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연애만큼은 서로에게 정말 좋을 게 없다고. 반드시 피해야 하는 연애유형이라 생각해온 게 어디의 누구였더라.
막상 해보니 서로 스케줄 맞추기도 편하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얼마나 어떻게 바쁜지 설명 안 해도 알고 있어 나처럼 일일이 말로 풀지 못하는 성격에는 더 딱이었다.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 위로나 응원이 필요한 타이밍도 정확히 알고 있어, 좋은 점이 많았다.
뭐, 사내연애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누구인지의 문제겠지만.
부서는 달라도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두 팀이다 보니 중간중간 메시지로 서로 힘든 점 토로하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거래처 담당자 디스도 하고. 스트레스 해소를 통한 컨디션 유지에도 매우 도움이 됐다.
근데, 다 좋은데 딱 하나.
주변에 비밀이라는 게 문제였다.
[박 대리님이 직속 선배로서의 명령이라는데? 나 미치겠다 진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유명한 게 요릿집으로 저녁 장소를 정하고 은근 기대하면서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5시쯤부터 우동주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메시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주말 내내 집에서 방바닥이나 긁었을 박 대리가 죽어도 오늘 술 한잔해야겠다며 물고 늘어진다는 거다. 선약이 있으니 봐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취소하라며 막무가내란다.
뭐? 직속 선배의 명령? 마음 같아서야 당장 박 대리에게 전화를 걸어 우동주 애인으로서의 명령이니 칼퇴근시키라고 하고 싶었지만, 예민한 내가 공동 작업으로 프로그램 코딩해야 하는 상황도 미리 알고 스트레스받지 말라며 애교 있게 응원해준 우동주인데, 나도 의젓한 연상의 연인으로서 우동주의 사회생활의 고충을 이해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럼 그냥 나 불러서 셋이 마시자고 해.]
[괜찮아요? 피곤하지 않겠어?]
사귀고 나서 첫 출근이고 둘이 오붓하게 저녁 먹을 생각에 좀 들떠 있었는데 왜 김새지 않겠는가. 아무리 사내놈 둘이서 하는 연애라도 나름의 핑크빛 하트는 존재한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프렌치 레스토랑에 가서 칼질, 포크질 하지 않아도 마주 앉아 게 다리 뜯으며 서로 살을 발라주는 것도 우리에겐 로망이 될 수 있었다.
[10시 전에 박 대리 보낼 궁리나 해놔.]
[예썰. 특별 조제 폭탄주로 10시 전에 보내버리겠습니다.]
약속이 망가졌는데도 화가 나기보다 웃음이 났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우리 관계를 상상도 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비밀로 한 채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이마를 맞대는 것도 연애 기분이 나서 꼭 싫지만은 않았다.
10시까지 우동주가 박 대리를 만족스러울 정도로 취하게 해주면, 좀 늦은 시간이긴 해도 둘이서 마주 앉아 대게 네다섯 마리 정도는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로 살도 좀 발라주고, 마지막엔 얼큰한 대게 라면에다 소주도 한 잔씩 걸치면 좋겠지.
게 요리라는 게, 소매 걷어붙이고 양손을 써가며 먹어야 하는 음식인 만큼 연인이 함께 하는 첫 식사로는 그다지 로맨틱하지 못한 메뉴인 건 알지만, 우동주도 나도, 로맨틱한 데이트 기분을 내기 위해 월요일부터 주차할 데도 없는 한남동 골목을 뱅뱅 도는 일 같은 건 생략하자는 데 합의를 본 것이다.
응? 잠깐. 한남동?
한남동에 생각이 닿은 순간, 뭔가가 머릿속에서 팔딱 튀어 올랐다. 친구 이름이라도 되는 것같이 친근하게 불러왔던 어느 외국 배우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날 때처럼, 살 것을 미리 정해두고 마트에 갔는데 뭔가 중요한 항목 하나가 끝까지 생각이 안 날 때처럼 근질근질 답답했다.
그 배우의 이름은 아마 콜린 퍼스 정도일 거고, 빠뜨리고 사지 않은 건 똑 떨어진 치약이겠지. 그럼 지금 내 신경을 살살 긁는 이 찝찝함의 정체는 뭘까?
딸깍딸깍 마우스 버튼을 누르면서 모니터에 의미 없는 드래그를 쳐가며 생각해봐도 튀어 올랐던 힌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자취를 감춰 더 이상 붙잡고 늘어질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에이, 뭐 어때.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닐 텐데. 일상이 무리 없이 돌아가는 걸 보면 치약을 안 산 것도 아니었고, 좋아하는 배우의 최신작을 놓친 것도 아니었다.
퇴근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어제는 다음 날 일에 지장이 가건 어쩌건 우동주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들길래 앞으로의 직장생활이 걱정스러웠는데 괜한 기우였다. 사생활이 즐거우니 오히려 일에 더 집중이 잘됐다. 고3 때 우동주를 만났으면 S대를 갔을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일하다 말고 또 혼자 픽픽 웃었다. 이젠 누가 좋은 일 있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못 할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티 나는 것 같았으니까.
일찍 가봐야 술자리만 더 늘어질 것 같아서 계획보다 30분 정도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마무리를 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손이 빨라지려고 해서 중간중간 의식적으로 딴청을 부려야 했다. 아침에 보고 헤어졌는데도 사석에서 우동주를 만날 것이 기대됐다. 내 걸로 찜해놓고 밖에서 만나는 우동주는 또 색다를 것 같았다.
“선배님, 여깁니다!”
박 대리가 정한 장소는 회사 근처의 연탄 고깃집이었다. 테니스 스웨터에 냄새가 흠뻑 밸 것이 조금 걱정됐지만 인심도 훈훈하고 편안한 분위기라 나도 좋아하는 곳이었다. 가운데 불 들어가는 자리가 뚫린, 드럼통처럼 생긴 둥그런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우동주가 나를 보고 번쩍 손을 들었다.
보니까 좋았다. 좋아서 웃음이 자꾸 나려고 해서 입가에 힘을 줬더니 이상한 표정이 된 것 같았다. 우동주가 박 대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내게 윙크를 했다. 그건 모르는 척했다. 작업질이 몸에 배셨어, 아주.
“야, 주세영하고 껍데기집이라니. 진짜 안 어울리지 않냐?”
벌써 눈 밑이 벌겋게 달아올라 넥타이도 풀어헤친 박 대리는 나를 보자마자 킬킬거렸다. 앉으면서 보니까 둘이서 그새 빈 병을 세 병이나 만들어놨다.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박 대리는 미리 대기시켜놨던 내 몫의 잔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음, 박 대리가 이 상태라면 9시 전에 쫑나는 것도 가능하겠군. 굿 잡, 우동주. 잘했어.
“야, 배부터 좀 채우자.”
“마셔, 마셔. 식전주는 보약이다, 인마.”
근거 없는 낭설을 대며 잔을 쥐여주는 박 대리 때문에 결국 빈속에 싸한 소주 한 잔을 내려보내고서야 재킷을 벗고 편히 앉을 수 있었다. 내 왼쪽에 앉아 있던 우동주가 잽싸게 재킷을 받아다 얌전히 뒤집어 뒤쪽 옷걸이에 잘 걸어주었다. 선배 대접을 해준 건지 애인 대접을 해준 건지는 몰라도 뭐… 기분 괜찮았다.
“껍데기 말고 다른 것 좀 시킬까요? 배고프시죠?”
나하고 같이 샀던 보스의 슈트와 셔츠를 입은 우동주는 재킷만 벗었을 뿐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지도 않았고 넥타이도 바르게 매고 있었다. 바둑판처럼 딱딱 떨어지는 윈도페인 체크셔츠에 네이비 실크 타이를 맨 정중하고 반듯한, 그러면서도 고지식해 보이지 않고 여유가 느껴지는 유쾌한 모습이 완전 내 스타일이다. 정확히는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해왔던, 되고 싶었던 남자의 모습. 하지만 이런 성격으로 그 이상을 달성하긴 글렀으니, 그런 남자를 내 것으로 하는 것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차선책이 될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주세영이 껍데기를 얼마나 잘 먹는데. 얘가 껍데기 귀신이다, 귀신.”
셔츠에 감싸인 우동주의 두툼한 어깨와 팽팽한 팔근육을 잠시 감상하고 있는 사이 박 대리가 소스 찍은 껍데기 두세 장을 내 입 앞에 대령하며 말했다.
음, 내가 껍데기를 좋아하긴 하지. 요게 콜라겐 덩어리라 피부에 엄청 좋거든. 기분 탓인지 다음 날 왠지 탱탱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소스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아서 일단 주는 대로 얼른 받아먹었다. 대체 남자들은 왜 술만 들어가면 살가워지는지. 남자다움에 대한 압박 때문에 평소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건가? 우리 부장님하고 영업부 부장님만 해도 술만 마시면 서로 끌어안고 뺨을 부비고 어떤 때는 뽀뽀까지 하고 난리지만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깍듯이 존대하며 내외를 하신다. 박 대리 역시 평소엔 안 하던 짓을 하는 걸 보니 술이 알딸딸하게 오른 게 확실했다.
“놀랍지 않냐? 이 얼굴로 껍데기 귀신이라니. 순대도 안 먹게 생겼는데 말이야. 머리에 기름을 바르질 않나, 매일같이 뭔 연예인처럼 반지르르하게 차려입고…. 난 주세영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완전 게이인 줄 알았잖냐.”
흥이 오른 박 대리는 내 어깨를 툭툭 쳐가면서 호탕하게 웃었지만 우동주와 나는 어설프게 웃는 시늉만 했다. 박 대리를 처음 봤을 때의 나는 분명 게이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그렇다고 할 수 있었으므로.
“근데 아니지. 우리 주세영이 생긴 건 요렇게 까탈스러워 보여도 또 겪어보면 그게 다가 아니거든. 우동주 너도 같이 출장 다녀봐서 알지? 의외로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자더라고. 일할 때 조금 예민하긴 하지만 그게 또 우리 주세영만의 매력 아니겠어요?”
박 대리는 여섯 살 조카 우쭈쭈 해주듯이 손가락으로 내 턱 밑을 간질이면서 웃었다. 쟁반에 담긴 껍데기를 불판 위로 옮겨 놓던 우동주의 눈매가 잠깐 딱딱하게 굳었다. 야야, 이런 거에까지 질투하고 그러진 마라. 박 대리는 남자고, 난 너 말고 딴 남자는 진짜 됐거든?
“세영 선배만의 매력이야 저도 자알― 알고 있죠.”
껍데기 구우랴 박 대리의 빈 잔 채워주랴 바쁜 신입은 ‘자알’에 유난히 힘을 실어 발음하면서 내 쪽을 쓱 훑어보다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은근 화끈하시잖아요.”
요런 게 사내연애의 매력이라 이거지? 남들이 볼 땐 별 의미 없는 가벼운 대화 같아도 우리 둘에겐 아슬아슬한 밀어가 따로 없었다. 어쩌면 오늘 데이트를 박 대리 때문에 망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진짜 희생양은 우리가 아니라 박 대리일지도.
우동주가 말랑말랑 잘 익은 껍데기를 내 앞접시에 덜어주면 열심히 집어 먹었다. 잘난 애인이 정성을 담아 구워줘서 그런지 평소보다 입에 짝짝 붙는 게 내일이면 피부가 탱탱하게 차올라 또 한 살 회춘할 것 같았다.
“근데 너는, 인마, 주세영은 왜 세영 선배고 나는 박 대리님이냐? 거리감 느끼게. 나도 성훈 선배라고 해.”
“에이, 그건 아니죠. 그래도 직속 선배님이신데.”
껍데기가 눌어붙지 않게 뒤집으면서 우동주는 천연덕스럽게 박 대리의 말을 받아쳤다. 속을 다 알고 이놈을 보고 있으니 구렁이도 이런 능구렁이가 없다.
“아, 그게 또 그런가?”
직속 선배 대우해준다는 말에 금세 헬렐레해진 박 대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사회 초년생 주제에 사람 대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처음엔 그저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은 호쾌한 청년인 줄 알고 방심했다가 당한 걸 생각하면….
근데 그것도 다 좋아해서 괴롭히고 싶은 심리였다 이거지? 하긴 아무리 요령이 좋다고는 해도 사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는 악취미를 가진 놈은 아니었다. 본질이 그런 놈이었으면 좋아질 리도 없었고.
넉살 좋고 시원시원하고 술도 잘하는 타고난 영업 체질이지만, 그렇다고 입만 살아서 손바닥만 비비는 살살이는 절대 아니었다. 일에도 의욕적이고 몸으로 직접 움직여 결과를 보여주는 타입이니 앞으로 저절로 신용이 따라붙게 되겠지. 그리고 우직하고 진실돼 보이는 인상도 한몫 도와줄 거고. 같은 남자로서 또 회사 선배로서 미래가 기대되기도 하고 자극을 받기도 한다.
부모가 부자이거나 아니거나 그런 건 상관없지만 부모 재산 믿고 일을 놀이 취급하는 놈이었으면 정나미가 떨어졌을 거다. 하지만 우동주는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제대로 일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내가 교육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고, 함께 출장을 가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도 잘 알았다. 그리고 아마 난 그런 점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됐던 것 같다.
우동주는 보고 싶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더 있다 가라며 억지를 쓰기도 하지만 그건 우동주 방식의 애정표현일 뿐 정말 생각과 마음이 어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생각과 마음이 어린 놈이 그랬으면 그저 귀찮게 느껴졌겠지.
하지만 우동주는 분명 남은 내 인생을 배팅해도 좋을 만큼 믿음이 가는 놈이었다. 서른한 살에 날 게이로 만든 놈인데 그 정도가 아니면 곤란했고.
“근데 네 여자친구는 잘 있냐?”
오늘 돌았던 거래처의 누구 씨 흉내를 내면서 낄낄거리던 박 대리의 화살이 갑자기 나를 향했다. 속으로 한참 팔불출 짓을 하고 있던 나는 뜨끔해서 우동주 눈치를 살폈다.
“그냥 그렇지 뭐.”
비워놓은 내 앞접시에 새로 껍데기를 채워주던 우동주의 집게가 잠깐 멈칫했다. 그러지 마라, 우동주야. 우리 우동주는 여유를 갖춘 진짜 잘난 놈이니까 내가 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지 다 이해할 거야. 그치? ‘당신하고 사귀는 건 난데 왜 사람들 앞에서 그걸 숨겨야 돼?’ 같은 융통성 없는 멘트로 날 힘들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치? 난 네가 말이 통하는 놈이라 참 좋더라.
“서른한 살에 대학생하고 사귀면서, 그냥 그렇지 뭐? 에라, 이 도둑놈아. 야, 우동주. 너 주세영 얼굴만 보고 여자도 없이 맨날 혼자 백화점이나 들락거릴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얘가 완전 연하 킬러야, 킬러. 인정하긴 싫지만 연애는 나보다 한 수 위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월급쟁이 신분으로 대학생을 만나냐? 얘나 나나 연봉도 비슷한데 말이야. 나도 너처럼 이런 거 입고 다니면 되냐?”
이젠 알딸딸을 넘어 슬슬 혀가 꼬이기 시작한 박 대리는 내 테니스 스웨터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여자친구가 없는 억울함을 엉뚱한 곳에 화풀이했다.
글쎄, 잘은 모르겠다만 꼭 네가 테니스 스웨터를 입지 않아서 여자친구가 없는 것 같진 않다. 그리고 꼭 내 현재 애인 앞에서 과거 얘기를 그렇게 막 들춰야 되겠냐? 그것도 마구 부풀려진 과거를? 내가 언제부터 연하 킬러였냐? 남의 얘기라고 진짜 막 과장하지 좀 말자.
“아… 세영 선배가 연하 킬러였구나. 그럼 세 살 정도는 연하로 느껴지지도 않겠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쪽을 보며 웃는 우동주의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짜식, 비꼬긴. 심기 불편해지셨네. 박 대리가 킬러 어쩌고 얘기만 안 꺼냈어도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젠장.
“세 살? 그건 주세영한테 동갑이나 마찬가지지. 지금 사귀는 애가 몇 살인데.”
바지춤을 추키며 일어난 박 대리는 우동주를 향해 혀를 끌끌 차더니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찾아갔다. 꼭 이런 폭탄을 던져놓고 화장실 가더라. 무책임한 놈.
“화났냐?”
박 대리가 카운터에서 화장실 열쇠를 받아 문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나는 우동주의 허벅지를 콕콕 찌르면서, 큰일로 번지기 전에 미리미리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나름 애교를 시도해봤다.
“뭐가. 여자친구하고 헤어졌다고 말 안 한 거, 아니면 당신이 연하 킬러인 거?”
그런데도 이놈은 껍데기만 뒤집으면서 날 쳐다보지도 않는다. 말로는 내가 불리하다. 저쪽은 영업부의 떠오르는 샛별이고 이쪽은 컴퓨터 오타쿠 취급받는 개발부 프로그래머니까 절대적으로 말싸움은 불리하다.
“여자친구 있는 걸로 해두면 편하잖아. 누구처럼 엉뚱한 데서 넥타이 받아 올 일도 없고.”
“오늘 내내 외근하다 바로 퇴근해서 시간이 없어서 못 준 거지, 내일 바로 돌려줄 거거든?”
발끈해서 툴툴거리는 걸 보니 자기도 알긴 아는 모양이다. 여기서 진심으로 화냈다가는 진짜 유치해진다는 걸. 아, 귀여운 것. 어쩌면 난 연하 킬러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지금까진 가벼운 만남을 원하는 상대를 찾다보니 그 대상이 주로 연하가 됐던 거지 연하라는 자체가 연애의 이유가 됐던 게 아니었는데, 우동주는 정말 KILL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화 안 났지?”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를 우동주 쪽으로 좀 더 끌어 앉으며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고 살짝 흔들어봤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튕겨져 나갈 것처럼 단단한 촉감에 저 깊은 곳에서 뭔가 신호가 왔다.
“비겁자.”
내가 너한테 무슨 수로 이기냐, 라는 얼굴로 또 열심히 껍데기를 뒤집어 내 접시에 덜어주는 우동주. 너 왜 이렇게 귀엽냐? 네가 그렇게 귀여우니까 형아가 당장이라도 네 그 딴딴한 허벅지 위에 뛰어올라 뜨거운 키스를 막 퍼부어주고 싶잖냐.
“이따 우리 집 갈래?”
퉁퉁 부은 얼굴로 괜한 껍데기만 뒤집고 또 뒤집던 우동주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나를 향했다. 딴 건 몰라도 이건 이놈한테도 꽤 솔깃한 제안이었나 보다. 잠깐 내 테니스 스웨터의 네크라인을 쳐다본 우동주는 다시 불판 위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자고 갈 거야.”
내 대답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이상하게 가슴이 들떴다. 가끔씩 이렇게 확 틀어쥐고 긴장감을 조성할 때가 있단 말이지. 대답이 필요 없어 보이길래 나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벌게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온 박 대리에게 우동주는 좀 전과는 전혀 딴판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선배님, 폭탄 말까요?”
“아이, 좋지 좋지. 역시 이 새끼 뭘 좀 안다니까.”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우동주는 정말 뭘 좀 아는 놈이다.
여러 가지로.
□ WOO DONG ZOO
열심히 공부해서 꼭 쾌감으로 울게 해주겠다는 그 사람과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거기에서 한 겹의 예의를 벗겨내고 말하자면, 완벽한 라인을 그리는 그 사람의 아름다운 엉덩이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 사람과 제대로 이어지고 싶은 내 욕망의 해소를 위해.
어젯밤 눈에 핏줄이 벌겋게 설 때까지 공부에 매달린 결과, 각종 영상, 이런저런 체험 수기, 실전에 도움을 준다는 여러 기구들이 온종일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사실 영상은 그리 큰 공부가 안 됐다. 옷을 홀딱 벗고 과도하게 헐떡거리는 영상 속의 남자들보다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넥타이를 맨 주세영 쪽이 훨씬 야하고 섹시했으니까).
이제까지의 섹스 라이프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그야말로 신세계와의 조우였다. 남자끼리의 섹스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나의 지식은 없느니만 못한 막연하고 위험한 추측이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설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제 새벽까지 열공하다가 잤다? 아마 당신, 조만간 나한테 장학금 줘야 될걸?”
아침에 출근 전 피트니스 클럽에서 먼저 만났을 때, 아무도 없는 라커룸에서 굳이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난 그렇게 속삭였고, 그 사람은 흑심이 잔뜩 깃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주세영도 어젯밤에 게이 동영상 찾아봤다는 거에 내 그랜드 체로키를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주세영도 어젯밤에 게이 동영상을 찾아봤으리라는 나의 의혹은 퇴근 후의 술자리에서 거의 확신이 되었다.
“화 안 났지?”
박 대리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허벅지 위로 미끄러지는 손놀림이 어찌나 은밀한지 그 사람의 손바닥이 팬츠를 무시하고 내 맨살에 그대로 닿아오는 것 같이 짜릿했다. 그랜드 체로키 걸고 거기에 내 빌라까지 얹어도 될 것 같았다. 주세영, 책임질 각오도 없이 남자 허벅지에 손을 대진 않았겠지. 그래서, 당신은 어제 뭐 봤는데?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얘기를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잠깐 섭섭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와 사귄다는 얘기를 할 수도 없는 건데, 그걸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었다. 그 사람 말대로 여자친구가 있는 줄 알면 귀찮은 상황이 생길 일도 줄어들 테고. 그 사람이야 내가 받아온 넥타이에 대해서 귀여운 정도의 질투로 끝내줬지만 상황이 뒤바뀌면 내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지금으로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박 대리님이 줄줄이 읊어준 그 사람의 여성 편력을 곧이곧대로 믿고 토라질 정도로 꽉 막힌 놈도 아니었다. 듣기로 거의 3년 동안 연애를 못 하고 계시다니, 박 대리님 입장에서는 주세영이 부럽기도 했겠지. 술이 들어가서 얘기가 좀 부풀려진 것도 있을 거고. 그래도 제3자의 입으로 과거까지 들었는데 너무 질투가 없어도 섭섭하니까 애인된 도리로 조금 삐친 척을 해봤는데, 안 그랬으면 억울할 뻔했다.
기분 풀어준다고 허벅지 주물러주는 서비스라니. 이게 유혹이 아니면 대체 뭐가 유혹이냐.
“비겁자.”
라고 말했지만, 비난이기보다는 오히려 만족감의 표현이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이겨먹겠습니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쌀쌀맞아 보이다가도 침대에서는 화끈하게 일 쳐주시는 은혜로움. 그것도 모자라 자기가 불리해진 것 같으니 살짝 접고 들어와주는 고난이도 기술까지 선보여주시니 비겁자라는 찬양(?)을 받아 마땅했다. 당근과 채찍 전술에 있어 주세영은 독보적이었다. 채찍에서 당근으로 갈아타는 타이밍이 절묘하고 아찔해 거의 곡예 수준이다.
