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2화 (2/71)

제2장 대법왕

끼니는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 유일하게 마혈이 풀리는 시간은 다음끼니를 먹기 이각 전이었다. 식사 이각 전쯤에 몸을 풀어주어야 몸속의 감각 기관과 내장이 잠시 원활해져 소화가 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에는 철저히 마혈을 묶었다.

보통 마혈이 제압된 시간은 끼니 후 두 시진 반에서 세 시진이었다. 두 시진 반에서 세 시진이면 어느 정도 먹었던 음식이 소화가 될 시간이고 다음 끼니를 해결하기 이각 전쯤 인 것이다. 그때는 토하더라도 별것도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은 몸속으로 소화가 되어 사라진 뒤였다.

탁!

아혈을 치자 입이 벌려졌고 팔용이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죽을 한 숟가락 쑤셔 넣었다. 탁 하고 다시 천장금왕이 아혈을 치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슥!

탁!

슥!

탁!

그렇게 십여 번 만 하면 죽 한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 드셨사옵니다.”

팔용이 빈 그릇을 보였다. 천장금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잠깐.”

동천몽이 벼락같이 소릴 질렀고 천장금왕이 돌아섰다.

“소승에게 하실 말씀 있으신지요?”

동천몽이 인상을 쓰며 말을 뱉었다.

“토하지 않을 테니 마혈을 풀어주시오.”

“아미타불! 용서하소서.”

천장금왕이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동천몽이 왁 하며 소릴 질렀다.

“그래, 너 잘났다 개자식아. 콱 벼락이나 맞아 뒈져라.”

쿵!

닫힌 문을 노려보던 동천몽이 카악 하며 가래침을 뱉었다.

팔용이 놀라며 말했다.

“주무시는 방에 가래침을 뱉으시디니.”

“개자식이 더러우면 네가 치우면 될 것 아냐?”

“아, 예!”

팔용이 잽싸게 걸레를 가져와 가래침을 닦고 허릴 숙였다.

“그럼 소승도 이만.”

바람처럼 사라졌다. 곁에 있었다가는 무슨 욕을 더 들을지 알 수 없었다.

동천몽의 눈이 매서운 빛을 뿌렸다. 이런 식으로 가면 승산이 없다.

뭔가 확실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뻣뻣한 자세로 앉아 대책을 떠올려 봤지만 마땅한 해결책이라고는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평생 이곳에 갇혀 중놈으로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중놈이라니 그건 도저히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차라리 죽고 말지 방구석에 틀어박혀 염불이나 외우고 푸른 풀만을 먹으며 평생을 산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확 돋는다.

오후네 석상처럼 앉아 묘책을 떠올려 봤지만 뾰쪽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벌컹!

문이 열리고 천장금왕이 들어섰다. 오른손을 뻗어내고 지풍을 날려 동천몽의 마혈을 풀어주었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동천몽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고 천장금왕이 송구한 얼굴로 말했다.

“소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모두가 대법왕님의 건강과 본궁의 미래를 위하는 일이니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동천몽의 인상이 또다시 험악해졌다.

“제발 그 소리 좀 그만 하쇼. 나 당신들 대법왕 아냐! 이거 진짜 돌겠구만.”

동천몽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난 동천몽이란 말이오. 소주 형천파 두목 동천몽, 난 절대 당신이 말하는 대법왕 아니라니까? 잘 봐봐. 내가 어디 당신들 대법왕인지 보라구.”

얼굴을 들이 밀었다. 오른손으로 이마를 덮은 머리까지 쓸러 올려주며 확인시켰다.

“보라니까? 이 얼굴 맞아? 맞느냐고?”

꽥 소릴 질렀는데도 천장금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흥분을 참지 못한 동천몽은 실내를 거칠게 쏘다녔다. 이런 식으로 끌려가면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동천몽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조금씩 어둠이 짙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붙잡혀 온지 두 달이 되었다. 죽든 살든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팟!

창밖을 바라보던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그것이다!’

한 가지 쓸 만한 계책이 지금 막 떠오른 것이다. 동천몽은 지체 하지 않고 곧바로 머리로 창문을 들이 받았다. 창문은 대설산에서만 생산된다는 총설유리(?雪琉璃)였다. 옥에 가까워 부드럽지만 예리하기가 칼이나 병기에 버금간다.

와장창!

대번에 총설유리가 깨졌고 동천몽이 총설유리 한 조각을 쥐더니 번개처럼 자신의 목에 들이댔다.

“대…대법왕님.”

천장금왕이 소스라치며 놀랐다.

동천몽이 뾰쪽한 총설유리를 툭 튀어나온 목젖에 대고 외쳐 말했다.

“건드리지마. 건들면 그어 버릴 거야.”

천장금왕이 다급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건들지 않겠습니다. 대법왕님. 그러니 진정하시고.”

