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지도 않았는데 유미는 의자를 끌어다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숄을 걸치고 있어서 상체의 노출은 거의 없었지만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원피스의 라인과 허벅지까지 길게 나 있는 슬릿으로 인해 하반신의 노출이 더 돋보였다. 이 여자는 이런 차림으로 이 사람 많은 길거리를 돌아다닌단 말인가. 가게 내에서나 입을 옷을 입고.....
누구....신지?
지애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나와 유미를 번갈아 본다. 그녀의 눈빛이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설명했다.
아, 저 이 분은... 제가 예전에 과외하던 애 어머니 되시는데요....
순간 유진이의 이름이 나올 뻔 했지만 황급히 삼켰다. 어쩐지 지애가 유미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하긴 청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둘 사이에 끼어든 유미를 탐탁치 않아 하는 지애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그렇기에 이런 자리에서 유진이의 이름을 꺼내면 어쩐지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유미와 유진의 관계가 드러난다면 모르긴 몰라도 유진이가 앞으로 학급의 반장 역할을 하는데 애로사항이 꽃피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유미는 내가 마시고 있던 맥주병을 뺏아 들더니 상표를 들여다 보면서 말했다.
저랑은 술 한 잔 하자는 것도 계속 빼시더니 여기서 맛없는 수입맥주나 드시고 있었어요? 저희 가게 오시면 맥주 말고도 더 찐한 서비....
하하, 이 분이 주류판매점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남의 맥주병을 가져다 홀짝이는 유미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도록 미리 차단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지애의 불편한 기색은 여전했다. 그녀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가게가 많이 한가하신 분인가 보네. 지나가다 갑자기 남의 술자리에 끼기도 하고.
남의 술자리에 미묘한 강세가 느껴진다. 날 보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말의 화살은 명백히 다른 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저 과녁판 노릇이나 하면서 화살을 얌전하게 받고 있을 이가 결코 아니었다. 유미는 다소 심드렁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남자가 많이 고픈 분인가 보네요.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분 데려다가 술 먹여서 어찌하려는 걸 보고 있노라니...
뭐라구욧?
명백한 도발적 언사에 지애의 말투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그러나 유미는 따로 대꾸도 하지 않고 내 맥주를 다 마셔버렸다. 여전히 지애 쪽은 쳐다 보지도 않고 날 보며 말했다.
요새 선영이가 잠적을 했거든요. 걔한테 맡겨둔 일들이 전부 저한테 쏟아지고 있어요. 어쩌면 좋죠, 선생님?
질문을 할거면 그냥 말로만 하세요, 유진이 어머님. 손가락으로 남의 쇄골 부분을 긁지 말고.
저...저런, 힘드시겠어요. 선영이는 무슨 일이라던가요?
글쎄요. 어떻게 하라고 전화가 몇 번 오긴 했는데 통 알아듣기 어려워서....
유미는 한숨을 쉬며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걷어 손에 말았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 정말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슴골이 확 드러나면서 내 시선을 빼앗았다. 그녀의 가슴이 작은 편이 아니기도 하거니와...아니, 사실 오히려 큰 쪽에 가깝다.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꼽으라면 지혜보다는 작을 지 몰라도 리사나 선영보다는 컸다. 암튼, 그런 크기에 옷의 파인 정도가 상당하다 보니 참 아름다운 계곡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런 가슴을 밀어붙이며 팔에 바짝 붙이고 있었다. 반팔을 입고 있던 내 팔뚝에 천 한 조각 너머의 가슴 온기가 전해질 정도다. 아찔하고 참 감사합니다.... 그녀는 귀에 착착 감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전에 고양이 손 보내서 도와드렸잖아요. 이젠 선생님이 은혜 갚음 좀 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하하... 그... 고양이 손 말입니까.
도움은 개뿔! 욕실에서 알몸으로 씻고 있다가 당돌하기 그지 없는 그 녀석에게 당한 수모가 한순간에 떠올라 울컥했다. 그러나 애써 내색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유진이 이야기니까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유진이 이름을 꺼냈다가는 정말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다. 일단 최대한 말을 둘러대기로 한다.