“이따 우리 집 갈래?”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주세영의 입술에서 나오는 ‘우리 집’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화목하고 즐거운 우리 집’의 그 우리 집과는 전혀 다른 집이었다. 게다가 리을이 앞뒤로 두 번 겹치면서 혀끝이 윗니의 뒤쪽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갈래?’의 어감에 나는 당장이라도 내 재킷과 주세영의 재킷을 챙겨 튀어나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주세영이 허벅지를 문지르면서 ‘우리 집 갈래?’ 하는데도 일단은 엉덩이 붙이고 앉아 껍데기나 뒤집고 있어야 하는 현실이라니. 화장실 간 박 대리님을 그대로 거기 가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의젓하게 잘 참는데, 어디가 열여덟이라는 거야? 열여덟이었으면, 당신하고 나, 지금 뭐 하고 있었을까.
껍데기 뒤집던 손을 멈추고 주세영을 시선으로 꾹 누르듯이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허름한 껍데기집 드럼통 테이블 앞에 앉은 단정한 테니스 스웨터의 묘한 조화. 대체 어떤 헤어제품을 쓰는지 몰라도 반듯하게 고정되어 있는데도 떡지지 않고 촉촉해 보이는 머리카락. 손가락을 얽으면 쩍쩍 갈라지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의 촉감. 나와 같은 성별인데도 왜 이렇게 신비로워요?
“자고 갈 거야.”
이미 주세영의 유혹에 완전히 홀려 흐물흐물해진 속을 숨기고 통보하듯 말했다. 예감이 좋았다. 주세영은 뭔가를 각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게 어젯밤 성인용품 사이트에서 봤던 스토퍼 1호든 히팅 미사일이든, 아니면… 내 손가락이든 혹은 혀든.
평소라면 건방지다고 볼이나 코 한 번쯤 꼬집었을 법한 나의 경고에도 별다른 대답 없이 앞접시에 덜어준 껍데기만 집어 먹는 입술도 예뻐 미치겠다. 때로 오케이를 뜻하기도 하는 주세영의 침묵. 반들반들 기름이 묻은 것까지도 섹시하고 난리다.
애들처럼 만세를 부르게 하고 저 얌전한 스웨터를 벗겨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바짝 붙어 서서 콧김을 뿜으며 셔츠 단추를 따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내 허리만 만지작거리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도 벨트 버클을 풀겠다고 덤빌까. 예측불허의 주세영을 예측해 보는 건 혹시 결과와 어긋나더라도 늘 즐겁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비겁자’니까.
주세영이 보여줄 결과가 궁금한 만큼 열심히 폭탄주를 말았다. 물처럼 술술 넘어가면서도 효과는 확실한 나만의 폭탄주 제조법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보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빨리 취하고 싶을 때, 메이드 바이 우동주의 폭탄주만 한 게 없다는 평이다. 오늘은 특히나 목적의식이 뚜렷했기 때문에 더욱 혼신을 다해 제조했다. 먹어본 폭탄주 중에 목넘김이 제일 부드럽다며 정말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쭉쭉 들이켜던 박 대리님은 목표 시간인 10시가 되기도 전에 넉넉히 취해 아무래도 집에 가야 할 것 같다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죄송한 생각이 조금 들긴 했지만 원래 세상이 그렇다. 별로 나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불려 나갔다가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 거짓말해본 경험은 누구나 한두 번씩은 있을 것이다. 그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난 원래 박 대리님을 좋아한다. 나이에 비해 영업 경험도 풍부하고 실력도 뛰어나 배울 점이 많은 선배다. 선배랍시고 진심으로 거들먹거리는 것도 없고 얘기도 잘 통했다. 다만 오늘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을 뿐.
우린 엄연히 연애 초기의 커플이다. 그것도 속 시원히 ‘우리 커플입니다’ 공언할 수 없어서 더 애가 타는 사내 커플. 사내 남남 커플. 그러니 이 정도 전략쯤은 귀엽게 봐주시길.
선배님, 택시 잡아 태워드리고 기사 아저씨에게 팁까지 넉넉히 얹어 차비 챙겨드렸으니 절 너무 욕하지 마세요. 그래도 제가 이야기 열심히 들어드렸잖아요. 장단 맞춰드린다고 폭탄주도 열대여섯 잔 마셨구요. 거래처 최 과장님 흉내에 몇 번이나 웃어드렸는지 아십니까? 심지어 하나도 안 똑같은데. 앞으로도 수백 번 웃어드릴 테니 부디 무사 귀가하십시오. 그리고 웬만하면 빨리 연애하세요. 모두를 위해.
택시를 출발시키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학생처럼 스마트하게 차려입은 주세영이 가방을 들고 얌전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9시 33분. 조잡한 네온사인이 깜빡거리는 늦은 저녁의 거리를 배경으로 서 있는 그 사람이 쓸쓸해 보여 마음이 아팠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쓸쓸함을 위로해줄 수 있는 어엿한 연인이 되었다니. 없는 쓸쓸함이라도 만들어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잘생기고 능력 있는 데다가 곧 뜨거운 학구열로 S대에 수석 입학할 연하의 애인이 생겨서 그런지, 오늘의 주세영은 그때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의 머리끈을 풀고 다니며 괴롭힐 때도 한 번도 거기에 편승해본 적이 없던 나인데. 테니스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고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사람을 보는데, 왠지 그때 그놈들의 그 유치한 방식의 애정표현이 뒤늦게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왜.”
가방을 들지 않은 손을 팬츠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쳐다보는데, 그 시선이 쑥스러웠는지 주세영은 퉁명스러운 척 물었다.
“머리끈 풀어보고 싶어서요.”
당신이 걱정돼서 이 길 건너편에 택시를 세워놓고 지켜봤던 나를 알면, 당신은 웬 스토커냐며 질려 할까 아니면 나 모르게 속으로 기뻐할까. 갑자기 웬 머리끈 얘기냐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해하는 그 사람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행복해서 웃음이 났다. 아마 주세영도 초등학교 때 좋아하는 여자애의 머리끈을 잡아당기는 타입은 아니었나 보다.
“빨리 가요, 나 급해.”
“뭐가.”
“에이, 또 자기는 아닌 척한다.”
주세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컴컴한 고층빌딩들 사이의 골목은 을씨년스러웠지만 은근슬쩍 손을 잡을 수 있어 비밀 커플인 우리에겐 딱이었다. 아직 3월 초지만 바람이 많이 부드러워진 게 느껴졌다. 쌀쌀한 와중에도 문득문득 상냥함이 느껴지는 게 꼭 우리 주세영 같네. 이제 겨울은 완전히 지나간 것이다.
내 팔이 떨어지더라도 가방을 들어주고 싶고, 아무도 안 보는 골목에서는 업어주고도 싶었다. 야하고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뒤엉켜 킥킥거리고 싶고, 서로의 몸에 아이스크림이나 포도알을 문지르고 싶기도 했다. 둘만 있을 땐 마구 유치해지고 싶었다.
성적인 면으로 따지자면 나는 한창 성숙해지고 있는 시기였다. 적은 자극에도 쉽게 흥분해 오직 사정을 향해 직진하던 20대 초반을 지나, 힘과 테크닉을 과시하는 것에 치중했던 20대 중반을 지나, 상대와 교감하면서 천천히 진득하게 하나로 섞여 들어가는 과정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한 상대와 그다지 긴 연애를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충만한 섹스를 즐길 기회는 별로 없었다.
섹스는 아주 섬세한 대화였고, 상대의 눈빛의 변화와 가슴이 들썩거리는 속도와 손가락이 내 몸을 쓰다듬는 촉감만으로도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런 교감은 짧은 시간에 아무하고나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이해한다. 하지만 주세영과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가능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집에 콘돔 있어요?”
마주 잡은 손을 앞뒤로 슬쩍슬쩍 흔들기도 하면서 박 대리님 얘기로 같이 웃다가 오피스텔이 가까워져 주변이 가로등과 상점의 간판 불빛으로 환해졌을 때쯤 손을 놔줬다. 불쑥 튀어나온 콘돔이라는 단어에 그 사람은 잠깐 흠칫했지만, ‘그게 왜 필요한데?’ 같은 씨알도 안 먹힐 내숭을 떨진 않았다.
“없을걸?”
“편의점에서 사 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요.”
그 사람은 조금 부끄러운 듯 아니면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면서 편의점 앞에 나를 세워두고 오피스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장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무턱대고 찾아와 그 사람을 껴안았다가 그대로 쫓겨 나왔던 오피스텔에 지금은 연인 자격으로 다시 찾아와 그 사람과 사용할 콘돔을 사려 하고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며칠 사이 달라진 상황이었다. 돌아서는 그 사람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옷, 벗지 말고 기다려요.”
막상 말로 뱉고 나니 옷 벗고 기다리라는 말보다 어째 더 변태처럼 들리네. 이게 아닌데.
“나가 죽어라.”
그 사람이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밀어버리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그 스웨터는 꼭 내가 벗겨보고 싶었다고.
불을 훤하게 밝힌 편의점에서 콘돔과 러브젤, 베이비오일까지 골랐다. 러브젤이라는 건 남녀 관계를 위해 만들어진 거라 우리 사이엔 별 효과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멀쩡하게 생긴 놈이 음료수 한 캔, 과자 한 봉지 섞지도 않고 목적이 뻔한 것들만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고 씩 웃자 알바생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럴 땐 내 얼굴이 좀 싫다. 길바닥에 아이스크림 봉지 한 번 버려본 적 없을 것 같고, 무거운 짐 든 할머니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 같은 얼굴. 어이, 청년. 나 그런 사람 맞아. 가끔씩 담배꽁초는 슬쩍 버릴 때도 있지만, 내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그 외 쓰레기는 버려본 적 없다고. 근데 길바닥에 아이스크림 봉지 한 번 버려본 적 없는 놈도 섹스는 하고 살거든?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우리 이런 걸로 껄끄러워지지 맙시다.
러브젤은 물론이고 사실 콘돔을 편의점에서 사본 적도 없었다. 항상 약국에서 미리 준비해둔 콘돔을 사용했기 때문에. 근데 오늘은 편의점에서 파는 콘돔에, 러브젤에, 베이비에게 발라줄 게 아닌 베이비오일을 사 가지고 나오면서도 전혀 뒤가 찜찜하지 않다. 오히려 아이스크림과 치킨을 양손에 들고 퇴근하는 가정적인 아빠라도 된 기분이었다.
비닐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 딱 9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가 한 대 있길래, 뻔히 1층에 멈춰 있는 놈들을 놔두고 굳이 그놈을 불러 내렸다. 우리 주세영이 타고 올라간 걸 나도 타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거울 속의 나는 눈이 약간 충혈되긴 했지만 전혀 피곤해 보이지도 졸려 보이지도 않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복도를 걷는 구두 소리가 의미심장하다. 등이 곧게 펴지고 어깨가 저절로 벌어졌다. 정확하게 검지를 바짝 세워 당당하게 벨을 눌렀다. 그 사람이 현관으로 나오는 인기척이 문 너머로 느껴지고 도어록이 열린다.
나가 죽으라며 핀잔을 주더니, 재킷만 벗고 스웨터는 그대로 입고 있는 주세영이 문틈으로 보이는 순간,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눈이 마주치고, 눈빛에도 혀가 있는 듯 꼬아놓은 새끼줄처럼 서로 얽히고, 등 뒤에서 도어록이 자동으로 잠기고, 나는 구두를 벗고 복도에 올라섰다. 애인의 자격으로 이 집에 들어서니 의기양양했다. 집요하고 짓궂고 유치한 본능이 끓어올랐다. 눈빛의 긴장을 견디지 못한 그 사람이 먼저 등을 보였다.
묵직한 가죽가방과 나풀거리는 비닐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곧이어 스웨터를 입은 등이 벽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청바지를 입은 그 사람의 다리 사이로 내 허벅지가 비집고 들어간다. 하체가 밀착되고, 코끝이 닿을락 말락 입술이 스칠락 말락,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호흡은 주기적이지 못하고 들쑥날쑥 벅차다. 주세영이 눈앞의 내 코와 입술을 노골적인 눈빛으로 훑는다.
“같이 샤워하자.”
입술을 비켜 귓가와 뺨이 이어지는 부분에 입을 맞추면서 목소리를 죽였다. 누구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 이상 볼륨을 키웠다간 뭔가가 박살날 것 같았다. 아침부터 나의 엉큼한 상상을 부추겼던 스웨터 안으로 드디어 손을 넣었다.
손바닥에 빳빳한 질감의 셔츠가 닿고, 포근한 스웨터가 손등을 쓸고 말려 올라간다. 살살 달래듯 등을 어루만지면서 스웨터를 밀어 올리는 내 손길에 그 사람의 목과 어깨 주변이 뻣뻣해진다. 내 어깨에 가벼운 이마가 툭 얹어졌다. 셔츠 깃 사이로 깨끗한 뒷덜미가 드러났다. 손을 밀어 넣거나 이를 세워 물고 싶은 살결이었다.
등에서 옆구리로 가슴으로 손을 옮겨 겨드랑이 바로 아래까지 스웨터를 밀어 올렸다. 셔츠 아래로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는 단단한 가슴이 느껴진다. 스웨터 안에서 더듬더듬 근육의 윤곽을 짚어나갔다. 그 사람이 어깨를 움찔거릴 때마다 손바닥 아래에서 근육이 수축하고 팽창했다. 고개를 깊숙이 숙여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댄 그 사람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만세. 응?”
“이게 어디서….”
가볍게 주먹으로 아랫배를 한 대 얻어맞았지만, 그 사람이 픽 웃으면서 어느 정도 긴장을 풀었으니 그걸로 좋았다.
“왜. 머리끈 대신 한번 해줘.”
“아까부터 웬… 머리끈 타령….”
그 사람을 벽 속에 밀어 넣을 기세로 하체를 바짝 밀착시키면서 가슴과 등을 넓게 애무했다. 아랫입술로 귀 아래부터 관자놀이까지 진하게 훑어 올리자 주세영은 마침내 항복했다. 겨드랑이까지 스웨터를 말아 올린 채 내 가슴과 벽 사이에 짓눌려 두 팔을 들어 올린 주세영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벌을 받고 있는 착한 학생 같아서 내 안의 못된 스위치에 불이 들어올 것 같았다.
뒤집어진 스웨터가 그 사람의 작은 머리에서 쑥 빠져나왔다.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흐트러지면서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이렇게 머리카락만 흐트러져도 몇 살은 더 어려 보인단 말이지. 누가 봐도 내가 형 같잖아? 주세영처럼 까칠하고 자존심 강한 애가 형이라고 불러주면 어떤 기분일까. 주세영을 만난 뒤로 상상력만큼은 확실히 풍부해지고 있었다. 야한 쪽으로만 발달하는 망상력에 가까워서 그렇지.
스웨터를 벗기면서 같이 끌려 나온 셔츠 한 자락이 입술 밖으로 내밀어진 혀처럼 도발적이다. 키스에 환장한 놈처럼 주세영의 입술 안으로 거칠게 파고들어 혀를 찾았다.
수년간 익혀온 매너를 어디다 팔아먹어버린 우동주세영은 껍데기를 먹은 것쯤 개의치 않고 서로의 혀에 매달렸다. 서로의 등과 어깨와 허리와 엉덩이를 쥐어뜯듯이 애무하는 거친 손길에는 예의가 없었다. 거의 섹스를 하는 듯 혀와 혀가 리얼하게 질척거리는 소리와 우리의 셔츠가 격하게 쓸리는 소리에 점점 엔진에 열이 올랐다.
주세영이 어떤 신호탄처럼 미련 없이 내 넥타이 매듭을 끌어내렸다. 주세영을 들쳐 안고 이 자리에서 단번에 삽입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자기 옷을 벗듯이 능숙하고 재빠르게 우리는 상대의 옷을 벗겨나갔다. 버튼을 따주면 소매를 털어 셔츠를 벗고, 버클을 벗기고 지퍼를 내려주면 발바닥으로 종아리를 문질러 바지를 벗어내는 식이었다.
“윽.”
샤워실이 바로 등 뒤에 있는데도 나는 그새를 못 참고 그 사람에게 덤벼들어 브리프 위로 불거진 페니스에 손을 댔다. 막 부풀기 시작한 페니스에 자극을 받은 그 사람은 뒤통수를 벽에 문지르면서 몸을 뒤틀었다. 뭍으로 끌려 나온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 내 손 안에서 꿈틀거리면서 이리저리 비껴 나간다.
이 감촉은 정말 안 만져본 사람은 모른다. 겨드랑이 아래가 찌릿찌릿하면서 저절로 고개가 꺾어지고 눈이 가늘어지는 촉감이었다. 그 사람의 내리뜬 눈이 현관 센서의 불빛에 그늘졌다. 그 안에서 호기심과 욕망이 뒤엉킨 눈동자가 내 손의 움직임을 좇는다.
“샤워… 하자며.”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조물거리다가 손바닥으로 휘감았다가 고환에서부터 쓰윽 훑어 올렸다가, 속옷 위로 페니스를 자극하는 내 손길에 그 사람의 목소리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한 번 뚝 꺾어졌다.
“할 거야.”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다른 한 손을 브리프 안의 엉덩이로 미끄러뜨렸다. 근육이 예쁘게 모아진 빵빵한 골 사이로 손날을 세워 넣었다. 근육과 살집이 적절히 어우러진 탄력이 나를 압박해왔다. 여기 어디쯤에 주세영은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애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당장 사정할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주세영의 엉덩이를 한 움큼 쥐어짰다.
“이러면서… 언제.”
내 어깨를 붙잡으면서 허리를 살짝 비튼 주세영이 엉덩이 근육에 힘을 줘 내 손을 꽉 물었다. 아, 가끔 진짜 사람 돌게 한다니까.
“지금.”
그 사람의 브리프를 단번에 끌어내리면서 주저앉았다. 그 사람이 브리프 안에서 발을 꺼냈고, 나는 앉은 김에 양말도 벗겨주었다. 내던진 브리프와 양말이 어딘가에 나동그라졌다. 앉은 자세로 올려다보니 반쯤 일어선 페니스와, 결대로 누운 윤기 나는 음모와, 마른 뱃가죽에 찰싹 달라붙은 복근과, 판판한 가슴 근육에 그림자가 내려앉은 각도가 그야말로 천하절경이다. 옷은 뭐하러 그렇게 신경 써서 입고 다녀? 다 벗고 있는 게 제일 예쁜데.
나 역시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그 사람의 손을 끌고 욕실로 쳐들어갔다. 어찌나 공격적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지 거짓말 조금 보태 오피스텔이 다 울릴 정도였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다지 넓다고 할 수 없는 욕실 한쪽의 샤워부스 안으로 그 사람을 거의 욱여넣었다. 문을 닫고 뒤따라 들어가 곧바로 달려들지 않고 잠시 어깨를 크게 들썩여 숨을 고르며 그 사람을 보고만 있었다.
우리 사이, 1m도 채 안 되는 이 거리의 압력에 몸이 터질 것 같았다. 발기한 페니스를 앞세우고 타일벽에 붙어선 알몸의 주세영은 아주 손쉽게 나를 미친놈으로 만들 것 같아 두려웠다.
주세영이 왼팔을 뻗어 샤워기 레버를 돌렸다.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매달린 레인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넓게 퍼져 흐른다. 주세영은 기어코 나를 미친놈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 ZOO SE YOUNG
둘이서 손잡고 으슥한 곳만 골라 집으로 오는 길에는, 누가 보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보든 말든 어때 하는 배짱이 공존했다. 후자 쪽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지만.
“집에 콘돔 있어요?”
우동주의 입에서 나온 콘돔이라는 단어는 덤덤하고 담백했다. 주변을 둘러보거나 목소리를 낮추거나 했다면 오히려 그러려니 했을 텐데, 집에 여분의 칫솔이 있냐고 묻는 것처럼 콘돔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니 그게 더 튀게 느껴졌다.
“없을걸?”
“편의점에서 사 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 있어요.”
편의점 내부와 간판에서 쏟아지는 환한 백색 조명을 받으면서 밤거리에 서 있는 우동주에게서 나는 새삼스럽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듬직한 체격도, 그 몸을 유연하게 감싸고 흐르는 슈트도, 왼쪽 손목에 찬 묵직한 시계도, 시원시원하고 반듯한 약간은 이국적인 잘생긴 얼굴도. 예전 같았으면 그저 같은 남자로서 열등감의 대상이었겠지만, 지금은 이런 훈훈한 놈이 내 거라고 생각하니 내가 그런 남자가 된 것보다도 더 짜릿한 느낌이었다.
“옷, 벗지 말고 기다려요.”
장난기도 없이 진지한 얼굴과 어조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꺼낸 건 우동주인데, 내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럼 뭐, 내가 옷 다 벗고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을 줄 알았냐? 이런 면이 널 참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우동주야.
“나가 죽어라.”
초인종을 눌렀을 때 다 벗은 몸으로 문을 열어주면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순간적으로 주세영답지 않은 과감한 장난기가 솟기도 했지만, 아직 그만한 배짱은 없었다. 블레이저만 벗어 냄새가 빠지도록 옷걸이에 걸어두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오늘, 어디까지 하려는 걸까.
아침에 공부 열심히 했다며 의기양양해하던데, 그럼 오늘 끝까지 진도 빼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고.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같이 공부하자고 할걸. 각자 따로따로 공부를 하니 어디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복도에 하나씩 발자국을 새겨 넣듯 또박또박 바른 걸음 소리가 들리고 나는 담배를 껐다. 우리 집 앞에서 발소리가 멈추고 벨이 울렸다. 벨이 울릴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튕기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난 목요일, 무작정 집으로 쳐들어왔던 우동주가 생각났다. 괴로운 얼굴로 내게 진심을 토로하고, 나를 등 뒤에서 껴안고, 그리고 기어이 내 안의 상자를 덮은 가리개를 열어 젖혀 거기 든 것을 확인하게 했던 날.
그날로부터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우동주는 내 연인이 되어 이 오피스텔의 벨을 누르고 있었다.
평소엔 실없는 소리로 잘만 떠드는 놈이 문틈 사이로 나를 보면서 웃기만 했다. 편의점에 갔더니 점원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 그런 얘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말없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 구두를 벗는다. 나의 매일이 이어지는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공간 안에 연인으로서의 우동주가 들어서고 있었다. 주말에 우동주가 왜 그렇게 집에 가지 말라며 매달렸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가방과 비닐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나는 양쪽 팔이 붙잡힌 채 벽에 몰아세워졌다. 아플 정도로 강한 힘도 아니었지만 부서질까 조심스러운 힘도 아니었다. 청바지를 입은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우동주의 허벅지에 페니스가 짓눌렸다. 페니스가 달려 있다는 건 참 번거로운 일이다. 흥분하면 바로 반응이 와버리니 아닌 척할 수가 없다.
“같이 샤워하자.”
귓가에 입술을 문질거리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서는, 평소의 장난기를 찾을 수 없었다.
맨살도 아니고 셔츠 위로 스웨터를 밀어 올리는 것뿐인데 우동주의 손바닥이 스치는 자리마다 감각이 예민해져 살갗이 아릴 지경이었다. 노골적이고 집중적으로 가슴을 더듬거렸을 땐, 우습게도 앞으로는 남자들도 수영복을 위아래로 갖춰 입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 성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부위인데, 그렇게 만천하에… 공개를… 한다는 게… 앞으로는 남자도… 수영복 상의… 를… 아, 동주야… 거기, 거기는 유두가….
“만세. 응?”
“이게 어디서….”