“비켜, 앞길 막지마.”

“예…예! 비킵니다.”

천장금왕이 한쪽으로 물러났고 동천몽이 목에 깨진 유리를 대고 입구로 걸어갔다.

벌컹!

그때 식사를 갖고 들어오던 팔용이 비명을 지르며 상을 엎었다.

죽과 반찬이 엎어지고 팔용 역시 겁에 질려 있었다.

“너도 비켜.”

“비…비킬께요. 비킵니다.”

팔용이 잽싸게 천장금왕쪽으로 섰다.

문을 나온 막종오는 뒤로 돌아서서 따르는 천장금왕과 팔용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서, 따라 오지마.”

두 사람이 멈칫했다.

“따라오면 그어 버릴거야. 중놈 되느니 이렇게 죽는게 나아. 씨벌.”

“알겠사옵니다. 따르지 않을테니 제발 이성을 찾으십시오.”

“오지마.”

다시 한 번 소릴 지르고 복도 밖으로 나갔다.

천장금왕이 팔용을 향해 빠르게 말했다.

“당장 사제들을 불러오고 대력을 데려 오너라.”

“알겠습니다.”

팔용이 서둘러 사라졌고 천장금왕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동천몽이 깨진 유리조각을 목에 대고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천장법왕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르며 달래기 시작했다.

“엇!”

“저건 뭐지.”

무예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무승들이 동천몽을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천장금왕이 무승들을 향해 말했다.

“속히 갈 길을 가거라. 여긴 신경쓸 것 없느니라.”

무승들이 동천몽을 홀깃 거렸다. 그러다 어느 한 무승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가…가만 목에 유리대고 가는 시주 말일세. 꼭 돌아가신 전 대법왕님을 닮지 않는가?”

“맞아.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 했는데 쌍둥이라고 해도 믿겠구만.”

괴이하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기우뚱 거리며 사라졌다.

“대법왕님, 제발 목에 대고 있는 유리를 내려 놓으시고 소승과 대화로.”

“시끄러, 대화는 무슨 얼어 죽을 대화야. 따라 오지마. 당신도 꼼짝 하지마. 계속 따라오면 그어 버릴 거야.”

슥!

그러면서 동천몽이 목젖을 슬쩍 그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붉은 피가 목을 적셨다. 따르던 천장금왕이 기겁했다.

“나 무서운 것 없는 놈이야. 죽는 것 두렵지 않아.”

“아…알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거기 서. 더 이상 달라붙지 마.”

천장금왕이 걸음을 세웠다.

동천몽은 일광전 마당을 벗어나 자취를 감추었다.

휙!

바로그때 팔용이 한 명의 승려를 데리고 떨어졌다. 팔용이 데리고 온 승려는 오십가량으로 붉은 승포를 걸쳤는데 폭발할 듯한 극양의 기세를 풍겼다.

“부르셨습니까 수석법왕님.”

목소리 또한 풍기는 분위기만큼이나 우렁찼다.

“잘 왔네. 지금 동문쪽으로 가면 흑의소년 한명이 도망치고 있을 걸세. 당장 잡아들이게.”

“잡아만 들입니까?”

“잡아들이게.”

대력선사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내 말은.”

“알았사옵니다.”

대력선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천룡구십구불(天龍九十九佛), 소림의 백팔나한과 비교되는 포달랍궁 최고의 정예이고 대력선사는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사형.”

“대법왕님이 도망치다뇨?”

사대법왕 중 세 사람이 날아 내렸다. 천장금왕이 사태를 설명하자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날 따르게.”

천장금왕을 비롯한 팔용이 동천몽이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천몽은 빠르게 내 달렸다.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이 기회가 아니면 이곳을 벗어나기란 요원할 것 같았다. 멀리 동문이 보이고 좌우로 길게 늘어진 담벼락이 들어왔다.

야밤의 탈출이 아니기 때문에 담을 넘는 수고는 할 필요가 없다. 동천몽은 동문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어엇!

달려가던 동천몽이 걸음을 세웠다. 하늘에서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앞을 막고 선 사람은 마치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십층 석탑을 보는 듯했고 몸에서 가공할 열기가 뻗어나왔다. 아직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움츠려 들었다. 그래서 더욱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당신은 또 뭐야?”

그러면서 유리를 목에 다시 대었다.

그러나 대력선사는 놀라거나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냥 따라 갈래 얻어터지고 끌려갈래.”

“미친.”

치익!

동천몽이 악을 쓰며 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자 대력선사가 흠칫 놀랐다. 자신의 몸에 스스럼없이 자해를 한다는 것은 보통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제 왜 천장금왕이 자신을 보냈는지 이해가 되었다.

