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65)

펜을 내려놓고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 하는 순간, 나의 여름 방학이 시작 되었다. 강의실을 나온 다음 기말고사 동안 혹사당한 정신을 쉬게 하고자 과사의 진호 선배를 찾았다. 얼마 전, 놀라운 소식을 발표한 진호 선배 덕분에 우리 과가 한번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과사 앞에서 선배를 만났다. 늘 그렇듯이 혼자가 아니었다. 

여어, 한석. 시험 다 끝난 거야?

 방금이요. 선배는요?

그러자 형은 옆에 있는 과순이를 가리키며 웃었다. 아니, 이제 그렇게 부르면 안되지. 혜진 씨라고 했던가.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늘 과순이라고만 불러왔고 이제는 형수님이라 불러야 되는터라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야 애들 시험 끝났나 확인만 하면 되지만 우리 마누라가 교수님들 서류 정리가 아직 덜 끝나서 말야. 내일까지는 학교에 나와야 할 것 같아.

 별 일 아니니까 나오지 마요. 오빠.

 그래도 우리 마누라 혼자 다니게 할 수는 없지. 늑대들로 드글드글한 공대에 널 두고 가면 내 속이 안 편해.

졸지에 인간에서 늑대로 격하된 나는 뭐 먹으러 갈지 묻는다. 선배가 호기롭게 외쳤다.

낚지 볶음 맵게 잘 하는 데를 찾았어. 가자!

맛있겠다며 좋아하는 형수를 보며 난 알았다는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맵다... 이 말이지.

호의는 고맙지만 전 여기까지... 

정중히 사양하고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선배에게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으악. 제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로 먹으러 가자구요! 네에?

그렇게 끌려가다시피 하여 고문과도 같은 식사를 맞이했다. 어느 정도 먹고 나서 입과 속에서 일고 있는 불길을 다스려가며 먼저 일어섰다.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 즐겁게 데이트 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내가 가야할 곳으로 향했다. 

다시 학교로 들어가게?

 예. 마리가 아직 오후에 시험이 있어요.

 내가 니 마리 처음에 데리고 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감을 했다니까. 둘이 착 붙어다니는게 보기 좋다고 말야.

 하하. 고맙습니다.

진호 선배와 미래의 형수님께 인사를 남기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교정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 봄부터 이어져 내려온 나의 섹스 라이프를 상기한다. 남한테는 결코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속으로 중얼거린다.

'둘이 아니라... 셋이 붙어있습니다만....'

그렇다. 그 날 마리와 리사, 두 자매를 동시에 취한 그 날 이후 나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나의 사고도 완전히 달라졌다. 여지껏 나는 섹스는 남성과 여성, 두 사람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예전에 잠깐 알고 지내던 지혜와 효진이를 두고 셋이서 즐겼던 적이 있지만 그건 나 자신이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돌발성 이벤트였다. 그러나 지금 이 자매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하루는 내 침대에 마리가, 또 다음 날에는 리사가 들어왔다. 휴일에는 두 사람이 같이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몸 안의 정액이 고갈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생각이 들 때도 없진 않았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다. 어느 한 사람도 놓치기 싫은 매력의 소유자들인데다가 날 무척이나 사랑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둘의 사이는 정말 좋았다. 셋이서 하다가 어느 정도 열이 오르면 둘이 엉켜서 키스를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 나 역시 참전하고....... 그렇게 두 명의 정기적인 섹스 파트너가 있다보니 나라는 녀석의 사고방식이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명과 꼭 할 필요는 없다. 두 명도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요새 시험기간이라고 참고 있었더니 이제 방학동안 불태울 밤에 대한 생각만으로 아랫도리가 불룩해진다. 공대 앞 벤치에 앉아있던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았던 다리의 방향을 바꾸었다. 시계를 들여다본다. 마리 이 녀석은 모르는 문제가 잔뜩 나와서 정답은 고사하고 교수님을 향한 열렬한 자기고백과 성찰을 담은 편지를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시험시간을 꽉꽉 다 채워서 끝까지 앉아있다가 나오는 녀석이니 아직 나오려면 한참 남았다. 더군다나 마리는 아직 시험 과목과 일정이 더 남았지만 나는 다 끝났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리사에게 오늘 시험이 끝난다고 말했더니 뛸 듯이 기뻐하며 이날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녀는 방학을 맞이한 나와 이곳저곳으로 데이트하러 갈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만의 뜨거운 밤도.....

최한석 씨 되시죠?

순간 예린인줄 알았다. 나의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야리꼬리한 생각을 방해한 사람은 커다란 덩치의 남자였다. 성별도 다르고 체격도 다른데 예린으로 착각한 이유는 늘 그녀가 입는 것과 같은 까만 정장을 차려 입었기 때문이다. 새까만 선글라스도 그렇고. 그렇지만 예린은 오늘 리사와 함께 볼 일이 있다고 아침에 어딜 갔으니 여기 있을 리가 없다.

그렇습니다만....

 전 이런 사람입니다만, 잠시 이야기 괜찮을까요?

남자가 내민 명함은 예전에 예린에게서 받은 것과 같은 종류였다. 경남산업개발이라는 사명 아래 박태호 부장이라고 써있었다. 기껏해야 서른이 좀 넘었을까? 아니다. 목소리 때문에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보니 선글라스 때문에 가늠은 쉽지 않지만 말투나 머리 스타일을 볼 때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어쩌면 20대 초중반 쯤 되었을려나? 그러고보니 나보다 한 살 어린 예린도 무슨 부장인가 그랬지. 이 회사는 대체 뭐하는 회사길래 부장들이 왜 이렇게 젊어?

박 부장님?

 님 자는 안 붙이셔도 됩니다. 박 부장이라고만 불러 주십시요.

 아, 그래도 저기....

 편하게 대해 주십시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내게 몹시 깍듯했다. 그 사람은 서 있는데 계속 앉아있기도 뭣해서 일어났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한테....?

 아가씨들 문제로 여쭐 게 있어서요.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모셔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시간이야 뭐....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았다.

좀 있으면 마리가 나올텐데요.

마리가 나오면 같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었다. 그래서 공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박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마리 아가씨는 절 싫어해서..... 되도록이면 눈에 안 띄려고 했습니다만.

 아, 그런가요?

그 성격 좋은 마리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니. 어떤 사람이길래 그럴까.

그러면 연락을 좀 남기고 갈게요. 마리가 그냥 나와서 저 없는 거 보면 실망할테니까요.

