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택시를 얼마 만에 타보는지 모르겠다.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부터는 택시 탈 일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까.
“싫어요, 선배님이 먼저 타요….”
열린 뒷문을 붙잡고 휘청거리면서도 우동주 씨는 나를 먼저 태우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금방이라도 잡은 손을 놓치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아스팔트에 엉덩방아를 찧을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응?”
원래 술버릇이 이런 건지 작업 상대 한정인지는 몰라도, 대형 세단의 넓은 뒷자리에서 굳이 나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은 우동주 씨는 잠투정하며 엄마 품으로 파고드는 애처럼 내 허리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엄마 찾는 어린애치고는 손놀림이 끈적하긴 했지만.
재킷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끌어안은 손은 땀이라도 닦으려는 것처럼 셔츠 위를 비비적거렸고, 고개를 가누기 힘든 듯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를 때마다 두꺼운 콧대나 뜨끈한 입술이나 단단한 턱뼈가 그대로 느껴져 왔다. 내일모레면 서른인 다 큰 사내놈이 엉겨 붙는데도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묘한 긴장감에 목이 탔다.
허리에 감기는 손바닥의 은근한 질감, 셔츠 위를 적시는 입김의 젖은 훈기, 금방이라도 셔츠를 들어 올리고 그 안으로 불쑥 손을 밀어 넣을 것 같은 우려. 혹은 기대.
“뭔 소리야. 너 내려주고 난 우리 집 갈 거야. 마음 같아선 버려두고 가고 싶은 걸 참는 거니까 고마운 줄이나 알아.”
순진한 열여덟 소년처럼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으로, 손은 스물여덟 노련한 선수처럼 움직이는 언행 불일치가 문득 괘씸해서 코를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런 얼굴로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해라. 얼굴만 보면 누가 알겠냐. 지금 네가 재킷 안에서 내 허리를 어떤 식으로 쓰다듬고 있는지.
“왜… 자고 가요…. 국수 해줄게…. 나 연습도 했어요….”
냄새를 맡아 뭔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코끝으로 가슴을 더듬어 나가는 우동주 때문에 잠시 숨을 멈췄다. 혹시 셔츠 위로 내 유두를 찾아 무는 건 아닐지 가슴을 졸였다. 말로는 귀여운 척을 하면서 행동은 발정 난 짐승이다. 내 위로 거의 올라타다시피 반쯤 걸쳐져 있던 다리가 결국은 내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로 떨어졌다. 가늘고 미끈하게 쫙 잘빠진 다리도 아니고 두껍고 무거운 기둥 같은 다리인데도 팬츠가 쓸리는 자리에 신경이 예민하게 돋아나는 것 같았다. 정말 국수 때문에 자고 가라는 것도 아니잖아, 너.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게 무슨 국수야….”
커다란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리고 어떻게든 내 품 안에 들어와 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가증스러운 한편 귀엽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으로 손이 갔다. 우동주 씨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조금은 대범해졌다. 생기 있는 촉촉한 곱슬머리가 손가락에 감겼다.
이것 덕분에 어떤 때는 캘리포니아의 서핑 보이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폴로 게임을 즐기는 명문가의 도련님 같기도 했다. 곱슬이라고는 해도 뻣뻣하고 고집 세 보이기보다 유쾌하고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처음엔 이런 호감형 얼굴로 살살 갈구는 바람에 열 받기도 했었는데.
“할 수 있어…. 자고 가요…. 우리 집 안 궁금해?”
폴로 게임을 즐기는 명문가의 도련님은 사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다. 그나마 가슴 부근에서 꼼지락대고 있던 얼굴을 목덜미로 옮겨 고르지 못한 숨결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함께 짐승이 되자고 나를 회유했다.
끌리고 있음을 부정하려는 생각은 이제 없었다. 대답을 보류해두고 있기는 했지만 고백을 받은 이후의 내 행동은 누가 봐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열여덟 같은 우동주 씨를 따라 요 며칠 나도 그보다 세 살 많은 스물한 살이 된 것 같았다. 실제 스물한 살 때도 이렇게까지 감정이 들뜬 적은 없었다. 요즘의 나는 핸드폰이 울리지 않은 걸 뻔히 알면서도 5분에 한 번씩 액정을 들여다본다.
분명 나는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 갈등을 지나 ‘이래도 되나?’ 의 영역으로 슬그머니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궁금해….”
꼭 우동주 씨가 취해 있어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 궁금했다. 우동주가 궁금했다. 이제 막 성에 눈 뜬, 호기심으로 가득 찬 소년처럼 그의 감촉, 무게, 탄력, 남들은 보지 못하는 은밀한 몸 구석구석, 그리고 지금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전부 알고 싶었다.
우동주 씨의 입술이 내 목에 닿았다. 어쩌다 스친 것이 아니라 분명 의도적인 밀착이었다.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는 목덜미 깊숙한 곳에 입술을 대고 꾹 누르자 입술 안의 딱딱한 치아까지 똑똑히 느껴졌다. 다리 사이로 무릎이 파고들고 허리 근처를 지분거리던 손바닥이 가슴 위를 쓸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나 역시 흥분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들킬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아니, 우리 사이에는 거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남자다. 발랑 까지거나 밝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그다지 순진하지도 않았다. 누굴 좋아하면 당연히 살을 맞대고 싶어진다. 그 상대가 이런 식으로 달라붙어 유혹해오는데도 아무것도 못 느낄 만큼 목석도 아니고 성인군자도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몸에 관심을 가진 적도, 자세히 관찰해본 적도 없으며 성적 대상으로 본 적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에 우동주 씨의 몸은 나에게 새로운 종류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너하고 맨살이 닿으면 어떨까. 옷을 입고 비비적거리는 것만으로도 이제까지 내가 해온 어떤 섹스보다 더 섹슈얼한데, 진짜 옷을 벗고 서로의 몸을 만지면? 입술과 입술이 닿고 그 부드럽고 촉촉한 점막 안으로 서로의 혀가 드나들면 어떤 소리가 날까. 네 손이 내 피부 위를 스치고 움키면 나는 어떤 전율을 느끼게 될까.
너무나 단순명료해서 차라리 순수하기까지 한 맹렬한 욕망이 내게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쪽으로는 점잖다 못해 좀 심심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실제로 내 섹스는 지루할 정도로 평범했었고) 우동주 씨와 맞닿은 곳마다 억제할 수 없는 성욕이 피어올랐다.
그것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그가 내 손을 슬며시 감싸 쥐었다.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욕망에 심취해 있음을 내게 알리며 나를 안심시켰다. 함께 재미있는 걸 해요. 우리가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알고 있잖아.
“미치겠어…. 당신 너무 섹시해….”
괴로워 돌아버리겠다는 듯, 금방이라도 내 발 아래로 줄줄 무너져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혀를 내밀어 뜨겁게 내 귀를 핥아 올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인내할 자신이 없었다.
내 몸을 발가벗기는 듯한 우동주 씨의 속삭임에 바닥과 닿아 있는 구두 밑창에서부터 열이 끼쳐 올라오더니 마지막엔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뒷덜미가 오싹했다. 그의 손을 마주 꽉 움켜쥐었다.
섹시함이 만약 성적인 매력이고, 성적인 매력이라는 게 함께 침대 위를 뒹굴고 싶다는 욕망이라면… 지금의 우동주야말로 내게는 듣도 보도 못했던 섹시함이었다. 내가 남자의 몸에 욕정하다니.
뺨을 만지고 싶었다. 고개를 비틀어 귓가에 닿아 있는 그의 입술이 내 몸의 다른 곳에 닿게 하고 싶었다. 코끝이라든가, 턱선이라든가, 입술이라든가….
아무리 한쪽이 인사불성으로 취했다지만 혹시라도 기사 아저씨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창밖에 스쳐가는 풍경들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맞닿은 손에 땀이 고여도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았다. 그건 이미 무언의 어떤 사인이었다. 어른들끼리만 아는 그런 게 있다. 오늘 괜찮아? 응 괜찮아, 뭐 그런. 아직 아무 망설임 없이 선뜻 괜찮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늘, 지금이라면 이제까지의 주세영이 아닌 다른 모습도 가능할 것 같았다.
언제까지 메시지로만 애인 행세를 하면서 시간을 끌 수는 없는 거니까. 다른 여자가 네 목에 타이를 둘러주는 것에 대해 정당하게 화를 낼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싶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그 자격을 인정받을 수는 없겠지만 너한테 실컷 심통 부릴 수 있는 자격이면 돼.
우리를 태운 택시는 유엔빌리지 안으로 들어가 주거를 목적으로 지었다고 하기엔 굉장히 모던하고 특이한 외형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나처럼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원룸에 살고 있겠거니 했는데 유엔빌리지의 고급 빌라라니. 우동주 너, 진짜 금수저였냐? 나, 금수저 알레르기 있는데. 아니, 사실은 그런 알레르긴 없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우동주 씨의 손에 이끌려 머뭇머뭇 택시 뒷좌석에서 내려서는데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쩌려고 지금 여기에 내리고 있는 건지…. 국수, 국수 준다고 했으니까….
“뭐야… 이런 데 살아? 우동주 씨 진짜 재벌 집 아들이었어?”
긴장을 감추기 위해 아무 말이나 뱉어내고 있었을 뿐 사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롤러코스터라도 탄 기분이었다.
“진짜 재벌 집 아들은 이런 데 안 살아요.”
우동주 씨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유엔빌리지의 고급 빌라에 살면서 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명품 슈트를 사 입을 수 있으면서도 파크랜드를 걸치고, 그리고 스물여덟 살이면서 열여덟 살처럼 웃는 남자. 아니, 요즘은 연애라면 도가 튼 선수처럼 굴 때가 더 많긴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우동주 씨에게선 닳아빠진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런 놈에게 호감을 느끼지 말라는 게 더 무리다.
“자고 갈 거죠?”
나긋하고 애절하게 속삭이는 소리에 숨 쉬는 박자를 놓칠 것 같았다. 평생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했던 일인데 일순간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확실히 우동주 씨는 밀어붙여야 할 때와 꼬리를 내리고 동정심을 유발해야 할 때를 잘 가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연애를 많이 해본 익숙함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 것 같았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그런 타이밍 면에서 서로 궁합이 잘 맞았다.
“방은 많아 보이네.”
“각방 쓰겠다고?”
각방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나를 당황시켰다. 그럼 언제는 우리가 합방했냐? 하지만 우리가 청소년도 아니고, 이 나이에 섬씽 있는 사람의 집에 발을 들인다는 건 분명 ‘합방’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의사 표현이 되겠지. 그걸 알면서도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우동주 씨의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같이 살지도 않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내 귀가 시간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신 아버지의 통금 핑계를 대면서라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아버지가 불 같이 화가 나셨더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기도 했다. 우동주 씨가 이대로 도어록을 못 열었으면 싶기도 했고, 왜 이리 굼뜨냐며 내가 달려들어 얼른 문을 열어젖히고 싶기도 했다.
긴장감이 너무 길어져 녹초가 될 것 같았다. 내 예민한 정신이 버티기에는 너무 오래, 너무 강한 자극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제 그만 무엇에라도 좋으니 항복하고 싶었다. 지금 만약 우동주 씨가 ‘나하고 사귈래요?’ 하고 물어온다면 나는 두말 않고 ‘그래’ 해버릴 것 같았다.
“가지 마…. 너는 나 보냈지만, 나는 너 못 보내.”
현관 안으로 끌고 들어가 복도 턱에 앉혀놨더니 내 손목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불쌍한 척을 한다. 검은 대리석이 반짝반짝하게 깔린, 내 오피스텔의 욕실만 한 현관에 앉아 아무리 불쌍한 척해봤자 동정심 비슷한 것도 안 생기거든? 그리고 나는 뭐 그때 너 보내고 싶어서 보낸 줄 아냐? 나도 개미 눈곱만큼은 네가 안 간다고 버티길 바랐었다고.
“누가 간대? 당장 국수 삶아 대령할 각오나 해.”
내 손목을 붙잡은 우동주 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우선 구두를 벗겨줬다. 우동주 씨가 생각만큼 취해 있지 않다는 것은 택시를 탄 이후에 서서히 알아챘지만, 술 취한 척까지 해가며 나를 구슬리려 한 노력이 가상해서 이 정도는 서비스하기로 했다.
더 튕길 줄 알았는데 웬일이래? 라는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쑥스러워져서 이마를 가볍게 툭 밀어주고 일어나 나도 구두를 벗고 복도로 올라섰다. 이런 빌라에 살면서 어째 현관에 실내용 슬리퍼 하나 없냐. 뭐 그런 면이 좋긴 하지만.
“진짜 국수 먹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우동주 씨의 시선이 내 동선을 따라온다. 국수 줄 테니 자고 가라고 해놓고 막상 집에 발을 들이니 딴소리다. 이래서 남자들이란. 일단 나도 남자다마는.
“국수 준다며. 집까지 끌고 와줬으니까 이제 쇼 그만하고 혼자 걸어라.”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올려다보는 우동주 씨를 그냥 내버려두고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탁 트인 전면창으로 한강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멋진 거실이 나타났다. 숨이 턱 막히는 야경이었다. 한남대교나 동호대교를 건너면서도 한강의 야경을 보지만, 위치와 높이가 달라서인지 그것과는 감흥이 달랐다. 이 거실에서 보는 서울은 내가 알던 서울과 완전히 다른 도시 같았다.
물안개가 옅게 낀 검은 강을 배경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불을 밝힌 가로등과 늦은 시간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강 건너 빌딩들이 반사시키는 조명이 어우러진 전망에 감탄하고 있는데, 뒤쫓아 들어온 이 집 주인이 감싸듯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마치 우리가 이 집의 거실에서 매일 저녁 이런 포옹을 나눠온 것처럼.
“안 취한 거, 알고 있었어요?”
