그를 보고 있다가 전염된 하품을 하며 물었다.

“굳이 이런 곳에 와서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걸까 싶습니다. 그냥 부대에서 평소에 하는 것만 봐도 되는 걸 텐데.”

“같이 하는 거 티 내기 좋아하는 곳이잖아.”

“그나저나 총은 쏠 줄 아십니까.”

그의 때 타지 않은 총이 생각나 물었더니 그가 펄쩍 뛰며 말했다.

“네가 워낙 괴물 같은 애들 사이에서 훈련받고 온 몸이라 내가 하찮아 보이는 모양인데, 우리도 훈련은 다 받는단 말이야. 무시하지 말라고. 실전에선 어떨지 모르겠는데, 봐라. 내가 테스트 보면 너보다 잘 볼 거다.”

“지금, 이 테스트는 쓸모없는 짓이라고 돌려 말한 거죠.”

“생각보다 잘 알아듣네. 차라리 타자 빨리 치기 같은 거나 하지 이게 뭐냐. 대체 내가 팔굽혀펴기를 잘해서 뭐 하고 윗몸일으키기를 잘해서 뭐 해. 앉아서 화면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게 10년인데.”

그때, 옆에 앉아서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여자가 우리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녀는 무엇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일인지,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을 많이 하고 있는지, 뽑는 기준부터 바꿔야 한다며 표성과 쿵짝이 맞는 대화를 했다.

평소 별말 하지 않던 표성도 맞는 사람을 만난 일이 즐거운지 평소보다 높은 톤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일한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그녀의 이름은 한소라라고 했다. 찰랑거리게 풀어둔 머리에 진한 화장, 그리고 삐쩍 마른 몸은 누가 봐도 운동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훈련이고 보고서고 제가 빈혈로 쓰러지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발언에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언젠가 인간 공장에 끌려가면 탈출할 체력은 있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빈혈이라도 있는지 창백한 여자는 경악하며 나에게 속삭였다.

“에이, 제가 거기 끌려갈 일이 뭐가 있어요. 그리고 끌려가면 그냥 죽는 거지 무슨 탈출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거기서 피 뽑히나 여기서 피 빨리나 다를 게 없을 거 같네요. 부산에선 오히려 피만 주면 되니까 더 나은 거 아니냐는 말도 돈다니까요.”

그녀는 그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팔뚝에 있는 문신을 긁적였다. 톡 튀어나온 살이 거슬렸다.

“솔직히 여기 있는 것도 거의 별다를 바 없잖아요. 숙소도 같이, 침대도 같이. 심지어 그들이 저희를 건들면 안 된다는 조항도 파트너 사이에선 어느 정도 눈감아주는 거 보면 말 다 끝났죠. 다른 직렬로 시험 보고 들어갈 걸 그랬어요. 괜히 몸 고생만 더 해.”

“그럼 파트너한테 억지로 당하는 일이라도 없게 열심히 훈련하세요.”

그녀는 입을 씰룩거리더니 나름대로 유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흠…… 그런데 그쪽은 왜 그렇게 온몸이 난리예요? 무슨 교통사고라도 당했어요? 문신도 그렇게 많으면 면접 때 마이너스가 없나?”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저도 할까 했는…….”

“거기 입 좀 다물어! 다음! 백유운, 신표성, 정준수, 한소라, 김주아, 이연…….”

여자의 시끄러운 고음에서 벗어날 수 있나 싶었더니 달리는 내내 붙어서 말을 거는 게 여간 거슬리지 않았다. 아직 다리가 뻐근해 설렁설렁 갈까 싶다가 결국 전력 질주를 해버리고 말았다.

땀이 흐를 새도 없이 끝나버린 달리기는 조금 허무하기까지 했다. 너보다 테스트들은 잘 볼 거라고 장담하던 표성은 특급을 목에 걸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나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표성은 다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 너 그거 다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지?”

“누가 이렇게 거치적거리는 걸 장식으로 쓴답니까.”

그늘 막에서 찌뿌드드한 몸을 풀면서 한창 잘 쉬고 있는데, 헉헉거리며 들어온 여자가 또 표성과 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와, 진짜 빠르시네.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기준치만 넘으면 되는데.”

“수액 맞기 싫어서요.”

나의 대답을 들은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쯤이면 그만 떨어져 나가겠거니 싶었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옆에 앉아 종알거렸다. 심지어 표성이 화장실이 급하다며 자리를 피할 정도니…….

“운동 진짜 열심히 하시나 봐요. 얼굴만 봤을 땐 좀 귀엽게 생기셔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몸 엄청 좋네요. 팔 근육 한 번만 만져봐도 돼요?”