 으음.

과사에다 말을 남겨야 하나 아니면 예린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박 부장이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나도 키가 큰 편이지만 이 사람은 190은 훌쩍 넘은 듯하고 어깨 넓이가 거의 내 두 배에 가까웠다. 연구실에 있는 학술서적 가득 꽂힌 마호가니 책장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짝 붙으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좋게 말할 때 빨리 따라오지? 험한 꼴 보기 전에?

지금까지의 말투와는 전혀 다르게 으르렁거리는 말투에 깜짝 놀랐다. 놀란 내가 그의 얼굴을 돌아보며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강력한 충격이 배에 느껴졌다. 아직 그래본 적은 없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배에 구멍이 뚫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허억!

 날 밝은 데 애먹이게 하고 있어. 짜식이....

의식이 멀어진다. 공대건물, 하늘이 보이더니 그대로 모두 까매졌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공대 앞에 있을 때는 한 낮이었는데 지금은 노을빛으로 추정되는 붉은 빛이 사방에 가득했다. 눈을 억지로 비집어 뜨고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가 가늠한다. 달리고 있는 어떤 차 안이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은 이미 테이프로 봉해져 있었고 손과 발도 무언가로 꽁꽁 싸매어져 마치 짐짝처럼 뒷자리에서 구르고 있었다.

읍읍!!!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나오는 건 이 정도가 최선이다. 조수석에 앉은 이가 뒤를 돌아본다. 박 부장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놈이다. 날 이렇게 만든 원흉! 나쁜 놈!

깼냐? 얌전히 있어.

 읍읍읍!!!

 맘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회치고 싶은 걸 참아준거야. 고맙게 생각해.

 읍읍읍읍!!

 안 닥쳐?!

무언가 날라와 내 이마를 정통으로 맞춘다. 맞추는 순간 부셔지는 걸 보아 무슨 과자나 크래커인 모양이다. 고작 과자에 맞은 건데도 굉장히 아팠다. 손목 힘이 어마어마한 모양이다. 하긴 아까 맞은 배가 아직도 욱신거릴 정도이니.... 꼭 맞은 부위가 아파서라기보단 지금 내가 떠들어봐야 하고 싶은 말도 못 하는 것이기에 그냥 얌전히 있기로 했다. 운전석에 있는 이가 이쪽을 힐끔 돌아보더니 박 부장에게 묻는다.

행님아. 던지려면 단디한걸 던져야지, 저런 걸 던지면 우짭니까? 고마 뒷자리 과자 뿌스레기 천지네.

 단디? 근데 이런 걸 던지면 저 자식이 뒤지잖아.

박 부장이 들어올린 건 쇠로 된 재떨이였다. 저런 걸 왜 차에 놓고 다니는 거야!

아하, 맞다. 살려 데려오라 ?지요?

나이가 좀 어려보이는 녀석이 운전을 하면서 뭐라 궁시렁거렸다. 그런데 녀석의 운전이 험한 건지 아니면 길이 험한 건지 꽤나 쿵쾅거리고 있었다. 굴러다니면서 곳곳에 부딪히고 문대느라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아오. 저거 연장만 안 싣고 왔으면 그냥 트렁크에 넣는 건데.

 연장 뺄까예?

 됐어. 어차피 다 왔는데 뭐하러. 일단 둬.

트렁크는 짐 싣는 곳이지 사람 싣는 곳은 아니잖아. 자세는 불편하지만 그래도 뒷좌석이 더 좋기에 참는다. 이제부터는 아파도 신음을 흘리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는데도 도로 사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앞자리에 앉은 녀석들끼리도 지들끼리 뭐가 불만인지 한참 떠들어댄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누군가 그들을 쫓고 있는 모양이다. 나를 납치해놓고 쫓기고 있다니... 날 구하려는 정의의 기사라도 쫓아오는 건가? 설마 그녀인가?

이쪽으로 돌면 따돌리려나?

 글쎄예. 될까예?

지들끼리 무어라 궁시렁 거리는 데, 바로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완전히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차가 어디 박힌 모양이다. 운전하던 놈은 벨트를 안 매었는지 그대로 핸들에 얼굴을 들이박아 버렸고 박 부장의 몸도 크게 들썩인다. 그러나 그의 동작은 상상 이상으로 재빨랐다. 그는 벨트를 벗는 것과 동시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밖에서 몇명인지 모를 사람들의 함성과 욕설이 들려왔다. 박 부장의 욕설도 들린다. 자동차의 경적이 무척이나 시끄럽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누군가 이 차의 유리를 박살내버렸다.

읍읍읍!!!

몸을 움츠려 떨어지는 유리 파편을 피해보려 애썼지만 덩어지져 떨어지는 깨진 유리는 와장창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운전석에 앉아있는 놈이 끌려 나가고 곧 이어 뒷문도 열리더니 나도 밖으로 끌러나갔다. 공주님 안기로 사뿐히 안아주는 것 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건 너무 아프잖아!

뭐야, 이 놈은?

 모르겠습니다. 박태호가 직접 싣고 가는 걸로 봐서 중요한 놈 아닐까요?

 너 같으면 중요한 새끼를 이렇게 둘둘 싸매고 가겄냐?

 그렇네... 버릴 까요?

비슷한 복장의 녀석들이 날 둘러싸고 처분을 고심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인물이 날 구하러 온 건 절대로 아니었다. 뭔가 사태가 요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된 나는 최대한 선량한 시민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마에 상처가 있고 눈이 쫙 찢어진 녀석이 날 보며 인상을 쓰다가 옆에 있는 이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실어!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바닥을 질질 끌려 간다. 봉고차의 뒷좌석에 실리기 전까지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박 부장과 아까 운전하던 젊은 놈은 대여섯명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고 있었다. 날 단 한방에 때려 눕힌 박 부장이 저렇게 맞는 게 처음에는 고소했지만 너무 많이 맞는 게 아닐까 싶어서 좀 불쌍하기도 했다. 봉고차의 문은 거칠게 닫혔고 이내 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짐짝 취급인 채로 말이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내가 던져진 곳은 어떤 빈 창고였다. 손발에 묶인 것도 재갈도 풀어주지 않은 채로 던지길래 한참이나 읍읍 거리면서 사정했더니 입은 풀어주었다. 물론 신나게 몇 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말이다.

저기! 저 화장실이 좀 가고 싶은데요.

 저기 구석에서 알아서 싸!

 큰 건데요.

