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송년 축제 하루 전날의 아침이 밝았다. 축제 전야의 날이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벌써부터 축제 열기로 가득했다.
제국은 송년 축제를 전후로 사흘 동안 공휴일을 갖는다. 축제 전야의 날에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가족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각 종교사원에서는 한 해를 보내는 기원 의식을 한다.
그리고 상점들은 한 해가 가기 전 마지막으로 대폭 할인을 했다. 이때가 대목인지라 거리에는 휴일을 맞은 사람이 넘쳐흘렀다. 다들 행복한 얼굴이다.
행복.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와 쓰러지듯 잠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굉장히 이상한데, 행복한 꿈.
꿈에서 나는 루크였다. 그런데 루크의 기억에는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황제는 나를 죽이는 대신 출궁을 시켜주었고, 나는 리안의 영지 한쪽에 별장을 얻어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예법에 맞지 않는다 하여 이른 아침부터 깨우는 사람도 없고, 나를 시기하여 전갈을 풀어놓는 귀족 영애도 없는 평화로운 일상. 언젠가 바랐던 그 모습 그대로의 삶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몰랐다. 꿈에서의 나는 종종 정신을 빼놓고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거나 생각에 잠겼으며, 가끔은 영문 모를 외로움에 자다 깨서 스스로 어깨를 감싸기도 했다.
나는 그냥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흑갈색 머리칼을 가진, 가끔 야성적인 향을 풍기는, 우아하게 잔혹한 어떤 사내를.
그러다가 어느 날 나를 이곳에 보낸 리안이 찾아온다. 내 안부를 묻는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대화를 쉽게 이어가지 못한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면서도 한편 나는 또 다른 궁금증에 시달린다.
몇 달 동안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한 사람, 그 사람은 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감히 물을 수가 없다. 리안의 남자가 되어버린 그 사람. 내가 무슨 자격으로 물을 수 있을까.
그때 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본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핏속을 내달리는 것은 믿을 수 없는 환희.
그 순간 응접실의 문이 열린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 내 시야에 그 사람이 가득 들어차자,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눈물이 되어 흐른다. 몇 달 동안 그리워했던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이제 알겠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고, 나는 무척 심란해졌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과거에 나는 출궁하지 못하고 황궁 안에서 죽음을 맞았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꿈을 꾼 걸까. 나는 이것이 내 무의식, 정확히는 루크의 무의식의 발로인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찝찝했다.
그에게 복수하면서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다시 만나서 행복해하다니. 얼빠진 놈이라고 자책을 해봐도 꿈속에서 느낀 환희를 거짓이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정말로,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행복했으니까.
황궁에 도착해 비서실로 향했다.
내일은 나의 마지막 근무일이다. 축제가 끝나는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나는 황궁과 연을 끊게 된다. 마냥 홀가분할 줄 알았더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내일은 어차피 하루 종일 연회장을 맴돌 테니 비서실에 오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이 문을 잡게 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이지.
“오랜만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실장님.”
“잘 지냈습니까? 라파엘 비서관.”
“어떻게 벌써……퇴원하셨습니까?”
“어제 퇴원했습니다. 어제 참고인 조사를 다녀왔다고요?”
얼떨떨했다. 마치 죽은 사람이 되돌아온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직 아픈 기색이 완연한 비서실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잘했습니다.”
“…….”
“라파엘 비서관이라면 풀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칭찬은 그 얘기였던가. 칭찬받을 일은 아니었는데.
근데 뭔가 이상했다. 비서실장은 내가 그것을 풀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는데, 그걸 어떻게 확신했을까. 금고는 제작 방식부터가 무척 구식이라 그 지식을 알지 못하면 열 수 없는 것이다.
비서실장이야 전임 비서실장으로부터 들었을 거라 쳐도, 나 같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비서실장은 도대체 뭘 믿고 내가 그걸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그런데 유능한 비서관을 잃게 되네요.”
“예?”
“그만둔다면서요? 얘기 들었습니다.”
“아, 예. 그렇게 됐습니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내게 죄송할 건 없고. 갑자기 왜 그만두는 건지 궁금하긴 하네요.”
비서실장은 이유를 물었지만 구구절절하게 이렇고 저렇고 설명할 일은 아니다. 그에 나는 판에 찍은 듯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외조부의 사업을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오, 그래요?”
“당장이야 어렵겠지만 천천히 공부하면서 물려받으려고 합니다.”
