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10시가 되기 전인지라 샤를마뉴는 도착하지 않았다. 광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홀로 멍하니 서서 광장 앞에 세워진,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상을 보았다.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라도 하듯 풍성히 수염을 기른 그레고리는 말 위에 올라타 광장을, 더 나아가 광장 밑으로 펼쳐진 제국의 수도를 굽어보고 있었다.
델루니안 사후 델피온 2세의 아들로 황제가 된 그레고리는, 글쎄, 빈말로도 델루니안을 닮았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저 조각상이 만들어졌을 때 즈음에는 미술계의 화풍이 바뀌어 외모에 대해 철저히 고증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닮은 점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긴 닮지 않는 게 정상인가. 델루니안은 자식이 없었고, 그의 뒤를 이은 황제는 그의 조카였으니 어쩌면 외모가 다른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라파엘!”
그때 샤를마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샤를마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광장, 샤를마뉴의 모습이 어둠에 가려 희미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은 거대한 한 형체.
‘그를 위협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귓속에 잔혹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라파엘?”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을 치자, 샤를마뉴가 의아한 듯 걸음을 멈췄다.
가로등에 그의 얼굴이 비치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노란 가로등에 비쳐 호박색으로 반짝였다.
하아. 하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니야. 라파엘. 저 남자는 샤를마뉴야. 델루니안이 아니다.
“어디 아파? 다치기라도 했어?”
잠시 걸음을 멈췄던 샤를마뉴는 다시금 내게로 향했다. 두어 걸음의 거리는 금방 좁아져 이제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가 되었다.
샤를마뉴는 비에 젖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만졌다.
머리, 얼굴, 어깨…… 도자기 인형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뜨거웠다. 어쩌면 작게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침내 내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샤를마뉴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나를 껴안았다.
비에 젖은 셔츠가 얼굴에 부딪쳤다. 그 밑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뜨겁게 요동치는 심장이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 품에 안겨, 나는 멍하니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시드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롭니다.”
“샤를마뉴가 날 죽였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모르셨습니까?”
그가 손을 뻗었다. 본능적인 혐오감이 들어 그 손을 뿌리쳤지만 시드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손을 뻗어 단숨에 내 목을 움켜쥐었다.
처음에는 나를 위협하려는 속셈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그가 내 목, 그러니까 정확히는 내 귓불 뒤의 거미 모양 흔적을 엄지로 훑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르셨다니, 유감인데요.”
“……빙빙 돌리지 말고 당장 말해.”
“저는 당신이 다 아는 줄 알았습니다. 모를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나 얼굴이 똑같은데…….”
그 말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설마. 지금 그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델루니안. 당신을 죽인 황제.”
“…….”
“그가 샤를마뉴입니다, 루크.”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씹어뱉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 샤를마뉴가 그일 수 있다고?”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나보다 황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당신이, 고작 얼굴이 똑같다는 이유로 샤를마뉴와 그를 구분하지 못한다니 내가 더 놀라운걸.”
얼굴이 똑같은 건 그저 유전의 탓이다. 샤를마뉴는 그의 후손이고, 가끔 몇 세대를 뛰어넘어 유전이 발휘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얼굴이 같은 것은 어떤 증거도 되지 못한다.
나는 샤를마뉴를 잘 알았다. 델루니안은 말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 상세하게 꼽지 않아도 두 사람의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써 부정하며 시드니를 노려보자 시드니가 애석하다는 듯 처진 눈으로 웃었다.
“성격이 다르지요. 달라요. 압니다. 하지만, 루크.”
“내 이름 똑바로 불…….”
“시대에 따라 사람의 성향은 바뀔 수도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습니까? 그토록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았던 델루니안이 만약 요즘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닥쳐.”
“그는 분명 샤를마뉴가 되었을 겁니다, 라파엘.”
“닥치라고!”
“당신도 사실은 알고 있지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만약 델루니안이 요즘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으면 샤를마뉴가 됐을 거라고?
아니다. 순 거짓말이다. 이간질을 좋아하는 채스터턴의 교묘한 혀놀림에 넘어가면 안 된다.
델루니안은 잔혹한 군주였다. 동정이나 자비 따위는 태생적으로 거리가 멀었다. 요즘에 태어났으면 분명 반사회적인 인물이라고 낙인찍혔을 법한 인물이 델루니안이다.
하지만 샤를마뉴는, 그는 다르다. 혈기왕성한 청년답게 조금 거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는 동정을 알았다. 자비를 알았다.
백성의 억울함을 알고, 백성을 돕는 황제가 되기로 나에게 약속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델루니안일 수 있다고? 아니. 그건 불가능해.
“……믿지 않아. 내가 아는 샤를마뉴는 델루니안일 수 없어.”
그레고리 광장에 도착했을 때 시드니가 말했다.
“판단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믿지 않는다 했지.”
“곧 알게 될 겁니다. 당신만큼 델루니안을 잘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
“저도 몰랐던 부분을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대답 없이 내리려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당신은 왜.”
“예?”
“왜…… 나를 들쑤시는 거야. 왜.”
샤를마뉴가 델루니안이든 아니든. 도대체 왜 이런 식으로 나를 들쑤시는 거야.
시드니는 희미하게 웃었다.
“일종의…… 복수라고 해두죠.”
누굴 향한 복수인지, 누굴 위한 복수인지 몰라도 나는 그가 참으로 비열하다고 생각했다.
비열한 채스터턴. 비열한 시드니 카턴. 자신의 복수를 위하여 친구까지 팔아넘기는, 최악의 남자.
샤를마뉴가 말했다.
“이제……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샤를마뉴의 얼굴을 비치고 있던 가로등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꺼져 버렸다.
* * *
비서실장은 여전히 의식불명의 상태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복부에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황실 일가를 제외하고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비서실장이 피습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조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실에서 언론을 틀어막은 것이다.
아직 범인이 잡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용의자가 수습 비서관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황실의 위엄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겉으로 보기에 황실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일간지와 주간지, 그리고 정치, 경제 전문 잡지에서 황실에 대한 언급이 많이 줄었을 뿐이다.
그리고 황실 내부의 혼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서실장의 임무는 나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그의 전반적인 임무는 안보, 경제, 정치 등의 각 분야를 다루는 제1비서실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취합 수리하여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자 그 바로 아래 직책의 총무비서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에 허둥지둥하는 것은 일개 비서관인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내가 속한 제2비서실은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이미 하반기 일정은 다 나온 상태였고, 송년축제를 제외하면 큰 행사는 더 이상 없었다.
아인 퍼스가 실종되었지만 아무도 그에 관해 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그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함구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로의 행방에 대해서 묻지도, 대답하지도 말라는. 그저 일상적인 업무를 이어나가라는 그런 함구령.