 너, 이 새끼. 죽을래?

그래도 그곳을 똥숫간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지 다리를 풀어주며 일으킨다. 한 녀석이 날 끌고 간이 화장실로 데려가 주었다. 얼마만인지 모를 배설의 쾌감을 만끽한 다음 다시 창고로 끌려가면서 주변을 살핀다. 커다란 창고와 작은 창고가 마구 모여 있는, 꽤나 비효율적인 물류창고단지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단지 바깥은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날 싣고 온 봉고차가 입구 쪽에 있었고 다른 봉고차도 반대편에 있었다. 십 여명의 남자들이 떠들고 있었고 대화 중에 태호라는 이름이 꽤 여러번 나왔다.

빨리 들어가! 얌전히 있어!

창고로 들어가 있으려니 얼마 뒤에는 아까 그 박 부장도 들어왔다. 그는 전신에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선글라스도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드러누워서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박 부장을 보고 말했다.

어라? 생각보다 젊네?

 뭐, 임마?

선글라스 때문에 그랬지 막상 그게 없으니 꽤 앳된 얼굴이었다. 나랑 비슷하거나 아니면 더 어려보이거나.

난 또 서른은 넘은 줄 알았지. 목소리도 굵직하길래.

 넌....쿨럭.... 지금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

 농담? 아닌데?

박 부장, 아니 태호는 한참동안 마른 기침을 해댔다. 난 녀석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등을 갖다 대었다.

내가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은데 말야, 손이 묶여 있어서 안 되거든? 좀 풀어줄래?

 죽을래 임마. 얌전히 안 있어?

 곧 죽을 것 같은 건 두드려 맞은 너지 난 아니야.

태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고 있다가 내 쪽으로 기어오더니 내 팔을 풀어주었다. 한참이나 같은 자세로 있다가 벌떡 일어나니 온 몸이 쩌릿쩌릿하다. 일어난 자세 그대로 한참이나 몸을 푼 다음 바닥에 드러누운 태호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가쁜 숨을 내쉬며 팔을 감싸쥐고 모로 누워있었다.

일단, 우리 빚은 없게 하자고?

 뭐?

태호가 뭐라고 하기 전에 녀석의 배를 한번 걷어찬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태호는 몸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무릎을 세우고 날 노려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날 물어뜯을 기세다.

이 새끼가 진짜! 내가 아무리... 쿨럭. 그래도 너 하나 쯤은...

 워워. 진정해. 진정해. 아까 니도 내 배 때렸잖아. 이걸로 쌤쌤. 안 그래?

 뭐.........? 하아... 저거 또라이 아냐?

태호는 다시 몸을 눕히더니 드러누웠다. 난 몸의 관절을 풀어가며 주변을 살핀다. 열평은 넘어보이는 중간 크기의 창고였다. 아무 것도 없었고 창문 같은 것도 없었다. 조명이라고 해봐야 족히 4미터는 넘어보이는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등이 다였다. 한쪽 벽에 돌지 않는 환풍기가 달려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비어있는 창고이긴 하지만 바닥을 쓸어보며 적당한 물건이 없나 찾아본다.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짧은 걸로 하나 주워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다음 태호에게 다가갔다.

어이, 박 부장. 상황이 어떻게 된거야? 말 좀 해봐.

 쿨럭.. 뭐긴 뭐야. 좆된거지.

 어떤 식으로 좆된 건데... 빨리 말해봐. 쟤네 어디 애들이야?

 뭐 임마?

 칠성이야, 태무야? 예린이한테 듣기는 했는데 진짜 이런 식일 줄이야.

내 입에 나온 이름을 들은 태호가 표정이 급변한다.

니가 칠성이나 태무를 어떻게........ 자, 잠깐. 예린 누님한테 들었다고?

 어? 진짜 너 어리구나. 예린이가 너한테 누나야? 걔가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는데, 그럼 니도 내 동생 뻘이겠네?

그러자 녀석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뭔 개수작이야, 임마! 예린 누님이 너 따위를... 오빠라고 부를리가 없잖아!

 안타깝게도 사실입니다. 오빠라고 불리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을 많이 했지.

 미친....

궁시렁 거리는 태호를 내버려두고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지난 일들을 떠올려본다. 리사, 마리와 그런 관계가 되고 나서 3주일 정도 지난 후에 다리의 석고를 완전히 뗐다. 재활을 위해 화, 목은 병원을 다녀왔는데 이때 나와 동행한 것이 예린이었다. 마리는 학교를 가야했고 리사는 내가 모르는 일로 낮 동안 계속 바빴기에 예린이 나와 함께 한 것이다. 예린과 단둘이 되고나자 난 그녀에게 예전부터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구했다. 

말해줘. 리사네 집은 대체 뭐하는 집안이야?

 전에도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렇게 뭉뚱그려 말하는 거 말고... 자세히 말야.

 ......

예린은 한사코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녀에게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는 순서라고 말했었다. 이제는 순서를 지킬 차례인가 싶었다. 시내 도로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조수석에 앉아 예린의 옆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

리사랑 마리랑은 이미 했고... 이젠 예린, 너만 남았는데 말야.

 .....

 저기 사거리에서 일단 우회전 해.

재활치료를 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차는 정상코스에서 조금 벗어났다. 병원 주차장이 아닌 모텔 주차장에 차가 섰다. 내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따라온 예린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윗입이 열리지 않기에 아랫입부터 열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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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씩 연재하다보니 첫번째 화에는 댓글이 적게 달리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슬퍼요. 두 글 다 사랑해주세요.

두 글 덮밥 정신!

저희는 부산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했던 사소한 분쟁 해결?

 그건 일부 업무입니다.

뜨거운 시간이 지나고 알몸으로 내게 안긴 예린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리사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꽤나 알아주는 큰 손이라고 했다. 큰 손인 동시에 큰 주먹이다. 지하 경제에 흐르는 돈줄도 돈줄이거니와 사람을 공급하는 일에 있어 거의 독점적 수준이라고 한다. 돈이야 그렇다 치고 사람을 공급한다고? 일의 내용 자체도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거니와 규모 역시 내가 짐작할 수 있는 범위보다 더 큰 모양이었다. 적어도 예린이 직접 동원 가능한 그녀의 휘하에 있는 인원만 해도 상당했다. 말 그대로 조직인 셈이다.

그 정도였어?