귀여워……?

세상 처음 듣는 소름 돋는 말에 고개를 돌렸을 땐 나의 팔뚝은 이미 그녀의 손에 당하고 있었다. 감탄사까지 내뱉으며 슬슬 어깨로 올라가는 여자의 손을 피했다.

“문신에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거예요? 글씨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선으로 채워져 있기만 한 거 같은데.”

“별 뜻은 없습니다. 허세 좀 떨어보자고 한 거라.”

“에이, 그러면 호랑이든 용이든 좀 있어 보이는 걸 새겼어야죠. 그리고 별로 허세 떨 것 같은 성격은 아니신 것 같은데.”

“예에…… 그렇게 봐주셨으면 다행이고요.”

눈치 없는 상대는 내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붙여왔다.

“유운 씨는 파트너분이 잘해주세요? 여자분이에요, 남자분이에요? 딱 보니까 파트너분이 되게 어려워할 것 같은데.”

“소라 씨는 여기서 일하는 걸 그렇게 탐탁지 않아 하시는 걸 보니 그쪽은 파트너분이 잘 못 해주시나 봅니다.”

“흠, 잘 못 해준다기보다 좀 폭력적이랄까요. 처음에는 얼굴도 나쁘지 않고 몸도 좋으니 그래도 할 만하겠다 싶었는데, 제멋대로 구는 게 있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돈이 되니까 하는 거지 수당 안 나오면 하기 싫을 것 같아요.”

인상을 찌푸리던 그녀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아, 그분 봤어요? 전재혁이라는 분.”

“……못 봤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볼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아까 실물로 보니까 진짜 잘생기긴 했더라고요. 버스 안에서도 다 그분 얘기만 하고요. 유운 씨도 나중에 한 번 봐요. 같은 팀 아니면 솔직히 지역 같아도 잘 못 마주치잖아요. 그 사람한테라면 수당 안 나와도 그냥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황당한 발언에 하마터면 그녀의 면전에 대고 비속어를 내뱉을 뻔했다. 부자연스럽게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가서 파트너 맺지 않겠냐고 한번 물어보시죠. 좋다고 할지도 모르잖습니까.”

“에이, 순혈분이시잖아요. 맡았다간 제가 감당 안 돼서 죽을지도 몰라요. 아, 그러고 보니까 저기 계신다는 건 파트너분도 같이 오신 걸 텐데 누굴까요. 여자분은 아닐 것 같고, 혹시 아세요?”

돌아오지 않는 표성을 보며 나도 화장실로 대피를 해야 하나 생각했을 때쯤, 직원들은 일정이 끝났다며 우리를 체육관으로 밀어 넣었다.

체육관이라고 해도 별것 없었다. 모랫바닥이 나무 바닥이 되고 사방이 막혀 있다는 것뿐이었다. 식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주먹밥 두 덩이를 먹고 있으려니 기가 찼다.

애초에 기대도 없던 터라 그냥 넘어갔지만, 텅 빈 곳에 놀 거리라도 넣어주든가 음악이라도 틀어주면 좋았을 걸, 삭막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몇몇은 창가에 기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뱀파이어 놈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고, 대부분은 앉아서 친목질에 바빴다. 잠을 그렇게 자고도 졸린지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표성에게 물었다.

“이게 진짜 꿀 빠는 겁니까?”

“상대적인 거잖아~. 어차피 부대에 있었으면 우리가 가만히 있는 걸 못 참는 분들이 던지는 일을 해치우느라 바쁠 테고, 그것도 아니라면 체력 단련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텐데 여기선 적어도 가만히 있어도 욕은 안 하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그래도 틀린 말은 없었잖아.”

문을 지키고 서 있는 직원에게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들어가서 쉬어야겠다고 말해보았지만, 그는 두 시간만 더 있으면 저녁 먹고 숙소에 들어갈 수 있다면서 나를 돌려보냈다. 점심 같은 저녁을 준다면 차라리 안 주는 게 덜 욕먹을 것 같은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데 폭발 소리가 울렸다. 수류탄이라도 던지나 싶어 밖을 내다봤더니 마구잡이로 날아드는 총격과 폭탄들을 맨몸으로 피하는 무식한 짓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래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단 모양이 테스트인지 고문을 하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조건과 미친 속도로 날아오는 공격에 대부분 피를 줄줄 흘리며 끝을 맺었다. 그마저도 금방 낫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막상 본인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지만 나를 따라온 표성은 고개를 설설 저으며 말했다.

“저게 할 짓이냐.”