“그거 잘됐네요. 요즘 안 그래도 그쪽 사업이 호황이라던데.”
그렇다고 듣긴 들었다. 그래서 사업을 물려받겠다 한 건 아니지만. 비서실장이 아쉽다는 듯 한숨처럼 웃었다.
“전하께는 말씀드렸습니까?”
“예, 뭐…… 아시더라고요.”
대답이 미심쩍었는지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말씀드린 건 아니고요?”
“…….”
직접 말한 적은 없다. 그냥 그가 어떻게 알고 따지러 온 것뿐이지. 대답 없이 침묵이 이어지자 비서실장은 대충 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다퉜는지는 모르겠지만 퇴사하기 전에 인사는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영원히 안 볼 사이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먼 친척 아닙니까.”
“다툰 건 아닙니다.”
“그럼요?”
다퉜다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
“죄송합니다. 사적인 일입니다.”
“……사적인 일이라니 더 캐물을 순 없지만, 퇴사하기 전에 전하 뵙고 가세요. 이건 공적인 일이니까, 결말은 아름답게 갑시다.”
황태자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지만, 그의 말이 옳기는 했다. 사적인 일로 틀어지기는 했으나 3년이나 모신 사람에게 공식적인 언질 없이 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이왕 해야 하는 인사, 일찍 해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황태자의 오후 스케줄 시간을 확인한 후 바로 황태자의 궁으로 향했다. 문 앞에 경호원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황궁을 비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신원을 밝힌 후 잠시 기다리자 곧 문이 열렸다. 침실로 통하는 응접실에 황태자와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 앉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무척 놀란 듯하다.
황태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짧게 묵례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
잠시 고민하던 황태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연녹색 눈동자에 어쩌면 작은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피어오른 것 같았다.
나는 이곳까지 오면서 거의 외우다시피 한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저는 내일 이후 비서관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제 후임은 주지하고 계시듯 소냐 하워드 비서관이며, 인수인계는 거의 완료된 상황입니다. 직접 말씀드린 적이 없어 이렇게 뒤늦게나마 말씀드립니다.”
“…….”
“…….”
침묵이 흘렀다. 해야 할 말을 다 내뱉은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었고 그는.
“그게 전부야?”
“……예.”
황태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입꼬리만 살짝 움직인 그가 소냐 하워드 비서관을 향해 낮게 명령했다.
“잠시 나가 있어요.”
그녀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난다. 불길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길게 하려고 이러는가. 나가야 할 사람은 나다. 길게 입씨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 후, 끔찍한 정적을 깨고 황태자가 말했다.
“퇴사한다고 알리려 여기까지 온 거야?”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알리려고, 여기까지 왔다 이거지.”
그가 발작적으로 웃었다.
“참…… 끝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
“그 모욕을 당하고도 혹시 몰라서 미친놈처럼 희망 가진 게 참…….”
“…….”
“우습다, 정말.”
황태자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잠시 말을 삼켰다.
시계가 째깍째깍 흘러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찬란한 햇살. 그 속에 앉아 영원처럼 침묵을 지키는 황태자.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고, 그 광경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림처럼 내 눈에 달라붙었다.
한참 후 그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말을 꺼냈다.
“한참을 생각했어.”
“…….”
“당신은 왜 나더러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말했을까. 당신이 그것 때문에 크게 화가 난 건 알겠는데, 아무리 생각을 뒤집어봐도 난 당신에게 어떤 짓도 한 적이 없거든. 당신을 상처 입히는 건 나 자신이라도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모르겠고 억울한데,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지 않을까,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 병신처럼. 나는 그 순간에도 당신을 이해하려고 했던 거야.”
그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젠가 친구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데도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싶고 받아주고 싶으면, 그게 사랑이라고.
“방금 전까지도 당신을 이해해 보려고 했지. 문을 열고 당신이 들어왔을 때, 어쩌면 내게 그 이유를 알려주려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
“그런데…… 이제는 안 하려고.”
“…….”
“더는 못 하겠다. ……더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을 등지고 내게 선 그는, 꿈속의 델루니안처럼 후련한 듯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잘 가.”
‘오랜만이다.’
“그동안 고마웠어, 라파엘 드마뉴.”
‘……루크.’
* * *
시간은 늦은 오후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몰과 함께 채스터턴가의 파티가 열리는 수도 중심부 C&H호텔의 불이 밝았다.
