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장 (21/34)

20장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출근하자마자 주말 내내 꺼두었던 휴대폰을 켜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 목록이 떴다.

발신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부 삭제하고 오늘의 일정을 체크한 후 아침 조회를 나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

황태자는 대답이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오늘의 스케줄을 읊자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이상입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왜 전화 안 받았어.”

“주말이니까요. 급한 용무라도 있으셨습니까?”

원칙적으로는 주말에도 전화를 받아야 했지만, 그에게 급한 스케줄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한 일이었기에 나는 당당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경무청에서 연락이 오거든 소냐 하워드 비서관에게 대신 받아달라고 하기도 했으니 질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용무?”

기가 차다는 듯 황태자가 하,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후, 그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당신이랑 내가 굳이 용무가 있어야만 전화할 수 있는 사이야?”

“……그렇지 않으면요?”

“난 동의한 적 없으니 아직 헤어진 거 아니야. 제대로 설명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이러고 있을 시간 없는데. 그의 스케줄을 수행하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 많았다.

물건이 오늘 도착하니 하나하나 다 검수를 해야 했고, 그다음에는 평면도를 보고 동선을 짜야 했다. 그리고 또…….

“납득하실 것 없습니다.”

“…….”

“그냥 제가 싫을 뿐이에요.”

황태자가 화를 참으려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주먹을 꾹 움켜쥔 그의 손이 하얗게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결국 치밀어 오른 화를 참지 못했는지 그가 소리쳤다.

“그러니까 왜!”

“…….”

“왜, 뭐가 싫은 거냐고. 뭐가!”

뭐가 싫으냐고?

“……전부 싫습니다.”

“…….”

“당신의 얼굴, 목소리, 지위, 성격, 모든 게 싫습니다.”

그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그래.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전하의 눈이, 가장.”

“……눈?”

“그 눈만 보면…….”

속이 안 좋아. 역겹다고. 토할 것 같아.

말을 잇는 대신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내 눈만 보면, 그다음은?”

“…….”

“……그냥 내가 다 싫은 거야?”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허탈한 듯 낮게 웃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네.”

“…….”

“이때까지 어떻게 나랑 만나고 키스하고 했어?”

그러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 스스로가 환멸스럽다. 내 얼굴에 떠오른 조소를 확인한 황태자가 사납게 중얼거렸다.

“그래. 알았어. 날 싫어한다는데, 내가 어쩌겠어? 가. 가버려, 라파엘 드마뉴.”

나는 대답 대신 묵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가득했다.

문을 닫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욕설과 함께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경호원이 깜짝 놀라 나와 황태자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저 이것으로 그와 나의 관계가 끝나기를 바라며.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나가.”

“……예?”

“당신 말고 앞으로 다른 사람이 보고해.”

그 말에 황당하게 굳어버린 건 나뿐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찻잔에 차를 따르던 메이드가 흠칫 놀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황당함을 감추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 싫다며. 앞으로 괜히 일이랍시고 꼴 보기도 싫은 나 보지 말고 다른 사람 보내라고.”

“……전하.”

“왜, 이것도 싫어?”

날카롭게 가시가 선 말을 들으니 절로 가슴이 답답했다.

요 며칠 황태자는 부쩍 날카롭게 굴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내가 풀어줘야 할 의무도 없고 나 역시 그 못지않게 예민했던 터라 저런 반응을 곱게 받아넘기기 힘들었다.

그래도 최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딱 질색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지친다. 나도 저런 황태자를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

“내일부터는 저 대신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조회를 올 겁니다.”

하, 하고 황태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불편하시다면 수행비서직도 소냐 하워드 비서관에게 넘기겠습니다.”

“……당신 편한 대로 해. 그게 당신 아니야?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예, 알겠습니다.”

결국 말을 끊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잔 터라 안 그래도 힘이 부쳤다.

비서실로 돌아와 의자에 꺼지듯 주저앉자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것보다 소냐 하워드 비서관, 부탁할 게 있어요.”

“네, 뭐든 말만 하세요.”

“앞으로 전하의 아침 조회랑 외근 수행을 부탁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태자의 아침 조회와 외근 수행은 그의 선임비서관인 나의 직무로, 사지육신이 멀쩡한데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이에게 넘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하와는 이야기가 모두 끝났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

“어차피 곧 맡게 될 일이었는데, 미리 연습한다 생각하고.”

