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의 힐난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리사는 예린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이르고는 마리에게는 얼음을 사오라고 시켰다. 얼음찜질을 받으며 가까운 병원으로 이동한다. 토요일 오후라서 문을 연 정형외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좀 큰 병원을 찾아 응급실을 통해 접수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당직의사를 면담했다. 리사는 보호자를 자청하여 내 곁에 있고 마리와 예린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골절까지는 이르지 않으셨더군요. 염좌입니다만 좀 상태가 안 좋습니다. 발목염좌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1도 염좌는 가벼운 정도라고 보시면 되고 2도는 부분 파열인데.... 지금 최한석 씨 상태는 거의 3도에 가까운 2도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3도에 가까운 2도라니. 사람이 좀 알아듣기 편하게 이야기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의사는 차트를 들여다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3도는 인대가 완전히 단절된 경우를 말하는데요, 지금 여기 보시면 알겠지만,
의사가 벽에 걸린 내 발목 엑스레이 사진의 어떤 부분을 가리켰다. 내가 본다고 아나, 이 사람아. 그걸 알면 내가 공대생이 아니라 의대생이겠지.
인대 파열이 전체적으로 일어난어요. 절단까지는 아니지만 정도가 좀 심하구요, 뼈와 뼈 사이가 제법 벌어졌습니다. 농구하다가 이렇게 되셨다 그랬죠? 뭐,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만 가끔 운 나쁘게 제대로 넘어진 분들이 이렇게 되시더라구요. 수술까지는 필요없습니다만 장기간 관리 잘 하셔야 합니다. 다 붙고 나서도 습관성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구요.
한 마디로 내가 억세게 운이 안 좋아서 발목이 제대로 삐었다는 소리였다. 리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향후 치료나 합병증에 대해 물었고 의사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의사의 설명을 듣고 놀란 리사가 반문한다.
6주나요? 그 만큼이나 누워있어야 한다구요?
아뇨. 누워있어야 하는건 처음 1~2주 정도면 됩니다. 그건 경과 봐 가면서 결정해야될 문제구요, 일단은 석고하시고 당분간 오른발은 절대사용금지입니다. 절대안정이라 이 말씀입니다. 키가 크신 분들은 체중 쏠리는 정도가 심해서 되도록이면 입원을 권합니다. 6주 말씀드린 건 석고하는 기간을 말한 거구요. 그 이후에는 재활치료도 따로 받으셔야 됩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소리인가 보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농구코트에서 펄펄 뛰던 인간이 당장 입원치료를 해야되다니 말이다. 간호사가 휠체어를 끌고 오더니 여기에 앉으란다. 기가 막혔다. 휠체어는 영화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아니면 검찰에 출두하는 회장님들이나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타는 거 아니었던가. 별 도리없이 휠체어에 앉는다. 오른발은 들어서 앞에 놓은 판넬에 고정시킨다. 리사가 밀어준다. 입원 수속을 하러 갔다. 눈매가 날카롭게 생긴 간호사가 내게 물었다.
병실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의료보험 되는 게 몇인실이죠?
6인실부터요.
그럼 6인실로 주세요.
아니요.
리사가 간호사에게 손을 내저었다.
1인실로 주세요.
엑?
모르기 몰라도 1인실이면 무지 비쌀텐데. 내가 리사를 돌아보자 그녀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단다. 간호사가 단말기쪽으로 가서 뭔가 확인하더니 리사에게 물었다.
지금 1인실은 다 찼구요, 특실 하나 남았는데 그럼 그걸로 하시겠어요?
네. 주세요.
꾸엑. 1인실도 아니고 특실이라니. 병원 서류에 해야할 싸인은 리사가 대신했다. 휠체어를 밀고 로비쪽으로 돌아가면서 리사에게 항의했다.
리사 씨. 전 그렇게 돈이 많지 않은데요. 그냥 6인실로 해도 될 것을...
걱정마세요. 병원비는 제가 낼테니까요.
한 두푼도 아니고.... 리사 씨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제가....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
휠체어가 멈췄다. 아무도 없는 병원 복도에서 리사의 목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온다. 어쩐지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한데 등 뒤에 있는 그녀 모습이라 확인하기 어렵다. 고개를 돌려볼까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왠지 뻘쭘해질 것 같았다. 자기가 왜 미안하다는 거야?
제가 괜히.... 심술 부리고.... 아까도 속으로 한석 씨 콱 넘어져라.... 그러고 있었단 말이에요. 흑흑흑.....
아이고. 가다가 저 차 빵구나라고 빌 때 그 차 정말 빵꾸나면 달려가서 타이어 때워줄 여자 같으니라고. 너무 여린 마음씨의 소유자인 리사는 결국 울음이 터졌다. 나는 휠체어 손잡이를 짚고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오른발로 땅을 딛지 않게 최대한 조심한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리사를 끌어다 안아주었다.
리사 씨 잘못 아니라니까요. 왜 이렇게....
내게 안겨서도 쉬이 울음을 멈추지 않는 그녀를 안고 달래고 있노라니 복도 저쪽에서 마리가 오는게 보인다.
얼래? 선배가 울 언니야 울렸어여?
그런게 아니라니깐.
자기 혼자 울긴 했지만 따지고보면 원인제공은 나일려나?
한참 후 가까스로 리사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겨우 병실로 가서 누울 수가 있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창 밖을 보니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난리법석을 펴느라 다들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나 때문에 고생이라 몹시 미안했다. 리사가 우선 마리와 예린보고 저녁을 먹고 오라고 보냈다. 리사와 내가 먹을 것은 그들이 사오기로 했다.
특실이라고 뭐 대단한 건 아니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호텔 방처럼 꾸며진 그런 방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병실보다 좀 넓고 개인용 욕실과 화장실이 딸려있는 게 다였다. 하긴 다른 병실은 이만한 공간에 네 명에서 여덟 명까지 누워있기도 하는데... 이만하면 꽤나 호사스럽다고 본다. 침대이면서도 바닥은 온돌로 되어 있어서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소파와 TV도 있었다.
혼자 해도 괜찮다고 하는데도 리사가 하도 성화를 해서 그녀의 부축을 받아 환자복으로 갈아입는다. 속옷을 보이게 되어 다소 부끄러웠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벗어놓은 옷을 개어 옷장에 넣어놓고는 내게 필요한게 없는지 묻는다.
지금은 딱히 필요한 게 없는데요.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 일주일동안 필요하신게 뭔지 묻는 거에요.
