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예전에 한 번 간 적이 있는 고급 한식당이었다. 현아가 한식을 좋아한다는 소리에 터무니 없이 비싼 곳으로 데려가 밥을 사주었던 태근이 형 덕분에 가본 적이 있다.
여기입니다.
여기서.... 밥이라도 먹자고 절 이렇게 데려온 건가요?
그러자 하영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여기가 한 끼 먹는데 얼마 드는지는 알고 계세요?
비싸겠죠. 한 번 와봤습니다. 계산은 직접 안 했지만...
그러자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루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부티가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전혀 여기서 밥 먹을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데....
.....
일단 밥 먹는 건 아니니 따라오세요.
네.
하영은 날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배인이 나와 그녀를 영접한다. 하영과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 받은 지배인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하영이 내게 돌아와 말했다.
매화실이라고 하는군요. 이쪽입니다.
여러 개의 작은 정원과 별채로 이루어진 곳이라 안내 없이 돌아다니면 길 잃기 딱 좋은 곳이다. 그녀는 나를 梅花室이라고 적힌 별채 앞에 데려다 주었다.
그럼 전 나가서 시동을 걸고 있겠습니다.
시동이라뇨? 바로 가야 돼요? 밥 먹는 것도 아니라면 여긴 왜 오는 건데요?
일단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가시면 효진 씨가 알아서 응해줄 겁니다.
힘차게? 그나저나 저 안에 효진이가 있다는 이야기로군. 좋았어. 사람하고 약속까지 해놓고 막무가내로 파토를 낸 책임을 단단히 따져 물을 테다. 나는 장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미닫이 문만 아니라면 발로 뻥 차면서 들어갔겠지만 문을 세게 쾅 여는 것으로 대신한다.
임마, 저 사람 기다리래놓고 여기서 대체 뭐....
평소 효진에게 대하듯 거침없이 소리 지르며 들어가던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우뚝 멈추었다. 효진이가 앉아 있는 거야 당연한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 앞에 마주 앉아 있는 허여멀간한 얼굴의 남자는 전혀 예상치 못 했기 때문이다.
누구...
누구....
남자와 내가 동시에 서로의 정체에 대해 고민한다. 남자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고급 식당에서 효진이를 만나고 있을가. 게다가 효진이는 평소 입던 빈티지 티셔츠 같은 건 어디다 팽개쳐두고 저렇게까지 나풀나풀거리는 블라우스를 어여쁘게 차려 입고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걸까. 눈에 보이는 게 의문 투성이라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 때였다.
자기야! 여긴 어쩐 일이야!
효진은 얼굴 가득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의 털털한 말투와는 전혀 다른 상냥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다. 순간 효진이가 아닌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대답이 나와버렸다.
어...어쩌기는.... 니가 여기에 있다고....
그러자 효진이 내게 갑자기 안기며 얼굴을 품에 묻었다.
미안해. 자기한테 미처 말도 못 하고 여기까지 와버려서..... 결코 내 본심이 아니었어. 난 언제나 자기 뿐이라고. 그러니까 용서해 줄거지?
뭐...뭐라는 거지?
효진은 내게 안긴 채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광 씨!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이미 몸도 마음도 이 분에게....
얼굴이 하얀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 노려보는데 기세가 상당히 무섭다. 그가 무서운 말투로 말문을 연다.
당신인가?
나?
임마, 다짜고짜 당신이라고 하면 내가 뭐라고 답하냐. 내가 너랑 여보 당신 하는 사이도 아닌데... 그는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이 효진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효진 씨를 포기하지 않아.
제법 비장한 각오로 말을 하고 있다만 난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효진은 내려다보니 녀석이 남자에게 보이지 않게 눈을 껌뻑이고 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이 녀석....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남자를 향해 손을 내저으려고 팔을 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효진이 그 팔을 끌어안더니 소리친다.
자기야!! 안돼! 또 사람을 치면.... 아직 출소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가중처벌 되면 또 나오기 어려울 수도 있어!
에엑?
난 이게 뭔 소리냐 싶어 뜨악해서 효진을 쳐다보고 있었고, 남자는 좀 다른 의미를 담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다가오려다 주춤하는 걸 봐서 효진의 공갈이 먹히긴 한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좀 무섭게 생긴 건가.
어서 나가요. 그리고 진광 씨. 그럼 이만.... 죄송해요. 앞으로는 뵐 수 없을 것 같아요.