“네?”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더니 곧 깨달은 듯 ‘설마’ 하고 중얼거린다. 나는 대답 없이 웃었다.

시선이 책상 서랍으로 향했다. 이틀 전 작성해 놓은 사직서가 그 안에 있었다.

황태자와의 관계를 정리한 후 곧장 사직서를 작성했다. 그와의 인연을 끊으려면 퇴사가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퇴사를 해봤자 어차피 먼 친척 관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예컨대 그의 대관식과 같은 때에는 불가피하게 얼굴을 마주하게 되겠지만, 인생에 한두 번 있을 일이다. 그 정도면 인연을 끊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퇴사한다면 에반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일단 거처를 라윈으로 옮기고, 당장 회사를 경영하기에는 그 방면으로 아는 게 없으니 경영대학원부터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무를 익혀야지. 아마 자리를 잡기까지 최소 10년은 걸릴 거다.

황실비서관으로서의 탄탄한 경력을 버리고 선택하는 길이지만 후회는 없었다. 권력은 이제 신물이 난다.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게 내 삶이었다.

여기저기 치여 나뒹굴었던 루크처럼 살지 않으리라.

행복하고 싶다. 내 환생의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살게 된 인생, 이제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저 평온하게, 루크일 적 내가 바랐던 그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으면 그걸로 족했다.

* * *

에반이 일반 병실로 자리를 옮겼다.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었지만 그는 업무상의 비밀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하여튼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 건 알아줘야 한다.

“가라니까?”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뭘 가라는 거야, 자꾸.”

게다가 에반은 계속 나를 쫓아내려 했다. 내가 있으면 불편하다나 뭐라나.

왜 이제 와서 내외하는지 모르겠지만,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해 화장실만 가려 해도 휠체어가 필요한 사람을 버려두고 갈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너 불편하다고.”

“나도 당신 불편해.”

“…….”

“몇 년 만에 나타나서는 갑자기 삼촌 행세를 하질 않나, 그러더니 갑자기 반 죽어서 실려 와 병원에서 연락이 오질 않나.”

에반이 인상을 구겼다. 그가 짜증스럽게 ‘그러니까……’ 하고 입을 떼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말을 가로챘다.

“근데 노력 중이야.”

“…….”

“같이 가자며. 라윈.”

에반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갈 거냐?”

“응.”

“회사는.”

“그만두기로 했어.”

오늘 오전, 총무비서관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는 한창 바쁜데 귀찮게 한다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 일만 마무리 짓고 퇴직하겠다고 하니 크게 붙잡지는 않았다.

공연히 떠벌리고 나갈 일은 아닌지라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건 입사 동기인 나단과 후임인 소냐 하워드 비서관에게만 밝혔고, 퇴직 날짜에 맞추어 차질 없도록 인수인계를 시작하기로 했다.

“……잘했다.”

가타부타 다른 말없이 그저 잘했다고만 하는 에반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협조 좀 해.”

“…….”

“어린 조카 버려두고 훌쩍 떠났으니 이제라도 잘하란 말이야.”

반쯤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래.”

그런데 그래, 하고 대답하며 옅게 웃는 에반의 얼굴이,

“……어?”

“왜?”

묘하게 익숙하다.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처럼.

……뭐지? 이 기시감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신기루처럼 에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내일 아인 퍼스에 대한 조사 결과가 발표될 거다.”

“…….”

“이미 조력자들에 대한 체포 영장은 발부됐어. 송년 축제가 있기 전에는 전부 잡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래.”

“너도 참고인으로 불려 나갈 수 있으니까 준비해 두고.”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해 둔 터였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에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작게 중얼거린 말이 한숨 속에 흩어졌다.

“……지긋지긋한 악연.”

* * *

에반이 일러준 대로 다음 날 경무청은 지난번 테러사건의 진짜 배후를 밝혀냈다며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브리핑에서도 비서실장의 피습 사태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인 퍼스라는 이름의 소수민족 출신 테러리스트가 황실을 위협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알려지며 여론은 또다시 무정부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압박하자는 우파보수여론과 차라리 그들을 분리 독립시키자는 진보여론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면 여론은 보수적으로 흐르게 마련인지라, 그들을 분리 독립시키자는 의견은 아무래도 약세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정국은 시끌시끌했으나 일단 끝까지 범인을 색출한 경무청과 황실에 대한 지지도가 올라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공화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줄어든 이 시점에서, 황제는 제국과 황실의 안정을 도모하는 신년 담화문을 송년 축제 때 발표할 계획이었다.