아, 그런가요?
여태 아무 생각없다가 리사의 지적을 듣고나서야 내가 앞으로 최소한 일주일, 경과가 안 좋으면 이주일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거에 생각이 미쳤다. 학교 스케쥴을 생각해본다. 머리가 복잡하다. 학점관리에 구멍이 나는 건 물론이고 다음 달에 있을 교생실습도 과연 나갈 수 있으려나 고민이다.
일단, 레포트 용지하구요 필기도구랑.... 교과서랑..... 아, 교재들은 다 학교 사물함에 있는데.
휴우. 역시 한석 씨는 뼛속까지 모범생이시군요.
리사가 한숨을 푹 내쉰다.
네? 무슨....
제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잠시 후, 마리와 예린이 돌아왔다. 그들이 들고 온 케이크를 보고 그제서야 오늘이 내 생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참, 대단한 생일 되시겠다. 나와 마리, 예린이 케이크를 먹는 동안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리사는 마리에게 뭔가를 시켰다. 케이크 먹느라 정신이 팔린 마리가 제대로 못 알아듣자 짜증을 냈다. 리사가 짜증을 내는 광경이라니.... 희귀한 광경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가야겠네요.
리사는 내 발목에 올려진 냉찜질팩을 교환하면서 말했다.
어딜요?
집에 말이에요.
리사는 케이크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온 이래 그녀는 평소와 좀 다른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약간 우울하다고 해야하나... 무엇보다도 평야설넷면 절대 안 부릴 짜증을 좀 부리고 있었다.
한석 씨 갈아입을 속옷이랑 아까 말씀하신 책이랑 세면도구랑.... 챙길 게 많은데 마리 이 가시나는 한 개도 못 알아먹고. 휴우.
말투에 슬슬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리사의 기분이 몹시 안 좋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리사의 심기에 거스르지 않도록 결코 반대의사를 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예린 언니야가 여기서 30분마다 팩 갈아주세요. 한석 씨 필요한 거 있으면 준비해주시구요. 절대 발 내리지 못하게 하세요. 밤에 티비 오래 보게 하지 말고 일찍 재우세요. 그리고 차 키랑 휴대폰 저 주세요. 마리, 넌 내 따라온나.
어쩐지 예린 씨도 네, 엄마라고 답하면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리사의 명령에 예린이 군말없이 차 키와 휴대전화를 꺼낸다. 리사는 마리를 데리고 나갔다. 내일 아침 일찍 오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병실에는 예린과 나만 덩그라니 남게 되었다. 아무런 말없이 10여분이 침묵 속에 흘러갔다.
TV....라도 볼까요?
내가 말을 꺼내자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던 예린은 대답도 안 하고 그대로 스윽 일어나 리모콘을 가져온다.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돌리다가 김국진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있기에 거기에 채널을 맞춘다. 테마게임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김국진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한참을 웃었다.
푸하하하하- 하. 하. 하. 하.......하아?
사람이 말이다. 한 명이 대폭소를 하고 있는데 다른 한 명이 전혀 안 웃고 있으면, 게다가 그 공간이 딱 그 둘이 있다고 하면 말이다. 상황은 뻘줌, 그 자체가 된다.
예린 씨는 TV 안 보세요?
보고 있습니다.
안 웃겨요?
웃깁니다.
근데 왜 안 웃어요?
웃고 있었습니다.
김추자가 부릅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머리 속에 울리는 BGM은 무시하고 한숨을 푹 내쉰다. 예린에게 불을 꺼달라고 요청했다. 일찍 잠이나 자야겠다. TV를 끈다. 전등이 꺼졌는데도 창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다른 불빛들로 인해 병실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의 예린이 움직이는게 희미하게 보인다. 그녀는 내 다리에 얹어진 쿨팩을 교체하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예린 씨는 안 자요?
잡니다.
그럼 보조 침대에서 주무세요. 아까 담요도 가져왔던데.
이게 편합니다.
지가 무슨 레옹이냐. 그러고보니 불끄고나서도 선글라스를 안 벗다니. 정말 대단하다. 난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말했다.
제가 불편해요.
.....알겠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의자를 치우고 예린이 침대 밑에서 보조침대를 꺼낸다. 담요를 가져오더니 거기에 누웠다. 창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빛도 그렇거니와 길가에 있는 병원이라 자동차들 다니는 소리가 꽤나 크게 들려왔다. 종종 울리는 경적 소리와 더불어 가끔씩 지나가는 개념 없는 차들의 꽝꽝 울리는 오디오 소리에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평소보다 일찍 누워서 그렇기도 하다. 다리를 올려놓고 있는 자세도 불편하고 앞으로 학교 생활이랑 다른 일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고민 때문에 머리 속도 복잡하다.
.....아까, 보셨죠?
네? 뭘요?
자다가 봉창이라던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던가, 암튼 그 속담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예린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꺼낸 건 정말이지 신기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여전히 아래쪽에서 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제 눈이요.
......에엑?
아까라고 하면 농구할 때를 말하는 건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엉켜서 뒹굴었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깜짝 놀라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던 예린의 눈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물론 그 후에 이어진 발목의 고통 더하기 병원에서의 난리법석 때문에 그것에 대해 언급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설마 눈 색깔 때문에 그러....
혹시나 싶어서 말을 꺼냈는데 밑에서부터 번개 같이 올라온 무언가가 내 입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말을 잊지 못 했다. 예린의 손이었다. 키가 큰 만큼 그녀의 손도 큼지막했다. 내 입을 완전히 덮고도 남았다.
역시... 보셨군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상체를 일으킨 예린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고 싶어도 입이 틀어막혀 있어서 곤란했다.
부탁드릴게요. 절대로.... 절대로 제 눈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아니 그게 뭐 엄청난 대수라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나 예린은 내가 약속하지 않겠다고 하는 줄 알았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재차 부탁한다.
만약 그래주신다면... 한석 씨가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도 간절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예린이 손을 떼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쉰다. 그녀의 옆 모습을 보면서 질문했다.
아니, 예린 씨.... 제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네.
그게 그렇게 엄청난 비밀....인가요?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의 입막음이었다. 대답을 안 했으면 질식해서 죽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예린은 천천히 대답했다.
저에게는 중요해요.
하아.