고개를 끄덕이는 예린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여태 있었던 여러 일들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스케일은 짐작을 못 했다. 허풍을 떨거나 허세를 부리는 성격이 결코 아닌 예린이 한 소리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린은 좀 묘한 소리를 덧붙였다.

다만 요새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

하긴 그렇게 큰 영향력이 있는 곳이라면 문제가 없을 리는 없겠지. 무슨 문제인지 말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예, 최근에 여러가지로 부침이 많습니다. 아버님이 그리 노쇠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이미 충분히 퇴물 대접입니다. 게다가 가장 핵심 인원이 최근에 곁에서 빠지고 나니 아무래도....

 핵심 인원? 그게 누군데?

예린이 날 빤히 보며 대답했다.

리사 아가씨입니다.

 에엑...?

그녀들의 집이 그런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리사가 그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놀라움에 입을 뻐끔거리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그러하다. 학교도 다니지 않는 리사가 낮에 그리 바빴던 일이나 늘 예린을 동행하고 다니며 휴대전화로 수시로 연락을 취했던 일들이 결코 그녀가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리사의 지시가 필요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전화로 처리하고 있었던 거다. 그 후로 예린에게 수시로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와 요즘 부산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예린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는 가끔 리사가 전화를 붙들고 사투리로 뭐라뭐라 고함을 치는 걸 보고도 그냥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예린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은연 중에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그 자매와 그렇게 엮이고 있는데 언젠가는 나에게도 무언가 영향이 미칠 것이다라는 걸 말이다.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일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일 말이다. 어느 날인가 이런 우려를 예린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결코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두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생기면?

그러자 예린은 내 몸을 힐끔 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오빠 몸에 생채기라도 내는 놈들이 있으면 제 손으로 싹 다....

 워워. 됐어, 거기까지.

순간 그녀에게서 피어오르는 살기는 결코 날 향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까지 오싹하다. 그와 동시에 몹시 든든했다.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다시 안아주고 리사 몰래 찐한 시간을 보냈다. 그랬던 지난 날을 떠올리던 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지금 이렇게 내가 닥쳐있는 바로 이 순간이다. 일단 태호를 불렀다.

태호야.

 뭐, 임마! 너 죽어볼래?

 날 죽이고 싶으면 일단 일어나서 걸어야 되지 않겠어? 니 예린이보다 동생이라며. 그럼 내가 말 놔도 문제 없지. 안 그래?

 끄응...

태호는 투덜거리면서도 날 다시 보는 눈치였다. 녀석이 평소에 예린을 얼마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게 눈에 보였다.

일단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곤란하잖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씨발.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어허, 형한테 말버릇 봐라. 예린한테 나중에 이른다?

 너 자꾸 누님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를 거야?

 그럼 어떻게 불러? 걔가 날 보고 오빠라고 부르는데 내가 다시 누나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잖아.

 아....으.... 씨발 진짜. 좆같네.

나를 씹어먹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태호를 보고 있노라니 아무래도 비장의 수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어지간하면 이 이야기는 안 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긴 해야 겠다. 뭐, 예린이도 이해해 주겠지. 난 태호를 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예린이 별명이 푸른 악마라면서?

녀석의 눈빛이 단번에 경악으로 물든다.

너, 임마... 그걸 어떻게....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녀석을 보며 묘한 우월감이 생겼다. 우후후후후.

물론 그녀 앞에서는 교관 말고는 아무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그러고?

 당연하지. 어떤 미친 놈이 그걸 누님 앞에서 지껄이겠어? 죽고 싶어 환장한 새끼가 아니고서야...

 그런데 리사나 마리도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할래? 내가 본인에게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한다면?

 끄응..... 마...말도 안돼....

예린이 알려준 조직의 생리라는 건 그런 거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굴복한다. 강한 사람과 동급인 사람에게도 굴복한다. 지금 태호는 자신이 방금 들은 소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예린을 누님이라고 부르는 이상 녀석은 나에게 적수가 안 된다. 아, 전문 용어로는 쨉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급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이제 알아들었으면 좀 일어나봐.

태호는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부축하는 손을 마다하지 않고 기대어 일어난다. 게다가 내가 한 협박(?)은 주효한 모양이다. 녀석은 좀 주저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상황을 좀 보겠습니다.

 오냐.

너무 건방지게 대답했나? 내심 나에게 한수 접기로 한 모양이던 태호가 발끈한다.

아, 진짜.

난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태호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투덜거렸다. 다 들려, 임마!

태호를 부축한 채로 아까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 열 명 남짓한 인원 수와 두 대의 봉고차. 컨테이너에 꾸며진 사무실. 창고가 가득했던 주변 풍광을 되도록 자세히 설명했다. 날 패던 놈들의 얼굴도 기억나는 대로 설명해보았다. 내 이야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하던 태호는 입안에 고인 피를 한번 뱉어냈다. 겉으로도 멀쩡하지 않은데 내상도 꽤 입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칠성 애들이 있는 물류창고 같은데...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맞을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있는 창고 내부와 출구 주변을 꼼꼼히 조사한다. 단순하기 그지 없는 내부인지라 그만큼 빈틈이 있을 여지도 적었다. 조사를 마친 태호는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저들이 열어주기 전까지는....

 음... 근데 우린 왜 가둬놓은 거야?

 일단 저와 떼어놓은 다음 성제를 족치고 있겠죠. 저희가 서울에 간 이유나 뭐 그런 걸 캐고 있을 겁니다.

성제라는 녀석은 아마도 아까 운전을 하던 젊은 녀석을 이르는 듯 했다. 그 놈은 이 창고에 없었다. 

그러게. 안 그래도 나도 궁금하다. 너 나 데리러 온 거 맞지?

태호는 좀 머뭇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시킨 거야?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리사 아버님?

 ......예. 그렇습니다. 아버님이 지시하신 겁니다.

이전에 들었던 예진의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리사는 마리가 방 잡고 정착할 때까지 당분간 있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 때문에 그녀의 복귀는 늦어졌고 (이 부분에서 예린이 날 힐끔 쳐다보았고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든 나는 예린을 뒤에서 끌어안아 주었다.) 금방 부산으로 복귀 하겠다던 그녀의 약속은 점차 뒤로 미루어졌다. 리사가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전화로 각종 보고를 받고 그에 맞는 지시를 내린다고는 하나 조직의 핵심 브레인인 그녀가 부산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직 내에서 약간의 동요가 일어났다고 했다. 