담화문은 주절주절 길었지만, 큰 골자는 명확했다.

‘분리 독립은 꿈꾸지도 마라.’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총무비서관을 만나기 위해 제1궁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장신에 발걸음이 절로 멈추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도 나를 알아본 것인지 보폭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

“…….”

먼저 발을 멈춘 건 과연 황태자였을까, 아니면 나였을까.

“즐거운 오후입니다, 전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어 모래를 씹은 듯 꺼칠한 입을 떼었다. 황태자는 대답 없이 나를 훑었다. 시선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이 묘하게 시큰시큰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피하며 나 역시 그를 훑었다. 이건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황태자의 신체 사이즈와 안색, 손끝 발끝까지 모두 파악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으므로.

……살이 조금 빠진 것 같네. 그가 입은 옷은 기성복이 아니라 조금만 살이 빠져도 옷태가 확연히 달랐다.

원체 근육 체질이라 아직까지는 입을 수 있다지만 저런 식으로 계속 살이 빠지면 조만간 황태자의 옷은 전부 새로 맞춰야 할 거다.

게다가 피부까지 꺼칠해졌다. 마사지 좀 꼬박꼬박 받으라니까 또 말을 안 듣지.

황태자는 공인이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무척 중요했다. 곧 송년 축제인 만큼 황태자의 용모가 세간의 화제로 떠오를 텐데 저런 식으로 볼품없으면 곤란하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잘 좀 챙겨 먹고 다니지…… 까지 생각하다가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 차려. 더 이상 저 사람을 챙기는 건 내 일이 아니야. 이제는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살이 빠지든 굶어 죽든 알 게 뭐야.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자. 어차피 잘 먹고 잘 살 사람이니까. 내가 없어도 말이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황태자에게 인사를 할 때였다.

“그럼 급한 용무가 있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얼굴, 좋아 보이네.”

오랜만에 듣는 황태자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낮고,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가장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무덤덤한 나라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그것은 ‘비웃음’이자 ‘분노’였다.

분노는 알겠는데, 비웃음은 누구를 향한 거지? 일순 당황한 나는 멍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아주 좋아 보여.”

“칭찬, 감사합니다.”

그 말에 황태자가 작게 웃었다.

“칭찬이라.”

“…….”

칭찬 아닌데. 그의 낮은 속삭임을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가봐요, 라파엘 비서관.”

가라고 말한 것은 황태자였지만, 묵례를 한 내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그가 먼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쳤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먼 옛날 누군가의 뒷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어쩐지 가슴 한쪽이 베인 것처럼 시렸다.

……뒷모습은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향했다. 가슴속이 차마 꺼내지 못한 말로 울렁거렸다.

……당신 눈에는, 내가 괜찮아 보입니까?

* * *

송년 축제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해야 할 일도 거의 마무리되었고, 이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체크할 일만 남은 터라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소냐 하워드 비서관에게 내 업무의 일부분을 넘겨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날 그렇게 우연히 조우한 이후로 황태자와 마주칠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었다. 어쩌다 그와 마주쳐도 이제는 그쪽에서 나를 무시했다.

인사를 건네도 아예 대놓고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지나치기 일쑤니 그 모습에 당황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내가 퇴사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서 그와 화해하라고 종용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송년 축제가 끝나면 보지 않을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멀뚱히 아파트 앞에 서 있는 황태자를 보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

말을 고르듯, 황태자가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대답했다.

“……사표 제출했다는 소리 들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처음 떠오른 생각은 ‘이제서?’였다. 사표를 제출한 게 언제인데 그 사실을 이제 알았단 말인가.

……내 인사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 직감하긴 했지만, 그는 이제 정말로 내게 모든 관심을 끊은 모양이다. 3년을 같이한 비서관의 퇴사 소식을 나흘 전에야 알 정도로.

“예, 그렇습니다.”

황태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연녹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쳤다고요.”

“…….”

“전하께서도 알고 계신 일인 줄 알았습니다. 제 인사를 받지 않을 때부터 동의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아니었나. 내 착각이었던 걸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그럼 내 인사는 왜 안 받았어? 왜 날 모른 척했지?