뭐, 사람마다 개인적 신념에 따라 어떤 일에 중점적인 가치를 두는가는 완전히 다를 수 있으니 그건 그렇다치고서라도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그런 조건을 내걸 정도의 일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시면 차라리 칼라렌즈라던가, 뭐 그런 방법도 있지 않나요? 선글라스는 그 자체로도 너무 튀고 불편할텐데요.
렌즈는....
예린은 조용히, 그리고 늘 그렇듯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무서워서요.
...넵?
전혀 예상 밖의 답변에 놀라고 말았다. 예린은 꽤 주저하며 말을 이어갔다.
눈에다 넣는 거잖아요. 전 그게....
푸하하하하핫!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예린이 날 쳐다보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마음껏 웃었다.
하아.... 아, 진짜. 예린 씨....
뭡니까. 비웃는 건가요?
아뇨. 그럴리가요. 어쩐지 귀엽다고나 할까.
네에? 그...그럴리가.
평소답지 않게 당황하는 그녀가 못 견디게 귀엽게 느껴졌다. 아니, 선글라스를 꼈으니 눈이 보일리가 없나. 이 야밤에도 선글라스라니. 대단하다, 대단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선글라스를 벗긴다. 내 손이 닿자 꽤나 놀라며 흠칫했지만 그렇다고 내 동작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선글라스를 벗긴다. 예린은 눈을 감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인다.
눈 떠보세요.
고개를 젓는다. 재차 요구한다.
제 말은 다 듣는다고 했잖아요. 눈 떠봐요.
예린이 천천히 눈을 뜬다. 사실 이 어둡기 짝이 없는 방안에서 그녀의 눈 색이 보일리는 없다. 순전히 내 기분 탓일거다. 아까 낮에 아주 잠깐, 정말 잠깐 보았던 그 푸른 눈이 똑바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미려한 얼굴선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정말 제 말대로 다 한다고 하면.... 제가 이런 것을.... 해도 되나요?
질문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답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얼굴을 가져간다.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당긴다. 입술을 겹쳐본다. 벌려진 입술과 그 안에서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혀를 탐한다.
이런.... 것도?
그녀의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만지작거린다. 키스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녀는 내 손을 더 이상 막지 않으리라는 것을.
──────────────────────────
한석은 모른다 03 - Start
──────────────────────────
토요일은 오전 수업 뿐이다. 소란은 가방을 챙기면서 토요일은 도시락을 따로 챙기지 않아서 참 편하다고 생각했다. 세은이가 오더니 소란에게 묻는다.
영서랑 지수가 노래방 가자는데, 같이 갈래?
주말에는 집안 일을 돕는 게 소란의 주된 일이긴 하지만 한 시간 정도 놀고 가는 건 괜찮겠지 싶었다. 소란은 고개를 끄덕여 승락하고는 옆 자리에서 가방을 싸고 있는 유진에게도 권했다. 소란의 짝인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난 가봐야 할 데가 있어.
어디?
있어. 그런 데가.
소란은 약간 아쉬웠다. 오늘 아침부터 유진의 표정이 안 좋았기에 기분을 좀 풀어주려고 했건만 타이밍이 맞지 않은 모양이다. 소란은 유진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머지 애들과 먼저 교실을 나섰다. 유진은 소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자기도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시내의 한 대형 서점이었다.
'오늘이 생일인데... 그냥 빈 손으로 가긴 좀 그렇겠지?'
처음에는 책을 선물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진이 떠올리기에 한석이 항상 읽고 있던 건 대학 교재였던 탓에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난하게 베스트 셀러 코너에서 한 권 고를 수도 있지만 왠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서적 코너를 지나치고 나니 각종 학용품 및 팬시 상품을 파는 곳이 나왔다. 한쪽에 내놓은 좌판에서 익숙한 녀석을 발견한다. 예전에 한석이 자기에게 사주었던 펀치 브라이스 인형이었다.
'남자한테 인형이라....'
조금 주저하며 보고 있는데 앞치마를 두른 점원이 다가와 선물로 할 거냐고 묻는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유진이 들고 있던 건 예전에 한석에게 받은 것과 같은 녀석이었다. 그걸 본 점원이 옆에 있는 다른 인형을 들어보인다.
지금 들고 계신 애랑 이 아이랑 서로 커플이에요. 공식 설정북에 보면 얘네들 만화가 나오죠.
그래요?
입고 있는 셔츠를 보시면 서로 상대방의 이름이 씌여있죠.
유진은 그 인형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지 공식 설정북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점원이 권한 녀석으로 하기로 했다. 커플이라니,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포장을 하고 작은 종이가방에 넣어진 녀석을 건네받는다. 택시를 잡아타고 한석이 사는 빌라로 간다.
한석은 집에 없었다. 아침에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그때부터 외출해서 지금까지 안 들어온 건가 싶었다. 혹시나 싶어 앞집의 벨도 눌러보았는데 반응이 없었다. 조금 속상했다. 한석의 삐삐 번호를 알고 있기에 한 번 쳐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자기 입으로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던 터라 호출을 하긴 싫었다.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진은 조금 짜증이 났다. 자기랑 별 상의도 없이 덜컥 과외를 그만둔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한석을 보게 되면 정강이를 냅다 한 대 차주리라 생각했다.
'진짜 아프게 뻥 찰거야. 절대 안 봐주고. 생일빵이라고 둘러대지 뭐.'
──────────────────────────
한석은 모른다 03 - End
──────────────────────────
*
정작 루트에서 유진이는 안 나오지만 [한석은 모른다]에 계속 출연할지도....?
원래 이거 안 쓰려고 했었는데 유진이 밝히는 분들이 왜 이렇게 많나요;;;
그러나 난 굳이 하나하나 물어본다. 일종의 심술이다.
하아....
단추가 하나하나 풀러지는 동안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었다. 목덜미를 채 덮지 못하는 짧은 머리카락의 끝 부분이 닿은, 그리고 드러나 있는 목덜미가 너무도 섹시하다. 그녀로 하여금 내 침대로 올라오게 했다. 드레스 셔츠를 모두 벗겨내자 그 안에는 코르셋 같은 전신속옷이 그녀의 상체를 옥죄고 있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다행히도 내가 쩔쩔 매기 전에 예린이 먼저 손을 뻗어 뒤쪽의 버클을 풀어내고 커버를 벗겨낸다. 몸을 둘러싸고 있던 갑옷 같은 그것이 벗겨지자 전에 없던 라인이 드러난다. 예린이 키가 크고 슬림하면서도 단단한 몸매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가슴라인까지 훌륭할지는 몰랐다. 이렇게 좋은 걸 왜 그렇게 칭칭 싸매고 숨기고 있는 거지?