이때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곳이 바로 칠성이라는 곳과 태무라는 조직이다. 다른 곳도 얌전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두 조직이 가장 눈에 띄게 거동하며 백당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아, 여기서 백당이라는 이름은 리사네 조직의 이름이자 리사 아버지의 호라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데도 어쩐지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그런 주먹 세계와 전혀 인연이 없는 나도 알 정도의 이름이면 정말 많이 알려진 대단한 조직인건가 싶었다.

최근 들어 백당에서 운영하는 기업들의 자금 흐름이 둔해지고 이에 따라 여러 사업이 삐걱대고 있기에 누구보다 리사의 지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했다. 이렇게 조직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고 리사의 부재는 더욱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결국 참다못한 수장의 명령에 따라 부장급인 태호가 움직이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리사 아가씨에게 부산으로 돌아오라고 여러번 권고를 하셨습니다. 사람도 보내셨고....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 있어야 한다며 고집을 피우시더군요. 그래서 아버님은 리사 아가씨가 서울에 있겠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찾으셨지요.

태호의 시선이 날 향하는 게 느껴졌다. 좀 쑥스러워서 헛기침을 했다.

죽이지만 말고 최대한 신속하게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직접 시키신 일이니 아래 애들 시키기도 뭣하고... 제가 직접 나섰습니다. 급히 움직이다 보니 다른 조직에게 뒤를 밟히는 줄 몰랐군요. 제 실책입니다.

태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궁금한 게 생겼다. 전에 예린에게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녀도 자세히는 말해주지 않았다.

근데 말야.

 예.

 너도 그렇고 예린이도 그렇고... 왜 다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너랑 예린이랑 남매야? 리사하고도 상관 있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거의 그렇죠.

 그건 또 뭔 소리래.

태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바깥의 기색을 살폈다. 나도 귀를 기울였다. 무어라무어라 떠드는 소리가 좀 들리긴 했지만 쓸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저희 내부의 이야기이긴 한데.... 형님에게라면, 뭐 말해도 무방하겠죠.

예린을 들먹이며 겁박을 준 게 유효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이제 날 형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다. 만년 외동아들로 자랐는데 난데없이 동생이 생기고 나니 기이한 느낌이다.

아버님이 직접 키우시고 길러낸 저희는 그 분을 아버님이라 호칭합니다. 조직의 다른 분들은 큰형님이나 오야붕이라고 부르지만 ... 특별히 저희에게만 허락된 호칭이죠.

 직접 키우고 길러냈다?

 말 그대로입니다. 부산에서 버려진 아이들이나 미혼모의 자녀들이 몸을 의탁하는 시설이 있습니다. 저희가 운영하는 시설이죠. 그곳 출신 중에서 소질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님이 직접 훈육하고 길러내십니다. 교관님께 따로 교육도 받죠.

예린에게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세한 뒷배경까지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리사의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호칭한다고 했을 뿐이다. 사람을 공급하는 일도 한다고 했는데 그게 이 정도의 스케일 일줄은 몰랐다. 그녀의 별명과 교관 이야기도 아주 우연하게 듣게 된 일이었다. 예린은 조직에 대해서 이야기 할지언정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잘 털어놓지 않았다. 태호는 자신들의 형제가 자신과 예린을 포함하여 다섯명이라고 했다.

예린 누님이 가장 에이스고.... 그 다음이 저입니다.

녀석은 덩치에 맞지 않게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우, 징그러.

그럼 세컨드 에이스씨. 나를 저기까지 올려줄 수 있겠어?

내가 가리킨 것은 약 3미터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환풍기였다. 천장에 콘센트가 있었지만 플러그가 빠져있어서 돌고 있지는 않았다. 태호는 내 키를 가늠해보더니 그 벽 아래로 가서 섰다. 비록 기운 빠지고 지친 몸이긴 하지만 나를 받쳐주는 데는 무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올라가서 어쩌시게요?

 아까 창고를 뒤지다가 이런 걸 주워서 말야.

내가 내민 것은 짧고 굵은 철사였다. 손으로 구부리려고 했는데 조금 굵은 편이라 곤란하다. 태호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좀 한심스럽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설마 그걸로 누굴 찌르기라도 하시려구요? 택도 없습니다.

 누가 찌른데? 일단 환풍구로 나갈 수는 있겠지?

 저라면 어렵지만... 형님 덩치라면 가능하겠죠. 그런데 나가더라도 금방 잡힐 겁니다. 바깥은 불빛이 밝아서...

 나도 알아. 일단 저거부터 떼보자.

일단 태호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환풍기를 떼어냈다. 적어도 몇년은 청소 없이 묵혀둔 먼지가 삽시간에 나에게 쏟아지긴 했지만 환풍기를 떼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꽤 낡아있었기 때문이다. 벽이랑 붙어 있는 부분의 시멘트가 다 닳아빠져 낡아있었다. 환풍기를 가지고 일단 내려왔다.

좋았어.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환풍기의 한쪽 모서리를 이용해서 가지고 있던 철사를 구부렸다. 한 번 더 구부려서 U자형으로 만든다. 양말 한짝을 벗어다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다시 태호를 디디고 올라가 환풍구에 매달렸다. 좀 끙끙거리기는 했지만 간신히 몸을 반쯤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창고 입구와는 반대편에 나 있는 곳이라 이쪽으로 나가도 바로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뒤집는다. 벽에 반만 걸쳐진 몸이 다소 괴롭긴 했지만 동작은 신속할 필요가 있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형님.

 착한 아이들은 따라하지 말아야 할 것.

 네?

 조금 물러나 있어. 튈지도 몰라.

양말로 철사를 붙잡고 천장에 붙은 콘센트를 향해 조금 밀어넣는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다. 손의 감각만으로 조금씩 더 밀어넣는다. 조금씩, 조금씩, 그래 지금쯤이면.....

퍼억-

뭐야!

 불이 나갔습니다!

 정전인가?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사방이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전기가 모두 나가버리자 갑자기 닥친 어둠 속에서 녀석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원래 별도의 건물에 전기설비를 할 때 각각 차단기를 설치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대개 이런 옥외에 창고를 막 지을 때는 그런 원칙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 차단기 하나에 전선만 물려서 사방에 조명을 임의로 만들어 다는 경우가 흔하다. 때문에 내가 여기서 쇼트, 그러니까 합선을 시켜버리는 순간 차단기가 떨어져 나가고 이 일대는 암흑 속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물론 순간적으로 스파크를 일으키며 튀어나간 철사를 잡고 있던 내 손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지만 말이다. 충분한 수확이다. 