그건 비서실장의 피습 사건을 함구한 것과 똑같은 이유였다. 아인 퍼스가 프락치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를 공식적인 적으로 돌리면, 황실은 프락치 하나 잡아내지 못하고 비서실이라는 황실 가장 깊숙한 곳에 그를 들여놓은 희대의 멍청이가 된다.
아마 아인 퍼스가 은밀히, 그러나 확실히 검거될 때까지 이런 상황은 지속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샤를마뉴는 공식적인 일정을 나섰다. 송년축제를 앞두고 황립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이 공부하는 현장을 살피고 일일학습교사가 되는 짧은 일정이었다.
“라파엘.”
“……예, 전하.”
“당신 안색이 안 좋은데.”
의상 담당자와 일정에서 입을 옷을 고르던 샤를마뉴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뒤에 선 나를 살폈다.
비서실장 피습 사태 이후, 그는 부쩍 나를 쥐면 깨질까, 불면 날아갈까, 마치 가녀린 영애를 대하듯 대하였다.
정작 그때의 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왔지만, 이틀이나 생사를 알 수 없이 실종되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이 되었던 것 같다.
그날, 광장에서 다시 만난 이후로 그는 부쩍 나를 살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감시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비서관은 분명 나인데 그가 나의 비서가 된 것처럼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내가 어디라도 가려 하면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고, 잠시라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는 것을 싫어했으며, 일정이 끝나 퇴근을 할 때면 그가 직접 데려다주겠다 고집을 부렸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니 황궁에 있으라는 충고에도 요지부동인지라, 결국 어쩔 수 없이 황궁 내 숙직실에서 잠을 청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샤를마뉴도 조금은 안정을 찾았는지, 퇴근까지는 받아들이게 된 것이 며칠 전 일이다.
“괜찮습니다.”
“몸이 불편하면 내 침대에서 쉬어도 돼.”
의상 담당자가 흘낏 나를 살폈다.
황태자의 침대라고?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해명하기도 이상하게 보이겠다 싶어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준비를 서둘러 주십시오.”
“…….”
나의 딱딱한 대답에 샤를마뉴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또다시 나를 향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불편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이상하게도, 불편하고 힘들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예.”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원래는 그의 모습을 꼼꼼하게 체크해서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근래의 나는 그러한 과정을 모두 생략했다.
비서관답지 못한 태도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체크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조금…… 거북스러웠다.
의전용 차량에 단둘이 타는 것은 내가 요새 가장 힘들어하는 일이 되었다.
앞에 수행기사가 있으나 샤를마뉴는 항상 블라인드를 올렸고, 온전히 단둘만 남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일부러 수첩을 바라보고 행사 일정을 두 번 세 번 점검하고는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수첩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샤를마뉴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라파엘.”
“……예, 전하.”
“……당신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습관적으로 괜찮다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으면!”
갑자기 그가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그가 일렁이는 연녹색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날 봐. 라파엘 드마뉴.”
그 말에 홀린 듯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연녹색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인 걸까. 아니면 두려움인 걸까. 나는 저 눈동자 속에 깃든 감정을 추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다시 화들짝 놀라 시선을 떼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샤를마뉴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계속 날 피해?”
“……피한 적 없습니다.”
“눈도 안 마주치잖아. 방금도!”
“아닙니다.”
“……이상해. 당신 이상하다고.”
샤를마뉴는 어떻게든 내가 아프다고 믿고 싶은 것 같았다. 내가 그를 피하는 게 전부 아파서 그런 거라고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러니까, 신체적으로는 괜찮았다.
그냥.
‘그가 샤를마뉴입니다, 루크.’
……그 목소리가 귀를 떠나지 않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얼굴을 볼 때면,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시드니 카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면 나는 샤를마뉴의 얼굴에서 찰나의 순간이지만 델루니안을 겹쳐 보고,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특히나 샤를마뉴가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듯 웃지도 않고 나를 바라보는 통에 그러한 기시감은 더욱 심해졌다.
패기 넘치는 청년답게 웃는 샤를마뉴라면 모를까, 정색하는 샤를마뉴는 확실히……델루니안을 닮았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정말로 당신이 델루니안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부쩍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생각하고도 스스로 놀라 아니라고 황급히 부정하기 일쑤였지만, 감염률이 높은 지독한 바이러스처럼 한 번 뿌리를 내린 생각은 툭하면 튀어나와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만약, 만약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당신이 이럴 때마다 난 정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거냐고.”
샤를마뉴의 목소리가 분노와 고통으로 얼룩져 갔다. 그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그저 내가 휘둘렸을 뿐이다. 간사한 자의 세치 혀에 내가 휘둘렸을 뿐이야. 당신은 잘못이 전혀…….
……만약 샤를마뉴가 델루니안이라면?
그만. 그만해.
“라파엘, 대답을 좀,”
“그만.”
“……뭐?”
“그만,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둬. 제발.
* * *
샤를마뉴는 누가 봐도 저기압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어린아이들 앞에서 자기 나름대로는 웃는다고 노력하는데 어찌나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는지, 별의별 꼴을 다 봤다고 자부하는 황실 출입 기자단이 당황하여 셔터를 누르다 말고 곤혹스럽게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 사태의 원인이 된 나는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고작 이런 일로 표정 관리 하나 못 하는 황태자에게 부하 직원으로서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또 내가 내뱉은 몇 마디에 중심을 못 잡는 것을 보니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는 잘못이 없다.
사실 이건 내 잘못이다. 스스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욱하는 대로 내뱉었으니까. 이런 내가 누구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겨우겨우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일일교사를 맡은 샤를마뉴는 아이들의 급식 지도를 해야 하지만 이 상태로는 무리다 싶었다.
나는 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경호관들에게 기자들을 내보내라 지시한 후 샤를마뉴에게 다가갔다.
“전하…….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본 샤를마뉴는 대꾸 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이 두어 번 빠르게 깜빡였다. 마치 안에서 치솟는 감정을 갈무리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아무도 없는 텅 빈 응접실 안. 문을 닫자마자 샤를마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오전의 일은 죄송합니다.”
“…….”
“개인적인 일로 전하께 화풀이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저 개인적인 일입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정말 죄송…….”
“라파엘 드마뉴.”
그가 경직된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랐다.
“당신은 지금 내가 사과 하나 받자고 이러는 줄 아는 것 같은데.”
“…….”
“나는 며칠 동안 당신을 이상하게 만든 그 ‘개인적인 일’이 뭔지 궁금한 거라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
정적이 흘렀다. 침묵은 영원처럼 길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나 역시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 말 외에 내가 무슨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긴 이야기였고,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침묵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그저 눈을 내리깔고 그가 어떤 대답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 샤를마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
“나는 우리가 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연인 관계에도 프라이버시는 존재합니다.”