스웨터를 벗겨줄 테니 팔을 들어보라는 것뿐인데, 귓가에 대고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자꾸 야했다. 우동주의 손가락 끝에 걸려 바짝 곤두선 유두가 신경 쓰였다.
“왜. 머리끈 대신 한번 해줘.”
자기 혼자만의 무슨 상징이나 비유인지 자꾸 머리끈 타령을 하는데, 그 뜻을 캐묻고 싶어도 귓바퀴에 닿은 입술의 뜨거움에 궁금증은 곧 아득해져버렸다.
뺨을 핥아 올리는 우동주의 뜨겁고 도톰한 아랫입술에 노곤해져 결국 시키는 대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스웨터가 목 위로 빠져나가고, 우동주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바닥 어딘가에 스웨터를 팽개쳤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입술에 달려들었다.
얘하고 하는 키스는 참 동물적인데 로맨틱하다. 우동주의 혀가 입천장에 닿으면 입천장이 긁고 싶도록 간지러웠고, 육감적인 아랫입술이 내 입술을 강하게 흡입하면 얼얼한 통증과 함께 그 안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이 아득해졌다. 타액이 서로 들러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도, 잠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들이쉬는 흐트러진 호흡도, 전부 키스의 한 부분이었다. 더 버티고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벌써 무릎 뒤가 후들거렸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우동주의 타이 매듭을 찾아 단번에 끌러버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서둘러 옷을 벗었고, 당장 욕실로 잡아끌 줄 알았던 우동주는 불쑥 내 브리프 위에 손을 댔다. 마디가 굵은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이 막 발기하기 시작한 페니스 위를 비비는 촉감에 온몸이 비비 틀렸다. 시각적으로도 완벽한 공격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제 다운받아 봤던 야동 속의 과장된 손놀림보다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움직이는 우동주의 손가락이 더 섹시한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샤워… 하자며.”
“할 거야.”
말뿐이었다. 우동주는 이번엔 왼손을 브리프 안으로 넣어 엉덩이 골 사이로 찔러 넣었다. 왼손, 너마저.
봉긋하게 솟은 살점 사이로 손날이 들어오는 감촉에 둔부의 근육이 저절로 수축했다. 금방이라도 우동주가 ‘거기’에 손가락 끝을 갖다 대고 지분거릴 것 같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의식해본 적도 없었던 그곳이 지금은 강렬한 성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흥분을 억제하려는 듯 내 엉덩이를 꽉 틀어쥐는 우동주가 귀여웠다. 내 사정 따윈 신경도 안 쓰고 헤집어 놓을 것처럼 달려들다가도 한 번씩 주춤거리는 이 덩치 큰 녀석의 배려가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귀엽고 기특한 널 위해서 어제 공부 좀 했다고. 오늘 당장 뭐가 되진 않겠지만 뭐가 되는 그날을 위해서 같이 노력해보자. 응?
“이러면서… 언제.”
“지금.”
순식간에 브리프가 끌어내려지고, 우동주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선을 내리면, 등을 둥글게 말고 앉은 자세 때문에 페니스보다 조금 낮은 곳에서 그의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분명하게 전달해오는 시선은 분명 남자의 성욕 그 자체였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얼굴로 인해 흥분했다. 순간적으로 그 잘생긴 얼굴에 그대로 내 페니스를 짓이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낮에는 져주고 밤에는 이기는 남자가 최고라고들 하던데 우동주는 최고의 남자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 평소 실실대던 놈이 한순간 발휘하는 집중력은 압도적이었다.
성욕을 응집시키고 형태화시킨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우동주가 드디어 나를 욕실로 데리고 갔다. 안쪽으로 열리는 욕실문 손잡이가 타일에 부딪치면서 큰 소리가 났지만 우리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우동주는 마치 싫다는 놈을 억지로 범하려 하는 것처럼 나를 끌어다 샤워부스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화난 놈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우동주 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나. 위기감을 느껴야 할 순간 같은데, 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 목구멍에 천 쪼가리를 쑤셔 넣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아마 저 예의 바른 동물은 갈등하고 있을 것이다. 나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건지. 그게 혹시 나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지는 않을지. 욕망과 싸울 줄 아는 동물이라니 기특하긴 하지만 짐승아, 욕망은 너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란다.
팔을 뻗어 샤워기 레버를 돌렸다. 머리 바로 위를 살짝 비껴 쏟아지는 가느다란 물줄기들이 내 정수리를 적시고 이마 위로 콧등 위로 뺨으로 흘러내렸다. 민첩하고 예리한 눈빛이 그 물줄기의 흐름을 좇는다.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한 방울의 물조차도 아깝다는 듯이.
쇄골 위로, 가슴의 근육 위로, 딱딱하게 뭉쳐진 유두 위로, 오목한 배꼽을 지나 음모를 적시고 페니스와 고환 아래로 흐르거나, 허벅지와 종아리를 타고 곧장 미끄러져 발등을 적시고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을 모조리 훑는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들어 자신의 시선 안에 나를 가둔다. 등 뒤에 닿은 타일의 차가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 순간의 팽창된 압박 속에 나는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고양잇과의 날랜 동물처럼 재빠르게 달려들어 단숨에 나를 제압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시간을 끌듯이 느릿느릿, 우동주는 왼쪽 손목에 채워진 스틸 재질의 묵직한 시계부터 풀었다. 그 별 것 아닌 움직임에도, 제 몸과 완벽한 비율을 이루는 페니스가 반쯤 고개를 든 채 흔들렸다. 무성한 음모는 배꼽을 타고, 사타구니로, 허벅지로 퍼져나가면서 점점 옅어진다. 상체의 체모는 그럭저럭 보통인 편인데 하체는 꽤 무성하다. 그 무성한 수풀이 피부 위를 쓸고 지나가는 촉감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탁
유리로 된 선반 위에 시계를 내려놓는 소리마저도 의미심장했다. 우동주가 물줄기의 사정 범위 안으로 들어섰다. 넓고 가늘게 퍼지는 레인 샤워기의 물줄기 속을 뚫고 다가온다. 바닥에 고인 물을 밟는 소리에 귀가 잘근잘근 씹히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짧은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물에 젖는다. 그의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콧대를 지나 코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줄기는 단순한 물이 아닌 것만 같다. 평소의 우동주였다면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야한 농담이라도 한두 마디 던졌을 텐데. 오늘은 그 깊숙한 눈 안에서 잠자코 나를 응시하기만 한다.
“왜 그렇게 봐요?”
너무 부드러운 말투에 놀랐다. 의외였다. 눈으로는 당장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훑어놓고 입가에 생크림을 잔뜩 묻힌 듯 달콤한 목소리를 내면서 웃는다. 어쩌냐. 나 이러다 진짜 게이 되겠다. 네가 너무 멋있어. 멋있는 남자를 보고 성욕을 느끼는 내가 낯선데, 사실이니까 어쩔 수가 없네.
“너 아닌 것 같아서.”
“나 맞아요. 양치질할래요?”
미소를 지으면서 오른손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엉뚱하게도 우동주는 선반 위에 놓인 치약과 칫솔을 집어 들었다. 욕망과 싸워서 이기는 짐승이 되겠다는 건가? 그런 짐승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목을 물어뜯길 각오를 하고 있던 나는 살짝 배에 힘이 빠졌다. 실망은 아니고 약간의 당황?
샤워기 아래에 선 우동주가 칫솔에 치약을 짜서 건넨다. 물줄기는 감정과 의지를 가진 존재처럼 우동주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두툼한 어깨와 등을 타고 흐르면서 근육의 홈 위로 물길을 만든다. 내 건데. 뒤에서 두드려 볼륨을 만든 동판화 같은 울룩불룩한 그 몸을 마음대로 쓰다듬는 물줄기에 말도 안 되는 질투를 느끼면서 나는 엉겁결에 칫솔을 받아 들고 이를 닦기 시작했다.
상쾌한 민트 향이 입안을 채운다. 나를 물줄기 가장자리에 세운 우동주는 이번엔 샤워볼과 샤워젤을 가져다가 거품을 냈다. 훈훈한 습기를 타고 망고 향이 순식간에 욕실을 가득 채운다. 거품이 풍성해지면서 강하게 단련된 우동주의 손목까지 번져갔다.
충분히 거품이 일어나자 우동주는 샤워볼을 내 목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움직이기 편하도록 양치질을 하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목을 한 바퀴 두른 거품은 어깨와 가슴, 양쪽 팔, 아랫배를 차례대로 뒤덮어갔다. 애무의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담백한 움직임이 나를 더 긴장시켰다. 발기가 가라앉거나 여기서 더 이상 단단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역시나 아들놈은 아버지의 의지 따윈 상관없이 무덤덤한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꼿꼿해졌다.
분명 우동주도 알몸이고 우동주의 페니스도 꾸물꾸물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데, 나 혼자 알몸이고 내 알몸에 아무 관심도 없는 놈을 상대로 발기하고 있는 듯한 낭패감이 들었다. 이제 곧 페니스에 샤워볼이 닿으리라는 기대감과 절망감에 눈을 감아버렸다. 우동주의 손은 내 발기한 페니스에 닿고도 전혀 움직임을 달리하지 않았다. 샤워볼에 쓸려 페니스가 위아래로 진동하는 감각에 나만 더 곤란해졌을 뿐이다.
“윽.”
내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신음을 내는데도 이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계속해서 볼을 움직여나간다. 발기한 내 페니스 따위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한 손길에 애가 탔다. 다리 사이를 드나들다가 고환을 둥글게 뭉치고 조금 빡빡하게 음모 위를 문지르는 샤워볼의 거친 감촉에 금방이라도 솔직한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동주의 샤워볼은 쩔쩔매는 내 페니스를 놔두고 거침없이 허벅지로 옮겨간다. 오직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듯 미간을 찌푸린 표정.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종아리를 문지르는 우동주의 다리 사이에서도 분명 팽팽하게 부푼 페니스가 왕성한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혹시 내가 먼저 짐승이 돼서 널 밀어붙이길 바라는 거냐? 그것도 뭐 어렵진 않은데.
“당신도 여러 가지로 알아봤을지 모르지만, 우린 그렇게 쉽게는 안 돼요.”
내 오른쪽 발목을 붙잡고 왼쪽 종아리를 문지르면서 우동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법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다. 우동주의 굽힌 등 위로 타닥타닥 물줄기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 등에 매달려보고 싶었다. 굵직한 뱀이 몇 마리는 들어앉아 꿈틀대는 듯한 근육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가며 확인해보고도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여러 가지로 알아보지’ 말 걸 그랬다. 진짜 알아봤으니 잡아떼면서 아닌 척하기도 뭐하고, 알 만큼은 안다고 자백하기도 왠지 낯부끄러웠다.
“씻고 나가면 협조 좀 해요. 당장 뭘 어떻게 한다는 건 아니고, 공들여서 많이 풀어줘야 되거든요. 내 목표는 이번 주말쯤인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지금까지도 이랬어?”
내 앞에 왼쪽 무릎을 꿇은 우동주의 오른발을 지그시 눌렀다. 발가락과 발가락이 꼬물꼬물 겹쳐진다. 두툼한 발등을 타고 좀 더 위로 올라갔다.
“뭐가요.”
“난 너하고 이번 주말쯤에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너 그날 스케줄 돼? 이렇게 쿨하게.”
내 종아리를 문지르던 우동주가 픽 웃는다.
“뭐가 웃겨. 난 하나도 안 웃겨.”
서른한 살 먹고 연인의 과거에 질투하는 건 추접스럽고 산뜻하지 못하다는 거 나도 아는데, 난 원래 체에 받쳐 기름기를 쫙 걸러낸 것처럼 담백한 남자 맞는데, 이놈이 나 말고 딴 사람한테도 이렇게 해줬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좋지만은 않았다. 우동주의 발등을 치근대던 발을 옮겨 다리 사이를 꾹 눌러버렸다. 이렇게 세우고 뭘 신사적인 척이야.
내 발에도 그가 잔뜩 문질러놓은 거품 때문에 우리가 닿은 부위가 몹시 미끄러웠다. 우동주가 내 발목을 꽉 붙잡았다. 깜짝 놀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힘자랑을….
“나 지금, 좀 복잡하거든요?”
그래, 날 보는 네 눈이 굳이 말 안 해도 참 복잡해 보이긴 한다.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로 흥분돼서, 지금 여기서 뭔가를 시작했다간 날 망가뜨릴까 봐 겁난다. 뭐 그런 얘기 하고 싶은 거지?
나 때문에 우동주가 흥분한다는 게 날 흥분시켰다. 우동주의 경고를 무시하고 발가락을 놀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한 존재감의 페니스를 이리저리 문질러댔다.
“근데 너, 왜 꼬박꼬박 존댓말 쓰냐?”
“안 그러면, 폭주할까 봐.”
우동주는 버릇없이 움직이는 내 발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뒤로 돌아서게 했다. 등과 엉덩이를 문질러 온몸을 거품투성이로 만들고 나서는 다 됐다는 듯이 엉덩이를 두어 번 툭툭 두들겼다. 다시 봤다, 우동주. 네가 이렇게 자제력이 강한 놈인 줄 미처 몰랐군. 앞으로 참고하겠어.
“머리 감고 거품 헹구고, 나가서 기다려요.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싹싹 핥아서 아주 흐물흐물 떡을 만들어줄게.”
내 손에서 칫솔을 뺏은 우동주는 머리 위에 샴푸를 눌러 짜주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운 사람처럼 얼른 등을 돌리고 서서 저도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뭐? 떡을 만들어줘? 그러려고 지금은 꾹 참는다 이거지? 그래, 얼마나 푹 퍼진 떡을 만들어주려고 이렇게 인내심을 발휘하는지 내 두고 본다.
살짝 숙인 뒷목 아래로 우동주의 몸 안에 갇힌 굵은 뱀들이 똬리를 트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머리를 감고 거품을 헹군 나는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기엔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일을 쳐도 큰일을 칠 것처럼 욕실로 끌고 와놓고는 부탁한 적도 없는 인내를 발휘하고 있는 뒷모습이 괘씸했다.
비누칠을 하는 우동주의 뒤로 다가가 허리에 팔을 두르는 척하면서 발기한 페니스를 뿌리부터 귀두까지 진하게 쓸어 올리며 귓가에 속삭여줬다.
“기다리고 있을게. 빨리 나와.”
넓은 가슴에 샤워볼을 문지르던 우동주는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당신, 한번 해보자 이거지?”
샴푸가 흘러내려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도 우동주는 내 쪽을 향해 발끈하면서 맨발로 타일바닥을 한 번 구르기까지 했다. 야, 진정해라. 니 아들놈 널뛴다.
“한 번? 뭐, 세 번까진 괜찮아.”
이러면 꼭 내가,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바람 맞아서 심술난 놈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욕망은 우동주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니까. 욕실에서 괜히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나를 고이고이 소중하게 대하겠다는 의지가 무너질까 봐 허벅지 뜯고 있다는 것까진 나도 알겠다. 남자끼리라 조심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의욕만으로는 될 일이 아닌 것도 안다.
번거롭긴 하겠지만 덕분에 호기심은 좀 솟아나잖아? 우동주가 아닌 놈한테야 ‘거기’를 내준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어차피 그놈하고 나하고 둘밖에 모르는 일인데 둘 중의 하나가 엎드려야 한다면 그게 내가 되더라도 상관은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난 저런 커다란 몸을 가진 우동주에게 별로 넣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근데 우동주가 나에게 넣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그건 쪼금 진짜 쪼금 궁금했다.
“뭐가 세 번까지 괜찮다는 건데?” 라며 소리치는 우동주를 무시하고 욕실을 나와 물기를 닦은 타월을 빨래바구니 안에 던져 넣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혹시 몰라 어제 새벽에 대강 정리를 해둔 덕에 그다지 지저분한 편은 아니었다. 시트도 깔끔했다. 커다란 전면창 맞은편은 모두 불이 꺼진 빌딩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블라인드를 내렸다. 맥주를 한 캔 따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팔꿈치께가 저려온다. 물이나 마실 걸 괜히 맥주를 마셨나. 더 목이 타네.
마침내 물소리가 멎고 찰박찰박 맨발이 젖은 타일 위를 걷는 소리가 들리고 우동주가 문을 열고 나왔다. 좁은 오피스텔 안에 습기와 함께 망고 향이 훅 밀려들어 온다. 매트 위에 서서 타월로 몸을 대강 문지르는 옆모습이 희미한 빛 속에서 물기를 반사시켰다. 맨발로 바닥 위를 디디며 걷는다. 허리 바로 아래까지 올라붙은 엉덩이 근육이 아름답게 물결친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면서 맥주를 삼켰다. 우동주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비닐봉투를 집어 들고 이쪽으로 돌아섰다. 발기가 전혀 진정되지 않은 우동주의 페니스는 그의 걸음걸이에 맞춰 묵직하고도 리듬감 있게 흔들렸다.
“나도 하나 마실게요.”
검은 비닐봉투를 침대 위에 툭 던진 우동주가 날 보며 픽 웃더니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맥주를 한 캔 꺼낸다. 너무 대놓고 쳐다봤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옆모습을 보이고 선 우동주는 맥주 캔을 거의 반이나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고 내 앞으로 걸어와 내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가져갔다.
“내 칫솔 버렸길래 새 거 하나 꺼내 썼어요. 괜찮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우동주는 재떨이와 맥주 캔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반 정도 남은 내 맥주도 우동주에게 줘버렸다. 협탁 위로 허리를 숙일 때 다리 사이로 고환이 슬쩍 보였다. 크기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처지지 않고 탄력 있게 올라붙은 고환은 엄청난 양의 총알을 장전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 놀리니까 재밌었어요?”
다시 앞에 와서 선 우동주가 오른손을 내 머리카락 사이로 얽어 넣는다. 부드럽게 움직이려 하는 투박한 손이 귀여웠다. 내 눈높이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멋진 페니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가.”
“하여튼 불리하면 모르는 척하는 건 알아줘야 돼.”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으로 뺨을 쓸어내려 턱을 붙잡아 부드럽게 들어 올린다. 허리를 깊이 숙여 입술을 겹쳐왔다. 샤워로 인해 서늘해진 입술이 강한 흡입으로 내 입술을 빨아 당겼다. 이번엔 어떤 기술도 없이 그저 거침없이 단호하게 내 입안을 점령해나간다. 열렬한 구애가 느껴지는 키스였다. 마주 혀를 얽어 그 마음에 답하면서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등을 어루만졌다.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손끝에 만져졌다. 이제야 우동주가 내 손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두 팔로 목을 좀 더 조여 안으면서 가까이 끌어당기자, 우동주가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무릎을 꿇는다. 퍽퍽한 아랫배에 발기한 페니스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놈의 등을 꽉 끌어안고 페니스와 페니스를 마구 짓이기고 싶은 충동이 불쑥 일었다.
한 번 더 도발을 할까 어쩔까 고민하면서 우동주의 혀를 잘근거리는 동안 그는 내 가슴을 더듬어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뭐 이상한 거라도 있지 않나 수색을 하는 놈처럼 꼼꼼하게 빈틈없이 매만져나간다. 등을 쓰다듬던 다른 한 손은 어느새 어물쩍 엉덩이까지 내려가 침대와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안에 가득 차고 넘치도록 한 움큼 쥐고 살점을 뜯어내려는 듯 꽉 쥐어짜는 손놀림에 엉덩이가 얼얼하다. 나도 모르게 우동주의 뒤통수에 손가락을 찔러 머리카락을 움켰다.
“야… 아파….”
“이걸로 아프면 어떡해. 참아봐요.”
키스와 가벼운 애무로 살짝 흥분했는지 우동주의 목소리가 달떴다. 내 입술과 떨어지기가 무섭게 목덜미로, 어깨로, 빠르게 옮겨간 우동주의 입술은 순식간에 가슴까지 내려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가슴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여기에 누가 입술을 대기는 처음이었다. 살살살 피부 표면 위를 스치듯 옮겨가는 우동주의 입술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솜털이 쫙 일어섰다. 우동주의 입술이 유두에 가까워질수록 내 가슴의 들썩임도 거세졌다. 궁금하다. 우동주가 내 유두를 빨면 어떤 기분일까.
흑갈색으로 둥글고 딱딱하게 뭉쳐진 유두가 마침내 우동주의 입술에 삼켜졌다. 쪼오옥, 하는 소리를 내면서 가볍게 빨아 당겼다 탁 튕기듯 놔줬다. 유두 자체에서 뭔가가 느껴진다기보다는 그런 우동주를 보고 있다는 시각적 자극이 더욱 강했다.
나를 한 번 슬쩍 올려다본 그는 이번엔 뾰족하게 세운 혀를 유두에 갖다 댔다. 혀끝에 짓눌린 유두가 위로 꺾였다. 그럼 우동주는 다시 혀를 눌러 아래로 꺾기를 반복했다. 위아래로 유두를 꺾어대는 혀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져 곧 노골적인 날름거림으로 바뀌었다. 그걸 보는 사이 내 호흡은 오르락내리락 거칠어지고 뭔가가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갑갑함에 고개가 휘었다.
나도 우동주의 것을 만지고 싶었다. 다급하게 손을 더듬었다. 불룩하게 솟은 근육의 당김 때문인지 가로로 긴 타원형의 유두가 손끝에 걸렸다. 중지 끝으로 그 앙증맞은 작은 돌기를 꾹 눌렀다. 누른 채로 빙빙 돌렸다. 유두 아래로 느껴지는, 건강하고 생생한 근육의 감촉에 흥분이 배가 되었다. 이 사이에 유두를 물고 잘근거리면서 동시에 혀끝으로 자극하는 우동주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남자도 유두가 성감대라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이제까지는 유두로 느낄 일도 없었고, 느껴서도 안 되는 거라고 고리타분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
“윽.”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근지러움에 우동주의 머리통을 꽉 끌어안았다. 이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동주는 내 몸에 달려들면서 유두를 속 시원히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유두로 흥분하다니, 전 같았으면 수치심과 좌절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그저 신기했고 그 신기함이 적극적인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섹스 시에 더 자극을 느끼고 더 흥분할 수 있다면 이득이다. 남자도 적극적으로 성감대를 개발해야 한다. 느낀다는 건 남성성의 퇴색도 뭣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우동주 앞에서 굳이 남자를 연기하거나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서로가 남자라는 것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시작한 관계였으니까.
가슴으로 달려든 우동주를 안고 그대로 뒤로 떠밀리듯 드러누운 나는 다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우동주가 내 페니스를 입에 넣었다.
오럴은 정말 근 3, 4년 만이었다. 귀두를 깊숙이 밀어 넣고 엄청난 흡입력으로 압박해오는 우동주의 뜨끈한 입안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자극이 강했다. 금방이라도 내 페니스가 뚝 떨어져 우동주의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페니스에 가해지는 너무나 직접적인 자극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우동주는 왼팔을 길게 뻗어 내 가슴을 눌렀다. 나는 맥없이 매트리스 위로 풀썩 쓰러졌다. 우동주의 왼손이 그대로 가슴과 배와 음모 위를 넓게 애무했다. 오른손으로는 페니스의 뿌리를 단단히 붙잡고 축축하고 뜨뜻한 입안으로 넣었다 빼기를 반복한다. 목구멍까지 쑥 밀려 들어갔다가 다시 입술 앞까지 밀려 나온 페니스를 희고 단단한 이 위에 부드럽게 문지르기도 했다.
