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4)

사귀게 된 지 이제 한 3주일? 한창 좋을 때인 건 나도 안다. 실제로 한창 좋기도 했고.

회사가 같으니 평일엔 싫어도 매일 얼굴을 보고, 그래놓고도 평일엔 서울과 부산에서 따로 직장생활을 하는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주말 내내 붙어 지냈다. 내 연애생활에 이 정도로 시간을 공유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화장실만 가려고 일어나도 어디 가냐고 묻는 이 덩치 큰 놈이 귀엽게만 느껴지는 게, 아직 벗겨지지 않은 콩깍지의 활약인지 내가 진짜 변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른한 살에 만난 남자 애인에게 제대로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게 요즘 주세영이라는 거, 그건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이젠 우동주의 집이 내 집처럼 익숙하고 편해져서 묻지 않아도 타월이 있는 자리, 여벌의 휴지가 있는 곳, 간장 종지의 위치까지 훤히 알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좀 무서워졌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건지. 이거 안전한 건지.

혹시나 헤어질 때를 대비해 미리 발 뺄 틈을 만들어두자는 그런 비겁한 심리는 아니지만,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다 보니 생활 리듬도 불규칙해지고, 마음은 즐거워도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건지(?) 회사에서 피곤을 느끼는 시간도 점점 빨라지고, 일상이 조금 어수선하게 붕 뜬 느낌이었다.

거기다 이제 프로젝트 마무리 기간이라 내일부터는 정말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렇게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가는 지난달 대전 프로젝트의 악몽이 되풀이될까 봐 슬슬 불안하기도 했다.

“나 진짜 가야겠다. 데려다줘.”

아무리 우리가 한창 청춘 같은 연애를 하고 있어도 일단은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성인이니 최소한 일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조절을 해야 할 텐데, 우동주는 집에 가겠다는 내 말이 헤어지자는 통보라도 되는 것처럼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본다.

점심 먹고 일어서려던 걸 저녁만 먹고 가라고 붙잡아서 저녁을 먹었고, 저녁 먹고 나니 그럼 영화만 한 편 보고 가라고 붙잡아서 영화도 한 편 봤다. 벌써 8시였다.

아무리 이제 3월 말, 한창 봄이라고는 해도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이대로 몇 분만 더 뭉그적거리면 그땐 내 쪽에서 가기 싫어질 게 뻔했다. 사실 지금까지도 가고 싶어서 가겠다고 했던 것도 아니다. 얕게 남은 마지막 이성을 쥐어짜고 있을 뿐.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라, 우동주야. 네가 그런 눈으로 보면 안 그래도 가기 싫은 내 마음이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위태위태 약해진다고.

“안 데려다줘? 그럼 택시 타고 가고.”

정말 갈 거야? 나를 두고 갈 거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저 얼굴을 더 보고 있다가는 또 지난주처럼 결심이 무너질 것 같아서 일부러 더 딱 자르면서 돌아서려는데, 우동주가 안고 있던 쿠션을 소파 구석에 확 내던지면서 벌떡 일어난다. 오, 드디어 반항기냐?

“버릇이 뭐 이러냐, 너?”

“뭐가요. 데려다주려고 일어난 건데.”

대들어봤자 상처받는 건 자기라는 걸 알고 있으니 뭐라고 더 덧붙이지는 못하고 차 키를 가지러 간다며 침실로 들어가는데, 말투에선 서운함이 풀풀 묻어나고 트레이닝팬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뒷모습이 아주 축 처졌다. 야, 누군 가고 싶어서 가냐?

“네 입으로 뭐라 그랬어? 딱 영화 한 편만 보고 가라 그랬지? 너 왜 자꾸 한 입으로 두말하냐.”

나 좋다고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저러는 게 밉진 않은데 바라는 대로 해줄 수만은 없는 내 심정을 몰라주는 것도 속상해서, 안 그래도 풀 죽은 애의 등에 대고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이왕 가야 하는 거 그냥 곱게 보내주면 어디 덧나냐? 기분 좋게 데려다주고, 주말 동안 즐거웠다고 볼에 뽀뽀나 쪽 해주고, 검수까지 일주일만 힘내자고 파이팅 외쳐주면 안 되는 거냐고. 다른 건 다 나보다 어른스럽게 이해해주고 배려해주고 잘하면서 유독 같이 보내는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고집을 부렸다.

다른 때 다 잘하는 놈인 걸 알면 하나쯤은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줘도 되겠지만, 또 그래 주고 싶긴 한데, 생활이 규칙적이지 않으면 일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난 성격 탓에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했다.

원래도 나는 노력파라 타고난 엄친아 같은 우동주처럼 이것도 저것도 요령 좋게 술술 해내질 못한다. 그러다 보니 일을 대할 때는 예민해지고, 감정 조절도 해야 하고, 생활 리듬도 신경 써줘야 한다. 피곤한 성격인 거 나도 알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쩌겠는가.

“주세영은 가끔 보면 나하고 이해관계야. 이렇게 생각했으면 이렇게 딱 지켜야 되고, 저렇게 생각했으면 딱 저렇게 해야 돼. 그게 되면 애인이야? 갑과 을이지?”

점퍼를 걸치고 나오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섭섭해하면서도 데려다주겠다고 차 키를 챙겨 나와 운동화를 신는 구부정한 등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오늘은 진짜 집에 가야 했다.

“뭘 또 내가 딱딱 그래? 너 만나고 내 생활이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냐?”

생활을 떠나 삶 자체가 변했지. 부모님한테도 소개할 수 없고, 남들 앞에서 ‘얘가 내 거예요’ 할 수도 없는 연애를 하고 있었으니, 남들 눈 신경 쓰고 일반적인 룰에서 벗어나는 걸 겁내는 주세영에게 이건 거의 혁명 수준이었으니까.

“알아. 알아서 고맙고 행복한데, 주말엔 나하고 실컷 놀아준다며.”

“금요일 저녁에 와서 여태 놀았으면 실컷 놀았지, 뭘 더 놀아?”

원래는 이렇게 오래 툴툴거리는 놈이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은 길게 끈다. 주차장에 내려가 차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나를 보려고 하질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기색 전혀 없이 밥 먹다가도 킬킬대면서 서로 엉키고 쓰다듬고 물고 빨고 했는데, 2박 3일 여기서 진 치고 있다가 일요일 밤이 돼서야 집에 가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서운하냐?

오피스텔에 거의 다 와갈 때까지도 우리는 별말이 없었다. 이대로 헤어지긴 찜찜해서 제대로 얘기를 해볼까 하다가 그럼 길어질 것 같고,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정신적 여유가 없으니 일단 모르는 척 덮어두자 싶어 그냥 관뒀다. 사귀는 동안 우동주가 이렇게까지 무게를 잡으며 자기 골난 걸 티 내기는 처음이었다.

“두 집 살림 슬슬 힘들다. 그냥 합치자, 응?”

오피스텔 앞에 차를 세우고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기고 나서야 우동주는 본론을 꺼내놓았다. 같이 살자는 얘기 한 일주일 안 꺼내나 싶더니 포기한 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집에 가는 게 서운했던 게 아니라 아예 자기 집에 눌러앉히고 싶었던 거구만. 그래서 그렇게 퉁퉁 부었던 거였어. 우동 면발 퉁퉁 부으면 맛없다?

“그게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인 줄 알아?”

“안 간단할 건 또 뭔데.”

“합치면 내가 너희 집으로 들어가야 될 텐데, 그럼 우리 집 정리해야 되고, 서류나 돈 같은 것도 그렇지만 부모님한테는 또 뭐라고 말씀드려?”

지금도 거의 같이 사는 거나 마찬가지고, 앞서도 말했듯 우동주와의 끝을 겁내면서 사귀고 있는 게 아니라, 살림을 합치려면 절대 못 할 일도 아니긴 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우동주 같은 생각을 한다. 이렇게 이 집 저 집 왔다 갔다 하느니 그냥 하나로 합치는 게 여러모로 경제적일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같이 사는 거나 다름없이 두 집을 오가더라도, 정말 동거를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건 기분 문제인데, 때로는 기분 문제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왜 밥을 먹고 개수대에 담가놓지 않았냐, 샤워한 뒤에 뒷정리가 엉망이다, 난 욕실 문을 열어두는 게 좋은데 너는 왜 꼭 닫아놓냐, 이런 문제들로 우동주와 다투기 싫다. 아직은 좀 더 달콤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애인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난 어차피 나중에 같이 살게 될 텐데 뭘 벌써부터 서두르냐는 생각이고, 우동주는 어차피 같이 살게 될 거 빨리 합칠수록 좋지 않냐는 생각이다. 이런 게 성격 차이겠지. 일단 물러서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툭툭 건드려본 후에야 혀를 대보는 조심성 많은 초식 동물 같은 주세영과 눈앞에 알짱댄다 싶으면 일단 엉덩이를 쫓아 냅다 달리고 보는 육식 동물 같은 우동주.

“그럼 당신 집 그냥 그대로 두고 필요한 짐만 챙겨서 들어오면 되잖아.”

허허. 이놈 말하는 것 좀 봐라.

“이럴 때 보면 진짜 있는 집 자식이라니까. 멀쩡한 집 비워두고 월세 낼 생각을 해? 아깝게.”

“…….”

안다. 우동주가 그 돈을 하찮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값어치 있게 여기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는 걸.

“나 이제 지겨워?”

전혀 예상 못한 방향의 전개에 놀란 표정으로 우동주를 돌아봤다. 내가 좀 까칠하게 굴고 가끔 구박해도 실실대며 넘겨버리는 놈이라, 이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만으로 충격이었다. 안 자고 간다고 살림 안 합친다고,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내 마음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평소에 하는 농담처럼 애교 섞인 말투가 아니라서 나도 장난으로 받아치면서 넘길 수가 없었다. 호흡이 조금 떨릴 것 같았다.

“무슨 말이 그래?”

“너무 매달리고, 맨날 같이 있자 그러고, 당신은 싫은데 집도 합치자 그러고. 난 좋아서 죽는데 당신은 너무 침착하니까 혹시 나한테 질렸나 해서.”

홧김에, 혹은 섭섭해서 그냥 던지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비꼬는 어조도 아니고 공격적이지도 않다. 핸들에 양팔을 걸치고 그 위에 엎드려 앞만 내다보면서 풀 죽은 목소리를 낸다.

“진심으로 묻는 거야?”

“조금은. 나만큼 당신도 날 좋아하는지 약간 자신이 없어지려고 그래.”

핸들 위에 엎드렸던 몸을 일으킨 우동주가 점퍼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오피스텔 앞 편의점에서 밝혀놓은 불빛이 우동주의 오른쪽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벌써 이 얼굴이 평생 마주하고 살아온 것처럼 정답고, 보고 있으면 가슴이 찡한데 너는 왜 그런 말을 하냐. 늘 내 마음을 찰떡같이 헤아려주던 우동주라서 섭섭함이 더 컸다.

“당장 내일부터 검수 날짜 맞춘다고 야근하고 철야하고 그럴 거 아니야. 그럼 평일에도 시간 안 맞을 거고. 당신은 헬스도 못 나온다 그러고.”

어린애 같은 투정이 아니었다. 담배 연기를 뿜는 우동주의 옆얼굴은 연애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스물여덟 먹은 남자의 그것이었다. 연애 이후 거의 처음으로 우리는 성격 차이라는 난관에 부딪혔다.

우린 남들과 달라, 우리에게 시련 따윈 없어, 백날 천날 행복하기만 할 거야. ―이런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건 절대 아니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적어도 이번 프로젝트가 해결된 뒤라면 심적인 여유가 생기겠지만, 당장 앞으로 일주일은 말 그대로 죽음의 기간이었다. 이 문제는 그때까지만 좀 미뤄줬으면 좋겠는데….

예전의 나였다면 이번 주말에도 집에서든 사무실에서든 어느 정도 일을 진행시켜놨을 거다. 누가 쪼지 않아도, 그렇게 해두지 않으면 스스로 못 견디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평일에 찔끔찔끔 만나고 아쉽게 헤어지느니 차라리 주말을 넉넉하게 같이 보내고 다음 한 주 스케줄을 빡빡하게 짜보자는 생각에, 내 나름대로 어느 정도 조정을 해본 거였는데. 그걸 몰라주나 싶어서 서운하고….

우동주와의 시간이 너무 달아서, 연애가 다 내 마음처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일주일만 참으면 되잖아. 회사에서도 매일 보고.”

“회사에선 손도 못 대게 하면서.”

“당연한 얘기 할래?”

사내 비밀 연애의 짜릿함은 남들 눈을 피해 몰래 주고받는 눈빛과 스킨십이라고들 하지만, 만약 들켰을 경우 ‘하하, 들켰네요. 그래요, 우리 사실 사귑니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되도록 조심하고 싶었다. 오버스럽게 몸을 사리자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사방이 유리벽인 흡연실에서 엉덩이 더듬는 거 못 하게 했다고 날 매정한 놈 취급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그리고, 못 하게 해도 그냥 하잖아, 너.

“막판 작업 들어가면 당신 분명히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일에만 매달려 있을 텐데, 같이 살면 내가 옆에서 챙겨주고 좋잖아.”

“너, 같이 출장 갔을 때 잊었냐? 나 분명히 너한테 히스테리 부리고 화풀이하려고 들 텐데. 너한테 그러기 싫은 마음은 모르겠어?”

다시 생각해도 그땐 정말 미안했다. 몇 년 만의, 그것도 정말 어이없는 실수에 안 그래도 한껏 까칠해져 있었고 그때쯤 스스로 자각만 못 했다 뿐이지 우동주의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을 때라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심술을 부렸었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우동주가 좀 받아주는 것 같으니까 더 편하게 기댔던 것도 있고.

그때야 자기 감정 갈피 못 잡고 방황할 때라 그랬다 쳐도, 일하는 스케줄 하나 조정 못해서 연하의 애인에게 성질부리는 못난 놈이 되긴 싫었다. 일이 빡빡해도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앞으로 노력은 해나가겠지만 아직은 성숙하게 처신할 자신이 없었다. 묵묵히 담배만 피우는 우동주의 옆모습에 애가 탔다.

“나 솔직하지도 못하고 말주변도 없는 거 너 알잖아. 네가 내 마음 몰라주면 진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담배 연기를 뿜는 건지 한숨을 내쉬는 건지, 길게 숨을 뱉은 우동주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착한 너는 결국 또 접어주겠지.

“알았어요, 당신이 너무 좋아서 내가 투정 좀 부렸어. 일주일만 참을게. 미안.”

우동주가 이해해주고 접어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해지곤 했는데 오늘은 알았다고 말하면서 날 보고 웃어줘도 마음이 안 놓였다. 겨우 이런 일로 우리는 맞네 안 맞네 할 만큼 이젠 어리지 않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마인드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알면서도 아는 대로 안 되는 거. 세상엔 그런 일이 더 많다.

“에이, 좀 웃어라. 내가 너무 미안해진다. 응? 안 그럴게.”

나도 널 이해해주고 싶다. 네가 나에게 기댈 때, 나에게 뭔가를 바랄 때, 넉넉하게 덮어주고 원하는 걸 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소중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매번 위로를 받는 건 내 쪽이다. 아마 그래서 끌리게 됐겠지.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우동주. 우동주가 가진 남의 떡이 크고 맛있어 보여서 힐끔거렸더니 그는 제 떡을 내주면서 얼마든지 먹으라고 했다.

우동주는 강하다. 꽁꽁 싸매고 가시를 세우지 않아도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나오는 거다. 애인이고 남자친구고를 떠나서, 한 남자로서 한 사람으로서 그게 부러웠다. 우동주라고 모든 면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여느 사람들보다 좀 더 멋진 놈인 것만은 분명했다.

지금만 해도 우리 둘 중의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데, 말 그대로 ‘차이’일 뿐인데, 결국 접어주는 건 우동주다. 나도 애써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로 그의 모습을 흉내 내봤다.

“검수받고 나면, 그때 같이 시간 많이 보내자.”

알았다고 미소를 지으면서 손등으로 뺨을 어루만져준다. 자기도 아직 마음이 다 안 풀렸으면서 내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어른스러운 미소가 고마웠다. 이 따스함이 남의 것이 되는 건 이제 죽어도 싫다. 이렇게 널 좋아하는데 이 마음이 전부 다 전달되고 있지 않다니. 네가 내가 아니고 내가 네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그게 꼭 내 못난 성격 때문인 것 같아 작아지는 기분도 어쩔 수 없었다. 심각하게 한 말이 아니더라도 네 입에서 질렸냐는 말이 나오게 만든 거,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다.

“어, 그렇게 해요. 내가 진짜 미안해. 안 그래도 당신 예민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요. 피곤하겠다.”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사람은 나였는데 들어가라는 말에 우동주를 붙잡고 싶어지는 것도 나였다. 나는 왜 일과 사생활을 융통성 있게 조율하지 못할까.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여유를 즐길 줄 안다던데 지금 생각하면 참 맞는 말이다. 그런 것도 그릇이 커야 되는 거지. 일단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면 다른 생활에는 눈곱만큼도 신경을 못 쓰는 나는, 그럼 영원히 성공과는 안녕인 건가? 성공은 둘째치고 일과 연애 사이에서 균형이라도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운전 조심해.”

마음 같아선 ‘올라왔다 갈래?’ 하고 싶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잔인한 짓인 것 같아 시트에 딱 붙은 것 같은 엉덩이를 틀어 막 차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우동주가 팔을 잡아끌었다.

“뽀뽀도 안 해주고 그냥 가?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내 표정에 남은 어색함을 알았을 거다. 농담을 건네면서 입술을 겹쳐온다. 높고 딱딱한 코끝이 내 코끝을 살짝 비비고, 오늘따라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혀가 기분 풀라는 듯 조금 장난스럽게 달콤하다. 키스로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나 역시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키스했다.

아주 오랜 시간 입술을 겹치고 서로의 어깨를 쓰다듬었지만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허전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음 약한 혹은 주세영에게 약한 우동주는 결국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후진해 돌아갔지만, 나는 왠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우리 집인데도 잠자리가 낯선 것 같은 느낌에 뒤척거리다가, 괜한 베개 탓을 해보다가, 한참 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

그 넓은 집에, 넓은 침대에, 혼자 주눅 들어 웅크리고 잠들어 있을 내 퉁퉁 불은 우동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 내 마음이 행주나 걸레인 줄 알고 꽉꽉 비틀어 짜고 있었다. 사실 우동주는 배를 내놓고 대자로 누워 자는 놈인데도 내 멋대로 우동주의 잠버릇을 수정해가면서까지 애처롭게 여기고 있었다. 다툼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의 하찮은 어긋남이었지만, 소위 사랑싸움이라고들 하는 평소의 장난 같은 투닥거림이 아니었기에 신경이 쓰였다.

역시나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우동주가 내가 모르는 어떤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 ‘난 이제 이 사람하고 살 거야. 나하고 같이 살아주지 않는 당신은 필요 없어.’라며 차가운 얼굴로 건방진 멘트를 날리는 꿈을 꿨다. 월요일 아침부터 완전 개꿈이다. 웃기네, 내 인생 통째로 걸고 시작한 연애인데 이제 와서 네가 여자 만난다고 하면 순순히 놔줄까 봐?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출근 준비를 했지만 그건 약해지지 않기 위한 자기 암시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삽질하고 싶진 않다. 일해라, 주세영. 너 여기서 일까지 제대로 못하면 우동주하고 잘 지내고 아니고를 떠나서 스스로 무너진다. 일단 일하고, 그리고 시간을 들여서 잘 대화해보면 분명 잘 해결될 거야. 원래 바쁘고 예민할 때는 별것 아닌 일들도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역시나 사회인은 고달파서, 일단 출근을 하고 나니 삽질도 우울도 사치스러운 얘기가 됐다. 거래처 담당이 깐깐한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월요일 검수 날짜에 맞춰 버그 테스트까지 마쳐야 했다. 수첩에 스케줄을 짜놓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우동주는 우동주대로 영업 일 때문에 거래처 쪽으로 바로 출근한 모양이라 출근 후에 항상 담배 한 대 같이 피우던 것도 못 했다. 하필 꼭 이럴 땐 타이밍도 안 맞는다.