“그래, 프라이버시. 나도 알아.”
갑자기 샤를마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자조적인 웃음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 이틀 동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았어.”
“…….”
“당신이 사라져서 나는 정말 미칠 것 같았고, 심장이 멈출 것 같다는 공포가 뭔지 알게 되었지만, 당신이 무사하다는 걸 알게 되자 어째서 시드니를 통해서 내게 연락을 취했는지! 그딴 것 따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안도했으니까.”
샤를마뉴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샤를마뉴가 감정을 참을 때 취하는 버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날 이후 당신은 이상해졌고, 나는 내가 뭘 잘못한 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지. 당신이 얘기해 줄 거라 믿었거든. 왜냐면…… 우린 연인이니까.”
“전하, 그건.”
“그런데 당신이 하는 말은 고작 프라이버시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
“무심한 연인은 날 보면 몸을 피하기 급급한데 나는 그 이유조차 모르는 이 상황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주인을 따르는 개새끼처럼 당신이 나에게 행하는 모든 잔인한 행위를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주인을 따르는 개새끼라니.
“그런 게 아닙니다, 전하. 그저…….”
그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것뿐이다.
내가 겪어온 일들. 300년의 시간을 초월한 이야기. 전생과 현생, 나를 죽인 사람과 똑같은 얼굴을 한 당신.
마음속에 심어진 의혹의 씨앗과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당신이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지 모르는 것뿐이야.
“너무, 긴 이야기라……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
“전하께서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요.”
두렵다. 당신이 나를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까 봐.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봐.
내가 어째서 당신을 두려워하고 그토록 혼란스러워했는지 이해하지 못할까 봐.
내 말에 샤를마뉴가 조용히 되물었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
“당신이 라파엘로서의 기억을 잃었을 때에도 당신을 사랑했어.”
“…….”
“뭐든지 받아줄게. 뭐든지 이해할게! 그러니까, 제발 내게 말해줘. 어째서 당신이 회피하려 하는지, 긴 이야기든 짧은 이야기든 뭐든 들어줄게.”
그 말은 퍽 유혹적이었다. 당신에게 말하면 모든 게 쉬워질까. 당신의 얼굴이 전생에 나를 잔인하게 죽인 남자의 그것과 똑같아서 두려웠다고 말하면 편해질까. 과연 그럴까?
말해도…… 될까.
충동을 참지 못하고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삐리리리 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 * *
“다시 잠이 드셨어요.”
“……그렇습니까.”
비서실장이 깨어나서 나를 찾았다는 소식에 급하게 달려왔건만, 내가 도착했을 때 비서실장은 다시 잠든 상태였다.
그래도 코마 상태로 빠진 것이 아니라 그저 수면이라고 하니 그나마 좀 안심이 되었다.
“그럼 전 잠시 바깥에 다녀올게요.”
간병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비서실장을 내게 맡기고 자리를 비웠다.
나는 그녀의 자리에 대신 앉아 잠든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늘 독사처럼 무섭던 비서실장이 피습을 당하여 누워 있는 꼴을 보니 지금 나라에 일어나는 일이 모두 꿈만 같았다. 믿을 수 없이 기괴한 꿈.
그때 내 시선을 잡아챈 것이 있었다. 비서실장의 주먹 쥔 손안에 흰 무언가가 보였다.
휴지인가? 슬쩍 잡아 뺐는데 휴지가 아니라 종이였다.
“그림…… 1124?”
그림 1124라. 이건 뭐지. 뭔가 암호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이게 비서실장이 나에게 하려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코마에서 깨자마자 가족보다 나를 먼저 찾을 만큼 급하게 처리해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니까.
나는 일단 쪽지를 갈무리해 주머니에 넣었다. 내 것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비서실장이 알고 있으니 깨어나면 알아서 처리하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병실의 문이 열렸다. 간병인인가 싶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에반?”
내 눈에 들어온 건 간병인도 누구도 아닌 에반이었다. 어째서 에반이 여기에 있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에반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남의 조카 좀 부려먹지 말라니까. 깨자마자 부르고 지랄이야, 지랄은.”
“……아는 사이야?”
“그럼 모르겠냐?”
“…….”
“저놈이 아는 제정부 직원은 제정부장이랑 내가 전부인데.”
에반이 턱짓으로 비서실장을 가리켰다. 뭐야.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말투가 거칠잖아.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에반이 내게 손짓했다. 뭐 하자는 거지?
“뭐 해? 나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잠이나 쳐 자빠져 자는 놈 얼굴 구경해서 뭐 하게?”
“잠이나 쳐 자빠져 자는 놈…….”
하여튼 말투 좀 보라고. 저 말투를 보고 누가 델라윈 공작이라고 생각하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잠에서 언제 깰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자리를 좀 비운다 해도 병실 앞을 지키는 경호관이 수십이라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주머니에 든 쪽지가 멀쩡히 있는지 확인하며.
병원 밖 공원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려니 그가 다리를 절룩대며 음료수를 사와 내게 던졌다.
여차하면 얼굴을 맞을 뻔했던지라 짜증을 담아 노려보자 그가 혀를 찼다.
“반사 신경 좀 보라고.”
나는 당신이랑 다르게 싸움꾼이 아니거든.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고개를 돌리자, 한참 후에 에반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냥 거기 있을 것이지.”
거기라면, 아마 제정부의 은신처를 말하는 것일 게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출근해야 하니까.”
“…….”
에반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음료수만 홀짝였다.
“너 언제까지 이 일 계속할 거냐?”
한참 후 에반이 뜬금없이 물었다. 언제까지 할 거냐고?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황태자의 전담 비서관이었다. 내 밑에 소속된 비서관은 여럿 있지만 선임 비서관은 나 하나였다.
그 말인즉, 황태자 소속 비서관 중에서는 내가 가장 급이 높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그가 황제가 될 경우 내가 비서실장이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는 뜻이었다.
비서실장은 제1비서실에서 뽑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황제가 특별히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 제2비서실에서 뽑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권력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의 비서관으로서의 경력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편이다.
아마 끝까지 그와 함께하지 않을까, 라고 내가 말없이 생각할 때였다.
“이번 일 정리되면…… 일 그만두는 게 어때?”
갑작스러운 에반의 말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그가 습관적으로 다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 그러니까 누나가 내게 남겨 준 성이 하나 있어.”
성?
“어떤 성?”
“라윈에 있는 고성. 델라윈가에 남은 마지막 성으로, 아버지가 누나한테 주셨지.”
라윈이면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델라윈 공작의 영지다.
황실이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며 영토 개념도 없어지고 그저 조그마한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라윈은 황제의 여름행궁이 있는 곳이니만큼 아름답기도 무척 아름다워 델라윈 공작가의 자랑이나 마찬가지였다.
“라윈으로 가자.”