“흐으, 으… 하….”
나는 팔꿈치를 하늘로 향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너무 좋아서 하지 말라고 하기도 싫다. 계속해, 계속…. 그래, 거기…. 거길 좀 더 혓바닥으로…. 아, 그래… 너도 아는구나, 거기 진짜 좋지? 아, 이거 진짜 뿅가네…. 나도 나중에 너 해줄게…. 그니까 지금은 조금만, 조금만 더….
“아, 아… 아, 동주야… 동주야….”
몸을 마구 뒤치고 싶었다. 정수리를 시트에 박고 몸이 활처럼 휘어지도록 들썩이고 싶었다. 이건 본능이다. 극도의 흥분은 사람의 몸을 활짝 열어젖히고 이성마저 해방시킨다. 평소 사정 시에 느끼는 쾌감이 페니스 끝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지금은 온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좋아?”
페니스의 기둥을 뿌리에서부터 핥아 올리면서 묻는 우동주의 목소리도 흥분으로 고르지 못했다.
“어, 좋아…. 아… 아, 죽을 것 같아….”
머릿속이 아득하게 빙글빙글 돌면서 자꾸 고개가 비틀어지고 눈이 뒤로 뒤집어지고…. 도저히 얌전히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침대 아래 바닥을 디디고 있던 발을 들어 올려 우동주의 어깨 위를 짚었다.
“너, 너… 뭐 하는!”
그랬더니 이놈이 그대로 내 무릎 뒤에 손을 넣어 가슴께로 밀어 올려버린다. 우동주 앞에 엉덩이를 훤히 내놓고 누운 꼴이 되었다. 다리를 버둥거려 봤지만 두 무릎 뒤를 단단히 고정시킨 우동주는 고개를 숙여 드디어 ‘그곳’에 혀를 대려 하고 있었다. 오 마이 갓. 아무리 각오했어도 충격은 충격이었다.
“왜. 협조한다며….”
허공에 드러난 회음부 주변을 핥으면서 날 올려다보는 그놈은 나의 치욕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너무나 섹시해서, 흥분이 충격을 앞지를 것 같았다.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매너고 예절이고 갈등이고 더는 그 안에 없었다. 눈꺼풀에 잔뜩 힘을 주고 검은자위를 위로 치켜뜬 날카로운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혀를 단단하게 세워 그곳의 입구를 지분거렸다. 오싹했다. 치부를 드러낸 채 공중에 쳐들린 내 종아리마저도 섹시하게 느껴지는 이 순간의 스스로가 무서워질 것 같았다.
“야, 야… 차, 차라리 엎드릴게.”
눈이 벌게진 우동주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면서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발목을 놔줬다. 몸을 뒤집어 무릎으로 기어 침대 안쪽으로 더 들어가려는데 우동주가 다시 내 발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 그냥 여기서 해.”
그러고는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다시 내 엉덩이에 코를 박았다. 두껍고 딱딱한 콧대가 골 사이를 비비고 들어왔다. 입과 코에서 뿜어져 나온 습기가 은밀한 곳을 눅눅하게 데우는 촉감이 고스란히, 생생히 느껴졌다. 평생 남의 손이나 혀가 닿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 야들야들한 점막이 와서 닿자, 아 여기도 내 신체의 일부구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생각이 들었다.
애널에도 피부가 있고, 감각 세포가 있고, 그래서 우동주의 혀를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흡.”
애널 주변을 핥느라 위아래로 우악스럽게 움직이는 우동주의 턱이 고환 뒤를 찔렀다. 우동주는 아예 침대 위로 올라와 내 무릎 사이에 V자로 다리를 벌리고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왼손으로는 엉덩잇살을 넓게 주무르면서 오른손을 침대와 내 아랫배 사이로 넣어 아직도 부어 있는 내 페니스를 짜내기 시작했다. 괜히 엎드린다고 했나? 다리를 훤히 벌리고 있는 게 민망해서 엎드린다고 하긴 했는데 어째 이쪽이 더 굴욕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얼굴이 안 보여서 그건 다행이긴 했지만….
“나도 너… 해주고 싶어….”
애널에 닿는 타인의 혀보다 더 충격적인 건, 이제까지의 방식과 사회화된 학습의 두꺼운 벽을 맹렬하게 무너뜨리면서, 이 순간의 행위에서 쾌락을 감지해내는 나 자신이었다.
애널 주변의 여린 피부를 이 사이로 한번 빨아들였다 놔준 우동주는 내 다리 사이로 제 다리를 길게 뻗으며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내 엉덩이를 제 얼굴 위로 끌어내려 다시 맹렬하게 빨아대기 시작했다. 거기가 내 입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 거부감 없이 맛있다는 듯 핥아대는 우동주를 보면 정말 달콤한 뭔가가 흘러나올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현실은… 아, 지금 현실 같은 거 생각하지 말자. 생각했다간 절대 못할 테니까.
“해줘. 왜 안 해?”
내 엉덩이에 얼굴 처박은 채로 말하지 말아줄래?
우동주의 재촉에 시선을 떨구어 보니 얼굴 아래에 독이 바짝 오른 파충류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이 나쁜 새끼. 변태 새끼. 나한테 이런 걸 넣으려고 하다니.
하지만 나는 그 나쁜 변태 새끼의 독 오른 코브라와 사랑에 빠졌다. 두 손으로 허벅지의 체모를 쓰다듬으면서 페니스의 뿌리에 코를 대니 거짓말처럼 향긋한 냄새가 났다. 방금 샤워를 해서 그럴까, 아니면 사랑의 힘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두툼하고 널찍하게 벌어진 귀두에 혀를 대자 같은 남자의 성기를 빨려고 한다는 배덕감에 전신이 찌릿했다.
우리는 정신을 잃고 위아래로 엇갈려 겹쳐진 채 서로의 몸에 열중했다. 방 안엔 타액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가득했겠지만 우리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우동주의 사타구니에 더 깊이 고개를 틀어박느라 엉덩이를 끌고 올라가면 우동주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더 바짝 쳐들고 따라 올라왔다. 게걸스럽고 적나라했다. 슈트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질 좋은 구두를 신고, 신사적인 미소를 짓는 우동주와 주세영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의 혀는 헐떡임을 숨기려하지 않았고 정중함을 버렸다.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우동주의 쇄골쯤에 스스로 페니스를 짓이겨 문지르면서 사정했다. 말도 안 되는 야만스러운 짓거리였지만 전혀 수치를 느끼지 못했다. 섹스가 정말 육체의 언어라면, 지금 우리가 나누는 말은 ‘사랑해’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음란한 짓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자유로웠다.
□ WOO DONG ZOO
제대로였다.
옷만 벗은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있었던 모든 규율과 관습마저 벗은 것 같았다.
내숭 없이 솔직하지만 과장되지 않고, 탐욕스럽지만 사랑이 깃든. 그래서 포르노보다 직설적이되 포르노처럼 뒤가 구리지 않은. 이렇게 야한 동시에 이렇게 산뜻한 섹스가 가능했다니. 이것이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멋진 엉덩이를 내 얼굴에 들이밀고 배 위에 거꾸로 엎드린 주세영이 페니스를 정신없이 핥아대면서 내 가슴 위에 사정할 땐 정말, 여기가 극락정토인가 싶게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세계가 몽롱했다. 컬처 쇼크 그 이상이었다.
눈앞에서 빵빵한 엉덩이 사이로 짓눌린 고환이 왔다 갔다 하는데, 고문도 이런 생고문이 따로 없었다. 신이시여, 이런데도 제가 참아야 합니까?(헬스클럽 처음 갔던 날 이후로 오랜만에 찾은 신이었다.)
대체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 건데요? 욕실에서 주세영이 샤워기레버를 돌렸을 때도, 내 발을 밟고 발가락을 꿈지럭거렸을 때도, 심지어 거품이 묻은 발바닥으로 내 아들놈을 짓밟는 S끼를 보였을 때도 저는 참았습니다.
왜냐? 전 주세영을 사랑하고, 아무리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강한 갈증이라 한들, 그 욕구를 풀자고 섣불리 덤볐다가 그 사람의 몸에 상처라도 만든다면 갈증이고 욕구고 뭐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로 먼저 죽을 것 같으니까요.
물론, 손재주 좋으신 조물주의 편애를 받아 남들보다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세심하게 다듬은 듯 예쁘게 균형 잡힌 주세영의 몸에 거품을 잔뜩 칠하고 주세영 자체를 하나의 스펀지 삼아 내 몸을 문지르고 싶은 마음 간절했었다. 왜 바라지 않았겠는가?
평소의 주세영을 봐서는 상상도 못 할 음란한 모습으로 내 위에 거꾸로 엎드려 사정의 쾌감에 부르르 떠는 엉덩이를 보면서 왜 당장 덤벼들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저 몸을 맞대고 비비적거리는 것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갈증임을 알아서 그랬다. 어젯밤에 공부한 내용들을 실습해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그걸 빨리 제대로 실습해야 우리 둘의 진정한 합체가… 뭐, 난 결국 그런 놈이니까. 아무리 잘난 척해봤자 몸이 하나로 이어져야만 완전하게 서로의 소유가 됐다고 안심하는 시시한 놈이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시시한 놈이 되어도 좋으니, 주세영이 떡두꺼비 같은 제 아들 하나만 낳게 해주세요. 아니면 제가 낳는 것도 상관없어요.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가 완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거의 수행에 가까운 긴 인내가 필요했다. 어차피 오래 걸리는 거 느긋하게 욕실에서도 한 판 하고, 침대 위에서도 또 한 판 하고, 그러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런 애무와 사정의 반복에 무의미한 에너지를 소비할 때가 아니었다. 우리 주세영이 서른한 살에 사내놈에게 ‘그곳’을 내주기로 결심해 주셨는데, 정성스러운 준비와 최상의 서비스로 멀티오르가즘을 느끼게 해드려야 마땅했다.
몸이 충분히 긴장을 풀고 느슨해질 때까지 정성을 들여 애무해주면서 조금씩 늘려갈 것. 겉피부와는 다른 예민한 곳이니 되도록 손가락에 콘돔을 씌우거나 실리콘 재질의 확장 플러그를 이용할 것. 짧은 손톱에도 자칫 긁힐 수 있다는 코멘트에는 겁이 나기까지 했다.
게이 야동 속의 전문가(?)들은 무지막지한 사이즈의 노 콘돔 페니스도 쑥쑥 받아내던데, 그것만 믿고 덤볐다가 주세영의 그곳에 상처를 만들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공부를 절대 대충할 게 아니었다. 역시 게이 야동이든 뭐든, 야동은 위험하다. 야동으로는 절대 공부가 안 된다. 잘못된 망상만 길러줄 뿐.
어젯밤에 각종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지식을 주워 모으는 동안 결심한 것이 하나 있다. 앞으로 절대, 주세영이 나와의 잠자리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게 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것.
나와야 하는 곳으로 뭔가를 받아낸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달콤함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철저한 사전 조사를 거쳐 사랑을 듬뿍 담아 안전하고 주의 깊게 실전에 임한다면, 이제까지 네가 알던 어떤 섹스와도 비교 불가한 신세계가 너와 너의 파트너에게 임할 것이라고 선배님들은 조언하고 있었다. 하여간 세상 어디에서 뭘 하든 정보력과 행동력만 있으면 못 할 게 없다.
애널이 비록 생식기는 아니지만 결국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두뇌에서 느끼는 흥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선배님들의 말에 반신반의했는데, 주세영의 반응을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으로 촘촘하게 빨려 들어가는 애널 주변의 피부가 짓무를 정도로 핥아대는 동안 그 사람은 정말로 제대로 발기하고 흥분하고 사정했다. 가끔씩 뭐가 찌릿찌릿 오는지 내 페니스를 빨다 말고 어깨를 굳힌 채 움찔움찔 떨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주세영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 역시 완전 털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섹스는 오직 페니스만의 문제인 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온몸에 오일을 칠하고 각각 세 번씩 사정을 하고 난 뒤에야 중지 하나를 끝까지 밀어 넣는 데에 성공했다. 미치도록 찾고 싶었던 전립선을 건드리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건 처음이라 주세영이 너무 긴장해서 못 느낀 것일 수도 있고, 아직 우리에겐 화수목금이 남아 있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토요일이 되면, 내 기어코….
“물 가져와, 물….”
엎드린 채로 녹초가 되어 뻗어버린 주세영이 나를 침대 밖으로 밀어내며 머슴 취급을 했지만 난 지금 주세영이 여기서 알몸으로 PT를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코 가늘다고 할 수 없는 내 중지 하나를 다 삼켜낸 장한 주세영인데 물이 아니라 뭐라도 떠다 드려야지.
“여기.”
얼른 정수기로 달려가 냉수 한 잔을 받아오는데, 엉망으로 구겨진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엎드린 나체에 또 아래가 욱신거렸다. 세 번이나 뺐는데 이럴 수가 있나. 나도 이제 20대 후반인데.
팔꿈치로 버티고 물을 마시는 그 사람 옆에 걸터앉아 허벅지부터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일이 번져 미끄러웠다. 탄력 있는 엉덩이는 엎드려 있어도 흉하게 퍼지지 않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서 보기 좋게 솟아 있었다. 운동도 꾸준히 했겠지만 타고난 것도 어느 정도 밑받침이 됐을 거다.
“전에도 느낀 건데, 여기가 진짜 섹시해.”
엎드려 있으면 엉덩이와 허벅지가 이어지는 부분에 사타구니 안쪽을 향해 선이 하나 그어졌다. 엉덩이의 탄력으로 인해 허벅지와 구분지어지는 경계선인데, 이상하게도 불룩한 엉덩이의 살집 자체보다 살집의 탐스러움과 탄력을 반증해주는 듯한 그 경계선이 더 섹시하게 느껴졌다.
검지를 대고 선을 따라 쭉 그으니 그의 엉덩이 근육이 딱딱하게 뭉쳐지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 지금 몸이 꽤 예민하긴 할 거다.
“아니, 힘 빼봐요.”
손바닥 전체로 엉덩이를 감싸고 살살 흔들어가며 몇 번 주무르자 다시 힘을 뺀다.
“여기 말이야, 엎드려 있으면 여기에 살짝 경계선이 지거든. 이게 진짜 미칠 거 같아.”
“별게 다….”
그 사람은 빈 컵을 내게 내밀더니 다시 베개 위로 툭 쓰러졌다.
“그럼 당신은? 당신은 내 어디가 좋은데?”
컵을 받아 협탁 위에 내려놓고 그 사람의 몸을 뒤집어 나를 보게 만들었다. 내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면서 고민하는 표정이 꽤 진지해 보인다. 어디를 집어줄까? 우리 어머니가 볼 때마다 감탄하는 눈썹? 아니면 아버지를 빼다 박은 깊숙한 눈? 우리 집안 내력인 콧대? 입술? 어디야, 어디? 당신은 내 어디에 미치는데? 응?
“음… 속눈썹이 짧은 거?”
이 남자를 진짜.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리며 미간이 좁혀졌다. 하여간 몸으로 말할 때가 제일 귀엽고 솔직하다니까.
“뭐야, 그게 좋은 점이야? 차라리 엉덩이 선에 미치는 게 낫지.”
“속눈썹이 짧은 것까지도 장점으로 보인다는데, 여기서 뭘 더 바라?”
“…….”
그렇군요, 형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괘씸한 생각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있을 페니스를 다시 괴롭혀줄까 했던 마음을 바꿔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벌써 새벽 2시가 지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월요일부터 너무 뜨거웠던 것 같다. 내일 일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시트 갈아야죠.”
“몰라….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겠어…. 담배 좀 줘.”
명령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잘 들어보면 이건 명백한 응석이다.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입술 앞에 냉큼 대령했다. 그 사람은 상체를 약간 끌어올려 베개를 돋워 세우고 기대앉아 약간 나른하게 눈꺼풀을 내리뜨고 담배를 맛있게 피우기 시작했다.
샤워한 뒤에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엉켜서 뒹구는 사이에 멋대로 말라버린 머리카락이 둥둥 떠서 귀여웠다. 마음 같아서야 바로 자게 해주고 싶었지만 기껏 사 온 콘돔을 씌우지도 못하고 둘 다 생으로 사정해버리는 바람에 정액과 오일로 시트가 엉망이었다.
“샤워하고 있으면 그동안 내가 갈아 놓을게요.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줘.”
“아… 진짜 꼼짝도 하기 싫은데….”
그 사람은 귀찮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침대 가장자리로 엉덩이를 끌었다. 안쓰러워 죽겠네.
“우리 집이었으면 내가 욕조에 물 받아서 업어다 줬을 텐데.”
“아, 미안하네. 왕자님을 비좁은 오피스텔로 모셔서.”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요란하게 기지개를 켠 그 사람은 옷을 하나도 입지 않은 그대로 옷장 앞으로 걸어가 서랍 어딘가를 뒤져 시트를 찾아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같이 살면 안 되나?”
“어, 안 돼.”
시트를 내 팔에 안겨준 그 사람은 내 엉덩이를 한 번 꽉 쥐었다 놓고 미련 없이 욕실로 걸어갔다. 오케이란 대답이 나올 걸 기대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들어줄 가치도 없다는 듯 깔끔하게 잘라내니 좀 섭섭했다. 시트를 껴안고 욕실 앞까지 따라갔다.
“와, 너무 딱 자른다. 나랑 사는 게 그렇게 싫어?”
세면대 앞에서 칫솔에 치약을 짜던 그 사람이 거울을 통해 힐끔 나를 쳐다봤다. 전위적으로 헝클어진 머리도, 오일로 번들거리는 잘빠진 몸도, 죽여주는 엉덩이도, 발등으로 종아리를 슥슥 문지르는 동작도, 입가에 보글보글 일어나는 하얀 거품도, 칫솔을 쥔 팔뚝에서 움찔거리는 완근도, 나는 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게 내 일상이 됐으면 좋겠는데. 이런 거, 매일 하고 싶은데. 그러면 좋겠다고, 당신은 정말 생각 안 해? 조금도?
“너, 빨래 잘해? 청소 잘해?”
“난 잘 못하지만 우리 집 봐주는 아주머니는 잘하시는데. 그걸로 안 될까?”
주세영이 세면대 안에 거품을 뱉고는 다시 거울로 날 쳐다본다.
“얼씨구, 진짜 왕자님이었구만. 하긴 그 집을 너 혼자 어떻게 관리하나 했다.”
“그럼 내가 빨래하고 청소하면 같이 살아? 배우면 잘할 자신 있어.”
이번엔 대답 없이 칫솔질만 하면서 나를 본다. 나도 진지하게 꺼낸 얘기는 아니었고, 그냥 기분에 취해 충동적으로 던진 멘트였는데, 막상 주세영이 너무 가드를 치는 것 같으니까 괜히 집요해질 것 같았다.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동거라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성급한 얘기였지만 솔직히 난 주세영만 오케이하면 당장 내일부터라도 좋았다. 근데 주세영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딴 게 아니라 그게 섭섭했다. 뭐, 진짜로 당장 살자는 게 아니잖아. 마음이 그렇다는 건데, 꼭 그렇게까지 딱 잘라야 돼?
“네가 빨래하고 청소하고, 거기다 밥까지 해주면 생각해볼게.”
마지막에 그렇게 여지를 두는 대답을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난 꽤 심각하게 삐쳤을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나 혼자 짝사랑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화끈하게 애정을 표현해줄 때도 있으니 채찍질도 달게 맞을 수밖에. 주시는 당근이 워낙 달달해야 말이지.
“주세영하고 살려면 회사 그만두고 살림 배워야겠네.”
내 농담에 그 사람이 풋 웃었다. 거울에 하얀 거품이 튀었다. 청량음료 CF의 한 장면 같이 상큼했다. 이젠 별 게 다 예쁘게 보였다.
“이쪽 저쪽 잘 닦아요. 검사할 거니까.”
시트를 껴안고 욕실 앞을 떠나려다가 문득 한마디 더 보탤 말이 생각나 다시 되돌아갔다.
“아, 거기도 깨끗이. 검사할 거니까.”
입안을 헹궈내던 주세영이 이번엔 거울 속에서 노려봤지만 모르는 척 문 앞을 떠나버렸다.
시트를 갈고 그 사람이 비워준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예상대로 그 사람은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기다리지도 않고 자냐? 무드라곤 약에 쓸래도 없구만. 얼굴에 속았어.
하지만 더블 사이즈의 침대에 내 몫으로 남겨놓은 반쪽만큼의 자리와 그 사람 옆에 나란히 놓인 베개 하나, 그리고 비워놓은 내 자리를 향해 누워 평화롭게 잠든 주세영의 얼굴이 왠지 뭉클해서, 대강 넘어가 주기로 했다. 죽었다가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아주 깊은 잠을 잤다.
■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셔츠와 넥타이 위에 앞치마를 두른 주세영이 현관으로 마중 나오는 꿈을 꿨다. 다이닝룸에는 백김치 국물을 곁들인 국수가 차려져 있고, 욕조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가 가득 차 있고, 그리고 이 이상 상냥할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주세영이 전형적인 멘트를 쳤다. 밥 먼저, 목욕 먼저? 아님, 나 먼저?
그냥 꿈이었고, 꿈속에서도 그건 주세영이 준비한 일종의 플레이였다. 내가 평소에도 그런 여성상을 이상으로 생각해왔다는 뜻이 아니다. 주세영은 분명한 남자이니 내가 이상으로 생각해온 여성상이 있다 한들 그걸 주세영에게 덧씌우거나 기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내가 주세영을 만나기 전에 혹은 앞으로 주세영과 그리고 있는 미래가 그런 형태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확실히 하자면, 혹시라도 우리가 같이 살게 되더라도 앞치마 입고 국수 만드는 건 주세영이 아닌 나일 게 뻔했다. 기쁘게 요리하고, 욕조에 물 받고, 온몸 구석구석 비누칠까지 내가 해줄 각오가 다 되어 있었다.
꿈인 줄 뻔히 알면서도 도발당해 콧김을 뿜으면서 덤벼들었더니 주세영의 앞치마 안이 갑자기 알몸으로 변해 꿈에서도 코피를 쏟을 뻔했다는… 그런 몽정기 중학생 수준의 개꿈이었지만, 깨고 난 뒤에도 이상하게 여운이 있었다. 아니, 알몸의 에이프런에 대한 여운이라는 게 아니라(그것도 아예 없다고는 못하지만) 그 사람과 내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그 공간이 비록 야한 꿈속에서라도 따뜻한 톤으로 그려져서 그게 좋았다.
옆을 돌아보니 아직도 주세영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늘은 헬스클럽에 나가지 않는 날이니까 좀 더 재워도 되겠지. 밤새 수염이 푸릇푸릇하게 돋아난 그 사람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면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군산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재인 데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회장을 도맡아 했을 정도로 리더십도 뛰어나고, 성격마저 점잖고 차분해 할아버지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형이(내 얘기가 아니라서 미안하군) 판사나 검사가 되는 대신 농사를 이어받겠다고 했을 때.