사실 천장금왕이 대력선사를 보낸 것은 한 가지 때문이었다. 자신은 동천몽이 대법왕의 환생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상황이 어쩔수 없다고는 하지만 하늘같은 대법왕에게 손을 쓴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대력선사야 말로 홀가분하게 일을 처리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셋을 세겠다. 그 전에 그걸 버리고 투항해라. 하나.”

동천몽이 험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지랄한다.”

“두울!”

“웃기고 있네.”

“세엣!”

“흐흐! 끝까지 해보자는 건데, 좋아. 한번 해보자구.”

화악!

동천몽이 흑의를 완전히 벗어 젖혔다. 순식간에 겉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아랫도리만 가린 반라의 몸이 되었다.

막 공격을 하려던 대력선사가 흠칫 했다. 느닷없이 옷을 벗자 놀란 것이다.

찌이익!

동천몽이 유리로 배를 그었다.

피가 흥건히 흘러내렸다. 아랫도리가 붉게 물들었고 동천몽이 악을 썼다.

“올 테면 와봐.”

치이이!

또다시 배를 그었다. 동천몽의 몸은 피로 덮였다. 대력선사 또한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두 눈에서 살기를 내 뿜는 것이 장난 아니었다. 얼마든지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독종이다.

하지만 대력선사는 이내 웃음을 머금었다.

“놈 악질이구나.”

휘익!

대력선사가 움직였다. 그 순간 동천몽의 손에 들린 유리가 목을 찔렀다.

딱!

하나 살갗으로 패 파고들기 전에 오른손이 마비되었다. 곡지혈이 제압된 것이다.

“놔. 이 땡초 새꺄 날 놓아줘.”

그때 천장금왕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빨리 의각으로 데려가게.”

대력선사가 핏물로 범벅이 된 동천몽을 매고 의각을 향해 날아갔다.

천장금왕의 얼굴이 우울한 빛을 띄었다. 땅바닥에 동천몽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흥건했다. 일단 위기를 넘겼지만 서슴없이 자신의 몸을 인질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 앞으로 상당한 골치를 썩힐 것이 뻔했다.

배에 난 상처보다 위험한 것은 목이었다. 유리가 식도까지 파고들어 호흡장애까지 불러왔고 과다출혈로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만동승의를 비롯한 의승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최고로 좋다는 약재들이 사용되었고 떨어진 체온을 멈추기 위해 모든 조치가 취해졌다. 하지만 동천몽은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일이 잘못되면 큰일이었다. 대법왕은 포달랍궁의 주인이고 그는 서장을 통치한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사람이 떠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자신들이 부처를 죽인 것이며 자칫 포달랍궁의 몰락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살려내야 하네. 기필로.”

천장금왕이 만동승의를 깊숙한 눈으로 보았다.

“자네만 믿네.”

천장금왕을 비롯한 나머지 사대천왕이 방을 나섰다.

만동승의가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목과 가슴에 흰 천을 둘둘 감았는데 피가 베어있었다. 한참 동천몽을 쳐다보던 만동승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눈을 뜨기 싫습니까?”

“……”

“알고 있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동천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벌컥벌컥!

만동승의가 한쪽 탁자에 놓인 물주전자를 들고 물을 마셨다.

주전자를 놓으며 말했다.

“이미 한시 전에 깨어 난 걸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의원인 소승을 속이려 하십니까?”

벌떡!

죽은 듯 누워 있던 동천몽이 용수철처럼 상체를 일으켰다.

“으윽!”

격렬한 움직임에 가슴의 상처가 아려왔다.

“조심하십시오. 꿰맨 상처가 다시 터지면 그때는 위험해집니다.”

동천몽이 인상을 쓰며 만동승의를 노려보았다.

만동승의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쳐다보았다.

“불만이 많으시군요.”

“당신이 뭘 알긴 알아? 생일날 아랫놈들과 술 한 잔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중놈들이 들이닥쳐 대법왕의 환생자라고 끌고 가버리는 경우를 아느냐고?”

“대법왕의 환생자들 가운데는 이따금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그래서 당신도 내가 대법왕의 환생자란 말이오?”

“일단 성격과 생김새는 거의 흡사합니다.”

“닥쳐.”

동천몽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더니 침대를 내려왔다. 그러다 다시 가슴의 부여잡고 인상을 썼다.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오르십시오.”

동천몽은 아랑곳 하지 않고 주전자를 들어 물을 마셨다.

목이 많이 말랐던 듯 십여 모금 크게 마시더니 트림을 하며 말했다.

“당신 나와 얘기 좀 합시다.”

동천몽이 정색하며 쳐다보았다.

“당신 돈 좋아하지 않소? 돈 말이오? 쇠?”

“돈을 싫어할 사람도 있습니까?”

“맞아. 돈 앞에 장사 없지. 내 말만 잘 들으면 당신에게 엄청난 돈을 주겠소?”