그때 황태자가 되물었다.

“정말…… 인연이라도 끊을 생각이야?”

“…….”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서러운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대답 없이 그저 바라만 보자, 황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모질어.”

모질다…… 고? 내가?

순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내가 모질다고? 지금 당신이 나를 비난한 건가? 무슨 자격으로?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럼 나보고 어쩌란 겁니까.”

“…….”

“당신 얼굴 꼴 보기도 싫고, 미워 죽겠는데 이것 말고는 인연을 끊을 방법을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게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라! 그런데 내가 모질다고?”

“…….”

“진짜 모진 사람이 누군데!”

한 마디 한 마디에 황태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것마저도 보기 싫었다. 그 연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는 순간, 욱하는 충동을 못 이기고 소리쳤다.

“당신이 뭐라고 울어?!”

“…….”

“그런 표정 지을 거면 나한테 그러면 안 됐잖아. 그렇게 모질게 날 죽이지 말았어야지!”

7년을 품에 안아놓고 버릴 때는 기르던 개보다 못하게 날 버렸잖아. 사람이 어떻게 그래.

내가 별걸 요구한 게 아니었잖아. 그냥 나 살려달라고, 나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그냥 출궁시켜 달라고, 그거 하나 요구했는데 안 들어줬잖아.

모함이었다고, 나도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면 지은 죄가 사라지기라도 해? 나를 사랑했다고 하면 그게 없었던 일이 되냐고. 그래봤자 이미 나는 죽었는데. 그것도 나를 사랑했다던 당신이 나를 죽였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당신도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어. 내가 당한 만큼, 당신이 내게 저지른 만큼 똑같이 받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당신도 다음 생에는 나처럼 태어나서 기만당하고, 그 사람이 적반하장으로 당신에게 모질다 나쁘다 했으면 좋겠어!”

쏟아내듯, 헤진 가슴을 열어 마음에 응어리진 말을 모두 퍼붓자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벌벌 떨려 주먹을 꾹 쥐었다.

시야가 뿌옇다.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던 걸까. 황태자의 형체가 망막 앞에서 어른거렸다. 그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렸다.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가세요.”

“…….”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

나도 당신 인생에서 사라져 줄 테니, 이번 생만큼은 우리 각자 갈 길 가자. 부탁이야, 델루니안.

등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떠날 때까지 나는 이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떠나지 않을 셈이었다.

한참 후, 무언가 따뜻한 것이 어깨에 걸쳤다. 익숙한 향기가 몸을 감쌌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차가 주차장을 떠나는 소리까지 듣고서야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어깨를 감싸 덮은 그의 외투가 증오스럽게 다정했다.

* * *

그날 이후로 황태자는 황궁을 비웠다. 송년 축제 전 각 가문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느라 바쁜 탓이었다.

나에게도 초대장이 여럿 날아왔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사교계 인맥도 없는, 무늬만 백작인 나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황태자의 비서관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에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내게도 또 다른 일정이 있었고.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

저걸 보고 지금 긴장하지 말라는 소리가 나오는 걸까.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에 반대한다!’

‘수사 과정 중 고문과 협박을 일삼은 공안검사 존 마이너를 파면하라!’

검찰청 앞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보자니 눈앞에 마주한 으스스한 건물이 한층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참고인입니다. 피의자가 아니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담당 검사는?”

“특별수사팀 소속 검사 존 마이너입니다.”

“…….”

수사 과정 중 고문과 협박을 일삼은 공안검사 존 마이너를 파면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이 눈에 밟혔다.

고문과 협박…… 내 표정이 어두워졌는지 시드니 카턴이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감히 백작에게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알아요.”

“…….”

“귀족들과 연을 못 대서 안달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상대를 봐가며 고문하는 아첨꾼이라는 소리다. 참으로 위로가 된다. 하등 쓸모없는 새끼.

고개를 저으며 차에서 내리자 시드니 카턴이 뒤따라 내리며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만날 사람이 있으니, 두 시간 후에 정문 앞에서 만나죠.”

“그래.”

시드니 카턴이 먼저 사라지고, 나는 안내인의 손에 이끌려 조사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자 잠시 후 풍채 좋은 사내가 들어와 스스로를 존 마이너라고 밝혔다.