앓아누우신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나 역시도 충격이었다. 그 정도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거기에 맞는 꿈이나 야망을 갖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형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형이 농사를 짓는 건 아주 아까운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슨 실례인지. 한집에서 한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도 난 참 형을 몰랐던 것 같다.
꼭 세상이 다 알아주는 높은 자리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아야 성공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형을 통해 좀 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눈 뜨면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누워 있고, 그 사람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을 내가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성공’이라 할 만했다. 각 개인의 인생의 성공은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게 아니었다.
괜찮은 자리에 취업이 될 거라는 주변의 권유로 경제학과에 지원했지만, 막상 대학을 다니고 군대에 있는 동안에 생각이 달라졌다. 자산관리사나 증권 매니저는 분명 폼 나는 직업이었지만, 왠지 직접적으로 돈과 관계된 직업에는 별로 흥미가 안 생겼다. 활동적인 성격을 살릴 수 있는 직종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지금의 회사가 눈에 들어왔고, 규모나 운영시스템이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기에 딱 적당한 회사 같아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일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고, 이 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 자신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일 자체를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으로 삼을 생각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 형제에게는 유전적으로 그런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딱히 많지도 적지도 않은 연애를 해오는 동안 나는 매번 이 연애가 내 생의 마지막이 되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상대와 내가 바란 사랑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던 건지, 매번 안타까운 거리에서 사랑은 마무리되었다. 지켜주고 싶지만 동시에 기대고도 싶은, 앞으로의 길을 나란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각오가 자연스럽게 생겨날 사람을 계속 기다려왔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우리만의 천국과 우리만의 성공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내 삶의 가장 바탕이 되는 꿈이었다.
성공 그 자체가 되어주는 동시에, 사회적 성공의 이유가 되어줄 사람. 난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할 수 있는 놈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사내놈들이 하나같이 야망이 없다며 또 아버지의 교육 탓을 하시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 아버지도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아들인데.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전 이 사람하고라면 지구의 천국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뽀얀 얼굴에 삐죽삐죽 돋아난 푸르스름한 수염까지도 귀여워 보여요. 수염이라면 나한테도 얼마든지 있는 건데.
곤히 잠든 주세영을 깨워야 한다는 게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이래서 사람들이 사장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장이었다면 오늘 하루쯤은 푹 쉬게 해줬을 텐데. 그래봤자 이 사람은 그런 거 필요 없다며 출근 시간 딱 맞춰서 회사로 가버리겠지만. 또 그런 점이 좋기도 해요. 멋지잖아.
그다지 아침에 강하지 못한 그 사람을 다독여 깨워 비좁은 욕실 안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가며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이런 것도 다 처음이라 재미있는 걸까. 앞으로 열 번쯤 하고 나면, 머리에 거품을 잔뜩 묻히고 샤워기를 찾으려고 벽을 더듬는 그 사람의 모습에도 익숙해져서 하나도 귀엽지 않게 될까? 옷장 앞에 나란히 서서 그 사람이 하나하나 옷을 갖춰 입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나중엔 짜증스러워질까?
“외박한 거 티 나니까 넥타이라도 바꿔 매.”
어릴 때 아버지가 외출준비 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왠지 정갈하고 깔끔한 기분이 되곤 했는데, 그 사람의 절차는 아버지보다 간단하긴 해도 더 샤프한 맛이 있었다. 아버지는 커프스링크에 포켓스퀘어까지 절대로 빼먹는 법이 없는 분이니까. 아버지가 정통파라면 주세영은 응용에 강했다. 서로 세대가 다르기도 하고.
“응, 골라줘요.”
셔츠의 깃을 올리고 얌전히 기다렸다. 손톱이 깔끔하게 정돈된 그 사람의 검지가 즐비하게 매달린 넥타이 위를 쭉 훑어나가더니 네이비 바탕에 흰색 도트 무늬가 들어간 놈을 집어낸다. 그 사람이 골라줬으니 나는 의심 없이 목을 내맡겼다.
“네가 매. 나 바빠.”
“에이, 아직 시간 넉넉한데 뭘. 매줘요.”
자기가 생각해도 어젯밤에 너무 매정하게 굴었다 싶었는지 그 사람은 두 번 튕기지 않고 내 앞에 서서 타이에 매듭을 지어나갔다. 나보다 약간 아래에 있는 눈꺼풀이 내 목에 고정되었다. 열심히 집중한 모습에 슬금슬금 입가 근육이 풀어졌다. 아, 역시 사장을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사장이었으면 이럴 때 잠깐 주세영을 스톱시키고 출근 시간을 미뤄버린 채 모닝 섹스를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그것도 주세영이 기각시켜 버리겠지만.
“넌 덩치가 있어서 타이를 너무 클래식하게 매면 둔해 보일 수 있으니까 특별한 경우 아니면 그냥 플레인 노트로 산뜻하게 매.”
“특별한 경우, 언제?”
“뭐… 쓰리 피스 슈트를 입을 땐 좀 클래식하게 매도 괜찮겠지. 아니면 거래처 담당이 나이가 좀 지긋한 분이거나.”
당신이 나하고 같이 살면서 매일 아침 슈트와 타이와 구두를 골라준다면 앞으로의 내 영업실적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은데. 어때요, 엔 소프트의 꿈나무 한번 무럭무럭 키워보실 생각 정말 없나?
“남의 걸 해주려니까 잘 안 되네.”
폭이 넓은 쪽을 왼쪽으로 감았다가 오른쪽으로 감았다가 끙끙대던 그 사람은 드디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매듭을 완성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런 아침을 내 일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같이 살자.”
“목 졸라버린다?”
그 사람은 매듭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타이의 혀를 쭉 잡아당기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타이로 조르는 건 나중에 침대에서 얼마든지 해도 되니까 일단 같이 살면 안 될까? 당신도 분명 나에게, 또 이 연애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잖아.
“왜 싫은데?”
도망가지 못하도록 허리를 붙잡았다. 단정하게 정리해 올린 머리카락을 확 흩트려버리고 싶었다. 그랬다간 진짜 목 졸리겠지.
“진지해, 너?”
마음에 드는 위치에 매듭을 다시 고정시킨 주세영은 드디어 제대로 상대해줄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최대한 단호하고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살자는 말을 장난으로 꺼내는 놈도 있나?
“너무 빠르다고 생각 안 하냐?”
“해. 근데 그런 문제가 속도하고 상관있는 건가?”
“우리가 불장난으로 같이 살 나이냐?”
주세영이 두 손으로 내 가슴팍을 가볍게 밀쳤지만 나는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붙잡은 팔에 더 힘을 줘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미 우리 이렇게 된 것부터가 완전 제대로 된 불장난 아니야?”
주세영이 나와는 다른 마음이어서, 나와 가볍게 연애나 하다가 때가 되면 헤어질 작정이어서, 같이 살자는 내 말을 장난으로 치부하려 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한다.
오히려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거겠지. 성격이 그랬으니까. 근데 나도 진지해. 다만 나는 당신보다 겁이 좀 더 없을 뿐.
하체를 나와 맞대고 내 가슴에 손을 댄 주세영이 약간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본다. 난감해하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아무 패턴도 들어가지 않은 담담한 흰색 셔츠를 입은 주세영은 투명하게 청순한 동시에 오싹하도록 섹시해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분명 나와 다른 마음이 아니다. 난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그는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 그저 그 차이였을 뿐. 당신처럼 조심성 많은 초식동물은 나 같은 놈하고 사는 게 궁합이 잘 맞다니까.
“받아온 타이부터 제대로 돌려줘. 안 그랬다간 동거고 뭐고, 진짜 목 졸릴 줄 알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면서 재킷을 찾아 내 품을 벗어난다. 이번엔 순순히 허리를 놔줬다. 이제 한두 번 튕기는 걸로는 기죽지도 않아. 내가 진지하게 제안하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당신이라는 거 난 다 알고 하는 수작이거든. 일주일이 될지 한 달이 될지 혹은 몇 년이 될지는 몰라도, 이렇게 계속 들이대면 언젠간 당신하고 같이 살 수 있는 거잖아. 그치?
흰 종이 위에 새파란 잉크를 떨어뜨린 것 같은 타이를 매고, 푸른색 깅엄체크 재킷을 입은 주세영은 역시나 빼도 박도 못하는 상큼한 봄이었다. 바람난 봄 총각. 누구하고 바람이 났으려나….
현관에서 나란히 구두를 신고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로의 재킷 어깨를 털어주고. 이렇게 같은 집에서 나오니까 출근길조차도 데이트 같고 얼마나 좋아.
단둘만 있는 엘리베이터라는 공간에 흥분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CCTV 있어.” 하는 매정한 멘트와 함께 거부당했지만 이젠 거부 멘트조차도 섹시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러다 나 마조히스트가 되는 거 아닐지. 벨트로 때려달라고 매달리기 전에 주세영이 우리 집에 들어와 줬으면 좋겠는데.
“핸드폰, 핸드폰 안 가져왔어.”
1층이 가까워져 오는데 그 사람이 문득 재킷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완벽한 것처럼 보여도 이런 허점이 또 귀엽다니까.
“으이구, 진짜. 내가 가지고 올 테니까 엘리베이터나 9층으로 올려 보내줘요. 패스워드 뭐야.”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오피스텔 패스워드 겟. 나이스 우동주.
그 사람을 1층 로비에 내려놓고 다시 9층으로 올라가 당당하게 패스워드를 누르고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한번주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보자. 어디서 드르륵 드르륵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협탁 위인가, 소파 테이블인가….
그 사람은 과연 나를 뭐라고 저장했을까 하는 기대감에 청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희미한 진동음을 추적해나갔다.
주세영의 핸드폰은 우리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을 것 같은 침대 시트 안에 꽁꽁 숨겨져 있었다. 이렇게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두니까 잊고 나가지. 쯧쯧, 하여간 이런 데서 허술하다니까. 어디 보자, 보나 마나 ‘영업부 우동주’ 뭐 이런 식으로 재미없게 저장해뒀겠지. 별로 기대 안 한다. 주세영이니까.
그러나 언제나 내게 상상 이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주세영. 당신의 신비로운 매력은 어디까지일까.
몸을 떨면서 우는 핸드폰 액정 안에서 깜빡이는 이름은… ‘개뼉다구’….
나처럼 잘생긴 개뼉다구 봤어? 아무리 내가 연하여도 그래도 자기 애인이고, 어제도 침대 위에서 자길 위해 모든 이성을 동원해 인내한 놈인데, 개뼉다구? 와, 나 이건 진짜 그냥 못 넘어가.
미간에 내 천 자를 새기고 1층으로 내려가니 확 구겨진 내 표정을 보고도 그 사람은 심드렁했다.
“뭐. 표정이 왜 그래? 줘, 핸드폰.”
“지금 여기서 나한테 뽀뽀해주면.”
핸드폰을 가져가려고 팔을 뻗길래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거래를 제시했다. 눈썹을 삐죽 치켜 올리면서 나를 쳐다보는 매끈한 얼굴에서 어젯밤의 사랑스럽고 화끈했던 모습이 아른거려 자꾸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려는 찰나.
“너 가져라.”
시큰둥하게 받아치더니 먼저 로비를 떠나버리는 저 얄미운 뒤통수. 밑단을 턴업한 회색 팬츠 주머니에 한 손을 찌르고 예의 바른 척 경비 아저씨에게 묵례까지 하면서 오피스텔을 나서는 저 남자.
여러분, 속지 마세요. 저 남자는 절대 단정하고 금욕적이지 않습니다! 욕실에서 발바닥으로 남의 페니스를 마구 주물럭거리는 그런 남자예요, 저 남자가!
“이렇게 잘난 애인을 개뼉다구로 저장해놓고 죄책감도 못 느껴?”
사랑이 죄다, 사랑이 죄야. 내가 당신을 무슨 수로 이겨. 그저 가끔 가다 툭 던져주시는 당근 하나에 감지덕지해야지. 그래도 다행인 건 그 당근을 던져주시는 장소가 주로 침대 위라는 것.
“봤어?”
자기도 조금은 미안했는지 걸음을 늦춰 뒤따라오는 나에게 보조를 맞추며 뒤를 돌아본다. 진짜 조금만 덜 쌔끈했어도 내가 이렇게까진 안 매달리는 건데.
“봤으니까 이러지. 개뼉다구가 뭐야, 개뼉다구가.”
“넌 뭐라고 했는데?”
“나?”
함께 쇼핑을 했던 날,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심란했던 그날. ‘개발부 주세영 대리님’이라는 딱딱한 저장명이 마음에 안 들어 간절한 염원을 담아 수정했던 바로 그 이름.
나는 우선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고 그 사람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한번주세영.”
완벽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주세영을 골목에 세워놓고 속삭이는 ‘한번주세영’의 어감은 ‘개뼉다구’의 굴욕 따위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어질어질했다. 어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찐하게 키스 한 방 놔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넌 이제 영원히 개뼉다구야. 저질 새끼.”
어젯밤엔 내 가슴에다 사정을 하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애널에 내 손가락까지 넣어놓고, 주세영은 또 이제 와서 자기 혼자 고결한 척을 한다. 내가 저질이면 너도 같이 저질이야, 왜 이러셔.
아, 재밌다. 재밌어 죽겠다. 주세영 대리님, 선배님, 주세영, 세영아. 나만 재밌냐? 어? 진짜 나만 재밌어? 솔직히 말해봐. 너도 나하고 이런 유치한 짓 하는 거 쪼금은 재밌지? 화난 척 지금 앞서 걸어가면서 너 사실은 웃고 있는 거 아니야?
주세영과 투닥투닥하는 출근길은 소풍 가는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재미가 쏟아졌는데, 회사에 도착해 가방 안에 든 넥타이 상자를 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김수희 씨를 따로 불러내 조용히 넥타이를 돌려주는 일은 꽤 까다로운 미션이었다. 6층에 올라가서 직접 부르자니 총무부 사람들이 과도한 호기심을 보일 게 뻔해서, 할 수 없이 내선으로 전화를 걸어 옥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김수희 씨가 넥타이를 준 건 사실이어도, 직접적으로 고백을 하거나 대답을 달라고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괜히 내가 오버스럽게 반응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내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줬다. 남의 일에 신나서 과도한 오지랖을 펼쳤던 주변 사람들이 문제지, 우리 둘은 꽤나 간단하고 깔끔하게 넥타이에 대해 매듭을 지었다.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 지나치지 않은 방식으로 호감을 표시했고, 그 호감에 응할 수 없어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점잖고 조용하게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수많은 제3자들에 의해 떠벌려지고 다소 꼬여버린 게 씁쓸했지만, 김수희 씨는 다들 지금은 관심 있는 것 같아도 금방 잊어버릴 거라며 나를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나보다 나이는 어려도 확실히 사회생활의 선배다웠다.
제대로 거절했다는 보고를 하고 예쁨받고 싶어서 사무실로 내려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주세영에게 들르고 싶었지만, 외근 스케줄이 촉박했다.
“너, 뭐 들고 나가던데. 그거 김수희 씨가 줬던 넥타이 아니었냐?”
어제 그렇게 취했는데도 아침에 거뜬했다며 내 폭탄주 제조법을 칭찬했던 박 대리님은 외근 나가는 보조석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은근하게 말을 꺼냈다. 아무한테도 안 들킨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언제 보고 있었던 건지.
“아, 네, 뭐.”
“왜? 돌려줬어?”
내가 입을 다물고 운전에만 집중하자 박 대리님은 내 어깨를 툭 쳤다.
“나 입 무거워, 인마. 그런 거까지 나불대고 다니진 않는다.”
“죄송하지만 별로 신빙성이 없는데요, 선배님.”
“왜 돌려줬는데? 김수희 씨 별로야? 눈에 안 차냐?”
주세영하고 내가 엔 소프트 안에서 안전하게 연애를 하려면 박 대리님부터 연애를 시켜줘야 할 판이다. 왜 이리 남의 사정에 관심이 많으신지.
“그냥, 입사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지금은 일이나 열심히 해야 될 거 같아서요.”
“아, 네 스타일이 아니란 얘기지?”
이번에도 나는 별 대답 없이 그저 신호등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내가 잘 해봐도 되냐?”
“…….”
박 대리님 자체는 싫지 않아도 남의 사적인 스캔들에 지나친 호기심을 보이는 건 정말 이해가 안 돼서 최대한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나는,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운 듯 그렇게 얘기하는 박 대리님을 돌아봤다.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였어요? 근데 제가 입사하기 전부터도 김수희 씨는 이 회사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지금까지도 두 분 사이에 섬씽이 없었다면 앞으로도 그다지 가능성은 없을 것 같은데….
“글쎄요, 전 별로 상관없지만…. 근데 김수희 씨, 눈이 꽤 높은 거 같던데.”
“너 그거 무슨 뜻이냐? 내가 어디가 어때서?”
아니요. 오며 가며 인사나 좀 하는 사이여서 제가 지금까지는 김수희 씨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 일 겪으면서 보니까 박 대리님한테는 좀 아까… 멋진 분이더라구요. 품의 올리러 갈 때나 잠깐씩 보는 김수희 씨보다야 매일같이 차 타고 서울 여기저기를 함께 누비고 다니는 박 대리님이 정이 들어도 몇 배는 더 들었는데, 오르지 못할 나무에 작업 걸었다가 괜히 마음에 상처만 하나 더 얹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자기가 이래 봬도 용인에 24평 아파트도 마련해놨다며, 박 대리님은 자신이 얼마나 준비된 신랑감인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 다 좋은데요, 저한테 어필하셔서 뭐 하시게요.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선배가 말하면 맞장구를 쳐야하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후배에게 요구되는 도리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최근 몇 년 동안이나 연애를 못 해봤다며, 자신의 사무치는 외로움에 대해서까지 실컷 토로하신 박 대리님은 아무래도 어제 마신 폭탄주가 이제야 신호가 오는 것 같다며 거래처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부터 찾았다.
그 틈에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나는 ‘한번주세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날 개뼉다구 취급하는 주세영이라도 좋으니 충전이 절실했다.
[미션 클리어. 넥타이 잘 돌려주고 외근 나왔습니다. 근데 박 대리님이 오늘 하루 종일 연애로 신세타령하실 각이라 벌써 힘들어요.]
보통 일하고 있는 중에는 답장이 바로바로 오지 않기 때문에 별 기대 없이 이전에 주고받았던 문자들을 쭉 훑어보며 박 대리님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1분도 채 안 돼서 답장이 도착했다.
[박 대리 그냥 습관처럼 하는 말이야. 신경 쓰지 말고 오늘도 일 잘하고 와, 꿈나무.]
신경 쓰지 말고 일하라는 말에, 진짜 신경 쓰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효가 직빵이고, 물보다 흡수가 빨랐다.
[그럼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중지에 이어 검지 도전?]
내가 생각해도 조금만 풀어주면 금세 기어오르는 놈이었다. 그런 놈에게 주세영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이모티콘으로 당근을 치워버리고 채찍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난 채찍질에서도 쾌감을 느끼는 행복의 절정에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 당사자 외에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박 대리님의 연애문제에 대해서도 조금은 진지하게 들어줄 마음이 생겼다. 이런 게 불장난이라면, 앞으로는 불조심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 ZOO SE YOUNG
어디가 좋으냐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일단은 얼굴이다. 그 다음은 몸이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그릇이 큰데다 체력도 좋고 일도 잘한다. 거기다 세 살 연하.
나에게 푹 빠진 그 세 살 연하는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내 퇴근을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침대로 데리고 갔다. 내 오피스텔의 침대였을 때도 있고, 그 세 살 연하의 침대였을 때도 있었다.
“이번 금요일이 영업부 월급날인데, 토요일에 같이 쇼핑 가요. 갖고 싶은 거 사줄게.”
수요일 아침 헬스클럽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는, 잘 키운 자식을 둔 것 같은 기분까지 느꼈다.
“첫 월급으론 부모님 속옷 사드려야 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받아쳤지만 속으로는 좀 감동이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주신 플래티늄 카드를 갖고 있는 놈이라도, 선물을 주고받을 거라면 양말 한 켤레라도 좋으니 그놈이 번 돈으로 사주는 걸 원했다. 나도 우동주에게 그러고 싶었고.
“그것도 하고 이것도 해야지. 내가 번 돈으로 당신한테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첫째가 얼굴, 둘째가 몸이라고 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고, 생각과 마음이 제일 예쁜 놈이었다, 우동주는.
그렇다면 백화점 명품관으로 끌고 가서 등골을 쏙 빼먹어주겠다며 겁을 줬지만, 사실은 몇 번 들락거리면서 단골이 된 이태원의 테일러샵에서 같이 셔츠를 한 벌씩 맞출 생각이었다. 나는 첫 월급이 채 나오기도 전에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한 달치 월급을 웃도는 슈트를 덜컥 결제했던 소비의 제왕이었지만, 그놈이 받은 첫 월급은 아까워서 그렇게 못 하겠다. 나보다 더 부자인 놈인데도.
이번 주 들어서 빠르게 날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토요일인 오늘은 제법 봄기운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더 이상 무채색 일색의 겨울옷이 아니었다. 컬러도 다양해졌고, 사람들의 표정마저도 밝고 가벼웠다.
해밀톤 쇼핑센터 1층의 베이커리에 앉아 우동주를 기다리는 나 역시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전면창 앞 바(bar)에서 내다보는 거리는 북적거렸지만, 나는 딱히 그놈을 찾지 않는다. 굳이 찾지 않아도, 삼거리의 보행자 신호등이 동시에 초록불을 밝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대각선으로 혹은 직선으로 엇갈리면서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교차되는 번잡함 속에서도, 분명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사람이 있었다.
약속 시간은 아직 10분 정도 남았는데 이번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길 저쪽에서부터 걸음을 재촉해 신호등이 깜빡이는 동안에 이쪽으로 무사히 세이프를 하는 남자.
자연스러운 구김이 간 샴브레이 셔츠의 소매를 두어 번 말아 올리고 화이트 재킷을 가볍게 손에 든 그 남자가 반쯤 달리다시피 신호등을 건너는 동안, 베이지색 치노 팬츠와 연한 브라운 계열의 로퍼 사이로 단단하고 샤프한 발목이 슬쩍슬쩍 드러난다. 두리번거리며 찾을 필요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 열 명 중 예닐곱 명은 이미 그 남자를 돌아보고 있었다.
오늘 이태원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와 전면창 너머에서 환하게 웃는다. 얼굴도 좋고 몸도 좋지만, 자신에게로 쏠린 많은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는 편안한 분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조금만 잘나도 저 잘난 걸 스스로 알고 허세를 부리려 드는 남자들이 판을 치는 서울에서 이런 놈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나는 찾았다. 그 남자가 내가 앉은 옆자리를 검지로 콕콕 찔러 가리키면서 입모양으로 묻는다. ‘들어갈까?’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채로 이 남자를 아주 오랫동안 보고 있고 싶은 기분이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부드러운 금발 같은 햇살이 넘실대는 이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 남자의 미소를 어딘가에 가두어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고, 이보다 더 포장되거나 과장될 필요도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함 그대로. 네가 나를 향해 어떻게 웃었는지, 잊고 싶지 않았다.
내가 대답 없이 그저 웃으면서 마주 보고만 있자, 그 남자는 눈썹을 좀 더 위로 치키면서 한 번 더 묻는다. ‘나, 들어가?’