택시 타려다 말고 멈칫하는 거 다음으로 뒤에서 끌어안는 게 우동주식 작업기술인가 보다. 근데 이 기술, 꽤 효과 있는지도. 내가 빠져나갈까 봐 걱정되는 것처럼 한 팔은 가슴 위로 또 한 팔은 복부 위로 단단히 두르고 꽉 조이면서 목과 귀 언저리에 입술을 부빈다.
“혼자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취하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
처음 내 오피스텔에서 끌어안았을 때는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튕길 생각으로 여기까지 내 발로 걸어 들어온 건 아니다.
“그럼, 다 알면서도 따라왔다는 거네?”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목을 쭉 빼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입이 아주 귀에 걸렸다. 대답 없이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더니 기습적으로 뺨에 쪽 입을 맞춘다. 어딜 함부로 입술을 갖다 대? 너만 성욕 있냐? 나도 지금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거든? 생각 없이 자극하지 말아줄래?
“예뻐 죽겠네. 국수보다 더 좋은 거 줘야겠다. 저쪽이 욕실이니까 손 씻고 소파에 앉아 있어요. 금방 올게.”
한 번 더 힘주어 나를 꽉 안았다가 놔준 우동주 씨는 좋아하는 사촌형이 집에 놀러와 신난 애처럼 즐거워 보이는 모습으로 거실 뒤쪽 복도로 사라졌다. 아마 술이라도 내올 생각이겠지. 이런 거실에 나란히 앉아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와인을 나눠 마시는 건 그야말로 ‘작업의 정석’일 테니까. 거기에 달착지근한 80년대 R&B 음악까지 틀어둔다면 천성적 로맨티스트이거나 후천적 바람둥이이거나, 둘 중 하나일 테고.
난 옷에나 신경 쓸 줄 알았지 무드도 뭣도 없는 놈이라, 굳이 분위기까지 조성해 가면서 꼬실 필요는 없는데, 우동주가 고생이 많다. 그쪽도 남자는 내가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겠지. 나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남자일 때는 그럼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우린 둘 다 알지 못했다.
트렌치코트와 재킷을 벗어 일인용 소파의 등받이에 걸어두고 우동주 씨가 일러준 욕실로 들어가 정성을 들여 손을 닦았다. 정돈이 잘 된 욕실이었다. 타월은 깨끗했고, 대리석 세면대 위에는 물비누를 흘린 자국도 없었고, 바닥은 물기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 현관과 통일감을 느낄 수 있도록 검은 대리석으로 마감된 욕실은 운동장처럼 넓지는 않아도 청결하고 세련된 맛이 있었다.
이런 고급 빌라들은 너무 화려하게 치장해 거북스럽거나 심플하다 못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거나 거만하게 으스대는 느낌이거나,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집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 안에 담긴 사람을 따뜻하게 환영해주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내가 본 중에는 가장 인간적인 고급 빌라였다. 빌라의 규모와 위치를 생각하면 보통 샐러리맨의 월급으로는 평생을 모아도 살 수 없는 집이었지만, 그런 집임에도 불구하고 우동주와 어울렸다. 인상적인 집이었다.
욕실을 간단히 둘러본 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고 살짝 비뚤어진 타이를 바로 잡았다. 비치되어 있던 구강세정제로 입안을 헹구는 자신이 가증스러워 웃음이 났다. 타월에 손과 입가를 꼼꼼하게 훔치고 심호흡을 해보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는다.
술을 내오면 무슨 얘기를 하지? 시간은 얼마나 끌어야 적당한 걸까? 두 잔 마실 정도? 아니면 병이 3분의 2쯤 비워질 때까지?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여차하면 나보다 더 흥분해서 마구 달려들 것 같은 우동주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그쪽은 아마, 날 올라타고 싶어 하겠지. 그걸 짐작 못 했던 것도 아니고, 절대 못 해준다며 버틸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조금은 억울해졌다.
“뭐 해요? 샤워해? 치사하다, 혼자만 깨끗해지고.”
허리에 손을 짚고 욕실을 서성거리면서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는데 우동주 씨가 문 밖에서 노크를 하며 나를 찾았다.
나를 배 아래에 깔고 싶어 하는 불한당 같은 놈. 그런데도 왜 도망가고 싶지가 않을까. 도망은커녕 택시 안에서 느꼈던 접촉의 짜릿함을 다시 한번 원했다. 나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우동주 씨의 감촉, 무게, 탄력, 남들은 보지 못하는 은밀한 몸 구석구석까지 알기를 원했다. 누구와도 경험해본 적 없었던 리얼한 그 떨림은 뿌리치기엔 너무 강하게 자극적이었다.
“안 해, 샤워.”
“에이, 좀 아쉽네.”
문을 열어보니 그사이 재킷을 벗고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둘둘 말아 올린 우동주 씨가 말과는 달리 하나도 아쉽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좀 전까진 내 몸에 꿀 발라놓은 놈처럼 덤비더니 집까지 데려와서는 산뜻한 척이다. 얄미운 놈.
“이리 와요.”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손을 찾아 쥔 우동주 씨는 반걸음 정도 앞서가며 거실 소파 쪽으로 나를 끌었다. 몸을 보호하는 또 하나의 피부인 듯 잘 맞아떨어지는 셔츠가 팔의 움직임을 따라 우아하게 주름졌다. 둔해 보일 정도로 덩어리가 큰 것도 아니고 마르다 싶을 정도로 얄팍한 것도 아닌, 오랫동안 꾸준히 잘 가다듬어온 아름다운 근육들이 셔츠 위로도 뚜렷이 드러났다.
말아 올린 셔츠 소매 아래의 스틸 손목시계와 고무줄로 칭칭 동여매 피를 가둔 것같이 팽팽하게 솟은 핏줄에 맥박수가 증가했다. 남자의 팔뚝에 마른침이 넘어가다니, 가슴이 뛰면서도 헛웃음이 났다.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옛말 틀린 게 없어.
“와인은 잘 모르지만, 아버지가 좋은 일 있을 때 마시라고 선물해주신 거예요. 주세영이 넝쿨째 우리 집으로 굴러들어왔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어?”
조명을 따로 밝히지 않아도 커다란 전면창으로 스며드는 빛들이 간접조명 노릇을 했다. 차분한 톤의 나무 타일이 깔린 바닥과 베이지색으로 염색한 가죽 소파와 그 소파 뒤에 걸린 여러 개의 액자들이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의 표정과 눈빛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의 빛은 충분했다.
우동주 씨는 근사하게 잘 자란 스물여덟의 남자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그의 열여덟 같은 풋풋한 웃음도 스물여덟 같은 마일드한 미소도, 전부 내가 가지고 싶었다. 그걸 다른 누가 갖는다면 화병으로 앓아눕고 말 거다.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게 아니다. 이미 나는 ‘어떻게 하지?’를 넘어 ‘이래도 되나?’를 지나 ‘이러고 싶어’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순순히 소파에 가서 앉았다.
내 옆자리에 바짝 다가와 앉은 우동주 씨가 와인을 오픈했다. 풍성하고 볼드한 디자인의 잔에 광택이 감도는 검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확실히 관능적인 시각적 자극이었지만 병을 감싼 우동주 씨의 마디가 두드러진 긴 손가락만은 못했다.
두 개의 글라스가 각각 반쯤 채워지고 우동주 씨는 그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마침 목이 탔다.
“이제 알죠?”
잔을 막 부딪치려다 말고 우동주 씨가 힐끔 눈을 치켜뜨며 나를 본다. 나는 마주 바라보는 것으로 되물음을 대신했다.
“같이 쇼핑했던 날, 내가 왜 내일 죽어 있을 거라고 했는지.”
아… 하는 탄성이 나올 뻔했다. 그때부터였을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죽어 있을 거라길래 거한 술자리 약속이라도 있나 생각했던 나를 떠올리니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나 미안하면서도 내 짐작보다 훨씬 더 이르게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이 묘하게 기쁘기도 했다.
하긴. 그때 달란 말도 안 했는데 택시 타러 가다 말고 돌아와서 머플러를 감아줬었지. 그러고 보니 왜 그땐 그런 행동이 이상하다고 못 느꼈을까. 다른 놈이 나한테 그랬으면 분명 불쾌했을 텐데.
“이제부터는 날 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좋아해요.”
그러고는 다시 열여덟 살처럼 웃으면서 내 잔에 제 잔을 살짝 갖다 댔다. 아주 잠깐 살짝 닿았을 뿐인데 잔과 잔 사이에서는 높고 맑은 마찰음이 일었다. 목이 탔던 것을 떠올리고 얼른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나도 와인을 잘 모르긴 하지만 이제까지 마셨던 와인들에 비해 향이 감미롭고 탄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기분.
“살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괴고 두 손을 모아 와인잔을 가볍게 쥔 우동주 씨가 눈에 익은 어둠 속에서 나를 돌아본다. 커다랗고 온순한 동물처럼 둥그렇게 말린 척추를 쓰다듬고 싶다. 거기에 감춰져 있는 거칠고 저돌적인 관능을 끌어내고 싶다. 그와의 사이에 원하는 건 달콤하기만 한 섹스는 아니었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맹렬히 나를 갈망하는 너를 보고 싶었다.
“살려주고 싶어졌어요?”
“죽인 적 없어.”
우동주 씨를 보는 내 눈에 번들거리는 욕망이 전부 드러나 있을 것 같아서 와인을 마신다는 핑계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럼, 나 봐요. 당신이 고개만 돌려도 난 죽어.”
잔에서 입술을 떼자마자 우동주 씨의 손이 내 턱을 쥐고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어둠 속에서 분명한 음영을 그리는 구조적인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마가 반듯하고 콧대가 굵고 입매가 약간 고집스러운, 이국적인 면이 있지만 느끼하지는 않은, 열여덟 살처럼 웃는 스물여덟의 남자. 사실 나는 너의 모든 것이 다 좋고 마음에 들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다.
글래머러스한 잔에 담긴 보르도산 특급 와인, 한강의 습기를 머금어 촉촉해진 서울의 야경, 우리가 입은 슈트를 미끄러뜨리는 질 좋은 가죽 소파, 풍부한 향에 자극된 혀. 모든 것은 넘치도록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난 분명 브랜드를 따지고 남들에게 뒤처지기 싫어하는 속물이고 소심한 놈이지만, 오늘만큼은 값비싼 와인을 오픈해놓고 방치해두는 짓을 감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소파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왼손을 뻗어 김수희 씨가 매준 넥타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우동주 씨가 내 턱을 다시 한번 가볍게 들어 올렸다. 지금은 키스를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저녁 내내 나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그 타이를 구기듯 단단히 움켜쥐고 이번엔 내가 그를 잡아끌었다.
입술이 닿았고, 계획적이었던 나는 재빨리 얼굴을 비틀어 더 깊숙이 입술을 겹쳤다.
“할 거면 빨리해. 숨 막혀 돌아가시겠으니까.”
이마를 맞댄 채로 잠깐 입술을 떼고 밭은 숨 사이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 짧은 순간에 우동주 씨는 내던지듯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상체를 완전히 이쪽으로 틀어 내 턱을 쥐고 있던 손으로 소파 등받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밀어붙이면서 공격적으로 키스해왔다.
펄떡거리는 혀가 거침없이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내 혀에 제 몸을 비벼댔다. 마치 이곳이 자기 영역이라도 된다는 듯이 함부로 굴었다. 내 혀를 핥아 올리고 뭉개고 휘젓고, 제 입안으로 끌고 들어가 가득 머금은 채 얼얼하도록 빨았다. 그러는 도중에도 강약을 조절하기도 하고, 입천장에 내 혀를 바짝 붙이기도 하고, 이로 혓바닥을 슬쩍 긁기도 했다. 거칠고 난잡한, 엉망진창의 키스였다. 이제까지 내가 해본 적 없는.
“으, 음… 흠.”
우동주 씨의 입속에 혀를 넣고 있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흐를 것 같아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맹렬하게 덤벼드는 그의 혀와 몸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내 몸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기울어 마침내 소파에 거의 드러눕듯이 되었다. 팔걸이에 뒷머리가 닿았다. 춥춥거리며 혀를 빨던 소리가 멈추고 내 혀를 제자리에 돌려준 우동주 씨는 입술과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거리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주세영 때문에 돌겠다. 도대체 먼저 키스할 생각을 어떻게 했어? 나 살려주려고?”
아랫배 위에 그의 무게가 느껴졌다. 예상대로 묵직하다. 조금만 몸을 뒤척이면 페니스가 스치기도 할 것이다. 이젠 내 마음속에서조차 우동주라는 이름 뒤에 거의 꼬박꼬박 붙이곤 했던 ‘씨’라는 호칭은 떼버릴 거다.
“그래, 살려줄 테니까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바로 코앞에 있는 우동주의 뺨을 톡톡 두드리면서 웃었다. 얼굴을 건드리는데도 불쾌하지 않은지 우동주는 마냥 황홀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 아까 같은 키스 다른 애들한테 해주지 마. 다른 애들은 싫어한다?
오늘 종일 나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다른 사람이 선물하고 직접 매주기까지 한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대로 잡아당기자 느슨하게 풀어진다. 오늘 우동주가 입은 페일 핑크의 셔츠는 딸기 캐러멜 향이 날 것처럼 달콤했는데, 이 초록색 레지멘탈 타이는 거기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이거, 제대로 거절하고 돌려줘.”
셔츠 깃 사이에서 타이를 잡아 빼 목을 한 번 휘감아 조르는 시늉을 하는데도 우동주는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강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내 입술에 덤벼들었다. 이번엔 곧장 혀를 밀어 넣지 않고 입술끼리 문지르면서 간을 본다. 서로의 입술에 밀려 살짝살짝 안쪽 점막이 닿을 때마다 둘 다 콧김이 거세졌다. 다시 또 흥분이 정신을 뒤덮을 것 같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하고 싶었다. 얼굴을 비틀어 가까스로 우동주의 입술에서 벗어났다.