저렇게 생긴 사람이란 말이지. 상대를 봐가며 고문하는 아첨꾼은 과연 눈빛부터 달랐다. 호의를 가장했으나 뱀처럼 교활한 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는 나를 평가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본능적으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얕보이면 안 된다.

시드니 카턴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귀족과 연을 못 대서 안달이라고 했지.

신분으로 권위를 세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그런 것으로 나를 평가한다면 나 역시 신분을 앞세워 강하게 나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어릴 적 조부로부터 배운 귀족적인 태도를 취하며 질의에 응했다. 당신을 존중하지만 나를 넘어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음을 은연중에 드러내자 과연 존 마이너의 태도가 금방 공손해졌다. 본인이 업신여겨서는 안 될 상대라고 파악한 것 같았다.

무미건조한 질의응답은 약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아인 퍼스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지, 어째서 그를 비서관으로 발탁했는지, 사고가 난 이후로 그와 같이 지내게 된 경위는 무엇인지, 그동안 그가 어떤 말을 하였고 어떤 행동을 취하였는지, 특이점은 없었는지 등등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아는 범위 내에서 대답을 하는 지리한 공방.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존 마이너가 탄신제 기념행사 때 있었던 일을 물었다.

“그건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사항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예, 그건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비서실장 노엘 파커의 피습 건과 관련되어 검찰 쪽에서 찾고 있는 자료가 있어서 말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

그게 뭘까. 뭔가 마음이 찜찜했지만 일단 물어보는 대로 답변은 했다. 하지만 별다른 점을 찾아낼 수 없었는지, 답변이 끝났을 때 존 마이너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자료를 찾고 있는 걸까. 혹시 비서실장이 갖고 있는 자료라도 되는 걸까.

예전에 시드니 카턴은 아인 퍼스의 테러 관련 결정적 증거를 비서실장이 갖고 있을 것이라 했다. 그걸 찾는 걸까…….

“……아.”

그 순간, 어떤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 혹시 생각난 것이라도?”

존 마이너가 안색을 달리하며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서실장이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로부터 얻은 작은 쪽지 하나. ‘그림 1124’라고 적혀 있던 그것.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사이 내게 벌어진 일이 너무 많아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런 멍청한 일이 다 있나!

“각하?”

“아닙니다. 지금 급한 일이 떠올라서 그런데 이만 일어나도 괜찮습니까?”

“아, 이런. 벌써 두 시간이나 됐네요. 예, 가보셔도 좋습니다.”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사실을 벗어나는데 존 마이어가 황급히 덧붙였다.

“혹시 새로이 떠오른 사실이 있다면 언제라도 연락 부탁드립니다!”

글쎄, 그게 정말로 중요한 정보라면 그래야겠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벗어나 정문 앞으로 향했다. 시드니 카턴은 벌써 용무를 본 것인지 차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으로.”

“병원으로 갈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급한 일이야. 황궁으로 간다.”

“무슨 일입니까?”

“탄신일 행사에서 비서실장이 피습당하기 전에 남긴 게 있어.”

시드니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게 뭡니까?”

“아직 몰라. 그걸 찾아보려고.”

“그게 황궁에 있습니까?”

“아마도.”

내게 남긴 것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내가 찾지도 못하는 곳에다가 넣어두고 암호 같은 수수께끼를 던져줄 사람이 아니다. 황궁으로 가는 동안 생각했다.

그림 1124. 그림 1124. 생각보다 단순할지도 몰라.

황궁에 도착하자 시드니 카턴이 나를 돕겠다 자청해 왔다. 처음에는 그 존재 자체가 불편해 거절하려 했으나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인지라 함께 황궁으로 들어왔다.

“황궁은 오랜만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시드니 카턴의 목소리가 감회에 젖어 있어 조금 의아했다.

황태자의 친구 아닌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시드니 카턴이 대답했다.

“평민이니까요.”

“아하…… 천하의 채스터턴이 이번 생에서는 평민이라.”

“일종의 업보입니다.”

“업보치고는 싼 편인데.”

“신분이 업보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그럼?”

“…….”

내심 궁금해서 되물었지만 시드니 카턴은 말이 없었다.

우리는 곧장 실장실로 향했다. 쪽지는 없었지만 그 메모 내용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 될 건 없었다. 문은 어째서인지 열려 있었다.

총무비서관은 자신의 사무실을 따로 쓰기 때문에 비서실장이 없는 비서실장실은 휑했다. 여기 어딘가에 있는 걸까.