오늘을 위해 초대장이 없는 손님의 예약은 일절 거절한 호텔 측은 성공적인 파티를 위해 호텔 앞 도로까지도 통제해 놓은 상태였다.
수도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길이 통제된 탓에 연휴의 오후는 교통체증으로 반쯤 마비되었다.
우회로로 빠져나가는 차량의 성난 뒷모습을 뒷자리에서 지켜보던 샤를마뉴는 조용한 한숨과 함께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러니까 황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거다. 황후의 외가인 채스터턴 공작가는 뿌리 깊은 귀족가 특유의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황후가 자신의 가문 출신이라 하여 제국의 공공 자산을 자신들의 것처럼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제국 제일의 공작가가 저러하니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듯 여타 귀족들의 의식 역시 흐려지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외가의 친척들과 거리를 두게 된 샤를마뉴는 오늘 이 자리가 사실 달갑지만은 않았다.
어릴 적에는 제법 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다른 사람들, 특히 평민 출신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서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된 것 같다.
사실 그쯤의 샤를마뉴는 외가 사람들에게 질린 상태였다. 지나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귀족들 사이에도 급을 나누고 평민은 은근히 무시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티에 참석하겠다 기별을 넣은 것은 그들이 외가인 것도 있지만 자신의 친구이자 요즘 들어 의뭉스러운 점이 계속 눈에 띄는 시드니 카턴이 초대자 명단에 있기 때문이었다.
시드니 카턴. 샤를마뉴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평범한 대학 교수인 줄 알았던 친구가 요즘 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이 신기루처럼 생겼다 사라졌다.
도대체 왜, 너는 ‘그’와 함께 있었지?
시드니 카턴이 의뭉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모두 ‘그’와 얽힌 이후부터다. 그 이전에는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샤를마뉴의 머릿속에 ‘그’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오전에도 본 얼굴이지만 백 년 전에 본 것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 냉정한 사람. 차가운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울었던 사람.
‘잘 가.’
‘그동안 고마웠어, 라파엘 드마뉴.’
3년의 짝사랑을 끝내는 순간이었다. 한때는 양방향이었다 믿었지만 결국 단 한 번도 양방향이 아니었던 쓸쓸한 사랑에 안녕을 고하는 그 순간.
울 사람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3년간 짝사랑을 하면서 애간장을 졸인 것도 자신이고, 겨우 얻었다 생각한 사랑에 배신을 당한 것도 자신이다.
그는 헤어짐을 요구한 사람이었다. 자신더러 그의 인생에서 꺼지라고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놓아주겠다고 했다. 잘 가라고 했다. 이제는 질척거릴 일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픈 마음을 꾹 억누르며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가 울었다. 검은 눈동자가 부풀어 오르더니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샤를마뉴는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그건 일종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3년간 주었던 감정을 회수하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겠다는 슬픈 예감.
언제쯤이면 나는 당신에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나는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보며 내가 더 슬퍼지지 않을까. 언제쯤이면 나는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보며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언제쯤이면 나는…… 당신으로부터 온전히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기만당했다. 배신당했다. 이유도 모르게 이별을 선고받았다. 샤를마뉴라는 짐승의 고삐를 쥔 라파엘은 그를 희롱하다가 무참히 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마뉴는 라파엘을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못하여 그의 사랑은 점점 싸구려가 되었다. 라파엘이 그의 사랑을 싸구려로 만들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길바닥에 흩뿌려지는 사랑은 아무리 귀한 자의 것이라 하여도 싸구려가 될 뿐이다.
사랑뿐인가? 라파엘의 폭언과 영문 모를 외면은 평생을 황태자로 살아온 그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어릴 적부터 자존심을 최우선으로 지키라는 교육을 받은 그는 그러한 상황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자신의 가장 귀한 마음이 쓰레기가 되고, 평생을 지켜온 자존심이 발치에 나뒹구는 그러한 상황을.
그래서 이별을 선택했다. 그가 바라는 대로 인연을 끊어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헤어지는 순간에도 샤를마뉴는 철저히 약자였다. 덤덤히 이별을 고하는데도 자존심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의 우는 모습 하나에 절로 손이 나갈 뻔한 자신은 답도 없는 천치였다. 패배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당신이 왜 울어. 울고 싶은 게 누군데. 억울해 한탄이 나올 뻔했지만 샤를마뉴는 간신히 참으며 등을 돌렸다.
‘나가주겠어?’
‘…….’