가자니. 같이 가자는 말인가.
“싫다면?”
“황태자 때문이야?”
“…….”
순간 에반이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간의 당혹스러운 침묵 후 내가 내놓은 대답은 겨우,
“나도 직장이 있어.”
라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에반은 내가 겨우 짜낸 대답 따위 코웃음으로 넘겨 버리며 받아쳤다.
“굳이 그게 아니라도 되잖아. 너 영리한 녀석이니까 라윈에서도 다른 일 할 수 있을 거 아냐. 아버지가 남겨 주신 회사, 나 대신 네가 경영해도 좋고.”
외조부께서는 운영하던 회사가 있었다. 그는 내게 경영권을 주고자 하였으나 나는 너무 어렸다.
그 탓에 경영권은 현재 델라윈 공작인 에반이 갖게 되었지만, 워낙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탓에 전문 경영인에게 맡긴 지 근 10년이었다.
이제 와서 나더러 경영하라고? 말도 안 돼. 아니, 그것보다.
“왜 이제 와서 삼촌 행세야?”
나는 정말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장 힘들었을 때는 매몰차게 떠나 버렸으면서, 왜 이제 와서 삼촌이랍시고 안 어울리는 행세를 하는지.
내 물음에 에반이 조용히,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대답했다.
“……때가 됐으니까.”
“뭐?”
때가 됐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때가 됐다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찰나, 에반이 몸을 일으켰다. 다 비운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그가 말을 끝냈다.
“잘 생각해 봐. ……네 삶을 어디서 다시 시작하는 게 좋을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간다.”
“어이, 에반! ……삼촌!”
에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렸다. 나는 정말로 찝찝해졌다.
* * *
긴 이야기를 나중으로 미뤄둔 채 비서실장의 병원으로 향했던 그날 이후로 나를 대하는 샤를마뉴의 태도가 달라졌다.
일단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이전처럼 마냥 불안해하고 답답해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 괜찮으면 같이 영화 볼래?”
그는 마치 요 며칠 동안 어색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정하게 굴었다.
물론 이때까지 그가 무심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지나치게 다정해서 집착에 가까웠던 것이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자신의 다정함이 내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 하루 종일 눈치를 보다가 내가 퇴근할 때에야 데이트 신청을 하는 그의 얼굴은 긴장과 기대로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내일…….”
나는 머릿속으로 천천히 스케줄을 체크했다. 송년축제 준비로 한창 바쁜 시기였다. 삼 주 뒤가 송년축제였고, 다들 맡은 일을 처리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내일…… 바쁜데…… 나는 대답 없이 샤를마뉴를 살짝 바라보았다. 그는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직 똑바로 마주하기가 힘들어 시선을 돌리자 그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가 귀에 꽂히는 순간, 나는 대답했다.
“시간, 됩니다.”
나는 샤를마뉴가 델루니안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데 왜 계속 그를 불편해하는가. 왜 그에게 상처를 주는가.
샤를마뉴의 말이 옳았다. 언제까지 개인적인 일이라 회피하며 그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공포였다. 그에게는 폭력이 되는 공포.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째서 내가 당신을 피했는지, 그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를 믿는다.
“정말? 당신 바쁘지 않아?”
제가 물어 놓고도 이렇게 쉽게 확답이 떨어질지 몰랐던지 샤를마뉴는 연신 되물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우면서도 짠했다. 샤를마뉴의 말마따나 바쁘긴 하지만 괜찮다.
그래도 당장 급하게 처리할 것들은 오늘 몰아치듯 끝냈고, 주문한 것들은 다음 주에야 도착하기 때문에 내일은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괜찮습니다. 대신 경호상의 문제가 있으니 황궁 안에서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내 대답에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샤를마뉴를 보니, 조금 바빠도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샤를마뉴가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간신히 막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방 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시드니 카턴. 도대체 언제 내 휴대폰에 자기 번호를 저장해 놨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뭐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곱게 나갈 이유도 없고. 무심한 듯 사실은 경계한 채로 전화를 받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시드니 카턴이 빠르게 말했다.
-도주 중이던 아인 퍼스가 잡혔습니다. 지금 수송 중입니다.
“……뭐?”
-그리고 에반이 크게 다쳤습니다. 이쪽에서 수습할 수가 없어 서북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그쪽으로 차를 보낼 테니…….
그 순간 나는 택시 기사에게 서북병원으로 차를 돌려 달라고 했고, 차는 빠르게 외부순환도로로 빠졌다.
시드니 카턴이 자신도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도로를 내달리는 택시 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인 퍼스가 잡혔다. 생각보다 이른 발각이다.
도대체 어떻게 잡힌 걸까. 에반은 왜 다쳤지? 크게 다쳤다면 어느 정도로 다친 걸까.
제정부 은신처 안에는 상주하는 의사들이 있다. 그들로 수습할 수 없을 정도면, 혹시 생명에 위협이 가는 수준인 걸까.
날 듯이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달려갔다. 총상이었다. 좌측 옆구리를 총알이 관통했고, 도착했을 때 늑골이 부러져 폐를 찌르며 기흉까지 발생했다고 했다.
이미 응급수술에 들어간 상황이었고, 의사에게서 상태를 듣고 바로 수술 동의 서명을 했다.
빨간 불이 켜진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몇 시간 후 시드니 카턴이 달려왔다.
“수술 중입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벽에 몸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에반이 왜 저렇게 된 거지?”
“일이…… 좀 있었습니다. 설명하긴 복잡합니다만.”
“난 들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에반의 보호자로서 말이야.”
시드니와 잠시 시선이 얽혔다. 그가 보기 드물게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인 퍼스가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아인 퍼스를 체포한 사람이 에반입니다. 그 와중에 아인 퍼스가 총기를 무단으로 사용했고, 에반과 파트너로 움직였던 요원은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
현직 작전요원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문득 아인이 입사할 적에 경호원들을 제치고 사격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사격 시험에 1등 했다고 실전에서 잘하라는 법은 없는데, 아마도 아인 퍼스는 전직 작전요원과 현직 작전요원을 상대로 밀리지 않을 정도의 사격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 모르긴 모르지만 제정부의 요원들은 분명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제국 내 최고의 인간병기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일반인 한 명이 거의 제압할 뻔했다고? 그게 가능해? 어디서, 어떻게 훈련을 받았으면?
“아인 퍼스는 지금…… 그래서 뭘 하고 있지?”
“취조 중입니다. 일단은 무허가 총기 사용에 대한 혐의로요. 물론 묵비권을 행사하긴 합니다만.”
“……그가 자백할 거라고 생각해?”
“안 하면, 하게 만들어야죠.”
그렇게 말하며 서늘하게 웃는 그를 보자니 과거의 채스터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두렵습니까?”
“……당신은 전혀 변하질 않았네.”