“저희가 장애물 피하기를 하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또 왔다, 이 여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여자는 먹다 남은 주먹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유운 씨 파트너는 누구예요? 저기 저 여자분이신가.”

여자는 창 밖을 보기 위해 한껏 까치발을 들곤 홍서연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긴 내 아내고, 백유운이 파트너는 저기…….”

“긴 머리요. 저기 긴 머리 여자분.”

급한 마음에 옆 팀에 있는 여자를 찍으며 표성의 말을 잘랐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표성은 나를 힐긋 보더니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려주었다.

“내일 일정이 뭔지 혹시 압니까?”

여자는 표성의 질문에 열정적인 답변을 냉큼 뱉었다.

“심리 검사랑 영점 사격이요! 근데 그전에 오늘 밤이 진짜 고비죠. 뱀파이어 대원들을 일부러 한계까지 밀어 넣고 어디까지 버티나 본다는데, 솔직히 그건 우리가 죽어나는 일이잖아요.”

“예?”

나의 멍청한 되물음에 표성이 말했다.

“피 쏟게 한다는 거지. 한계점에서 어떻게 구나 보려고.”

“맞아요! 그래서 저것도 일부러 저러는 거래요. 억지로 쏟아내게 하느니 아예 저런 테스트를 해서 자연스럽게 만신창이로 만드는 거죠.”

한참 동안 그녀의 쓸데없는 정보들을 들으며 구경하다가 자리를 뜨려는데 익숙한 놈이 출발 지점에 섰다. 신경 쓰지 않고 체육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모여 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관심 속에서 출발점에 선 그에게선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심지어 귀찮아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힘없어 보이던 것도 모두 연기였는지, 출발 신호에 맞춰 달려 나가는 녀석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와, 다르긴 하네!”

표성은 절로 튀어나오는 감탄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내가 봐도 엇박자로 튀어나오는 공격을 손쉽게 통과한 그를 보면 다른 이들이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몸놀림에 절로 집중이 됐다. 다른 이들이 예외 없이 한 방 먹고 간 구간을 어떻게 지나려나 숨죽여 지켜보는데, 그는 우뚝 발을 멈췄다.

……저런 미친 새끼를 봤나!

폭발음과 함께 연기 속으로 사라진 그의 모습에 현장에 있던 녀석들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의 비명에 귀를 막고 지켜보는데, 검사관이라는 놈들이 가장 우왕좌왕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를 찬양하던 여자는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괜찮은 걸까요?”

모두의 걱정이 무색하게 홀연히 모래 먼지 속에서 빠져나온 그는 저벅저벅 걸어 나와 양손을 들어 괜찮음을 증명했다. 말짱한 옷을 보면 다친 뒤 회복한 것도 아닌 듯 보였다.

그는 더는 관심을 보이지 말라는 듯 손짓하며 태연히 나무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도 다시 테스트가 시작되니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움직이는 이들에게만 집중하느라 다들 알아채지 못한 듯 보였지만, 몇몇 구간이 미세하게 공격 시간이 바뀌어 마음을 다잡고 움직인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변해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다들 다치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어떻게 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표성은 그저 재혁도 피하지 못한 구간에서 서연이 한 발도 맞지 않고 통과했다며 기뻐하고 있을 뿐이었다.

“봤어? 역시 어딜 가도 꿀리지 않는다니까.”

굳이 기뻐하고 있는 이에게 초를 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소란도 지나가고 시끄러운 그들을 두고 잠이라도 잘까 싶어 바닥에 누웠건만 끼긱거리는 나무판자에 등이 배기는 데다 벌레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어 절대 잠이 들 수 없는 환경이었다. 표성이 어떻게 이곳에 앉아 졸았는지 비법이라도 알고 싶었다.

“어디 가나.”

당당하게 체육관 문을 열자 직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화장실요. 방광 터지겠습니다.”

여자들이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할 때에는 군말 없이 보내주더니 그는 내가 간다는 말엔 탐탁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됐나 싶어 그냥 문을 벌컥 열고 나가버렸다.

“5분 내로 갔다 와.”

5분은 무슨. 가는 데만 5분 걸리겠네.

최대한 느린 발걸음으로 언덕으로 가고 있으니 빨리 뛰어가라며 난리였다. 멀리서 닦달하는 소리에 청개구리 심보가 생겼다.