뒤에서 눈물을 삼키는 호흡이 들렸다. 잠시 후 자신의 것 못지않은 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까지 이유 한 자락 알려주지 않는 그는, 끝까지 지독한 사람이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부터 샤를마뉴는 다짐했다.
앞으로는 정말로 그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나 싫다는 사람 나도 놓아줬으니 이제는 정말로 모른 척 살 거라고.
아니, 모른 척이 아니라 정말로 잊을 거라고. 그래서 어느 날 그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 이렇게 잘 산다고 보여줄 수 있게, 그렇게 잘 살 거라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우습다. 취향도 아닌 사람에게 빠지는 건 한순간이었는데, 그에게서 빠져나오는 것은 늪에 빠진 사람처럼 버둥댈수록 더욱 깊어진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 사랑이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이었을까. 당신을 사랑한 내 3년의 시간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나.
하지만.
“……시드니.”
고치기 힘든 습관처럼, 그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확인하려고 드는 자신을 또다시 확인하며 샤를마뉴는 쓰게 웃었다.
이별을 고해놓고, 그의 삶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그와 시드니 카턴이 함께 있던 장면이 눈앞에 반복적으로 떠올라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시드니를 붙잡고 마는 자신은 언제쯤이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연회장 입구 쪽에 서 있던 시드니 카턴은 샤를마뉴를 보자 이틀 전에 황궁에서 마주친 일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오, 샤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럭저럭. 너는?”
“나야 항상 똑같지. 세드릭은 만났어?”
그 말에 샤를마뉴는 고개를 돌려 홀 가운데에서 와인 잔을 들고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자신의 외사촌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채스터턴 공작의 손자로, 시드니에게는 같은 칼리지를 다닌 친구였다.
사실 세드릭과 시드니 두 사람의 조합은 가끔 생뚱맞다는 느낌을 종종 주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세드릭이 평민을 무시하기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의 평민 비하는 황태자인 샤를마뉴마저도 불편하게 생각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드니 카턴은 예외였다. 한결같이 예외.
“아니, 아직.”
“어서 만나고 와. 오늘 아주 신났더라.”
“왜?”
“유학 갔던 약혼녀가 돌아왔거든. 저기.”
약혼녀라. 그러고 보니 칼리지 시절 세드릭이 약혼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스물두 살 때였나. 그냥 적당한 시기에 약혼했던 걸로 기억한다.
보통의 귀족들은 이십 대 초반에 약혼하고 중반에 결혼했으니 세드릭이 지나치게 예외적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예외라면 아직까지 약혼녀도 없는 자신이 예외일 것이다.
최근 황제와 황후가 약혼하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은근히 압박을 넣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결혼하지 않거나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보지 못하면, 중시조 델루니안부터 내려온 멜링턴 황가의 대는 끊기게 된다.
멜링턴 황가가 끝나더라도 계승권 서열에 따라 제일 가까운 친인척이 황가를 잇겠지만 정복 왕조의 종말은 제국의 시대가 저물어감을 의미한다.
“약혼이라…….”
약혼, 해야 할까.
며칠 전 황제와의 오찬이 떠올랐다. 그는 후작가의 영애를 넌지시 언급하며 약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은근히 제안했다.
“아직은 싫습니다.”
그러나 그때 샤를마뉴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직은 모르는 여자와 약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라파엘이 왜 이러는지 내게 적합한 이유를 대기 전까지는.
그때까지는 그가 내 연인이니까, 연인을 두고 다른 여자와 만나서 약혼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직은.
하지만.
이제는, 이라고 하기도 전에 사랑은 끝나 버리지 않았는가.
“너도 이제 슬슬 생각해 볼 때긴 하지.”
샤를마뉴의 혼잣말을 알아들은 시드니 카턴이 동조하듯 덧붙였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샤를마뉴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원래 궁금해했던 것을 떠올렸다.
자신과 라파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시드니 카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배제한 카테고리를 형성한 두 사람.
라파엘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시드니 카턴과 이틀을 함께 보낸 이후였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미 끝난 관계라지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내가 약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안 하면 어쩌려고?”
“……시드니, 넌 알고 있잖아. 내가 게이라는 거.”
시드니 카턴이 모호하게 웃었다.
“황가를 잇는 것과 너의 개인적인 사정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하지만 내게 연인이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나만의 개인적인 사정은 아니지.”