움직임에 방해가 됩니다. 출렁거려서.
리사나 마리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아니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이런 걸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꽁꽁 감춰놓다니! 괘씸하기 때문에 마구 주물러서 괴롭혀 주었다. 손 끝에서 전달되는 짜릿한 감촉이 잊고 왔던 나의 성욕을 부채질한다. 요새 확실히 못하긴 했었지. 예린의 상체를 벗겨놓고 나니 불끈불끈 하면서도 몹시 야릇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 순간, 나도 모르게 유진이가 생각났다. 벗고 있는 여자를 두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건 필시 죄악에 속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범했던 유진의 알몸이 생각나고 만다. 그때는 필사적으로 기분을 억누르며 수건만으로 조심스럽게 닦아내야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치 장난감처럼, 떡 주무르듯이 내키는 대로 만지고 희롱할 수가 있다.
하아......
김국진의 개그를 보고도 웃지 않던 예린이, 물론 본인은 웃고 있었노라고 이야기했지만, 암튼 그랬던 그녀가 흘리는 신음은 특별한 맛이 있었다. 그녀가 몸을 숙이자 내 얼굴 앞에 아주 잘 익은 배와 같은 탐스러운 과실이 두 개나 열린다. 크기로 등급을 매기는 분류로 치자면 특상품에 속하고도 남음이다. 바싹 눌려있던 유두를 혀로 깨워 일으키고는 유륜을 천천히 삼키고 유방 전체로의 면적을 혀로 재본다. 혀로는 모자라 손을 들어 양쪽을 동시에 주무르고 가운데 모아보고 다시 찌그러뜨리길 거듭한다. 빳빳이 솟은 유두에 침을 잔뜩 발라 손가락 사이에 넣고 슬쩍 비벼본다. 두 손가락으로 살짝 쥐고 입으로 가져와 혀 끝으로만 농락한다. 이에 따라 연주되는 예린의 신음을 즐긴다.
하으....음...... 한석 씨......
그녀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사정조로 나를 부른다. 방금 나를 애틋하게 부른 입에 내 입술을 맞댄다. 키스를 유지하면서 그녀의 바지를 벗긴다. 아니, 벗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벨트도 있고 해서 결국은 예린이가 직접 벗어야만 했다. 그 사이에 난 올려놓았던 오른발을 내리고 바지와 팬티를 벗어버렸다. 곧 있을 행위에 대한 기대감으로 팽팽해진 자지가 우뚝 솟아오른다. 알몸이 된 채로 주저하고 있는 예린을 가볍게 끌어당긴다. 한쪽 옆으로 비껴나 침대에 간신히 공간을 만들고 그녀를 눕게 한다. 누운 몸을 세로로 세우고 그녀의 등에 내 배를 맞댄 채 자지로 그녀의 탄력있는 엉덩이를 꾸욱 누른다.
하악.....항.....전.....이런 것까지는.....
네?
이런....거 까지는....... 아가씨에게......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급격히 달아오른 성욕으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운 나로서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알몸에 내 일부를 집어 넣고 싶은 생각만으로 꽉 차있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성한 음모를 헤치면서 질척해진 습지로 중지를 쑤시고 있었다. 헐떡이는 예린의 신음과 두 사람의 무게에 비명을 지르는 침대의 삐꺽거림이 나를 점점 더 급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자세가 몹시 불편한데다가 뒤에서 넣는 것은 별로 많이 해보질 않은 터라 자지의 움직임이 마음처럼 쉽지 않다.
한석 씨.... 한석 씨.....저.....저는.....
예린 씨. 가만히 있어봐요....
안 그래도 못 넣고 버벅이고 있는데 예린의 엉덩이는 참 비협조적이다. 내가 움켜쥐고 고정해놓으려해도 자꾸 들이뺀다. 다른 자세를 취해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다리 하나가 불편하니 이것 참 난감하다.
죄...죄송합니다.
결국 예린은 몸을 크게 꿈틀거리더니 내 품에서 빠져나간다.
예린 씨?
......이럴 생각까지는 아니었어요.
......에?
예린은 황급히 바닥에 널린 옷가지를 주워 자신의 앞을 가렸다.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제....제가 실수한 건가요?
너무 분위기를 탄 건가. 예린의 분위기에서 당연히 오케이일거라고 생각하고 밀어붙인 거였는데 이렇게 중간에 파토가 나고 나니 굉장히 뻘쭘해졌다.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예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제가....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녀는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저 풍만한 가슴이 단단한 틀에 갇히는 모습이라니.... 아까워 죽겠다. 원래의 차림으로 돌아간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선글라스는 끼지 않았지만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한석 씨에게 안기고 싶긴 하지만.... 순서를 지켜야 될 것 같아서요. 제가 너무 서두르면 아가씨에게 폐가 되니깐요.
순....서요?
아까도 그렇지만 이건 또 뭐 자다가 봉창이냐, 남의 다리 긁기냐. 내가 의아해하자 그녀는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한다.
마리 아가씨를 안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에에?
아까 아침의 당혹스러움이 다시 대번에 되살아난다. 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마리랑 저랑은 기필코....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그냥 잠만 잤습니다.
.......그러셨군요. 전 또 이미 마리 아가씨를 안으신 줄 알고.....
예린의 이야기는 뭔가 좀 알아듣기가 힘들다만 일단 한가지는 알았다. 그녀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그녀가 순서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거 이면에는 엄청난 뜻이 숨어있다는 거 말이다.
잠깐만요. 그럼 만약 제가 마리랑 그 머시기, 뭐냐, 암튼 그런 걸 했다고 하면 예린 씨는 저에게 안길..... 생각이었단 건가요?
내가 말해놓고도 내가 다 부끄럽다. 그러나 예린은 태연하게 대답한다.
아니요.
그러면요?
마리 아가씨와 리사 아가씨를 모두 안으시고 나면, 제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오마이갓. 이 푸른 눈의 아가씨는 시방 뭐라고 하는 거여!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다. 거의 뜬 눈으로 잠을 지새웠다. 나를 이렇게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 소리를 꺼낸 당사자는 지금 보조침대에서 쿨쿨 아주 잘 자고 있다. 예린을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한숨을 푹 쉰다. 이게 몇 번째 한숨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이야기에 황당하며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하고는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맘 같아선 당장 밑으로 내려가 그녀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면서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 토해내라고 하고 싶었지만 몸이 불편해서 참기로 한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벌써 여섯시다. 끄응 거리며 다시 누워보지만 역시 잠은 오지 않는다. 뒤척이고 싶어도 다리 하나를 올려놓은 채로 고정되다보니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애꿎은 뒤통수만 베개에 들이박으면서 신음을 흘린다. 여섯시 반이 좀 지날 무렵, 병실 문이 열리고 리사와 마리가 나타났다.