나는 그제야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내가 나갈게.’
나란히 이 봄 속을 걷고 싶어졌다. 손을 잡을 순 없어도, 허리에 팔을 두르진 못해도, 그런 걸로 풀 죽지 않는 나이에 너를 만나서 다행이다.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모두에게 공개한 연애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이 따라오는 게 아닌 것처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연애라 해서 그것이 실패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가장 멋진 남자와의 데이트 약속이었다. 실패에 대한 걱정은 불필요했다. 나란히 셔츠를 맞추고, 오늘은 게 요리나 껍데기 대신 다른 사람들이 연인과 데이트하는 그런 곳에서 식사를 하고, 그리고 저녁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너의 멋진 빌라로 가서 드디어….
테이블 사이사이를 지나 유리문을 밀고 거리로 나오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팔딱 튀어 올랐다. 그것이 튀어 오른 순간 빛에 반사된 비늘의 반짝임에 순간 눈이 부셨다.
서울에서 가장 멋진 남자.
발목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밝은 회색의 면 트레이닝팬츠에 어두운 쥐색 피코트를 입고 두툼한 니트 머플러를 둘둘 두르고, 한남동의 베이커리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셨던 그 남자.
그날 정말 추웠지. 난 시즌 내내 고민하다 결국 시즌 끝날 때쯤 눈 질끈 감고 사버린 카멜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갈 생각뿐이었지만 마음을 바꿔 헬스클럽에 들렀었다.
그날도 생각했었다. 아무도 자기를 쳐다볼 리 없다는 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움직이는, 어깨에 힘을 뺀 미소와 태도가 멋지다고. 평생 남의 시선을 염려하며 살아왔던 주세영에게는 얼굴보다, 몸보다, 옷차림보다 그게 인상적이었다. 얼굴이 잘생기고 몸이 좋고 옷을 잘 입는 남자는 이제 서울에 넘쳐났지만,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닌 자신만의 여유와 에너지로 강한 자존감을 가진 남자는 흔치 않았으니까. 눈앞에 반짝거린 비늘 조각의 실체에 잠시 머릿속이 멍했다.
“왜 그래요? 어지러워?”
서울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 말도 안 돼. 그날 그놈이 지금 이놈이라니.
“아니, 잠깐… 눈에 뭐가 들어가서….”
베이커리 안으로 들어가려던 사람들이 문을 가로막고 선 나를 흘깃거리자, 그 남자는 눈을 잘 뜨지 못하는 내 팔을 부드럽게 끌어 옆자리로 리드했다.
말 한마디 나눠본 것도 아니고 잠깐 창밖으로 기웃거리며 본 것이 전부라 세부적인 생김새보다는 막연한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날 그놈이 지금 이놈이라고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은 물증보다 분명한 심증, 확신보다 강렬한 예감이 있는 법이다.
“어디 봐요. 아파?”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 뺨을 감싸는데, 어제까지처럼 이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내가 서울에서 제일 멋지다고 인정했던 그놈이 이놈이었다니…. 회식자리에서 봤을 때 얼굴과 몸이 아까울 만큼 옷차림은 영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차피 옷은 껍데기일 뿐이었다는, 그런 교훈을 주려는 건가 지금?
“됐어, 이제 괜찮아.”
“왜, 어느 쪽 눈인데. 좀 봐.”
뺨을 놔주지 않으려는 그놈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내리고 겨우 그 눈에 시선을 겹쳤다. 괜히 더 멋져 보였다.
나는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기보다 그런 건 본래 내 안에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운명을 예감했다기보다는 그저 우리 사이의 작은 우연이 기쁘고 소중했다. 좋은 추억이 되겠지.
“너, 이 동네에서 남자 둘이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게이인 줄 안다.”
“뭐 어때. 게이는 아니라고 쳐도 당신하고 사귀는 건 사실인데.”
“큰일 날 소리를 해요.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어쩔래?”
“별걸 다 겁내네. 일부러 떠벌리고 다닐 필요는 없어도, 난 켕길 것도 없는데?”
나는 평범의 결정판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고, 몸을 사리는 편이었다. 남자와의 연애라니, 이 정도로 강한 확신이 있는 우동주가 아니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우동주의 호언장담을 듣고 있으면 나에게도 없던 배짱이 생길 것 같았다. 너하고 라면 정말 뭐든 어떻게든 잘될 것 같은, 도중에 잘 안 되더라도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눈 안 아파?”
“어.”
우동주를 등지고 걸어간 잘 차려입은 남자 두 명이 서로 수군거리면서 우리를 뒤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태원을 돌아다니는 잘 차려입은 남자라고 해서 모두 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느낌이 왠지 그랬다. 그들이 우리를 돌아보는 눈빛에는 일반적으로 동성을 향하는 시선 외의 무언가가 추가되어 있었다.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멋진 이성에게 보내는 우호적인 시선과도 비슷한 느낌으로 우동주를 훑어보는 그들의 시선에 나는 우동주 모르게 그들을 향해 슬쩍 웃었다. 나치고는 꽤 대범한 짓이었다. 얘가 좀 멋지죠? 근데 어쩌나. 얘는 내가 좋대요. 내 몸에 상처 내기 싫다고 일주일이나 허벅지 찔러가면서 손가락 넣는 것만으로 버티는 애거든요, 얘가.
“가자, 예약 시간 늦겠다.”
일부러 우동주에게 더 가까이 붙으면서 팔을 끌었다. 나의 어디에 이런 대담함이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는 사람이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손을 잡지 못해도, 허리에 팔을 두를 수 없어도, 함께 걷는 거리는 이미 완연한 봄이었다.
역 주변을 벗어나니 금세 거리가 한적해졌고 우리는 산책하러 나온 동네 주민처럼 설렁설렁, 앤티크 가구점에서 내놓은 탈바가지를 보고 서로 너를 닮았다며 웃기도 하고, 레스토랑 입구에 세워진 메뉴판을 넘겨보기도 하면서 느긋하게 걸었다.
손잡지 못하는 걸로 풀 죽지 않는 나이에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걷어 올린 소매 아래의 커다란 그 손에 자꾸 눈길이 갔다. 오늘도 그 시계 찼네. 우리 집 욕실 선반에 탁 올려놨던 그 시계. 하지만 붙잡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내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에, 안타까움보다는 오히려 비밀스러운 짜릿함에 가까웠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직장 후배였지만, 나와 둘이 있을 때 우동주는 야하고 열정적인 애인이었다.
“여기야.”
“멋지네. 딱 당신 취향이다.”
아담한 외관에, 쇼윈도 주변의 외벽이 코발트블루로 칠해진 샵을 보고 그놈은 피식 웃었다. 이태원로에서 살짝 벗어난 주택가에 자리 잡은 조용한 샵은 밖에서 보면 입구와 로비가 전부인 것처럼 보였지만, 안쪽으로 꽤 널찍한 공간이 숨겨져 있어 비밀 아지트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마 우동주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정도 연하일까. 젊은 주인이 안쪽 사무실에서 나와 나를 반겨줬다. 그렇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들러서 하다못해 셔츠 두세 개씩이라도 맞추고 갔었는데 지난 한 달 동안은 이놈하고 불장난을 하느라 발길이 뜸했네요.
“같이 오신 분은….”
오늘도 역시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긴장감 넘치게 드레스업을 한 젊은 주인은 내 뒤에 서 있는 우동주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회사 후배예요.”
거짓말은 아니다.
“네, 안녕하세요. ‘드레시 리버스’ 대표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동줍니다.”
영업부의 기대주답지 않게 별다른 사교 멘트 없이 간결하게 이름만 대면서 악수를 나눴지만, 잘생긴 얼굴은 미소를 지으면서 정중하게 악수를 하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잘생기셨네요. 몸도 좋고 스타일도 좋으시구요. 부럽네요.”
그저 빈말이 아니었는지, 요즘 젊은 애들처럼 몸도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얄상한 젊은 주인은 정말 부러운 시선으로 우동주의 길고 탄탄한 몸을 스윽 훑었다. 아마 지난달에 내가 베이커리 테라스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서 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이런 놈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 헬스클럽에 가서 설렁설렁 기구 한 번씩 돌아주는 것만으로도 초콜릿 같은 복근을 유지할 수 있겠지, 같은.
“셔츠 감 좀 보고 싶은데….”
“아, 셔츠요? 잠깐 앉아서 기다리세요. 번치북이 새로 많이 들어왔어요. 금방 가지고 오겠습니다.”
자그마한 로비 한쪽에 놓인 고풍스러운 소파로 우리를 안내한 주인은 사무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셔츠? 왜, 슈트 하나 맞춰요. 내가 해준다니까.”
우동주가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팔꿈치를 툭 쳤다.
“슈트 받은 셈 칠게.”
“아, 왜?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런다니까.”
남한테 돈 쓰지 못해 안달 난 이놈이나, 이놈 돈 아까워서 못 쓰겠다는 나나, 참. 서로 내가 더 좋아한다며 다투는 애들도 아니고.
“나중에.”
“나중에 언제?”
바깥 세계와 차단된 또 다른 아담한 세계인 듯 거리에 넘쳐나던 환한 빛이 살짝 가려진 이 소파에 숨어 이놈과 투닥거리는 이 순간도 아까의 그 미소와 함께 가두어놨으면 싶다. 너와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1%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 결정의 행복이 너무 눈이 부셔서, 나는 조금 마음이 아프려고 했다.
“첫 월급만 월급이냐. 그렇게 나한테 뭐 해주고 싶으면 아예 월급 통장을 내 계좌로 바꿔놓든지.”
“아, 그럴까?”
그러라고 하면 정말 그럴 기세다. 내 말이라면, 월급 통장에 자동차와 빌라까지 내놓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면 안 돼. 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냐? 세상에 대해서라면 나보다 몇 배는 더 똑 부러지게 알고 있을 것 같은 우동주의 처세술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그의 왼쪽 손목을 끌어다 시계를 보는 척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닿아 있고 싶었다. 봄을 타는지, 오늘 꽤 센치했다.
우리는 함께 셔츠 감을 고른 다음 피팅룸에서 치수를 재고 몇 가지 디테일한 디자인을 정했다. 젊은 주인은 아무래도 우동주에게 큰 호감을 가진 듯 평소보다 딱 두 배는 더 친절하게 굴었다. 은근히 신경 쓰였다.
“혹시 자수 넣으시겠어요? 원하시면 셔츠 깃 안쪽에 자수 넣어드리는데. 이름을 넣으셔도 되고, 원하시는 문구가 있으면 그것도 가능해요.”
“아, 그럼 저는 개뼉다구로…!”
먹히지도 않을 농담을 치려 하는 우동주의 뺨을 반대쪽으로 밀어 입을 다물게 했다. 네가 아무리 그런 식으로 발악해봤자 당분간 넌 개뼉다구야. 한번주세영이 뭐냐, 한번주세영이.
“자수는 됐습니다.”
“아니, 해주세요. 제트, 오 오, ZOO.”
미리 생각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우동주는 내 말을 가로막으며 지지 않고 외쳤다. 제트, 오, 오.
“동물원 할 때, 그 ZOO 말씀이세요?”
“네.”
“손님 것만 그렇게 해드리면 될까요?”
젊은 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예의상 그게 뭘 의미하냐는 것까지는 묻지 않았다. 고맙네, 청년. 센스가 있어. 아까 이놈 허리 잴 때 괜히 가슴팍에 얼굴 바짝 갖다 댔던 거, 한 번은 눈감아주지.
“아니요, 오늘 주문한 거 전부 그렇게 해주세요. 괜찮죠, 선배님?”
괜찮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내 얼굴이 빨개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네가 말하는 ZOO가 우동주의 ZOO만은 아니겠지.
“괜찮으시다네요. 그럼, 수요일에 다시 오겠습니다.”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우동주는 저 혼자 오더를 내려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허둥지둥하다가 재킷도 두고 나올 뻔했다. 젊은 주인이 입구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지만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뭐야, 갑자기. 이상하게 생각했으면 어쩌려고.”
샵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와서야 우동주의 허벅지를 정강이로 걷어찼다. 소심한 내 성격 다 알면서 그딴 애드리브를 치다니.
“뭐가. 내가 볼 땐 저 사람이 더 게이 같던데.”
“아, 몰라! 난 이제 저기 못 가! 수요일 날 너 혼자… 찾으러 가든가 말든가 맘대로 해.”
다 큰 남자 둘이 길에서 투닥거리고 있으니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외국인 아저씨가 흘깃거리길래 목소리의 볼륨을 확 줄였다.
“그래서, 싫어? 당신 이름하고 내 이름에 똑같이 들어가는 거잖아, ZOO.”
태양을 마주 보고 서서 우동주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눈이 부신지 재킷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눈썹쯤에 손차양을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놈도 나의 이 성질에 못 이겨 한 번쯤 짜증을 내겠지만, 그런 다툼으로 우리 사이가 잘못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 때가 오면 나도 한 번쯤은 나를 굽히고 먼저 사과해야지.
저녁 먹으려고 이태원 어디에 레스토랑을 예약해놨다고 했는데, 밥이고 뭐고 당장 길 건너의 택시를 붙잡아 타고 우동주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됐어, 밥이나 먹으러 가.”
“화내지 마요. 우리 오늘 사이좋아야 되잖아. 응?”
사이가 좋으면 좋은 거지, 좋아야 되는 건 또 뭐냐. 하지만 서울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나를 보면서 웃는데, 사실은 별로 화가 난 것도 아닌데, 더는 튕길 수가 없었다. 명분이 없었다. 우동주 말대로 싫은 것도 아니었다. 쑥스러움은 싫은 것과는 달랐다.
어딘가에 가두어 간직할 수 없어도 좋다. 내가 보고 싶어 할 때마다 이렇게 눈앞에서 웃어준다면. 그때 그놈, 그리고 지금 이놈. 우동주.
나는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을, 내 손안에 들어온 너를 단지 운명에 맡겨버리기엔 네가… 너와의 시간이 많이 소중했다. 우동주를 택한 시점에서 내 삶은 운명의 개척이나 마찬가지였다.
□ WOO DONG ZOO
월요일은 그 사람 집에서 잤고, 화요일엔 그 사람 집에 들렀다가 난 우리 집에 가서 잤고, 수요일엔 내가 살살 구슬려 아예 다음 날 출근할 준비를 해서 우리 집에서 같이 잤고, 목요일엔 내가 그 사람 집에서 잤고, 어제 금요일엔 그 사람 집에서 놀다가 내가 자정쯤 집으로 갔고….
이럴 바엔 그냥 같이 살자니까? 왔다 갔다 시간과 체력과 기름값이 아깝지 않나? 누가 나 대신 주세영 좀 설득해줬으면.
이런 폭풍 같은 연애는 처음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의 긴장과 흥분 때문에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져 버리면서도, 만나면 달라붙어 떨어지기가 싫었다. 이런 에너지와 체력을 정말 화학작용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가? 우리가 무슨 이팔청춘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춘향이와 이몽룡도 아니고, 어째 이렇게 감정 조절이 안 되고 물불을 못 가리게 되는 건지. 혹시 우리,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는 건가?
우리 둘 중 한 명이 여자였으면, 난 망설임 없이 주세영을 바로 군산에 데리고 내려갔을 거다. 할아버지, 이 사람입니다. 아버지, 얘예요. 엄마, 나 얘랑 살래.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만난 횟수와 관계없이 어느 순간 느낌이 딱 온다더니, 그 말을 갖다 붙여서라도 요즘의 내 감정을 합리화시키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연애 체질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일주일을 그렇게 보냈으면 피곤할 만도 한데 오늘도 나는 알람이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눈을 떴다. 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선명한 색상에 부드러운 테두리를 가지고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왔으면 그건 또 그거대로 촉촉해서 좋다고 느꼈을 거다. 내가 이렇게까지 긍정적이 될 수 있는 줄도 몰랐었다.
물론 지금의 이 에너지가 쭉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게 바로 우리가 로미오와 줄리엣, 성춘향 이몽룡 커플과의 다른 점이다. 어려서, 아직 연애나 사랑을 잘 몰라서, 감정과 열기에 도취되어 삼켜진 게 아니다.
언젠가는 시뻘겋게 활활 타오르는 이 불길도 잦아들어 타닥타닥 조용히 타들어갈 때가 올 거고, 발간 숯불이 되어 아랫목의 화로 속을 데우게 될 날도 오겠지. 하지만 그건 사랑의 변질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우린 아직 일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성장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는 나이고, 그만큼 앞으로 좌절이나 실패를 겪게 될 일도 있겠지. 그때마다 서로 조언자가 되어주고, 의지가 되어주고, 다 잊고 편히 누워 덮을 수 있는 이불이 되어주는 우리의 안정된 모습. 그건 그거대로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다만 지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이 불길의 혀에 내 온몸과 마음을 한번 불살라보겠다는 거지. 주세영하고 안 되면 이젠 영영 이런 사랑은 없을 것 같으니, 더 집중해서 쪽쪽 빨고 더 정신없이 휘둘려야지.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사랑이란 사랑은 모조리 싹싹 긁어서 너 다 가지세영. 하나도 안 아까워.
그렇게까지 붙어 지내다 보니 밖에서 따로 만나 정식으로 데이트하기는 처음이었다. 차를 가지고 나갈까 하다가 그 사람과 좀 걷고 싶은 마음에 택시를 탔다.
약속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사람은 일찍 도착해 있을 게 분명했고, 토요일 오후 이태원역 주변의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이제 바로 저 앞이 약속장소인데 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길래 요금을 치르고 내려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길은 비좁고 급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지 온화한 날씨 속에서 사람들의 걸음은 느긋했지만 짜증스럽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좋은 날이었다. 입고 나왔던 재킷을 벗어 손에 쥐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점심을 먹은 후 디저트 삼아 케이크 한 조각을 사이에 두고 나눠 먹는 커플, 오랜만에 만났는지 커다란 제스처까지 취해 보이며 열심히 수다에 집중한 친구들의 테이블, 그리고 베이커리 전면창 안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남자.
담백하다 못해 씁쓰름한 맛이 날 것 같은 저 탄산수 같은 남자가 사실은 시럽 넣은 커피를 좋아한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사람들은 다 주세영만 쳐다봤다. 라운드가 느슨한, 후들후들한 재질의 실켓 티셔츠를 연회색 슬랙스 안에 정리해 넣어 입은 주세영은, 평일 내내 퀴퀴한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는 프로그래머로는 보이지 않았다. 영미문학에 심취해 있는 문학도거나 깐깐한 취향의 미학 전공자처럼 보였다. 심지어 제 동생을 태운 유모차 옆에 찰싹 달라붙어 지나가던 대여섯 살 된 외국인 꼬맹이까지도 주세영한테서 눈을 못 떼더라. 뭐야,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국적과 인종까지도 뛰어넘는 마성의 매력이야? 흥, 그딴 게 어딨어. 이제 그냥 내 거지.
날 골탕 먹인다고 백화점에 끌고 가서 한 달 월급을 탈탈 털어갈 줄 알았는데, 그러더라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내어드릴 생각이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의 테일러샵이었다.
거기다 슈트도 아니고 셔츠나 몇 벌 같이 맞추자니. 자기 월급은 죄다 몸에 걸치는 걸 사는 데 쓸 것처럼 생겨서는 내 월급 쓰는 건 아까운지, 끝까지 셔츠면 된다고 우기는 이 남자가 너무 좋아서 앞으로 돈 많이 벌자고 결심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돈 말고, 내가 일해서 내가 번 돈으로 뭐든 다 해주고 싶었다. 물론 나보다 경력도 많고 연봉도 높은 주세영은 내가 해주지 않더라도 본인의 수입으로 원하는 걸 가질 수 있겠지만, 그건 그거고 또 애인이 해주는 건 기분이 다른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영업의 황제가 돼서 인센티브 팍팍 받아올 날이 머지않았어.
우리 이름을 하나로 겹쳐 놓으면 ‘우동주세영’이라고 기가 막히게 딱 떨어진다는 건 그 사람을 만나고 얼마 안 돼서 벌써 알아차렸다. 깃 안쪽에 원하는 문구를 넣어준다는 말에 그게 딱이다 싶었는데, 부끄럼 많이 타시는 주세영 선배님은 그게 또 불만이었는지 길거리에서 내 허벅지를 막 걷어차면서 투덜거렸다. 자기도 영 싫기만 한 건 아니면서.
잠시의 투닥거림은 또 금세 잊고, 우리는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약간 이른 저녁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갈수록 그 사람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버섯이 들어간 크림 스파게티를 포크로 헤집기만 하더니 디저트로 주문한 아이스커피는 반이나 남겼다.
“내가 만들어주는 커피가 훨씬 맛있지?”
긴장을 풀어주려고 건넨 농담에도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건성으로 웃는 게, 조금 있으면 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을 것 같은 얼굴이어서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뭘 그렇게 긴장을 해요. 이번 주 내내 우리 열심히 했잖아. 어제 내 페니스하고 거의 비슷한 두께의 플러그까지 부드럽게 잘 들어가는 거 우리 둘 다 확인했고. 긴장할 거 없다니까.
하지만 솔직해지자면, 나도 이젠 더 태연한 척할 수가 없었다. 점원을 불러 계산을 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아직 완전히 해가 저물진 않았지만 어느덧 오후에서 저녁으로 시간이 옮겨가고 있었다.
“바람도 좋은데 걸어갈까? 피곤하면 택시 타고.”
“아니, 좀 걷자.”
내 마음 같아서야 바로 택시 타고 집에 날아가서 베드인 하고 싶었지만, 바짝 긴장한 그 사람을 위해 산책 겸 느긋하게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집까지 가는 길은 한적해서 산책하기에 괜찮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걸어가자고 한 주세영은 산책이 아니라 경보 연습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자꾸 걸음이 빨라졌다. 생각에 깊이 잠긴 것 같은 얼굴로 말도 별로 없었다. 아, 진짜 왜 이렇게 귀여운 건지.
한남오거리를 지나 내가 아직 입사하기 전에 자주 들러 빵도 사고 커피도 마시고 했던 베이커리쯤 가서야 주세영은 걸음을 늦췄다.
“여기서 도보로는 얼마나 걸려?”
“이제 한 10분? 피곤해요?”
사실 지금 그 사람의 걸음으로는 10분도 채 남지 않은 거리였다. 이럴 거면 그냥 택시 타자고 하지. 난 또 당신이 이렇게까지 나와의 합체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하긴 당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니까. 어제는 거기에 플러그를 꽂고 그렇게 헉헉대기까지 하고 말이야(아, 결국 우리는 화요일에 확장 플러그 포함 그 외에 이것저것 주문해서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쓰고 있는 중이다).
“아니, 그냥….”
얼버무리면서 베이커리 쪽을 자꾸 흘깃거리길래 빵 먹고 싶냐고 물었지만 그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 빵 맛있는데, 다음에 그 사람이 올 때 집에 좀 사다놔야지.
해 질 녘이 되니 아무래도 날씨가 쌀쌀해졌지만 확실히 봄이 오긴 왔는지 상점들마다 거리를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완만한 언덕을 좀 더 올라가 유엔빌리지 입구로 들어섰을 때쯤 얼굴에 차가운 뭔가가 툭 떨어졌다.
“뭐야, 비 오나?”