[왜.]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반갑지도 않은 누나의 호출이었다.

[여전히 애교 없는 성격이구만.]

[무슨 일이야? 나 검수 날짜 얼마 안 남아서 정신없어.]

우동주가 사다 주는 커피가 절실했다. 내 컨디션에 따라 세심하게 시럽의 양을 조절한 달콤한 커피를 마시면서 그의 어깨에 관자놀이를 잠깐 기대고 있으면 조금은 여유가 생길 것 같은데.

[잡지 인터뷰 안 해줄래?]

[끊는다.]

나도 즐겨 보는 남성 잡지에서는 거의 매달 연예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기사를 하나씩은 꼭 싣고 있었고, 누나는 그동안 몇 번이나 나에게 인터뷰해보지 않겠냐며 제안을 해왔지만 매번 딱 잘라 거절했었다. 포토그래퍼 이하 스태프들과 에디터가 지켜보는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이 잡지에 실려 전국적으로 유포되고, 앙케트 같은 짧은 질문 몇 개에 대답하는 게 고작인 인터뷰라고는 해도 내 개인적인 생각이 까발려지고…. 그런 걸 나보고 감당하라니. 자기 동생 성격을 그렇게 모르나? 하여간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성공했겠지만.

[야, 야! 수요일이 촬영인데 스케줄 잡혀 있던 사람이 갑자기 해외 출장 간다고 펑크를 내잖아. 내가 소개시켜준 사람인데. 넌 안 하더라도 주변에 괜찮은 애 없어? 샐러리맨 특집 기산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샐러리맨이 뭐 많이 있어야지. 좀 살려줘라, 동생. 플리즈―.]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려던 내 귀에 ‘주변에 괜찮은 애’라는 말이 확 꽂혔다. 남들보다 좋은 걸 가지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나의 가장 가까운 주변, 엄청 괜찮은 그놈이 퍼뜩 떠올랐다.

나와 달리 우동주라면 잘할 것 같았다. 처음 내가 우동주를 봤던(지금은 우리가 곧잘 가서 커피를 사 마시는) 그 베이커리의 테라스에 앉아 있는 모습도 좋을 것 같고, 인테리어 잡지의 촬영장소로도 손색이 없는 우동주 빌라의 거실 마루에서 편안하게 뒹구는 모습도 좋을 것 같았다.

걔야 아무 데나 데려다 놓고 아무렇게나 막 찍어도 그림이지, 뭐. 없는데 있어 보이는 척하는 어깨에 힘 들어간 그림 말고, 따뜻하면서도 뚜렷한 존재감으로 확 꽂히는 백프로 자연산 엄친아 포스니까. 아, 그러다 또 모델 제의 들어오는 거 아니야? 그건 곤란한데.

[사진 한두 장 싣고 질문 몇 개 대답하면 되는 거지?]

[어, 시간도 얼마 안 걸려. 길어야 두세 시간? 왜, 누구 있어?]

어차피 누나도 밑져야 본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에게 전화했을 텐데 예상치 못하게 내가 미끼를 무는 것 같으니 반색을 하며 낚싯대를 확 낚아챘다.

[한 명 있긴 한데… 물어봐야 돼.]

아마 내가 사정을 얘기하고 부탁하면 우동주는 거절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싫은 기색이면 억지로 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꽁꽁 숨겨두고 나 혼자만 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기도 했고.

[야, 한번 물어봐, 물어봐. 촬영 장소도 자기가 편한 데서 하면 된다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고 해. 많진 않아도 사례비도 나와. 한다고 하기만 하면 내가 밥이든 술이든 거하게 쏠게. 어?]

지푸라기가 동아줄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 누나는 잘 설득해보라며 몇 번이나 나를 다그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어쨌거나 이번 주엔 퇴근 후에 같이 시간을 보내긴 글렀고, 내가 놀아주지도 못하는데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영업부도 바쁘긴 하지만 일단 개발부에서 버그 테스트를 완료하는 게 우선이라 그 전까지 다른 부서들은 업무 시간 외의 추가 근무는 거의 없게 된다. 즉, 내가 매일같이 야근을 하는 동안 우동주는 칼퇴근을 해야 한다는 얘기. 혼자 퇴근해서 쓸쓸하게 배회하느니 기분 전환 삼아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점심 먹고 회사로 들어온다는 메시지에 살짝 긴장감을 갖고 기다렸다. 우리 개뼉다구가 사다 주는 걸로 마시려고 점심 먹고 커피도 안 마셨다. 촬영 얘기를 빨리 해주고 싶은 것도 있지만, 어제 그렇게 헤어져서 그런지 얼른 얼굴을 보고 싶었다.

“주 대리, 전용 커피셔틀 왔다.”

부장님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깃을 들추면 ZOO가 새겨진 셔츠를 입은 우람한 체격의 커피셔틀이 유리벽 너머에서 나를 향해 커피를 들어 보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을 보니 어제부터 내내 불안했던 마음속 구름이 걷히는 것도 같았다. 나도 오늘 ZOO 셔츠 입었는데. 반갑지 않은 척, 그저 친한 회사 후배와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가는 척, 빨라지려는 걸음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복도로 나갔다.

“이제 슬슬 덥더라.”

내게 커피를 건네준 우동주는 라펠이 뾰족한 스트라이프 재킷을 벗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고는 흡연실 소파 위에 재킷을 툭 던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스트라이프가 들어갔는지 잘 모를 정도로 연한 회색 셔츠는 드레시 리버스에 갔을 때 내가 골라준 원단이었다. 거기에 짙은 감색의 타이를 두르고, 내 조언대로 살짝 기른 곱슬머리를 왁스로 자연스럽게 손질했다. 회식에서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옷하고 머리만 좀 어떻게 하면 완벽할 것 같았는데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나, 얘를 정말 잡지에 내보내도 될까?

슈트 한 벌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있을 때도 멋지지만 팬츠에 셔츠와 타이만 매고 재킷을 벗었을 때의 좀 더 편안한 분위기가 더 우동주다웠다. 얇은 셔츠감을 따라 길고 탄탄한 몸의 윤곽이 드러나 저절로 그 셔츠 안의 완벽한 육체를 상상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내 담배에 먼저 불을 붙여준 다음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꺾고 제 담배에도 불을 붙이는 옆모습은 같은 남자가 봐도 그림이었다. 그냥 ‘같은 남자’ 아니고 ‘애인 남자’인 내 입장에서는 짧은 순간에 불타오르게 할 수 있는 그림이기도 했다.

“바빴어, 오늘?”

그래도 평소엔 메시지 서너 개씩은 보내는데 오늘은 하나뿐이어서 그게 약간 걸렸다. 어제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가 싶어서.

“어, 조금. 오전에만 세 군데 돌았더니 정신이 없더라고. 점심 먹었어요?”

창틀에 팔을 걸치고 구부정해진 어깨로 담배를 피우며 나를 돌아보는 우동주의 얼굴은 초조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어젯밤 일에 대해 아직까지 나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 너는?”

“박 대리님하고 먹었지. 얼굴이 까칠하네. 몸 챙겨가면서 일해요.”

얼굴이 까칠한 건 어제 네가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간 데다가 꿈에 웬 모르는 여자하고 나와서…. 안 되겠다. 내가 같이 못 놀아주는 이번 주는 우동주의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려놓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역시 나 혼자 보는 것보다는 자랑하고 싶은 심리가 더 컸다. 비록 내 거라고 광고할 수는 없어도.

“너… 수요일에 뭐 해?”

“뭘 새삼스럽게. 당신이 모르는 내 스케줄도 있어요? 버그 테스트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겉으로는 덤덤해도 아직 어제의 연장선상에 있기는 했었나 보다. 평소대로라면 행여 내가 자길 신경 쓰느라 일에 집중 못할까 봐 먼저 마음 써줬을 놈인데 말투에서 서걱거리는 약간의 거리가 느껴진다. 꼬집어 말하라면 딱히 어디가 이상하다고는 못 하지만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당신 몸은 내가 챙겨줄게’가 아니라 ‘몸 챙겨가면서 일해요’도 그렇고. 그동안 우동주가 어지간히 나한테 잘하기는 했구나.

“저기… 우리 누나가….”

어렵게 얘기 꺼낸 이쪽의 조심스러움이 무색하게, 우동주는 별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시원하게 오케이했다. “당신 누님 일이라는데 혹시 모를 만약을 위해 점수 좀 따놓는 것도 괜찮겠지.”라며 웃었다.

누나는 그저 잡지사 쪽에 소개시켜준 것뿐이고 촬영장에까지 나타나진 않겠지만 ‘주변의 괜찮은 놈’을 소개시켜준 것만으로 나(와 우동주)에게 신세를 지게 된 건 분명했다. 우동주 말대로 ‘혹시 모를 만약’을 위해서라도 나쁠 건 없는 얘기였다.

“내 부탁이라 억지로 하겠다는 건 아니지? 안 그래도 돼.”

“아니야, 재밌을 것 같은데? 이번 주엔 퇴근 후에 할 일도 딱히 없고.”

윽, 널 퇴근 후에 할 일 없는 놈으로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평소보다 더 소심해진 나는 별것 아닌 말에도 혼자 의미를 부여하면서 안심했다가, 찔려 했다가, 서운해했다가… 고백을 듣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얼굴 좀 펴요. 엔 소프트 일 혼자 다 하는 것 같네.”

담배를 다 피운 우동주는 복도 쪽을 한번 살펴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손등으로 내 뺨을 툭 만졌다.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정말 넉넉하게 시간을 내서 우동주와 얘기를 해봐야겠다. 대화를 하다 보면 모든 게 잘 풀리겠지. 적어도 우동주는 얘기가 통하는 놈이니까.

“누나한테 얘기해둘게. 아마 잡지사 쪽에서 연락 갈 거야.”

“응, 알았어요. 애인 잘 둔 덕에 촌놈 출세하겠네? 일 힘내요. 난 오후에 또 외근이야.”

나란히 흡연석을 나서면서 우동주는 평소처럼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하지 말라며 손목을 비틀어 쥐던 평소의 응수를 생략했다.

겨우 월요일인데 마음이 급했다. 일이 마무리되기만 하면 당장 택시를 잡아타고 우동주의 집으로 날아가서 뼈가 녹고 살이 타는 섹스를 하고 싶었다. 벌써부터 우동주가 부족했다.

깊이 빠져 일상이 변하고 감정이 변하고 나 자체가 변해가고 있는 건 우동주만이 아닌데, 그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건지.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 WOO DONG ZOO

연애를 하면서 불안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겉으로는 매너 있고 다정한 남자였어도, 자신을 모두 쏟아 붓는 것 같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으니 상대의 표정 하나 말 한마디에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다. 사귀기 전 언젠가,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주세영이 말했던 대로 나쁜 남자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쿨하지 못했다.

문득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선을 긋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질 때가 있다. 지금까지의 변화만으로도 그 사람에겐 엄청난 파격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좀 더 나에게 많은 부분을 내주기를 원하게 됐다.

원래도 그 사람과 나는 속도가 달랐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많은 것을 욕심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자신의 틀을 깨는 것을 보고 싶다. 일도 가족도 세상도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나를 향해 전력질주 해오는 주세영을 한 번쯤 내 온 가슴으로 뜨겁게 마주 안아보고 싶었다.

정말로 일도 가족도 세상도 다 버리라는 게 아니다. 그저 한 번이면 된다. 이 사람이 날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구나, 느낄 수 있는 단 한 번. 결국은 애정을 확인하고 싶다는 얘기인데, 주세영이 알면 유치하다고 인상을 구길 게 뻔했다.

단순한 사고방식의 차이라는 건 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나를 대하는 주세영의 진지함을 의심하진 않는다. 다만 가끔씩 내 방식대로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 뿐.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오늘 진짜 정신없네. 대체 몇 군데를 돈 거야, 아이고 죽겠다. 어이 우동, 월요일인데 또 달려줘야지, 엉?”

마지막 거래처를 나오면서 박 대리님은 내 팔을 툭 치며 술잔을 꺾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칼퇴근을 하면 뭘 하나. 주세영은 나보다 일이 더 좋다는데. 그래도 혹시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을까 싶어 박 대리님에게는 일단 대답을 얼버무려놓고 그 사람에겐 먼저 메시지를 보내봤다.

[박 대리님이 한잔하자고 하는데.]

[그래, 잘됐네. 빈속에 마시지 말고 밥 먹고 마셔.]

언젠가의 월요일엔 박 대리님을 따돌리려고 둘이 합심했었는데 오늘 주세영은 나와 박 대리님의 술자리를 잘됐다고 한다. 일이 바쁜 건 이해해. 일 잘하는 당신이 좋고. 근데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다정하게 듣고 싶을 뿐이야.

서로 사회인인 마당에, ‘내가 먼저야, 일이 먼저야?’ 그런 건 대답할 가치도 없는 멍청한 질문이었다. 근데 그 말을 내가 주세영한테 하게 생겼다. 정말 날 우선해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말이라도 내가 먼저라는 대답을 원해서. 내가 이렇게 질척대는 타입이었다니.

[늦어요?]

[내일까지 적어도 템플릿 개발은 끝내놔야 돼서. 자정 넘을 것 같다.]

메시지에 일일이 답을 줄 정신이 없을 텐데도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건 안다. 아는데도 뭔가가 자꾸 서운했다. 알면서 왜 그러냐고 묻지 마라.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서러운 마음 나도 모르겠고, 이러는 내가 나도 정말 싫고 미우니까.

일요일 오후에 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얼룩 하나 없는 흰 종이를 깔고 공들여 깎아놓은 연필심 같은 주세영의 예민하고 예리한 심성. 그 연필은 부러지기도 쉽지만 날을 세워 찌르면 아프기도 하다. 아, 오늘은 술 한잔하고 박 대리님한테 노래방이나 가자고 해야겠다. 트로트가 땡기는 날이다.

[고생이 많네. 저녁은 먹어가면서 일해요, 꼭.]

당신이 딱 30분, 밥만 먹고 들어갈 테니까 회사로 오라고 했어도 난 기쁜 마음으로 당장 튀어갔을 텐데 그걸 모르나? 이 나쁜 남자야.

“선배님, 달리죠. 저 오늘 아예 집에 안 들어갈랍니다.”

“오오, 좋아! 가자, 1차는 내가 쏜다!”

술친구 해드리는 것만으로 이렇게 좋아하는 박 대리님이 안쓰러워야 하는데 어째 오늘은 내가 더 안됐다. ‘일만 아니었으면 나도 너하고 소주 한잔했을 텐데.’ ―그말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렵나? 립서비스가 눈곱만큼도 없어. 장사는 죽어도 못할 거야. 주세영 성격 모르고 만난 것도 아닌데 요즘 들어 갑자기 서운해지는 걸 보니, 나 진짜 같이 안 살아줘서 알게 모르게 시위하는 건가?

“너 요새 맨날 바쁜 척하더니 웬일이냐?”

“바쁘긴요, 뭐…. 어쩌다 보니 시간이 안 난 거죠.”

점심에 먹은 설렁탕은 벌써 아까 소화가 다 돼서 배고팠는데, 막상 돼지갈비 양념이 지글지글 익는 냄새를 맡으면서도 별로 식욕이 없다. 저녁도 제대로 안 먹고 까칠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주세영 모습이 아른거리는데 나 혼자 속 편하게 고기 먹자니 괜히 찔리기도 하고.

마음 같아선 먹을 것도 챙겨다 주고 커피도 사다 주고 싶지만 내가 가봤자 더 신경 쓸것 같아서 마음 접었다. 일할 땐 내버려둬야 한다니. 대체 뭐가 그렇게 섬세하냐고. 화가야? 작가야? 창작의 고통 때문에 밥 먹는 시간에조차 집중력을 흩트리면 안 되는 거냐고. 멀쩡한 애인 두고도 일주일 동안 독수공방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솟구치네, 진짜.

“너 솔직히 말해봐. 연애하지? 틈만 나면 핸드폰 붙들고 있고, 핸드폰 들여다보면서 웃었다가 울었다가, 딱 연앤데.”

허허, 박 대리님이 눈치채실 정도면 내가 좀 허술했었나? 앞으로는 주의가 필요하겠군. 설마하니 내 연애 상대가 주세영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시겠지만.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 일주일은 저도 찬밥 신세, 솔로나 다름없답니다, 선배님. 일주일 동안 우리 술이나 퍼마시죠.

“제가 또 언제 울었다고 그러십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오늘은 울더라? 왜, 잘 안 되냐?”

빈 잔을 내 쪽으로 기울이면서 은근하게 눈썹을 치키는 박 대리님 얼굴이 왠지 기뻐 보인다. 자기가 연애 못 하고 찌들어가고 있으니 남의 연애도 잘 안 되기를 바라는 놀부 심보인가? 흥, 죄송하지만 이건 그냥 연애의 필수 코스거든요? 이런 건 시련 축에도 안 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궁합이 잘 맞는지 아세요? 특히 속궁합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하아, 오늘은 마음속 주절거림도 왠지 힘 딸린다.

“그러게요. 생각처럼은 안 되네요.”

“오오, 역시 누가 있긴 있었구만. 이쁘냐?”

연애 제대로 안 풀려서 상심한 후배는 안중에도 없고 대뜸 첫마디가 ‘이쁘냐’라니. 이래서 남자들이란.

“이쁘죠.”

“너 내가 얼굴 밝힐 줄 알았다. 섹시한 스타일? 청순한 스타일? 연예인 누구 닮았냐?”

이쁘냐는 말부터 나온 사람이 누군데 나한테 얼굴 밝힌대? 주세영 얼굴이 좀 반반한 건 사실이지만 얼굴 때문에 사귀는 건 아니지. 냉정하고 도도하게 벽을 쌓아놓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심약하고 다정하고 허술한 면이 처음엔 호기심을 건드렸고. 파르르 떠는 반응이 재밌어서 주변을 맴돌면서 놀리다 보니 어느새 그 매력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건 바로 나였고.

“굳이 따지자면 섹시하고 청순한 스타일이죠.”

“뭐? 그런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냐? 섭소천 같은 거냐?”

섭소천이 뭔지 생각해 내기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나도 옛날 영화 뒤져보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앞뒤 설명도 없이 갑자기 섭소천이라니. 그렇군. 박 대리님에게 있어 섹시하고도 청순한 인물의 대명사는 <천녀유혼>의 섭소천이었군. 

 하지만 우리 주세영은 좀 더 서늘하고 정돈된 느낌이지.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면 희미하게 청량한 향이 풍기는, 방금 세탁소에서 찾아온 새하얀 와이셔츠 같은 남자라고나 할까. 하여간 뒤집어 벗어놓은 양말 같은 박 대리님하곤 다르다.

“좀 이성적인 타입이에요. 저는 좋다고 목매다는데 그쪽에선 태연하니까 불안하네요.”

사실은 그것도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분명 주세영은 겉으로 보기엔 이성적일 것 같고 한 번도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벗어난 적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뜨겁고 격렬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엔 그 감정 앞에 솔직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본인 스스로는 실제보다 더 꽉 막힌 인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았지만.