어머, 벌써 일어나셨어요?
누워있던 예린이 초스피드로 벌떡 일어나더니 리사와 마리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을 받아든다.
일어났다기 보단... 잠을 못 잤어요.
어디 사는 누구누구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고자질하고 싶었지만 참는다. 리사가 얼굴 가득 걱정을 담고 곁으로 다가왔다.
저런.... 많이 아프세요?
아뇨. 다리는 이제 별로 안 아픈데.... 머리가 아프네요. 좀 복잡하고.
어머, 두통도 있으시단 말이에요? 약 좀 달라고 할까요?
아뇨. 약보다는.....
그 순간 예린과 눈이 마주쳤다. 떠오르고 있는 해가 병실을 비추고 있었고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서는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이 창백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창백한 게 아니라 아예 인종이 다른 거였다. 얼굴 형태는 비교적 한국 사람 같았지만 이제 보니 그녀의 피부톤이나 눈빛은 백인종의 것이었다.
어? 예린 언니야는 이제 색안경 안 끼는교?
한석 씨 앞에서는 굳이....
그래예? 이야아.....
짐을 테이블에 다 올려놓은 마리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는 내 곁으로 다가온다. 쿨팩을 갈고 있는 리사의 옆에 나란히 선 마리는 팔짱을 딱 끼고 나를 내려다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요, 혹시 그거 아시나 모르겠네예?
뭔데.
녀석의 태도에서 불길함이 느껴진다. 마리는 턱으로 예린쪽을 가리키면서,
예린 언니가 말이지예. 자기 눈 저런거 들키는 거 죽기보다 싫어한다 아입니까. 예전에 큰 싸움 나가 언니 안경이 따악 한 번 벗기?는데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은 다 때려눕혔심더. 아예, 반 직있지예. 자기 눈 봤다꼬.
뭐?!
아침부터 넌 나를 놀라서 죽게 할 셈이냐? 그럼, 난 어제 죽음의 위기를 넘긴 건가?
근디도 언니야가 선배님을 살려둔길 보믄 마, 아무래도 언니가 선배님을.....
마리야.
내 발치에서 고정판을 조절하고 있던 리사가 동생의 말을 딱 끊는다. 그녀는 빠르거나 느리지도 않게, 높거나 낮지도 않게, 몹시..... 아주아주아주 몹시도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가서 준비해온 거 꺼내와. 아침 먹기 전부터 씨잘데기 없는 입방정 놀리지 말고. 주디에 콱 고마 미싱 박아버리기 전에.
이제 봄이건만, 꽃피는 봄이라는 춘삼월이건만... 지금 이 병실에서만 살얼음이 착 퍼지는 느낌이 든다. 진원지는 리사였고 그 얼음에 갇힌 사람은 마리와 나, 예린이었다. 리사의 웬만한 말에도 꿈쩍않는 마리지만 지금의 분위기만큼은 아무리 마리라도 이겨낼 재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자코 언니가 시키는 대로 짐을 풀고는 반찬통이나 그릇 등을 꺼내어 테이블에 차린다. 그리고 나서 모두 모여 아침을 먹는다. 리사는 병원밥은 맛이 없을테니 앞으로 자신이 매 끼니마다 밥을 차려오겠단다. 예전 같으면 그러실 필요 없다고, 번거롭게 그렇게까지 왜 하느냐고 했겠지만 극저온의 레벨로 쫄아있는 나는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기계적으로 밥을 퍼서 입에 가져간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니 얼마 안 있어서 간호사가 찾아왔다.
오전 동안 엑스레이를 한번 더 찍고 링겔을 꽂고 붕대를 감고 석고로 대는 등의 진료를 받았다. 리사가 내 곁에서 부축은 물론이고 휠체어 미는 것도 그녀가 계속 도와주었다.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따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뜯어말렸다. 병원 옆에 있는 의료기기 판매점에서 목발까지 사가지고 병실로 돌아와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나갔나 보네요?
네.
내가 침대에 눕자 리사가 링겔을 옮겨 달았다. 링겔 튜브에 달려있는 수액조절기를 만지작거리는 게 꽤나 익숙해 보인다.
혹시 간호 공부 같은거 하셨어요?
제가요?
리사가 살짝 웃으면서 의자를 당겨 침대 옆에 앉는다.
그럴 리가요. 전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데요.
아, 그래요?
후후.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해서요. 일 년 중에 따뜻한 때를 빼고는 병실에서만 내내 지냈어요.
아아....
병실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링겔을 다루는 거나 하는게 굉장히 능숙하다고만 생각했지 그럴 줄은 몰랐다. 하긴 병원에서 오래 지냈다고 한다면 그런게 익숙할만도 하겠다. 어제 병원에서 보여준 신경질적인 모습도 어쩌면 그녀의 아픈 기억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다.
저희 낳자마자 일찍 돌아가신 엄마 닮아서 그런 것 같다고는 하는데.... 그렇게 특별히 병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구요. 그냥 계속 잔병치레하고 몸은 허약하고, 그랬죠.
전혀 몰랐다. 물론 마리와 같은 나이일 텐데도 대학을 안 가는 거는 그냥 진학을 안 했나 보다 하고 그러려니 했는데 아예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니. 몸이 굉장히 안 좋았나 보다.
그 때는 주로 책을 읽거나 TV를 보면서 지냈는데요, 그것 때문에 바깥에 대한 환상이 정말 많았어요. 나중에 몸 좋아지면 해보고 싶은 걸 목록으로 적어보기도 하고 그랬죠. 지금도 집에 가면 어딘가에 노트가 있을 거에요. 1번부터 200번까지 번호를 붙여놓은....
그렇게나 많나요?
후후후. 한석 씨도 만약 침대에만 몇 달 동안 있어야 한다면 좀이 쑤셔서 못 견뎠을 걸요? 지금 못 하는 거, 나중에 하고 싶은 것들이 머리 속에서 막~ 왔다갔다 할 거에요. 저절로. 저는 그런 생활을 몇 년이나 했는걸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해가 간다. 안 그래도 어제 입원하고 이제 겨우 만 하루가 될까말까한 정도인데도 불편하고 짜증나는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앞으로 이런 생활을 일주일이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하다. 하물며 몇 달, 몇 년이라야.... 휴우.