전기공사기사 자격증 공부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던 강사님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를 보내며 환풍구에서 몸을 빼어 바깥으로 나왔다. 미리 눈을 감고 있었기에 어둠에 금방 적응했다. 천만다행으로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다. 아까 봐둔 컨테이너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거기에는 전화가 있을 것이다.

'제발.....'

컨테이너 뒤에 숨어 주변을 살핀다. 갑자기 꺼진 조명에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사무실 내부를 조심스럽게 들여다 본다. 다들 나가고 없었다. 컨테이너에 들어가자마자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위에 있는 전화기를 끌어당긴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빠른 속도로 누른다. 신호가 가는 동안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자식들이 옛날 구식 퓨즈로 된 브레이커를 쓴다면 복구에 오래 걸릴 테지만 전자식 브레이커를 쓴다면 스위치만 올리면 바로 불이 들어올 것이다. 

뚜르르르 하는 통화 연결음이 엄청나게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조바심에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결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컨테이너 사무실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난 수화기에 대고 빠르게 외쳤다. 

칠성! 물류창고! 회색 봉고! 부산54가에 562......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내 발을 확 잡아당겼다. 불시의 기습에 수화기를 놓치고 말았다.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그 순간 불이 환하게 들어온다.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이 새끼, 아까 그 놈 아냐? 이게 어떻게 여기 기어들어왔어?!

다짜고짜 발길질이다. 복부에 제대로 꽂힌 킥이 속을 아주 제대로 뒤집어놓는다. 

쿠엑....쿨러....억.

날 걷어찬 놈은 짧은 스포츠 머리에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가진 녀석이었다. 아까도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다. 찢어진 눈은 옆에 있는 뚱뚱한 녀석에게 눈짓했다. 뚱땡이가 내 멱살을 잡아 일으켜세운다. 배도 아파 죽겠는데 목이 졸리니까 더욱 괴롭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너, 이 새끼. 백당하고는 무슨 관계야. 그리고 우리가 칠성인 건 어떻게 알아?

 .........그냥. 그렇고 그런....사이랄까?

 장난해?!

내 배에 꽂히는 주먹은 장난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먹은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약 라면이라도 먹었다면 여기서 내가 뱉은 걸로만 라볶이 요리가 가능했을 거야. 그나저나 칠성이 맞았군. 긴가민가 했는데 확인시켜줘서 정말 고맙다.

누구한테 전화했어. 말해!

 ........천사.

 이 새끼가 진짜 끝까지!

이후로도 여러가지 다양한 욕, 구석구석 때려주는 폭력과 더불어 내 정체와 백당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질문이 쏟아졌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 물론 맞을때마다 비명과 신음을 내느라 그때는 입을 좀 벌리기도 했다. 그건 어떻게 안되더라. 잠시 후, 아까 태호와 비슷한 정도의 몰골이 되어 창고에 다시 갇혔다. 피떡이 되어 돌아온 나를 보고 태호가 혀를 찼다.

형님이라도 도망가시지 왜 돌아오신 겁니까.

 난 여기 초행길이란 말야. 나가도 길을 몰라. 혹시 택시 불러주나?

 으음.

태호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곁에 누워있던 성제라는 녀석이 킬킬거렸다. 녀석은 나와 같이 창고에 끌려왔는데 이 놈도 몰골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다.

리사 아가씨나 예린 누님 마음에 들었을 법도 한 아재네예. 저 입담 보소. 큭큭큭.

태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 고생을 하고 나가서 뭘 하신 겁니까? 전 또 가시겠다는 줄 알고 올려드렸더니.

 이 형님 나가시는데 동생이 배웅을 안 나와서 말야. 그래서 다시 들어와 봤어.

다시 성제는 배를 잡고 웃었고 태호는 짜증을 냈다. 이 놈은 개그가 안 통하는 놈이구나.

흰 소리 그만하고 말 좀 해보시죠. 나가셔서 뭐했습니까?

 천사한테 전화 좀 하고 왔어.

 천사요?

태호는 이놈이 이제 드디어 돌았구나 하는 눈빛으로 날 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소란스럽고 왁자했다. 초조한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태호는 왔다갔다 하며 몸을 풀고 있었고 난 성제를 돌봤다. 그대로 한 시간 쯤 흘렀을까. 무언가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과 욕설이 뒤섞여 들리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제 쇼타임이군. 

태호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날 보며 무언가 묻는 듯한 표정을 보낸다. 난 욱씬거리는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그가 하는 무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천사한테 전화했다고 했잖아. 여기 위치를 알려줬지.

녀석은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다.

교회 다니는 분이세요?

난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은 설명을 일일이 해줘야 알아듣나 보군.

아니, 교회는 안 다니는데.... 성녀 마리아랑 성녀 엘리사벳을 모시고 다니는 분이 하나 있어. 그 분께 내가 별명을 새로 지어줬지. 푸른 천사라고 말야.

그제서야 알아들은 태호가 입을 떡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

한참만에 밖에서 들리던 소음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창고 문이 열리고 예린이 내 품에 뛰어들어올 때까지도 태호는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 부상을 보고는 몹시 차분한 표정이 되어, 지극히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결코 온건하지 않은 말투로 지금 잡아 놓은 칠성 놈들 한 놈씩 묻어버리겠다는 예린을 뜯어말릴 때는 태호도 정신을 차리고 동참해주었다. 그제서야 녀석은 나와 예린 사이를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와줘서 고마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해.

내가 그 고생을 해가며 연락을 한 건 다름 아닌 예린이었다. 그녀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 착실하게 칠성을 박살내었다. 그녀 말고도 세 명 정도 더 온 것 같기는 한데 겨우 그 정도의 수를 가지고 그 몇 배는 됨직한 이들을 완전히 제압한 걸로 보아 예린의 전투력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본거지는 아니고 여러 곳에 나뉘어 있는 일종의 중간 기착지 중 하나인 이곳에 그녀가 빨리 올 수 있었던 까닭도 애초에 칠성 쪽에 혐의를 두고 그들의 주된 영역인 양산 쪽을 뒤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물론 내 연락을 받고 장소를 특정시키는 것이 결정적이긴 했다. 설명을 듣던 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무는요? 거기도....

알콜이 묻은 솜으로 내 얼굴을 닦고 있던 예린이 대답했다.

그 쪽은 리사 아가씨 전화를 받고 당황했다. 근데 칠성은 딱 잡아뗐다고 하더군.