내려올 땐 3분도 걸리지 않았던 거리를 평소에 보지도 않던 풀들을 구경하며 20분에 걸쳐서 내려갔다. 오래간만에 마주한 오디오가 빈 세상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빈둥거리며 건물을 돌아다녀서 찾은 화장실은 관리 따위는 하지 않는지 코를 찌르는 지린내가 진동했고, 바닥엔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축축한 신발은 원하지 않는 터라 건물을 더 돌아다녀봤더니 샤워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사람도 없고 잘됐구나 싶어 샤워장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청소해둔 건지 아까 갔던 을씨년스러운 화장실보단 쾌적했다.

볼일도 봤겠다, 뭘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윽!”

몸이 붕 떴다 바닥으로 추락했다. 몸에 밴 방어 본능이 아니었다면 뼈 하나쯤은 두 동강 났을 것이다. 내 몸도 참, 왜 나를 만나 고생을 하는 건지, 아직 내가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떠보니 사마귀가 눈앞에 서서 갸웃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진짜 백유운이네.”

……사마귀가 말을 하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몸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는데, 입구엔 다름 아닌 익숙한 얼굴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대놓고 실실 쪼개며 다가오는 꼴이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황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장면이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기까지 하네.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왔을 줄이야. 악착같이 버티더니 잘 지내고 있나 봐, 꼴을 보니까. 어?”

친근한 척을 하면서 대놓고 이를 드러내고 다가오는 놈들은 항상 재혁의 주위를 돌며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놈들이었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절로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목소리만 들려도 치가 떨렸다.

그들은 샤워라도 하러 온 건지 단체로 하의만 걸친 채 수건을 들고 있었는데, 주춤거리는 동안 문 뒤로는 이제 구경꾼들까지 모여 북적거렸다.

땡볕에 뛰어다닌 터라 붉게 물든 몸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표성의 말대로 그저 앉아 쉬면서 꿀이나 빨 걸 무슨 생각으로 체육관을 나온 건지 후회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하…….”

과장을 조금 더해 말한다면 내 몸에 나 있는 상처 중 절반은 그들에 의해 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욕설은 그저 일상이었고, 떼거리로 몰려와 재미로 감금과 폭행을 일삼는 놈들이었다. 덕분에 맷집을 잔뜩 키워 일하기 적합한 성격을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런 놈들을 만나서 반가움을 느낄 리 만무했다.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서 참자는 생각으로 나가려는데, 그들은 문까지 닫아버리며 막았다. 주위를 둘러싼 놈들 탓에 화장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연의 향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생각 없어 보이는 놈들에게 말했다.

“나야 손해 볼 게 없다만, 너희들은 무슨 뒷감당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덩치 큰 세 놈이 일자로 주르륵 서 있으니 벽 같았다. 그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실실 쪼개며 말하는 게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못 본 사이에 더 까칠해졌네. 네 담당 누구야? 길들이기 힘들었겠어.”

얼굴을 향해 뻗는 손을 쳐냈다. 구겨지는 얼굴이 볼 만했다.

“누군지 알면 가서 도와라도 주게? 말로 끝낼 수 있을 때 비켜.”

“도와줘야지. 노하우 전수라도 해줄까 싶은데.”

“나한테나 먼저 알려주지그래? 내가 하는 말도 안 듣는 몸뚱이 내가 먼저 좀 길들이게.”

그들은 뭐가 웃긴지 저들끼리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정신이라도 나갔나 싶어 그들의 옆을 그냥 지나가려는데 보기 좋게 잡혔다.

“어딜 가. 무식한 놈들한테 재미는 주고 가야지.”

“재미가 다 뒈졌냐.”

선빵도 먼저 맞았고 시비도 상대가 먼저 걸었겠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앞에 나와 있는 놈의 다리를 후려차자 보기 좋게 앞으로 고꾸라지며 무릎을 찧었다. 막상 내가 공격을 할 줄은 몰랐는지 양쪽에 멍청히 서 있던 놈들이 대놓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 이 새끼가!”

비록 상대의 머릿수가 많아 정식으로 덤빈다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힘들었지만, 무식하게 힘으로 덤비는 놈들을 보니 좁은 화장실에선 무사히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티끌 같은 확률에 올인하고 그들의 주먹질에 깨진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미 한창 흥분했던 놈들은 내가 일부러 낸 상처에 더 자극당한 나머지 계산적인 움직임이 아닌 본능적으로 달라붙을 뿐이었다. 이미 나를 맛본 놈들이었기에 더 놀리기 쉬웠다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쨌든 그들의 약점으로 삼을 수 있으니 좋다고 봐야 할까.

“지금이 좋게 끝낼 수 있는 마지막인 것 같은데.”

“그건 대봐야 알지, 새끼야.”

“무식해서 꼭 겪어봐야 알아?”