봐가면서요. 제가 지금 실습 기간 중이라...
그래도 시간 되시면 저희 가게 들려 보세요. 선생님,
그...그럴까요.
팔을 꾸욱 눌러 감싸오는 유미의 젖은 내게 참 여러가지 감동을 주었지만, 맞은 편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지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불쾌감을 전해준 모양이었다. 급기야 나와 있을 때의 착한 누나 모드는 삽시간에 사라지고 학교 모드의 송 선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지금 들리는 저 딱딱한 목소리가 바로 그 증거로다.
지금 대체 뭐하는 거죠?
그러나 유미는 마치 그 자리에 지애가 없는 것처럼 대하고 있었고 나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역시 맥주는 맛이 없네요. 저는 좀 더 독한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참, 선영이는 보드카 좋아하거든요. 알고 계세요?
아뇨. 몰랐는데요. 저기, 유......
하마터면 유진이 어머님이라고 부를 뻔 했다.
유미 씨. 제가 지금 이 분이랑 이야기 하고 있던 중이라....
유미는 그제서야 지애를 발견했다는 듯이 힐끔거렸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거두어 나를 쳐다본다.
전처럼 어머님이라고 안 부르네요? 이젠 저를 이름으로 부를 마음이 드신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무어라 답변하면 좋을지 몰라 쩔쩔 매고 있는데 거칠게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최 선생, 많이 바쁜 거 같은데 다음에 이야기 하죠. 여기 계산은 제가 할테니 마저 먹고 와요.
아아. 결국 폭발한 모양이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와 유미를 쏘아보더니 곧바로 몸을 돌렸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유미에게 말했다.
유진이 어머님,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저야 그냥 지나가는데 선생님이 보여서... 어머나, 제가 데이트에 방해가 된 건가요? 그런 거예요?
결코 몰라서 묻는 게 아닐텐데 호들갑을 떨며 어쩔 줄 모르는 척하는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얄밉지.
아뇨, 뭐. 데이트라고 할만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선배랑 밥먹는 거였어요. 다만 그 분이 제 직속 사수라서 나중에 실습 종료할 때까지 계속 같이 있어야 되는 분이라는 거죠.
그제서야 유미는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는 척을 하더니 말했다.
저런.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두 분 다 저희 가게로 가서 극진히 모셔야 하는 건데요. 잘못 생각했네요.
아뇨, 그랬다면 그거 나름대로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 같네요.
다 먹은 줄 알았는데 하나 남아있는 클럽 샌드위치를 집어 입안에 털어넣었다. 기분은 우울했지만 맛은 좋았다.
그럼 2차는 제가 쏠게요.
네에? 2차요?
여기 이렇게 파장 만든 책임은 저니까요, 2차는 꼭 제가 쏘지요.
내 팔을 잡아 끄는 유미를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옷차림이 워낙 헐거워서... 함부로 뿌리쳤다가는 옷이라도 벗기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주저되었다.
유진이 어머님, 전 근데 룸은 좀....
또 그러신다.
네?
아까는 유미라고 불렀잖아요. 그냥 그렇게 불러주는게 좋았는데 왜 안 그러세요?
그거야, 아까는 유진이 이름을 말하기가 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유미라고 불러주세요. 앞으로도.
유미나 지애나.... 왜 이렇게 자신을 향한 호칭을 내게 강요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 알았노라고 대답했다. 대신 룸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유미는 나를 바로 안내했다. 그녀와 함께 간 곳은 유흥가에서 조금 벗어나 뒷길에 있는 어떤 작은 가게였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테이블이라고는 벽쪽에 붙은 2인용 테이블 두 개가 전부였고 반대쪽 벽면은 바텐더와 마주 앉은 바로 되어 있었다. 바텐더와 익숙하게 눈인사를 주고 받는 걸로 보아 종종 오는 곳인가 보다.
제가 몇 살로 보이세요?
네? 갑자기 그건 왜....
사람 기껏 불러다 앉혀놓고는 말도 없이 혼자 술을 홀짝이던 유미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나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맞춰보세요. 맞추면 상 드릴게요.