처연한 말투를 남기고 방을 나서는 효진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다. 효진은 내 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갔고 밖에 나가자마자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내던져지다시피 한다. 차가 출발하자 옆에 앉은 효진을 닥달했다.
임마! 대체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을 하란 말야!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그때까지 정말 조신한, 약간은 새침한 표정으로 있던 효진은 원래의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한바탕 크게 웃어버렸다. 내 등까지 팡팡 쳐가며.
푸하하..하하.. 아까 그 남자 표정 봤어?
표정?
자못 비장한 눈으로 나와 효진을 바라보던 그였다. 효진은 한참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 나온 모양이었다. 마스카라를 어찌나 진하게 했는지 평소와 눈매과 완전히 달랐다. 녀석은 무언가 꺼내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 진짜. 웃겨 죽는 줄 알았네. 지가 무슨 비련의 주인공이라고....
임마, 혼자만 웃지 말고.... 좀 설명을 해줘.
효진은 잠깐 기다려보라더니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서랍에서 화장수와 솜을 꺼냈다. 조수석 뒤쪽을 당기자 거기에 거울이 나오면서 간단한 화장대가 차려진다. 헤에. 비싼 차에는 저런 옵션도 있는가 보군... 효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얼굴의 화장을 지웠다. 그러자 평소의 얼굴에 한결 가까워졌다. 객관적으로 보면 화장을 한 얼굴이 더 예뻤지만 나에겐 낯선 모습이라 영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녀석은 화장품을 챙겨서 원래 자리로 넣으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말야. 내가 한석이 좀 이용해 먹은 거지.
이용?
응. 이용. 내가 여태까지 선자리에서 만난 놈 중에서 저 놈이 제일 질겼거든. 아무리해도 떨어져 나가질 않길래 남자가 좀 필요했어.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언니한테 부탁했지. 좀 데려다 달라고.
그러면서 효진은 입고 있던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를 벗기 시작했다. 녀석의 레이스 가득한 브래지어가 보이기 시작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근데 어째서 브래지어까지 벗는 거냐!
아,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언니. 제 티셔츠 있죠?
여기 있습니다.
운전 중이던 하영이 조수석 아래 있는 쇼핑가방을 꺼내어 효진에게 건넸다. 효진은 밋밋한 디자인의 브래지어를 꺼내 착용하고 곧 셔츠 하나를 꺼내어 그 위에 입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 과정을 다 아는 이유는 내가 뒤통수에 눈이 달려서가 아니라 코팅이 워낙 잘 되어있는 유리라 뒷면에서 벌어지는 난데없는 스트립쇼가 너무 잘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코팅이라니.....참 감사합니다.
휴우. 이제 좀 편하네. 어이, 한석 군. 돌아봐도 돼. 뭘 새삼스럽게 그래.
임마, 그래도 그렇지.....
우리 둘만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도 이러지 않는다. 효진이랑 나랑 뭐, 더한 것도 서로 본 사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운전석 쪽에 있는 하영을 힐끔거리다가 백미러를 통해 이쪽을 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안경 너머 몹시 매섭게 생긴 눈이 날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어 앞을 본다. 내가 하영을 신경쓰는 걸 눈치챘는지 효진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언니도 다 알아. 걱정 마.
효진은 내 등을 두드리며 연신 괜찮다고 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효진이가 괜찮다고 말하기에 더 불안했다. 게다가 다 안다고? 이런.... 안 그래도 아까 하영이 날 끌고 올 때 사이즈니 모양이니 했던 소리를 상기한다면.... 효진이 이것이 대체 어디까지 말했는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걸 그냥 두었다가는 더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늘 뭐, 지혜한테 가보자고 안 했냐, 니?
아, 그랬지. 근데 지혜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당분간은 좀 곤란하다네. 이사한지 얼마 안 되어서 집도 엉망이라고.
으음....
안 그래도 남의 신혼집에 너무 염치없이 찾아가는 건 아닐까 싶어 저어 되는 게 없잖아 있었다. 효진에게 여름쯤 가보자고 했다. 교생실습 끝나고 나면 또 바로 시험이고 졸업 준비도 해야 되는 터라 일정이 빠듯했다. 효진은 조금 불만인 듯 했지만 그래도 혼자 가기는 싫은 모양인지 선선히 동의했다.
언니, 저희 저쪽 마로니에 공원 앞에 내려주시고 먼저 들어가세요. 토요일인데도 불러내서 미안해요.
니 뒷처리는 항상 내 몫이니 딱히 미안할 건 없어. 계산이나 잘 해놔.