 과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태호와는 달리 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아니,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조직간이라는데도 전화를 한단 말야? 게다가 잡아뗀 쪽을 의심하다니. 당황한 쪽이 연기일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내가 이런 점을 묻자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가씨의 감이죠. 저희는 그걸 믿고 따를 뿐입니다.

허어... 이 조직 문제 많네. 고작 스무살짜리 아가씨의 감에 사람들이 움직인단 말인가? 리사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상식으론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나와 태호는 예린의 차에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처음에 태호는 차에 타지 않으려고 했으나 예린이 몇 마디를 하니 찍 소리 않고 올라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양산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있는 어떤 산 중턱에 자리한 별장이었다. 통나무로 지어진 아담한 이층집이 주변 풍광을 거스르지 않고 자리하고 있었다. 한밤중이고 가로등조차 없는 좁은 길을 지나는 건데도 예린의 운전은 거침이 없었다. 아마도 자주 왔던 곳인 모양이다. 산장 앞에 차를 세운 예린이 나를 안내하며 말했다.

리사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사가?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 한편에 리사가 서 있었다. 겨우 하루만에 만나는 건데도 굉장히 반갑다. 오늘 하루가 아주 블록버스터급 무비같은 하루였기 때문이다. 벅찬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들어가고 싶었지만 태호가 한 발자국 먼저 나아가 허리를 깍듯하게 굽혀 인사를 한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리사는 내게 눈짓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보내고 나서 태호의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지만, 반갑지는 않네요.

전에도 몇 번 느꼈지만.... 리사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다. 주변 분위기를 한 번에 바꾸는 힘 말이다. 밝고 경쾌한 그녀의 목소리는 좌중을 웃게 하고 즐겁게 만들수도 있지만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는 겨울여왕처럼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태호의 뒤에 있기에 녀석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놈의 태도에서 표정이 어떨지 가히 짐작이 갔다.

제가 그렇게 알아듣게 이야기했을텐데 굳이 서울까지 올라온 이유가 뭐죠? 제가 만만한가요?

 그...야, 아버님이....

간신히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로 태호가 대답을 하자 리사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버님! 그렇군요. 아버님이.....

리사는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더니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묻잖아요. 제가 만만하냐고.

나한테 뭐라 그러는 게 아닌데도 굉장히 무섭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는 당사자인 태호는 어떻겠는가. 부들부들 떨며 대답을 못하고 있던 그는 거의 넘어지다시피 하며 바닥에 엎드린다. 이 녀석,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제 하나 알았다. 평소에 절에 다니는 구나. 오체투지가 아주 제대로다.

죽여주십시요. 아가씨.

다음 순간, 난 리사가 칼이라도 꺼내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나의 착각이고 그녀는 품에서 펜 하나를 꺼냈을 뿐이다. 리사는 아까보다 한층 나아진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확실히, 태호 씨가 절 오랜만에 보긴 보는 모양이네요. 제가 싫어하는 말을 다하고....

 죄....죄송합니다!

태호는 아버님의 지시를 받아 서울에 올라오게 된 것과 나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온 일을 이야기했다. 이 자식. 데려왔다니! 암튼 그러던 와중에 부산에 거의 다 와서 칠성의 습격을 받았고 여태 억류되어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리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부산 상황, 제가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안 내려간 것도 아니고... 여기도 사정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을텐데, 그걸 중간에서 제대로 전달 못하고 우왕좌왕 했던 건 불문에 붙이겠어요. 일정대로 움직이지 않은 제 탓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방학 되면 여기 내려올라고 했었는데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태호 씨가 일단 여기까지 오빠 모시고 온 거잖아요? 이 이야기는 한석 오빠 봐서 그냥 넘어가겠어요.

 감사합니다.

노끈으로 팔다리를 묶고 테이프로 입에 재갈을 물려서 납치를 한 게 모시고 온 거라니. 이 점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태호의 앞날이 어찌될지 몰라 나도 불문에 붙이기로 한다.

근데 칠성이랑 하지 않아도 될 뻘짓 하신 거나 우리 오빠를 피투성이로 만들게 된 일은 차후에 차차 이야기 해보는 게 좋겠군요. 지금 이야기 해 봤자 제 입만 아플테니까요.

 아...아가씨.

 일단 아버지에게 가세요. 전 여기서 마리 좀 기다린 다음 휴가 좀 즐기면서 천천히 갈테니까요. 당장 내일 관속에 들어가 누울 것도 아닌데 너무 안달내지 마시라고 전하세요.

리사는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 태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태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나갔다. 예린이 그 뒤를 따라 나가고 이제 리사와 나만 남게 되었다.

괜찮으세요?

그제서야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리사가 얼굴 가득히 걱정을 담고 내게 다가온다. 얼굴에 붙은 핏자국이나 상처는 대충 닦아둔 상태였지만 너덜너덜한 옷이나 폭탄 맞은 머리꼴은 어찌할 시간이 없었기에 내 꼴은 그지 꼴에 가까웠다. 내 몸을 어루만지며 속상해 하는 리사를 달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겉보기보단 멀쩡해. 내가 체력은 좋잖아.

 정말 죄송해요.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아니, 뭐...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했었달까....

사실은 납치와 감금, 폭행보다도 더 무서운 건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려나. 그러나 나는 애써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공포의 대왕, 아, 아니, 날 돌보는 성녀 엘리사벳이 내 옷을 벗기는 것을 가만히 도왔다. 리사는 물을 받아놓았다며 내게 목욕을 권했다. 

그녀를 따라 안쪽에 들어가니 욕실에는 네 사람은 너끈히 들어가고도 남을 대형 욕조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뜨끈한 물에 홀딱 벗고 들어가 욱씬거리는 내상을 치유하고 있노라니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수건을 두른 리사가 욕실로 따라 들어왔다. 지난 몇 달동안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기에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늘 그렇듯이 그녀의 깨끗하고 매끈한 몸매에 감탄했을 뿐이다. 리사는 탕으로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많이 아프죠?

 견딜만 해.

사실 그 자리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정도로 데미지가 쌓여있기는 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았다. 자라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 어쩌다 우격다짐을 하는 정도의 실랑이는 한 두번 해보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맞아본 일은 없었다. 턱도 얼얼하고 뼈마디도 쑤시고 특히 등짝에는 감각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렇게 고운 아가씨가 알몸으로 몸을 바싹 기대오며 나긋나긋한 손길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데 아프다는 기색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쪽으로 봐봐요.

 어어...