“똑바로 대답 안 해?”
그랬더니 억울하고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지금 이게 왜 중요해? 난 지금 당신 입술하고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 딱 붙은 채로 출근도 하고, 일도 하고, 러닝머신도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 그런 마음가짐은 좋은데… 네가 김수희 씨에게 전혀 관심 없다는 것도 믿는데, 그래도 굳이 말로 확인해주면 내가 한결 마음이 편하겠거든? 그것도 못 해줘? 그리고 입술 붙인 채로 러닝머신 뛰는 건, 그건 그림이 너무 웃기지 않냐?
“그래서. 제대로 한다고 안 한다고.”
“와, 내가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주세영 진짜 치사하다.”
“내가 뭘.”
“자기는 아직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내가 곧 돌려줄 넥타이 받아온 거 가지곤 막 혼내.”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내 몸 위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는 너는, 여자친구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놈 몸 위로 막 올라타고 혀도 집어넣고 야한 키스도 하고 그러냐?
“없어.”
우동주의 목 언저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맨 위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면서 퉁명스럽게 운을 뗐다. 말할 타이밍을 한참 놓치고 나서 말하려니 뻘쭘했다. 그동안 우리 둘을 가로막고 있던 문제는 내 여자친구의 존재 여부가 아니었던 터라 더더욱 거기까진 생각이 안 닿았었다.
“…….”
“헤어졌다고, 여자친구.”
“뭐? 진짜? 언제?”
튕겨 일어날 듯하면서도 절대 몸을 떼진 않는다. 차라리 키스를 하면 했지, 난 이 자세로 눈 마주치는 것도 민망한데, 이놈은 이 이상 편안할 수 없다는 태도다.
“좀 됐어…. 너하고 쇼핑 갔던 날.”
만지작거리던 맨 위 버튼을 풀어버렸다. 여자친구하고 헤어졌다는 걸 얘기하면 꼭 내가 우동주에게 관심 있다는 고백이 될 것 같아서, 그동안은 그 말을 하기가 쑥스러웠다.
“근데 왜 말 안 했어요?”
“그게 뭐 중요하냐? 여자친구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너 할 거 다 했잖아.”
“그거야 곧 헤어질… 얄팍한 관계인 게 딱 보였으니까 그런 거고. 당신은 그럼, 이깟 타이가 그렇게 중요해?”
지금 우동주가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는 되는데 난 엄연히 이미 헤어진 사이고, 넌 바로 오늘 딴 사람한테 받아온 건데, 그게 어떻게 무게가 같냐?
“나한텐 중요해. 넥타이 매줄 때 내가 얼마나 열 받았는지 알아?”
사실 우동주 씨에게는 잘못이 없다. 구성원 대부분이 남자인 사무실에 스캔들이 터지면 어떤 참사가 일어나게 되는지 우선 나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먹잇감에 달려드는 이리 떼처럼 게걸스러운 그들 앞에서 입사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 얼마나 무력한지도.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해한다고 해서 감정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나한테도 여자친구 문젠 중요해. 당신이 여자친구 만나서 뽀뽀라도 할까 봐 그동안 얼마나 초조했는지 알아?”
평균 나이 29.5세,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 하는 짓이냐, 우리 정말. 누구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긴 하다만 진짜 유치해서 스스로가 못 봐주겠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해. 아니, 내가 더 많이 좋아하거든! ―그렇게 다투는 연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이런 연애를 하게 되다니. 이제껏 내가 쿨하고 건조한 줄 알고 사귀었던 사람들이 알게 되면 속았다고 억울해하려나? 근데 그렇게 치면 나도 나에게 속은 셈이다. 나도 내가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꿈의 꿈속에서도 몰랐으니까.
“그래도… 여자친구하고 헤어지는 데에 내가 쪼금은 영향 줬죠? 응? 나 만나고 나서 제대로 헤어져야겠다 싶었지? 응? 말해봐요.”
좀 전까지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놈이 갑자기 히죽히죽 웃으면서 허리 뒤로 손을 넣어 내 몸을 바짝 끌어안으며 얼굴을 들이민다. 허리에 손바닥이 스치는 순간엔 숨을 깊이 들이마셔야 했다.
“이렇게 기어오를까 봐 말하기 싫었어.”
덤벼드는 얼굴을 밀어내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래도 우동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면서 다리를 버둥거렸다. 가만 보면 은근 귀여운 척을 좀 한다.
“아… 세영아… 세영아….”
“까불래?”
가끔씩 주세영 주세영, 한 적은 있어도 세영아 하고 부른 건 처음이었다. 성을 떼고 나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사람은 어머니 정도라 낯설고 새삼스러웠다. 내 이름이 이렇게 간지러웠던가. 중성적인 이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우동주가 부르는 내 이름은 왠지 새침데기 꼬맹이의 이름 같았다. 근데 그 꼬맹이, 좀 예쁘게 생겼을 것 같긴 하다.
“그럼 뭐. 야한 짓 할 때도 선배님 선배님 하라고? 아, 혹시 그게 취향이야? 그럼 해주고.”
말이나 못하면. 어이가 없어서 혀만 차고 있었더니 목덜미에서 슬금슬금 올라온 입술이 귓불을 얕게 빨아들이고는 입술이 스칠 정도로만 귓바퀴 여기저기를 가볍게 건드리고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우동주의 등 뒤로 팔을 둘러 셔츠를 꽉 붙잡았다.
“세영아… 방으로 가자.”
향기 가득한 따뜻한 바람이 귓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목을 움츠리면서 고개를 돌리니 우동주가 팽개치듯 내려놓았던 와인잔이 쓰러져 엉망이 된 소파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한쪽 모서리에서는 고인 와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지금 치우라고 해도 말 안 듣겠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우동주가 궁금해졌다. 그건 분명 엎지른 와인을 닦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 WOO DONG ZOO
내 거실에 그 사람이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내 집 거실에 있는 것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그림이었다. 초현대적인 슈트 차림을 한 남자가 조선시대의 거리에 뒤섞여 있는 장면처럼 이질적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한강에는 안개가 짙어, 달빛도 네온사인도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도 전부 부옇게 번져 보여 모든 것이 더 꿈같았다. 따로 조명을 밝히지 않은 거실에, 움직일 때마다 팔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붙어 앉아, 그 사람과 와인을 나눠 마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주변의 모든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충동적으로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이곳에 발을 들였다는 자체가 그 사람에게 굉장한 의미일 거고, 나란히 앉아 마시는 와인은 이제 그 의미가 향하는 목표지점으로 가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했다. 최대치까지 팽창한 공기 속을 어떤 스위치가 부유하고 있다. 우리 둘 중 누구 하나라도 그걸 건드리면 점잖은 척은 끝이었다.
“이제부터는 날 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좋아해요.”
우리의 잔이 부딪치고, 그것마저 잠시 후에 발생할 일들에 대한 복선이나 상징처럼 느껴져 자꾸만 몸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와인을 삼키느라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는 그 사람의 결후조차도 의미심장했다.
“살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유리로 만든 종이처럼 얇은 와인잔을 그대로 손안에서 으스러뜨릴 뻔했다. 모든 보상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살려주고 싶어졌어요?”
“죽인 적 없어.”
기껏 한발 다가와 줬으면서 금세 또 겁난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정교한 선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 내 쪽을 향하게 했다.
“그럼, 나 봐요. 당신이 고개만 돌려도 난 죽어.”
그리고 이미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얼굴로 손안의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엔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수성이 풍부해 보였다. 딱딱한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것보다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펜으로 글을 쓰는 게 더 어울리는 생김새였다. 까탈스럽고 경계심이 많지만, 일단 한 겹 뚫고 들어가면 아이처럼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예술가형.
조련의 달인이자 예술가이신 주세영 님이 내 넥타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넥타이가 마치 내 신체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그 암시적인 손길에 몸이 저려왔다. 그 사람이 눈꺼풀을 내리깔자 직선으로 곧게 뻗은 빳빳한 속눈썹이 어둠 속에서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내 눈을 피하면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고, 그 사람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린 순간 오히려 내가 잡아먹혔다.
“할 거면 빨리해. 숨 막혀 돌아가시겠으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오케이 사인이었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와인잔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그에게 닿을 수 있을지 고민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일단 입술이 닿자 머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 사람의 입 안은 민트처럼 쌉싸름했다. 멘솔향의 담배 때문일 수도 있고, 방금 마신 와인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향긋하거나 달콤하지 않아서 더 주세영다운 향이었다.
여유를 잃고 달려들었다. 마음껏 신세계를 누볐다. 소인국에 이제 막 도착한 걸리버처럼, 세부섬에 닻을 내린 마젤란처럼 호기심과 흥분으로 달아올라 탐험 본능을 발휘했다. ―라고 표현하면 너무 귀여운 척이겠지? 실제로는 그 사람의 허리를 뒤로 꺾어버릴 듯이 야만적으로 굴고 있었으니까.
키스 처음 해보는 열 몇 살짜리처럼 불타올라 아래턱을 벌렸다 다물었다 해가며 그에게 파고들었다. 결코 소극적이지 않은 젖은 살덩이가 내 성급한 움직임에 다정하게 응해왔다. 흘러내리는 그 사람의 타액 한 방울조차도 아까워 아랫입술을 더 넓게 밀착시켜 모조리 빨아들였다. 어찌나 열중해서 빨아댔는지, 나중엔 그 사람의 혀가 희게 탈색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손이 없어 포옹할 수 없는 동물들처럼 코끝을 부비고, 되직한 음료를 빨대로 마실 때처럼 뺨이 움푹 파이고, 점성을 가진 액체가 서로 끈끈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감질나는 소리에 청각마저 달아올랐다.
우리의 몸은 점점 기울었다. 가슴과 가슴이, 배와 배가 맞닿았다. 깊이 키스했다. 주세영이 내 거실에, 내 소파에, 내 아래에 누워 있었다. 그보다 섹시한 일은 없을 것처럼 생각됐다.
“진짜 주세영 때문에 돌겠다. 도대체 먼저 키스할 생각을 어떻게 했어? 나 살려주려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조인간 같고, 내 앞에서 우왕좌왕할 때는 빈틈 많은 덜렁이 같고, 어떤 때는 조심성이 지나쳐 소심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일단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자신의 선택에 대해 망설이거나 의심하지 않고. 내가 이래서 주세영이 좋다. 인간적이니까. 한 가지 캐릭터로 쭉 가면, 그게 사람인가? 드라마 속 인물이고, 흥부고 콩쥐지.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렇고, 기분이 다운된 날은 좀 까칠했다가도 집에 가면 내가 왜 그랬나 후회도 하고. 우동주한테 너무 채찍질만 한 것 같으니 오늘은 당근 좀 방출해볼까? 하면서 키스도 먼저 해주고. 그래야 사람이지.
당연한 얘기지만, 방금 전까지 나와 입술을 겹치고 내 타액을 실컷 삼킨 그 사람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야시시해 보였다.
“그래, 살려줄 테니까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손바닥으로 내 뺨을 찰싹찰싹 두드리면서 마치 인심 써서 사귀어준다는 듯이 말하는데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얼굴쯤은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늘 시선을 붙잡았던 그 사람의 정갈한 손가락이 내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겼을 때, 비로소 넥타이가 만들어진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치한 주제로 잠시 입씨름을 하긴 했지만, 내 집에서, 내 소파에서, 내 아래에 누워 있는 주세영과 주고받는 그 어떤 말이라도 다툼이 될 수는 없었다. 여자친구와 진즉에 헤어졌다는 얘기를 하면서 내 셔츠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그 사람을 내려다보는데 6,500cc 엔진이 붕― 붕― 울어댔다.
“아… 세영아… 세영아….”
끌어안은 허리는 날씬하고 딱딱했다. 약간 나른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야위기도 했지만 볼썽사나울 정도는 아니었다. 타이트하게 조여진 탄력 있는 근육이 손가락 아래로 느껴졌다.
“까불래?”
“그럼 뭐. 야한 짓 할 때도 선배님 하라고? 아, 혹시 그게 취향이야? 그럼 해주고.”
나중에 우리가 더 가까워지고 여러 면으로 노련한 커플이 되면 아마 난 그 사람이 하지 말래도 선배님 소리를 포기 못 할지 모른다. 말로는 선배님이라고 깍듯하게 부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손으로는 그 하늘 같은 선배님의 몸을 슬쩍슬쩍 터치하는 오피스 러브야말로 로망 중의 로망이었으니까.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고, 그 사람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세영아… 방으로 가자.”
방으로 가서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타인과 몸을 섞는 데에 어느 정도 본인만의 스타일이 생겨버린 나이에 만난 두 남자가 처음으로 맨살을 맞댈 때는 대체 어떤 절차를 밟고 어떤 룰을 따라야 하는 건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별수 있나? 첫 잠자리에 의미를 두고 마지막 보루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패를 내놓을 정도로 우린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건 다르게 생각하면 진득하니 성숙하고, 아찔하게 야하고, 내숭 없이 발라당 까진 질펀한 섹스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는 얘기도 됐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 손도 못 대보고 이 밤을 흘려보내기에는 난 지금 모험심이 넘쳤다. 시동이 걸렸으니 질주까진 못 하더라도 시운전 정도는 해봐야 할 게 아닌가.
“뭐가 이렇게 코스가 딱딱 떨어져? 너 맨날 이러냐?”
내 등 뒤로 팔을 둘러 셔츠를 꽉 붙잡고 있던 그 사람의 손이 장난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당겼다. 그 사람의 배 위에서 내려온 나는 소파 앞에 서서 팔을 잡아끌었다.