빙긋 웃는 그녀의 미소가 참 매력적이긴 하지만 어째 주겠다는 상의 정체가 수상하다고 생각되어 일단 상은 거절하기로 했다.
삼십대 중후반 정도요?
거의 맞추셨어요. 좀 더 자세히 맞추시면 상 드렸을텐데 아깝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내 앞에 놓인 마티니를 조금 마셔본다. 섹시한 연상의 여자와 바에 앉아 즐기는 마티니라....쌉싸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달콤하다. 제임스 본드가 즐겨 마셨다고 하는 풍미가 느껴진다.
제가 스무살이 되던 해에 유진이를 낳았어요.
물론 본드걸이 애엄마는 아니었겠지.
그렇게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조바심 때문이었답니다.
조바심이요?
그래요, 조바심. 난 알고 있었거든요. 내가 언제 끝나게 되리라는 걸. 내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보이지 않게 되는가를 말이에요.
영문 모를 소리가 쏟아진다. 들고 있던 마티니 잔을 내려놓고 유미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혹시 선영이가 그런 이야기 안 하던가요? 제가 선생님 앞날을 본 적이 있다고?
비슷한 이야기를 .. 한 번 들었습니다. 그냥 덕담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후후. 그래요. 아주 좋네요.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아요. 괜히 그거에 목 매다는 것만큼 추한 것도 없거든요. 사람의 앞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거겠어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지.
뭔가 철학적인 이야기가 쏟아진다. 문득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정말 유미인지 아닌지 궁금해졌다.
난 이 세상에서 해보고 싶은 게 참 많았어요. 즐겁게 살고 싶기도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죠. 내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걸 다 하려 해도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더라구요. 만약 남들 다하듯이 이십대 후반에나 시집가서 애 낳고 그러면 그 애가 채 사춘기를 맞이하기도 전에 내가 떠나버릴 테니까.. 그게 너무 가엽기도 하구요.
난 점점 더 의아해졌다. 믿기지는 않지만 그녀의 말투는 흡사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알고 있는 사람의 말투였다. 아니면 날 정해놓고 죽으러 가려는 사람의 말투. 뭐지, 이건 대체?
자...잠깐만요. 유미 씨 말을 듣고 있으니 뭔가 이상한데요? 유미 씨가 유진이를 빨리 낳은 건... 그러면 자신이 죽기 전에 아이가 좀 큰 상태이길 바라서... 그래서 그랬단 말입니까? 지금 말하는 게?
역시 대학생이라 그런지 이해가 빠르시네요.
그런 터무니없는....
터무니 없다고요? 후후.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남이 보는 것이 없는 거라 치부하면 안되죠.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걸어가고 있는데 눈 멀쩡한 사람이 장님, 당신 10미터 전방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소 라고 외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장님이 지팡이를 뻗어 고작 1미터 앞을 짚어보고 예끼 이 사람아, 내 앞에 구덩이가 없어 라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웃길지 말이에요.
그게 대체.....
난 그 웃긴 걸 항상 보고 살아왔어요. 난 그저 웃기니까 웃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장님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새삼 유미를 다시 쳐다본다. 언제나 웃고 있는 그녀가 자신의 웃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 장면은 어딘가 모르게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 역시 장님이기에. 그런 나에게 말을 하고 있는 눈 뜬 자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못해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저에게....?
글쎄요. 왜 일까요. 곧 죽을 사람의 변덕이랄까. 아니면 딸래미에 대한 질투? 후후.
곧 죽을 사람이라니....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설령 자신의 미래가 보인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 죽음을 피하거나 극복하려 하지 않는 거지? 이 점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유미는 너무 뻔한 질문은 지겹다며 기지개를 폈다. 바텐더를 불러 마티니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녀의 잔은 이미 비어있었다.
무슨 영화나 소설처럼 몇 날 몇 일 어느 장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다, 뭐, 그런 식으로 보이는 게 아니에요. 막연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렇지만 막연한 가운데에서도 제가 아는 게 있는 거고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고 그런 거죠.
유진이 어머님이라면 구덩이를 피해갈 수 있잖아요.