예전 드라마 중에서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 혹시 보셨어요?
아뇨. 전 TV를 별로 안 좋아해서....
저런,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걸 안 보셨단 말이에요?
리사는 그때부터 홍학표가 멋있다느니 박철이 귀엽다느니 하는 내가 못 알아들을 이야기를 한참동안이나 했다. 딱히 내용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몹시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는 리사의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적당히 대답도 해가면서.
솔직히 최진실 이야기는 좀 별로였어요. 걔가 싫은 건 아니었는데 전 그런 내용이 남 같지가 않아서 정말 펑펑 울면서 봤거든요.
아, 예에....
대학 가면 다 저렇게 즐겁게 지낼까 싶어서 대학 공부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워낙 기초가 없어서 안 되겠더라구요. 검정고시도 조금 준비하다가 포기하고 그랬죠.
저런.
그래서 그 때 리스트에 하나 추가했었죠. 유호정이 그랬던 것처럼 캠퍼스에서 낭만적인 키스를 하고 싶다고요.
그러셨군요.
아쉽게도 지금 여기가 캠퍼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 곁에는 멋진 남자 대학생이 있으니 소원 하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네에. 그러셨구나.... 네엣?
별 생각없이 응대하고 있다가 그녀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홱 쳐들었다. 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는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여배우 같다.
도와주실 수 있죠?
리사 씨.....
그러자 리사가 가만히 고개를 흔든다.
전 좀 불만이에요. 마리한테는 맨날 편하게 말하면서 쌍둥이인 저한테는 왜 그런 어색한 호칭을 붙이세요?
그....그거야.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이내 마음을 먹고 리사를 쳐다본다. 입을 열어 그녀를 부른다.
리사야.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빠.
확 달아올라 버린 내 얼굴이 들키지 않으려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야 할까. 저 평범한 칭호가 이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는데 말이다. 나도 모르게 좀 떨리고 더듬거렸지만 리사가 원할 것이 분명한 대사를 천천히 읊어본다.
우리, 키....키스할까?
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겹쳐본다. 버드 키스라고 하던가. 제대로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조차 모를 짧디 짧은 키스를 끝내고 조심스레 몸을 뒤로 빼려는데 어느샌가 리사의 두 손이 내 목을 끌어안고 그대로 안겨온다. 다시 입술이 겹쳐진다. 깊숙하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조금 입술을 벌려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기는 리사의 혀에 내 혀를 맞대어 부빈다. 짜릿한 감촉이 혀끝에서 온몸을 향해 퍼진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은 남녀관계에 있어서 끝인 동시에 시작이다. 끝이라는 것은 입맞춤을 기점으로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다는 거고 시작이라는 것은 거기서부터 무언가 더 바라는 관계가 된다는 말이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로맨스 영화의 끝은 두 사람의 키스지만 남자들이 좋아라 하는 영상은 키스부터 시작이다. 리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가슴은 방망이로 두드리듯 쿵쾅거리고 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리사의 블라우스 위를 더듬는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손끝으로 느껴본다. 더욱 더 격렬해지는 키스에 발맞추어 손의 움직임도 과감성을 더한다. 허리를 벗어나 배를 거쳐 그 위에 있는 언덕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똑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급히 떨어진 우리 두 사람이 있는 병실 문이 빼곡히 열리더니 위생모를 쓴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이민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나요? 넣어드려요?
그러자 리사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아뇨. 저희는 따로 싸왔어요. 수고하세요.
문이 도로 닫힌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 얼굴도 리사만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겠지. 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리모콘을 더듬거려 찾았고 리사는 점심을 차리겠다며 냉장고 쪽으로 갔다. 장학퀴즈 월장원전의 학교별 응원전을 들으며 우리 둘은 조용히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리고 있으려니까 마리와 예린이 돌아왔다. 학교 사물함에 두고 온 내 책들을 가지러 갔다 온 모양이었다. 날 바라보는 마리의 눈빛이 뭔가 묘하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암것도 아니라예. 입술이나 닦으시져.
이...입술?
설마 그 짧은 시간동안 뭐라도 묻었나? 황급히 손등으로 입을 훔쳐보았지만 아무것도 묻어 나지 않았다. 마리는 약간 시큰둥한 표정으로 침대 곁에 책들을 올려놓았다. 녀석은 진호 선배를 만나 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못 만났다고 한다. 일요일까지 나올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나중에라도 다시 이야기 해달라고 부탁한다. 덧붙여 내 시간표를 알려주고는 각 수업의 교수들에게 공결로 인정 가능한지에 대해서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거 더 필요한 거나 연락할 곳 있으세요?
없어.
유진이나 선영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에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시는 못 볼 사람들이다. 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 선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유진을 아끼는 마음은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그런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때 마리가 어떤 인형 하나를 꺼내어 내 침대 맡에 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양인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뭐야, 이 못 생긴 인형은?
선배님 생일 선물이라꼬예... 어제 누가 주던데예?
마리가 리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리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누구지? 나한테 이런 인형을 선물할 사람은? 아무리 궁리해봐도 누군지 모르겠다. 아마 리사나 마리가 어제 나에게 선물을 못 줬다고 급하게 고른건가 싶다.
고맙다. 마리야.
마리는 내 인사를 받고도 별 대답 없이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의자로 가서 앉는다. 잡지를 하나 붙잡고 뒤적거린다. 예린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리사는 사과를 가져오더니 깎기 시작했다. 먹기 좋게 썰어 접시에 담겨진 사과를 하나 집어먹는다. 사과를 집다가 리사와 얼굴을 마주치니 새삼 부끄러워진다. 그녀는 날 보고도 크게 표정이 변하지 않고 늘 그렇듯이 생긋 웃을 따름이다. 아, 진짜 이쁘긴 하네. 이런 동생 하나 있으면 진짜 맨날 업고 다니겠구만.
──────────────────────────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에다가 설레는 감정까지 겹쳐 되도록이면 리사 얼굴을 정면으로 안 보도록 노력하면서 마리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나중에 학생증 줄테니까 내가 말한 책들 좀 빌려다 줄 수 있어?
야아.
발표 수업 준비 같이 못 해서 어떡하냐.
일이 일케 됐는데 우짭니까. 있는 사람들끼리 해야지예.