그들을 패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귀찮게만 생각했던 닭발 같은 손을 방패 삼고 유리 조각을 무기 삼아 휘둘렀지만, 당연히도 유리 조각이 지나간 그의 몸들은 꾸물거리며 회복했다.

동시에 덤비는 놈들을 피하니 저들끼리 박치기를 하고 난리가 났다. 열을 잔뜩 받은 건지, 아니면 손에서 흐르는 나의 피에 정신이라도 놓은 건지,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붙어오는 덕에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발로 찍어 내리는 놈의 다리 밑으로 죽 미끄러져 간신히 문손잡이를 잡을 수 있었다. 미는 힘에 문이 열리면 참 좋았을 텐데, 바로 그 순간 머리채를 잡혀 꼼짝없이 뒤로 밀려났다.

“이런 미친…….”

“반항하는 게 네 진짜 매력이라고.”

90킬로그램은 거뜬히 넘을 놈들이 내 몸을 깔고 뭉개며 손발을 잡는 덕에 손쓸 방도도 없이 잡혀버렸다.

“으윽.”

“좀 놀아줄까 했는데, 안 그래도 한참 구르고 온 터라 힘들어서 말이야.”

쓸모없는 반항이라도 하던 몸은, 고작 송곳니가 목을 긁어오는 감각에 압도되었는지 더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에게 공포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도 아니었지만, 20년은 지났을 기억에 짓밟혀 모든 걸 놓는 몸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만으로도 굴욕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네놈 파트너가 누구인진 모르겠다만 내일 비실비실하는 놈이 누군지 보면 훤히 알겠지.”

벽에 얼굴이 뭉개졌다. 뒤에서 짓누르는 놈들 덕에 이대로 압사당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고개만 돌려도 목표 지점이라고 생각한 철문이 있었지만, 손 하나 뻗지 못해서 나갈 수가 없었다.

허무하게 찢겨나간 옷 덕에 맨살이 드러났고, 더러운 타일은 얼음장 같았다. 덮쳐진 몸은 그들의 체온에 열이 오르다가 타일의 한기에 차갑게 식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크읏……!”

놈의 거친 입술이 목에 닿자 내 몸에 힘이 들어갔다. 송곳니가 살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에 피가 얼굴로 쏠렸다. 생살을 파고 들어오는 느낌은 수십 번을 경험해도 소름 끼치는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눈치 없는 몸은 착실하게 액체를 쏟아냈고 상대의 혀가 핥고 지나갈 때마다 피부는 쓰라리고 화끈거렸다.

입에서 절로 쌍욕이 튀어나왔지만, 그마저도 막아버려 내 입에선 보기 좋은 신음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나의 피 맛을 본 놈은 서서히 몸을 붙여왔다.

뒤에서 비비적대는 감촉에 몸이 기억하고 있는 굴욕적인 감각들이 꿈틀거렸다. 입맛을 다시며 나를 붙들고 키득거리는 소리도, 나의 살을 빨아대는 마찰음도 귀를 파고들었다.

“으으…….”

“탐난단 말이야, 네 피. 그 새끼는 왜 맛을 안 보는지 몰라.”

“읍!”

상처 난 손가락을 쑤셔대는 통에 몸이 뒤틀렸다.

“야, 적당히 하고 넘겨라. 혼자 꿀 빨지 말고~.”

한낱 피를 조금 잃게 되었다고 나의 몸은 조금씩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온 정신을 그저 신체적인 괴로움에 쏟기 위해 애쓰는 방법밖에 없다는 건,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굳게 닫힌 철문이 허무하게 열렸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문 사이의 인영에 고개를 치켜들었을 땐, 절로 몸이 굳어버렸다.

“……더러운 새끼.”

나를 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그였다.

도와줄 거라고는 일말의 기대도 않았던 상대였지만 재혁은 이런 나를 훑어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경멸하는 듯 내리깔아보는 그의 눈빛은, 뒤에서 붙어오는 놈들보다 나를 더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려 해도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밀쳐대는 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징그럽게 몸을 훑고 다니는 손들을 쫓아 올라오는 그의 시선은 나를 마치 발가벗기는 듯했다.

그는 미련 없이 문을 닫고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문틈으로 비치던 그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소란에 사람들이 몰려온 틈을 타, 나를 붙잡고 있던 놈의 머리를 잡아 깨진 거울에 처박았다.

“……씨발!”

나는 아직 갚아줄 게 산더미였지만, 되레 진정제를 맞고 잠에 빠져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

“으으…….”