시드니 카턴의 영혼은 채스터턴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 잔인한 성격은 300년의 시간을 건너 놓고도 변하질 않았다.
이래놓고, 나더러 샤를마뉴가 델루니안이라는 걸 믿으라고? 아니, 못 믿어.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해야 하는 일.”
나를 모함하여 죽이는 일도 해야 하는 일이었을까. 비아냥대듯 코웃음을 치자 시드니 카턴이 달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라파엘, 당신과 아인 퍼스는 달라요.”
“……알아.”
“그는 제국의 적입니다. 샤를마뉴의 적이자, 당신의 적이기도 하지요.”
나도 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저.
“나도 그때 당시 제국의 적이었어?”
“…….”
시드니 카턴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나는 그게 궁금했다. 제국의 적을 처단하는 것이 해야 할 일이라는 당신. 나도 그때 당시 제국의 적이었는지.
“그건…….”
“그건?”
그때,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집도의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말과 함께 바로 중환자실로 옮길 것이라 했다.
중환자실? 위독한 것인가 싶어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떨어졌지만, 당장 위독한 것은 아니고 수술 후 집중관찰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일단 당장 죽을 정도로 위험한 건 아니라는 거지.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에반이 중환자실로 옮겨 가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를 쫓아가려던 나는, 문득 방금 전까지 시드니와 어떠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아, 맞아.
“그래서 다시 말해봐. 당신 입장에서 나는 제국에서 사라져야 하는 사람이었는지.”
그때까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드니 카턴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로 알고 싶습니까?”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그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인 퍼스를 만나주십시오. 그가 자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가?”
“예, 당신이요. 그는 분명 당신을 만나면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겁니다.”
어째서?
내 얼굴에 찍힌 물음표를 읽었는지 그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당신을 무척…… 증오하거든요.”
“……증오한다고?”
“예. 아주 많이.”
또다시 드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어째서 나를 증오한단 말인가?
그가 나에게 무언가 나쁜 짓을 하려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가 실제로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나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 항상 그랬다. 그의 모든 행동의 동기에는 원인이 없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걸까.
“그가 나를 증오한다는 걸 당신은 어떻게 알아?”
“그것도, 그를 만나면 알게 될 겁니다.”
답답하다. 이런 식으로 질질 끄는 전개를 나는 무척 싫어했다.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선 당장 사실을 털어놓으라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아인 퍼스가 그동안 내게 해온 일들과 나를 증오하는 이유에 대해서.
도대체 왜 그랬는지 묻고 싶었다. 이번이 아니면 평생 그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
“……좋아. 앞장서.”
어디 한번, 모두 파헤쳐 보자고.
* * *
문을 열자 지난번 아인 퍼스의 어머니를 취조했던 방과 유사한 형태의 취조실이 눈앞에 드러났다.
방 중앙을 가로지르는 유리창이 공간을 반으로 나누어놓았다. 이쪽에는 편한 옷을 입은 남자 두엇이, 저쪽에는 아인 퍼스가 수갑을 찬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쪽은 어두웠고, 저쪽은 눈이 아플 만큼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아인 퍼스는 천장을 향하여 고개를 젖힌 채 미동이 없었다.
“성과는?”
“없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써봤는데, 통 입을 안 열어요.”
갖은 방법이라니……? 겉으로 보기에 아인 퍼스는 외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취조 중 고문은 법률상 금지되어 있지만 사실은 아직까지도 암암리에 일어나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올 때도 나름대로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해서 의외다.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취조인 중 한 명이 말했다.
“원래 드러나는 곳에 하면 안 되는 법이거든요. 아마 죽을 맛일 겁니다. 아주 독종이에요.”
그럼 이미 고문을 당했다는 말이지.
시선을 돌려 아인 퍼스를 바라보았다. 천장을 향한 고개는 아래로 내려올 생각이 없다.
죽을 맛일 거라고? 과연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피부가 평소보다 한층 더 창백했다.
도대체 뭘 한 걸까.
300년 전에는 무식하게 때리고, 찌르고, 베고, 형틀을 이용해 근육을 쥐어짜고, 무식하다면 무식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는데 세상이 발전할수록 고문은 우아한 듯 지독하게 변하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음창을 뚫고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아인 퍼스가 움찔거리며 몸을 털었다.
마치 잠들어 있던 짐승이 몸을 털고 일어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천천히 하늘을 향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파란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핏발 선 파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했다.
메말라 갈라진 입술이 열린다.
“안녕, 비서관님.”
* * *
아인 퍼스의 창백하고도 비린 미소가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마치 포식자를 마주한 먹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두려움.
나는 그가 두려웠다.
고문으로 창백하게 질려 널브러져 있고, 심지어 수갑까지 찬 사람이지만 나는 그가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내 목 줄기를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그건 아마도 그의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증오로 불타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눈동자.
“비서관님과 얘기하고 싶어요.”
아인 퍼스의 요청에 취조관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드니 카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반대하자 아인 퍼스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다시 말했다.
“거래를 하죠. 비서관님과 단둘이 얘기를 하게 해줘요. 그럼 모든 진실을 알려줄게.”
“뭐?”
“대신 당신들은 모두 나가. 나와 비서관님, 단둘만 남아야 해요.”
시드니 카턴이 말한 그대로였다.
단둘만 남으라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는지 시드니 카턴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취조관들은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괜히 힘 빼지 않고 모든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말이 퍽 유혹적이었는지 의사 결정자인 시드니 카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좋아. 대신 안전을 위해 그는 이곳에, 너는 그곳에서 대화하는 걸로 하지.”
“상관없어.”
“10분이면 충분하겠지?”
아인 퍼스가 씩 웃었다.
“충분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러는 걸까.
시드니는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바깥으로 나갔고 취조관들이 그 뒤를 이었다.
달칵, 문이 닫히자 유리벽을 가운데에 두고 나와 아인 퍼스만이 존재하는 공간.
저쪽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두었기 때문에 아인 퍼스가 이쪽으로 올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괜히 촉각이 곤두섰다. 마치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짐승을 보는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웠다.
유리벽에서 두어 걸음 물러나는 나를 보며 아인 퍼스가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래.”
“뭘 그렇게 긴장하세요.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말투가 다르다. 저게 그의 진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네가 한 일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아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뭘요?”
“…….”
“비서관님 교통사고? 아니면 아인츠만의 장례식? 그것도 아니면, 비서관님 보약 말하는 걸까.”
너무나 태연한 대답에 순간 말을 잃었다. 선뜩했다. 죄의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저 뻔뻔함. 저게 내가 한동안 옆에 달고 다녔던 아인 퍼스라는 거지.
“정말 너였어?”
“그럼요. 제가 했죠. 하나 더 알려 드릴까요?”
그가 속삭였다.