“뭘 찾아야 하죠?”

“몰라. 그냥 ‘그림 1124’라고 적혀 있었어.”

“‘그림 1124’라…….”

시드니 카턴이 실장실 안을 훑었다.

“그림은 총 세 점이네요.”

남쪽을 향해 난 창을 제외하고 북쪽과 서쪽, 그리고 동쪽에 각기 그림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동쪽에 붙은 그림은 일전에 본 적 있는, 예의 그 감시카메라가 내장된 여인의 초상이었다.

“각각 제목이 붙어 있고요.”

“『지혜로운 여인』, 『영혼』, 그리고…….”

“『계몽』.”

북쪽 벽에 붙은 『계몽』은 두 개의 연작화였다. 가까이 붙여놓아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로 보이지만 실제로 이 방에는 그림이 총 네 점인 셈이었다.

혹시 그림 뒤에 금고라도 숨겨져 있는 걸까 싶어 그림을 살짝 들춰 보았지만 그저 벽이었다.

그림 1124는 도대체 뭘까…….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단순할지 모르겠다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던가.

설마 여기가 아닌 걸까. 다른 곳을 찾아야 하나? 하지만 황궁은 넓었고 그림은 수백, 수천 점에 달했다. 하나하나 다 찾을 수도 없었다.

아니다. 분명 여기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때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시드니 카턴이 입을 열었다.

“300년 전만 해도 신관과 과학자는 별다른 구분이 없었죠.”

“그래서?”

“신관인 과학자들은 숫자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탐구했습니다. 기억납니까? 황제 델루니안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그들이 제국의 기초과학을 발전시켰던 것을요.”

아니,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나는 글자도 제대로 모르는 평민이었으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전생 이야기에 기분이 조금 불쾌해졌지만 일단 잠자코 들었다.

“제가 국무대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보고서를 여러 번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들은 숫자 1이 가장 기본이 되는 숫자로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를 의미한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1이 두 개인 11은 기본 입자들이 딱 붙어 합쳐진 형태로 완전체죠. 완전체가 된 기본 입자는 전혀 다른 성질을 띠게 됩니다. 그것을 그들은 ‘영혼의 깨어남’ 혹은 ‘계몽’이라고 했습니다.”

……어?

“이런 식의 해석이 계속 이어집니다. 예컨대 숫자 2는 ‘영혼’이라는 의미가 있고…….”

그의 시선이 서쪽 벽에 붙은 그림으로 향했다.

“숫자 4는, 지혜라는 의미가 있었어요.”

내 시선은 동쪽 벽에 붙은 여인의 초상화로 향했다. 감시카메라가 왼쪽 눈에 박힌 여인은 지금 이 모습도 생생히 녹화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이걸 눌러볼까요?”

시드니 카턴이 『계몽』의 밑에 붙어 있는 금색의 조각판을 가리켰다. 작가의 이름과 제목이 써져 있는 네임 보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마치 누를 수 있는 버튼처럼.

달칵, 그가 조각판을 눌렀다. 어디선가 삐꺽, 하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쪽 벽에 붙은 『영혼』 밑에 붙어 있는 조각판을 눌렀다. 역시 달칵, 눌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미세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시드니 카턴이 『지혜로운 여인』의 네임보드를 눌렀을 때, 『지혜로운 여인』이 앞으로 튕기듯 열리며 구식의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네요.”

“……무슨 이런 트릭이 다 있어.”

“500년 전 설계된 황궁입니다. 처음 지어진 이후로 계속 증축이 되며 그 시대의 최신 기술을 도입해 트릭을 설치했으니 모를 수밖에요. 이런 형태의 금고는 매우 구식이지만, 금고가 만들어지던 시대의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면 절대 열 수 없죠.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가장 안전하다고 보면 될 겁니다.”

비서실장은 도대체 나더러 이걸 어떻게 풀라고 던져준 거야.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했다.

내가 얼빠져 있는 동안 시드니 카턴이 금고 안에서 비서실장이 감춰둔 서류 봉투를 꺼냈다.

“…….”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봉투를 열어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시드니 카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저 표정을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찾았네요.”

웃고 있으나, 그 웃음은 뜨겁게 차가웠다.

그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레브로비치의 아들은 고용인의 딸과 바꿔치기 되어 신분을 위장했죠. 그렇다면 그 바꿔치기 된 고용인의 딸은 지금 어디 있을까요?”