시간이 꽤 지났는지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누워 있는 곳은 작은 방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스프링 소리 나는 쇠 침대는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에 딱 붙어 있었고, 발치에는 낡은 철제 관물대가 있었다. 똑같은 침대와 관물대가 하나씩 더 있어 마치 도장으로 찍어낸 것 같았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두 침대 사이에는 고작 한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틈이 있을 뿐이라는 거였다. 고급스러운 방이나 좋은 매트리스는 기대도 안 했지만, 숙소 상태는 정말 최악이었다.

“감옥도 이것보단 낫겠네.”

정말 창문이라도 없었으면 감옥으로 써도 될 정도였다. 텁텁한 공기와 먼지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탓에 환기라도 하기 위해 일어나다 발을 헛디뎌 보기 좋게 고꾸라질 뻔했다. 그래봤자 옆 침대에 쓰러질 뿐이었겠지만.

찝찝한 몸을 벅벅 닦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워 쓰라린 피부를 만져봤지만 이미 반창고가 붙어 까끌까끌한 느낌만 났다.

대체 여기서 내가 뭘 하는 건지.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핑계 삼아 내일부터 일정에서 빠져야지 생각하며 이불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포근함이라곤 하나도 없고 꿉꿉한 냄새만 나는 천 쪼가리일 뿐이었다.

조금 소란스럽던 발소리들도 다들 제 방을 찾아 들어갔는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정적만 가득한 방 안에서 잠이 들어야 한다고 주문을 걸으며 눈을 감고 누워 있어도 이미 몸은 휴식을 잔뜩 취했는지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

다시 눈을 감은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벽을 보고 있어도 풀풀 풍기는 라벤더 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스산한 기운을 풍기며 들어온 그는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벌컥 열었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타고 들어온 부엉이 울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옷을 갈아입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귀에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처음 사관학교에 발을 들이고 그와 엮이는 일이 없었다면, 그놈들과 악연이 시작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지금 꼴사납게 누워 있을 일도 없었을 테고.

이미 막장이었던 내 삶이 고작 그와 엮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용해지진 않았겠지만, 그럭저럭 평탄한 삶을 살 수는 있었을 것만 같았다.

과거에 가정을 세우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은 없다고 했지만, 지금은 어디로 향할지 모를 화살을 눈앞에 있는 그에게 들이대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네 갈 길 가. 눈앞에서 사람 속 뒤집어놓지 말고.”

나의 중얼거림에 한참 동안 제 할 일을 하던 녀석이 대답했다.

“시끄러워. 잠이나 자.”

안 그래도 낮았던 그의 목소리는 금방 땅을 파고들 것처럼 건조하고 음침했다. 차라리 깐족거리며 유치하게 굴었으면 그를 비웃으며 아무렇지 않았을 걸, 남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피를 빼앗기며 살아왔건만 고작 피 한 번 쏟고 왔다고 칙칙하게 구는 녀석이 짜증 났다.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는 세상이 만만하지? 6년이나 참고 놀아줬으면 지겨울 때도 되지 않았어?”

“그냥 조용히 닥치고 잠이나 자라고. 나도 너랑 엮이는 거 불쾌하니까.”

갑자기 몸을 일으킨 나머지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애써 중심을 잡고 버텼다.

“불쾌하다는 새끼가 왜 그래 대체? 그동안 네 장단에 다 맞춰줬잖아. 이제 끝인 줄 알고 살고 있었는데 또 와서 헤집어놓은 것도 다 너잖아. 왜 자꾸 와서 가만히 있는 사람 인생 들쑤셔놓는데!”

“네가 자초한 일들이야.”

“뭐?”

“네가 그렇게 인생을 사는 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뭔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내가 아니었어도 넌 그렇게 살았을 놈이야. 그저 날 따르는 새끼들이 많아서 그래 보일 뿐이지. 원래 그렇게 더럽고 찌질하게 살았을 놈이라고.”

그는 지겹도록 차분하게 할 말을 했다. 어쩌면 나는, 오늘 당한 일을 그에게 화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나간 시간을 생각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 정도쯤은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든 걸 잃고 포기했을 때, 적어도 그는 아무것도 잃은 것 없이 제가 원하는 걸 해왔으니까. 나로서는 적어도 내가 아니라 나를 증오하는 놈을 탓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니까.

그렇게 의미 없는 소리를 또 질렀다.

“그러니까 알아서 설설 기는 놈들이랑 마음껏 원하는 대로 살지 여긴 왜 왔냐고, 미꾸라지 같은 새끼야!”

“하.”

“사람들이 네 앞에서 실실 쪼개니까 눈치 하나 더럽게 없는 넌 못 알아챘나 본데, 세상에 널 진심으로 대하는 놈들은 하나도 없어. 그냥 네 단물 한번 빨아보려고 붙어보는 거지. 넌 너만 다른 사람들을 비웃고 사는 거 같지? 다른 사람들도 똑같아. 네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말이야.”