제가 구덩이를 가지고 예를 들었더니 너무 거기에 얽매여 계시군요. 그건 좀 현실감있게 비유를 하느라 그렇게 말한 거구요, 솔직히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은 결코 그렇게 명확한 게 아니에요. 빛깔이라고 해야 하나 냄새라고 해야 하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창에 비치는 어릿한 그림자라고 해야 하나. 무엇 하나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랍니다. 생각해보세요. 살면서 그런 경우 없나요?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모를 이상한 냄새. 딱히 나쁜 냄새도 아니고 좋은 냄새도 아니지만 이건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냄새 있잖아요. 그런 냄새 맡아본 적 없어요?
.....아마도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쩌면..
그래요. 제가 느끼는, 아니, 이 경우에는 맡는 거라고 해야하겠죠? 미래라는 건 아까 말한 그런 어렴풋한 냄새가 적어도 수만배 정도 희석된 정도의 냄새라고 보시면 되요. 게다가 냄새라는 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실려다니잖아요?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를 바람에 쓸려 갑자기 사라졌다가 또 나타나기도 하고... 그런 거예요.
도무지 나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감각의 영역이었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유미의 말은 꽤 인상깊었다.
선생님. 미래는 결정되어 있기도 하고 결정되어 있지 않기도 해요. 그게 미래에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라고 하는 거예요. 전 가방끈이 짧아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그렇다고 하더군요. 한자로 아닐 미. 오다 래. 합쳐서 미래.
미래....라구요.
그래요. 어감 참 좋죠?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걸 무서워하고 기대하기도 하고 점쳐보기도 하고 그러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는 피해갈 수도 없이 올 것을, 사람들은 왜 굳이 그걸 알려고 애쓰는지 모르겠어요. 아아. 저야. 뭐. 그냥 알지만.
나 역시 마티니를 비웠다. 도저히 술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마티니의 맛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난 선생님이 좋아요.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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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기 짝이 없는 화제 전환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유미의 말투는 평온했다. 평소처럼 치근덕거리며 하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젊고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밤 일도 잘 할 것 같아 보여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나 같은 사람들을 미치게 하죠. 아마, 기회가 있었다면 선생님을 쓰러뜨리고 올라탔을지도 모르겠군요.
너무 어마어마한 이야기라 무어라 대답을 못 하겠다. 앞 부분의 그 이유는... 크흠. 흠흠. 그나저나 잘 생겼다니... 그런 소리는 난생 첨 들어본다.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이라니? 그녀 같은 사람이라는 건 방금 전의 설명으로 어느 정도 알았다고 치자. 대체 나 같은 사람들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거지....? 그녀는 내 의문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시원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같은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길이 있어요. 아까 말한 구덩이를 다시 예로 들자면... 선생님이 걷는 길은 무수한 갈래로 뻗어 있답니다. 어떤 길에는 끝도 없는 무저갱이 기다리고 있지만 또 어떤 길에는 꽃이 가득가득 피어있죠. 어떤 길은 비단이 깔려 있고 또 어떤 길은 가시덩쿨이 무수하게 자라고 있죠. 그 아찔함. 길과 길이 갈리는 그 순간이 선생님에게 놓여져 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요?
하하.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하지만 누구나 그 정도의 큰 차이가 있진 않아요. 더군다나 선생님의 길에는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특별한 사람이요?
그래요. 선생님이 그 사람의 손을 잡는 순간 선생님의 길이 정해지는 거죠. 그런 드라마틱함이 뻔히 보이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에겐 선생님이 아주 못견디게 재미있는 대상이 되는 거라구요. 사람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게 되면 그 다음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자나요? 그게 선생님의 매력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선생님 같은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요. 보고 있기만 해도 아주 재미있으니까요.
문득 선영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유미의 이야기를 전하던 선영은 그렇게 말했다. 나라는 녀석은 휘둘리기 좋은 녀석이라고.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지만 유미의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면 딱 그 이야기다.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여자로 한정한다면 더 그렇다. 어떤 여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그런 식으로 나뉘어져 있단 말인가? 상상조차 어렵다. 내가 느끼는 내 인생은 하나 뿐인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가 가능하지?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유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선생님 원래는 여자들에게 인기 없었죠?