일부러 떠보듯 연인이 있다고 흘렸다. 혹여 그가 라파엘과 자신이 헤어진 것을 알까 싶어서. 영리한 시드니 카턴은 미끼라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잠시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샤를, 그와는 헤어졌잖아.”
샤를마뉴는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알고 있었구나. 라파엘이 다 말한 걸까?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니, 모르는 건 뭘까.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 거지?
황궁 복도에서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았을 때 가슴속에 치솟았던 분노와 의심의 불길이 다시 하얗게 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오해하지는 마. 그가 알려준 건 아니니까. 황궁에서 봤을 때 서로 봐놓고도 인사 없이 지나가는 걸 보고 알았을 뿐이야.”
“그럼 황궁에는 왜 왔어?”
시드니 카턴의 얼굴에 난감함이 드러났다.
“샤를, 헤어졌잖아. 이제 와서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거야?”
“헤어졌으니까.”
“…….”
“사랑하고 있을 때는 감히 무서워서 묻지 못했으니까.”
시드니 카턴과 이틀을 보내고 돌아온 후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묻지 못했던 것은, 언젠가 라파엘이 말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무서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갑자기 달라진 태도의 이면에 자신의 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머릿속을 떠도는 어떠한 근거 없는 의혹이 사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무엇이 사실이든 최악의 결과는 이미 나왔으므로.
“그래서 묻는 거야. 두 사람, 무슨 관계야?”
“…….”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가 나를.”
‘그토록 혐오하게 된 거지?’라고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목이 막힌 듯 말이 성대를 넘어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드니 카턴은 대답 없이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초점 없이 맥락 없는 어딘가를 향했다.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와인 잔 부딪치는 소리. 무언가 깨지는 소리. 향수 냄새. 음악 소리. 촉각. 시각. 미각. 청각. 후각. 그 모든 것이 자극되는 이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은 유리된 채 한참 동안 고여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고여 있는 시간을 깬 것은 시드니 카턴이었다.
“우리는 그저 대화했을 뿐이야.”
“……무슨 대화.”
“한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대화. 그게 전부였어.”
“그게 누군데?”
“멍청했던 사람. 자신이 누구를 가슴에 품었는지 모르고 다른 이를 좇다가 놓쳐 버린, 아주 멍청했던 사람. 그 이야기는 그를 지치고 화나게 만들었지.”
샤를마뉴가 되물었다.
“그게 나라는 거야?”
“글쎄…… 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시드니,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시드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정말로 곤란한 것 같았다.
“정말로 알고 싶은 거야?”
“……응.”
“믿기 힘든 이야기라도 믿을 수 있어?”
그는 잠시 침묵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저렇게 되묻는 걸까.
“……노력해 볼게.”
다시 한번 시드니 카턴이 한숨을 쉬었다.
* * *
아주 먼 옛날, 한 소년이 살고 있었어. 그 소년은 아주 불행한 사람이었지.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죽을 위기에 처했으니까.
하지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어. 땅을 파먹고, 노동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몸까지 팔아가며 말이야. 그렇게 유지하는 삶이 찬란할 리가 없었어.
같은 시기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살고 있었어. 그 사람은 앞서 말한 사람과는 반대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어.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태어난 사람이었지. 부와 권력 모두를 말이야.
물론 그 사람이라고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어. 모든 것을 쥔 대신 가족사가 처참하리만큼 끔찍했지. 아버지가 형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형은 동생을 시기하여 전쟁터로 내몰았거든.
그때는 전쟁의 시대였어. 하지만 실제로 그를 위협한 것은 적보다는 형이 보낸 첩자들이었지.
운이 좋았던 걸까. 전쟁터에서 전사하기 전에 형이 먼저 죽어버렸어. 그는 형이 갖고 있던 권력을 모두 쥐게 되었지.
이제 그를 위협하는 것은 외부의 적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이미 거듭되는 배신에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다친 상태였어.
그는 모두를 의심했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 한 사람은 그의 어린 시절 친구였지. 그는 그 친구만큼은 신뢰했어.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목숨을 걸고 달려오는 유일한 사람이었거든.
그러다가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어. 마음 둘 곳 없이 힘들게 살아오던 소년과 이미 여러 차례 배신을 당해 마음이 걸레짝이 된 남자가.
처음에는 그저 계약관계일 뿐이었지. 하지만 소년은 자신에게 따뜻한 집과 안락한 생활을 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했고, 남자 역시 점점 그 소년을 믿게 되었어.