“입, 조심해.”

“열받았나 보지? 평소처럼 실실거리면서 주먹이라도 휘두르지그래?”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처럼 구는 녀석이었다. 언제나 평화롭던 그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 넌 네 손을 더럽히는 건 지독하게 싫어했지. 옆에서 대신 손 더럽혀줄 애들이 없으니까 쫄려?”

언제나 한 걸음 물러나 지켜볼 뿐인 녀석이었다. 지금도 그는 나의 말을 무시하며 관물대에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제 갈 길을 만들어갈 때 넌 10년 전에 비해 한 걸음도 나간 게 없어. 그냥 네 집안에서 받은 이름 석 자로 권력놀이나 하는 애송이일 뿐이니까. 내가 이놈 저놈한테 몸을 대줘? 그래, 그랬다 치자. 근데 그게 뭐? 그걸 네가 왜 그렇게 열을 내고 있는데? 뭐 찔리는 일이라도 있었나 봐? 넌…….”

목이 졸렸다. 갑자기 가해진 충격에, 이미 왕창 망가진 등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수록 반동 때문에 숨이 막혔다.

“크헉! 진짜……!”

코앞에 그의 눈동자가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번쩍이는 눈동자를 똑같이 노려봤다.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나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 옥죄고 있었고, 그의 흰자위로 검은 핏줄들이 먹이를 향해 몰려드는 구렁이처럼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의 안면 근육은 언제든 달려들 듯 움찔거렸고, 손엔 점점 더 많은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정적이 가득한 방 안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산소는 점점 부족해졌고, 눈알은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제발, 좀 닥쳐.”

“쿨럭…… 크윽!”

쪼그라들었던 폐 속으로 공기가 들어차면서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멈추지 않는 기침을 토하며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이를 빠득거리며 눈을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절제력을 잃어가는 녀석은 송곳니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고 목에 검붉은 핏대가 잔뜩 튀어나와 있었다. 녀석의 인내심이 한계점을 향해 달리는 동안 내 입도 끝을 모르고 날뛰었다.

“언제까지고 모두가 네 편일 거라곤 생각하지 마. 다들 네게 등을 돌릴 날이 올 테니까.”

다시금 공격할 줄 알았던 그는 화를 삭이며 수건이나 접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격식을 차리며 청승을 떠는 뒷모습을 봤다. 티를 안 내려고 하고 있지만 흥분할수록 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끔찍하게 퍼지고 있었다.

“으, 라벤더 냄새…….”

그의 주먹질에 관물대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는 금세 정색을 하며 들고 있던 옷을 나에게 집어 던졌다. 한 번에 그의 냄새를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코를 찌르는 향이 퍼졌다. 그는 튀어나온 송곳니만 아니었다면 정말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어?”

“뭐?”

그는 이를 악문 상태로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넌 고작 내 라벤더 향에 질색하지만, 난 너한테 가까워질 때마다 좆같은 향들이 뒤섞여 나서 코가 진동해. 그런데도 넌 그 상태로 자길 잡아먹어달라고 피를 철철 흘리고 다니지. 네 촉? 감? 그동안 네가 그놈들을 찾은 게 아니라 그놈들이 널 찾아온 거야.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나는 피를 먹고 싶어서! 아무리 문신과 테이프로 널 숨겨도, 넌 그냥 다른 사람들 그늘 속에서 썩어갈 거야. 혼자 잘났다고 자맥질이나 하면서 말이야.”

“……그건 너겠지.”

“저놈들이 너한테 달려드는 걸 내 탓이라고 하고 싶어? 마음껏 그래. 넌 평생 그렇게 살 테니까! 남 탓만 죽어라 하면서 말이야.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훈련하면서 자신이 뭐 대단한 인간이라도 된 줄 알았겠지. 편의를 봐주는 부대에서 좋다고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겠고. 그거 알아? 네 편의를 봐주는 게 아니라 그 녀석들은 다 널 그저 재주 부리는 원숭이쯤으로 생각한다는 거?”

“…….”

정적 속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마른입을 움직이며 말했다.

“왜. 노인네들 앞에서 꼭두각시짓 하는 네 모습을 나한테서 보고 있으니 배알이 꼴려?”