“선배님은 오케이라는 말을 아주 길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나만큼 당신도 긴장해 있을 거고,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어보려고 농담을 던지는 걸 테고, 당신이 내 몸에 대해 어디까지 각오를 했는지 알 수 없어 미치도록 불안하지만. 당신의 손을 잡고 복도를 지나 침실로 가는 이 순간에 나는 문득 어울리지도 않는 고백을 하고 싶어져. 당신을 만나고 이제야 진정한 의미의 연애가 시작될 것 같은 기대감에 오늘이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면, 당신은 웃을까? ‘다른 애들한테도 다 그렇게 말했지? 나도 그랬다, 인마.’ 하면서 내 뺨을 두드릴까.
침실 문을 열고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손을 끌었다. 마주친 그 사람의 눈이 너무나 침착해서 오히려 나는 용기를 얻었다. 짙게 가라앉은 그 눈은 분명 이미 모든 것을 각오했고 준비를 마쳤다는 메시지를 내게 보내고 있었다.
“샤워, 하고 싶어요?”
한강을 향한 전면창의 절반이 블라인드로 가려진 침실은 거실보다 좀 더 어두웠다.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던 그 사람 앞으로 다가가 허리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뺨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하고 싶다면, 하게 해줄래?”
두 손으로 내 허리춤을 붙잡으면서 살짝 웃는 그 눈이 내게 다음 사인을 보내왔다.
“아니, 그냥 예의상 물어봤어.”
마주선 우리는 서로의 몸에 팔을 얽으며 하나로 맞물려 키스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나뿐만 아니라 그 사람도 다급했다. 커다란 빵조각에 달려든 잉어들처럼 우리는 쉴 새 없이 입술을 놀려 서로를 뜯어 삼켰고,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대신 서로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어붙여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며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였다.
셔츠의 단추를 일일이 끌러낼 여유도, 그렇다고 영화에서처럼 단추를 그대로 뜯어버릴 배짱도 없는 보통 남자들은, 팬츠 안에 넣어 얌전히 정리한 셔츠 자락을 끄집어내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항상 잡지 속의 모델처럼 쇼윈도 안의 마네킹처럼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그 사람의 옷을 헤집고, 잘게 쪼개진 날렵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마른 등을 문지르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가 이러한 상황에서 익숙하게 느껴왔던 감각과는 완전히 달라서, 묘한 일탈감을 불러일으켰다.
찹찹, 쩝쩝, 춥춥. 그러다 가끔씩 추임새처럼 끼어드는 으음, 하는 신음 혹은 감탄.
입속의 연한 점막을 조심성 없이 마구 훑어나가는 두 개의 혀는 각자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엔 비비 꼬여 들쑥날쑥한 아이스바처럼 휘감겨, 마치 누군가 하나로 묶어주길 바라기라도 하듯 서로를 갈구했다.
입술 밖으로 혀를 꺼내 뱀처럼 날름거리며 혀끝을 마주 비비기도 했다. 절대 고상하다고는 못 할 키스였지만, 내 침실에서 그 사람과 살을 부비는 시간에 고상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끈적하게 들러붙어 맨살을 부벼대는 우리의 혀를 내려다보는 그 사람의 눈빛 역시 고상하기는 틀려먹었다.
나는 과감하게 셔츠 버튼에 손을 댔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그 사람의 날개뼈를 더듬으면서 다른 한 손만으로 툭툭, 버튼을 풀어나간다. 처음엔 목을 약간 뒤로 젖히며 움찔하던 그 사람은 곧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내 등을 잡아 비틀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대로 겨드랑이 아래를 훑어 가슴까지 옮겨온 손바닥이 둥근 원을 그리며 내 어깨와 가슴 주변을 부드럽게 문지른다. 마치 근육을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처럼. 살살 피부 위를 스쳐 가듯이 애를 태운다. 그사이 나는 그 사람의 셔츠 버튼을 전부 풀어냈다.
그토록 바라던 주세영의 가슴이 눈앞에 활짝 열려 있는데도 선뜻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기껏 단추까지 다 풀어놓고는 벌어진 앞섶만 붙잡고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그 사람이 내 입술에 붙은 자신의 입술을 떼면서 몸을 더 밀착시켜왔다.
“너, 몸이 너무 좋아서 쪽팔린다.”
어깨를 붙잡고 있던 그 사람의 손이 미끄러지며 가슴 위를 더듬었다. 이번엔 근육 하나하나를 점검하듯 꼼꼼하다. 살결 위를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 끝이 간지럽다.
“무슨 소리야. 당신은 이러면 안 어울려. 지금이 딱 좋아. 섹시 터져.”
내 코끝쯤에서 그 사람의 코가 시작되는 7센티 차이. 가까이 다가선 그 사람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니 다 풀어 헤쳐진 셔츠의 단추 사이로 보이는 가슴이 어둠 속에서 반들반들 윤기를 흘리고 있었다. 내가 선천적으로 근육이 잘 붙고 체격이 있는 편이라 크고 단단한 근육을 가졌다면, 그 사람의 근육은 무두질을 오래 해줘 유연해진 가죽처럼 뼈대에 착 달라붙어 탄력 있고 민첩했다. 약간 야윈 듯하지만 잔 근육이 매끈하게 붙어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나고 옷을 벗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예쁜 몸. 빨리 다 벗고 알몸으로 끌어안고 싶었다.
“벗어봐. 좀 보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셔츠 안으로 내 가슴을 문지르고 있던 손목을 꺾어 바깥쪽으로 젖히면서 셔츠를 찍찍 늘린다. 나는 열여덟인데 자기는 서른한 살이라서 안 된다던 사람이 내 몸을 궁금해한다. 벗으라면 벗겠어요. 그리고 벗길 겁니다.
혀를 쓰지 않고 오직 입술만을 겹쳤다 떼는 얕은 입맞춤을 나누면서, 그 사람의 것을 풀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일곱 개의 버튼을 풀어나갔다. 셔츠의 앞섶이 완전히 서로 분리되자 그 사람은 내 입속에 혀를 넣었다. 그리고 손을 밀어 올려 어깨 너머로 내 셔츠를 밀어냈다. 나는 재빨리 양쪽 소매를 잡아당겨 셔츠를 바닥에 떨구고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겨내듯 그 사람의 셔츠를 확 젖혀버렸다.
그 사람은 턱을 비틀어 더 깊숙이 입술을 겹치면서 셔츠를 벗어버리려 팔을 털었다. 내 입속에서 그 사람의 혀가 몸을 꼬았다. 그럼 나는 내 혀 위에 올려진 그 사람의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쥐어짜듯 강하게 빨아들인 뒤에 놓아주었다.
셔츠를 벗은 우리는 곧장 상대의 버클에 손을 댔다. 꽉 맞물려 있던 쇳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풀려나가는 소리가, 맨발로 보드라운 진흙 위를 걷는 것처럼 잘박잘박 간지러웠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벨트를 풀어내는 그 사람의 손을 잠깐 멈추게 했다.
“놀라지 마요. 나 조금 커졌어.”
그 사람이 남자인 내 몸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아직도 조금 남아 있었다. 나도 남자는 처음이면서 이상하게 자꾸 그 사람만 걱정된다. 내가 너 먼저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네 몸도 많이 상상해봤고, 집에 혼자 있을 땐 너 생각하면 막 거기가 딱딱해지고 그랬으니까. 근데 너는 날 어디까지 상상해봤을지 알 수 없어서. 같은 남자의 발기한 성기를 보면 푸시식 식어버리는 게 아닐까 무서웠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방해하지 말라는 듯 내 손을 탁 쳐내고 시원하게 단번에 지퍼를 내렸다.
“뭘 신경 써? 안 커졌으면 그건 그거대로 섭섭해.”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러네. 내가 아무래도 주세영을 너무 선비 취급했나 봐. 이제 마음 놓고 막 그 사람의 지퍼를 내리려는데 벌써 아래가 허전해졌다. 벨트 버클의 무거운 머리에 딸려 순식간에 아래로 뚝 떨어진 내 바지는 어느새 발목에 걸쳐져 있었다.
“이게 조금 커진 거야?”
기절초풍할 뻔했다. 주세영이 꿈틀꿈틀 딱딱해진 내 페니스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속옷 위로 스윽 쓰다듬어 올렸다. 헉, 숨이 틀어막혔다.
“당신, 막 이래도 돼?”
어금니 꽉 물고 주세영의 손목을 쥐었다.
“뭐가.”
“나 자극해도 되냐고.”
“너 그럼 뭐 하자고 방에 온 건데? 빨리 내 것도 벗겨봐.”
숨넘어가기 직전에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희망을 흘려 넣어주시던, 조련의 달인, 밀당 주세영 선생은 어디로 가셨나요? 출장 중이신가? 그럼 오늘 내가 딱 세 번 뺄 때까지만 그분 좀 오지 말라고 해주실래요? 전 지금의 주세영이 너무 좋거든요.
“난 당신 생각해서 페이스 조절하고 있었지. 손해 봤어.”
그 사람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고 헐거워진 팬츠 뒤로 손을 찔러 넣었다. 그 사람이 흠칫 몸을 털었지만 개의치 않고 속옷 위로 엉덩이를 움켰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죽여주는 엉덩이다. 한 손에 다 움켜지지 않을 정도로 살이 올라 있으면서도 탄력이 빵빵하게 올라 손에 쫙쫙 달라붙는다. 나물을 무치듯 손안에서 살살 조물거리자 그 사람이 내 몸통을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흥분과 긴장으로 촉촉해진 가슴과 가슴이 찰싹 달라붙었다. 그 사람의 어깨 위로 고개를 숙이니 팬츠 안에서 꿈지럭거리는 내 손이 내려다보였다.
다른 한 손까지 찔러 넣고 그대로 손끝으로 바지를 끌어내렸다. 엉덩이 아래까지 밀어내니 그 다음엔 저절로 뚝 떨어진다. 그 사람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는 내 손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실해, 완전 야해. 엎어놓고 팡팡 두드려주고 싶은 엉덩이야.
“엉덩이 죽인다.”
중얼거리듯 내뱉으며 두 손으로 양쪽 둔부를 한쪽씩 붙잡고 주물럭거리다가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손끝으로 고환을 툭툭 자극했다.
“으읏.”
암벽 타듯 내 등을 긁던 그 사람의 손이 한순간 깊게 박혔다. 딱딱해진 두 페니스가 얇은 속옷을 사이에 두고 서로 쓸렸다. 그 마찰에 모든 것이 정지했다. 생전 처음 맛보는 전율이었다. 거센 전류가 몸 안을 단번에 뚫고 지나간 듯 저릿저릿했다.
나와 같은 구조의 성기가 내 성기와 닿는다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자극.
엄청난 충격에 잠시 멈춰 있던 우리는 상대를 끌어안고 있던 손으로 서로의 속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발끝으로는 양쪽 팬츠를 번갈아가며 눌러 발을 빼냈다. 속옷 안에서 엉덩이부터 끄집어낸 뒤 옆구리 아래를 쑥 잡아 내리면 탱탱하게 부어오른 페니스가 튀어 올랐다. 살짝 진동하는 느낌만으로도 아플 정도로 예민했다.
얌전한 검은색 드로즈에 감싸여 있던 그 사람의 페니스 역시 벌겋게 익은 얼굴을 드러냈다. 잘 다듬어진 몸에서 불거져 나온 윤기 흐르는 검붉은 성기가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주세영이 나 때문에 발기했다. 주세영도 발기를 하는구나. 아, 야해. 그냥 페니스만 달려 있어도 야한데 그걸 또 막 세워. 아, 주세영 야해 죽겠어.
“속옷은 화려하고 야한 게 좋다며? 나 좀 기대했는데.”
옷은 전부 벗고 양말만 신은 채 속옷은 허벅지 어디쯤에 엉거주춤 걸치고 페니스를 빳빳이 세운 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법도 한데 전혀 웃고 싶지가 않았다. 종아리 중간까지 감싸주는 얇고 고급스러운 감촉의 양말은 바지를 벗던 중에 그랬는지 한쪽이 좀 더 아래로 말려 내려가 있다.
“넌 이렇게까지 크단 얘기 없었잖아.”
“왜요? 내 거 크면 곤란해? 왜?”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둘이 첫날밤부터 삽입을 시도했다가 나는 나대로 찌부되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피 보는 일을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 사람이 내 것을 받아줄 결심을 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입맛 확 당기는 소리이긴 했다. 거기가 크다고 불평하는 건 내숭이야, 아니면 나 부추기려고 그러는 거야?
퉁퉁 부은 페니스를 앞세우고서야 살짝 쑥스러워진 듯 시선을 피하는 그 사람 앞으로 한 발 다가서 코끝에 입을 맞췄다. 가까이 서기만 해도 페니스가 서로 스쳤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딴딴하고 길쭉한 두 살덩이가 서로를 향해 이를 세우고 있었다. 싸우지 마, 사이좋게 지내야지. 니들이 싸우면 아빠가 마음이 매우 아프단다.
“얘들 뽀뽀 시켜주자.”
우리는 다정하게 이마를 맞대고,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는 두 녀석을 내려다봤다. 내 건 참 내 몸답게 생겼고, 그 사람 건 참 그 사람 몸처럼 생겼다. 내 것만큼 두껍진 않지만 어디 가서 빠질 정도도 아니다. 호리호리하면서도 다부진 체형과 균형을 이룬다. 어떻게 보면 반전 몸매다. 평소의 반듯하고 깐깐한 이미지를 생각하면 왠지 페니스의 생김새가 시원찮을 것도 같은데 이렇게 잘빠진 아드님을 두셨다니, 역시나 예측불허의 주세영.
“이렇게 세우고 귀여운 척하고 싶냐?”
“에이, 좀 귀여워해주라, 세영아.”