아까 나한테 대할 때는 꽤 공손하면서도, 물론 그러면서 한 번씩 이상한 말투가 섞여 있었지만... 지금 하영이 효진에게 대하는 말투는 굉장히 친근했다. 효진도 그녀의 말투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러죠. 헤헤헤.
국내 굴지의 법무법인 팀장급 되는 여자와 이 대책없는 아가씨와 대체 무슨 관계일까 궁금했다. 난 궁금한 걸 못 참는 편이라 차에서 내려 효진과 걸어가며 바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꽤 간략하게 대답했다.
계약관계지, 뭐.
계약?
응. 내가 필요할 때 법률서비스 및 기타 용역을 제공하고 연말에 정산하는 거지. 돈으로.
뭔가 효진과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온다.
하아. 니 돈 많냐? 변호사를 그런 식으로 막 쓸 정도로?
생각해보니 우리는 방금 변호사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온 셈이다. 법률서비스야 대체 어디다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변호사니까 도움 받을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타 용역이라니. 설마 방금 차에 태워다 주고 날 납치해가고... 그런 게 기타 용역이라는 건가. 거참, 특이한 녀석일세. 효진을 아무리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변호사를 불러다 운전기사처럼 쓴단 말이야? 효진은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녀석도 날 마주 보았다.
왜? 흥미 있어? 돈이 많다니깐?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전혀. 너나 태근이 형이나.... 난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더 이상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거든.
헤에~ 괜히 쿨한 척 하려고 하는 거 아냐? 한석이 가난하잖아.
임마! 그래도 다 쓸만큼은 가지고 다니거든?!
그러자 효진이 펄쩍 뛰어올라 헤드락을 걸며 유쾌하게 외쳤다.
역시 너란 놈은....
이거 놔! 길거리에서 뭐하는 짓이야!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두 번만 귀엽다가는 코브라 트위스트라도 걸 셈이야?
간신히 효진을 떼어내고 씩씩거리며 걸어가노라니 그녀가 뽀로로 뛰어와 옆에서 나란히 걷는다.
하긴, 한석이가 좋아하는 건 돈보다도 지혜처럼 가슴 큰 애였지....
아, 쫌! 여긴 길거리야! 사람들 다니는 데라고!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곳은 대학로였다. 주말 저녁이라 사람들이 가득했다.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딱히 우릴 의식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신경은 쓰였다. 효진은 전혀 개의치 않고 헛소리를 이어갔다.
내가 확대수술이라도 받고 오면 좀 다르게 봐줄라나?
됐거든.
요새는 기술이 좋아져서 감촉도 진짜 같다고 하더라. 어때, 나 한번 해볼까? 한석 군에게 사랑 좀 받아보게?
야야, 됐어. 됐다구.
그렇게 효진과 옥신각신하며 걸어갔다. 날 부려먹은 대가로 저녁을 쏘겠다길래 굳이 말리진 않았다. 최대한 비싼 것으로 뽑아 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대학로 유명 맛집 칼국수 집에서 평야설넷면 주문 못할 모듬 칼국수를 시켰다. 평소 먹던 해물 칼국수보다 2,000원이나 더 비싸서 그런지 건더기가 훨씬 더 많았다. 효진이는 소주도 한 병 시켰다. 둘이서 나누어 마셨다. 밥을 다 먹고 나오며 효진이가 기지개를 폈다.
밥도 다 먹었겠다, 잠이나 자러 갈까?
어디서?
뒤따라 나오던 나를 돌아보더니 씨익 웃는다. 어째 좀 불안하다.
오늘 원래 지혜 보러 가기로 했잖아. 지혜는 못 봤으니 대신 지혜 침대에서 잠이나 자야겠다.
지혜 침대?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택시 하나를 잡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효진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으음. 지혜 냄새가 많이 희석되었는데? 어째 다른 여자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다른 여자라니!
뜨끔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효진은 드러누운 채 날 바라보며 말했다.
한석이가 저렇게 어벙해 보여도 의외로 여자가 꼬인단 말야... 거참, 미스테리해.
뭐가 미스테리하냐! 나 정도면 어디가 어때서.
어디가 어떻다니... 여러 군데가 어쩌고 저쩌고.... 그렇잖아?
뭐라 명확히 표현하는 건 아니었지만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폼이 어째 기분 나빴다.
참나. 이래뵈도 열심히 운동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며 건실히 살아가는 청년이라구.