가득 찬 잔을 단번에 탁 털어 넣고 다시 채우려고 소주병을 쥐는데, 박 대리님이 엉거주춤 의자에서 엉덩이까지 들고 일어나 소주병을 가져가 따라주신다. 내가 박 대리님에게 위로받는 날이 오다니. 감사한 마음보다 왠지 모를 패배감이….

“심각한가 보네, 이놈. 너 같은 놈들은 연애 쉽게 할 줄 알았더니.”

연애를 쉽게 혹은 가볍게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어려웠지. 이전의 그녀들에 대해서도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 좋아했다. 이것이 내가 누군가에게 품을 수 있는 최상의 감정이라고 느껴본 적도 있었다. 다만 주세영을 만나고 나서 그 이상의, 혹은 다른 방향의 감정도 내게 있음을 깨달았을 뿐.

주세영을 만나고, 나는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주세영이 없는 곳에서 갖는 술자리에 대해 그 사람이 궁금해했으면 했다. 옆 테이블에서 혹시 합석을 권하는 건 아닐지 불안해했으면 했다. 캐묻고 감시하고 의심하는 문자를 원했다. 이건 지금까지의 내 모습과 달랐다. 내가 아는 우동주가 아니었다.

그래도 난 거기에서 혼란을 느끼거나 주세영으로 인해 내가 변한다는 것에 대한 자존감의 위기 같은 건 못 느낀다. 사람은 원래 좋건 싫건 크건 작건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해가는 존재다. 스스로 나라고 인식했던 과거의 모습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완전하게 독립된 자아는 결코 아니다.

그러니 현재의 감정에 의심 없이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게 우동주였고, 당연하게도, 주세영은 나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타인이었다.

그래, 결국엔 누구를 만나더라도 연애라는 게 타인과 벌이는 이벤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간극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어긋남은 내 탓도 그 사람 탓도 아니다. 누구와 만나더라도 언젠가는 지나야 하는 관문일 뿐. 우리 섬세한 주세영도 그냥 그렇게만 여겨주고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어른스러운 척 말했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어긋남이라는 핑계로 이 유치한 감정에 강한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있는 게 지금의 나였다. 어떻게 포장하려고 해봐도 난 그냥 주세영의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시시하고 뻔한 한 남자였다.

“저도 처음입니다, 이렇게 빠진 건. 전 얼른 같이 살고 싶은데 그쪽은 너무 빠르다고 하네요.”

‘그쪽’이 주세영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어도 이런 얘기를 박 대리님에게 한 것만으로도 주세영이 알면 날벼락이 떨어지겠지. 내가 연애하는 상대가 주세영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고 보니 그런 점에서도 우린 참 달랐다. 그 사람 입장에선 내가 대책 없이 과감하기만 한 놈일 거고, 내 입장에서 주세영은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사람이고.

“같이 살다니, 동거?”

주세영하고 나하고 결혼은… 좀 그러니까 아무래도 동거겠죠? 이 나이에 남자 둘이 살림 합친다는 건 각오에 있어서는 결혼과 다를 바가 없겠지만, 서류에 도장 찍어 국가기관에 신고해야만 결혼이 성립되는 거라면, 우리가 한집에서 함께 살더라도 그건 영원히 동거일 수밖에 없었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박 대리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의외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 생긴 거하고 되게 다르다? 엄청 고지식한 놈일 줄 알았는데 동거라니.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한국에선 아직 시선이 그렇잖아. 똑같이 동거했어도 여자 쪽을 더 안 좋게 보니 아무래도 조심스럽겠지.”

“전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결혼하고 싶어요. 지금 당장 결혼하자고 했다간 뒷발로 걷어차일 것 같으니까 일단 같이 살기라도 하자는 거죠.”

그 사람도 나도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고, 어차피 우리 둘이 같은 마음으로 살면 되는 건데 굳이 결혼이니 뭐니 하는 말을 갖다 붙일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지금 네가 좋으니까 같이 살고 싶어! 앞날은 어떻게 되든지!’ 하는 철없는 마음도 아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에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걸 머리로도 경험으로도 이해하고 있는 나이이고, 그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내 마음은 확고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거 아니냐? 벌써 결혼 생각이 들어?”

“얼마 안 되긴 했는데… 뭐 한 달 만나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둘이 같이 정신이 반쯤 휙 나가야 되는 거고. 그쪽도 너 좋아하긴 하냐?”

“자기 세계가 좀 확고해서 신중한 거지, 저 엄청 좋아하거든요?”

이 아저씨가 진짜! 주세영이 나 때문에 게이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인데! 일 때문에 나를 조금 소홀히 한다고 해서 기본 바탕이 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 둘 다 정신이 반쯤, 아니 완전히 날아가지 않았다면 지금에 와서 남자와 연애할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싱숭생숭해 죽겠는데 불난 집에 기름 들이붓는 것도 아니고, 진짜.

갓 스무 살 된 애들도 우리처럼은 뜨겁지 않을 거라고, 30년을 같이 산 부부도 우리처럼 손발이 척척 맞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잖아. 아니지, 주세영? 와서 박 대리님한테 말 좀 해주라. 응?

“어이구 자식, 발끈하기는. 아주 푹 빠졌나 보네. 네가 진짜 결혼할 때가 됐나 보다. 물불 못 가릴 나이도 아닌데 결혼에 동거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

박 대리님 말대로, 상대가 주세영이 아니었더라도 이제 조금 끌린다고 해서 가볍게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너무 무뎌져 둔감해지기 전에, 너무 말랑말랑해 쉽게 터져버릴 수 있는 시기를 지나, 딱 좋은 타이밍에 그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사는 문제에 신중한 것도 날 그 정도로는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세영 성격 때문이라는 것도 다 아는데, 왜 이렇게 자꾸 초조한 건지.

“아, 진짜… 저 없으면 안 되게 만들고 싶은데…. 방법 없을까요….”

연애 젬병인 박 대리님한테 물어봤자 답은 안 나오겠지만 속에 있는 걸 뱉기라도 하지 않으면 안에서 곪아 터질 것 같았다. 주세영이 밥 먹고 술 마시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들어서 그런지 이제 겨우 두 병 비웠는데 벌써 알딸딸했다. 허리를 세우고 있는 게 귀찮아서 등 뒤의 벽에 몸을 기댔다.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와서 그새 수북해진 재떨이를 갈아주셨다.

“그 여자도 조만간 알아주겠지. 너처럼 잘난 놈을 이렇게 떡 주무르듯 하는 사람이 누군지 얼굴 좀 보고 싶다, 야. 마셔, 마셔. 오늘은 이 선배님이 쏜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생각하시는 것처럼 여자는 아니지만, 내일 출근 뒤에 4층으로 올라가시면 절 이렇게 떡 주무르듯 하는 사람이 누군지 얼굴 보실 수 있습니다. 근데 아마 그 사람이 주세영인 거 알면 선배님 뒤로 넘어가실 것 같으니까 되도록 4층엔 올라가지 마세요.

“선배님은 김수희 씨한테 대시 좀 해보셨어요?”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울 것 같으면 내가 지금까지 혼자겠냐, 인마….”

박 대리님의 험난했던 지난 연애기를 들으면서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위로를 하기도 했지만, 죄송하게도 내 마음은 이 자리에서 점점 겉돌고 있었다. 10시가 되기도 전에 나는 빈속에 소주 다섯 병을 비우고 두 갑 반의 담배를 피웠다. 나중엔 박 대리님이 그만 마시라며 말릴 정도였다.

“오늘 집에 안 간다니까요. 2차 가죠, 선배님. 제가 사겠습니다!”

주세영을 피해, 주세영에게로 향하는 내 마음을 피해 군산으로 도망갔던 그날 이후 이렇게 취하기는 처음이었다. 원래 나는 술이 세다. 술을 할아버지에게 배워서 그런지 작정하고 긴장한 채로 마시면 아무리 퍼부어도 안 취할 정도다. 그런데 오늘은 취했다.

박 대리님은 더 마시자고 들러붙는 나를 택시 안에 밀어 넣었다. 아직 자정이 안 됐길래 회사로 가볼까 하다가 그냥 한남동으로 가자고 했다. 저녁 먹고 일하라고 했던 내 메시지 이후로 주세영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더 보고 싶었다. 그냥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살을 맞대고 체취를 맡으면서 잠들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치유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창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술 취해서 전화하는 건 추한 짓인 걸 알면서도 나는 기어이 전화를 걸었다.

[저녁 먹었어요?]

[어, 너는?]

뭔가에 쫓기는 듯한 목소리. 나와 통화하고 있지만 관심은 다른 곳에 두고 있는 무심함.

[먹었지. 근데 나… 오피스텔 가서 기다리면 안 되나? 술 좀 마셨더니 집까지 가기 귀찮다.]

[동주야….]

내 이름을 부르는 한숨 섞인 목소리에 제정신이 들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라, 우동주.

[아, 그냥 한번 말해본 거야. 신경 쓰지 말고 일해요. 그리고 나 벌써 집에 다 왔어, 사실은. 끊을게요.]

몸이 하나로 이어져야 그 사람을 다 가진 것 같아서 안달을 하고, 내 집에 데려다 놔야 안심이 될 것 같고, 일에 집중해 있을 때도 문득문득 나를 떠올렸으면 좋겠고, 힘들 땐 나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했으면 좋겠고…. 주세영이 나를 자꾸 못난 놈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니, 내가 주세영을 못난 남자로 만들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같이 살기만 하면, 주세영이 어떤 하루를 보냈건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일하는 동안 날 방치해두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 진짜 중병인가 보다. 주세영도 중병 환자로 만들어주든가, 아니면 나를 완치시켜주든가. 오랜만에 신을 탓하게 되네.

택시 안에서 내다본 한강의 야경이 나 혼자 주세영을 좋아했던 때처럼 서글퍼 보였다. 한동안 세상 모든 빛이 다 따뜻해 보였었는데.

집에 가자마자 재킷도 못 벗고 쓰러지듯 소파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최악의 컨디션으로 일어나 보니 주세영에게서 세 번 부재중 통화가 와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었을 텐데 그것도 못 느끼고 곯아떨어졌던 거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으면 엄청 추한 꼴을 보였을 테니까.

[일어났어요? 나 지금 출근 중. 어제 씻지도 않고 잠들어서 전화 온 줄도 몰랐어. 출근길에 커피 사 갈 테니까 흡연실에서 봐요.]

버스 안에서 메시지를 보내고 카페에 들러 그 사람 몫의 잔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시럽을 넣었다. 내 건 노 시럽. 난 지금 좀 쓸 필요가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4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람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기다리면서 먼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으려니 정신없는 와중에도 빈틈없이 차려입은 주세영이 눈가를 누르면서 들어온다.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 피곤해 보인다.

“좋은 아침.”

커피를 건네주면서 인사했더니 무릎으로 허벅지를 푹 찌른다.

“좋은 아침 좋아하시네. 어제 뭐야…. 걱정했잖아.”

“걱정했으면 한 서른 통 정도 걸어주지 그랬어. 세 통은 너무 짠데?”

그래도 걱정했다면서 흘겨보는 얼굴을 보니까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왜 걱정이 안 됐겠는가. 술 마시고 전화해서 그런 식으로 끊어놓고는 연락 두절이 돼버렸는데. 아무리 일에 푹 빠진 주세영이라도 속 좀 태웠겠지. 안 그래도 피곤했을 사람한테 걱정 끼친 게 겸연쩍고 미안해졌다.

“웃기고 있네. 나도 피곤해서 씻자마자 뻗어버렸다고. 그 와중에도 핸드폰 쥐고 잠들었구만 뭐가 어쩌고 어째?”

투덜거리는 주세영의 담배에 불을 붙여줬다. 서로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어제보다 이렇게 투닥거리는 오늘이 더 마음 편했다. 아무래도 점점 마조가 돼가는 것 같은데 그냥 받아들여야겠다.

“미안, 미안. 오랜만에 좀 많이 마셨더니 어젠 술김에 내가 오버 좀 했어. 신경 쓰지 마요. 진짜 술김이야.”

“얼마나 마셨길래 네가 취해? 안 놀아준다고 시위하는 거냐?”

정답. 하지만 날 걱정했다는 걸 확인했으니 정답이 아닌 척해줘야지. 

“진짜 아니야. 나 원래 혼자서도 잘 노니까 주세영 대리님은 안심하고 일에 전념하세요. 아, 나도 오늘은 자료 정리하느라 박 대리님하고 좀 남아 있을 거야.”

혼자서도 잘 놀지만 잘 놀고 있는지 당신이 확인해주지 않으면 일부러 넘어져서 다칠 것 같으니까 가끔씩 관심 좀 보여주세요, 라는 말을 다르게 포장한 건데 주세영이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계절은 봄이 한창인데, 흡연실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이라곤 죄다 칙칙한 사무실들뿐이다. 드문드문 놓인 가로수들만으로 봄을 만끽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번 주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잔인한 4월이라더니 시작부터 너무 빡세다.

분위기 봐서 이마에라도 좋으니까 뽀뽀 좀 하고 싶었는데 개발부 다른 프로그래머가 들어오는 바람에 뽀뽀는커녕 엉덩이 두드리는 것도 못 했다. 깍듯한 존댓말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그 사람만 볼 수 있도록 짧고 굵게 윙크를 쏴줬다. 못 말린다는 듯이 픽 웃는데, 그것만으로도 좀 힘이 났다.

그 미소의 힘으로 근근이 버티면서 하루를 보냈다. 오후에 외근 한 번 나갔다가 들어와서 잠깐 회의 좀 하고 났더니 퇴근 시간이었다. 개발부와 달리 이번 주까지는 스케줄이 널널한 우리 부서 사람들은 박 대리님과 나만 남기고 전부 퇴근을 했다. 박 대리님이 개발부에 껴서 저녁 먹자고 하시길래 웬 떡이냐 하고 덥석 물었는데, 주세영은 거기 안 낀다고 해서 나도 속이 안 좋다며 슬쩍 발을 뺐다. 박 대리님이 개발부 사람들과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빛의 속도로 4층에 전화를 걸었다.

[왜 저녁 안 먹어요?]

[들어오는 길에 김밥이나 좀 사달라고 해놨어.]

[어차피 다 밥 먹으러 나가는데 왜 혼자만 남아서 일을 해?]

[가서 먹어도 마음이 안 편해서 그래.]

[나 잠깐 올라가요.]

대답도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오늘은 이제 더 이상 둘만 있을 시간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거야말로 저녁밥 따위보다 훨씬 큰 떡이었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곧장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단정한 뒷모습을 보니 슬쩍 웃음이 났다. 사귀기 전에 근처에 올 일이 있다는 핑계로, 일요일에 혼자 나와서 일하던 그 사람을 기습 공격(?)했던 기억이 났다. 서울에 아는 사람도 몇 없는 군산 촌놈이 휴일 오후에 이 근처에 올 일은 무슨, 그냥 작업 멘트지.

왜 올라와서 방해하냐는 얼굴로 째려봐도, 난 몰라, 이제 그런 거 무시할 거야. 회의 테이블 의자를 끌어다 그 사람 옆자리에 갖다 놓고 앉았다.

“대리님, 작업은 잘돼가십니까?”

일부러 목소리 쫙 깔면서 선배 대접을 했더니 또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어이없는 웃음이라도 웃는 얼굴이 좋다. 그냥 있어도 이쁘긴 한데 요즘 당신 웃는 얼굴을 너무 못 본 것 같다.

“넌 왜 밥 먹으러 안 갔어?”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거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으면서 나를 본다. 내가 사준 셔츠를 입었다. 예민해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푸른, 블루 드레스 셔츠.

“당신 안 간다는 정보를 듣고 저녁 대신 주세영 보충하려고 일부러 안 갔지.”

뾰족하게 날을 세운 깃을 들추고, 매듭에 검지를 찔러 넣어 타이를 풀고, 한쪽 끝을 붙잡아 스르륵 끌러내면 그 안에는 ZOO라는 각인이 있다. 정식 업무 시간은 벌써 지났고, 타이를 느슨하게 맨다거나 하는 이유로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 사람의 셔츠 단추는 항상 고집스럽게 끝까지 채워져 있다. 정숙하고 금욕적인 척을 하지만 셔츠 안에 감싸인 당신의 가슴은 흥분으로 헐떡거리는 쾌감을 알고 있다. 혀와 손가락으로 유두를 놀려주면 허리를 젖히면서 내 머리를 꽉 끌어안겠지. 그럴 때 당신이 목 깊은 곳에서 내는 소리를 좋아해, 나는.

“내일 촬영이지? 잡지사에서 연락 왔어?”

“어, 낮에 촬영하고 싶다고 해서 부장님한테 얘기해서 시간도 빼놨어.”

“진짜? 어디서 하길래?”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단둘이 있는데, 지금 내 눈빛은 분명 의미심장할 텐데,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고 싶은 건지, 그 사람은 자꾸 딴소리만 한다. 정말 일주일이나 나하고 아무것도 안 할 셈인가?

“영업부라고 했더니, 영업맨 느낌이 나게 촬영하자 그래서… 운전하는 컨셉으로 찍기로 했어.”

“음… 재밌겠다. 나도 일만 아니면 구경 가고 싶은데.”

등받이에 기댄 채로 고개만 내 쪽을 향한 주세영의 시선이 나른했다. 피로감 때문에 오히려 살짝 느슨해진 눈빛은 손을 뻗으면 저항하지 않을 것 같았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가볍게 깍지를 낀 손. 팬츠에 감춰진 허벅지, 벨트로 알맞게 조인 허리. 예전에 그것들은 결코 손대서는 안 되는 남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짜? 구경 오고 싶은 마음은 있어?”

“당연하지….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을지 모르는데.”

잡지 촬영은 전혀 관심 없었지만, 내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 누님의 부탁이기도 했고. 뭐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주고 싶다. 그러니까 당신도 조금쯤은 날 위해 자신을 허물어야지.

“안마해줄까?”

“됐거든.”

주세영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사렸지만, 나도 여기서 바지지퍼 내리자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 엘리베이터 도착하면 벨 울릴 거고. 괜찮으니까 잠깐 가만히 있어봐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의 뒤쪽에 서서 어깨를 붙잡았다. 익숙한 두께와 감촉임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에 전해져오는 그 사람의 온기가 나를 곤두서게 만들었다.

“어우, 대리님, 어깨가 아주 단단히 뭉치셨는데요. 스트레스가 심하신가 봐요.”

사심이 섞인 마사지이긴 했지만 피로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은 사실이었다.

“일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요즘 애인이 속을 썩여서요.”

누가 누구 속을 썩이고 있는데? 감히 내 흉을 보다니. 목덜미를 내보인 당신이 잘못한 거야. 물어뜯기는 건 순간이라고.

“그럼, 그 애인은 그만두시고 저랑 한번 잘 해보실래요?”

삼각근을 감싸고 꾹꾹 누르던 손을 쫙 펼쳐 그대로 가슴으로 미끄러뜨렸다. 셔츠의 촉감 때문인지 그 안에 든 가슴의 굴곡 때문인지, 사무실이라는 공간을 까맣게 잊을 만큼 순식간에 관능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너 솔직히 말해. 그때도 음흉한 마음으로 주물렀었지?”

“언제? 뭘 말하는지 난 잘 모르겠는데?”

웃으면서 허리를 더 굽혔다.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귓가에 입술을 문질렀다. 얕게, 스치듯, 너무 가까워 뜨겁지도, 너무 멀어 무감하지도 않은 거리.