동천몽이 문 쪽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날 이곳에서 도망치도록 협조만 해주면 황금 백냥을 주겠소. 아니 성공만 하면 오백냥을 더 주겠소.”

만동승의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동천몽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인데 당신 혹시 천상각이라고 들어보았소?”

평생 세속과 등을 진 만동승의가 알 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중원이 아닌 서장이니 더욱 모를 수밖에.

만동승의가 눈을 깜빡거리자 답답하다는 듯 동천몽이 목소리를 높였다.

“중원에서 가장 큰 상가인데 바로 우리 집이오. 내게 협조하면 당신에게 황금 육백냥을 주겠소.”

만동승의의 눈이 커졌다.

황금 육백냥.

비록 출가인이기 때문에 세속의 가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황금 육백냥이 얼마나 큰 거액인줄은 알고 있었다. 황금 육백냥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다.

“날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인데 어떻게 하면 믿겠소. 다시 말하지만 내 집은 중원제일상가라는 천상각이 분명하오. 아버지는 그곳 주인인 동오룡이오.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포달랍궁에 막대한 시주를 하도록 해주겠소.”

만동승의가 묵묵하게 듣고 있자 자신의 말이 어느 정도 먹혔다고 판단한 듯 동천몽은 열변을 토했다. 육백냥이 적다고 생각하면 원하는 액수를 말해보라고 했고, 원하면 이곳을 떠나 천상각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도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미녀를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이며 전용마차까지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어떻소? 인생은 어차피 한판이라는데 나 좀 도와주시오. 당신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소.”

만동승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보시오. 의승 영감.”

그때 문밖으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약 대령 했사옵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의승이 김이 피어난 약사발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만동승의가 약사발이 담긴 쟁반을 받아 내밀었다.

“약 드십시오.”

파악!

동천몽이 그대로 약사발을 집어 던져 손으로 쳐버렸다.

뜨거운 약이 만동승의 앞가슴으로 쏟아졌고 사발이 방바닥을 나뒹굴었다.

“너나 쳐 먹어. 돌팔이.”

만동승의와 약을 갖고 들어왔던 의승이 놀란 표정으로 동천몽을 쳐다보았다.

“개자식들.”

동천몽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완패였다. 자해로 탈출을 감행하려던 자신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공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목과 배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흉터만 훈장처럼 얻었다.

그 정도면 거의가 통했다. 온갖 잡놈들로 우글거리는 저자거리에서도 그 정도 행패를 부리면 대부분 겁을 먹고 물러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기분이 착잡했다. 고향길은 갈수록 멀어졌고 어쩌면 탈출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전신을 덮었다. 평생 이곳에서 중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것은 절대 안되는 일이었다. 중으로 산다는 것은 살인적인 악몽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여길 떠나야 한다. 갈수록 감시가 심해지고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지겠지만 그렇다고 포기 할 수는 없었다.

딸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팔용이 들어섰다. 쟁반 위에 삼지초로 끓인 죽을 가져왔다.

동천몽에게 내밀었지만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다. 팔용이 눈치를 살피더니 숟가락으로 한 술 떠서 입 앞으로 들이밀었다.

“드셔야 합니다. 기운을 차리셔야 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자 팔용이 시선을 피했다. 잠시 팔용의 얼굴을 쳐다보던 동천몽이 입을 벌렸다. 거절한다면 그때처럼 또다시 강제로 먹일 것이다. 그러 치욕을 겪느니 스스로 먹기로 했다.

입을 벌렸고 팔용이 넣어 주었다. 그렇게 한 그릇을 뚝 딱 비우고 팔용이 건네준 물까지 마셨다.

“오늘이 몇 일이오?”

“초사흘입니다.”

초사흘이면 이곳에 끌려 온지 정확히 석 달 이다.

동천몽은 침대에서 내려와 한쪽 벽에 걸린 동경 앞에 섰다. 가슴과 목에 흰 천을 둘둘 감은 낯선 인물이 서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예전과 너무 틀리다. 문득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누구도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지 못했고 자신의 한마디면 저자거리 상인들은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질근!

소리 없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코 이곳을 떠나고 말리라. 이 수모를 앙갚음 하기 위해서라도 기어이 탈출해야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타계한 전대법왕이었다. 완벽한 환생이라는 의미에서는 즐거워야 할 일이었지만 전대법왕의 성격을 생각하면 걱정거리가 한 둘이 아니었다.

자기 성질대로 되지 않으면 자해까지 서슴지 않았고 난폭함은 광기에 가까웠으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고승들도 아차하면 욕을 퍼붓고 심지어 걷어차기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제자들 사이에서 난폭법왕이라는 말이 나돌았겠는가.

“포기하지 않을 거요?”

사대법왕이 탁자를 놓고 앉아 무거운 얼굴을 했다.

“반드시 다시 탈출을 감행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막아내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끝없이 탈출을 감행한다면 언젠가는 뚫리겠지요.”