음. 그래? 그건 그렇지만 말야, 그게 매력 포인트는 아니잖아. 남자는 자고로..... 음.....
효진은 여전히 드러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다시 묻는다.
너 돈 많아?
........아니.
시골 집에 땅 좀 있어?
......소작하는데....
소작? 소작이 뭐야?
이래서 서울놈들은....
남의 땅에 돈 내고 농사짓는 거.
우와. 그런 거 조선시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너, 죽을래?
효진은 자신의 생사여부에 전혀 개의치 않고 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직장이 빵빵해?
아직 대학생이잖아.
아버지가 한 자리 하신다거나...?
......나, 아버지 안 계신데...?
어, 미안하다.
효진은 고개를 잠깐 꾸벅해 보이고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이내 날 쳐다보며 말했다.
것봐, 가진 건 몸뚱아리랑 잘 생긴 자지 뿐이잖아. 그런데 여자들이 뭘 보고 널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이게 미스테리지, 아니냐?
틀린 말은 없었지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게다가 잘 생긴 얼굴도 아니고 잘 생긴... 그거라니.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그럼 넌 대체 나랑 왜 한건데?
내가? 너랑?
그래, 임마. 솔직히... 처음에 한 것도 니가 유혹하다시피 한거잖아.
그랬었나?
기억도 안 나는 거냐!
아니, 기억이 안 나긴. 잘 나지. 근데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니까 궁금한거야. 딱히 널 비꼬려는 게 아니라.
녀석도 나만큼이나 거짓말을 못 하는 녀석이라 말이 밉게만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어서 녀석이랑 말싸움 해보아야 내 입만 아프다고 생각되었다. 그냥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효진은 내 팔 하나를 끌어다가 자기 베개로 사용했다. 그렇게 둘이 드러누운 채로 한참을 있었다. 나중에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보아 효진은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켜질 때 쯤, 팔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대로 책상으로 가서 스탠드를 켜고 공부라고 할까 하다가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워있는 녀석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효진의 몸을 살짝 밀고 당겨 침대에 바로 눕혀주었다. 그러자 녀석이 눈을 비비며 뒤척거렸다. 눈이 떠졌다.
뭐야, 음. 잠들었네.
침부터 닦으세요. 참.... 한가롭다. 한가로워.
효진은 손등으로 침을 스윽 닦아내며 말했다.
이렇게 사는 게 부러워?
......그래, 부럽다고 해줄게.
부러우면 일로 와서 너두 다시 누워.
효진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마치 자기 침대에 누워 자리를 양보하는 생색을 내는 분위기다. 이런 녀석을 등 뒤에 두고 공부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아 시키는대로 누웠다. 효진은 자기 팔 한 쪽과 다리 하나를 내 몸 위에 턱 올려놓는다.
뭐야, 이건. 치워.
왜에. 나의 섹시다이너마이트 바디가 닿으니까 흥분되지 않아?
다이너마이트 불발탄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느끼기 전에 일단 무겁다, 야.
쳇. 지혜가 이랬으면 좋다구나 하고 가슴부터 만졌을 거면서. 아... 나도 지혜 가슴 만지고 싶다....
효진의 말투에는 약간의 원망과 시샘마저 섞여 있었다. 난 녀석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목소리를 살짝 낮게 깔고 음모론자의 목소리로 말했다.
지혜 침대보다 지혜 냄새가 많이 나는 곳이 하나 있긴 하지.
어딘데?
예전에 지혜가 가슴으로 문대줬던 곳인데.... 입에 넣고 쪽쪽 빨아주기도 하고 지혜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 갔던 곳이기도 하지.
엑?
효진의 손을 잡고 내 바지 고간 위로 올려두었다. 사실 아까부터 불룩해져 있던 곳이다. 제아무리 효진이가 내 불알친구 급으로 행동하는 꼴이 남자다운 녀석이라고는 하나 그녀 자체는 부드러운 몸을 가진 여자임에는 틀림없으니 말이다. 여자랑 단 둘이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딱딱해지지 않는 자지를 가진 남자는 불능이거나 혹은 게이 뿐이다. 효진은 아주 잠깐 놀라더니 이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손으로는 바지의 불룩한 부분을 쓰다듬고 있었다.
정말 많이 컸다니까?
뭐가, 내 자지가?
그러자 효진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얼굴을 떼면서 속삭였다.
한석이가 말야. 전에는 이 정도로 건방지지 않았는데.
그래서, 싫어?
효진은 대답 대신 내 바지를 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