“내가 사준 셔츠가 당신 몸을 감싸고 있는 거, 그거 진짜 짜릿해.”

내 속삭임에 그 사람이 뺨의 솜털을 세웠다. 아, 못 참겠어. 어제도 뽀뽀 한 번 못 했는데, 오늘도 지금 아니면 기회 없을 텐데. 다른 쪽 귓불을 어루만지면서 뺨에서부터 더 아래쪽으로 입술을 옮겨갔다.

“너… 뭐 하려고…!”

주세영의 No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지금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넌 끝이야’라는 일반적인 의미의 No와 ‘지금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다가오지 않으면 넌 끝이야’라는 반어적인 의미의 No. 물론 지금은 후자 쪽이다.

“우리 요즘 너무 애정이 부족해. 지금 주세영 수혈 안 해주면 나 시들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당신, 그래도 좋아?”

말이 끝날 때쯤 이미 내 입술은 그 사람의 입술 위에 놓였다. 위아래로 살짝 고개를 움직여 닫힌 입술을 열고, 혀를 밀어 넣어 윗입술 안쪽의 점막을 핥는다. 귀를 만지작거리던 손은 뒷덜미로 옮겨가 긴장한 목을 주무르고, 다른 한 손은 그 사람의 허벅지 위를 가로질러 팔걸이를 짚었다. 주세영이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나는 안쪽으로 더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주세영이 턱을 더 들어 자기 안에 들어온 내 혀를 빨아들였다.

급속도의 흥분에 머릿속이 벌겋게 달아오른 나는 세 번째쯤의 단추를 끄르고 벌어진 틈 사이로 손을 넣어 유두를 찾았다. 그 사람은 내 손목을 붙잡고 빼내려고 했지만 거기에 그다지 강력한 저항의 의지가 담겨 있진 않았다. 오히려 입안의 혀는 나를 더 깊이 끌어당기며 갈증을 호소했다. 손가락 끝에서 주세영의 유두가 빳빳해졌다. 화장실이라도 좋으니까 자리를 옮기자고 해야 할 것 같았다.

―퍽!

질량을 가진 묵직한 물체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파편으로 변하는 소리.

혹은 내 심장이 혹은 주세영의 심장이 충돌하면서 파편으로 부서지는 소리. 혹은 세상이 잠시 멈추는 소리일 수도 있고.

0.1초를, 찰나를 1분처럼 느낀다는 게 이런 걸까? 머릿속에서 동시에 수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뭔가를 각오하기까지 했다.

“니들… 뭐 하냐?”

은박지에 싸인 김밥은 옆구리가 터진 채로 밥알을 뱉어냈고, 비닐이 터진 일회용 용기에 담긴 어묵 국물이 꿀렁꿀렁 넘쳐 사무실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진 박 대리님의 양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좆됐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맞아떨어지는 상황은 없을 거다. 나는 우선 주세영의 셔츠 단추를 잠그고 허리를 폈다.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박 대리님을 향해 나는 웃었다.

어제 박 대리님이 보고 싶어 하셨던 그 사람이 이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4층엔 올라오시지 말라니까.

최악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박 대리님과는 껄끄러운 채로 일을 하고, 주세영은 완전히 나를 쌩까고, 그 와중에 나는 내키지도 않는 잡지 촬영을 가야 했다. 일요일부터 위태위태했던 분위기가 마침내 시원하게 박살이 나버렸다. 박살도 아주 이런 개박살이 없다.

우리의 키스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박 대리님이라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내에서 그 사람과도 가장 가까웠고, 나하고는 뭐 허구한 날 붙어 다녔으니 이런저런 정도 쌓였고.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입이 가벼울 것 같아도 꽤 의리가 있는 선배기 때문에 일단 다른 곳에 떠들고 다닐 염려는 없었다. 제대로 얘기를 한다면 어렵게나마 받아들여 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평소처럼 대해주는 박 대리님이 일단 고마울 뿐이다.

[지금 촬영 가요. 아마 회사로 다시 들어오진 않을 것 같아. 박 대리님은 없었던 일처럼 해주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해요.]

어제부터 주세영은 내 메시지, 전화, 다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한창 예민해져 있는 시기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딱 5분만 더 늦게 오시지. 원망할 대상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박 대리님 탓을 하게 됐다.

역시나 주세영은 답이 없다. 내가 먼저 손댄 건 인정하겠는데 당신도 아주 싫지는 않았잖아. 또 다 내 잘못이야? 이번엔 나도 주세영의 태도에 좀 화가 났다.

자기가 직접 스타일링해서 입고 온 옷으로 찍어야 한다길래, 뭘 입고 가면 좋을지 코치 좀 받으려고 했었는데 주세영은 그 전화도 묵살했다. 자기가 부탁한 일인데 책임감도 못 느끼나? 홧김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입고 가려다가 그래도 그 사람 체면에 누님 체면까지 달린 일인데 그럴 수는 없어서 그 피폐한 정신으로 드레스룸에서 몇 시간을 끙끙댔다. 처음엔 그냥 아버지한테 전화해볼까 했지만 나중엔 오기가 생겨서 혼자 어떻게든 해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주세영한테 잘 보이려고 잡지도 사 보고 인터넷도 뒤지고 했던 것들을 총동원해 머리를 쥐어짰다.

다양한 분야의 샐러리맨들을 인터뷰하는 게 이번 촬영의 목적이라며 되도록 평소 분위기대로, 그리고 자기 분야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차림으로 부탁한다고 했는데 영업맨이 뭔 특징이 있나. 그저 단정하고 신뢰를 줄 수 있으면 최고지.

그래서 네이비 슈트로 골랐다. 광택이 없는 담담한 네이비 슈트에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셔츠를 고르고 타이는 검은색으로 했다. 실제로 가장 귀한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 입는 옷이기도 했다.

촬영 장소는 강남에 있는 스튜디오라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스튜디오로 오라길래 운전하는 모습 찍자더니 웬 스튜디오? 하고 의아했는데, 작은 마당이 딸려 있어서 거기다 차를 세워놓고 운전하는 척을 하는 거였다. 다행히 옷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책임 에디터라는 누나가 체격과 얼굴을 칭찬해줬지만 거기에 기뻐할 여력도 없었다.

“요즘 우동주 씨 생활을 제일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보통 운전할 땐 뭘 하세요?”

운전할 때 뭘 하냐니, 운전에 집중해야죠.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DMB로 뉴스를 본다든가 스마트폰으로 스케줄을 체크한다든가… 뭐 그런 우동주 씨만의 버릇 없어요?”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잡지사 에디터의 이미지대로 꽤 깐깐하고 서늘해 보이는 동시에 일도 잘할 것 같은 인상의 누님이었다. 깐깐하고 서늘하고 일도 잘할 것 같다는 점에서는 주세영도 비슷한 느낌이지만, 신기하게도 서로 방향은 달랐다. 그 사람이 좀 더 고집스럽게 자기 안에 집중하는 장인 같다면, 에디터 누나는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적극적인 행동파에 가까웠다.

“요즘엔, 주로 핸드폰을 보는데요.”

“스케줄 체크?”

“아니요…. 사실 애인하고 지금 냉전 중이라, 혹시 연락 없나 계속 핸드폰만 보게 되더라구요. 이런 건 능력 있는 샐러리맨의 모습이 아니겠지만.”

“음… 아니요, 그것도 좋을 것 같은데. 샐러리맨도 결국 사람이잖아요. 운전할 때는 일에서 살짝 벗어나 있을 때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인간적이고 괜찮을 것 같은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에디터 누님은 옆에 있던 사진작가 큰누님(포토그래퍼분이 에디터 누나보다 열 살 이상 많아 보였다. 에디터 누나가 깐깐해 보이는 느낌이라면 포토그래퍼 누님은 다소 거칠고 자유로워 보이는, 속세를 벗어난 히피에 가까운 인상이었다)에게 의견을 물었다. 카메라만 만지작거릴 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작가 선생님은 그것도 좋을 것 같다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냥 신세타령 삼아 툭 던진 말이었는데 결국 촬영 컨셉은 ‘일은 잘 풀리지만 연애는 잘 풀리지 않는 영업맨의 고달픈 오후’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정말 요즘 내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컨셉이 돼버린 거다.

촬영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내가 프로 모델도 아니고, 그쪽에서도 완벽한 결과물을 기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슈트도 반듯하게 입고 자세도 바르게 하고 시작했는데, 나중엔 재킷도 벗고 셔츠의 버튼도 하나 풀고 소매도 걷어 올렸다. 이왕 하는 거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뭔가 점점 리얼해지고 있었다. 이러면 그냥 평소 내 모습인데.

“신호 대기 중에 연인의 연락을 체크하면서 초조해하는 느낌으로 부탁할게요!”

그건 굳이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내가 딱 그 심정이니까. 잘하고 있냐고 한마디만이라도 해주길 바랐지만, 시원시원한 포토그래퍼 선생님 입에서 “오케이, 수고했어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도 내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스튜디오로 들어가 잠깐 쉬면서 몇 가지 인터뷰 질문에 답안을 작성했다. 의외로 요즘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날카로운 질문들이었다.

남자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지금 하는 일은 나의 천직일까. 일과 사랑 중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대강 그런 류의 질문들에 한두 줄 정도로 간단히 답하면 됐다. 하지만 한두 줄로 답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생각하는 시간이 길게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주세영을 빼고는 설명이 불가한 게 요즘 우동주의 생활이라, 답변을 적으면서 자연히 주세영이 많이 생각났다.

우리는 현재 동종 업계 종사자에(비록 부서는 다르지만), 같은 회사에(비록 부서는 다르지만), 마음만 먹으면 서로 의지가 되어주면서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할 수도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새삼 자각했다. 지금 우리의 안 좋은 상황은 딱히 둘 중 한 명의 잘못 때문도 아니고, 내가 조금만 더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조금만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 되는 일이었다. 박 대리님은 뭐… 나중에 내가 알아서 처치(?)할 거고.

물론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분명 내가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한다면 그 사람도 강경하게만 나오지는 않을 거다. 사귄 시간으로만 보자면 오래된 커플은 아니지만 우리에겐 그에 못지않은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었다.

우리의 끌림은 불장난이 아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매력이나 외모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시작한 만남도 아니다. 서로 많은 것을 각오했고, 버렸고, 또 그 이상으로 서로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그것만큼은 우리가 같은 생각이라고 믿는다.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어떻게 매일매일 깨가 쏟아지고 달콤하겠는가.

“우동주 씨, 선생님이 오늘 촬영 즐거우셨다고 뒤풀이하자시는데 이 뒤에 시간 괜찮으세요?”

이미 오늘 촬영 때문에 반차를 낸 상태였고, 회사에 돌아가서 그 사람을 달래려고 해봤자 지금으로서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었다. 그 사람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게 우선은 최선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집에 가서 점잖게 책이라도 보면서 그 사람이 일요일 전에 일을 끝내기를 기다릴 수 있을 만큼 나는 어른스러운 놈이 못 됐다.

“저야 좋죠.”

이러라고 잡지 일을 소개시켜준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기가 이번 주엔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할 것 같으니까 새로운 경험도 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면서 즐겁게 지내라고. 주세영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집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보다는 훨씬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았다.

[촬영 끝났어요. 잘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사람들이 뒤풀이하자고 해서 지금 이동 중. 저녁 먹어요. 일을 위해서라도.]

답문을 기대하고 바란 메시지는 아니었다. 주세영 성격에 어제의 사건까지 끌어안고 일을 하는 건 거의 생고문 수준이나 다름없겠지. 난 솔직히 박 대리님은 별로 걱정 안 된다. 우리 부 부장님이나 영업부 부장님이 아니었던 게 어디야. 아니, 애초에 내가 키스만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그런 건 그저 우연과 타이밍의 장난일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자꾸 못난 생각을 하게 됐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나누는 잠깐의 키스에 도덕적 죄책감까지 끌어올 정도로 고결한 놈이 아니니,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주세영에게 키스할 게 뻔했다. 그러니 후회해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하하, 우동주 씨 진짜 핸드폰만 보네. 지금 얼굴 사진 찍어서 잡지에 실어도 되겠어. 회식 자리에서도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신입 영업맨!”

술이 어느 정도 오르신 사진작가 큰누님은 5분이 멀다 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나를 놀리면서 즐거워하셨지만, 마주 웃어드리는 내 얼굴은 어색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내 얼굴이 썩거나 말거나, 왠지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보셨을 것 같은 큰누님은 젊은이의 연애가 즐겁기만 하신 모양이었다.

“대체 애인하고 뭐 땜에 싸웠길래 그래? 우동주 씨가 잘못한 거야?”

네, 제 잘못이죠.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전 그저 위태로운 분위기를 달콤한 스킨십으로 풀어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 사람에게 짐 하나 더 얹어준 꼴이 됐네요. 근데 저도 사람이니까 상대의 마음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 거고, 날 봐달라고 떼쓰고 싶을 때도 있는 거잖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너무 매정하다구요. 어떻게 하루 동안 내 연락을 무시할 수가 있는지. 난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 사람 연락을 모른 척하진 못할 것 같은데. 이것도 성격 차이인가요? 혹시 그 사람은 나만큼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 불안한 건 제가 찌질한 놈이어서 그런 거냐구요. 아이씨, 그냥 찌질하다 쳐. 나 찌질한 놈 맞으니까 사람 하나 구한다 치고 연락하라고, 주세영 이 나쁜 새끼야.

“제 잘못이라고 해서 이 냉전이 끝나는 거라면 몇 번이고 제 잘못으로 하고 싶네요.”

“아이고, 아주 다 죽어가는 얼굴이네! 그렇게 고민할 거면 무작정 찾아가서 기다려보기라도 해봐. 정성에 감복해서 용서해줄지 누가 아나?”

큰누님 선생님, 조언 감사하긴 한데 제 애인은 아쉽게도 그런 정도의 인정머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아니, 어떤 때는 제가 불쌍한 척만 조금 해도 못 이기는 척 넘어와 주는데, 어떤 때는 또 얄짤 없거든요. 그 기준을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죠. 저에게만큼은 끝도 없이 신비롭고 새로운 연구 대상이랍니다. 그래서 이젠 조금, 아주 조금만 덜 신비로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그 사람 속이 훤히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그 사람이 큰마음 먹고 연락을 하면,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곧바로 답을 주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건 다 하찮은 일이 되고 그저 보고 싶었다. 만나서 서로 얼굴을 보고, 끌어안고 키스를 하면 별다른 말 없이도 오해와 불안이 사라질 것 같았다. 아니, 키스까지는 못 해도 좋으니까 그저 보고 싶었다. 고백을 했던 다음 날,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을 뛰는 사이 느꼈던, 지금 바로 그 사람을 보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던 그 기분이었다.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도록 만드는, 그는 처음부터 내게 그런 존재였다. 이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팔을 뻗어 꽉 붙잡지 않으면, 일상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들로 그에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하게 요구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쉽게 마음을 바꿔 스르륵 손 안을 빠져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서 등을 돌릴 것 같은 불안으로,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내가 그만큼 밀어붙이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진행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

□ ZOO SE YOUNG

아무리 사람들이 저녁을 먹으러 간 사이라고는 해도 사무실인데, 어깨에서 셔츠 위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우동주의 손길에 순간적으로 몸이 타올랐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약간의 긴장감에 상기되어 있었고, 그 목소리의 불안한 높낮이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숨결이 몸 어딘가의 신경을 찔러댔었다.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고 그 벌어진 틈 사이로 손을 밀어 넣는 대담함에, 놀라움보다는 아찔한 흥분이 더 컸다. 내 코를 드나드는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우동주도 느꼈을 거다. 당장 그를 책상으로 밀어붙이고 그 몸에 달려들어 셔츠를 벗겨내고 싶었다. 그러고는 세차게 뛰고 있을 넓은 가슴을 쓰다듬고, 내 가슴을 거기에 밀착시키고, 질척하게 또 거칠게 나를 다룰 줄 아는 우동주의 리듬을 깨우고 싶었다.

사무실인데, 내가 그런 충동을 느꼈었다.

그 순간에는 빈 사무실에서 짧게 나누는 키스와 스킨십쯤은 괜찮을 것 같았는데, 당시의 흥분이 사라진 뒤 돌아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1%의 위험까지도 견제해야 안심할 수 있었던 주세영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이런데도 그는, 내가 더 변하기를 바라는 건가?

장소를 잊은 도발의 대가는 그 도발의 뜨거움만큼이나 냉혹했다.

그 순간에 우동주가 보인 침착함이 믿기지 않았다. 딱 하나 풀어놓았던 내 셔츠의 단추를 채워주던 손은 떨림 하나 없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에 오직 그 손만이 나를 붙잡아주고 있었다. 함께 패닉이 됐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다. 우습게도, 그를 방패삼아 숨고 싶었다. 내 두뇌는 상황의 수습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다 끝났어’ 같은 극단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지’ 같은 무덤덤함도 아니었다. 박 대리가 어떻게 받아들였건 그건 둘째치고, 우선 나는 내가 받은 충격을 감당하기 벅찼다.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아버렸고, 우동주가 내 왼쪽 뺨을 쓰다듬었다.

“미안한데, 저것 좀 치워줘요.”

그리고 우동주는 박 대리를 데리고 4층을 떠났다.

우동주마저 사라지자 발밑이 아득하게 꺼져갔지만 추락하고 있을 틈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김밥과 어묵 국물로 엉망이 된 바닥을 치워야 했고, 월요일 아침이 오기 전에는 템플릿 개발과 레이아웃 개발에 버그 테스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나 있어야 했다.

연인과의 관계는 삐걱거리고, 회사 동료에게 남자 애인과의 키스 장면을 들켜버렸어도, 도망치거나 좌절할 권리, 심지어 술을 마시고 취할 권리조차도 없었다.

우동주와 대화하는 것, 박 대리와 대화하는 것, 당장 오늘 안으로 템플릿 개발을 끝내놓는 것. 그 세 가지 중에 1순위가 무엇인지, 사회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을 시작하면 견딜 수 없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내 나약한 정신력이 한꺼번에 감당하기에는 이미 수용 범위를 넘어선 문제들이었다. 모든 것은 적어도 다음 주 화요일이 된 후에 생각하고 싶었다.

벽을 세우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일 외의 모든 것에 대해 스위치를 내렸다. 자기방어이기 이전에 나에겐 생존의 문제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팽개치지 않기 위한, 이 이상의 극단적인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한.

사무실 바닥을 치우고 손을 씻고 책상 앞에 앉아서 우동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벽을 세우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모든 스위치를 내리고 나니 오히려 머릿속은 차분해졌다.

[일 끝날 때까지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

아니, 차분하다는 그런 평화로운 어감은 어울리지 않았다. 스스로에게서 감정을 배제시켜버린 나는 앞에 놓인 컴퓨터보다도 비인간적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말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한마디라도 우동주의 말에 대답을 했다가는 묻어둬야 할 감정들이 쏟아져 나와 발목을 잡을 것 같았다.

이 정도 일로 우리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월요일까지만, 아니 일요일에는 어떻게든 일을 끝낼 테니까 그때까지만 우동주의 이해심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난 어차피 다양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능력 따윈 타고나지 못했으니까.

답이 없어도 우동주는 꾸준히 메시지를 보내왔다. 외근을 나갈 때, 회사로 돌아올 때, 퇴근할 때, 잠자기 전. 몇 번인가 전화를 하기도 했지만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할 수는 있어도 전화를 받아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일만 했다. 컴퓨터보다도 내가 더 기계적이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졸리지도 않았다. 함께 일하는 프로그래머가 자정에 퇴근한 이후에도 한 시간 넘게 더 남아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토요일에는 일이 끝날 것 같았다. 안 좋은 상황이 일에 대한 집중력을 키워줬으니 이런 게 불행 중 다행이란 건가? 일이 끝나면 뭐부터 시작해야 하지?