모두가 천검은왕을 쳐다볼 뿐 뾰쪽한 대책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도망을 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소.”

천장금왕이 천검은왕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어쨌든 여기서 밀리면 볼 장 다보네.”

천권동왕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대법왕님의 마음을 돌린단 말입니까?”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동천몽을 붙잡아 둘 대안이 없었다. 마치 야생늑대처럼 그는 끝없이 우리를 뛰쳐나가려고 했다.

대설산위로 둥근 보름달이 떠올랐다. 찌그러진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팽팽한 달이었고 달빛을 받은 흰 눈이 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 일 것이다.

주위는 조용하지만 거처 주위로 천룡구십구불이 완벽한 경계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이제야 말로 탈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어딘가 허점이 있다는 부친의 말이 떠오른다.

멀리 홍산 꼭대기로 긴 꼬리를 남기며 한 개의 유성이 떨어졌고 밤이 깊어지자 산짐승들이 이곳저곳에서 울부짖는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뾰쪽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써 먹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바닥이었다.

벌렁!

침상에 벌렁 누웠다. 가슴과 목으로부터 통증이 밀려왔다. 아직 가슴과 목에는 흰 천이 감겨 있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어두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생각해도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벌떡!

누워 있던 동천몽의 눈에서 섬광이 피어났다. 뭔가 확실하고도 절묘한 계책이 떠오른 듯 했다.

‘이런 병신 새끼, 여태 그 생각을 못하다니.’

동천몽이 입술을 깨물며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정리하고 훑어봐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물론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뜻대로 되기만 하면 그야말로 당당하게 두 발로 걸어 나갈 수가 있었다.

‘흐흐! 개자식들’

동천몽의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생각할수록 만족스러운 방법이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 탓인지 잠이 일찍 깼고 밖은 어둡다. 시간상으로는 묘시가 채 안되었을 것이다.

“누구더냐?”

“소승 팔용이옵니다. 대법왕님께서 금왕님을 뵙겠다면서.”

“뭣이 대법왕님께서.”

이부자리를 게우던 천장금왕이 퉁기듯 문을 열고 나왔다. 어둠속에 팔용과 동천몽이 나란히 서 있었다. 천장금왕이 맨발로 허리를 구부렸다.

“아…아미타불!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행차이십니까? 소승을 부르면 달려 갈 터인데,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동천몽은 아뭇소리 않고 방으로 들어섰다.

천장금왕이 아랫목을 권했고 거절하지 않았다. 잠시 동천몽의 표정을 살피던 천장금왕이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불쑥 연락도 없이 이렇게 찾아와 놀랐을 것이오?”

“아…아니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대법왕님께서는 소승을 비롯해 일만 이천 제자들의 어버이시며 하늘이십니다. 미천한 저희들에게 공대를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법호가 뭐라고 했던가?”

“천장이라 합니다.”

“맞아. 천장이라고 했지.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솔직히 대답해야 한다. 내가 너희들 죽은 대법왕의 환생자가 분명히 맞느냐?”

천장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물론이옵니다. 소승이 어찌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대법왕이시여.”

포달랍궁의 대법왕은 죽기직전 환생자를 지목한다. 하지만 이따금 급서를 하거나 하면 환생자를 지목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대법왕과 가장 흡사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찾아 앉힌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기간이 무려 십 육년이 소요되었다.

“체격은 물론 성격 식사하는 모습을 물론 심지어 욕을 잘하는 것까지 완벽한 환생자이시옵니다.”

“완전히 나와 쌍둥이란 얘기구만.”

“소승 또한 너무 빼닮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제대로 짚어보자. 도대체 너희들이 말하는 대법왕이라는 사람은 누구냐?”

“대법왕님은 본 포달랍궁의 궁주이시며.”

“포달랍궁?”

동천몽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중원의 상계에 대해서는 부친을 비롯해 식구들로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그래서 중원 상계의 거두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지만 포달랍궁이란 말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그것은 곧 장사꾼 집단은 아님이 분명했다.

“본궁에 대해 전혀 모르신단 말입니까?”

“모르니까 묻지. 내가 지금 농담 하는 줄 아느냐?”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천장금왕이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하오시면 혹 소림사에 대해서는 아시옵니까?”

“그야 알지. 소림사를 모르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어.”

소림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귀에 익숙한 이름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큰 사찰이자 무공이 강한 승려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혹시 이곳이 소림사란 말이야?”

“아닙니다. 정확히 본궁이 천하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설명한다면 한마디로 서장의 소림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장의 소림사,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천장금왕은 포달랍궁에 대해서 얘기했다. 동천몽이 알아듣기 쉽게 굵은 뼈대만 말했는데 별무반응이 없었다. 소림사라는 말에는 본능적으로 반응을 보이던 동천몽이 심드렁하자 아직 포달랍궁에 대해 뭘 몰라 보이는 표정이라고 이해했다.