재혁은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두피가 뜯겨 나가는 줄 알았다. 고개가 꺾여 입이 절로 벌어지면서도, 악에 받쳐 입을 놀려대는 그를 보니 피식 웃음이 샜다. 감출 필요도 없이 실실 쪼개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걸론 부족해? 더 지껄여줘야 해? 아무리 있어 보이는 척해도 결국 너도 다른 놈들이랑 다를 바 없어. 넌 그걸 알고 있고.”

발악하는 나의 숨소리와 화를 억누르는 듯한 그의 숨소리는 별다를 게 없었다. 서서히 손아귀에서 힘을 풀던 그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그만하자.”

“그만? 난 이제 재미있어지려고 하는데?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이 없는 거겠지. 하고 싶…….”

그가 고개를 푹 숙여오는 덕에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하…….”

그는 살에 닿을 듯 말 듯 입술로 반창고 주위를 지분거렸다. 반창고 하나 사이를 두고 그의 이가 닿았다. 그의 체온을 품은 공기가 상처에 스며들었다. 조금씩 긁어대는 느낌에 아물어가던 상처는 다시금 반창고를 적시며 축축해졌고, 깊게 공기를 빨아 당기는 힘에 솜털이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마른 입술을 할짝대는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미칠 것 같으니까, 그만하자고.”

귓가에 머문 그의 목소리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그가 없어도 방 안은 그의 냄새로 가득했고 머릿속엔 그와 주고받은 말만 맴돌았다. 뭐라도 허무맹랑한 말들을 내뱉고 사라졌으면 좋았을 걸, 무엇 하나 반박할 수 없게 사실들만 내뱉고 간 녀석 때문에 절로 지난날들까지 소환되어 나를 괴롭혔다.

지폐 몇 장에 기뻐하는 여자의 사랑을 받겠다며 조그만 몸으로 자진해서 뱀파이어들을 찾아간 날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 리 없었다. 다만 어떻게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지금까지 거들먹거리는지, 왜 저렇게까지 혐오감을 드러내면서 나를 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농락당한 몸은 여전히 기억을 지우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고, 그런 날들을 견디며 곁에 있길 원했던 여자는 이제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가 됐다. 몸도 마음도 상처받은 건 나인데 왜 저 녀석한테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건지.

“저어…….”

난데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열린 문틈으로 낮부터 달라붙던 여자가 보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는 혈액 팩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슬금슬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주위가 조용한지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한참이나 눈을 굴리고 있던 여자는 한참 동안 입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그…….”

“뭡니까.”

그녀는 운을 떼어주어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큰 눈을 끔벅였다. 밀려오는 두통에 빨리 누워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굴뚝같았다. 건조한 눈을 끔벅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할 말 없으시면, 나가주시겠습니까?”

“죄…… 죄송해요! 엿들으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바깥에 서 있으니까 방음이 하나도 안 되고 또, 주변이 너무 조용하기도 하고…….”

그녀는 들고 있던 혈액 팩을 내밀었다. 횡설수설하는 게 내 정신까지 다 사나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손 위에서 찰랑거리는 피를 그저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저게 고작 뭐라고 이런 난리를 피워야 하는지.

“아, 이거…… 이거 드리러 온 거였어요. 그, 지금 나가신 거 같은데, 그분한테 드리려고 했…… 제, 제가 갖다드릴까요?”

“그냥, 두고 가세요.”

“이거 바로 안 드시면 망가지는…….”

“그냥 두고 가세요.”

내 앞에서도 쩔쩔매면서 무슨 자신감에 이걸 그에게 전해주겠다고 물어보는지. 그의 침대 위에 혈액 팩을 내려놓은 여자는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나가지 않고 자리에 서 있었다.

“저, 사실 오늘 그…… 흡, 혈한 분이 제 파트너였거든요. 제 탓도 있는 것 같아서 사과드리려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힘드셨을…….”

“괜찮으니까, 좀 나가주시겠어요?”

목소리에 절로 힘이 실렸다. 사과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괜한 사람에게 짜증을 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나를 귀찮게 군 것에 비하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잠이 올 리 없었다.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천장을 봤다. 방음이 안 된다는 게 사실인지 정적이 흐르던 방 안에 서서히 사람들의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소리도 지를 만큼 지르고, 짜증도 낼 만큼 냈는데 시원하지 않았다. 풀리지 않는 앙금만 가슴속에서 부글거렸다. 누굴 향한 분노도 아니고, 그가 나에게 한 말들에 열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고작 이런 일에 치졸해진 내가 한심할 뿐이었다.

손에 들린 혈액 팩은 눈치 없이 찰랑거리며 존재를 알렸다. 휙 내던지자 혈액 팩은 맥없이 터져 벽을 더럽혔다. 줄줄 흐르는 피는 그의 침대를 적셨고, 방 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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