코끝에 작은 물방울이 와서 톡 내려앉길래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낮게 깔리긴 했어도 그다지 비가 쏟아질 것처럼 무거워 보이진 않았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응? 난 모르겠는데. 어? 온다, 비 온다.”
같이 멈춰 서서 덩달아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사람도 뺨을 닦아내면서 나를 쳐다봤다. 툭, 툭, 투둑. 내 코끝에 한 번, 그 사람의 뺨 위에 한 번 떨어진 빗방울은 곧 눈에 보일 정도로 실선을 그으며 내려오더니, 순식간에 아스팔트 위에 둥근 얼룩을 만들며 쏟아졌다. 여름 소나기처럼 마구 퍼붓는 비는 아니었지만 분무기로 쏘는 듯 가늘게 흩뿌리는 비도 아니었다.
유엔빌리지에 데이트를 나왔던 연인들은 비를 피할 카페나 식당을 찾아 서둘러 사라졌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왔던 사람들도 강아지를 품에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각자 재킷을 벗어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달렸다.
데이트한다고 기껏 신경 써서 잘 차려입은 남자 둘이 재킷을 뒤집어쓰고 빗속을 달려가는 모습을 누가 본다면, 무슨 청춘 드라마 찍냐며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신났다.
로퍼의 얇은 바닥이 아스팔트 위를 때리는 감각에 발바닥이 징징 울렸지만,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유쾌했다. 뒤집어쓴 재킷 안에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소리 내서 웃었다. 별로 웃긴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웃음이 났다. 요즘 그 사람 따라 헬스클럽을 다녀서 그런지 달리는 게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도중에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길래 손을 잡아끌었다. 그 사람의 입술에서 부풀어져 나온 희미한 입김이 빗줄기 사이로 금방 흩어졌다.
지금 만약 어딘가의 처마 밑에 들어가 잠깐이라도 비를 피하게 된다면, 주세영이 허벅지가 아닌 거기를 걷어찬다고 해도 키스를 하겠다고 덤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일단 집에 좀 빨리 가자, 응? 주세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비가 내리는 한적한 거리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진회색의 우리 빌라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옅은 브라운 색이었던 로퍼의 발등이 비에 젖어 밤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차고 옆 작은 뒷문으로 들어가 빌라 로비에 도착해 뒤집어썼던 재킷을 펼쳐 보니 제법 젖어 있었다. 그것마저도 괜히 웃겨서 우리는 재킷의 물기를 털어내며 웃었다.
그 사람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져 있었다. 달려오느라 홍조가 오른 젖은 뺨과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싱그러웠다. 주세영과 만난 후로 이번 봄에는 비가 잦다. 올해는 농사가 풍년이 될 조짐이다.
“괜찮아요? 많이 젖었어?”
그 사람의 뺨을 쓸어 물기를 걷어냈다. 재킷을 뒤집어썼다고는 해도 앞머리며 얼굴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얇은 실켓 티셔츠가 추워 보여서 안아주고 싶었다. 이런 걸 입고 있으니 셔츠에 슈트를 입고 있을 때보다 더 슬림해 보인다. 쇄골도 드러나고, 뭔가 자꾸 나풀나풀거리는 것이….
“아니, 별로. 괜찮아.”
내 눈빛의 끈적임을 눈치챈 주세영이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닥진 젖은 머리카락 끝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젖으니까 더 이쁘네.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 사람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엘리베이터엔 CCTV 없어.”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코너로 몰아붙이며 허리를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주세영은 아직 분위기를 덜 탄 모양인지 힘껏 내 가슴을 밀어냈다.
“뻥치지 마. 저건 그럼 CCTV 아니고 뭐냐?”
아이, 진짜. CCTV를 꼭 저렇게 ‘나 씨씨티비임’ 하고 티 나게 달아놔야 되나? 서너 발자국 뒤로 밀려난 나는 진짜 까일까 봐 다가가진 못하고 팔을 뻗어 그 사람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여긴 내 빌라잖아. 난 들켜도 상관없다고.”
“언제는 여기서 같이 살자며. 들키면 난 절대 안 들어와, 여기.”
귀가 번쩍 뜨였다. 지금 고작 키스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들어올 거야?!”
“아직 그런 얘긴 안 했는데.”
3층까지는 금방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세영은 당근을 주려다 말고 바로 뺏어가 버린다. 그래도 검지에다 은근슬쩍 내 손가락을 감고 내려줬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당근을 계속 먹고 싶으면 졸졸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너, 들어가자마자 뭐 할 생각 하지 마. 나 준비할 거 많아.”
내 중지에 자기 검지를 걸고 패스워드 누르는 내 옆에 서서 참 똑 부러지게도 경고장을 날린다. 이거 봐. 본게임 들어가면 나보다 더하다니까.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뭘 준비할 건데요, 응? 어떤 준비? 어떻게 하는 건데? 내 앞에서 하면 안 돼?
얻어맞을 땐 얻어맞더라도 얼굴을 들이밀고 히죽거리고 싶었지만 한기로 덜덜 떨리는 어깨가 안쓰러워서 일단 얼른 문을 열고 현관 안으로 그 사람을 밀어 넣었다.
“같이 목욕할까? 당신 감기 걸리겠다. 티셔츠가 너무 얇아.”
다른 손가락들도 꼬물꼬물 그 사람의 손가락 사이에 얽었다. 깍지 낀 채로 신발을 벗으면서 나보다 앞서서 복도로 올라서는 그 사람의 어깨선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찰싹 달라붙어 가볍게 이를 세워버렸다. 그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휙 쏘아보면서 어깨를 문지른다.
“이 티, 은근 야하다.”
“네 머릿속이 야한 거겠지.”
“그것도 맞고. 물 받을게요. 젖은 옷은 빨리 벗어.”
그 사람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주고 뺨에 쪽 입을 맞춰주고 아쉽지만 깍지 낀 손도 놔주고, 욕조가 있는 마스터룸 욕실로 거의 달려가다시피 했다. 급한 마음에 복도를 걸으면서 셔츠의 단추를 풀어 욕실로 들어가기 전 파우더룸 안의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바짝 말라 있는 욕실 바닥을 맨발로 밟고 들어가 안쪽의 욕조에 조금 뜨겁다 싶을 정도의 온도로 물을 맞춰놓고 캐비닛 안에서 입욕제를 골랐다. 아직 이 집이 우리 가족 소유였을 때 어머니가 채워놓은 것들인데 이렇게 또 빛을 발하게 됐다. 엄마, 땡큐. 이젠 엄마, 아버지가 우리보다 당신들 서로를 더 사랑한다고 해도 이해해요. 아니, 그게 맞는 거였어요. 아들, 성장했답니다.
라벨이 붙어 있어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일일이 뚜껑을 열고 향을 확인한 뒤에 어렵게 겨우 하나를 골랐다. 나 혼자 할 때는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써버리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나름 신중을 기해봤다. 처음 뚜껑을 열면 정종 냄새가 강하지만 막상 욕조에 풀었을 때는 달큰한 복숭아 냄새와 섞이면서 긴장이 이완되는 게 꽤 섹시한 느낌의 입욕제였다. 역시 써본 경험이 있는 걸로 고르는 게 안전하지. 뚜껑을 열어 아낌없이 쏟아붓고 거품이 잘 생기도록 월풀을 돌려주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 해? 바지 다 젖겠다.”
“…….”
주세영은 진짜 가끔씩 사람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제 막 내 앞에서 긴장도 안 하나 봐. 그냥 옷 다 벗고 알몸으로 들어와서도 완전 당당하네.
그게 아니라, 이 남자가 진짜…. 누구 심장마비로 여기서 죽는 꼴 보고 싶어? 자기 준비할 거 많다고 덤비지 말라 그러더니 언행 불일치도 정도가 있지. 이래놓고 덤비면 또 나만 짐승 취급할 거지?
“뭐야, 냄새 좋네. 나 먼저 샤워 좀 할게.”
난 욕조 안으로 허리를 굽히고 고개만 돌린 채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는데, 그런 내 사정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세면대 맞은편의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뒷모습이 얄미울 지경이었다. 두고 보자, 주세영. 이 빌라에서 나가고 싶지 않게 만들어주겠어.
바지와 브리프를 벗어 파우더룸 쪽으로 대강 던져두고 샤워부스 안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선 채로 머리를 감고 있던 주세영이 윙크를 하듯 눈을 찡그리면서 나를 힐끔 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머리 감는 데에 열중한다. 거품이 흘러내린 것도 아닌데 머리 감으면서 왜 눈을 못 떠? 애기야? 아니면, 눈 감고 모르는 척해줄 테니까 와서 마음껏 장난치란 얘기?
내 검지발가락이 주세영의 뒤꿈치에 거의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서서 머리를 감느라 치켜든 팔뚝에 입을 맞췄다. 그래도 달리 거부반응이 없길래 옆구리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샤워 안 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당신도 외출하기 전에 샤워하고 나왔을 거 아냐. 간단히 물샤워만 하고 빨리 들어가자. 응?”
옆구리를 쓰다듬던 손을 앞쪽으로 옮겨 판판한 아랫배와 가슴을 쓰다듬다가 한 손을 좀 더 아래쪽으로 미끄러뜨렸다. 물에 젖어 가지런해진 음모가 손가락에 걸린다. 손끝에 좀 더 강한 힘을 주면서 음모를 긁듯이 내려가 마침내 페니스를 손안에 넣었다. 나쁘지 않은 사이즈다. 모양도 예쁘고 고환도 자리를 잘 잡았다. 그래서 흔들릴 때의 탄력감이 멋졌다. 머리 감는데 불편하게 뒤에 착 달라붙어서 내가 페니스를 주물럭거리는데도 주세영은 별말이 없었다.
“물 좀 틀어줘.”
마치 페니스를 주무르는 내 손 따위는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성적 긴장으로 그의 허벅지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왜 머리 감으면서 눈을 못 떠요? 다 큰 어른이.”
팔을 뻗어 샤워기의 레버를 돌려주면서 좀 더 그 사람에게 밀착했다.
“몰라. 어릴 때부터 버릇이 돼서 그런지 못 뜨겠더라.”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 선 그 사람의 머리에서 흰 거품들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거품을 씻어내기 좋으라고 상체를 뒤로 좀 젖혀줬다. 덕분에 하체가 더 바짝 붙어버렸다.
“야. 너 왜 벌써 딱딱해지려고 해?”
“당신이 눈앞에서 다 벗고 있는데 그럼 내가 안 서?”
“말은….”
마디가 단정한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거품을 씻어내는 모습을 본다. 물에 섞여 흘러내린 거품이 그 사람의 엉덩이 골 사이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 좋았죠?”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펼쳐 손끝을 그 사람의 등에 대고, 흘러내리는 거품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
“내가 셔츠에 ZOO 새기자 그래서 진짜 화났어요?”
“아니.”
“다음엔 진짜 갖고 싶은 거 사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거품을 깨끗하게 씻어낸 그 사람이 샤워기의 레버를 잠그고 내 쪽으로 돌아섰다. 나한테 딱딱한 게 닿는다고 뭐라 그러더니 자기도 그렇게 무르지만은 않았다. 나를 응시하는 주세영의 젖은 속눈썹이 무거워 보인다.
“그런 얘기 그만하고 욕조로 가자.”
나는 웃으면서 샤워부스의 문을 밀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주세영이 내 앞을 지나쳐 먼저 샤워부스 안을 빠져나갔다.
■
“물 온도 괜찮아요?”
“어, 딱 좋아.”
맞은편에 앉은 그 사람은 욕조 가장자리에 양팔을 걸치고 목을 뒤로 젖히며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정말 기분 좋다는 듯이.
깊게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길고 깔끔한 목덜미에 불거진 결후가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섹시해서 보기 좋긴 한데, 나 좀 보지?
“목이랑 어깨랑 좀 주물러줄까요? 피곤해 보이는데.”
무릎을 세우고 앉은 그 사람의 발가락을 찾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자 겨우 나를 봐준다. 네 시커먼 속 같은 건 벌써 훤히 알고 있어, 라는 눈으로 날 본다. 근데 아마 지금 당신 속도 하얀 도화지 같지는 않을걸? 욕조 가장자리에 걸쳤던 오른팔을 꺾어 관자놀이를 받치고 잠깐 삐딱한 얼굴로 나를 보던 그 사람은, 다 알지만 속아준다는 듯한 태도로 물속을 거슬러 와 내 앞에 앉았다.
넘칠 듯 풍성하게 가득 찬 거품이 그 사람의 가슴에 휘감겼다. 앞에 앉은 주세영 모르게 입모양으로만 웃으면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물과 거품으로 미끄러워진 살결이 주무르기 편했다.
“긴장했어요? 어깨가 뻣뻣하네.”
사실 매끈하게 빠진 뼈대 위에 근육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어깨라 딱히 피곤하지 않아도 말랑말랑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조금씩만 찰흙을 떼어내 군더더기가 없도록 조심조심 덧붙여나간 것 같은 근육이라 밀도가 높고 단단했다. 그 사람은 자기 육체에 별로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것 같았지만, 밸런스가 좋은 예쁜 몸이었다.
“긴장은 무슨.”
“아까 밥도 제대로 못 먹던데, 뭘.”
“네가 예약한 데가 맛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맛없는 거 좋아하시네. 내가 화요일부터 블로그란 블로그는 다 뒤져가면서 제일 맛있다는 집으로 골라서 예약한 건데, 맛이 없긴 뭐가 없어? 안심 스테이크도 냉장육을 썼는지 입에서 살살 녹던데. ‘응, 오늘 너하고 끝까지 갈 생각을 하니까 긴장되고 기대돼서 밥을 못 먹겠더라’, 라고 해주면 엉덩이에 뿔이라도 나지? 하긴, 그런 말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내가 아는 주세영이 아니지.
“그럼 다음엔 어디 갈까? 당신 좋아하는 데로 가자.”
“아, 거기… 거기 좀 더 해봐. 시원하다.”
묻는 말엔 대답도 없이 목을 꺾어가며 어디어디를 주무르라고 주문까지 한다. 부드럽게 어깨를 쥐었다 놨다 하던 손을 좀 더 미끄러뜨려 척추 위를 꾹 눌러줬더니 애무할 때와 같은 땅에 끌리는 듯한 신음을 흘리면서 목을 젖힌다. 따뜻한 습기와 달콤한 복숭아 향이 가득 찬 욕실에, 그 사람의 신음 섞인 목소리가 가늘게 진동한다.
“여기?”
나는 일부러 엉뚱한 곳을 짚었다.
“아니, 거기 말고, 더 아래.”
가끔 생각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말인데 주세영이 발음하는 어감이 괜히 야릇할 때가 있다. ‘우리 집 갈래?’ 할 때라든지, 지금처럼 ‘거기 말고, 더 아래’라고 할 때라든지.
“너 지금 일부러 이러지?”
“당신이 거기, 거기, 이러니까 야하잖아.”
욕실이라는 공간, 욕조 안의 거품 목욕이라는 상황, 몸을 데우는 습기, 달콤하다기보다는 달큰하게 올라오는 짙은 복숭아 향. 이런 최적의 조건 속에서도 모르는 척 내게 등을 보이고 앉아 마사지에만 집중하는 주세영. 슬슬 본게임 좀 들어갔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리님?
“거기 말고, 더 아래.”
“어디?”
“쭉 내려가면서 다 눌러봐. 손아귀 힘이 좋아서 그런지 엄청 시원하다.”
이 아저씨가 진짜, 우리 집에 마사지 받으러 왔냐? 아니, 내가 사랑하는 주세영 마사지 좀 해주는 게 억울하다는 게 아니라, 꼭 지금이어야만 하냐 이거지. 난 분위기 좀 띄워보려고 주물러준다고 한 건데 뭘 이렇게 본격적으로 안마를 받으려고 해? 오늘 우리의 진짜 목적이 뭔지 당신 잊은 건 아니겠지?
“시원해?”
“어, 좋다. 더 아래.”
척추와 골반이 만나는 곳까지 내 손이 내려갔는데도 그 사람은 더 아래까지 주무르라며 재촉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까라면 까야죠.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엉덩이 위로 골반 뼈까지 꾹꾹 눌러가면서 성심성의껏 열심히 주물렀다. 물속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손놀림이 둔해졌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다 좋은데, 이런 느긋한 시간은 섹스 끝난 다음에 보내면 안 돼? 나 일주일 기다렸어. 얼마나 더 참아야 되는데?
“아니. 더 아래, 동주야.”
“…….”
당목으로 힘껏 때린 종처럼 온몸이 울렸다.
너 솔직히 말해. 어디서 배워오지? 분위기 조성하는 데 전혀 관심 없는 척 상대를 방심 혹은 실망시키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사람 미치게 만드는 수법 같은 거, 그런 거 가르쳐주는 학원 다니지? 어디야, 거기? 가서 수강료 내가 대신 내줄게. 뭐 그런 흐뭇한 학원이 다 있어?
미안, 내가 당신의 깊은 뜻을 눈치채지 못하고 툴툴거렸네. 우리 주세영 선배님이 진짜 마사지 받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구나. 당연히 마사지해드려야죠. 이제부터 큰일 하실 귀한 몸인데.
“여기?”
주세영의 엉덩이 골 사이로 중지를 밀어 넣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어서 그런지 마치 맞춘 것처럼 벌어진 틈으로 손가락이 쉽게 들어갔다. 주세영이 작게 웃었다. 이번엔 촉촉한 뒷목에 입을 맞췄다.
“여기?”
간지러운 입맞춤에 주세영이 또 웃는다.
“또 어디, 응?”
엉덩이 아래로 찔러 넣었던 손을 거두어 그 사람의 허리를 끌어안고 내 가슴 앞으로 바짝 당겼다. 그 사람의 엉덩이에 내 페니스가 짓눌렸다. 주세영이 고개를 돌리고, 우리는 키스를 했다. 잔입맞춤 없이 곧바로 입술을 열어 혀부터 얽었다. 직설적으로 움직이는, 뜨겁고 축축한 두 살덩이의 마찰음이 습기로 가득 찬 욕실 안에서 평소보다 더 강한 점성으로 청각을 데웠다.
주세영이 내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몸을 약간 틀었다. 입술이 좀 더 깊게 밀착됐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찰방찰방 물소리가 귓가에 간지러웠다.
주세영은 키스도 잘한다. 일단 적극적이라서 좋다. 장난스럽게 내 혀를 피해가며 애를 태우기도 하고, 반대로 내 혀를 자기 입안으로 유인해 강약을 조절해가며 빨아주기도 한다. 주세영의 입안으로 들어가려는 놈처럼 턱을 틀어 입술을 더 깊이 겹쳤다. 겹쳐지는 압력에 아랫입술이 뒤집히고, 그저 로맨틱하지만은 않은 질척한 소리가 흘렀다.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끌어올려 가슴을 더듬었다. 적당한 두께감의 근육에 골이 제대로 쪼개진 멋진 가슴이다. 어디 있는지 뻔히 알고 있는 유두를 놔두고 일부러 엉뚱한 곳만을 헤매는 내 손길에 그 사람은 몸을 뒤틀면서 애달아 했다. 내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이 허벅지를 쥐어뜯듯이 쓸어내린다.
“음―.”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신음이 흐르고, 키스는 점점 더 격해져 나중엔 숨이 차올랐다. 입술을 오래 틀어막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가파르게 치솟는 흥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 뒤엉켜 주둥이로 깨물면서 노는 강아지들처럼, 아니 그런 귀여운 것에 비유하기엔 우린 덩치도 너무 크고 혀의 움직임도 야하지만 어쨌든, 이쪽저쪽으로 턱을 비틀어가며 서로에게 열중했다.
허벅지를 쓰다듬던 손을 엉덩이로 가져가 잔뜩 움키고 있던 그 사람은 완전히 몸을 틀어 내 목에 팔을 감으며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나는 아래로 꺾여 들어간 페니스를 끄집어내 그 사람의 페니스와 잘 맞물리도록 위치를 조정했다.
“무거워?”
판단력이 흐려진 것 같이 풀린 눈동자와 타액에 젖은 입술로 그 사람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느슨해진 표정과 달리 내 뒤통수를 문지르는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욕망을 절제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주세영의 손안에 갇힌 본능은 마음껏 날뛰고 싶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아마 주세영은 그걸 막을 수 없을 거다.
“아니, 깃털 같은데?”
그 사람의 턱을 이 사이에 물고 잘근잘근 가볍게 씹었다.
“그러면 내가 좋아할 거 같냐?”
어느 정도 발기가 진행된 그의 페니스가 내 페니스에 비벼졌다.
“농담 아니고 나 지금 너무 황홀해서 무게감을 못 느끼겠어.”
나보다 좀 더 위에 있는 주세영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사이사이 주름진 엷은 피부가 안타까운 거리에서 마주 닿았다. 그렇게 입술만을 마주 댄 채로 몇 번을 더 가볍게 문질렀다. 살짝살짝 스치는 촉감에 애가 타면서도 뭉근하고 진득하게 끓어오르는 흥분이 만족스럽기도 하다.
“나 진짜…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뭐가.”
입술 끝이 겨우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 사람이 낮게 중얼거렸다.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지만 이미 욕망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버린 사람들이 내는, 그런 목소리였다.
“사내놈 허벅지에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으니…. 이러다 고추 떨어지면 어떡하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겨우 키스가 문제였어? 지난 일주일 동안 당신이 나하고 뭘 하면서 놀았는지 벌써 다 잊었어? 당신 어제는 거기서 뭔가가 느껴진다면서 좀 더 부드럽게 건드려보라고 날 막 조종했잖아. 플러그가 도착했던 날 호기심에 눈을 빛내면서 그 정갈한 손가락으로 요리조리 만져보고 그랬잖아.
그런 건 괜찮고, 내 허벅지 위에서 키스하는 건 안 돼? 뭘 걱정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젠 못 물러. 우린 이제 없던 일이 될 수 없어. 거기까지 온 거야. 괜히 고민하지 마.
“우리 주세영 선배님 고추 떨어지면 안 되지. 절대 안 떨어지게 내가 꼭 붙잡고 있을게. 그럼 돼.”
맞붙은 아랫배 사이로 손을 밀어 넣으며 그렇게 말하자, 그 사람이 웃으면서 내 뒷머리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겼다.
넓게 벌어진 단단한 어깨에, 근육이 붙은 퍽퍽한 가슴에, 여러 조각으로 쪼개진 복부와 새카만 음모가 넓게 뒤덮인 나와 같은 구조의 성기에, 내가 이렇게 흥분하다니. 이 상황이 얼떨떨한 건 당신만은 아니라고.
그니까 그냥 우리 같이 미쳐요. 진짜 게이가 된 건지, 주세영 한정인지는 몰라도, 머리 아프게 그런 거 생각해서 뭐 해. 중요한 건 우리 둘 다 이제 여기서 빼도 박도 못한다는 건데.
“되긴 뭐가 돼. 그게 해결책이냐?”
덤벼드는 내 얼굴을 마구 밀어내면서 키득거리는 그 사람의 웃음소리가 좋았다. 웃는 입술에 그대로 내 입술을 겹치고 혀를 밀어 넣고 마음껏 휘저어 웃음이 신음으로 바뀌는 것을 듣고 싶었다.