리사가 내 몸에 난 기스들을 보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맞을 때 필사적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멍과 타박상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처에 물에 닿아 쓰라린 것도 있었지만 적당한 온도의 물에 몸을 담그고 나니 몸에 쌓인 피로와 긴장이 풀리는 게 더 좋았다. 내 몸의 상처 하나하나를 다 확인해보려는 리사를 달래어 내 앞으로 끌어온다. 그녀의 등을 내 가슴에 기대게 하고는 뒤에서 끌어안았다. 팔로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고 손으로는 매끈하게 뻗은 허벅지와 훌륭한 볼륨을 자랑하는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더 빨리 안정이 될 것 같아....

 아이, 참....

리사는 그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내게 살짝 입을 맞추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그녀는 손을 뒤로 돌려 내 자지를 살짝 쓰다듬었다.

얘가 자꾸 절 찌르는 걸 봐서 몸 상태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니까 말야. 괜찮다고 했잖아.

목덜미와 귀를 살짝 깨물고 핥는다. 빳빳해진 자지는 리사의 엉덩이 계곡에 비벼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또 관능적으로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리사의 뒷태에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욕조에서 그녀를 잡아 일으키자 내 의도를 알겠다는 듯이 욕조 한쪽 모서리를 잡고 엎드렸다. 뒤로 쑥 내밀어진 엉덩이를 보며 잘 빚어진 예술적인 도자기의 라인을 떠올린다. 도공이 예술혼에 불타듯이 난 섹스혼에 불타고 있다. 성한 곳이 없는 지금 내 몸에서 가장 건강하고 팔딱거리고 있는 녀석을 잡아 조준한 후 그녀의 안으로 밀어넣는다. 제자리를 찾아들어가듯 꼭 맞게 그녀의 보지로 진입한다.

하악.... 오빠..... 흡.....

잘 빠진 허리를 붙잡고 내 허리를 천천히 움직인다. 지난 몇 달간 리사와 함께 하면서 한가지 깨달은 게 있다. 리사는 정말 맛있는 여자라는 것 말이다.

하악! 하악....하악....

전희도 많이 생략되었지만 이미 맞춰진 몸의 리듬은 늘 그러하듯 잘 맞아떨어진다. 몸을 적시는 목욕물이 말라가고 송글송글 배어나는 땀이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몸을 움직여댄다. 뒤쪽에서 너무도 잘 보이는 리사의 보지를 쑤셔대는 자지의 움직임이 몹시 바쁘다. 허벅지 아래쪽으로는 욕조물이 찰랑거리고 있다. 건강에 좋다는 반신욕을 이렇게 즐기는 건가. 그렇게 뒤로 한창 쑤시다가 리사가 날 돌아보았다. 저 눈빛이 뭘 요구하는지 알고 있다.

이쪽으로 와.

이번에는 내가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고 리사를 내 앞에 마주 앉힌다. 나에게 꿰뚫린 채 리사는 자신의 가슴을 내 얼굴에 가득 들이밀었다. 절정에 다가가면 가슴을 깨물어주는 걸 좋아하는 리사의 버릇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사양않고 양쪽 가슴을 번갈아 깨문다. 유두를 거칠게 빨고 입술만으로 잘근잘근 씹어댄다. 

하악... 오빠... 호아..... 나, .... 하악....

거친 신음을 쏟아내는 리사가 미칠듯이 보지를 수축시킨다. 물을 계속 출렁거리는 우리 두사람의 움직임은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안으로 내 정액을 쏟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몸이 식으면 좋지 않아요.

한참 후, 몸이 식어갈 때쯤 리사는 나에게 다시 물에 들어가길 권했다. 내가 욕조 안으로 다시 기대눕는 동안 그녀는 급수밸브를 조금 조절했다. 따뜻한 물을 좀 더 열었다.

이리 와.

다시 아까의 자세로 복귀한다. 리사의 어깨에 턱은 얹은 채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후희를 즐겼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원래는 오늘 오빠랑 쇼핑을 좀 가고 싶었거든요.

 쇼핑?

 네. 나중에 바닷가 가서 입을 수영복을 골라달라고 할라 그랬는데.

 수영복이라.... 어떻게, 내가 고르는 엄청 섹시한 디자인을 리사가 소화할 수 있으려나?

 으휴, 아저씨 같아요.

 아저씨 맞지 뭐. 변태 아저씨.

내가 옆구리를 간지르자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몸을 흔들었다. 아직은 말랑한 상태로 잠자코 있는 자지가 그녀의 탱글한 엉덩이에 깔린다. 곧 또 다시 일어나 엉덩이를 찌르겠지만 아직은 베이비 상태. 한바탕 장난질이 진정된 다음 리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산에 이런 식으로 모시고 싶지 않았는데.... 하아. 정말 아까는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오빠가 잘못 되는 줄 알고.

 지금은 이렇게 멀쩡하잖아. 예쁜 리사랑도 같이 있고....

예쁜 리사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연 건 한참만이었다.

약속해주세요.

 뭘?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요.

 네 곁에서?

 예.

 약속하고 말고. 손가락 대신 다른 가락을 걸어줄까?

 아뇨. 전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리사는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지한 눈빛이다.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세계에 있는지 어느 정도 눈치 채셨죠?

 응? ... 으응.

눈치 챈 정도가 아니라 뼈 저리게 느꼈지.

아직은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오빠가 제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수많은 무리가 오빠를 노릴 거에요. 오늘만 해도 저희 아빠가 오빠를 데려가려고 했었잖아요.

여자에게 내 남자라는 말을 듣는 기분은 묘했다. 기분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리사의 당당한 선언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날 노리는 무리라니... 걱정스러운 내 맘을 눈치 채었는지 리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전 오빠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항상 제 곁에 두고 싶어요. 그렇기에 오빠가 마음을 굳게 먹고 항상 저와 같이 있겠다는 대답만 해주시면 제가 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오빠를 지키겠어요... 그러니 제 말에 똑바로 대답해주셨으면 해요.

프로포즈라면 프로포즈랄까. 말투만 놓고 본다면 결투신청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그렇지만 리사의 말투는 더없이 진지했고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강인하기 짝이 없었다. 우유부단한 나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리. 

난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 속으로 결론을 내려버리고 말았다. 바이킹을 타러 가자고 날 졸라대고 아침마다 밥을 챙겨주고 병상에 누운 나에게 열과 성을 다해 말 그대로 몸 바쳐 봉사한 여인에게 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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