“아인츠만 그 개자식도 제 손에 죽었어요, 비서관님.”
“……뭐?”
“자기 몸은 끔찍하게 챙기는 인간이었거든요. 소수민족이라면 치를 떠는 인간이 몸에 좋다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챙겨 먹더라고요. 보약이라고 챙겨 넣는 건 일도 아니었어요.”
하하하. 그가 천진하게 웃었다.
보약…… 그거였구나. 머리통을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어지러웠다. 갑작스러운 아인츠만의 죽음이 그거 때문이었어.
보약. 내게도 챙겨준 그것. 너였구나. 너와 그 일리오니쉬 의사가 저지른 일이었구나. 그걸 나에게도 준 거였어.
도대체 너는…….
“……너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울컥, 가슴속에서 튀어나온 말에 아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가 터벅터벅 유리창 쪽으로 다가왔다.
“아시잖아요? 이제 알 때도 됐는데.”
“…….”
“15년 전 그날.”
그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엄마가 그랬어요. 이젠 대업을 이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15년 전 그날. 비행기를 타기 전에.
부모님으로부터 걸려온 국제전화. 엘, 엄마 곧 돌아갈게! 그리고 귀찮아서 금방 끊어버린 나. 그날…….
“부모님께 죄송해요. 아직…… 남았는데.”
울지도 못하고 TV를 보던 그때, 너는 뭘 하고 있었나.
그때 아인 퍼스의 파란 눈동자가 선뜩하게 빛났다.
“아직, 델루니안 그 개새끼가 남았는데.”
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 지금, 뭐라고.”
“가장 극적인 순간을 노린 게 문제였을까. 그 새끼만큼은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 말이야.”
“다시, 다시 말해봐. 지금 너 뭐라고…….”
아인 퍼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뭘 그렇게 놀라요, 비서관님.”
“…….”
“사실 당신한테는 크게 악감정이 없어요. 좀 거치적거릴 뿐이었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이상해. 분명 델루니안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인은 태연했다.
내가 잘못 듣기라도 한 걸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분명히 들었다. 그가 델루니안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어떻게 300년이나 지나도 변하질 않아?”
“뭐?”
“그래도 내가 항상 경고했잖아. 라쉬네라고.”
라쉬네.
……그 순간 어떤 기억들이 폭발하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억의 파편들이 드문드문 끊긴 기억을 비추었다.
내 진맥을 보던 일리오니쉬 의사. 전설 속 엘프처럼 생긴 그가 입모양으로 무언갈 말했지.
파편은 조금 더 옛날의 기억을 들췄다.
연회장. 내 뺨에 입을 맞추던 일리오니쉬 황비. 그녀가 했던 말.
라쉬네. 나는 아직도 그 의미를 몰라.
“몰랐구나, 가엾게도.”
“…….”
“라쉬네에는 여러 뜻이 있어. 축복한다는 의미도 있고, 무운을 빈다는 의미도 있지. 하지만 마지막 의미는 뭔 줄 알아?”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잔인한 푸른 눈동자가 깨진 유리창처럼 날카롭게 나를 꿰뚫는다.
“명복을 빈다는 의미야, 루크.”
그 순간 아인 퍼스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이는, 300년 전 요정처럼 아름다웠던 일리오니쉬 황비의 얼굴.
오랜만에 그 이름을 입에 담아보았다. 300년 전에는 듣기만 하고 차마 부를 수 없었던 그녀의 이름을.
“……안나 레브로비치?”
아주 먼 옛날의 이름, 이제는 역사책에나 기록된 이름을 부르자 아인 퍼스가 눈을 휘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이름 오랜만이네요. 근 300년 만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너무 예상치 못한 해후였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있을 수 있어.”
황망히 물어보자 아인 퍼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영혼은 되돌아오게 마련. 나라고 다를 리 있겠어?”
“어째서…….”
“멍청한 소리 하지 마요, 비서관님. 알잖아요. 난 내 과제를 끝내기 위해 돌아왔을 뿐이야.”
“과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끝내지 못한 영혼의 과제를 말하는 것인가?
내 물음에 아인 퍼스가 먼 과거를 그리듯 천장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황제 델루니안, 그 개새끼한테 빚을 졌지.”
그 말을 하며 고개를 내린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차가워 소름이 끼쳤다.
“내 삶은 그렇게 끝날 게 아니었는데 델루니안이 강제로 끊어버렸기 때문에…….”
강제로 끊다니. 그가 황비를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그녀가 황후에 오른 후 몇 년 살지 못하고 금방 죽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걸 소재로 영화도 만들어졌고.
영화에서는 루크인 내가 그녀를 저주해 일찍 죽었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 델루니안이 죽였다는 걸까.
“너 때문이야.”
“…….”
“너 때문에 나는 과제를 다 끝내지 못했어. 나의 과제는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
어째서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델루니안을 향한 복수가 당신의 과제인가?”
“말하자면?”
“그럼 그를 찾아 복수하면 됐잖아. 왜 나를 죽이려 했어!”
가장 묻고 싶은 건 그거였다. 왜 하필 나를 죽이려 했는지. 나는 델루니안이 아니고, 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네가 거슬리니까.”
“……뭐?”
“항상 그 새끼 옆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내 계획에 너는 없어야 했어.”
옆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는다고? 내가? 내가 누군가의 옆에 항상 붙어 있다고?
그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금발의 파란 눈. 윤회를 결심하며 바란 조건이었지. 그건 모두 델루니안 그 개새끼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기 위함이었어.”
“……어째서 금발의 파란 눈이야.”
“그 새끼가 환장하는 조합이었잖아. 그렇죠, 비서관님?”
갑자기 아인 퍼스가 아하하, 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금발의 파란 눈. 델루니안이 환장하는 조합. 그리고 그 누군가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때 그가 정색했다. 무기질과 어울리는 마른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근데 왜 그 새끼는 또다시 너한테 빠진 걸까.”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내가 여기 있는데. 자문하듯 중얼거린 그가 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금 그가 말하는 사람은 델루니안이다. 델루니안. 샤를마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널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불완전한 각성을 해버렸을까? 거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지.”
“…….”
“네가 각성하지만 않았어도.”
델루니안은 내가 차지했어. 그 심장에는 내 칼이 꽂혔을 거라고. 아인 퍼스의 다정한 속삭임이 나를 옭아매었다.
시드니가 던져놓은, 외롭게 돌고 있던 의혹의 톱니바퀴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아인 퍼스의 것과 아귀를 맞추어 돌아가는 톱니바퀴는 묻어두었던 진실을 끌어 올렸다.
“그래도 나에게는 시간이 많아.”
“…….”
“다음 생에는 그 새끼도 황태자로 태어나지 않을 거고, 나도 이렇게 태어나지는 않겠지.”