네에? 아... 뭐.....
지독히도 정확한 사실이라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노라니 유미가 날 똑바로 쳐다보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내 가슴 근처를 가리켰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선생님의 마개가 열렸어요. 옛날 이야기 중에 뭐 그런게 있죠? 판도라의 상자인가 뭔가... 그게 맞나 모르겠는데, 암튼... 어떤 분이 선생님의 가능성을 알아버리고 오픈해버렸죠. 그때부터 선생님의 갈림길이 시작된 거예요.
오픈? 가능성? 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잔뜩이었지만 이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내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유미는 지금 지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어떻게 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지혜를 본 적이 없을 텐데....
그 전까지는 선생님의 냄새를 나 같은 사람만 맡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열어 버리니까 사방으로 냄새가 퍼지고 말았네요. 만약 그 분이랑 잘 되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잘 안 된 모양이죠. 그래서 주변의 다른 여자들이 선생님의 냄새에 끌리고 있죠. 결과적으로 저와 선영이, 그리고 유진이에게는 도리어 잘 됐지만요. 후후후.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말들은 하나하나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는 유진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나와 선영의 관계도 대강 알고 있는 듯 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여하튼 전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요. 가능하면 제 곁에 두고 싶기도 하고 안겨보기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죠. 근데 이제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일부러 잊으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스스로 잊은 채 살고 있더군요.
유진이 어머님.....
또, 또 그렇게 절 부르는 군요. 아무도 절 그렇게 부르지 않는데.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난처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럼 뭐라고 부르나요?
제 이름을요. 유미라는 제 이름을 부르시면 돼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그래도 그건 좀....
훗, 역시 애엄마를 상대로 그렇게 편하게 부르는 건 쉽지 않겠죠?
그녀는 새로 나온 마티니 잔을 홀짝였다.
아무튼. 전 그런 이유로 선생님이 좋다. 이 말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거예요. 뭐, 특별히 더 할 말은 없어요.
그러신가요.
어쩐지 맥이 빠졌다. 뭔가 굉장히 거창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끝에 와서는 시시하게 끝났다. 아니, 뭐 그렇다고 내가 아주 이상한 걸 상상하거나 야리꾸리한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건가? 내가 손을 맞잡고 흔들자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유진이를 잘 부탁해요.
네? 유진이요?
예. 제 딸이자 선생님을 좋아하는 한 여자. 제 연적.
자신의 딸을 여자, 그리고 연적이라고 칭하는 그녀의 말투는 굉장히 낯설었다.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 그녀는 손을 놓았다.
지금은 제가 한 이야기들이 이해가 잘 안 가시겠죠? 그렇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 따로 배웅은 안 할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녀는 어느새 마티니 두 잔째를 비우고 있었다. 내게 딱히 인사를 받을 생각도 없는 듯 바텐더를 불러 세 잔째를 청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바를 나왔다.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어쩐지 취한 느낌이다. 술보다는 유미의 신비로운 이야기에 취했다고나 할까. 집까지 돌아가는 길이 제법 멀었다. 그러나 나는 택시를 잡아타지도 않고 계속 걸어갔다. 골목길마다 길이 갈라져 있는 것이 새삼스럽게 크게 느껴졌다. 이 길. 저 길. 그리고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내가 가지 않은 저 길. 모든 것이 이 세상에 놓여있다.
술을 그리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나는 명희와 연인이 되는 꿈을 꿨다. 지혜와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리사와 함께 쌍둥이 아이를 키우는 꿈을 꾸었다. 군복을 입고 있는 나를 안아주는 마리를 보았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감옥에 갇히는 꿈도 꾸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들판만이 내 앞에 펼쳐 있는 것을 보았다.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과 쏟아 붓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불길은 맹렬하게 타올랐고 이윽고 나를 태워버렸다.
흐억!!
내가 눈을 떴을 때, 마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내 옆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금 전 꿈들이 너무 생생하여 오히려 깨어난 지금이 현실 같지 않았다. 마리는 땀으로 가득한 내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
어제 술 억수로 많이 드셨나 보네예?
어? 어.... 그런 건 아닌데....