“아무튼 대법왕님께서는 본궁의 주인이시고 어버이시옵니다. 누구든 대법왕 앞에서는 공손해야 하며 명을 어긴 자는 하늘의 벌을 받습니다.”

“하늘의 벌? 어떻게?”

“벼락이 치지요.”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대법왕, 그러니까 내 말을 듣지 않는 놈은 벼락을 맞아 죽는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벼락을 맞아 죽기도 하지만 대부분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맞아 죽습니다.”

척!

동천몽이 자세를 바꿔 앉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너희들 대법왕이라고 치자.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뭐야?”

“대법왕님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셔야 할 일은 뭐니 뭐니 해도 공부를 하는 것이옵니다. 천문과 지리는 물론 우주삼라 만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를 깨달아야 하고 곁들여 무공을 갖추는 것이옵니다. 대법왕님은 하늘이시기 때문에 무공이 속하들 보다 월등이 뛰어나야 하지요. 그래서 대법왕님께서 익히실 무공은 일반 무공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어렵다는 얘기냐?”

“소승들에게는 어렵지만 대법왕님처럼 지혜가 넘쳐나시는 분께는 식은 죽 먹기지요.”

동천몽의 이마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책이라면 죽는 것 다음으로 싫었다. 나이 아홉이 되어서야 겨우 이름 석자를 썼다. 다른 아이들은 다섯 살이면 자신의 이름을 쓰는데 어찌된 머리인지 수십 수백 번을 가르쳐 줘도 하루 밤 만 자고 나면 까먹기 일쑤였다.

보다 못해 부친이 글 스승을 데려다 붙여 주었지만 효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배우려고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한 시진 전에 배운 것이 기억나지 않았고 별로 나아진 것이 없자 부친은 스승을 바꾸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바꾼 스승도 동천몽의 학문을 성장시키지 못하여 보름 만에 쫓겨났으며 사흘이 멀다 하고 유명하다는 스승들을 데려와 글을 배웠는데도 도무지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열다섯 번째 스승이 왔다. 열 다섯 번째 스승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곧바로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수업에 들어가기 이전에 동천몽의 지능과 머리의 상태 파악이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면밀한 조사를 하더니 사흘째 되던 날 놀라운 선언을 했다.

‘낙추석두(落墜石頭)!’

소주제일부호의 안주인이지만 어머니는 절대 마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나마 만삭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용했는데 몸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그런데 어느 날 타고 가던 말이 발을 헛딛어 넘어졌고 어머니는 땅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하필 만삭의 배가 길가의 돌멩이와 부딪힌 것이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진통이 시작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쭈글어져 나왔다. 추락할 당시 하필 머리와 지면의 바위가 부딪힌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인보다 머리가 훨씬 나쁘게 태어났다는 진단이었다.

이후 머리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모조리 구해다 먹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복잡한 계산과 치열한 머리싸움으로 이윤을 남겨야 하는 거상의 핏줄로서 머리가 나쁘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부친은 포기하지 않았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 아니던가. 그런데 머리가 좋아지기는 커녕 온순하던 성격이 점차 난폭해기 시작했다. 별일도 아닌데 걸핏 하면 아랫사람을 두들겨 팼다.

‘다약광성(多藥狂性)!’

부친은 의화자라는 명의를 불러다 원인을 밝히도록 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놀라운 진단이 떨어졌으니 바로 영약 과다 섭취로 가학적인 성격으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영약 투입을 멈췄지만 이미 동천몽의 성격은 과격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의화자는 한마디를 잊지 않고 붙였다. 지능은 떨어지지만 천하에서 그 단단함을 따를 머리는 없을 것이라고.

“죽은 전 대법왕은 어떠했느냐? 머리가 뛰어났느냐고 묻는 것이니라.”

천장금왕의 안색이 변했다. 전대법왕의 머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나빴다. 앞에서 가르쳐 주면 돌아서서 잊어 먹었다. 천장금왕은 설마 머리까지 닮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말했다.

“아…아미타불! 차마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다소 실망스러운 경지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거라?”

“밥 먹기 전에 배운 공부가 숟가락 놓을 때쯤이면 기억을 하지 못했습니다.”

화악!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자신 또한 얼마나 머리가 나쁜가. 만약 머리가 나쁘다고 했다간 필시 또다시 대법왕과 완벽한 판박이라고 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입을 닫았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것보다 무공 수련이 급합니다. 대법왕님 정도 되려면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공을 익혀야 합니다.”

동천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천장금왕이 계속 말했다.

“무공을 배우기에 앞서 한 가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벌모 세수입니다.”

동천몽의 눈이 빛을 뿌렸다.

“버…벌모세수? 그건 또 뭐냐? 이렇게 세수 하는 것을 말하느냐?”