내 것의 뿌리 쪽을 쥐고 시험 삼아 그 사람의 것을 툭 건드려봤다. 등골에 전류가 흐른다. 난 지금 전도체다. 뭐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찌릿찌릿해? 그 사람 역시 뭐가 막 올라오는지 미간을 일그러뜨리면서 입술을 꽉 깨문다.
툭, 툭, 건드리고 빠지면 그 사람의 물건이 바르르 떨렸다. 어디를 어떻게 자극하면 눈이 뒤집어지는지, 같은 걸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훤히 알고 있었다. 매끈하고 불그스름한 그 사람의 것을 고환에서부터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 고환의 크기까지도 아주 이상적이다. 음경 아래에 바짝 올라붙은 그것은 주무르는 내 손안에서 탄력적으로 반응했다.
“흐으… 읏.”
그 사람이 숨을 흐느끼며 내 오른쪽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단단히 독이 오른 내 페니스를 촉촉한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엄지를 조이면서 아래에서부터 쭉 훑어 올린다. 그 사람의 어깨에 팔을 둘러 꽉 붙잡았다. 이를 악물고 있어서 입으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내 손안에서 그 사람의 것이 점점 더 딱딱해지고, 그 사람의 손안에서 내 것은 펄펄 날뛰기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 아래로 눈을 내리깐 채 그것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것을 내 음경에 바짝 갖다 대고 문질렀다. 그 사람 역시 내 것을 위아래로 움직여 자신의 것에 더 밀착시키려 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던 두 짐승은 이번엔 상대를 집어삼키고 싶어 안달이었다. 위로 바짝 세운 페니스를 하나로 겹쳐 우리는 연신 쓰다듬었다. 고체로 된 둥근 막대처럼 단단한 살덩어리들은 손안에서 자꾸만 서로 헛돌았다. 툭툭, 어긋나는 그 느낌에 발뒤꿈치까지 힘이 들어갔다.
“진짜 야하다…. 한 살만 더 어렸을 때 이런 거 봤으면 나 변태 됐을 거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을 만큼 강렬한 시각적 자극이었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실감할 수가 없는 낯선 쾌락이었다. 마주 선 두 가슴은 거친 호흡으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묽은 액체를 뚝뚝 흘리면서 서로 몸을 비비는 페니스는 그 어느 때보다 팔팔해, 내 몸에서 뚝 떨어져 나가 저 혼자서도 존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이 내 목의 뿌리에 이마를 박고 가슴을 짙게 애무해왔다.
“동주야… 가고 싶어…. 답답해….”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줬다.
“하여간, 조련질 쩔어요.”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부벼댔다. 엉덩이, 등, 어깨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문지르고 쥐어뜯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몸을 밀착시키기 위해 어깨를 비틀어 서로의 품을 파고들고, 짓이기듯 거칠게 엉덩이를 문지르고, 다리를 들어 올려 상대의 허벅지에 감았다. 땀이 배어 나와 미끈미끈해진 몸은 척척 달라붙었다. 잔뜩 팽팽해진 페니스가 서로 밀고 밀리면서 비껴나가는 감각에 귀두 끝이 바짝바짝 타는 것처럼 약이 올랐다. 할 수 있다면 둘을 하나로 감아놓고만 싶었다. 하다못해 이 욕망에 충실한 근육이 혀만큼만 유연했다면. 야한데, 죽도록 야한데, 갈 듯 말 듯 뜸을 들이니 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완전히 밀착돼 있는데도 더 강한 밀착이 절실했다. 내 힘을 그 사람의 몸에 온전하게 퍼부을 수 있는 체위가 필요했다.
“아, 아….”
숨넘어갈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내 어깨를 붙잡는 그 사람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어깨와 팔뚝에 핏줄이 솟을 정도로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패팅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대로 허리를 들었다 놨다 튕기면서 그 사람에게 몸을 치댔다. 그 사람의 딱딱한 골반에 나를 갖다 박는 감각만으로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아랫배 사이에 눌려 있던 페니스와 페니스 사이에 공기가 새어 들어가 허리를 부딪칠 때마다 민망한 소리가 났다. 그 사람의 페니스가 아랫배를 갈기고, 절대 하나로 겹쳐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살덩이들이 서로를 집어삼키고 싶어 애를 쓰고 있었다. 미친놈이 될 것 같았다.
“으윽. 윽. 크윽.”
막판엔 내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몰아붙이는 바람에 둘 다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퍽퍽, 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이 세계에는 손안에 꽉 쥔 그 사람의 벗은 육체만이 존재했다. 사지를 뒤틀면서 요란하게 사정했다. 사정하는 도중에도 허리를 한껏 뒤로 젖혀 그 사람의 고환과 내 고환을 맞대고 흔들었다. 시커먼 정액이 나올 것 같은 흥분이었는데 평소처럼 뽀얀 색이었다.
한바탕 사정을 했지만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갈증은 더욱 깊어져 화가 날 지경이었다. 싸다 만 느낌이었다. 좋을 줄은 알았는데 해보니까 너무 좋았다. 더 좋은 걸 하고 싶어졌다. 그 사람의 몸에 나를, 좀 더 마음껏 치대고 싶었다. 아무것도 조절하거나 아끼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우동주 그 자체를 전력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 ZOO SE YOUNG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침착하다고 평가했다.
냉정해 보인다며 술자리에서 빈정거린 대학 동기도 있었고, 맺고 끊는 게 분명해서 얘기가 통할 것 같다며 먼저 접근한 연상의 여자도 있었다. 직장 동료들은 나를 초식남이니 토이남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한 가지 성향으로 명쾌하게 정리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경험을 쌓으며 복잡한 인격을 형성해나간다.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할 때가 많다. 30년 동안 나라고 믿어왔던 가치관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은 아니었다. 내가 남자와 연애를 하려 하고 있는 이 형국에 더 이상 뭘 한들 놀라울 게 없었다.
사회생활 5년 차의 서른한 살 주세영은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자신을 숨길 줄 알고, 생각해봤자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두뇌 속의 냉동고에 넣어 꽁꽁 얼려버리기도 했다. 연애를 꾸준히 해온 편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완전한 충만함을 느껴보진 못했다.
우동주에게서는 그 충만함을 느꼈다는 성급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분위기와 비슷한 박자와 비슷한 느낌으로 반복되기만 했던 발전이 없었던 나의 연애기에 새로운 리듬을 끌어온 것만은 분명했다.
나와 같은 구조의 육체와 섹스를 하려 한다는 긴장과 흥분과 걱정 역시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금 우리가 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 다음을 이어가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을 것같이 생각되기도 했다.
남자끼리 하는 섹스의 클라이맥스가 뭔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우동주는 내 몸 ‘어딘가’에 자신을 밀어 넣고 그 클라이맥스를 느끼고 싶겠지. 이렇게 저렇게 다 고려해 봐도 저 두껍고 커다란 놈이 내가 자기를 울려주길 바라고 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핑크색은 여자 색깔, 파란색은 남자 색깔. 그 비슷한 개념을 끌어와 내 남성성이 훼손되는 건 싫다며 버틸 생각은 없었다. 내가 우동주의 고백을 받고 고민했던 것도 뒤쪽의 순결을 사수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많은 핸디캡을 각오하고 남자와 사귀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단지 사귈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뿐 아니라 그 이후에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사항들까지 모두 포함한 각오를 의미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물론 섹스까지 포함해서.
우동주의 것을 내 엉덩이에 넣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동주의 엉덩이에 내 것을 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난 그저 우동주의 벗은 몸이 궁금했고, 내 벗은 몸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가 궁금했고,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사춘기 시절 이성의 성기에 가졌던 궁금증만큼이나 우동주의 페니스가 궁금했다. 일단 내가 바라는 것은 그 정도였고 만약 우동주가 나와 달리 그 이상을 원한다면 연인으로서 거기에 응해줄 생각이었다.
침실은 거실보다 한층 더 아늑했다. 문 오른쪽으로는 간이 책상으로 쓰는 듯 여러 가지 책과 자료가 어질러진 티테이블과 오디오 세트가 놓여 있고, 욕실과 드레스룸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문 왼쪽으로는 거실에서부터 쭉 이어진 것 같은 널찍한 전면창 앞에 2인용의 작은 소파 세트가 배치되어 있고, 그 옆쪽으로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자리에 침대가 있었다.
다리가 없는 젠 스타일의 심플한 바디 위에 두툼한 매트리스가 두 겹으로 높이 깔린 넓고 쾌적해 보이는 침대였다. 다리 없이 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있으니 다 큰 장정 둘이서 난리를 피워대도 침대가 무너질 일은 없겠네, 따위의 생각을 했다.
“샤워, 하고 싶어요?”
분명 아늑한 침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동주와 눈이 마주치고 그 입에서 샤워라는 말이 나온 순간, 만 19세 미만은 출입금지를 시켜야 하는 성인전용 침실이 되어버렸다.
침실이라는 아주 사적인 공간에 둘만 있다는 건, 호텔룸에서 관계를 가질 때의 어쩔 수 없는 허무함과도 달랐고, 좀 전까지 우리가 함께 있었던 거실의 불안정한 개방성과도 달랐다. 여기에서 내가 한 일들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은 비밀성이 거기에 있었다.
어깨와 환상적인 비율을 이루면서 역삼각형으로 떨어지는 우동주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하고 싶다면, 하게 해줄래?”
“아니, 그냥 예의상 물어봤어.”
난 네가 예의 있는 놈이라 좋더라. 진짜 샤워하라고 했으면 김 샐 뻔했잖아.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평균나이 29.5세가 아깝지 않게 타이밍을 포착한 우리는 서로의 몸에 달려들어 입술을 파고들었다.
양보 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잡아 뜯듯 상대의 셔츠 자락을 팬츠 안에서 끄집어내 손을 밀어 넣고 등을 헤집었다. 우동주는 옷을 입고 있어도 근육의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 좋은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과 그 근육의 움직임을 직접 손끝으로 더듬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수많은 톱니바퀴가 오차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야만 작동하는 거대하면서도 정교한 기계처럼, 우동주의 등은 내 손바닥 아래에서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파도를 일으키며 물결쳤다.
날개뼈 부근의 근육과 어깨의 삼각근, 넓게 퍼진 가슴 근육이 마치 하나로 이어진 갑옷 같았다. 우리 헬스클럽 트레이너의 불룩하게 튀어나온 대흉근은 좀 징그러웠는데, 널찍하고 탄탄하게 벌어져 완만한 갈매기 모양을 그리는 우동주의 가슴은 딱 좋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른 남자의 가슴을 만져보기는 처음이었다. 거칠지만 건강한 피부결 아래 퍽퍽한 질감은 가볍게 주먹으로 두드려 강도를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로 단단했다. 아주 작은 돌기로 뭉쳐진 유두가 손바닥에 걸려왔다. 빨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우리는 성질이 급한 어린애들 같았다. 고상하게 포크를 쓸 줄 모르고, 손으로 케이크를 움켜쥐고는 입가에 크림 범벅을 해가며 쑤셔 넣는 어린애.
스물여덟 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몸을 소유한 우동주는 자기의 발기한 페니스 앞에서 내가 제정신이 돌아올까 봐 걱정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커졌다는 우동주의 말에 흥분한 게 내 현실이었으니까.
발기한 남의 페니스를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는데, 연인으로서도 훌륭한 페니스였지만 같은 남자로서도 부럽고 탐날 만큼 크기, 빛깔, 굵기가 환상적이었다. 딱 제 얼굴과 몸처럼 생겼다. 음. 아니, 반듯하게 생긴 제 얼굴보다는 훨씬 노골적으로 밝힐 것 같은 페니스였다.
그의 페니스가 공격적으로 내 페니스에 엉켜 왔다. 목을 물어뜯을 빈틈을 노리는 독을 가진 뱀처럼 사납고 전투적이었다. 서로 뒤엉켜 비벼지는 두 페니스에서 우리는 눈을 떼지 못했다. 한 살만 더 어렸을 때 이걸 봤으면 변태 됐을 거라는 우동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몸이 저절로 꼬였다.
상대의 몸을 자신의 몸속에 밀어 넣으려 하는 사람들처럼 자꾸만 더 등을 끌어당겼다. 미끈미끈해진 몸에 손가락이 미끄러졌지만 우리는 포기를 모르는 도전자였다. 살기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절박함으로 서로의 몸을 옭아맸다. 나는 한쪽 다리를 들어 우동주의 허벅지에 감고 마구 비볐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했다. 엉덩이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우동주의 브리프를 발가락으로 끌어내리고, 바짝 곤두서 딱딱하게 굳은 엉덩이 근육을 쥐어뜯고, 내 페니스가 우동주의 것에 더 밀착하도록 몸을 들이밀었다. 곧 갈 듯 말 듯, 딱 한 모금이 모자라게 입안으로 떨어지는 쾌락에 몸에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커다란 몸에서 나온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우동주의 유연한 탄력이 그대로 내 몸을 진동시켰다. 양쪽 골반에서부터 사타구니를 향해 V자를 그리며 내리꽂히는 우동주의 장골이 나를 때릴 때마다 페니스가 앞뒤로 펄떡거렸다.
“으윽. 윽. 크윽.”
우동주 역시 꽤 흥분한 듯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패팅 속도가 점점 빨라질수록 내 엉덩이를 움킨 우동주의 손아귀에도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
선 채로 서로를 꽉 끌어안고 쏟아놓은 첫 사정 뒤에도 우동주의 페니스는 반도 시들지 않은 채였다. 무언가를 억제하듯 나를 꽉 안은 채 진정되지 않는 숨을 고르려 애를 쓰는 우동주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나, 엎드릴까?”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오르락내리락하던 우동주의 어깨가 멈췄다.
“무슨 뜻이야?”
“뭐가 무슨 뜻이야. 너 힘들잖아, 지금.”
남자끼리의 삽입 섹스에 어디를 이용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그곳의 근육을 풀어줘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어쩌면 오늘 하루 안에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고. 하지만 시도를 해볼 생각은 있었다. 내가 그런 마음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이 근육질의 멋진 곰돌이는 감격해주지 않을까.