소년은 남자가 봐온 어떤 유형의 사람과도 달랐거든. 유약한 듯 강하고, 강한 듯 순수한 사람이었어.
어느새 남자가 신뢰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 되었지. 어린 시절의 친구와 그 소년. 어쩌면 그 소년을 신뢰하는 것이 더욱 컸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거든.
남자는 외골수적인 기질이 있었어. 그는 지독하리만치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한번 마음을 열게 되면 상대에게 모든 것을 퍼주려고 했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을지 상상이 가? 그는 최고 권력자였고, 소년이 마음만 먹으면 남자가 이뤄놓은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었어.
물론 소년은 그러지 않았지. 소년 역시 그 남자를 사랑했거든. 7년을 줄곧 그 옆에서 수난을 당하면서도 앓는 소리 한 번을 안 할 정도로 말이야.
아무튼 소년은 위험한 사람이었지. 그걸 알아본 사람이 있었어. 그는 소년을 남자의 옆에서 치우려고 했지.
그 사람은 소년과 남자 사이를 이간질했고, 소년에게 아주 무거운 죄를 뒤집어씌웠어.
처음에 남자는 그걸 믿지 않았지. 하지만 배신에 이골이 난 남자를 흔드는 것은 세 번이면 충분했어. 남자는 결국 어마어마한 배신감에 휩싸여 소년을 추궁했지. 소년은 아무것도 몰랐는데 말이야.
결국 소년은 추궁 끝에 남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어. 남자는 소년을 죽이면서도 자신이 받은 상처만 생각하느라 소년의 사정은 알아볼 생각을 안 했지. 그렇게 이기적이고 유약한 사람이었어.
그러다가 소년의 억울함이 밝혀졌어.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건 네 상상에 맡길게. 사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남자가 어떻게 됐느냐가 아니니까.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무엇이냐면.
300년 후, 소년이 다시 태어났다는 거야.
그리고 아주 우연한 계기로 전생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거지.
그리고 그 소년은 자신을 죽인 남자가 환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지.
……왜 라파엘 드마뉴가 너를 떠났는지 이제 알겠어? 샤를마뉴?
* * *
마지막 업무를 마치고 황궁을 나서는 길은 평소보다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황금빛 외부 조명을 화려하게 밝혔지만, 죽은 유물들을 모아둔 박물관의 밤처럼 쓸쓸한 기운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 걸까?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을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기억이 꽃이 피어나듯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떠오른 기억은 무질서했다. 루크일 적의 기억과 라파엘로서 황궁에서 근무하던 기억이 두서없이 머릿속에서 엉켰다.
300년 전 처음 황궁에 들어와 감히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못 하고 발끝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걸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반면, 처음 입사하여 수습 비서관으로 선임 비서관의 뒤를 쫓아 걸었던 기억은 300년 전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내 방.”
그렇게 과거와 현재의 기억을 덧그리는데 무의식중에 내 방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 방은 어떻게 되었더라? 사실 황궁 안에 내 방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없다. 적어도 라파엘인 나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내 방은 라파엘의 것이 아니라 루크일 적에 사용했던 후궁의 방이었다. 호화롭고 찬란했지만 모든 것이 덧없었던 방.
루크일 적 사용했던 후궁의 건물은 황제의 일부다처제가 폐지된 후 박물관으로 그 쓰임이 바뀌었다. 황실 일가가 사용하는 내궁의 건물은 보안상의 이유로 공개할 수 없으니 내궁 다음으로 황궁에서 가장 호화로웠던 후궁을 공개한 것이다.
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과 수도를 여행하는 국민들의 필수 관광 코스라는 그곳을, 황궁에서 일하는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황실에서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나중에’, ‘언제 시간이 나거든’ 차일피일 미루어두었더니 이렇게 됐다.
그 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 침대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그대로 침대가 놓여 있을까? 한 권 두 권 사 모은 초라한 책들은 화려한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끌려가기 전에 앉아 있던 그 테이블과 의자는 그대로 남아 있을까?
후궁에서 지냈던 7년 동안 내가 직접 사 모은 것이 별로 없다 보니 추억할 것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앞으로 내가 직접 확인할 일은 없겠지. 떠나는 마당에 그 방 하나 확인하겠다고 다시 황궁에 발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방은 내 마음속에 영원한 미궁으로 남아 있으리라.
내가 죽은 후 그 방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의 애환과 슬픔이 묻혀 있을까. 그들도 나처럼 억울했을까. 모르겠다.