……이것이 진실이다.
하얗게 질린 나를 보며 아인 퍼스가 환하게 웃었다.
“비서관님, 전하께 전해주시겠어요? ‘나를 기다리라’고…….”
* * *
“끝났습니까.”
취조실 밖에는 다른 사람은 어디 갔는지 시드니가 홀로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
그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무슨 얘기를 하고 나왔지? 심장이 머리에 있는 것처럼 머릿속이 쿵쿵 울렸다.
“그녀가 자신을 밝히던가요?”
그녀. 방금 그녀라고 했나?
“당신은 알고 있었어?”
“……예.”
“어떻게?”
“그를 레브로비치라고 의심할 때부터요. 델루니안인 샤를마뉴 옆에 루크였던 당신, 채스터턴이었던 저까지 돌아왔는데 하필 그 시기에 사라진 줄 알았던 레브로비치의 후계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우연일 수 없잖아요.”
델루니안인 샤를마뉴, 라는 말이 가슴에 쿡 박혔다.
“정말로…… 샤를마뉴가.”
델루니안이냐는 질문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문 나를 대신하여 시드니가 말을 이었다.
“델루니안입니다.”
“…….”
“아직도 못 믿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데, 믿게 된다. 전생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 그를 델루니안이라고 하니, 믿고 싶지 않아도 믿게 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
어떻게.
“제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델루니안이 요즘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필히 샤를마뉴가 됐을 거라고.”
“…….”
“당신이 기억하는 그는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한 정복 군주였지만, 라파엘.”
“…….”
“그도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니었답니다.”
델루니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생 웃는 얼굴이라고는 모를 것 같던 그 사람. 적을 내치는 데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던 그 사람의 얼굴 위로 샤를마뉴가 겹쳐졌다.
지금은 방탕한 황태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촉망받는 황태자였다.
어릴 적부터 작은 동물을 사랑하고 약자를 우선시하던 황태자 샤를마뉴는 제국대학 4학년 시절 현재 시행 중인 14세 미만 아동의 의무교육을 보장하는 법의 골자를 만들었고, 노동운동이 활발했을 때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14세 미만의 아동의 노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상원의회에서 통과시키도록 하였다.
물론 그 이후로 상원 의원들의 견제가 심해지며 뒤늦은 사춘기를 맞아 평판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본성은 선한 사람이다.
그 두 사람이 같다고. 델루니안도 사실은 선한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선한 사람이, 나를 죽였잖아.”
7년을 함께한 나를 죽였잖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시드니 카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약속했었죠. 어째서 당신이 제국에서 사라져야 했는지 알려주겠다고.”
“……말해봐.”
“결론부터 말하면, 그랬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그랬어요.”
순간 말문을 잃었다.
“제국 통일을 이루었지만 제국을 안정화시키려면 막대한 지출이 필요했습니다. 정복은 쉽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편입하는 것은 쉽지 않죠.”
“……그래서?”
“일리오니쉬 황비가 필요했습니다. 정확히는 그녀가 들고 온다는 지참금이 필요했죠.”
지참금. 꿈에서 본 황제의 문서가 떠올랐다. 일리오니쉬 공주의 지참금이었던 아이젠. 그리고 아이젠에 있는 것은 막대한 양의…….
“……광산?”
“예. 광산이요. 하지만 라파엘, 황비의 지참금은 명목상 제국에 귀속되는 것일 뿐, 실제로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은 황비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말해봐.”
“……그건 일종의 거래였죠. 황비는 황후가 되어 일리오니쉬 하프 황제를 만들고자 하였고,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래서 황후를 몰아냈구나. 그래서.
꿈에서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몸이 약했던 황후가 반역자가 되어 처형을 당했다는 황제와 백작 사이의 대화.
황후가 모함을 썼다는 것은 알았고, 그것을 채스터턴이 꾸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배경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나는 뭐가 문제였지?”
“300년 전 여름행궁에서의 대화를 기억합니까?”
‘벌집을 치우려면 여왕벌만 잡으면 됩니다. 어째서 애꿎은 일벌까지 잡으려 하는 겁니까.’
‘글쎄요…… 제가 농부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잡은 게 여왕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다음에 그가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흐릿했다. 분명 무어라 했는데…… 그때 시드니 카턴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당신도 여왕벌 중 하나였습니다, 라파엘.”
그리고 그때 떠오른 채스터턴의 마지막 말.
“아니면 두 마리든가요.”
“내가…… 여왕벌이었다고?”
“예. 전혀 예상치 못한 여왕벌이었죠. ……그때까지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황제의 마음이 문제였어요.”
황제의 마음?
“애초에 없애려고 했던 건 리안이었습니다. 기사이자 공작이며,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였으니까요. 그가 혹시라도 황제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용했다면 황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황제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네요. 그저 당신을 보는 눈이 리안을 볼 때보다 더욱 깊어졌다는 것밖에는.”
……이건 어떤 감정일까. 손끝이 차게 식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이 미친 감정은.
“그 의심에 쐐기를 박은 건 그날이었습니다.”
“……언제?”
“당신이 여름행궁에서 황제를 잘못 부른 날이요. 그날 당신의 방에 든 모든 귀족을 소집하라고 미친 듯이 화를 내던 그날.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기사 리안까지도 의심하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했어요…… 당신이 새로운 여왕벌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래. 이건 분노였다.
“개소리하지 마.”
“왜 안 믿는 겁니까?”
“당신 말, 마치 그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처럼 들려. 하지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했다면 리안에게 고백을 했을 것 같나? 나를 죽였을 것 같아? 세상천지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이는 얼간이가 어디 있어!”
“그가 만약 몰랐다면요?”
뭐?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고, 조작된 증거를 사실이라 믿으며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래요. 처음에는 그도 믿지 않더군요. 하지만 의심은 세 번이면 충분했습니다, 루크. 그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당신이 역모에 가담했고, 자신과 리안을 죽이려 했다고만 믿었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믿음은 엄청나더군요. 직접 고문을 지시할 정도로.”
“…….”
“그리고 당신이 죽은 뒤 그는…….”
“닥쳐!”
닥쳐. 닥쳐. 제발 닥치라고.
미칠 것 같았다. 머릿속에 광풍이 불어 이성을 태우고 분노를 일으켰다.
나를 사랑했다고. 날 사랑했는데, 아무것도 몰라서 날 죽였다고.
그래서? 그래서 뭐? 어쨌든 날 죽였잖아. 내 말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나를 그렇게 잔인하게 고문한 뒤 죽였잖아.
그가 정말 사랑했다면 그랬으면 안 됐어. 모르는 척하면 안 됐다.
“당신을 죽이고 그가 후회했다면, 믿겠습니까?”
“믿느냐고?”