“싫어? 거기까진 됐어?”
껴안은 채로 가만히 대답이 없길래 어깨로 가슴을 툭 치면서 한 번 더 묻자, 내 어깨를 꽉 붙잡아 제 몸에서 떼어낸다. 그리고 제법 복잡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본다.
“나 주세영 무서워지려고 한다.”
“뭐가, 또.”
“너무 협조적이잖아. 다 끝나고 나서 한 번 자줬으니까 됐지? 뭐 이러는 거 아니죠?”
내가 어딜 봐서 그런 배짱이 있는 놈으로 보이냐. 근데 그 말을 하는 우동주는 정말로 그런 사태를 걱정하는 것처럼 심각해 보여서, 정말 나를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다. 원래 누굴 좋아하면 뇌가 소심해지고 평소엔 안 하던 걱정들도 사서 하게 되니까. 나도 우동주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했던 것처럼.
“협조적이어도 문제냐? 그럼 나는 뭐 성욕도 없을 줄 알았어? 너만 남자 아니야.”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과장이었다. 발기가 잘되지 않거나 너무 빨리 사정을 해버려 곤란했던 적도 없지만 주체 못할 강렬한 성욕에 휘말려 하룻밤을 섹스로 하얗게 지새워본 적도 없었으니까. 다만 오늘은 새로 알게 된 장난에 평소보다 조금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밤도 샐 수 있을 것 같았고, 단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우동주의 저 무시무시한 주니어를 내 엉덩이에 가져다 대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우, 성욕이래… 성욕이래….”
우동주가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난 뭐 성욕이란 말도 입에 담으면 안 되는 사람이냐? 이게 멀쩡한 사람을 아주 고자 취급하고 있어. 나 쪽팔려서 이런 실랑이 오래 못 해.
“해, 말아?”
“해.”
정색하고 즉답이 나온다. 이럴 거면서 사양하는 척은 왜 했는지. 나를 보는 눈이 변한다. 더는 시원시원하고 유쾌한 모범 청년의 눈이 아니다.
속옷을 완전히 벗어 조그맣게 말아 허물처럼 벗어놓은 팬츠 위에 툭 던졌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양말도 벗었다. 침착한 척 행동했지만 우동주가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손이 엇나갈까 봐 긴장됐다. 양말 벗고 있는 남자를 그런 넋 나간 표정으로 쳐다보다니, 너도 콩깍지가 어지간하구나.
나만 쳐다보고 있던 우동주도 뒤늦게 제 브리프와 양말을 벗어 던졌다. 완전한 알몸이 된 우동주의 페니스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의복이라고 할 만한 걸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으니 방금 문명 세계에 도착한 야생의 타잔이라 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우락부락하기보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근육들은 헬스클럽의 웨이트트레이닝 기구들을 써서 만든 게 아니라 바위를 들어 올리고 나무에 기어오르고 계곡에서 수영을 하는 동안 저절로 다듬어진 듯 인위적인 느낌 없이 자연스러웠다. 아마 단백질 음료 같은 건 입에도 안 대봤겠지. 저런 게 이제 내 거인 거다. 내 몸이 아닌데도 내 거인 거.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두께가 비슷한 섹시한 입술이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반은 블라인드에 가려지고 반만 드러나 있는 전면창 때문에 침대 위에는 비스듬히 그림자가 늘어져 있다. 침대 위를 무릎으로 기어가 그 중간쯤에 엎드렸다. 내 뒷모습이 우동주의 눈에 훤히 드러나 있을 걸 생각하니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아마 그림자가 내 등허리쯤을 사선으로 가르고 있겠지. 한 사람분의 무게가 침대 위로 올라서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종아리에서부터 허벅지를 지나 엉덩이를 가볍게 한 번 주무르고 허리와 등줄기를 쓰다듬으며 올라온 손이 내 어깨를 둥글게 문지른다.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편안해 신음이 흘렀다. 계속 만져줬으면 했다.
“줘도 못 먹는 놈 소린 듣기 싫지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단 소린 더 싫으니까, 끝까지 가는 건 킵해놓을게요. 공부 열심히 해서 꼭 당신 울려줄게.”
엎드린 내 몸 위에 제 몸을 겹치고는 무슨 굉장히 달콤한 사랑의 고백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귀에 대고 속닥거린다. 앞뒤 없이 덮어놓고 덤벼들어 저 혼자 흥분해서 헐떡거리다가 끝나버리는 그런 시시한 놈은 아니다 이거지?
우동주의 말이 맞았다. 우린 더 이상 갖다 박고 배출하는 게 섹스의 전부인 서툰 나이는 아니었다. 진득한 잼 같고 질퍽질퍽한 머드 같고 가끔은 탄산수 같기도 한 섹스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나이였다.
“그래, 열심히 해봐. 쉽진 않겠지만 응원해줄게.”
엎드려 눈을 감은 채로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도 이왕 엎드려준 김에 조금만.”
엎드린 내 몸 위에 조심스럽게 제 몸을 겹친 우동주는 내 엉덩이 사이의 골에다 자신의 페니스를 비비적거렸다.
“공부하고 오겠다며.”
하얀 커버가 씌워진 베개를 끌어다 가슴 아래에 넣고 끌어안으며 힐끔 뒤를 돌아봤다. 오늘의 모든 일들이 그렇긴 했지만, 내 엉덩이에 다른 남자의 페니스가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이 생경했다. 레그 프레스를 열심히 하면서 대둔근을 키운 건 옷태를 살리고 발기의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서였지 그 사이에 다른 남자의 페니스를 파묻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예습, 예습.”
우동주가 내 가슴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입을 맞췄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엉덩이 사이의 여린 피부에 물린 묵직한 존재감에 나 역시 다시금 흥분하고 있었다. 페니스끼리 맞대고 비비면 기절하게 좋다는 것까지 알게 됐으니 이번엔 또 어떤 신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감으로 온 신경이 두근거렸다.
“아….”
심해어류처럼, 혹은 배부르게 먹이를 먹고 난 후 느긋해진 포유류의 대형동물처럼, 우동주가 느릿느릿 몸을 풀기 시작했다. 낮고 길게, 굉장히 기분 좋은 듯한 신음을 흘리면서 엉덩이와 허리에 파도를 일으켜 조였다 풀었다 페니스를 자극해나간다.
무거웠다. 우동주는 상체의 무게가 내게 쏠리지 않도록 팔꿈치로 버티고 있는데도 페니스뿐만이 아니라 그 몸 전체가 나를 누르고 비트는 것 같은 육중함이 느껴졌다. 물리적인 무게라기보단 아마 지금 내가 느끼는 쾌락의 무게일 것이다.
흥분한 우동주의 다리가 침대 시트 위를 비비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베개 아래에 손을 넣고 얼굴을 묻었다. 우동주의 페니스를 조금이라도 더 조이기 위해 엉덩이에 바짝 힘을 주었다. 골 사이로 굵고 둥근 살덩이가 드나드는 감각이 적나라했다. 피부 위를 쓸고 지나가는 짙은 음모의 결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엉덩이 아래부터 부드럽게 쳐올리는 골반의 힘도.
나른하게 몸의 바닥부터 달아올랐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층이 두터운 흥분이었다. 가슴을 더듬는 우동주의 손바닥이 끈끈하게 움직이다 깔고 누운 배 아래로까지 비집고 들어가 손가락 끝으로 음모를 문질렀다. 내 입술에서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것 같은 신음이 흘렀다.
엎드려 있지 않았다면 쑥스러움과 당혹감에 우동주를 발로 차버렸을지도 모른다. 싫은 게 아니다. 너무 좋아서, 너무 느끼고 있는 나 자신에게 배신감이 들 것 같았다. 우동주의 몸이 꿈틀거릴 때마다 시트 위에 쓸리며 자극당한 페니스가 지조 없이 두 번째 사정액을 장전하고 있었다.
쿠션감이 좋은 매트리스 덕분에 다행히 삐걱거리는 소리까진 듣지 않아도 됐지만 살이 살을 때리는 찰진 소리와, 시트가 밀리는 소리와, 코만으로는 부족해 우리가 입으로 헉헉거리며 호흡하는 소리가 청각을 뭉근하게 달구어 휘젓고 있었다.
착착착착, 진짜 삽입이라도 한 것처럼 내 엉덩이에 제 몸을 털어대는 우동주의 허리놀림이 점점 더 빨라졌다. 중간중간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패팅질을 멈추고 허리를 뒤틀면서 골 안쪽으로 페니스를 더 깊이 밀어 넣기도 했다.
우리는 말도 없었다. 나중엔 나도 팔을 뒤로 뻗어 우동주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움켜쥐었다. 내 가슴과 배와 팔을 오가면서 피부를 벗겨낼 듯 아프도록 애무하는 우동주의 손 위를 겹쳐 내가 원하는 곳으로 잡아끌기도 했다.
우동주가 내 귀를 씹었다. 그의 타액으로 젖은 귓가는 몇 배로 예민해져 정신을 녹아내리게 했다. 이제까지 내가 섹스의 범주 안에 넣어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히 ‘역사’라고 할 만했다. 우동주의 몸이 내 몸을 흔드는 감각은 하나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았다.
“일어나 봐.”
결박하듯 내 겨드랑이 아래로 두 팔을 넣어 어깨를 꽉 붙잡은 채 하체에 모든 힘을 집중시키고 있던 우동주가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무릎을 꿇은 채 침대 위에 버티고 섰다. 내 페니스는 맞아서 붓고 멍이 든 것 같았다. 아플 정도로 땡땡해져 있었다. 뒤에 선 우동주가 나에게 더 바짝 붙어 섰다.
“안 넘어지게 버텨봐요.”
왼팔로 내 허리를 감고 오른손으로 내 페니스를 쥔 우동주는 엉덩이 골 사이에 페니스의 위치를 잡더니 제 몸을 나에게 들이박기 시작했다.
“윽.”
내가 무슨 침대에 고정된 기둥도 아니고 그렇게 부서지라고 밀어대는데 무슨 수로 버텨…. 그래도 안간힘을 써서 버텼다. 자존심과 오기로라도 버텼다.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뒤에서는 우동주가 내 엉덩이에 페니스를 묻고 헉헉거리지, 앞에서는 우동주의 손이 페니스를 붙잡고 흔들어대지. 1분도, 아니 단 10초도 참지 못하고 시트 위에 고꾸라져 사정할 것 같았다. 1분 동안, 아니 10분 동안이라도 계속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은 농밀한 쾌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야… 좀… 이제 가라….”
자존심이고 오기고 간에 페니스는 페니스대로 죽겠고, 커다란 놈이 와서 꽝꽝 부딪치는 걸 버티는 것도 더 못 하겠고, 근데 뒤에 붙은 놈은 아직도 쌩쌩하게 엉덩이를 비집고 있고, 백기를 흔드는 수밖에 없었다. 금방 갈 것 같아서 일어나라고 한 거 아니었어? 대체 얼마를 버티는 거야? 그래, 인마. 네 허벅지 굵다.
대답도 없이 한 팔로 배부터 가슴을 가로질러 단단히 껴안아 제 가슴에 내 등을 딱 붙이더니 이번엔 내 엉덩이에 골반을 완전히 밀착시킨 채로 진동을 주기 시작했다. 덜덜덜덜덜, 성능 한번 기똥차다. 내 어깨와 목덜미와 턱밑과 귀를 마구 씹어대면서 페니스를 짜내는데…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아― 야, 야.”
귀두 끝을 문지르는 손을 붙잡고 늘어져 봤지만 이미 시트 위에 사정액이 뚝뚝 떨어진 후였다. 내가 사정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의 동시에 엉덩이에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느껴졌다. 우동주는 내 페니스를 문지르면서 가슴과 배를 애무하는 동시에 무한대 기호 모양으로 허리를 둥글리면서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사정의 흥분을 즐겼다.
나는 방금 전에 정액을 흘린 것도 개의치 않고 시트 위로 푹 고꾸라졌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우동주가 그 위로 몸을 겹쳐왔다. 두껍고 무거운 그 몸은 아직도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뜨겁게 젖어 있었다. 엎드린 내 얼굴 위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낸 우동주는 이마와 뺨과 입술에 여러 번 입을 맞추며 후희를 즐겼다. 우리 둘의 숨이 잦아들 때까지 키스는 계속됐다.
“예습하다가 바로 시험 칠 뻔했네. 당신하고 하는 거 왜 이렇게 좋냐?”
우동주의 과장이 싫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웃었더니 또 한 번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나도.”
“…….”
눈을 감고 있으니 보이진 않지만 아마 지금 우동주는 또 일시 정지 상태겠지. 눈을 떴다. 내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내민 우동주가 신기한 구경거리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몰랐는데, 난 꽤 얼굴을 따지나 보다.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있으니 뽀뽀하고 싶네.
“나도 좋았다고.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분발해봐.”
우동주가 웃는다.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고 몇 번이나 내 입술을 제 안에 머금는다. 도톰한 입술이 닿으면 자꾸 저절로 눈이 감겼다.
“공부해서 S대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시한 농담에 입술을 마주 댄 채로 웃었다. 점점 웃음이 잦아들고, 우리는 아주 꼼꼼한 키스를 나누었다. 내 안에서 구르는 우동주의 따뜻한 혀를 느끼면서 연애를 처음 해보는 소년처럼 주책없이 가슴이 들썩거렸다. 충만함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 WOO DONG ZOO
봄비가 오고 있었다.
청승맞게 부슬거리는 비가 아니라 창에 부딪치며 토독토독 터지는 맛이 있는 제법 살이 오른 비였다. 며칠만의 숙면인지 몸속이 텅 빈 것처럼 가볍고 머릿속이 말끔했다. 좀 살 것 같았다. 요즘 주세영 때문에 마음고생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그래, 맞다, 주세영.