그러면서 양손으로 세수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천장금왕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세수가 아니라 무공을 익히기에 아주 알맞은 체질로 몸을 바꾸는 것을 말하옵니다.”

“그래, 그럼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했는데 당장 시작 하거라.”

“급한 성미는 영락없는 대법왕님이십니다. 헛헛헛.”

천장금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동천몽은 인상을 썼다. 걸핏하면 대법왕과 너무 닮았다는 말이 이젠 지겨웠다. 동천몽은 속으로 도대체 어떤 자식이기에 날 그렇게 닮았다는 거야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내일부터 하겠사옵니다.”

“좋을 대로 하거라.”

동천몽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아직 여명이 밝아오지 않은 어두운 길을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훗훗!’

길을 걷는 동천몽의 입 꼬리가 비틀어졌다.

지금 처지로서는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무공이 절정에 이른 저들의 손아귀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되지 않는 일에 자꾸 매달리느니 차라리 이들에게 협조하며 신임을 얻는 것이었다. 일단 이들의 조건이나 요구에 순순히 응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 편이 훨씬 이곳을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흠! 아침공기가 무척 상쾌하구나.”

동천몽이 느긋하게 입을 열자 옆을 따르던 팔용의 눈이 커졌다. 너무 여유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안절부절 못했다. 시녀가 놓은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두 눈은 고정되지 못한 체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마냥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혀 있었는데 숨소리 또한 거칠게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대…대공자님은 언제 오십니까?”

좌측으로 서 있는 오십 가량의 백의인을 향해 물었다.

백의인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침부터 절강성과 복건성 모피상들이 찾아왔는데 아마 회의가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너무 염려 마시고 차를 들고 계시면 금방 오실 것입니다.”

사내는 전혀 차를 마실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연신 소매 춤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엉덩이를 가만 두지 못하고 들썩거렸다.

벌써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별을 넣은 지가 반시진이 지났다. 그런데 상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절강성과 복건성에서 온 모피상들과 회합이라는 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을 더욱 초조하고 다급하게 만들어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고도의 수작인지 모른다. 설혹 진짜로 모피상들이 찾아 왔다고 해도 반시진이란 회의는 자신의 예로 볼 때 터무니없이 길다. 더구나 회의는 자신이 찾아오기 전부터 열리고 있었다고 했다.

쭈욱!

급기야 목이 타는 듯 사내는 다 식은 차를 단 숨에 비워버렸다.

“한 잔 더 주문해도 되겠소?”

“그러시오. 여기 차 한 잔 더 내 오거라.”

목이 말랐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시녀가 김이 나는 뜨거운 차를 다시 가져다 놓았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뜨거운 것이 들어가자 식도가 이글거렸지만 별로 뜨거운 것을 느낄 새가 없었다.

딸칵!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사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명의 백의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략 서른 초반 가까이 되어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풍채가 당당했다. 전혀 어깨를 흔들지 않고 다리로만 걸어오고 있는 것이 언뜻 커다란 바위가 다가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핫핫핫! 이거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했소이다.”

사내가 자리에서 퉁기듯 일어나며 다가오는 백의청년을 향해 넙죽 허리를 구부렸다.

“미천한 소가지가 대공자님을 뵈오이다.”

“자자 앉읍시다.”

백의청년이 소가지 맞은편에 앉으며 자릴 권했다.

동천비(童天飛), 올해 서른한 살로 절강을 중심으로 강서 안휘 호남 귀주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천상각의 맏아들이었다.

부친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 받은 듯 어려서부터 뛰어난 수완과 재주를 펼쳐 보였고 그래서 차기 천상각의 가장 강력한 각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소가주가 소생을 찾아오다니 어인일이시오?”

동천비가 오른손을 내밀자 소가지가 두 손으로 악수를 받았다.

동천비가 악수를 하며 웃었다.

“핫핫! 지난번 볼 때보다 소가주의 화색이 훨씬 좋아진 것이 요즘 장사가 무척 잘되는가 보구려.”

척!

손을 놓은 동천비가 양손을 의자 좌우로 뻗어 올리며 왼다리를 오른다리 위로 포개어 앉았다.

소가지는 맞은편에 앉았는데 무릎을 다소곳이 모으고 양손을 가지런히 올렸다. 누가 봐도 잔뜩 주눅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자세였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식전 아침부터 찾아왔는지 얘길 들어봅시다.”

퍼억!

느닷없이 소가지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동천비가 꼬았던 다리를 풀며 깜짝 놀라며 말했다.

“소가주 이게 무슨 짓이오. 어서 일어나시오.”

하지만 소가지는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대 공자님 이 소모를 살려주십시오. 이 소모를 도와주시기만 하면 평생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허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말합시다.”

하지만 소가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마를 거의 바닥에 대듯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대공자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한 번만.”