“다 된다니까 진짜. 어디 보자…. 아직 안 떨어졌네. 걱정하지 마요.”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페니스를 손에 쥐었다.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있는 미끌미끌한 감촉에, 안 그래도 서서히 지펴지고 있던 흥분이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엄지손가락으로 귀두를 한 바퀴 훅 훑었다. 그 사람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바짝 고개를 치켜든 두 페니스에 시선을 고정시킨 우리의 숨소리가 욕실을 가득 채우고 팽창한다. 하아 하아? 혹은 스흡 스흡? 인간의 언어로는 똑같이 재현해낼 수 없는, 말이 아닌 형태의 소리가 말보다 더 분명한 서로의 의사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육체의 언어.
참 이상한 게, 어느 순간,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상의가 필요 없을 때가 있다. 나는 그 사람의 엉덩이를 움켜쥐었고, 그 사람은 내 등을 바짝 잡아당기며 더 안쪽으로 성큼 들어앉았다. 맞붙은 페니스에서 불이 지펴졌다.
허리를 튕겨가며 그 사람을 쳐올렸고, 좀 전까지만 해도 키스 하나에 고뇌하던 주세영은 어디로 가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날것 그대로의 주세영이 나타나, 조금이라도 더 페니스를 압박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부피와 질량을 가진 살덩이는 서로 얽혀들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며 우리를 안타깝게 했지만, 갈 듯 말 듯한 그 아슬아슬함마저도 지금의 우리에겐 머리가 뜨거워지는 자극이었다. 사방으로 거품이 튀고, 욕조 밖으로 물이 흘러넘쳤다.
주세영은 나중엔 아예 내 등 뒤의 욕조 헤드를 붙잡고 전력을 다해 내 아랫배에 페니스를 문지르고 비벼댔다. 아니, 그런 표현으로는 그 박력을 전달할 수 없었다. 들이박았다는 말이 더 맞을 거다.
그런 식으로 욕망을 내게 쏟아 붓는 주세영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한창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느라 장소도 상황도 잊어버린 채 헐떡거리는 주세영을 당장 욕실 타일 위에라도 쓰러뜨려놓고 콘돔도 끼지 않은 생페니스를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이 전신을 장악할 것 같았다.
아랫도리의 흥분에 지배되어 날뛰는 남자의 모습에 발정하다니. 나야말로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그 사람에게 갈수록 더 깊이 빠지는 자신을 직시하면서도 스스로의 변화에 문득문득 놀라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아아… 하… 후우….”
나보다 먼저 절정을 맞은 주세영은 무릎으로 버티고 서서 내 가슴 아래에 페니스를 짓이겨가며 사정했다. 나는 뒤에서부터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주세영의 고환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꼿꼿하게 몸을 세운 내 페니스를 위아래로 흔들어가며 사정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한 번이라도 빼고 본게임에 들어가는 게 낫겠지 싶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주세영은,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쾌감이 주무르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허리를 털고 신음하는 주세영은, 사정에 이르도록 해주는 확실한 촉매제였다.
각이 잡힌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 삼각근이 팽팽하게 솟아오르고, 얕은 가슴골 사이로 거품이 미끄러진다. 팔딱거리는 배에 패인 복근의 윤곽을 혀로 핥았다. 입욕제의 거품 때문인지 복숭아 향이 났다.
“너… 못 갔지?”
울컥울컥 몇 번에 나누어 사정한 그 사람은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쓰다듬었다. 날 내려다보는 눈이 뭔가에 푹 젖어 있었다. 아직 덜 사그라진 주세영의 페니스가 가슴께에 슬쩍슬쩍 와 닿았다. 아… 지금, 지금 갈 거 같은데…. 좀 더, 좀 더 만져줘.
표정을 보고 내 마음을 알아챈 주세영이 얼굴을 쓰다듬던 손으로 뒷머리를 어루만지면서 허리를 굽혀 앉았다. 내 머리통을 감싸 안고 귓바퀴 위에 부드럽게 입술을 비빈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거친 호흡이 새어 나와 귓속을 데웠다. 주세영의 입술이 닿은 귀, 주세영의 가슴에 파묻힌 뺨, 주세영의 페니스에 찔리는 가슴. 그 모든 것에 자극받은 나는 욕조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의 허리를 좀 더 끌어내려, 회음부에 대고 귀두를 문질렀다. 눈앞의 가슴에 입술을 박고 이리저리 고개를 치대며 닥치는 대로 핥고 빨고 깨물었다. 사정 직전의 흥분에 손이 엇나가 가끔씩 귀두가 주세영의 고환 뒤를 찌르기도 했다. 사정을 한 뒤에도 만족감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더 거센 욕망이 차올랐다. 넣고 싶다는 본능으로 가득 차버렸다.
“평소보다 빨리 갔네?”
주세영이 끌어안은 내 머리 위에 입을 맞추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빨리 가려고 애쓴 거거든? 당신 생각해서.”
괘씸한 마음에 이를 세워 유두 주변을 깨물었다. 감정이 실려 꽤 아팠을 텐데 웬일로 주세영은 아무 반응이 없다. 심지어 다시 자세를 낮춰 내 허벅지 위에 내려앉더니 뺨을 어루만져줬다. 이러다 갑자기 뺨을 쫙 갈기는 건 아닐지 무섭다. 근데 안 때린다. 때리기는커녕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준다.
“나가서 기다려. 금방 갈게.”
아… 숭배하라, 주세영.
아마 지금 내 얼굴, 눈은 풀리고 입술은 헤 벌어져서 뺨은 불그스름하고, 딱 바보 같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당신이 ‘준비’하는 거 한 번쯤 보고 싶은데. ―라고 말했다간 완벽한 오늘에 흠집 날 게 뻔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게이로 살아온 것도 아닌 그 사람에게 오늘, 준비의 과정까지 공유해주길 요구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매너가 아니었다.
“미안해요. 번거롭지?”
등을 쓰다듬으며 최대한 마음이 전달될 수 있도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음부턴 네가 할래?”
주세영이 픽 웃으면서 내 허벅지 위에서 내려갔다. 그동안 거품이 많이 사그라진 욕조 물 아래로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주세영의 페니스가 내려다보였다.
“당신이 하라면.”
“됐다. 너무 덩치라 그럴 마음이 안 생겨.”
난 진심으로 한 얘긴데 그 사람은 얼른 나가라는 듯이 내 종아리를 마구 밀어냈다.
“너무하네. 당신이 원하면 근육도 빼고 다이어트하지, 뭐.”
나를 밀어내는 그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의 눈이, 역시나 아직 기세등등한 내 페니스에 가서 박힌다. 시선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럴 능력 안 되면 얌전히 나가서 기다려. 너만 급한 거 아니야.”
붙잡힌 발목을 털어내면서 주세영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얌전히 발목을 내주고 욕조 안에서 물러났다. 샤워부스 안에서 간단히 거품을 헹구고 욕실을 나왔다. 파우더룸에 딸린 작은 옷장 안에서 배스가운을 꺼내 입었다.
아직 나 혼자뿐인데도 침실 안의 공기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고여 있었다. 블라인드를 전부 걷어놓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서울에는 어느새 촉촉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금방 그칠 비 같았는데 아직도 빗방울들이 창문에 와서 부딪치고 있었다. 처음 하는 섹스도 아닌데 기대되고 긴장되고 흥분돼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배스가운을 여미지도 않은 채 전면창 앞으로 걸어갔다.
물기를 머금어 모든 불빛을 부옇게 반사시키는 서울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 오는 서울은 나에게 을씨년스러움일 뿐이었을 텐데. 지금은 줄지어 움직이는 꽉 막힌 도로 위의 자동차들까지도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이 창 앞에 서서 한창인 봄도, 서울의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주세영과 함께 보고 싶었다.
혹시 더위에 약할까? 아마 그럴 것 같은데. 그래도 에어컨 너무 틀어주지 말아야지. 물 받아서 테라스에 내놓고 파라솔 펴고 비치체어에 앉아 둘이서 맥주나 마시면서 느긋하게 음악이나 들으면 딱 좋겠다. 가을엔 테라스창 열어놓고 거실 마루에서 그 사람 무릎 베고 누워서 뒹굴었으면. 10분도 못 버티고 무겁다며 비키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버텨야지. 그럼 결국엔 못 이기는 척 무릎을 내줄 테니까. 겨울엔, 겨울엔 그 사람이 코트에 묻은 눈을 털면서 이 집 현관으로 들어섰으면 좋겠다. 난 그 사람을 위해서 따뜻한 국물 요리를 만들고, 그 사람은 코트를 입은 채로 주방에 들어와 나를 왁 끌어안아주는 거지. 그렇게 이 집이 그 사람의 집이 됐으면 좋겠다.
“동주야, 타월 못 찾겠어!”
욕실 쪽에서 나를 찾는 주세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던 재떨이에 재빨리 담배를 비벼 끄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어, 지금 가요.”
바이바이, 서울. 잠깐만 나 혼자 주세영 좀 독점할게. ‘준비’가 끝난 주세영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 ZOO SE YOUNG
좁지 않은 침실 안이 눅눅한 습기로 가득 찼다.
아니, 그건 내 착각인지도 모른다.
귀에 들리는 거라곤 우동주와 나의 불규칙한 호흡뿐이고, 깨끗하게 비워진 나의 ‘그곳’은 콘돔을 낀 우동주의 손가락으로 틀어막혀 질척거리고 있었다. 우동주가 끈질긴 검색 끝에 찾아낸, 요즘 제일 잘나간다는 효과 확실한 젤을 우리는 일주일 새에 두 통이나 비워버렸다. 아직 여덟 통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그 사이트 우수 고객이 될 것 같… 윽.
“윽―.”
전립선은 무조건 건드린다고 촉이 오는 게 아니라 꾸준히 자극을 주면서 ‘개발’해야 되는 거라고 하더니, 목요일쯤부터는 간질간질 뭔가 감이 오기 시작했다. 페니스를 자극할 때와는 약간 다른 종류의 전율이었다. 어깨가 움찔움찔 떨리면서 저절로 뒤를 조이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앞에서 뭔가가 새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반사적으로 그렇게 됐다. 지금처럼.
“후우… 후… 아파?”
손가락을 넣고도 꼭 페니스를 넣은 것처럼 달아오른 우동주는, 숨소리도 제대로 조절 못 할 정도로 흥분해놓고도 내게 아프냐고 묻는다. 아프다고 하면 그만할래? 물론 너라면 그렇겠지. 근데 꼭 너만 오늘을 기다린 건 아니거든. 그리고 형님은 지금 아픈 게 아니란다. 그 정도는 구분해줘라.
“아니. 계속해.”
우동주의 섹스는 다정하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도록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핥고 빨고, 그러고는 오래 끓인 죽처럼 푹 퍼진 내 몸을 천천히 열고 들어온다. 뭔가가 들어오고 있다는 이물감은 느껴지지만, 덕분에 한 번도 아픔을 느껴본 적은 없다. 이놈이 좀 소질이 있는 것 같다. 공부 열심히 해서 S대 가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그게 다 허풍은 아니었다.
덕분에 나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별 무리 없이 새로운 방식의 섹스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섹스 실력을 가지고 잘한다느니 못한다느니 운운하는 건 천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잠깐 천박해졌다 치고 얘기하자면, 솔직히 잘한다.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게 섹스의 본질이라면, 우동주는 분명 섹스를 잘한다. 내 연인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고.
세 개가 들어간 우동주의 손가락이 몸 안에서 까딱까딱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살살, 아주 조심스럽게, 아직 충분히 아물지 않은 딱지를 떼어내듯이.
“흐음. 흠―.”
좀 더 강하게 그곳을 비벼줬으면 좋겠다. 입김으로 부는 것 같은 간지러운 터치 말고, 좀 더…. 침대 앞에 서서 매트리스 위를 짚고 허리를 굽힌 나는 입술을 꽉 다물고 시트를 비틀어 쥐었다.
“힘, 빼야죠.”
뒤에 선 우동주가 한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주무른다. 나보고는 힘을 빼라면서, 제 목소리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일주일 동안 힘 빼는 연습을 많이 해왔는데도 여전히 처음엔 그게 어렵다.
“후우― 후―.”
숨을 길게 내쉬면서 긴장을 풀어본다. 우동주가 부드러운 손길로 뒷목을 주물러줬다. 동시에 손가락은 집요하고 끈기 있게 한곳을 계속해서 자극해나간다. 애널에 타인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성의 의식에서 벗어나 그곳에서부터 번져나가는 부정할 수 없는 쾌감에만 신경을 집중시키면, 몸이 점점 더워지면서 자연스럽게 힘이 빠져나간다. 힘이 빠지는 것을 감지한 우동주의 손가락이 몸속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몸의 대화이니만큼 타이밍이 중요했다.
“흡.”
숨이 멈추고 무릎이 꺾였다. 우동주가 얼른 내 허리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부드럽게 굴곡을 만들며 움직이던 손가락이 몸 안에서 빳빳하게 펴졌다. 굽히지 않은 그대로 조금씩 조금씩 내 안을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이 감각,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일주일 동안 공들여 함께 천천히 열어온 그곳은 손가락의 들고 남을 느끼면서도 거북하지 않게 되었다.
“하… 하아….”
고스란히 보고 있겠지. 애널로 자신의 손가락이 드나드는 광경을. 일주일 동안이나 그걸 보고만 있었던 우동주의 인내심은 솔직히 경이로울 정도다. 한 번쯤은 막무가내로 페니스를 들이밀 줄 알았는데.
왼쪽 허벅지 뒤쪽에 우동주의 페니스가 비벼지고 있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맨살에 비벼지면 접촉한 부위로부터 한층 더 몸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숙이니 내 페니스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몸을 열어나간 덕인지, 애널에 손가락이나 플러그를 꽂고도 내 것은 시든 적이 없다. 우동주의 페니스를 넣으면 어떨지, 그래도 쌩쌩하게 발기해 있을지, 그게 궁금했다.
“아… 진짜 죽겠다….”
넣었다 뺐다, 삽입하듯 한참 손가락으로 애널을 들락거리던 우동주가 무너지듯이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 얼굴을 문질렀다. 오래 참았다. 인정한다.
“죽지 말고… 넣어.”
바로 어제 나는, 둘이 함께 주문했던 플러그 세트 중 가장 큰 사이즈를 받아들였다. 체온이 없는 그것은 신체적 쾌감과는 별개로 다소 불편한 감각을 줬지만, 왠지 우동주의 것은 다를 것 같았다.
거의 내 등에 매달리다시피 했던 우동주가 팔을 뻗어 콘돔을 집었다. 내 허락을 받은 뒤에 움직여야 안심하는 게, 절대 우동주에게 결단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걸 안다. 침대 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용쓰는 것만큼 추한 남자가 없지.
지익, 콘돔 껍질이 뜯겨지는 소리가 들리고, 천천히 부드럽게 몸 안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간다. 빠져나간 손가락은 한동안 그 주변을 지분거리며 근육이 완전히 풀어진 것을 확인한다. 손톱만큼만 밀어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젤 범벅이 된 애널에서는 그때마다 민망한 소리가 흘렀다.
“숨, 제대로 쉬어요. 힘들면 말하고.”
콘돔을 장착한 우동주가 엉덩이 골 사이에 페니스를 비비면서 천천히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걱정 마…. 힘들면 당장 걷어찰 거니까.”
“젤 좀.”
침대 위에 있던 젤을 집어 뒤로 건네줬다. 내 엉덩이와 자신의 페니스가 맞닿은 곳에 아낌없이 젤을 뿌려댄다. 흘러내린 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우동주는 삐익삐익, 튜브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날 때까지 젤을 짜냈다.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것이 서늘하게 피부에 닿았다가 체온에 녹아 금세 뜨뜻해졌다. 우동주는 거의 다 써버린 또 한 통을 바닥에 내버렸다. 골 사이를 쓰다듬듯이 미끄러지는 페니스의 윤곽과 무게감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후우―.”
나는 마른침을 삼켰고, 우동주는 심호흡을 했다. 콘돔을 씌운 두툼한 귀두가 입구를 지분거린다. 힘을 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될까 의심스러웠는데, 정말로 들어온다. 게다가 각오했던 만큼 힘들지도 않았다. 일주일이나 정성을 들여가며 차근차근 늘려온 효과가 있는 건가? 묵직한 뭔가가 들어온다는 이물감은 있지만, 숨이 턱 막힌다든가 입구가 찢어질 것 같다든가 하는 고통은 전혀 없다. 아무런 불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불쾌감은 없었다.
우동주가 내 등을 쓸어주면서 계속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자기가 더 긴장한 듯한 모습에, 이 행위가 나만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님을, 같은 목표와 같은 쾌감을 향해 우리가 함께 행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안심이 됐다.
잘 맞지 않는 사이즈의 나사를 억지로 구멍에 끼워 넣을 때처럼 오른쪽 왼쪽으로 성기를 천천히 돌려가면서 조금씩 더 밀려 들어온다. 예상한 대로 플러그와는 느낌이 다르다. 딱딱하지만 유연한 탄력이 느껴지는 살덩이는 혼자 겉돌지 않고 내벽에 끈끈하게 들러붙어왔다. 침대 위를 짚고 있는 두 팔이 후들거렸지만 힘들어서가 아니다. 우리 둘이 뿜어대는 더운 숨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았다.
CF 속에서 맥주나 음료를 마시는 모델처럼, 꼴깍꼴깍, 한 모금씩 들이켜는 기분. 그러다 어느 순간 뭔가 끝에 닿았다는 느낌? 이제 다 들어온 건가 싶었는데, 엉덩이에 음모가 바짝 비벼지는 것이 아마 내가 정말 다 받아들인 것 같았다. 전부 다 마셨는데도 어느새 잔은 다시 꽉 채워져 있다.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이. 뒤가 묵직했다. 저녁을 거의 다 남겼는데도 아랫배가 꽉 찼다.
“하… 하하….”
갑자기 우동주가 웃었다. 이놈이 미쳤나 싶어 뒤를 돌아보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뭐야.”
“잠깐만. 이거… 좀 위험하지 않아요? 나, 움직이면 바로 사정할 것 같은데?”
최저치로 낮춰놓은 조명 속에서 땀으로 번들거리는 육체가 은은하게 빛을 반사시킨다. 잘생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꼭 히어로물의 주인공처럼 생겼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그리고 우동맨. 이름은 조금 웃기지만, 가장 잘생기고 가장 강하고 가장 섹시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동맨. 내 안에 페니스를 전부 밀어 넣은 것만으로도 사정할 것 같다는 우동주의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천천히 움직여봐.”
“알았어. 알았으니까, 당신은 절대 가만히 있어.”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내 양쪽 허리를 단단히 붙잡더니, 넣은 그대로 서서히 허리를 돌려나간다. 보고 있지 않아도 안에서 느껴진다. 저절로 고개가 꺾였다.
내벽을 서서히 휘젓는 뜨거운 살덩이의 압박감. 커피에 시럽을 넣고 유리막대로 저으면 달콤하게 섞여 들어가듯이. 느린 허릿짓에 그의 성기와 내 안의 점막이 경계선을 허물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내 페니스는 아직도 빳빳하게 서 있었다.
“괜찮아, 당신?”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와 시트를 다시 고쳐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케이 사인에 우동주의 허리가 운동 방향을 바꾼다. 원을 그리듯 천천히 엉덩이에 비벼지던 음모가, 조금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까슬하게 비벼져왔다.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페니스가 뒤로 빠졌다가 꽉 들어차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속도가 붙는다. 우동주가 묵직하게 깊이 찌르고 들어올 때마다 발기한 페니스가 위아래로 진동하면서 아랫배를 슬쩍슬쩍 스쳤다.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몸이 달뜨고 눈앞이 아른거렸다. 그 아른아른한 틈으로 팽팽하게 날이 선 우동주의 허벅지가 보인다. 아마 엉덩이 양쪽으로 예쁜 보조개가 파여 있겠지.
“일어나 봐. 딱 붙어서 하고 싶어.”
허스키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우동주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운다. 등에 닿은 넓은 가슴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가슴과 등이 맞닿자, 열을 머금은 입술이 목덜미와 어깨에 덤벼들었다. 힘줄이 팽팽하게 돋은 팔뚝이 가슴을 더듬고 페니스를 쓸었다.
자세를 바꾸니 안쪽에서 우동주가 닿는 부위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엎드려 있을 때보다 좀 더 꽉 들어차는 기분이다. 팔을 뒤로 뻗어 우동주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엉덩이에 돌이 찬 듯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내 등에 붙은 커다란 육체는 욕구의 거침없는 발산을 참고 있었다.
입술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귓가든 뺨이든 목덜미든 어깨든, 어디든 입을 맞춰대는 우동주는 격렬했지만, 내 몸을 흔드는 우동주의 페니스는 고요하고 차분했다. 고요하고 차분하게, 끝까지 이성의 통제 아래에서, 내 안을 부드럽게 드나들고 있었다.
가슴을 꽉 결박한 우동주의 팔을 붙잡았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살갗이 자꾸만 미끄러졌지만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잡았다.
이어진 채로 함께 흔들린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좋았다.
잔잔한, 가끔은 조금 격렬한 파도 위에서 같은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이걸 위해서 일주일을 함께 노력해왔던 거다. 본능의 해제를 위해서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싶은 바람의 충족을 위해.
끈적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지 않아도, 캔들에 불을 밝히지 않아도, 달콤한 말을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지 않아도, 이 순간의 충만함에 녹아내린 우리의 몸이 하나로 질척하게 뒤섞일 것 같았다. 침실의 블라인드로 서울의 파란 아침이 새어 들어올 때까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소리 내서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 번도 내 속에서 진심으로 꺼내본 적 없는 그런 고백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자리에서 분위기에 취해 하는 말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너무나 주세영다운 염려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인 육체의 움직임으로 고백을 대신하듯, 고통이 점차 옅어지고 그 자리에 그만큼의 쾌락이 차오르는 몸을 스스로 움직여 내가 이 행위에서 제대로 만족을 느끼고 있음을 그에게 전달했다.
뒤로 성큼 물러섰다가 빠르게 파고드는 그런 삽입은 아직 무리였지만, 깊이 연결된 채 함께 흔들리고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곧 사정할 것 같은 경련의 감각이 몰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입술이 겹쳐졌다. 격렬한 쾌감에 정리되지 않은 숨결을 뱉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혀를 얽었다.
“아… 아, 흐윽.”
하나로 이어진 채 허리를 흔드는 사이, 힘의 불균형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미 뿌리까지 내 안에 들어오고서도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나를 안고 뒤에서 누르는 허리의 힘이 느껴졌다. 등을 뒤덮은 우동주는 무거웠지만 이 무게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팔랑팔랑 어딘가로 날려가 버릴 것 같았던, 가벼웠던 내 삶과 나 자신을 지그시 눌러주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 침실이 우리의 침실이 되는 날을 조심스럽게 그려본다. 내일 아침 너의 침대에서 눈을 뜨면 같이 그 베이커리에 가자고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네가 혼자 앉아 있었던 그 자리에 마주 앉으면, 나도 조금쯤은 솔직하게 진심을 꺼내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그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진짜 첫 만남에 대해. 또는,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그를 깊이 받아들인 내가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있는 우리가 함께인 미래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