엎드린 채로 발끝까지 힘을 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던 나는 어젯밤을 떠올리고는 옆자리를 돌아봤다. 황홀했던 지난밤이, 폭주하던 나의 망상이 만들어낸 신기루가 아니었음을 생생히 증명하는 주세영이 내 곁에 잠들어 있었다.
자는 것도 참 주세영답다.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워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입술은 꼭 다물고, 얌전하게도 잔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울고 가겠어. 어젠 그렇게 화끈하게 풀어헤쳐 보이시더니 언제 그랬나 싶게 또 단정하고 말끔한 모습이다.
높은 콧등이나 숱이 많은 짙은 속눈썹, 또렷한 입술선 같은 것들을 한참 보고 있다가 문득 이불 위로 드러난 벗은 몸이 추워 그 사람 곁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뒤척거리며 자기 가슴 위를 가로지른 내 팔을 쓰다듬어줬다. 꿈같다. 주세영이 정말로 나와 사귀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장기전으로 돌입해서라도 끝내는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긴 했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기대 안 했었는데. 겉모습은 이 이상 현대적일 수 없으면서도 고지식한 걸로는 대쪽 같은 조선시대 선비 못지않은 주세영이다 보니까.
죽네 사네 울고불고, 협박에 동정심 유발에, 추해 보이고 없어 보이더라도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할 각오까지 했었는데, 분위기가 꽤 괜찮게 흘러갔다. 그 사람이 내게 보여준 반응들을 나의 기대가 부풀린 착각이라 치부해버리지 않고, 희망을 놓지 않길 잘했다. 다행이다.
“음… 몇 시야?”
방금 잠에서 깬 목소리도 섹시하다. 낮게 갈라진 목소리는 푸석푸석하고, 샤워한 뒤 그대로 잠든 탓에 머리카락은 까치집이고, 턱밑에는 파릇파릇한 수염까지 돋아 있는데, 그게 다 너무 귀엽고 섹시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동주 원래 게이설’이 유력하다. 어느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잠재적으로 양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니까, 남자에게 끌리고 좋아하게 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여태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이성애자로 살아오다 이제 막 남자와 사귀게 되었으면 아무리 좋아하는 상대라고는 해도 수염이나 다리털, 발기한 페니스 같은 것에는 약간이라도 위화감을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너무 자연스럽단 말이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 못해 그 모습을 보고 아침부터 아랫도리에 자극까지 받고 있으니 내 본래 성향이 심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1시 10분.”
그 사람의 가슴을 껴안고 옆얼굴과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면서 대답했다. 나와 같은 샴푸 향이 풍겼다.
어제 그 사람은 침실 쪽 욕실에서 난 거실 쪽 욕실에서 각자 샤워를 하고 시트를 교환할 기력조차 없어 둘이 같이 손님방으로 기어와 실신하듯 잠들었던 시간이 새벽 6시경. 2시쯤 집에 도착해 3시쯤 침실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겨우 사정 두 번 하는 동안 무슨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지. 어쩐지 눕자마자 딱 기절할 것 같더라.
술도 꽤 마셨고 긴장해 있었던 데다가 평소의 몇 배로 농축된 흥분을 느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고혈압이었거나 심장이 좀 안 좋았으면 쓰러졌을 수도 있다. 아… 어제 주세영 진짜….
“비 와?”
“어, 좀 더 잘래요? 블라인드 내릴까?”
“아니, 일어나야지.”
그러면서 내 뺨을 톡톡 두드려주는 그 사람의 손길은 완벽한 연인의 그것이었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대화들이 소중해 죽겠고, 내 옆에서 눈을 뜬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당신의 태도가, 우리가 그런 사이가 됐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순간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온 신경과 감각을 집중하게 되는 연애를, 스물여덟이 돼서야 내가 주세영하고 하는구나. 밤이 한 번 지나고 나자 그제야 조금 그런 실감이 났다.
“갈 거 아니죠?”
그렇게 물으면서 목덜미를 파고드니, 내 뺨을 쓰다듬어준다. 가지 말고 여기서 나랑 살면 안 되나? 나는 이런 연애 처음이라 정신 못 차리겠는데, 당신은? 당신은 나 말고 이전의 누구에게 이런 마음 느껴봤어? 아… 유치한 거 나도 알고,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런 생각 숨기고 싶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의자에 앉혀놓고 낱낱이 샅샅이 과거를 파헤쳐버리고 싶기도 하다. 나 진짜 원래 이런 애 아닌데. 과거 따위 넓은 아량과 쿨한 이해심으로 덮어주고 모른 척해주고 넘어가던 남자였는데.
근데 아니었어. 나 안 쿨해. 집착 쩔어요. 나 만나기 전에 누구랑 이런 사랑 했어, 주세영? 엉엉.
“당신 가고 나면 이거 다 꿈일까 봐 불안해 죽을 거야. 더 있다 가요. 어차피 토요일이잖아.”
그 사람이 가버린 뒤에 이 집에 혼자 남게 될 것이 벌써부터 겁났다. 물론 그 사람이 떠나도 우린 이제 분명한 연인관계고 불안해할 이유가 없었지만,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진짜 결혼하자고 할까? 결혼이 아닌 그 뭐라도 좋으니까 그 사람이 절대 나를 떠날 수 없는 장치 같은 걸 해두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거였다.
“커피나 한 잔 내려 와. 맛없으면 당장 옷 입고 가버린다?”
내가 내준 속옷 한 장 달랑 입고 나와 같은 침대 위에서 내 연인이 되어 나를 귀엽게 협박하고 있었다.
“테라스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마실래요? 경치 좋을 텐데.”
몸을 일으켜 침대를 반 바퀴 빙 돌아 그 사람 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 사람의 시선이 내게 따라붙었다. 그 사람 앞에서 속옷만 입은 채로 근육 쇼를 좀 보여줬더니 킥킥대면서 웃는다.
“일으켜줘.”
커피를 대령하라며 협박하더니, 이번엔 나를 향해 팔을 뻗으면서 어리광을 부린다. 정신 못 차리겠다, 진짜.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상체가 완전히 세워진 후엔 입술에 입술을 꾹 눌렀다.
매일 이렇게 눈뜨고 싶다고 하면 당신은 대답을 아끼면서 알쏭달쏭하게 웃겠지. 철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듯이. 얼른 당신이 내 속도를 따라잡아 줬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스타트라인에 함께 서준 이 감격과 행복을 질릴 때까지 만끽해야지. 이렇게 마음먹어도 지금뿐이고 내가 간절한 만큼 너도 날 좋아해달라고 또 그 사람을 볶아대겠지만, 일단 마음만이라도 그렇게 먹어보는 거다.
“옷 갖다줄 테니까 입고 나와요. 집에 가기 싫을 만큼 맛있는 커피 대령할게.”
간단한 실내복을 내주고 어느 때보다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린 다음 그 사람의 입맛에 맞춰 시럽을 넣었다. 이젠 주세영 컨디션에 따라 자유자재로 시럽 양을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피곤해서 조금 예민해져 있을 때는 약간 많이, 일에 집중해야 할 때는 약간 적게. 그리고 오늘처럼 내 연인이 되어 우리 집에서 함께 눈뜬 날에는 내 애정을 담아 듬뿍.
내 티셔츠에 내 트레이닝팬츠를 입은 그 사람이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주방까지 따라와 “뭐 도와줄 거 없어?” 하며 옆에 섰다. 홈웨어 차림이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슈트를 입고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내 티셔츠를 입고 있으니 역시 체격 차이 때문에 꽤 할랑하다. 주세영이 뭘 해도 감격스러운 나는 고개를 꺾어 또 입술을 겹쳤다. 애들도 아니고 무슨 뽀뽀를 이렇게 좋아하냐며 그 사람은 핀잔했지만, 진짜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닌 거 아니까 무시하고 한 번 더 쪽, 해버렸다. 이번엔 그 사람도 얌전히 입술을 내줬다. 다른 게 아니라 이게 날 도와주는 거예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갓 구운 파이처럼, 아무리 틱틱거려도 마음은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 날이 잘 드는 칼로 꼼꼼하게 시간을 들여 정갈하게 깎아 놓은 뾰족한 연필 같은 심성.
주세영은 그 연필로 글자 하나 쓰는 데에도 연필을 쥐었다 놓았다 한참을 고심했을 거다. 같이 게이가 되자는 세 살 연하의 꼬임에 오케이라는 답을 적기까지, 아마 나보다 더 현실적인 고민들을 했을 테고 나보다 더 큰 용기를 내야 했겠지.
하지만 이 사람은 혼자 묵묵히 그걸 해냈고, 일단 답을 적은 후에는 거기에 맞는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소심한 것과 신중한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주세영은 신중하고 또 그만큼 화끈하다. 소심한 사람은 절대 침대에서… 그… 됐다. 그냥 소심하다 치자. 남들이 알까 무섭다.
테라스로 나가기 전에 커피를 받친 쟁반을 그 사람에게 넘겨주고 접어놓았던 차양부터 펼쳤다. 테라스창을 열자 빗소리가 한층 더 가깝게 들렸다.
테라스 바닥에 깔린 갈색 데크는 축축이 젖어 짙은 고동색이 되었다. 한강 위로 낮게 드리운 하늘은 팔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고, 토요일 오후의 비 오는 거리를 느리게 달리는 차들은 여유로워 보인다. 그 사람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내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그 사람의 입술에서 태어난 연기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빗속으로 재빠르게 흩어졌다.
“이런 집에서 사는 놈이었을 줄이야. 집이 농사짓는다고 해서 그냥 그런 줄만 알았더니….”
머그잔을 입술로 가져가면서 그가 속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짜 우리 집 농사지어요. 농사는 아버지 대신 형이 이어받았다고 전에 말했었는데. 아버지는 건축 전공하셨거든요. 이것도 우리 아버지 작품.”
“아… 진짜?”
그 사람은 등 뒤로 고개를 돌려 새삼 주의 깊은 시선으로 창 너머 거실을 둘러봤다.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 집은 아마도 부유한 편이겠지만 그 부의 혜택을 비교적 다양하게 누리기 어려운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아니면 가정교육 탓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의식을 못 하고 자랐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대학을 가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물질적으로 윤택하다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그다지 이점으로만 작용하진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고.
일부러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그런 생각이 더 오버겠지) 웬만하면 그 사람만은 그걸 빼고 날 봐줬으면 했던 게 사실이다. 주세영은 그것 때문에 나에게 편견을 갖거나 나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냥 우동주라는 놈의 자체적 매력만으로 어필하고 싶었다. 사실 이건 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일구어오신 몫이고, 난 아직 첫 월급도 받기 전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내 재산은 한 푼도 없는 셈이기도 했다.
그 사람 곁으로 좀 더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툭 밀쳤다.
“연하에 잘생기고 일도 잘하고 거기다 이런 집까지 갖고 있고. 일등 신랑감이지 않아요? 당장 결혼해도 되겠지?”
“네 거냐, 아버지 거지.”
모르는 척, 눈을 맞추지 않고 커피를 홀짝인다. 결혼이라는 말에 솔직히 뜨끔했으면서. 잠깐 가슴 철렁 설렜으면서.
“이 집 내 거면, 그럼 결혼해줄래요?”
“남자끼리 결혼은 무슨.”
그 사람 말대로다. 남자끼리 결혼이라니, 어차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는데 유난일 뿐이겠지만, 난 지금 뭐라도 좋으니까 당신을 묶어둘 구실이 필요하다고. 이 집에 당신 하나 들어왔을 뿐인데 아귀가 딱 들어맞으면서 그림이 나오잖아. 여름엔 둘이 여기서 바비큐도 해 먹고 비치체어랑 파라솔 내놓고 드러누워서 책도 보고. 아, 휴가. 휴가 땐 뭐 하자고 하지? 어디 조용한 데로 여행을 가자고 할까, 아니면 그냥 집에서 둘이 뒹굴면서 푹 쉬는 게 좋을까. 이제 겨우 3월이고 아직 첫 월급도 못 탔는데 벌써부터 여름휴가 생각이었다.
“왜? 난 결혼하고 다를 바 없는 각오로 당신하고 사귀는 건데.”
“넌 그런 말 하기 쪽팔리지도 않냐?”
자기도 쪽팔린 게 아니라 쑥스러운 거면서.
“할머니한테 자리 양보하기 싫어서 자는 척하고 있다 걸리면, 그게 쪽팔린 거고. 좋아하는 사람하고 어렵게 겨우 이어졌는데 하고 싶은 말은 해야죠. 안 그래도 우리, 앞으로 장애가 많을 텐데 둘이서라도 솔직해지고 서로 얘기 많이 하고 그래야지.”
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은 내리는 봄비를 묵묵히 받아내면서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나는 그런 그 사람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든든하고 믿음직하면서도 동시에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이 사람하고라면 서로 존중해주면서 진정한 반려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신중한 주세영이 한참만에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머리 위의 차양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묻힐까 봐 곁으로 더 바짝 붙어 섰다. 우리의 어깨가 따뜻하게 겹쳤다. 사무실에 버젓이 있는 우산을 없는 척하면서 그 사람과 한 우산을 쓰고 걸었던 날이 생각난다. 자각은 없었지만 그때부터 나 음흉했구나.
“많이 답답할 거야, 나. 너처럼 솔직하지도 못하고 꽉 막히고 고집도 세서….”
“둘 다 안 그러니까 천생연분이죠. 그리고 고집은 나도 만만치 않아. 당신이 나 밀어내려고 하지만 않으면,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어.”
“…….”