회사를 나와 오피스텔로 가는 지름길은 우동주와 자주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이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 짧은 뽀뽀를 하기도 했고 야한 농담을 서로의 귓가에 속닥거리며 웃기도 했었다. 지나가다 누가 본다고 해도 별로 겁나지 않았었다. 그 사람이 우리를 쫓아와 손가락질 하면서 욕을 할 것도 아니었고, 똥 밟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갈 길 가겠지. 난 어느새 그 정도로 대범해져 있었다. 사무실에서 서로의 입안을 오가며 질척한 키스를 하고 내 셔츠의 단추를 푸는 손을 내버려 둘 만큼.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무심코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을 쳐다보니 감정이 없는 무채색의 시시해빠진 남자가 서 있었다. 우동주를 만나기 전의 내 모습이었다. 그땐 이게 평균이고 평범인 줄 알았다. 그래서 문득 외로워도 남들도 다 이렇겠지, 라는 생각으로 덮어둘 수 있었는데.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자야지.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도 잠이 올 것 같진 않지만 맥주를 두어 캔 마시면 괜찮겠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만큼 일단 일은 순조로워. 지금은 그걸로 된 거야. 일이 끝나야 다른 것도 할 수 있어.

촬영을 간다는 것도, 촬영이 끝났다는 것도, 뒤풀이를 간다는 것도 내게 보고했지만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연락은 없었다. 메시지는 보내면서도 4층으로 올라오진 않길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가 싶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코너를 꺾어 복도로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네이비 슈트에 잘 손질된 검은 드레스업 슈즈를 신은 남자가 우리 집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그의 등장에 걸음을 멈췄다.

아직 나는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다. 지금은 누군가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도피로밖에 보이지 않더라도 난 지금 필사적이다. 소중하기 때문에 더,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만나고 싶었지만 얼굴을 보고 얘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 집 앞에 앉아 있는 건 분명 내가 죽고 못 사는 내 연인이었는데, 나를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사자라도 만난 것처럼 겁이 났다. 오늘은 겨우 목요일 새벽이었고, 아직도 일은 많이 남아 있었다.

현관 옆 벽에 기대 앉아 있는 우동주를 모른 척하고 도어록의 캡을 올리고 패스워드를 눌렀다. 삐삐, 삐삐삑― 하는 기계음이 오늘따라 필요 이상으로 거슬렸다. 우동주는 내 오피스텔의 패스워드를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내가 없는 사이 그걸 누르고 들어온 적은 없었다. 내 영역을 존중해주고 싶었던 거겠지. 네가 그걸 누르고 들어와도 딱히 난 상관없는데.

너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을까. 너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내 모습들을 모두 알아줄 거라고, 그렇게 근거 없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공주님과 왕자님이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책의 해피엔딩을 꿈꾸는 어린애처럼.

“나 몰라?”

무릎을 세우고 앉아 거기에 팔을 걸치고 있던 우동주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내가 모르는 거칠고 강한 힘이었다. 상처받은 것 같은 말투가 마음을 할퀴었다. 띠리링―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현관의 잠금이 해제됐다.

“일어나.”

내 발목을 붙잡은 우동주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내 앞에 높고 두꺼운 벽이 하나 가로놓인다. 얘가 이렇게 컸었나? 아무리 체격이 다르다고 해도 겨우 7센티 차이인데.

눈앞의 우동주는 항상 내게 양보하고 져주던 세 살 연하의 상냥한 남자가 아니었다. 고압적이고 압도적인, 여차하면 나를 몰아붙이면서 폭주할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을 가진, 학습된 사회적 규율과 이성의 제제를 벗어난 상태의 남자였다.

우리 둘 중 누가 더 강한지, 굳이 주먹이 오고 갈 필요도 없다. 수컷들의 세계는 먼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 철저한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힘, 돈, 권력, 외모. 그런 조건들을 조합해 남자들은 그룹 안에서 자연스럽게 서열을 구성하고 거기에 암묵적으로 따른다. 하다못해 친구들 사이에도 그 서열은 엄연히 존재해, 리더와 리더를 따르는 추종자들로 구분된다. 원시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과정이 아주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서열의 상위자들도 최소한 직접적으로 군림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인류가 이만큼 긴 역사를 구축해온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원시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너무나 원시적이게도, 물리적인 우세함이 더 이상 합법적으로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수단이 될 수 없는 사회가 된 지금에도 강한 육체적 파워 앞에 공포를 느끼고 굴복하는 상황도 여전히 비일비재했다. 우스운 얘기고 비참한 얘기지만, 실제 사회의 엄연한 한 부분이기도 했다.

거창하게 떠들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우동주에게서 느껴지는 절제를 잃은 거친 기운이 나에게 위협을 느끼게 하고 있었단 얘기다. 우동주가 나와 싸움을 하려는 건 아니었겠지만, 내가 그보다 연상이고 직장에서 선배라는 사회적 위치와 거리를 그가 무시하려 든다면, 그런 상황 아래에서는 아마도 내가 그를 상대로 별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지는 못할 거라는. 그것을 피부로 느꼈다. 물론 그건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들어갈래.”

“피곤하다. 다음에 얘기해.”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대화를 할 기력도 없었지만 지금의 우동주 역시 대화를 하기엔 많이 위험해 보였다. 서둘러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내가 채 문을 다 열기도 전에 우동주가 더 이상 열지 못하도록 문을 꽉 붙잡았다.

“들여보내 줘.”

말의 형식은 부탁이었지만 뉘앙스는 명령이었다.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집에서 나온 실내복 차림의 남자가 우리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이미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일단 우동주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구두를 벗지 않고 현관에 우동주를 붙잡아뒀다.

“일이 먼저냐 내가 먼저냐, 나도 그런 한심한 질문 하기 싫다.”

“…….”

여전히 나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꺾어 우동주의 왼손쯤을 내려다봤다. 주황빛 센서 불빛을 받은 우동주의 그림자가 짙고, 어둡고, 거대했다.

“근데 당신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을 하게 될 것 같아서 겁나.”

누가 나에게 일이 먼저냐 우동주가 먼저냐고 물어보면, 이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우동주라고 대답할 것 같은, 난 그런 내가 겁났다. 그런데 세상이 와서 부딪쳐도 안 깨질 것 같은 너는, 뭐가 그렇게 겁나냐?

“일 끝나면, 그때 얘기하자. 지금 정말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

“얘기 못 해도 좋아. 그럼, 섹스해. 섹스하자.”

오른팔로 내 허리를 감아 끌어당기면서 왼손을 내 머리카락 사이로 얽어 넣었다. 시작부터 거칠고 맹렬한 키스였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신사적이고, 다정한 놈이었다. 마지막엔 늘 자신을 접고 나를 우선시해주는 놈이었고. 하지만 내 허리를 조이는 팔에는 자비가 없고, 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손길은 자제가 없고, 두껍고 거친 혀는 숨통을 틀어막을 듯 난폭하게 입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고개를 비틀어 우동주의 혀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나를 가둔 팔과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력에서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왜? 하기 싫어?”

이때껏 우동주에게서 들어본 중 가장 불친절한 목소리였다.

“말이라고 해, 너 지금?”

어제 사무실에서는 그토록 맞닿고 싶어 했던 가슴을 두 손으로 힘껏 밀어냈다. 아무리 거부해도 봐주지 않을 것 같았던 우동주는 이번엔 쉽게 밀려났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넌 분명히 후회할 거야. 지금은 이성을 잃고 폭주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따뜻한 너는, 두고두고 오늘 일을 괴로워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멈추자. 그만하자, 동주야.

이번엔 우동주의 고개가 힘없이 꺾어졌다. 하지만 말아 쥔 두 손은 살을 뚫고 뼈가 튀어나올 것처럼 단단히 뭉쳐져 있었다.

“나는 이렇게 보고 싶고, 속이 타고, 죽을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냉정해?”

지난 일요일부터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느낌에 화가 치솟았다. 화의 대상이 꼭 우동주인 건 아닌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우동주밖에 없으니 이미 뽑혀진 화살은 우동주에게 겨누어졌다. 안 좋은 상황이 너무 여러 가지로 겹쳐져 있었다. 내 신경은 극도로 쇠약해져 작은 도발에도 끊어져버릴 지경이었다.

“네가 지나치게 감정적인 게 아니라 내가 냉정한 거냐? 사무실에서 셔츠 단추까지 풀어가면서 키스하는 게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야?”

우동주가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어, 네 탓이 아니라는 거. 나도 분명히 거기에 응했고 회사라는 걸 잊을 정도로 열렬하게 너를 원했었어.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이건 분풀이밖에 안 된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그만하자고 했잖아, 오늘은.

“하―.”

우동주가 타이의 매듭을 풀면서 고개를 꺾었다. 아주 같잖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한숨이었다. 우리의 다툼은 이미 원래의 목적을 잃고 그저 서로 화를 발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난 어떻게든 이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던 거고, 우동주는 피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고. 그 견해 차이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인데,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다.

어차피 연애가 생산성을 따져가며 그 계산에만 따를 수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당신, 날 연인으로 생각하기는 해? 얘기를 하자고 해도 싫다, 키스도 싫다, 섹스도 싫다. 난 당신이 여유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라는 거야? 매번 프로젝트 끝낼 때마다 이러자고?”

우동주에게도 분명히 격렬한 감정은 존재했다. 그것을 억누르고 자제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뿐, 애초에 격정 자체가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걸 잊고 있었다. 생각 못 했다. 분노만이 격정은 아니었다. 우리 관계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반 이상은 우동주의 격정의 힘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분노로 인한 격정도 존재한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내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처럼 날뛰었다.

“일주일도 못 버텨? 아니, 이제 겨우 3일이야. 일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사람을 들들 볶아?”

“주세영!”

우리는 현관문 안에 서 있었지만 아마 9층 사람들 모두 그 소리를 들었을 거다. 나를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소리쳐놓고 우동주의 눈은 오히려 내게 저미는 듯한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자기 안에 담아둘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거세게 폭발시킨 뒤에 이어진 침묵은 불안한 파장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물린 부분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보는 우동주의 시선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너 혼자 고고하게 잘 살아봐. 그 잘난 자기 세계 유지하면서.”

오피스텔을 뒤흔드는 것 같았던 고함 뒤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침착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도어록을 연 우동주가 현관을 나가버린다. 구두 소리가 멀어진다. 나는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박 대리가 나를 쓰레기 취급한다고 해도, 회사에서 잘리고 업계에 소문이 번져 일하기가 껄끄러워진다고 해도, 우동주를 잃는 것에 비하면 그건 전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와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아니다. 일은 나의 부분이었지만, 나는 우동주를 내 삶으로 받아들일 각오로 그를 선택했던 거다.

내가 누군가를 이 정도로 사랑할 수 있을 줄 몰랐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연인과 이런 사랑을 하면서 사는 걸까? 이제까지의 내 삶과 방식을 모두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이런 깊고 무거운 감정을, 다들 어떻게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거지?

내 현관 앞에 있었던 우동주처럼 구두도 벗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웠다.

사실 왕자님과 공주님은 많이 다퉜을지도 모른다. 공주님이 낭비벽이 있어 왕자님이 골머리를 썩었을 수도 있고, 왕자님이 바람기가 심해 공주님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언성을 높이면서 싸울지언정 서로를 포기하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마침내 동화책의 마지막을 장식할 진정한 해피엔딩을 만들어 갔을 거다. 애들한테 그런 얘기는 너무 어려우니까 과정을 생략한 거겠지.

아무 노력도 없이 서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커플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건 있어선 안 된다. 지금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잡히는 대로 대강 옷을 입고 출근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스케줄에 치여도, 그러면 그럴수록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해 더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나였기 때문에,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매고 머리카락을 정돈하지 않은 내 모습에 사무실 사람들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내가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놈이 갑자기 변해서 너무 놀랐는지, 다들 힐끔힐끔 내 기색을 살피면서도 무슨 일이 있냐고 선뜻 묻는 사람 하나 없었다.

목요일 오후에는 누나에게서 고맙다는 연락이 왔다. 네가 보낸 애가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고 성격까지 좋더라며 에디터가 칭찬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원래 그런 놈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젯밤의 우동주도 우동주의 한 부분이지만, 절대 우동주의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다. 극히 일부일 뿐.

회사 일 때문에 우동주는 핸드폰의 전원을 켜놓았지만 막상 전화가 연결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외근을 나가야 한다고 하길래 잘 다녀오라고 하고는 끊었다. 어제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딱딱하고 싸늘한 목소리였다.

외근을 다녀온 뒤에도 커피 배달은 없었다. 나는 일에만 매달렸다. 새벽 네다섯 시까지 회사에 있다가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두세 시간 잔 뒤에 다시 출근을 했다. 일도 일이지만 집에 있기가 싫었다. 공간의 힘은 생각보다 더 커서, 사적인 공간에 있으면 사적인 감정이 자꾸 머릿속에 기어들어 왔다.

우동주와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일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거나 열심히 하라는 상투적인 내용뿐이었다. 그렇게나마 연락이 이어지는 것으로 안심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뿌리치려 애썼다. 우리는 절대 이 정도 다툼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끝없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한참 일에 집중하다가 문득문득 손이 멈추는 때가 있었다. 제법 잘 돼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처음엔 분명 가벼운 사랑싸움 같은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어떻게 꼬이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누군가 작정하고 계획한 나쁜 계략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서로의 진짜 영역 안으로는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 적정선의 관계만 가져왔던 나에게는 너무 복잡한 감정이고, 너무 무거운 상황이었다. 이겨내는 것은 고사하고,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회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왜 이 정도의 압박에도 제대로 처신하지 못할 만큼 자신을 나약하게 길러왔는지.

감정의 훼손과 소모가 싫어 타인과의 깊은 관계를 피해왔지만, 오히려 그 선택들이 정작 간절한 상황에서조차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쓸모없는 자신을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탓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모든 대상을 전부 탓하고 난 뒤에 남은 것은 스스로에 대한 냉정한 시선뿐이었다.

그런 상태로 목요일과 금요일이 지나갔고, 계획보다 하루 빨리 토요일에 일이 끝났다. 그렇게 미친 듯이 일만 해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주일 사이 몸무게가 3kg이나 줄었다.

[지금 버그 테스트 중이야. 금방 다 될 것 같으니까 미안한데 회사로 좀 와줘라.]

수요일 이후 박 대리와도 사흘 만의 대화였다. 그러고 보니 우동주는 그 이후에 박 대리와 어떻게 지냈을까. 나야 사무실도 다르고 부서도 다르니 딱히 부딪힐 일이 없지만 같은 부서에다 하루 종일 영업도 같이 다녀야 해서 둘 다 많이 껄끄러웠을 텐데. 우동주는 그런 걸로 불평한 적도 없었다.

박 대리는 집 앞 편의점을 나갈 때나 입을 법한 편한 바지에 운동화를 꺾어 신고 면도도 하지 않은 꺼칠한 얼굴로 나타났다. 아무리 정식 출근도 아니고 주말이라지만 그래도 회사에 나오는 건데 좀 깔끔하게라도 하고 올 것이지. 연애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외모에 신경을 안 쓴다. 하긴 연애하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못 굴러가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

“벌써 다 했냐? 일요일 밤이나 돼야 끝날 줄 알았더니. 괴물 같은 놈.”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툭 던지듯 말하는 박 대리의 어조에서 조금은 어색함이 느껴졌다.

이제 내가 맡은 일은 일단락된 셈이었다. 월요일에 영업부가 거래처를 방문해 검수를 받으면 진짜 끝이었다. 그렇게도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던 일이고, 이 일이 끝난 뒤에 해결하자고 미뤄놓은 문제들이 산더미였는데, 후련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이 더 있었으면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우선순위로 해결해야만 했던 일이 끝났으니 이젠 더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술 한잔할래?”

프로그램을 쭉 검토하고 난 박 대리가 의자에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켜면서 툭 어깨를 쳤다.

“그래주면 고맙지.”

주말이라 회사 근처에는 문 연 곳이 별로 없어서 어디를 갈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가까운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우동주와도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술김에 센치하다는 고백을 한 것도 이 집이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이 집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 사랑을 잘 모르겠다고 했던 놈이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진지하게 연애 상담을 해왔을 때는 괜히 속이 뒤틀렸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질투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고생했다. 그쪽 담당자가 깐깐해서 스케줄 맞추기 힘들었을 텐데.”

곧 죽어도 소주파인 박 대리는 호프집에서도 치킨 안주에 소주를 주문했다. 박 대리가 넌 맥주 마셔도 된다고 했지만 나도 오늘은 소주가 끌렸다.

“사람 상대하는 건 넌데, 뭐.”

“일요일까지 철야해야 겨우 다 끝낼 줄 알았더니 역시 주세영이네. 수고했어, 마시자.”

두어 번 잔을 주고받자 한 병이 금방 동났다. 박 대리가 먼저 자리를 만들어줬으니 적어도 이야기는 내 쪽에서 풀어나가야 도리일 것 같았다. 입이 안 떨어졌지만, 일은 같이 벌여놓고 수습은 우동주에게만 밀어놓을 수 없었다. 그건 우동주뿐 아니라 박 대리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날… 놀랐지?”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박 대리는 피식 웃더니 장난스럽게 면박을 주며 내 잔을 채웠다.

“놀라지 그럼 안 놀라냐. 처음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얼굴에 뭐가 묻어서 좀 봐주는 거겠지 했는데… 내 평생 그렇게 놀라긴 처음이었다, 인마.”

박 대리라면 적극적으로 응원해주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일단 얘기를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침착한 반응이었다. 쑥스러움과 어색함에 내가 그냥 웃고만 있자 박 대리는 한 잔을 더 마신 뒤 입가를 훔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동주한테 얘기 들었어. 목요일 날 술 한잔하자고 하더라고. 나도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선뜻 용기가 안 생겼는데 그놈이 먼저 그러자고 하더라.”

그러지 않았을까 조금 예상은 했다. 워낙 책임감이 강한 놈이고, 걱정이 많은 내 성격도 잘 알고 있으니 자기가 먼저 어느 정도 해결해두려고 했겠지. 목요일이면 새벽에 우리 집에서 그렇게 다투고 난 다음인데, 그래도 우동주는 큰일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 놈이었다. 예전에 내가 이 자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잘생기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학벌도 좋고 목소리까지 좋은 놈. 나와는 달리 한꺼번에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타고난 멀티플레이어. 냉정하게 보자면 내가 조금 기울지.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 그 전에도 술 마시면서 연애가 잘 안 풀린다고 하더라고. 같이 살고 싶은데 그쪽에서는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아서 초조하다고 하더니… 그게 너일 줄이야.”

“둘이 그런 얘기도 했었냐?”

그럴 마음이 없긴 뭐가 없어. 같이 살았다간 네 다정함에 완전히 길들여져서 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가 될 것 같아서 미루자고 한 거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박 대리 앞에서 날 나쁜 놈으로 만들다니.

“어디 모자란 구석 없이 두루두루 잘난 놈이 한 여자한테 저렇게 목을 매기도 하는구나 싶어서 좀 감동했었지. 그게 너인 줄 알았으면 감동 안 했을 텐데.”

박 대리는 완전히 속았다는 듯이 곁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고마움과 안도감에 뭐라 할 말이 없어 나는 그냥 계속 피식 웃기만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누군가에게 들킨 것만으로 우동주와 헤어질 생각을 했을 거다. 들킨 대상이 박 대리였다고 해도 얘기를 나눠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다. 그 이전에 사내놈과 연애할 생각도 못 했겠지만. 나는 이미 너로 인해 많은 부분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싫지 않아.