자료 정리할거나 레포트 써야 할 거 있으면 나한테 가져와.
알겠어라.
그 외에도 나머지 교양 수업들에 대한 당부를 일일이 전한다. 마리도 처음에는 그냥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다이어리를 가져오더니 하나하나 받아 적는다. 교양 수업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전공 수업에 대한 조언도 해준다.
....양 교수님한테 갈 때는 여기서 진단서 끊어가. 워낙 깐깐한 분이라 말로만 해서는 공결처리 안 해줄거야. 그리고 또.....
내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한참 듣다가 마리가 결국 두 손을 번쩍 든다.
후아. 선배님은 일케 수업 하나하나에 다 신경씁니꺼? 교수님들 성향까지도예?
......당연한거 아냐, 임마?
피곤해서 우째 삽니까. 그래가꼬.
전액 장학금 받는게 쉬운 줄 알아? 이번주랑 다음주가 난 고비라고. 담달에는 교생실습도 가야되는데 이래가지고 나갈 수 있을런지나 모르겠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리사가 저, 오빠? 하면서 끼어들었다.
주제 넘는 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교생 실습은 포기하셔야 될 것 같아요. 아까 의사한테도 들었지만 오빠 상태가 심해서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나중에 습관성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하잖아요? 교생실습은 아무래도 많이 움직이셔야 될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번에 놓치면 내년에 졸업생 신분으로 다시 신청해서 나가야 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고 목발을 짚은 채로 교생을 나간다? 그것도 어려울 것 같긴 하다.
알겠어. 일단은 회복에만 집중하도록 할게. 너무 걱정 마.
리사를 안심시키고 다시 마리 쪽을 쳐다보는데 녀석이 마치 쥐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을 날카롭게 뜨고 날 보고 있다. 아니, 나와 자기 언니를 번갈아 보고 있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
선배님이 와 우린 언니에게 말을 놓는데예?
어? 어....... 그게 말야.
내가 대답을 잘 못하고 버벅이고 있으려니 리사가 대신 답한다.
내가 오빠한테 편하게 불러 달라고 했어.
오빠아? 오.빠.아앙?
마리가 과도하게 입을 씰룩거리며 특정 단어를 강조한다.
왜? 무슨 문제 있니?
리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자 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를 가리키며,
내도 이자부터 오빠라고 부를끼다! 안 그래도 내도 전부터 오빠야라고 부르고 싶다 안 카나!
라고 선언한다. 여태까지 한쪽에 가만히 앉아있던 예린도 한쪽 손을 스윽 들더니 그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한다.
아, 그러면 저도.....
그러자 리사가 느긋하게 말한다.
저야 아까부터 오빠라고 불렀으니 상관없어요.
난데없는 오빠 부르기 입후보 대회가 펼쳐진다. 뭔 난리다냐. 이건 도대체.
한참 난리를 치다가 저녁 늦게서야 예린과 마리가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부터 리사가 병실을 지키기로 했다. 내가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거듭 말했지만 그래도 나를 혼자 둘 수 없으니 굳이 남겠다는 리사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마리야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야 했고 예린에게는 내가 따로 조용히 부탁한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리사와 마리가 잠시 없는 틈을 타서 난 예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두었다.
예린 씨....
이렇게 부르자 예린이 손가락을 하나 내밀어 아니라는 포즈를 취한다. 별 수 없이 그녀가 바라는 대로 불러주기로 한다.
아, 아니. 예린아. 그러니까 마리 학교 다니는 것 좀 지켜봐줄 수 있어? 당분간 말야.
무슨 일이라도?
그냥 노파심에서이긴 한데....
이틀 전, 금요일 수업에서의 마레기 행동이 영 눈에 밟혔다. 게다가 그 날 마리에게 했다는 소리도 그렇고....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사고를 치고도 남을 인간이기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제쳐두고 품행이 좋지 않은 녀석이 마리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두었다.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대답한다.
네, 오빠.
......꼭 너까지 그 호칭으로 날 불러야 겠니. 아니, 기왕 부르려면 리사처럼 애교있게 하던가 마리처럼 씩씩하게 부르던가.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부르면 어쩐지 시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거참.
마리와 예린이 돌아가고 나니 병실에는 리사와 나만 단둘이 남게 되었다. 다들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둘만 밀폐된 공간 안에 남고 나니 새삼 아까 낮의 일이 생각나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괜스레 리사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주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녀는 테이블과 소파에 놓인 것들을 정리하더니 내게 말했다.
그럼 저 먼저 샤워할게요.
샤......샤워?
네.
그러더니 병실에 딸려있는 욕실로 훌쩍 들어가버린다. 곧 이어 들리는 물소리가 내 가슴의 두근거림을 한층 더 격하게 만든다. 리사가 이렇게나 적극적인 여성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녀가 싫은 건 아니다. 게다가 예린이가 했던 그 이상한 말도 있고 아까 낮의 행동으로 보아 리사도 결코 나에 대해 가벼이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불은 끄는게 좋겠지? 다리가 이 모양이니 체위는 좀 불편하겠지만 리사가 협조해준다면 그닥 나쁠 것 같지도 않다. 일단 리모콘으로 TV는 끈다. 불을 끄러 가고 싶지만 되도록 움직이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이후 내가 다리라도 내릴라 치면 리사가 대번에 뭐라고 하기 때문에 참기로 한다. 침을 삼킨다. 시계를 본다. 아까 간호사가 한 번 다녀가서 링겔을 바꿔주고 갔으니 또 들어올 일은 없을 거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 물소리가 멎었다. 한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제 곧 욕실 문이 열리고 섹시한 모습의 ....
어라?
... 편하디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리사가 욕실에서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눌러 짜며 말이다. 어라, 왜 알몸이 아닌거지. 아니, 아니, 알몸이 아니라면 최소한 수건만 두르고 나온다던가..... 거 왜 그런 복장 있잖는가! 바로 어른들의 즐거운 놀이에 돌입하기 편한 그런 복장! 그런 것도 아니라면 간호사 복장이라도 하고 나오든가! 물론 그냥 평범한 간호사 복장 말고 치마는 좀 많이 짧고 가슴은 많이 파인 걸로! 아래는 망사로 된 밴드 스타킹에 가터벨트 신어주고!!!
오빠, 벗으세요.
........뭐, 뭐?!
망상에 빠져있다가 리사가 던진 말에 화들짝 놀라 두 팔로 몸을 가린다. 아, 그런가. 나부터 벗어야 하는 거였나?