글쎄, 아마도 죽지 않았을까.

“아인 퍼스에 대해서 수사를 하는데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게 하나 있어요.”

“흠?”

“바로 자금줄. 그게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단순히 계좌 추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사항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자금줄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어서 이상했죠.”

마침내 서류에서 시선을 뗀 시드니 카턴이 내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아니, 이건 서류가 아니다. 이건 서류가 아니라…….

“신문 기사……?”

나는 천천히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24년 전에 발행된 기사에는 한 입양기관이 국가공인입양기관으로 채택되어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는 짧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이 기관이면 나도 아는 곳이었다. 25년이 지난 현재, 이 기관은 제국 내 세 번째로 큰 규모로 성장했으니까.

“아인 퍼스가 태어난 다음 해에 갑작스럽게 국가공인기관으로 채택되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뚜렷한 실적이 있었던 곳도 아닌데요.”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필 왜 입양기관이었을까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만약, 그 아이가 죽은 게 아니라 입양이 되었다면?

일단 태어났으니 출생 기록은 남았지만 출생신고는 하지 않은 아이를 법적으로 문제없이 빼돌릴 방법은 입양뿐이다. 하지만 입양기관에서 아이를 데려갈 때는 적법한 절차를 걸쳐야 한다.

만약 신분을 밝히기 꺼리는 사람이 법망을 피해 아이를 데려간다면?

“레브로비치의 후예를 금전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만큼 재력이 있으며, 정부 부처를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아인 퍼스를 입양한 사람이라는 말이지.”

“바꿔치기 된 아이를 이렇게 조용하고 은밀하게 빼돌리려는 권력자가 흔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뭔가 있어요. 아주 큰 게.”

그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어떤 권력자가 떳떳하게 입양할 수 있는 아이를 조용히 빼돌릴까.

그리고 확실히, 실적도 없는 작은 민간입양기관이 갑자기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된 것도 미심쩍다. 어쩌면 이 기관이 아인 퍼스의 자금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지원을 받게 해주는 조건으로 갓난아이를 법망을 피해 빼돌리고, 지원비의 일부를 아인 퍼스의 자금으로 대주기로 했다면? 마냥 허무맹랑한 가정은 아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시드니 카턴이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인 퍼스가 비서실장을 쏜 것이 단순히 자신의 정체를 알아서가 아니라 이것 때문이라면, 더욱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하면 마주한 현실로부터 외면할 수 있다는 듯.

끝이라 믿었던 게 끝이 아니었다. 아인 퍼스의 단독 범행일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사건이 확대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정부 부처에 있는 권력자가 아인 퍼스와 공범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가. 누구를 믿고, 누구를 쳐내야 하지?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려는 듯, 시드니 카턴이 서류를 갈무리해 품에 넣으며 말했다.

“일단 나가죠. 존 마이너 검사에게는 제가 넘기겠습니다.”

“……그래.”

무거운 마음으로 서류를 찾고 돌아 나오는 길, 맞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두 명의 인영이었다.

“…….”

“…….”

피곤해 보이는 황태자와 그 뒤를 따르는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라니. 참 타이밍도 안 좋다.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도 뒤늦게 나와 시드니 카턴을 인식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황태자의 시선이 시드니 카턴을 향한다. 오래된 친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마치 네가 왜 여기 있어?’라고 묻는 것 같다.

시드니 카턴은 말없이 웃어 보이며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 사람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황태자의 시선이 시드니 카턴의 고갯짓을 따라 나에게 향한다. 그 순간 나는 덫에 걸린 토끼처럼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당신도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어. 내가 당한 만큼, 당신이 내게 저지른 만큼 똑같이 받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당신도 다음 생에는 나처럼 태어나서 기만당하고, 그 사람이 적반하장으로 당신에게 모질다 나쁘다 했으면 좋겠어!’

흥분한 상태로 내뱉은 말이 그와 나 사이에 맴돌았다. 허공으로 사라진 말인데, 황태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명처럼 고막에 달라붙어 귓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후회하지 않아.

그렇게 흥분하여 소리친 것은 부끄럽다 생각하지만, 내용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게 내 진심이니까. 너도 그렇게 당해보라는 내 마음이니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연녹색 눈동자가 무참히 흔들렸다. 제어되지 않는 감정이 그 눈동자 안에 맴돌았다.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기만당해 보라고, 아파보라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묵례를 했다.