오케이를 길게 말할 줄 아는 재주만 가진 줄 알았더니 침묵으로 오케이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주세영만의 이런저런 오케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놈이어서 참 다행이다. 앞으로도 당신 마음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무디고 멋없는 내 마음, 잘 다스려야지. 뾰족한 연필심처럼은 못 되더라도 적어도 당신이 그 연필로 원하는 걸 쓰고 그릴 수 있는 넓은 종이는 돼주고 싶어.
“지금이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왜요?”
“추우니까 안아달라고 하게.”
“…….”
저기요, 누가 솔직하지 못하다구요? 그냥 안아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 가슴 녹아내리게 안아달라는 이분은 누구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고수야…. 말끔한 겉모습에 속아 방심하고 있다가는 영혼의 마지막 한 톨까지 이 사람한테 탈탈 털리겠어….
반 정도 탄 담배를 비벼 끄고, 벌써 많이 식어버린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그 사람의 등 뒤에 가서 섰다. 팔을 둘러 날씬한 배 위에 깍지를 꼈다. 뺨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함께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 순간이 어떤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의 사랑보다 나에게는 벅차고 충만했다.
영화 속 사랑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눈물콧물 빼는 우여곡절 끝에 맺어진 사랑도 아니지만, 우리는 같은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 사랑은 아마 우리의 인생 전체를 뿌리째 뒤흔들게 되겠지.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탄하게 왔어도 어쩌면 앞으로 눈물콧물 빼는 스토리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혹시, 혹시 잘못되어 헤어지더라도 아마 이런 깊고 충만한 마음은 두 번 다시 가지지 못할 거고, 앞으로 더는 여자를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모든 위험만으로도 이미 우리 둘에게는 인생 전체를 건 사랑이나 마찬가지였다.
“와… 꽉 찬다….”
“그럼 품에 쏙 들어오는 사람 만나라.”
꽉 찬다고 해도 버겁게 넘치는 게 아니라 내 팔과 품에 꼭 맞춘 것처럼 빈틈없이 완벽했다.
“왜 그래요, 또. 그래서 좋다고. 나 원래 게이인 거 아닌지 의심된다니까.”
내 넉살에 그 사람이 픽 웃으면서 자신의 담배를 내 입술에 물려줬다. 친절하기도 하지. 주세영이 입술에 대주는 담배는 몸에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쪽쪽 빨아들였다.
“국수 해줄까요?”
깍지 낀 손에 더 힘을 주어 가까이 안으며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어. 근데 비 오니까 동치미 국물 말고 멸치 육수로. 따뜻하게.”
“오케이.”
천국 같고 무릉도원 같고 따뜻한 이불 속 같고 후후 불면 훌훌 날아가는 솜사탕 같은 주말이었다. 멸치 육수는 몇 번을 다시 우려도 쓰기만 할 뿐 맛이 없어서 결국은 그 사람에게 조미료 넣은 국수를 먹여야 했다. 다른 거 뭐 시켜 먹자고 해도 그 사람은 시켜 먹는 음식에도 다 조미료 들어간다며 내가 만든 국수를 맛있게 해치웠다.
8인용 식탁이 놓인 다이닝룸은 혼자 쓰기엔 너무 넓어서 항상 주방 보조 조리대나 거실 소파테이블 앞에서 밥을 먹곤 했는데, 그 사람과 나란히 앉아 김치 접시 하나 사이에 놓고 국수를 먹는 식탁은 꽉 차 보였다.
양치질을 하겠다는 그 사람을 욕실까지 뒤따라가 귀찮게 치대다가 결국 한 대 맞기도 했다. 세면대에 허리를 숙이고 입안을 헹궈내느라 무방비해진 뒷모습에 순간 불끈해져서 뒤로 다가가 그 사람의 엉덩이에 아랫도리를 꽉 밀착시켜 버리기도 했다.
“야, 뭐 해, 너!”
입술과 그 주변이 촉촉하게 젖은 채 얼굴이 벌게진 그 사람이 거울 속에서 나를 꾸짖었다. 하지만 나는 붙잡은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고 모르는 척 씩 웃었다.
“그냥. 각도 좀 보려고.”
각도라는 말이 뭐 그렇게 야한 말이라고 얼굴이 확 붉어지면서 내 손을 뿌리치려고 하길래 꽉 껴안고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각도가 뭐 어쨌는데요. 수학 수업은 어떻게 들었대? 삼각형 각도 구할 때마다 야한 생각 했어?
날 밀쳐내려고 하던 움직임이 점점 잦아들더니, 나중엔 내 혀에 자신의 혀를 얽으며 허리를 마주 끌어안아 왔다. 주춤주춤 뒤로 밀려가던 그 사람의 엉덩이가 세면대가 놓인 대리석 받침대에 닿았다.
“차가워….”
“옷, 새 걸로 줄게.”
키득거리며 얽힌 채 오래 장난쳤다.
아예 받침대 위에 걸터앉은 그 사람은 두 다리 사이에 나를 가두고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등을 쓰다듬으며 도발했다. 서 있을 때보다 눈높이가 낮아져 내 가슴쯤에 턱을 대고 올려다보는 시선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피부가 깨끗해서 그런지 가끔씩 묘하게 섹시할 때가 있긴 했지만 뭐랄까… 약간 의도적인 도발이 섞인 눈빛이었다.
이런 눈을 하기도 하는구나. 손으로 그 사람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입술과 뺨과 귓가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혀로 애무했다. 마사지하듯 목덜미 뒤를 부드럽게 주물러주자 살짝 더 머리를 젖히면서 내게 몸을 맡기듯 기대왔다. 음― 하는 깊은 신음이 기분 좋았다.
젖은 바지를 갈아입은 뒤에는 거실에서 놀았다. 그 사람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서로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딱 처음 시작하는 보통 연인들의 모습이었다.
“사실은 나한테 좀 호감 있었죠?”
“아니, 전혀.”
그렇게 딱 잘라 정색하니까 더 의심스럽네. 그 사람은 어느덧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가는 거실 소파에서 내 짧은 머리카락을 돌돌 감기도 하고, 흰머리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뒤적거리기도 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나는 어째서 우리 회사가 주5일제인지를 탓하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주말이 흘러가는 게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근데 왜 고백했을 때 한 대 치지도 않았어? 사내놈이 고백했으면 기분 더러웠을 거 아냐.”
“음… 잘생겨서.”
“엥?”
전혀 예상외의 대답에 나는 모로 누웠던 몸을 바로 눕히고 그 사람을 정면으로 올려다봤다.
“잘생겨서 그런지 별로 거부감이 없더라고. 못생긴 놈이 그랬으면 진짜 한 방 날렸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내가 잘생겨서 사귀기로 했다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믿을 만한 얘기를 해야 장단을 맞춰주지.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잘생겼다는 말이 듣기 좋긴 한데, 당신이 퍽도 그런 이유로 남자랑 사귀겠다. 그냥 내가 좋았는데 덥석 게이 되기가 뭐해서 고민했다고 솔직히 불어요. 뭐 어때서 그래. 벌써 알몸으로 뒹구…!”
“그만해라.”
빨개진 얼굴로, 그 사람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주세영이 부끄러워하는 타이밍은 아직 잘 모르겠다. 욕실에서는 내 몸에 다리를 감고 어떻게 좀 해달란 듯이 등을 막 계속 당겼으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걸 인정하는 건 부끄러워한다.
내 입을 막은 그 사람의 손목을 붙잡고 막대 아이스크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그 사람은 피하지 않았다. 이거 봐. 이럴 땐 또 협조적이면서. 주세영은 몸이 제일 솔직하대요. 새끼손가락부터 중지까지 차례대로 핥는 것을 지켜보던 그 사람은 검지로 혀를 옮기기 전에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나에게 달려들었다.
토요일 오후 우리는 잠시도 서로의 몸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처럼 눈만 마주치면 입술을 마주댔고 그 이후엔 당연한 순서인 듯 맨살을 갈구하며 불쑥불쑥 달아올랐다. 내가 열여덟 살이라 안 된다고 했던 주세영도 서로의 몸을 만질 때만큼은 서른한 살처럼 굴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속궁합도 죽여주는지. 아니, 아직 ‘속’까지 맞춰보진 않았지만 보나 마나 뻔했다. 피부끼리 꾸덕꾸덕하게 쩍쩍 달라붙는데 속피부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지.
너무 늦었다며 가겠다고 일어나는 그 사람에게 찰싹 달라붙어 가려면 날 밟고 가라고 매달린 덕분에 결국 토요일에도 그 사람은 집에 못 갔다.
이렇게 앞뒤 없이 정신없이 빠져들어 허우적대기는 처음이었다. 스물여덟에 연애를 하면서 처음 해보는 게 왜 이렇게 많은지. 하지만 깊이 빠지는 걸 두려워하고 싶진 않았다. 이미 내 마음은 그 사람을 마지막 연애로 정한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그 사람도 그런 각오로 나를 택했으리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차에 그 사람을 태워 집에 데려다줬다. 내 그랜드 체로키를 본 그 사람은 버스로 출퇴근하길래 아직 차가 없는 줄 알았더니 진짜 속았다며 억울한 얼굴을 했지만, 그 사람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면서 나는 신나기만 했다.
미친놈처럼 빈 의자에 안전벨트를 채우던 때를 생각하면 급격한 신분 상승이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이거, 뒷좌석 접어서 침대 만들 수 있다?”라고 했다가 코가 한 번 비틀어지긴 했지만.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차 한 잔만 달라고 졸라봤지만 올라가서 다시 내려올 자신 없으면 냉큼 돌아가라고 매정하게 쫓아낸 바람에 그새 허전해진 조수석을 힐끔거리며 집에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차에서 내리기 전에 찐하게 키스 한 번 더 해줘서 참을 만했다.
그 사람이 가버린 우리 집은 예상대로 휑하고 허전했다. 시끄러운 사람도 아니고 이 집에 오래 있었던 사람도 아닌데, 처음부터 그 사람과 같이 지내려고 마련한 집인 것처럼 지나치게 넓고 지나치게 조용했다. 소파에 누워 지난 이틀을 생각하니 그사이 내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빨려간 것 같았다.
주세영이 내 연인이 되었다.
테이블에서 똑똑 떨어진 와인은 제때에 치워주지 않아 결국 얼룩이 남았지만 우리가 보낸 시간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명 같아 전혀 속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실감이 필요했다. 겉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운 채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인의 자격으로 처음 해보는 통화였다.
[보고 싶어.]
[…….]
저 너머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보이는 것 같은데도 보고 싶은 건 뭐냐고 진짜.
[보고 싶다구요.]
[그래, 들었어.]
[자기 집에 가버리더니 마음도 식었나 봐.]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나도 보고 싶어, 해달라는 소리지.
[당신 가고 나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나 이러다 바보 되면 어떡하지? 당신은 그런 남자 싫어하잖아.]
[…안 그래.]
[뭐가.]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같이 있어서 서로 체온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텐데. 떨어져 있으면 이상하게 더 수줍음을 타는 우리 주세영.
[넌… 안 싫다고.]
머뭇거리면서, 잘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주는 그 사람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응. 싫어하지 말아줘요. 싫어해도 소용없으니까. 당신 이제 못 벗어나, 나한테서.]
농담인 척 진심을 담은 멘트였는데 그 사람은 그냥 웃었다.
[뭐 해?]
[그냥 불도 안 켜고 소파에 누워 있어요.]
뭐 하냐는 질문은 정말 할 말 없을 때 하는 상투적이고 심드렁한 얘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사람이 뭐 하냐고 물어주니 이보다 더한 관심의 표현이 없는 것 같았다.
[왜. 빨리 씻고 쉬든가 해.]
[싫어. 당신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내가 주세영에게 이런 땡깡을 부릴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우린 이제 같은 편이고 동지고 연인이야. 그죠?
[그럼 어떡하냐. 허구한 날 붙어 있어?]
[어, 그럼 안 돼?]
[회사에서 매일 볼 텐데 뭘 너는….]
[회사에서 뽀뽀하고 당신 막 만져도 돼, 그럼?]
그런 시시해빠진 얘기를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주고받았다. 그런 시시해빠진 얘기를 밤새도록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보고 싶어….]
결국 나는 또 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다. 그 사람이 그러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일어나 다시 그 사람 집으로 달려갈 수도 있었다. 그런 건 아무런 수고로움도 아니었고 조금도 귀찮지 않았다.
[내일 보잖아. 헬스클럽에나 늦지 말고 잘 나와.]
앞으로 별다른 일이 없으면 월, 수, 금에는 7시에 헬스클럽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두 시간 일찍 주세영을 볼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일이 많이 바쁘지 않은 날은 퇴근 후에 항상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고. 진짜 우리가 연애를 하는 거다.
[보고 싶다고….]
[너… 자꾸 애처럼 굴래?]
[아, 그래요. 어차피 난 열여덟 살이니까.]
[…….]
보고 싶다는 말쯤 같이 해주면 어때서 그걸 못 하는 그 사람이 조금 섭섭했던 것뿐인데, 그 사람의 침묵에 아차 싶었다. 얼른 변명을 하려고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보고 싶어, 나도. 근데 내일 출근도 있고… 서로 참아야 하는 부분인 거잖아.]
맵게 혼내면 어쩌나 순간 쫄았는데, 섭섭하고 속상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금방 후회스러웠다.
[미안. 안 괴롭힐게 이제. 마인드 컨트롤 좀 해서 당신한테 멋져 보이고 싶은데 조절이 잘 안 돼서 그래요. 미안. 다 알면서 그랬어. 속상해하지 마요. 응?]
출근을 위해 자야 할 시간이 돼서야 겨우 전화를 끊었다. 아무것도 아닌 내용으로 옥신각신하고 섭섭해하고 쩔쩔매면서 용서를 빌고…. 정말로 우리가 연애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위에 핸드폰을 올려둔 채 천장을 보고 누워 실없이 혼자 웃었다.
‘우동주세영’으로 합쳐진 우리들은 각자의 인생 전체를 건 최대의 모험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드레시 리버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