안녕. 내 작은 방. 이제 다시는 그 문을 열지 않을 거야.
집으로 가는 길, 여전히 운전을 하지 못해 택시를 잡아탔다. 황궁이 점처럼 보일 때 즈음 머릿속에 황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를 말해줄 거라 믿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며,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피해자의 거죽을 뒤집어쓴 그의 모습.
‘잘 가.’
‘그동안 고마웠어, 라파엘 드마뉴.’
……그만둘 때는 그만두더라도 이유는 말해줬어야 했나. 그럼 피해자인 척, 상처받은 척 구는 것은 그만두었을까?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속죄를 하지는 않았을까. 그래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그래도, 어쩌면…….
아파트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렸다. 길을 걸어가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어쩌면으로 시작하는 부질없는 공상들은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생각했던 심장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이건 모두 황제 때문이다. 뜬금없이 꿈속에 나온 황제가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서 그런 거다.
‘오랜만이다.’
‘……루크.’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다.
그 순간이었다.
“라파엘.”
꿈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눈앞에 그가 서 있었다. 얼음처럼 투명하게 얼어붙은 연녹색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가.
“아니…… 루크라고 불러야 할까?”
그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 * *
그가, 나를 루크라고 불렀다.
“어떻게…… 모두, 모두 기억한 겁니까?”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루크라고 부른 적 없는 그가 나를 루크라고 불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전생의 반토막도 기억하지 못해 피해자인 척 내 속을 뒤집어놓은 그가 내 전생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어떻게? 설마 모두 떠올린 건가? 각성이라도 한 거야?
더듬더듬, 토막 난 생각들을 간신히 입에 올려 문장을 완성했다.
그런데 내 물음에 황태자가 차갑게 조소했다.
“역시 그게 전생의 이름이었구나.”
“…….”
나는 또다시 갈피를 잃고 말았다. 무슨 말이지? 역시라니? 얼빠진 얼굴을 보며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정말이었나 보네. 당신이 전생 때문에 나를…….”
그가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토막 난 웃음을 내뱉었다. 웃음은 폐병쟁이의 기침처럼 툭툭 튀어나왔다. 그에 맞추어 내 심장은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불안했다. 그가 전생을 깨달은 건지 아닌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무서웠다. 만약 그가 모든 것을 떠올렸다면, 각성한 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종잡을 수 없어서 두려웠다.
한참을 밭은 웃음을 내뱉던 황태자가 돌연 웃음을 거두었다. 농도 짙은 연녹색 눈동자가 이글대듯 나를 향했다. 심장이 거세게 뛴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하려고…… 어쩌면……?
“아니지?”
“…….”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전생 타령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지?”
씹어뱉듯 토해내는 그 말에, 심장이 빠르게 식는다.
“……뭐?”
“아니라고 말해. 정말로 비참해질 것 같으니까. 다른 이유도 아니고 전생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나보고 믿으라니.”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우습다는 듯 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황태자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차갑게 식은 심장이 서서히 멈춘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어간다. 귀가 닫힌다. 이명이 들렸다. 아니, 이명이 아니다. 비명이다. 누군가의 비명. 300년의 시간을 건넌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
뭘 기대한 거야, 루크. 그는 너를 믿지 않아.
너 따위는, 너의 비참한 삶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300년 전 너의 가여운 삶은 그저 한낱 ‘전생 타령’에 불과하다잖아. 모든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그건 말도 안 되는 핑계라잖아. 네가 겪은 고통과 설움을 전부 부정하잖아.
뭘 기대한 거야…….
날카로운 발톱에 가슴을 찢어발겨지는 느낌은 300년 전 고문을 당할 때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욱 아팠다.
300년 전 존재했던 내 삶이 통째로 부정당했다. 내 삶을 부정하는 사람은 또다시 델루니안이다.
기대는 사라졌다. 어쩌면으로 시작했던 공상은 역시나로 잠들어 버린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한때 내가 어리석은 기대를 품었던 자가 서 있었다.
“빨리 다른 이유를 말해. 다른 게 있다고.”
“……마음대로 믿어.”
“뭐?”
“상관없잖아. 무슨 이유든.”
“……라파엘 드마뉴.”
“가버려.”
이제는 정말로 어떤 기대조차 하지 않을 거야. 가버려.
그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황태자가 내 팔을 잡았다.
“놔.”
“그게 진짜 이유라는 걸 나보고 믿으라고? 알아듣게 설명해야 내가 납득할 거 아니야!”