“…….”

하, 하고 황태자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의 구두밖에 없었다. 잘 닦여진 구두가 잠시 후 내 시야를 벗어났다. 그 뒤를 따르는 소냐 하워드 비서관의 구두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완전히 그들이 시야에서 벗어난 후 고개를 들자 시드니 카턴이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끝난 겁니까?”

“……당신이 알 바 아니야.”

“샤를마뉴를 용서하지 못하나 봅니다.”

용서하지 못하냐고?

“용서하지 말라고 알려준 거 아니었나.”

“그건 아닙니다.”

“복수라며.”

“복수였죠.”

그렇게 말하며 시드니가 덧붙였다.

“하지만 복수만을 위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운명을 믿습니까?”

무슨 뜬금없는 운명 타령이야. 나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운명? 예전 같으면 절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운명이란 나약한 자들의 변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는.”

“그럼 어느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네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가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운명이 있죠. 하지만 운명은 길 위에 박혀 있는 이정표와 같은 겁니다. 그 이정표는 뽑을 수도, 없애 버릴 수도 없죠. 하지만 그 이정표대로 따라가느냐, 아니면 길도 없는 곳을 개척하느냐는 사람의 자기 의지에 달려 있는 겁니다. ……대부분은 그저 따라가지만요.”

“…….”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운명이 있어요. 거대한 흐름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세상의 운명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그가 웃었다.

“운명의 파도와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자기 의지가 맞부딪친다면 누가 이길까요?”

“…….”

“더 간절한 쪽이 이기는 겁니다.”

“그래서?”

“채스터턴인 저는 운명의 파도를 이끄는 운명을 가졌습니다.”

하?

“그 파도라는 게 뭐였는데?”

“황제를 도와 제국 통일을 이끄는 역할이요.”

“……그럼 지금은?”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대답했다.

“이런 말 들어봤는지 모르겠네요. ‘역풍을 맞아라. 절대적인 자유에 가까워지리라.’”

“……거창하군. 결국 운명에 거스르고 있다는 뜻이잖아.”

“그렇게 말하자면 또 그렇죠.”

“그래서 우리 시대의 운명은 뭔데?”

“……모르겠습니까? 당신과 당신 부모님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겪고도?”

그 순간 머릿속으로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무정부주의자들. 분리 독립을 요구하던 일리오니쉬. 테러와 저항. 그리고 루크로 깨어났을 때 시드니 카턴과 처음 만난 날의 대화가.

도서관에서 군주제 폐지를 외치던 대학생들과 그들을 바라보던 시드니의 말.

‘뭐, 이것도 시대의 흐름이라고 할까요.’

‘…….’

‘저는 벌써 옛날 사람이 됐는지, 군주제 폐지까지는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하……?”

그거였구나.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샤를마뉴와 당신을요.”

“……어째서.”

“샤를마뉴는 황태자, 당신은 백작이지만 기묘하게도 당신 두 사람이 만나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거든요.”

“우리가?”

“예. 그래서 떨어뜨리려고 했는데……. 방금 그거,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습니다.”

어느새 주차해 놓은 곳으로 다다른 시드니 카턴이 시계를 한번 확인하더니 말을 돌렸다.

“이젠 가야겠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

“그럼 또 뵙죠.”

그의 차가 멀어졌다. 붉은 궤적을 남기며 떠나가는 그의 차를 보며 생각했다.

운명과 자기 의지.

시드니는 운명이 있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기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운명을 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다.

잠시 루크로 깨어났을 때 운명을 바꾸고자 노력했으나 그것마저도 운명의 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내 운명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운명에 휩쓸리고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내 운명은 뭘까.

언젠가 내 삶은 전생의 궤적을 쫓는 별똥별의 꼬리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게 내 운명인가? 과거에 얽매여 내 삶이 기만당하는 게 내 운명?

자연스럽게 생각은 황태자-델루니안에게로 이어졌다. 하얗게 질린 채 눈물을 떨어뜨리던 황태자의 얼굴이 두둥실 떠오른다.

그럼 당신의 운명은 뭐지? 나를 죽여놓고 다시 환생해 나를 쫓아와 내 삶을 기만하는 것? 도대체 뭘까. 당신과 나의 운명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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