지가 밤 늦게 문 뚜들기가 불렀는데도 답도 없고... 오늘 아침에도 식사 하라고 불렀드만 기척이 없기에 함 와봤심더. 허락도 안 받구 들어온기 좀 그렇긴 한데...
그러니? 괜찮아. 잘 했어. 내가 만약 늦잠이라도 잤다면....
문득 시계를 보니 으악! 벌써 아홉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찾는다. 그 순간 마리가 꺄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왜 그래, 마리야?
선....선배님요. 그게... 그러니까.....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찾아 헤매던 나는 그제서야 내 차림을 알아차렸다. 아니,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으니 차림이라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냥 벌거벗고만 있어도 창피도가 100%일텐데 아침이라고 기상 나팔을 불어 제끼고 있는 자지의 모양새는 창피도수 Over Range 였다. 난 황급히 다시 이불로 뛰어들어갔다.
저...마...마리야, 내가 지금 급해서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면 안될까? 나 지금 바로 나가봐야 돼.
마리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마리가 뛰쳐나가고 나서야 다시 이불에서 나올 수 있었다. 새 옷을 찾을 틈도 없어 어제 벗어 두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대체 왜 나는 잠들기 전에 옷을 다 벗어버린 걸까. 아무리 몸이 뜨거웠다고 해도 말이다. 암튼 머리를 정돈할 시간도 채 가지지 못하고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오늘따라 택시도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같은 데서 주인공이 손만 뻗으면 어디선가 택시가 날라와 앞에 딱 서는데... 나는 드라마의 잘못된 폐해를 온몸으로 느껴가며 학교까지 미친듯이 달려갔다.
허...허억...허억...하악.....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지애는 교무실에 이미 없었다. 벌써 수업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녀의 책상 앞에 놓인 수업배치도를 확인했다. 으윽. 젠장.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금 바로 1학년 3반 수업 중이었다. 나는 다시 교실까지 달려갔다. 중간에 학생주임을 만나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잔소리를 듣느라 좀 더 지체했다. 간신히 교실에 도착해서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띵-동-댕-동---
1교시 종료 종이 울려 퍼졌다. 이런 젠장할..... 반 아이들의 눈이 전부 갑자기 등장한 지각생... 아, 아니, 난 학생이 아니라 교생이지. 그러니 지각생. 맞군. 암튼, 나에게 쏠렸지만 지애는 교탁을 두드려 자신을 향하게 했다.
반장, 인사해.
그러자 유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령을 붙이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유진이 옆 자리가 비어있었다. 저 자리의 주인은 분명....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우렁찬 인사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정자세를 취한다. 교단에서 내려온 지애가 나를 지나치며 살짝 비꼬는 투로 말한다.
참, 대~단한 밤을 보내고 온 모양이죠?
교실을 나서는 지애의 뒤를 부리나케 쫓아갔다.
아, 아뇨. 오늘 어쩐지 늦잠을 자서....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라니, 집에도 안 들어가고 대체 어딜 간 거예요?
아닙니다.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여자 집?
아니요. 누....아니, 송 선생님.
교무실까지 가는 동안 지애의 날카로운 지적과 비아냥에 쩔쩔 맬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고깝게 받아들였고 결코 좋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결국 오전 내내 지애에게 이리저리 잔소리와 핀잔을 듣다가 하교를 하게 되었다. 어디 좋은 데 놀러가자는 태근이 형을 간신히 떼어놓고 혼자 걸어갔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교문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선생님.
어? 유진이구나....
학교에서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여간해서는 아는 척을 안 하는 녀석이었는데 이상했다. 수업이 끝난지 시간이 좀 되었기에 이미 갈 애들은 다 갔다고 해도 아직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애들이나 오고 가는 애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주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내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시간 되세요?
시간? 그건 왜?
소란이 집에 가볼까 하는데 괜찮다면 같이 가실래요?
소란이?
그제서야 아침에 보았던 소란의 빈자리가 떠올랐다. 유진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갓다.
오늘도 학교 안 나왔어요. 지난 번 월요일에도 갑자기 안 나와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거든요. 아무리 봐도 아픈 건 아닌거 같고.... 아무래도 찾아가 보려구요.