나는 그가 손을 씻던 것을 기억한다. 그가 내가 머물던 궁으로 습관처럼 향하던 것도 기억한다. 그래서 믿느냐고?
“믿지 않아. 그저 알량한 죄책감을 덜기 위함이었겠지.”
“……당신은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습니까? 모계에도 부계에도 연녹색 눈동자가 없는데 어째서 샤를마뉴만 연녹색 눈동자를 가졌는지.”
샤를마뉴의 연녹색 눈동자? 분노로 달아오른 머리 한구석에 샤를마뉴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그의 말마따나 샤를마뉴의 모계에도 부계에도 연녹색 눈동자는 없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잖……
“그게 그의 ‘흔적’입니다.”
“…….”
“당신의 눈동자였어요, 루크.”
……뭐?
“전생의 당신의 눈동자가 꼭 그런 빛이었어요.”
하늘처럼 마냥 파랗지만, 빛을 받으면 에메랄드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눈동자. 그게 바로 당신만의 색이었답니다.
* * *
병원으로 돌아와 에반의 상태를 들은 후 아침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해가 밝자마자 바로 오늘 하루 결근해야 할 것 같다는 전화를 했다. 유일한 가족이 중환자실에 있어 하루 정도는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말에 총무비서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일단 내가 맡은 일은 대강 끝내놓은 상태였기에 가타부타 질책하지는 않았다.
몇 시간 후 샤를마뉴로부터 전화가 왔지만 받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울려대기에 결국에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하루 종일 병원에서 서성거리며 많은 생각을 했다. 주로 전생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나의 전생. 불쌍하기 짝이 없던 루크의 삶.
어쩌다 태어나서 어쩌다 버려지고, 어쩌다 주워졌다가 어쩌다 황궁에 들어가 후궁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역모라는 모함을 쓰고 살해를 당하고…….
내 의지대로 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기저기 휩쓸려 다닐 뿐.
그런 내가 너무 불쌍해서, 황제가 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내게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마저도 가증스러웠다.
‘루크, 당신은 샤를마뉴가 델루니안이라면…… 그를 증오할 겁니까?’
병원에 나를 데려다주며 시드니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죄는 육신의 것입니다.’
‘…….’
‘영혼은 육체가 죄악으로 가장 더러워졌을 때도 깨끗하죠.’
‘…….’
‘그는 델루니안이지만 델루니안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저 우스웠다. 이때까지 나를 들쑤신 시드니 카턴이 이제 와서 델루니안을 감싸려고 하는 것이 우스웠다.
델루니안이지만 델루니안이 아니라고? 그게 무슨 궤변이야.
어떤 육신을 갖고 있든 그가 그 악독한 살인귀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
나는 이제 속지 않는다.
내가 그저 고개를 돌리자 시드니 카턴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늘 바라던 결말인데, 생각보다 기분이 좋진 않네요.’
마음 한쪽 문이 닫히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감정은 가장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울음 대신 웃음이 나왔다.
누가 본다면 기쁜 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게 보라지. 하하하. 그냥 우스웠다. 모든 것이 전부.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야 오늘 델루니안과 영화를 보기로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영화. 그래, 그가 보자고 보챘지. 맞다. 그랬어. 영화를 보자고 간절한 눈으로 내게 매달렸지. 맞아…….
약속을 떠올린 지 두어 시간 후, 병원에서 택시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 시점에 이미 나는 머리가 차가웠다. 감성은 죽어버리고 이성만이 멈추지 않는 모터처럼 윙윙, 뇌 속에서 칼날을 돌려대었다.
이성이 요구했다. 약속은 지켜야지. 해주고 싶은 말도 있잖아.
택시 안,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출입증을 제시하고 터벅터벅 걸어 필리프홀로 가는 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달빛 밑에 부서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라파엘!”
내 이름을 부르는 당신은 누구인가.
“무슨 일이야? 전화도 안 받고!”
“…….”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나한테 말도 없이 결근하질 않나, 휴대폰을 아예 꺼버리질 않나! 문제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나를 걱정했다고 말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지? 가족이 다쳐서 중환자실에 있다고? 어디가 크게 다친 거야? 당신은 무사하고?”
……가증스럽다. 참으로 가증스럽다.
“샤를마뉴.”
무어라 잔소리를 퍼부을 것 같던 그가 심상치 않은 기운에 입을 다물었다.
구름이 천천히 달빛을 가리었다. 어둠 속으로 그의 얼굴이 스며들어 사라진다.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그는 진정으로 델루니안이었다. 델루니안. 나를 죽인 자.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뭐?”
“그만하자. 이젠…… 더는 못 하겠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롭니다. 이제 그만해요. 그만…….”
“뭘 그만하자는 건데.”
나는 작게 웃었다.
“전부.”
“…….”
“당신과의 인연을 끊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한 생각이었다. 더 이상은 그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
이게 무슨 기묘한 악연인지 모르겠으나, 전생에서 시달린 것으로도 악연은 차고 넘쳤다.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루크로서의 삶이 충분히 괴로웠으니 이번 삶만큼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라파엘, 지금 그거…… 헤어지자는 거야?”
샤를마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저를 놔주세요.”
내 짤막한 대답에 샤를마뉴가 얼어붙었다.
“라파엘.”
“언제까지 당신에게 휘둘려야 합니까.”
“라파엘 드마뉴!”
“이젠 놔줄 때도 됐잖아.”
“당신 왜 이래. 왜!”
이제는 놔줄 때도 되지 않았냐는 말에 거의 울 것처럼 소리치는 샤를마뉴를 보고 있노라니 가증스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가 어깨를 붙잡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놔주세요. 아픕니다.”
“설명을 해봐. 왜 이러는 거냐고. 이유가 뭔데!”
나는 부드럽게 그 손을 떨쳐내었다. 정말로 이유가 알고 싶어?
“전하.”
“이유를 알려줘.”
“……전하가 잘못한 건 단 하나뿐입니다.”
오직 하나.
“그게 뭔데? 내가 잘못한 거라면…….”
“내 눈앞에 나타난 것.”
“……뭐?”
“당신은 내 눈앞에 나타나면 안 됐습니다. 당신에게 염치가 있다면, 당신이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됐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시드니는 그가 후회했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내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당신이 나를 죽였고 당신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사는 황태자로 태어났지만, 나는 당신과의 악연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당신을 따라 환생한 황비 때문에 라파엘의 삶마저 일을 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염치없는 당신의 사랑놀음에 또 장단을 맞추라고? 아니, 그건 못 하겠다.
샤를마뉴는 말이 없었다. 구름이 어두워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로 인하여 델루니안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것은 언제나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를 상처 입힐 수 있다.
이런 거였구나. 이런 거였어.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기쁨인지 울분인지 모를 감정에 온몸이 떨렸다. 눈물을 꾹 참으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