“설명?”
그의 팔을 뿌리치며 그 얼굴을 마주했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 내려앉은 이 시점, 나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없었다.
“무슨 설명이 필요해?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 거잖아?”
“정말 전생 때문이야?”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래, 그 말도 안 되는 전생 때문이야. 너는 못 믿겠지만 나는 그래. 그래서 네 얼굴이 꼴도 보기 싫고 역겹고 화가 나.”
둑이 터진 듯 심장을 가로막았던 말이 모두 터져 나왔다.
“근데 너라면 잊을 수 있겠어?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네가 알기나 해? 뼈마디가 벌어지고, 손발톱이 빠지고, 잠도 못 자고 두드려 맞고, 머리가 터졌는지 안압이 올라서 앞은 안 보이는데 다가오는 형체는 전부 고문관처럼 보여. 하지도 않은 일을 들먹이며 빨리 자백하래. 근데 나중에는 자백도 필요 없는지 혀를 자르더라. 아프다고 비명 지르는 게 싫었나 봐. 하지만 절대 죽이지는 않아. 왜인지 알아? 나를 죽일 사람은 따로 있거든.”
황태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게 바로 너였어. 내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은 사람. 그게 너였다고.”
“……뭐?”
“왜, 못 믿겠어? 그래, 그렇겠지. 너는 까맣게 잊어버렸으니까. 속 편하게 전부 잊어놓고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없었던 일처럼 치부하니까.”
“…….”
찬웃음이 흘렀다. 더 이상은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신은 참 불공평하지. 그 끔찍한 기억들을 피해자인 나만 기억한다니 말이야.”
“…….”
“너는 모르잖아. 네가 얼마나 끔찍하고 추악한 인간이었는지.”
‘오랜만이다.’
‘……루크.’
마음속에 떠오르는 평화로운 델루니안의 얼굴을 짓이기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아야 해. 너의 전생이 뭐였는지.”
“……그만해.”
“300년 전, 너는 황제였어.”
“라파엘, 그만. 그만하자.”
“제국의 성군이라 불리게 된 사람이었지.”
황태자가 고개를 젓는다.
“그만…….”
“하지만 사실은 잔인한 사람이었어. 잔인한 수준이 아니라 거의 살인광이었지.”
그가 하얗게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괜히 우스웠다.
“왜? 듣기 싫어? 그럼 그냥 미치광이의 헛소리라 생각해. 그냥 전생을 기억한다는 미치광이가 괜한 헛소리 하는 걸로 알아들으라고.”
“제발…… 라파엘, 제발 그만하자고.”
“그만하자고? 하하. 그럼 내 입으로 말하지 말까? 네가 찾아볼래? ……그럼 황실 서고에 가봐. 300년 전 기록을 찾아. 거기에 모든 게 있을 거야. 제국을 통일하고, 일리오니쉬 출신 황비와 결혼하고, 백성을 위한 통치를 시작했다는 성군과 그 성군의 버림받은 후궁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는 악녀라고 낙인찍혀 싸구려 영화에나 등장하게 됐지만, 사실은 아주 비참한 인생을 살았던 내 불쌍한 과거가.”
이 짧은 설명만으로도 황태자는 내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다. 제국의 중시조. 국민들이 사랑하는 제1의 황제. 하지만 사실은 추악하기 짝이 없던 그 사람.
“그 뒤에, 네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자각하고 난 후에.”
“…….”
“그 후에.”
나를 찾아와,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니야. 이제 와서 저자에게 사과를 받아봤자 뭘 해. 어차피 내 삶은 끝나 버렸는데.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 말을 남기고 집으로 들어갔다. 황태자는 나를 잡지 않았다.
동굴 같은 집의 암흑 속에 들어가자마자 심장 속에서 울컥울컥, 피처럼 울분이 솟아올랐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당신이 라파엘의 기억을 잃은 루크일 때도 당신을 사랑했어.’
‘뭐든지 받아줄게. 뭐든지 이해할게! 그러니까, 제발 내게 말해줘. 어째서 당신이 회피하려 하는지, 긴 이야기든 짧은 이야기든 뭐든 들어줄게.’
……거짓말이었잖아. 이 나쁜 새끼야.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안 믿을 거면서. 안 믿어줄 거면서…….
말 안 하길 잘했어. 정말로 말 안 하길 잘했어. 결국 그가 알았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안 말하길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