“근데 그 자식, 내가 그 여자 어떤 타입이냐고 했더니 뭐라고 했는 줄 아냐?”

“뭐라는데?”

조금 궁금했다. 우리 관계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연인으로서의 나를 우동주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타인에게서 들어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까칠하다고 했으려나? 아니면 이기적인 타입? 서로 어색했던 때니까 좋은 말은 안 나갔을 것 같은데.

“섹시하고 청순한 타입이라잖아. 나 원 참. 콩깍지도 어디서 그런 콩깍지가.”

박 대리는 말도 안 된다면서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대체 서른한 살 먹은 시커먼 사내놈의 어디가 섹시하고 청순하다는 건지 자기는 절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뭐, 나도 박 대리에게까지 섹시하고 청순해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잘된 일이었다.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그런 말은 안 할란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맙고 힘이 됐지만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우동주와 나의 관계는 세상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제발 받아들여 달라며 구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으므로. 누군가가 이해해주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 두 명이 그런 관계임을 알았을 때, 그것도 그런 좋지 못한 방식으로 목격하게 됐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서, 우리 관계의 떳떳함과 별개로 박 대리의 이해가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다.

“쳇, 누가 애인 아니랄까 봐 두 놈이 똑같은 얘길 하네. 알았다, 알았어, 누가 고맙다는 말 듣자냐. 내 앞에서 티나 내지 마. 아직은… 거기까지는 수용 못 하겠으니까.”

나 역시 지금은 그 정도의 이해만으로도 충분했다. 많이 고마웠다. 말없이 웃으며 박 대리의 빈 잔을 채워줬다.

어느 정도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건 꼭 박 대리 일이 해결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됐기 때문만도 아니었고.

인간은 이런저런 요소들이 모두 복잡하게 뒤섞인 가운데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요소들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따로따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게임에서 미션을 클리어하듯이 하나하나를 해결해나간다고 해서 자신이 안고 있는 종합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하지만 하나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몸부림치다 보면 종합적인 해결에는 닿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배우고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는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또 같은 방식으로밖에 대처하지 못할 거라는, 그런 절망은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아직 성장의 기회는 남아 있는 거겠지.

“아 그리고, 웬만하면 회사에선 좀 참아라. 그날 그게 나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어휴, 내가 다 아찔하다, 이놈아. 다 큰 것들이 어째 그렇게 자제심이 없어? 우동주야 워낙 혈기왕성하니 그렇다 쳐도 주세영 네가 그런 놈인 줄은 진짜 몰랐다.”

그날의 목격자가 다른 사람이었을 경우를 상상하며 박 대리는 공포로 어깨를 떨었다. 동성의 키스 장면을 목격한 자신의 충격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목격당했을 경우 발생했을지 모르는 갖가지 상황들을 더 걱정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오히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박 대리가 알던 대로 나는 그런 놈이 아니었던 게 맞다. 일어날 수도 있는, 거꾸로 말하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온갖 위험을 계산해 그 모두에 철저하게 대비해둬야만 마음이 놓이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모든 위험에 대한 철저한 대비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위험에 대한 대비만을 우선하며 산다면, 행복을 설계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해질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너도 연애해봐라. 그게 그렇게 생각처럼 되나.”

“어우, 어우, 이 닭털들! 두고 봐라, 내가 올해 안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장가가고 만다!”

박 대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발을 구르면서 제 팔로 제 몸을 껴안아가며 요란스럽게 우리를 질투(?)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생각대로만 흘러갈 수 없는 게 연애라는 것을 나는 피부로 배우고 있었다. 남자끼리 연애를 하든 다 늙어서 연애를 하든 소년소녀의 서툰 연애든, 사랑은 비일상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드라마였다. 건조하고 쿨하게만 유지될 수 없는.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깨부수고 그 안에 타인을 들이는 과정이기에, 연애를 통해 인간이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그만 일어나야겠다.”

“왜? 이제 시작인데.”

세 병째 소주의 두 번째 잔을 채우던 박 대리는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나를 붙잡았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올해 안으로 장가가겠냐? 어렵게 마음 정해준 박 대리에게 실례인 것은 알지만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나도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이런 대책 없이 무모하고 저돌적인 면이 나에게도 있었다.

헬스클럽에서 뛰어와 내 등을 끌어안던 우동주도, 목요일 새벽에 내 집 현관문 앞에 앉아 있던 우동주도, 지금이라면 이해가 됐다. 왜 이렇게 막무가내냐며 탓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화해하러 가려고. 이해 좀 해줘라. 나중에 빚 갚을게.”

“에잇, 연애하는 놈들 다 벼락 맞아라.”

마지막 잔을 같이 나누고 우리는 호프집을 나왔다. 오늘 자기를 버리고 가는 죗값은 너희 두 놈 모두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며 박 대리는 내 목을 졸랐다. 박 대리의 그런 제스처마저도 고마웠다. 우동주와 나의 떳떳함과 별개로, 호모하고는 닿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세상이니까.

그런 세상이니까, 우동주와 나는 둘이서 더 단단한 사랑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위축돼서 우울해하고 자기연민에 빠질 필요도 없지만 보통의 커플들보다 조금 더 진한 결속력을 다질 필요는 있었다. 우리에게 이 사랑은 삶 전체를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내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후회 없이 모든 것을 내던질 필요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한남동으로 가는 동안 마치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진짜 고백은 우동주가 먼저였지만, 관계의 시작을 여는 실토만이 고백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약속도 없이, 단지 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내가 먼저 우동주에게 달려가는 건 처음이었다. 왜 그랬을까. 우동주가 날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나도 그놈을 원하는데.

한남대교 위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우동주의 집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항상 네가 먼저 내 곁에 있어 줬기 때문이라는 걸.

□ WOO DONG ZOO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을까. 요즘 나는 틈만 나면 그 생각을 하지만 머릿속에 질문만 띄워놓고 좀처럼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생긴 일인데 혼자서 해결을 하려고 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대화. 이래서 대화가 중요해….

같이 살자는 제안(거의 조르기에 가깝지만)을 미루는 것도, 일을 시작하면 나를 방치해두는 것도, 메시지가 무뚝뚝한 것도, 다 그 사람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저 ‘차이’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코스가 문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도 마음으로는 그 ‘차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에서 내 키스에 응해주는 걸로 그 사람의 사랑을 시험하려 들고, 연락도 없이 찾아간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마음을 의심했던 거다. 그런 식으로 쫓겨나도 싸다. 그날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고백했던 다음 날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게 아니었다.

“아… 우동주 진짜 나가 뒤져라!”

소파에 누워 그날 새벽 일을 더듬어보다 나는 또 공중을 발로 차며 자책했다.

내 팔 안에서 딱딱하고 싸늘하게 굳었던 그 사람의 몸. 그건 긴장도 흥분도 아닌 분명한 거부였다. 그러고도 나는 내가 상처받은 것처럼 고함을 지르고 날카로운 말들을 던졌다. 아 진짜… 내가 왜 그랬지? 너무 좋아해서 잠깐 돌았었다고밖에. 너무 좋으면 더 조심조심 소중하게 대해야지 왜 삐딱선을 타냐고 하면…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 부분이 참 미지수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소리로 화를 내본 건 아마 태어나 처음이지 싶다. 친구나 가족에게는 물론이고, 사귀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큰 소리를 내본 적이 없다. 오히려 화가 나면 냉정하게 가라앉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세영 덕분에 나의 새로운 면을 또 하나 알게 됐다. 새로 알게 되는 면이 장점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내일쯤엔 일이 끝나겠지. 일 끝나면 박 대리님한테 연락 갈 거고, 그럼 찾아가서 싹싹 빌어야겠다. 무릎 꿇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아니지, 무조건이 아니라 내가 뭘 잘못했는지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조목조목 목록 작성해서 사죄해야지. 그럼 정성을 봐서라도 한 번은 봐주지 않겠어? 며칠 째 얼굴조차 제대로 못 보고 있는데, 그건 이미 나한테 중벌이라고. 알아, 주세영?

이번 일주일을 통틀어, 사무실에서 했던 키스가 우리 스킨십의 전부였다. 사귀고 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몸만 그립단 얘기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따뜻하게 이어져 서로를 보듬는 그 충만한 행복감이 그리웠다. 아무 짓도 못 해도 좋으니까, 날 따뜻하게 대해주는 주세영과 나란히 누워서 잠들 수 있다면. 신이시여, 한 번 정도는 좀 부탁을 들어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왜 이렇게 저를 강하게 키우시는 겁니까, 예?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더니 정말로 열렸다.

우리 집 현관문이.

아니, 정확히는 열린 게 아니라 내가 열어준 거지만.

누군가 우리 집 벨을 눌렀고, 왠지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어보니 무슨 서프라이즈 이벤트처럼 주세영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잘못 본 줄 알았다. 한 번도 연락 없이 찾아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난 연락도 없이 찾아가 주세영 집 패스워드를 누르고 들어가 본 적이 없지만, 주세영은 늘 우리 집을 드나들 때 패스워드를 누르고 들어왔었기 때문에. 주세영이 아닐까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을 조금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진짜 주세영이었다.

빌라 앞까지 택시 타고 왔을 거면서, 마치 도곡동에서 한남동까지 달려서 온 것처럼 주세영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일은?”

3일 만에 제대로 보는 얼굴이었다. 괜히 또 4층에 올라갔다가 벌집 들쑤셔 놓게 될까 봐 아예 발길도 끊어버렸었으니까. ‘그렇게 소원이면 너 일 끝날 때까지 아예 신경 꺼주마!’ 하는 애 같은 심리도 조금은 있었고.

“끝내고 오는 길이야.”

“벌써?”

그 사람의 눈 안에 뭔가가 가득 차 있었다. 눈물은 아니었지만 눈물과도 맞먹는 어떤 뜨거움이었다. 그걸 마주보는 것만으로 괜히 나까지 가슴이 뜨끈해져 왔다.

“서서 뭐 해? 들어…!”

어깨를 들썩거리며 서 있던 그 사람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목을 끌어안은 팔에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동주야….”

상상도 못 한 전개에 당황스러웠지만, 그건 잠깐뿐이었다. 손잡이를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 사람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무릎 꿇고 죄목을 읊은 후에도 그 사람에게 구둣발로 허벅지를 짓이겨질 각오 정도는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복도에도 CCTV 있는 거 까먹었어?”

“상관없어. 미안해… 미안해….”

CCTV도 상관없다니, 우리 세영이 반성 많이 했구나? 나도 반성 많이 했는데. 근데 당신이 이렇게 미안해하는 거 처음이니까 내가 얼마나 많이 반성했는지는 그냥 말해주지 말아야지.

내 뺨에 맞닿은 그 사람의 뜨거운 뺨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와줬으니까… 와준 걸로 됐어. 일단 들어가자, 응?”

그제야 그 사람은 내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 구두를 벗었다. 하지만 내가 슬리퍼를 벗고 복도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덤벼들었다. 신이시여, 이게 무슨 일인가요? 저 오늘 생일인가요?

나를 복도 벽으로 밀어붙인 그 사람은 적극적으로 입을 맞춰왔다.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아랫도리부터 가슴까지 단단히 밀착시키고 내 몸에 자기 몸을 마구 비볐다. 거의 일주일 만의 제대로 된 접촉에 코피가 날 것 같았다.

코피가 날 땐 나더라도 주세영이 이렇게 유혹해오는데 내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팬츠 안의 셔츠를 끄집어내고 엉덩이 안으로 손부터 밀어 넣었다. 사이즈가 잘 맞는 맞춤 슈트라 내 손을 밀어 넣기엔 좀 빡빡했지만 억지로 마구 밀어 넣었다. 지금 주세영은 내가 아무리 값비싼 슈트를 망가뜨린다 해도 쿨하게 넘어갈 것 같았다.

말랑하면서도 탄력이 느껴지는 살집이 손에 잡히자, 내 몸은 곧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골 사이에 중지를 끼우고 위아래로 비비기부터 했다. 주세영이 허리를 비틀면서, 맞닿은 입술 사이로 다급한 신음을 흘렸다. 내 페니스는 이미 경이로운 속도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하아… 하… 같이 살자, 우리.”

집요하게 키스를 퍼붓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길래 아쉬워서 막 쫓아가려는데, 그 입술이 믿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엉덩이 골 사이를 미끄러지던 손가락마저도 멈췄다.

“같이 살자. 같이 살자, 동주야. 나 당장 들어올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온몸을 덮쳤던 흥분마저 잠시 잊었을 정도로 정신이 얼얼한데, 주세영은 내 뇌가 말의 뜻을 더듬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목에 감았던 팔로 뒤통수를 끌어안으며 내 턱과 뺨에 마구 입을 맞추고 어제 출근할 때 이후로 면도를 하지 않은 바람에 벌써 꺼칠꺼칠해진 수염 위를 혀로 핥고 이로 잘근거렸다.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으면서 잠깐 그 사람의 어깨를 떼어내 나를 보게 만들었다.

“잠깐, 잠깐, 스톱. 당신 이거 술김에 하는 말이면 나 이번엔 진짜 화내?”

좀 전까지만 해도 믿지도 않는 신까지 찾아가면서 주세영을 갈구해놓고 괜히 센 척을 하고 있었다. 근데 이건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했다. 아무리 내가 같이 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렇다고 주세영이 충동적으로 혹은 죄책감으로 이 집에 들어오는 건 원치 않았다.

“내가 술김에 그런 말 할 성격이냐?”

한창 분위기 타던 차에 흐름을 끊어서 화났는지, 내 목에 매달리면서 미안하다고 속삭이던 귀여운 주세영은 금방 어디로 가버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톡 쏘는 주세영이 나타났다. 근데 이런 주세영도 섹시하니까 별로 상관은 없다.

“아니지.”

“그럼 빨리 키스해.”

나 아무래도 오늘을 생일로 해야 할 것 같다. 들어와서 살기로 결정 마쳤으니까 닥치고 키스나 하라는(그렇게는 말 안 했지만, 그거나 이거나) 주세영의 명령을 기꺼이 받들었다.

파도를 타듯 혀를 꺾고, 아랫입술을 뒤집어 주세영의 입술을 핥아 올리고, 턱을 비틀어 그의 입 안으로 타액을 흘려 넣었다. 젖은 살덩이가 서로 비비적거리는 소리에 우리 주변의 공기마저 축축하고 눅눅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주세영은 혀끝으로 내 입천장을 긁으면서 스스로 벨트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진짜… 들어올 거야? 미안해서 하는 말도 아니고?”

주세영을 도와 팬츠를 아래로 밀어내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온다면 오는 거지, 왜 이렇게 못 믿어?”

발목으로 떨어져 내린 팬츠를 한쪽씩 털어 벗어내면서 주세영은 이번엔 내 반바지 위로 페니스를 꽉 쥐었다. 아, 야야야, 지금 그렇게 세게 쥐면… 우리, 좋은 거 못 할 수도 있다고.

“나중에 딴말하지 마. 말해도 안 들어, 이번엔.”

주세영의 간절기용 얇은 재킷을 뒤로 젖히면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가 재킷을 벗는 동안 넥타이의 매듭을 끌러내고 셔츠의 버튼을 풀었다. 평소보다 크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가슴이 내 손길과 입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세영이 못 참겠다는 듯 내 뒤통수를 붙잡아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반대편 벽으로 주세영을 밀어붙이고 풀어헤쳐진 셔츠의 앞섶을 열어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훑으며 보기 좋게 살짝 부푼 근육 위를 이 사이에 물고 조금 아플 정도로 힘을 주었다.

“으윽!”

오늘은 감도도 좋다. 가슴을 양쪽으로 훑어낸 손바닥을 등으로 옮겨 척추를 더듬었다. 내 머리통을 붙든 주세영이 뒷머리를 마구 헤집어놓았다. 유두를 빨아달라는 신호지만 모르는 척 무시했다.

“당신… 살 빠졌어?”

목에 매달린 무게와 끌어안은 부피감이 전보다 조금 얄팍하다 싶긴 했는데 등을 만져보니 확실히 야위었다. 원래도 살이 별로 없는 날씬한 체질에 근육이 예쁘게 붙어 군살이 없는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도 더 빠질 살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구 때문인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러 와서도 금세 기고만장해져 내 탓을 하는 이 오만함. 정말 사랑한다. 흥분으로 반쯤 흘러내린 눈꺼풀 안에서 제 가슴에 파묻힌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등 뒤의 벽에 몸을 비비는 이 은혜로운 생물체 같으니라고.

“당연히 내 잘못이지. 주말 동안 가둬놓고 살 좀 찌워야겠다.”

청결하고 단정하고, 심지어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흰색 브리프의 밴드 안으로 손을 넣어 그 안에 든 물컹하고 뜨뜻한 살덩이를 주무르는 이 쾌감.

“으으, 음.”

부드러운 촉감의 양말을 신은 발로 주세영이 내 발등 위에서 꼼지락댄다. 유두 바로 옆을 스치면서 아래에서 위로 가슴을 핥아 올렸다. 뒷머리를 벽에 문지르면서 주세영이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왼팔로 허리를 좀 더 당겨 안았다. 브리프 안에서 가볍게 주먹을 쥐고 팔을 아래로 뻗으면 브리프가 허벅지 중간까지 밀려 내려가 반쯤 발기한 페니스가 훤히 드러났다. 고환 뒤부터 시작해 페니스 끝까지 손바닥으로 가볍게 훑었다. 손을 떼자, 아랫배에 찰싹 붙었던 페니스가 튕기면서 위아래로 가볍게 진동했다. 최근 나를 가장 흥분하게 하는 광경 중 하나였다.

모든 성적 흥분은 흔들림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무리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도 아무 움직임도 없는 것을 향해 흥분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흔들림,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상의 균열이야말로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을 건드리는 자극제였다.

“흐으읍.”

숨을 뱉던 주세영이 깨물듯 입술을 다물었다. 가슴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를 세워 살갗을 물었다 놨다 하면서도 절대 유두를 건드리진 않았다. 주세영은 다급하게 내 등을 긁기 시작했다. 내 발등 위에 놓여 있던 발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종아리를 문지르면서 뭔가를 자꾸 조른다.

“거기… 거기 빨아줘.”

숨소리 반 목소리 반으로 한껏 달뜬 숨결이 채 다듬어지지 못하고 새되게 갈라져 나온다.

“여기?”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딱딱하게 뭉친 유두를 눌러 위로 꺾었다.

“어, 거기, 세게.”

가슴 근육에 얼굴을 짓이기면서 입술을 좁게 오므려 콩알만 한 꼭지를 흡, 빨아들였다.

“하아… 하, 아―.”

어깨를 움츠리면서 내 머리를 꽉 끌어안는다. 이번엔 좀 더 입술을 넓게 벌려 내가 숨이 막힐 때까지 단번에 강하게 들이마셨다. 유두뿐 아니라 유륜까지 삼킬 기세로 강하게 흡입했다. 아랫도리에는 별다른 자극을 주지 않고 가볍게 위아래로 툭툭 쳐주고 있을 뿐인데 주세영의 페니스는 빠르게 단단해지고 있었다.

“아, 아파….”

아프겠지. 내 뺨이 푹 파일 정도로 빨아댔는데. 근데 네가 세게 해달라며.

아프다면서도 끌어안은 내 머리를 밀어내진 않는다. 말하자면 주세영은 지금,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중이었다.