동천비는 옆에 서 있는 백의중년인을 쳐다보았다.

“소가주가 왜 이러는 거요? 도대체 당황하여 얘기를 나누지 못하겠소이다. 여총관 당신이 아는 것 있으면 말해보시오.”

백의 중년인은 천상각의 총관이었다. 올해 쉰으로 천상각의 모든 재정을 총괄 지휘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었다.

“그…글쎄요. 속하도 왜 소가주께서 저러는지 도통 알지 못하옵니다.”

그러자 동천비가 엎드려 있는 소가지를 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일인지 일단 의자에 앉기나 하시오. 이건 내가 불편하단 말이오.”

“소가주님 그만 일어나십시오.”

보다 못해 여추량이 거들었고 소가지가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동천비를 향해 소가지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을 좀 융통해 주십시오.”

“……”

“한 달 만 쓰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이자까지 제대로 쳐서 드리겠습니다.”

“허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나. 이보시오. 돈 많기로 소문난 소가주께서 돈을 빌려달라니 난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소이다.”

“오늘 오시까지 어음을 막지 못하면 본 소씨상가는 무너지옵니다.”

동천비는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어음이 어느 정도 되기에 이렇게 내게 손을 벌리는 것이오.”

“황금 백십이만냥입니다. 만약 오시까지 막지 못하면 중상(中商)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만약 관부가 개입을 하면 난 한푼의 재산도 건지지 못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대공자님.”

소가지가 앉은 자세로 또다시 크게 고개를 숙여 매달렸다.

척!

동천비가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으로 올려 포갰다.

“내가 알기로는 소가주의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고 들었소이다만?”

“너…너무 무리한 확장을 하다 보니.”

“장사를 하다보면 급한 자금이 필요할 때가 있지요. 나 또한 장사꾼인데 어찌 소가주의 심정을 모르겠소.”

“가…감사합니다.”

“좋소이다. 돈을 빌려드리지요. 대신 조건이 있소이다.”

소가지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마…말씀해 보십시오.”

동천비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싹 가셨고 그의 두 눈에서 날카로운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소가주의 거래처 절반을 본각으로 넘기시오.”

“예옛?”

소가지가 기겁할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래처 절반을 본각으로 넘기면 자금을 융통해 드리겠소이다. 어쩌시겠소.”

“가…각주.”

소가지의 안색이 굳었다.

거래서 절반이면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져가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동천비의 조건을 받아 들이면 대대로 소주에서 터를 잡고 나름대로 세력을 갖고 있는 소씨상가는 졸지에 군소상가로 전락할 것이다. 하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될 경우 나머지 거래처의 반응이었다. 보잘것없는 소규모 상가보다는 천상각 같은 거대 상가와 거래 하는 편이 자금 회수나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득이 되므로 나머지 거래 선들이 옮길 것이 자명했다. 말이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일 뿐 동천비는 지금 자신의 가문을 통째 삼키려 하고 있었다.

“고…공자님 그것은 너무 지나친 요구이십니다. 어떻게 삼할 까지는 양보를 할 수 있겠지만.”

“헛헛! 그럼 하는 수 없구려. 여 총관 소가주를 문 밖까지 잘 배웅해 드리시오.”

동천비 일어 돌아섰다.

그 순간 소가지가 소리쳐 말했다.

“공자님 제발 이 소모를 살려주는 셈 치고 한 번만.”

여추량이 나가자는 손짓을 해보였다.

소가지가 안으로 들어가는 동천비를 향해 소리쳐 말했다.

“공자님, 잠깐만!”

동천비를 쫓아가려 하자 여추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공자님, 이 소모를 살려주시오. 공자님…공자!”

여추량에 의해 앞길이 제지당하자 소가지는 더욱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동천비는 냉정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좋습니다. 공자께서 원하는 대로 하겠소이다.”

뚝!

저만치 걸어가던 동천비의 걸음이 멈추었다.

동천비 천천히 돌아섰고 소가지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이 소모 동 공자님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본가의 거래선 절반을 천상각으로 돌려 드리지요.”

동천비가 천천히 다가와 소가지 앞에 섰다.

이를 악물고 서 있는 소가지를 보며 동천비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섭섭해 하지 마시오. 돈만 갚으면 다시 돌려 드리겠소이다.”

소가지의 두 눈이 동천비를 쏘아보았다.

지금의 거래 선으로도 백이십만냥을 막기 어려운데 절반으로 줄어든 거래 가지고는 그 돈을 갚기란 꿈같은 얘기다. 자신도 일평생을 장사꾼으로 보냈지만 확실히 장사꾼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 마침내 칠대에 거쳐 소주 북쪽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소씨상가가 문을 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총관, 서류는 당신이 작성하시오.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소가주.”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동천비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동천비가 사라진 안쪽 복도를 쳐다보는 소가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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