나부터 벗어야 돼?
무슨 말씀이세요?
리사는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내 곁으로 왔다.
오빠는 샤워를 못 하실테니 당분간 제가 닦아드릴게요.
아아.... 그런 이야기였나. 리사의 도움을 받아 환자복 상의를 벗는다. 그녀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어찌나 잘 맞춰서 적셔 왔는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좋은 온도다.
오빠, 겉으로 볼 때는 그냥 말라 보였는데 지금 보니 꽤나 근육질이네요.
그...그래?
리사는 착실하게 내 등과 옆구리 등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얼굴까지도 닦아준다. 마치 내가 중환자가 된 듯한 기분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꼼꼼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열심히 임하고 있는 리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에 야릇한 망상에 푹 빠져있던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럼, 불 끌게요.
응.
침대에 눕는다. 리사가 일어나 병실의 불을 껐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리사가 보조 침대를 빼고 있는 건가 싶어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보조 침대에서 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다음 행동에 나는 기겁하여 이름을 부르고 만다.
리.... 리사야.
왜요?
아, 아니. 그게 말야....
리사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올라와 내 옆에 누웠다. 오른 다리 한 쪽을 올리고 있느라 아무리 내 몸이 반절 정도만 침대에 올려져 있다고 하나 그래도 병원 침대가 트윈베드마냥 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좁은 그 공간에서 아무래도 리사와 나는 밀착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내 팔 한쪽을 꼭 끌어안고 달라붙다 보니 그녀의 가슴이 내 몸 쪽으로 가득 밀려온다.
조....좁지 않을까?
적당한데요?
그... 그래?
방금 샤워를 마친 여자의 머리카락 향기는 남자를 혼미하게 하는 미약과도 같다. 그런 게 바로 턱 밑에 있다고! 라이브로!
전 병원 침대가 참 싫었어요.
내 몸에 바짝 달라붙어 자신의 컵 사이즈를 내 팔 보고 재달라고 몸짓으로 말하고 있는 이 아가씨는 약간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에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지금 내 아래쪽에서는 남성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 혈관의 활발한 운동, 생식활동의 전초운동에 해당하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봐 노심초사 하고 있던 나다. 갑자기 말을 하려다 보니 말소리가 조금 샜다. 그러나 리사는 내 목소리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꽤나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이 죽는 곳이잖아요.
어? 어.....
듣고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병원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니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 더 이상 세상에 남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을 터다. 괜히 나까지 우울해진다. 우리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리사가 조금 더 꼼지락거리기 시작하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건 또 왜?
좋아하는 사람과 이렇게 바짝 누울 수도 있으니까요.
리... 리사야. 그 말은....
고개를 젖혀 날 바라보는 리사의 얼굴을 마주한다. 살짝 눈을 감는 그녀. 자세가 편한 건 아니었지만 일단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내 쪽으로 바싹 당긴다. 이제 그녀와 나의 입술은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놓인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그녀의 입술이 너무나도 먹음직스럽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리사의 입술 위로 나의 것을 겹쳐본다.
입술과 입술의 만남. 그리고 혀와 혀의 무도회.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입술이 딱 떨어지자마자 리사는 생긋 웃으며 내 팔에 얼굴을 묻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너 같으면 안녕히 잠이 오겠니!!! 우우....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넌 잠이 오냐구!!!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뭐라고 깨울 건가. 저기, 지금부터 이상한 짓 시작하지 않겠어요?라고 물어볼 텐가. 주인집 아가씨의 머리를 어깨에 얹고 밤을 홀딱 세운 양치기의 심정으로 혼자서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그 양치기도 분명 꼴린 자지를 달래느라 무던 고생을 했을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다음 날, 새벽에 리사가 먼저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옷을 찾아 입는 그녀를 보면서 멋쩍게 인사를 건넨다.
잘... 잤어?
네, 오빠.
옷을 다 입은 리사가 웃으며 내게 다가와 모닝키스를 해준다. 이젠 아주 자연스럽다.
저 좀 씻을게요.
그래.
리사는 수건을 챙겨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줍어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괜스레 나까지 부끄러워진다. 솔직히 여자와 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리사와는 같이 잠을 잔 거지 우리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건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이 아침은 알몸으로 몸을 섞은 후보다도 더 부끄럽다. 온몸이 간질간질하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창 밖을 내다본다. 아직 본격적인 아침이 시작되기 전이라 차도에 차도 별로 없었다.
잠시 후,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돌아온 리사에게 내 상체를 맡긴다. 그녀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는다.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고 TV를 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진료와 산책도 리사와 함께 했다. 저녁에 마리와 예린이 찾아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녀들이 돌아가고 나서 리사는 다시 내 침대로 들어왔다.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몹시 달아오르게 만들어버리면서 리사는 내게 키스를 해주고 곁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나의 하루는 이렇게 온전히 리사와 함께 흘러갔다.
화요일 오전, 전화기를 달라고 했다. 리사가 전화선을 길게 빼어 전화기를 내 옆에 가져다 주었다.
어디 거시게요?
엄마한테 좀.
어머, 여태 말씀 안 드렸어요?
걱정끼치기 싫어서 말야.
신호가 간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밭에 나가신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한창 바쁠 때긴 하다.
안 받으세요?
응. 나가셨나 보네.
그러시구나.
리사가 전화기를 도로 가져가려고 했다. 그 순간, 전화할 곳이 떠올랐다.
잠깐, 리사야. 다시 줘봐.
어디 거실려구요?
그게... 저... 그런 데가 있어.
어쩐지 리사에게 선영 이야기를 하는 건 좀 주저되었다. 자기 앞에서 전화하기를 주저하는 내 모습에서 뭔가 눈치를 챈 건지 그녀는 마실 것 좀 사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사가 나간 다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가고 나서야 선영이 전화를 받았다. 꽤 졸린 목소리였다. 그녀에겐 이른 시각이긴 하겠구나.
여보세요.
저에요. 한석.
전화기 너머 침묵이 느껴진다. 나 먼저 이야기 해야겠다.
유진이한테는 과외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 들었어요.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숨을 쉬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저 죄송하지만요, 그리고 당분간 그 쪽 과외는 못 갈 거 같아요. 제가 좀 일이 생겨서요.
무슨 소리죠, 그게?
그게 그러니까요. 제가 일이 있어서 당분간 선영 씨 과외는 못 할 것....
제 과외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n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