우리 주세영의 아픈 곳이 빨리 나으라고 유두에 타액을 잔뜩 발라준 다음, 가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면서 쇄골로, 어깨로, 목덜미로 타고 올라갔다. 중지를 세워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회음부 주변을 더듬었더니 단박에 몸을 뻣뻣하게 굳히면서 반응이 달라진다.

“흐으. 음.”

신음하는 턱선 바로 아래를 혀로 훑으면서 손가락을 구부려 한 지점을 살살 긁으면, 엉덩이 근육이 움찔거리면서 손가락을 물었다 놨다 못살게 군다. 나도 이젠 더 느긋한 척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여기서… 해….”

악마의 유혹이다. 타이밍도 어쩜 이러냐. 꼭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안 돼… 젤이, 방에….”

주세영이 중지와 약지 사이에 귀를 걸고 뺨과 목을 문지르면서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뜨거운 혀로 내 귀를 할짝인다.

“그냥, 그냥 해….”

와르르 무너지려는 이성을 단단하게 발기한 페니스로라도 받치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은 한 번뿐이라며 충동에 못 이겨 생으로 하더라도, 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될 수도 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울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결심한 바가 있었다. 절대 주세영이 항문외과 침대에 눕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제 연인의 몸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남자라니, 그런 놈은 섹스를 할 자격도 없다.

“싫…어. 당신 몸은 소중하니까.”

야금야금 귀를 적시면서 엉덩이를 조이는 주세영의 몸을 힘겹게 떼어냈다. 악마의 유혹을 이겨냈으니 이 정도면 인간 승리라 할 만했다. 팬츠 없이 양말만 신고 브리프는 허벅지 중간에 어정쩡하게 걸치고 셔츠 앞섶은 활짝 풀어헤친 채 탱탱하게 발기한 주세영. 악마도 이런 악마가 없다. 이런 악마에게라면 몇 번이고 영혼을 팔 수 있을 것 같다.

“방으로 가자. 오늘 안 재워. 아니, 당신이 잠들어도 난 안 잘 거니까 각오해.”

브리프를 한 손으로 추켜올려 발기한 페니스만 가릴 정도로 대강 입혀준 뒤 손을 잡아끌었다. 복도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가방이며 팬츠며 재킷, 타이…. 그것까지 챙길 이성은 없었다.

“아! 왜?”

고분고분 잘 따라오나 싶었던 주세영이 거실을 지나칠 때쯤 갑자기 신호도 없이 내 팔을 콱 깨물었다. 설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시작 안 했다고 열 받은 건가 싶어서 뒤를 돌아봤더니 예상 못 한 소리를 한다.

“다른 애들한테도 이렇게 해줬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열 받아서 그런다, 왜?”

자기는 나 만나기 전에 정절남이었던 것처럼 말하네. 하루 날 잡아서 서로 과거 좀 파헤쳐볼까, 연하 킬러 주세영 대리님?

“안심해. 이런 초절정 인내심을 발휘한 상대는 당신밖에 없어.”

울컥 치솟으려는 질투심을 슬쩍 숨긴 채 침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주세영을 끌었다. 뒤따라 들어온 주세영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면서 반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 인내심, 언젠가 한 번은 확 날려버렸으면 좋겠는데.”

“진심이야?”

팔을 뒤로 뻗어 조금은 부피가 줄어들어 안쓰러운 엉덩이를 주무르다가 한순간 무릎을 굽혔다 튕겨 일어서면서 주세영을 둘러업었다.

“한 번쯤은.”

날렵한 근육이 붙은 종아리가 공중에서 흔들거린다. 변태인 건지, 난 주세영의 맨다리에 신겨진 양말이 그렇게 흥분된다. 특히나 지금처럼 한쪽이 느슨하게 내려간 상태라면 더더욱.

“알았어, 접수 완료. 언제 날려버릴지 고민 좀 해볼게.”

등에 매달린 오늘의 제물을 침대 위에 내던졌다. 내가 옷을 벗고 협탁에서 콘돔과 젤을 꺼내는 동안 주세영은 셔츠와 양말을 벗고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손가락에 콘돔을 끼우면서 무릎으로 침대 위에 기어 올라가 이미 자리를 잡고 누운 주세영에게로 다가간다. 조도를 낮춰놓은 조명의 불빛이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 주세영의 몸 위를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준비, 안 해도 돼, 오늘은?”

“괜찮아. 바로 삼킬 수도 있을 것 같아, 오늘은.”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면서 주세영이 두 다리로 내 허벅지 뒤를 옭아맸다. 인내심 날려버렸으면 좋겠다더니 주세영이 날 날려버릴 것 같았다.

오늘의 주세영은 감도도 좋고, 평소보다 적극적인 데다가 왠지 내게 기대오는 느낌이었다. 원래도 섹스를 할 때 수동적인 타입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나에게 ‘사랑받고’ 싶은 기분인 것 같았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당신이 ‘사랑받고’ 싶다면 얼마든지 실컷 사랑해 줄 수 있어. 내가 당신 애인인데,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내가 안 채워주면 누가 채워주겠어.

오늘 여긴 우리 둘밖에 없고, 성별을 떠나 자기 애인한테 사랑받고 싶은 건 절대 흉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다른 사회적 역할 다 벗어버리고 그냥 우동주 애인 주세영만 해. 

허리 아래에 베개를 깔고 누운 주세영의 애널을 손가락으로 푸는 동안에도 우리는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주세영은 발바닥으로 내 팔과 어깨와 가슴을 문지르면서 키득거렸다. 그러다 내 손가락이 어딘가를 뭉근하게 누르면 길게 호흡을 들이쉬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럴 때 주세영의 얼굴은 너무 황홀해 보여서 대체 어떤 느낌이길래 저런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졌다. 주세영이 나에게는 넣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고 하니 당분간 그 느낌을 직접 체험할 기회는 없을 것 같지만.

이미 충분히 젤로 젖어든 그곳의 입구에 또 그만큼의 젤을 더 흘려 넣었다. 손가락을 살짝 뺐다가 다시 밀어 넣으면 젤도 함께 빨려 들어간다. 천천히 끝까지 밀어 넣으면 안에서 공기와 마찰을 일으켜 뿌욱뿌욱, 민망한 소리가 났지만, 우리 둘 다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주세영은 웃음도 장난도 멈췄다. 가슴만 오르락내리락 부풀리면서 다가올 쾌감에 미리부터 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안에서 손가락을 반 바퀴 뒤집었다. 이제 충분한 것 같았다.

“새 거 좀 뜯어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대 위에 던져놓은 콘돔을 집어 입으로 잡아 뜯는다. 콘돔을 건네받다 스친 손가락에서 가벼운 스파크가 일었다. 손에 끼고 있던 것을 벗어 바닥에 내버리고, 발기를 참느라 괄약근이 터지도록 힘을 준 덕에 아직 완전히 다 커지진 않은 페니스에 새 콘돔을 씌웠다. 그 위에도 젤을 뿌려 뿌리까지 꼼꼼히 펴 바른다. 딸기 향, 바닐라 향, 초코 향도 있지만 우리가 애용하는 건 무향이었다. 우리 둘만의 시간에 다른 인위적인 향기는 방해일 뿐이었으니까.

무릎을 꿇고 뒤꿈치 위에 엉덩이를 올려 V자로 벌려 앉아 있는 내 허벅지 위에 주세영이 발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굽혀진 두 무릎 사이로 젤이 번들거리는 그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직전까지 손가락으로 벌려둔 탓에 완전히 다물어지지 않은 그곳은 주세영의 호흡에 맞춰 벌름거리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정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은 장면이었다.

“하아아….”

주세영이 누운 채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좀 더 안으로 바짝 들어앉으면서 귀두 끝을 입구 아래에 대고 찌르듯 문질렀다.

“안에서 더 커질 거야.”

커질 거라는 말에 겁을 먹은 건지 기대를 하는 건지 주세영이 시트를 꽉 비틀어 쥔다.

“힘 빼야죠.”

허벅지를 가볍게 찰싹 때려줬더니 곧 힘을 빼고 다리를 좀 더 느슨하게 벌린다. 귀두를 입구에 조준하고 반쯤 밀어 넣은 뒤 주세영의 양쪽 허벅지를 안아 끌어당겼다. 아래로 몸이 딸려 내려오면서 뻑뻑하지만 착실하게, 조금씩 내 것을 빨아들인다. 매번 몸이 닳도록 애무한 뒤에 삽입했던 나의 정성이 효과를 보고 있었다. 몸을 겹칠 때마다 그의 몸이 처음보다 부드럽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페니스의 직접적인 삽입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기도 했지만 손가락이나 플러그를 이용해 꾸준히, 하지만 안전하게 애널의 근육을 자극해온 보람이 있었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데에 철저한 자료조사는 필수였다. 덕분에 주세영은 꽤 괜찮은 사이즈의 내 물건을 완전히 다 밀어 넣은 뒤에도 발기가 시들지 않았다.

어깨 앞으로 안고 있던 그의 허벅지를 풀어 내 옆구리 양쪽으로 내려놓았다. 상체를 굽혀 주세영의 몸 위로 엎드리자 페니스와 애널이 좀 더 깊이 밀착되면서 그의 호흡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숨을 고르느라 들썩거리는 그의 가슴을 문지르면서 턱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요…. 목요일에 소리 질러서.”

주세영이 먼저 미안하다고 했으니 이번만큼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는데, 처음으로 집 앞까지 달려와 미안하다는 말을 쏟아놓고 내 침대 위에 누워 나와 하나로 이어진 주세영을 마주하고 있으니 또 술렁술렁 마음이 약해졌다.

“괜찮아…. 내가 못된 소리 했잖아.”

주세영이 가쁜 호흡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면서 웃는다. 일주일 만이라 그런지, 그 일주일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들과 마음고생 탓인지, 우리 둘 다 평소보다 몸이 예민했다. 인내 뒤의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질퍽질퍽한 애무를 상당 부분 생략했음에도 몸은 이미 이 시간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야, 또 그러면 때려줘. 버릇은 초장에 잡아야지. 이제, 같이 살 건데.”

입술 끝끼리 스치도록 고개를 까딱이면서 오른손으로 유두를 찾아 엄지로 가볍게 둥글리다가 검지로 손가락을 바꿨다. 비뚤게 붙인 아끼는 스티커를 다시 붙이려고 떼어내듯이 끝만 깔짝거리는 손놀림에 주세영의 허리에 힘이 들어갔고, 그때마다 내벽이 페니스를 쥐어짜듯 압박해왔다.

“그래? 또 그러면…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해야겠네.”

이 시간의 행복감에 웃음이 났다. 웃고 있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귀와 턱이 연결되는 곳에 코끝을 비비며 입술로 피부 위를 긁었다.

“그건 당신한테도 벌 아니야?”

“아닌데?”

“아, 그래?”

젤도 콘돔도 없이 당장 하자며 복도에서 날 도발하신 분이 말은 참 잘하시는군요. 지금 분명 당신이 먼저 도발한 거야.

그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위로 밀려 올라가지 못하도록 붙잡은 그 상태에서 허리를 툭 밀어 올렸다.

“흣.”

입으로는 숨을 들이켜면서 코로는 숨을 뱉는다. 짧게, 턱을 치켜들면서. 그리고 그대로 잠시 숨을 멈춘다. 별로 강한 힘도 아니었고, 아직 포인트를 건드린 것도 아닌데 벌써 주세영의 얼굴은 황홀경을 코앞에 둔 것 같았다.

“그렇구나….”

베개를 등허리에 깔고 있어 약간 위로 들린 주세영의 엉덩이에 몸을 꽉 밀어붙이고 허리를 돌렸다.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지방질로 이루어진 주세영의 안쪽 피부에 결이 거친 음모가 짓이겨지고, 고환이 뭉개지고, 미리 예고한 대로 점점 더 커지는 내 것은 그 사람의 몸속을 서서히 둔하게 휘저어나갔다. 찌걱, 찌걱, 안에서 젤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한다. 온도가 올라간다. 주세영의 몸속, 우리의 체온, 이 침대 위, 침실 안, 아직도 밤이면 겉옷이 필요한 4월의 서울의 밤. 그 모든 것의 온도가 상승한다.

“내가 당신 몸에…”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 중 하나를 끌어내려 주세영의 등 뒤를 감싸 안고 이번엔 좀 더 길고 강하게 허리를 꾸욱 밀었다. 빡빡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그 사람의 몸속을 둘로 가르며 파고들었다.

“손가락 하나… 안 대면…”

살이 빠져 조금 더 날카롭고 분명해진 어깨 위를 깨물었다. 제법 선명한 잇자국이 생겼을 정도로 힘을 줬는데도, 모든 신경이 아래쪽으로 곤두선 주세영은 아픈 줄도 모르고 내 등을 끌어안은 채 꺽꺽거리며 숨을 몰아쉬기에 바쁘다.

“당신한테는 그게… 벌이, 아니…구나.”

페니스가 밖으로 반쯤 빠져나올 정도로 물러났다가,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끝까지 푹 밀어 넣기를 세 번 반복했다.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주세영의 애널은 회복이 빠른 상처처럼, 물러난 만큼 금세 들러붙었다가 내가 파고들면 다시 쩌저적 갈라졌다. 콘돔을 씌우고 젤을 듬뿍 퍼부어도, 그의 몸이 열리고 닫히는 그 감각이 페니스에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주세영 역시 그런 자신의 몸을 가르며 드나드는 나의 몸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흥분은 배가 되었다.

“흐읍, 흐흡, 큽!”

끝까지 밀어 넣을 때마다 주세영은 등을 들어 올리고 턱을 치키면서 숨이 넘어갈 것처럼 버둥거렸다. 힘을 빼야 몸이 편하다는 건 이미 잊었나 보다. 허공을 차는 허벅지는 단단하게 뭉쳤고, 내 어깨를 쥐어뜯는 손은 억셌다.

주세영이 힘을 주면 줄수록, 더 부풀어지려는 내 페니스와 조여들려는 주세영의 애널 사이에 뜨거운 마찰열이 오른다. 그의 허리를 두 팔로 안아 허벅지 위에 일으켜 안았다. 얼떨결에 반동을 주면서 일어나 앉은 주세영은 체위가 바뀌면서 페니스가 쓸리는 자리가 미묘하게 달라지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벌이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뭐… 뭐 하게….”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으면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내 목에 팔 걸어 봐요.”

원래도 10킬로그램 정도 나보다 가벼운 데다가 근력의 차이가 있다 보니 지금까지 주세영을 안는 것이 체력적으로 크게 힘들다고는 느끼지 않았었다. 물론 누워서 떡먹기 정도는 아니지만, 전력을 다해야 하는 만큼 끝난 뒤에는 한계까지 운동을 하고 난 뒤처럼 몸이 날아갈 것 같은 가벼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더욱 에너지가 솟는다. 그 어떤 체위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뭘 하려는 건지 걱정된다는 얼굴로 주세영이 머뭇거리며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왼팔로 그의 등을 받치고, 오른팔로 가슴을 스윽 밀었다. 주세영의 팔이 쭉 뻗어지면서 몸이 뒤로 기울고, 작용 반작용의 원리에 의해 우리의 몸은 서로를 팽팽하게 당기면서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상체가 뒤로 젖혀지자 반대로 주세영의 하체는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미끄러졌다. 색이 그리 짙지 않은 고환이 내 음모 위에 닿았다. 페니스 위쪽에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후우―.”

주세영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최대치로 부어오른 페니스가 아프도록 예민해 보인다. 서른한 살 아저씨가 뭐 이렇게 고추가 이뻐? 반질반질하고 미끈하고 불그스름한 게 갓 껍질을 벗겨놓은 과일 같아 먹음직스럽다. 하긴, 다른 데도 다 이쁜데 거기라고 별다를 리가 없지.

시험 삼아 허리를 움직여 몸을 흔들어봤더니 주세영의 아랫배와 내 복근 사이를 오가면서 찰싹찰싹 감긴다. 아, 이거 재밌네. 딱히 갈증을 느낀 것은 아니지만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허리를 털기 시작했다.

이중으로 겹쳐 놓은 매트리스는 반동 하나만큼은 예술적이다. 3 정도의 힘으로 5 이상의 파장을 만들어낸다. 조금 과장해서, 트램펄린 위에서 하나로 겹쳐져 뛰고 있는 것처럼 몸이 울렸다. 아래에서 위로, 45도 정도의 각도로 빠르게 그를 쳐올렸다.

“마… 말도 안 돼…!”

내 허벅지 위에서 널을 뛰듯 흔들리면서 주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내 목을 끌어안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미끄러운지 몇 번이고 고쳐 안다가 결국에는 목 뒤에서 두 손을 깍지 꼈지만 그것도 별 소용은 없었다.

“뭐가….”

쿠퍼액이 흐르는 주세영의 페니스는 내 허리의 움직임이 빨라지면 빙빙 돌면서 원을 그리고, 조금 느려지면 위아래로 끄덕거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 으, 으으… 윽!”

허벅지를 좀 더 넓게 벌려 자세를 고치고 주세영의 엉덩이 두 쪽을 단단히 움켜쥔 채 허리 아래를 더 격하게 움직였다. 아무리 살집이 있는 체격이 아니라 해도 남잔데 어떻게 당신을 허벅지에 올리고 이렇게 움직일 수 있냐고? 그게 궁금한 거야 지금? 그렇게 금방이라도 내 배 위에다 정액을 뱉어놓을 것처럼 몸을 뒤틀면서 고작 그게 궁금해?

“당신이 살 빠지는, 일주일 동안… 난 죽어라 헬스클럽을, 들락거렸…거든.”

그리고 원래 이런 건 힘보다는 테크닉이야. 이 말까지 했다간 당신이 당장 과거 캐보자며 덤빌 것 같아서 넣어두는 거지만.

주세영의 애널에서 찔끔찔끔 흘러나온 젤이 내 고환을 타고 흐르는 촉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런 것까지 감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아니, 온몸이 예민해진 지금이라면 머리카락 한 올이 벗은 어깨 위를 스치는 감각까지 캐치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의 상체를 더 당겨 안았다. 제법 민감해진 애널 속의 포인트가 페니스에 쓸리는 각도였다. 언젠가, 손가락을 넣어 시원하게 긁어버렸음 좋겠다는 당돌한 발언으로 날 돌게 만들었던 스팟.

“하아… 하, 하… 아! 음, 으음―.”

역시나 몸속에 벌레라도 들어간 사람처럼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어떻게 움직여봐도 깊숙이 찌르고 있을 땐 내 귀두 끝이 그곳을 눌러줄 수 없다는 걸 경험상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쯤 되면 체면이고 이미지고 뭐고 다 날려버리는 주세영은 움켜쥔 어깨 위를 짓누르면서 어떻게든 그곳에 더 강한 자극을 주고 싶어 내 사타구니에 엉덩이를 짓이겨가며 필사적이다. 자존심 강하고 깐깐한 평소의 주세영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다.

“그만… 그만… 아, 그만해…!”

몸을 뒤로 젖혀 침대 위를 손으로 짚고 빠르게 허리를 털어대며 페니스 위에 태운 그 사람을 마구 몰아붙였다.

“지금, 나만 하고 있는 거… 아니거든?”

주세영 역시 내 가슴 위를 짚고 내가 주는 진동에 맞춰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하지 마, 하지 마!”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자기가 움직이는 걸 멈출 생각은 않으면서 내 탓을 한다.

내 가슴 위를 짚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린 그 사람은 균형을 잃고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처음이다. 페니스에 손을 대지 않고 뒤만으로 사정한 것은.

나도 놀랐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시원하게 사정해버리고 싶은 본능을 뿌리치지 못하고 주세영은 자신의 페니스를 아래에서 위로 훑듯이 흔들어댔다.