유진과 소란은 굉장히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하긴 소란이가 유진을 꽤 생각하고 있던 걸 이미 들어 알고 있던 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소란에게 들었던 또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서 사뭇 걱정되었다.
아픈 것 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다른 이유요? 뭐, 좀 알고 계세요?
유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아차 싶었다. 소란이는 자신의 사정을 비밀로 하고 싶어했었지.... 나는 황급히 팔을 휘저으며 딴 소리를 생각해 냈다.
어, 뭐... 집안 일이라든가 이것저것 복잡한 무언가?
어쩌라구요. 그게 대체.
내가 말을 흐리멍텅하게 하고 있으려니 유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최한석 씨 되시죠?
고개를 돌리자 은색 정장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금테 안경을 얹은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적으로 보였다. 뽀얀 피부 위로 잘 자리잡은 이목구비도 선명하다. 그러나 표정이 워낙 차가워서 인간미는 별로 없어 보였다.
그렇습니다만....
손하영이라고 합니다. 박효진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표정과 달리 퍽 공손한 태도로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명함이 없기에 그저 받기만 했다. 받아들고 읽어보니 거기에는 국내 유명한 법무법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녀의 직책이 명시되어 있었다.
팀장 대리... 손하영 변호사님?
예. 가사 소송 및 재산분할 소송 전문입니다.
중지와 엄지를 펼쳐 안경을 고쳐 올리는 그녀의 태도는 딱히 위압적이라거나 무서워 보이진 않지만 함부로 범접 못 할 아우라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박효진 씨의 뒤치닥거리... 아니, 서포트를 맡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분이 어쩐 일로....
오늘 원래 효진 씨와 약속이 있으셨다구요? 맞습니까?
예, 그랬죠.
오늘 효진과 만나 지혜를 찾아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안 오고 뭐하는 거야, 이 녀석은.
그런데 효진 씨가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함께 가실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걸 전하러 일부러 오신 거예요?
이딴 사소한 일을 하려고 제가 올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그리고 덧붙여 한석 씨를 끌고 오...아니, 모셔 오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공손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꽤 야박한 말투를 은근히 섞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무심결에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딜 가는데요?
어디라고 말을 하면 한석 씨가 따라오지 않을테니 그냥 닥치고 따라오라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만약 따라오지 않는다면 지금 다니시는 학교에 사람을 풀어 한석이 물건 사이즈를 불어버리겠다고....
순간 날 바라보는 유진이의 싸늘한 시선이 곧바로 느껴졌다. 한 순간에 온몸이 얼어붙을 지경이다.
쿨럭! 아, 아니. 그런 이야기를 무슨 길 한복판에서!
그럼 차에 타시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유진이를 쳐다보았다. 유진이는 하영의 난입에 꽤 불쾌한 듯 보였다. 게다가 방금 나온 이야기의 내용을 눈치 못 챌 아이도 아니다.
저기, 유진아... 저기 말야.
아, 몰라요. 아저씨 마음대로 해요!
유진은 소리를 꽥 지르고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렸다. 하영이 한 발자국 다가서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덧붙여 모양도 꽤 괜찮으시다고....
타요! 타면 되잖아요!!
검정색 대형 세단이었다. 내가 조수석에 타고 뒤이어 운전석에 탄 하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뒤에 안 타시구요?
네? 뒤에 타야 돼요?
운전 중인 제 다리를 훔쳐보려고 앞에 타신 게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으흠....
은빛 슈트차림의 그녀 치마는 그 길이가 무척 짧았다. 무릎 위 20센티미터는 충분히 넘고도 남을 정도의 미니스커트였다. 그런 차림으로 운전석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허벅지가 상당히 드러나게 되었다. 몹시 매끈하니 아주 잘 뻗었다. 되도록 그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써 앞을 쳐다보았다.
그럴 생각 없으니 일단 가세요.
출발하겠습니다.
하영이 모는 차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 가는지 정말 이야기 안 해줘요?
도착하면 저절로 알게 되니 애처럼 굴지 말고 기다리세요.
......네.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별로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 신기한 화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