고통스러워 보일 정도로 몸부림치는 모습에 불타올랐다. 아직 사정 중인 그 사람의 허벅지를 붙잡아 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엉덩이와 허리가 들린 채 누운 그 사람은 아직 사정의 쾌감에 휩싸여 내가 뭘 하려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팔을 끌어다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몰아붙이는 힘을 밀어내지 못하도록.

구멍 안에서 마찰을 일으키면서 젤이 찍찍대는 소리, 근육으로 만들어진 탄력 있는 엉덩이가 사타구니에 와서 들러붙는 소리, 앞과 뒤에 모두 자극을 받는 주세영이 이성을 집어던지고 헉헉거리는 소리, 내 코에서 김인지 숨인지도 모를 습기 가득한 열기가 뿜어지는 소리. ―페니스와 함께 청각도 부풀어 올라 내가 인격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그대로 하나의 커다란 감각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굉장한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아… 위험해…. 지금 당신, 사정없이 조인다…고….”

“시끄러… 마음대로, 되는 거… 아니거든?”

벌써 많은 양의 정액을 쏟아놓고도 뭐가 더 나올 것만 같은지 그 사람은 귀두를 틀어막고 내 손을 뿌리치려 발버둥 쳤지만 나도 이제 한창 좋을 때였다.

“하. 아, 아! …안 돼, 안 돼! 싫…!”

허리를 휜 채 주세영은 뒷머리를 침대에 비비적대면서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단단히 비틀어 쥔 손목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더 빠르고 깊이 들락거릴수록 주세영은 뭔가를 참느라 더욱 몸에 힘을 줬고, 그럴수록 더 강한 압박을 받게 되는 나는 절정의 최정상으로 흥분을 몰아가면서 좀 전보다 더 맹렬하게 주세영을 들쑤셔놓았다. 이런 건 악순환일까, 아닐까?

“그만, 아, 하으윽…! 싫어, 아, 싫어…!”

침대 위에서 주세영에게 싫다는 말을 들었다. 주세영은 자꾸만 싫다고 했다. 계속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뭘? 너 벌써 네 복부와 가슴이 번들거리도록 사정해놓고 뭐가 더 나올까 봐 겁내는 건데? 난 괜찮아. 네 몸에서 뭐가 나오더라도.

때로는 좋아, 라는 말보다 더 강하게 좋음을 표시하기도 하는 게 주세영이 하는 ‘싫어’의 묘한 쓰임이었다. 주세영의 팔이 빠지도록 잡아당기면서 등허리를 한껏 밀어 넣어 몸을 뒤로 젖혔다. 내내 사정을 연기하느라 이를 악물고 코로만 뿜고 있던 숨을 드디어 입으로 몰아 내쉬었다.

목줄기를 팽팽하게 당기면서 턱을 치켜든 내 얼굴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지만 내 눈은 우주를 보고 있었다. 허황된 과장이 아니다. 주세영 안에서 페니스가 녹아내려 그대로 그에게 먹혀버릴 것만 같은 사정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부가 탈 것처럼 몸이 더웠는데, 종아리부터 허벅지, 등줄기와 팔뚝에까지 소름이 돋았다. 페니스에도 소름이 돋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후에도 잘게 허리를 털어가며 아주 긴 사정을 했다. 곧바로 다음 라운드에 접어들 수 없을 만큼 강하고 농도 짙은 여운이었다. 손끝까지 자르르 퍼지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주세영의 몸 위로 풀썩 엎어졌다가… 주먹으로 까이고 발로 차였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아! 아파라…. 좀 전에 당신 NO가 진짜 NO였다고? 내가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까 봐?”

주세영이 날 동네북 취급하며 쥐어박아도 나는 마냥 좋다고 실실거렸다. 자기도 좋았으면서 괜히 부끄러우니까 이제 와서 저런다. 다 알아, 당신 마음.

“아… 그러셔? 네가 내 속을 그렇게 잘 알아? 그럼 담배나 좀 가져와. 손가락도 까딱 못 하겠어.”

“넵.”

손가락도 까딱 못 하겠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세 살 연하에 회사 후배 신분의 애인인 나에게는 거부권이 없다. 그리고 거부권이 있다 해도 행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몸이 부서지더라도 주세영이 대령하라면 대령하고 싶었다. 그게 내 기쁨이었다. 지쳐 나가떨어진 그 사람의 입술에 담배를 물리고 불을 붙여주면서 나는 좋다고 실실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엉망이 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우리는 담배를 피웠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담배를 피우는 그 사람의 얼굴은 분명 일주일 전보다 야위어 있었다.

“어, 이걸 위해서 섹스한다는 생각이 들 만큼.”

주세영 옆에 팔베개를 하고 옆으로 누워 담배를 쥔 손으로 그 사람의 허벅지를 쓰다듬던 나는 하마터면 손을 놓쳐 그 미끈한 허벅지에 담배빵을 새길 뻔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농담이잖아.”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웃으면서 뺨을 쓰다듬어줬기에 망정이지…. 하여간 말을 너무 이쁘게 해. 할 땐 죽을 것처럼 헐떡거려놓고 꼭 끝나고 나면 입 싹 닦는다니까.

“아까 아예 울릴 걸 잘못했어. 난 당신한테 너무 약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털면서 불평했더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면서 또 발로 찼다. 두고 봐라, 내가 다음엔 진짜 엉엉 울리고 말지.

“알죠? 우리 집은, 들어올 땐 마음대로여도 나갈 땐 그렇게 안 된다는 거.”

아까 한 얘긴 충동적인 거였다고 발뺌할까 봐,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 슬쩍 한 번 더 굳히기에 들어갔다.

“네, 잘 알고 말고요. 이참에 아예 회사 그만둬버리고 살림할까 생각 중인데?”

“…….”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 사람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라서 깜짝 놀랐다.

“너무 대놓고 좋아하는 거 아니냐? 농담이잖아, 이것도.”

“안 좋아했거든요? 난 일하는 당신이 좋다고.”

누가 뭐래도 그건 사실이다. 잠시 잠깐 내 속에 존재하는 0.1%의 비뚤어진 독점욕이 발동해 아무도 못 보게 그 사람을 집에 가둬놓을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욕망이 새어 나왔는지 몰라도, 그 사람이 진지하게 그러겠다고 해도 내가 적극적으로 말리고 나설 정도로 나는 일하는 주세영을 좋아했다.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한 얼굴로 빤히 올려다보길래 내가 엔 소프트 주세영 대리님을 좋아하는 이유를 일일이 열거해줬다.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뒤통수까지 반듯하게 정돈된 머리도, 구김 하나 없이 맨 위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도, 꼭 자기 성격처럼 매듭이 꽉 조여진 타이도, 반들반들한 구두와 팬츠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양말까지. 그 안에 갇힌 몸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 그 옷을 완전히 벗겼을 때하고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흥분된다고.”

주세영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면서 발가락 끝으로 내 무릎을 꾹꾹 눌렀다.

“누가 얘보고 훈남이래? 순 에로 청년이구만.”

그 에로 청년하고 에로 바람난 게 누군데.

우리는 손가락에 담배를 건 채로 웃으면서 입을 맞췄다. 두 사람 몫의 담배 연기가 조용히 천장으로 피어올랐다.

□ ZOO SE YOUNG

내일 네 침대에서 눈을 뜨면 커피를 내려줘. 커피메이커 말고 드리퍼에 여과지를 깔고 곱게 갈린 원두를 두 스푼 넣고 뜨거운 김이 나는 물을 조금씩 흘려 넣어가면서, 정성을 담아 연하게 내린 커피를. 날 위해 네가 항상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해두는 시럽을 넣어서.

혀의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시럽을 듬뿍 넣어줘. 투명하고 달콤하고 끈적끈적한 시럽을. 한 모금 마시고 머그잔을 내려놓으면 입술을 댔던 자리에 갈색 자국이 생기겠지. 바로 그 자리에 네 입술을 대고 너도 한 모금 마셔봐.

그렇게 매일 아침 네가 내 커피를 내려줘. 오늘처럼 격렬하게 섹스를 한 다음 날 아침에도, 목소리 높여가며 다투고 아직 화해를 하지 못한 날 아침에도. 그 다음 날 아침에도, 그 다음 날 아침에도, 계속, 계속….

“야아― 우동주 인물이 이렇게 훤했었어? 모델 같네, 아주!”

“에이, 부장님. 우동주 씨야 원래 한 인물 했죠. 난 실물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안 그래도 회사에서 연예인이라도 나온 것처럼 촬영하러 가기 전부터 다들 이러쿵저러쿵 관심이 많더니 아침부터 온 회사가 우동주 얘기로 시끌시끌하다.

박 대리와 치킨에 소주를 마시다가 우동주의 집으로 달려갔던 그날로부터 정확히 2주일 후. 그러니까 지난 주 토요일. 나는 도곡동에서 한남동으로 주소지를 옮겼다.

우동주의 집에 이미 없는 것 없이 필요한 것들은 다 갖춰져 있는 상태라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들은 다 처분하고 개인적인 짐만 챙겨 가지고 들어간 거라 딱히 이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한 사람 더 들어왔다는 티도 별로 안 났다. 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던 우동주의 넓은 드레스룸이 거의 꽉 찬 것을 빼면.

그 전에도 살림만 합치지 않았다 뿐이지 뻔질나게 드나들던 집인데도 막상 이제 여기가 내 집이고, 우동주와 나의 집이구나 생각하니 잠을 자려고 누워도 설레고 아침에 일어날 때도 설레고 나란히 출근 준비를 할 때도 설렜다.

결혼 아니고 동거이긴 해도 어쨌든 한참 신혼이라, 퇴근 후에는 어디 들를 새도 없이 곧장 집으로 돌아가서 둘이 엉겨 붙기 바빴다. 밥을 먹어도, TV를 봐도, 이를 닦아도, 둘이 같이 집에 있으면 그냥 일상이 전부 연애고 데이트였다. 이런 설렘이 언제까지 갈지는 몰라도 일단 요즘은 왜 진작 합치지 않았나 싶을 만큼 신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은 이사한 지 4일째 되는 수요일이자, 지난번에 우동주가 촬영했던 인터뷰가 실린 잡지가 발간된 다음 날이기도 했다. 나는 그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있지만, 보통 발간일보다 5일 정도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그새를 못 참고 오늘 편의점에 들러 사 온 참이었다.

물론 우동주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정작 본인은 발간일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에디터가 그렇게 칭찬했다는 사진은 어떻게 나왔을지, 인터뷰에는 뭐라고 대답했을지, 궁금해서 얼른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왠지 우동주 앞에서는 안달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아, 참, 너 촬영했었지? 며칠 기다리면 집으로 잡지 올 텐데 뭐.’ 하면서 심드렁해할 거다.

“근데 우동주 얘는 언제 애인을 만든 거야?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일을 열심히 배울 생각을 해야지 말이야.”

9시가 넘은 지 한참이 됐는데도 다들 업무 시작할 생각은 안 하고 회의 테이블 주변에 서성거리면서 서로 잡지를 돌려보느라 바빴다. 난 별로 관심 없는 척 내 책상 앞에 앉아 오늘 사무 스케줄을 체크하…는 척하면서, 다들 빨리 자기들 자리로 돌아가야 화장실에 가지고 가서 마음 편히 볼 텐데, 하고 초조해하는 중이다.

마침 또 오늘 우동주는 거래처로 바로 출근한 터라 편의점에 들러 잡지를 계산하면서도 마음 졸일 일은 없었다. 안 그랬으면 따돌리느라 애 좀 써야 했을 텐데.

“자, 그만 일들 시작하지.”

부장님 말씀에 다들 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이면지 몇 장으로 잡지를 감추고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다들 관심 있어 하는 거, 너도 그냥 슬쩍 묻어서 보면 되지 뭘 그렇게까지 연기를 펼치냐는 말은 말아라. 모른다, 나도. 괜한 자존심이나 오기일 수도 있겠지만 회사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우동주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를.

애인이라고? 얘 설마 연애 얘기를 인터뷰에다 막 한 거야?

변기 뚜껑을 내리고 다리를 꼬고 앉아 우리 잘생긴 개뼉다구를 찾아 잡지를 뒤적거리는 마음이, 이렇게 설렐 수가 없다. 신간 잡지에서 좋아하는 걸그룹이 나온 페이지를 찾는 삼촌팬이 된 심정이었다. 그래본 적은 없지만 대충 지금의 나와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혼자 피식피식 웃으면서 잡지를 넘기다가… 와우, 브라보…. 나 이런 애랑 한 이불에서 잠자고, 목욕도 하고, 뽀뽀도 하고, 기타 등등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거야?

일반인 대상 인터뷰라고 하길래 한 페이지에 네다섯 명씩 빼곡하게 실려서 사진도 손바닥 반만 할 줄 알았더니. 아니, 다른 애들은 다 그렇게 실렸는데, 우리 개뼉다구만 무슨 진짜 연예인처럼 한 페이지 꽉 차게 사진이 실렸다.

신호 대기 중인 자동차 안이라는 설정 같은데,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말아 올리고 핸들을 감싸 안고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꺾은 채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는 우수에 찬 눈이 전문 모델 같았다. 사진에 대고 뽀뽀할 뻔했다.

멋지고 잘난 줄은 처음에 베이커리에서 봤을 때부터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듬어지지 않은 일반인인데, 이런 데 실려서도 빠지지 않을 줄이야.

술 취한 척하면서 나 꼬실 때부터 연기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기다리는 연락이 오지 않아 상심한 듯한 눈빛 연기가 프로 모델 부럽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가 박 대리에게 키스 장면을 들키고 나서 내가 메시지고 전화고 뚝 끊어버렸을 때라 자연스럽게 나온 표정일 수도 있고. 어쨌든 이미 반해버린 나도 다시 반하게 할 만큼 멋졌다.

이 코하고 눈 좀 봐. 외국인이냐? 우동주, 이 이기적인 놈.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 완전 일반인 됐잖아. 실제로 일반인이기도 하지만. 아, 나 정말 팔불출인가? 아니야, 누가 봐도 이번 특집 기사의 주인공은 우동주라고.

달랑 한 장밖에 안 되는 사진을 이렇게 저렇게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슬슬 다리가 저릴 때쯤에야 인터뷰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 시간의 4분의 1을 운전으로 보내는 4개월 차 영업맨의 신호 대기’라는,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운 제목 아래, 부장님은 돋보기를 쓰시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작은 글씨로 우동주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어디, 영업맨의 입담이 얼마나 좋은지 한번 볼까? 넉살 좋은 놈이니까 재미있게 썼으려나?

Q. 당신에게 일이란?

A. 자기의 존재 증명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세상과의 싸움.

(시작부터 화려하구만. 네가 일하는 게 세상으로부터 날 지키기 위해서였냐? 난 한 번도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뭐, 듣기 나쁜 말은 아니네.)

Q. 지금 하는 일은 나의 천직일까?

A. 앞으로 알아가려고 하는 중이다.

Q. 일과 사랑 중 포기할 수 없는 것은?

A. 나에게 있어 사랑은 내가 포기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자식 뭐 이렇게 개폼을 잡았어? 하지만 남들은 오그라든다며 욕할지언정 내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외에 신변잡기에 대한 자잘한 질문이 몇 개 더 이어졌고, 그런 것들에 대한 답변은 단답형으로 심플했다. 그리고 결국 나를 화장실에서 잡지 보면서 울컥하는 삼촌팬으로 만들어버린 건 마지막 질문이었다.

Q.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A. 대외적으로는 세계 평화, 개인적으로는 냉전 중인 애인과의 평화. 쭈,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같이 살자~.

이미 같이 살고 있잖아, 인마.

이런 인터뷰를 하고 나를 보러 온 애를 난 그렇게 박대해서 쫓아냈으니….

다 지난 일이고, 지금 우린 살림을 합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도, 새삼 다시 가슴이 아프고 미안했다. 사랑에 목숨 거는 남자를 그릇이 작은 새가슴 취급하는 세상에서, 자기에게는 내가 제일이라며 일조차도 나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고 전국적으로 떠들 수 있는 당당하고 멋진 너를….

내가 진짜 절대로 끝까지 심드렁한 척하려고 했는데 감동의 파도가 방풍림까지 밀려와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시간 날 때 전화하라고 메시지를 보내놓고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막 일어나려는데, 잡지 속 사진에서처럼 핸드폰 쥐고 내 연락이라도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깜빡이는 이름은 여전히 ‘개뼉다구’였다.

[빨리 연락했네?]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우동주는 지금 날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우고 있는 중이니까. 내가 나 자신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놈이라 지켜주겠다는 얘기가 아닌 것 정도는 안다. 우동주도 나도, 일 열심히 하면서 사회에서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서로를 지키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아… 무슨 결혼 정보 회사에서 전화가 와가지고 방금 전까지 통화하고 있었거든.]

[뭐?]

내 목소리의 다정함이 10초도 안돼서 씻겨 내려갔다. 다리 저린 것도 잊었다. 무슨 정보 회사?

[무료로 해줄 테니까 자기네 회원으로 등록하라고…. 전에 촬영했던 잡지 있잖아, 그거 보고 연락했다나 봐. 그게 벌써 나왔나?]

저녁에 칼퇴근하고 근사한 프렌치 레스토랑 가서 저녁 사주려고 했더니, 땡이다. 넌 오늘부터 적어도 다음 호 잡지 풀릴 때까지 외식도 외출도 금지야. 그냥 집에서 나만 쳐다보고 있어, 이 개뼉다구 같은 놈아. 쓸데없이 사진은 왜 그렇게 잘 찍혀가지고….

[근데 왜 연락하라고 했어? 나 보고 싶어서?]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니 옆에 박 대리가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내 앞에선 그딴 말 하지 말라고 우동주를 걷어차고 있거나. 걷어차진 말아라. 쓸데없이 사진 잘 찍힌 중죄를 지은 놈이긴 하지만 벌을 주더라도 내가 줄 거니까.

[꿈도 야무지군. 오늘 저녁엔 무조건 네가 만든 밥 먹을 거니까 각오하라고 전해주려고 그랬다, 왜?]

[응? 갑자기 왜? 오늘 외식하고 싶다고 안 했었나?]

[오늘 저녁은 네가 해. 세계 평화를 지키고 싶다면.]

세계 평화가 별건가, 다 가정의 평화에서 세계 평화가 시작되는 거지. 어리둥절해하는 우동주를 내버려두고 전화를 끊은 나는 들어올 때와 달리 당당하게 잡지를 옆구리에 끼고 화장실을 나왔다. 내가 화장실을 가면서 뭘 들고 가는지까지 궁금해할 사람은 사실 우리 회사에서 우동주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우동주가 외근에서 돌아오기 전에 편의점에 가서 잡지를 한 권 더 살 거다. 찢어서 스크랩하지 않고 그대로 서재 책꽂이에 꽂아두고 나 혼자서만 가끔씩 꺼내 볼 거다. 창간호부터 거의 다 모으고 있으니 그냥 꽂혀 있는 책등만 봐서는 많은 잡지 중 하나겠지만, 내 눈에는 이번 호의 책등만 반짝반짝하게 보이겠지.

우동주가 오늘 저녁으로 뭘 해주려나. 시커멓게 태운 토스트 사이에 계란 프라이를 끼워 주든, 우동주 집에서 다 만들어서 보내주신 나물을 섞기만 하면 그만인 비빔밥을 내놓든, 다이닝룸의 커다란 식탁 귀퉁이에 나란히 앉아 있으면 프렌치 레스토랑도 부럽지 않겠지.

우리는 같은 집으로 퇴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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