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환생자
장대비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져 내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빗줄기는 굵어졌다. 일광전(日光殿) 앞마당으로 누런 황톳물이 내를 이루며 흘러갔고 만개한 자미화(紫薇花)가 퍼붓는 폭우에 찢어진 육편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아아아!
섬광이 어두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 순간 하나의 인영이 일광전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염병할 하필 이때 번개가 칠건 또 뭐야?’
잽싸게 담벼락에 등을 기댄 동천몽이 어둔 하늘을 노려보았다. 혹시라도 자신을 본 사람이 있었는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좌우를 살핀 동천몽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양이처럼 낮은 자세로 이동한다. 담벼락을 따라 달려가던 동천몽의 걸음이 멈췄다. 담장이 끝나고 눈 앞으로 이층 전각 한채가 나타났다. 백상전(白象殿)인데 이곳 사람들 말로는 코끼리의 영혼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데 그따위 짐승에게 영혼이 있다니 확실히 미친놈들이 모여 있는 곳임은 분명했다.
동천몽은 가자미 눈을 하여 폭우 속을 살폈다. 자신들의 거룩한 성지라고 했으니 어딘가 지키고 있는 무사들이 있을 것이다. 구불어진 노송 아래나 후미진 담벼락 같은 곳 에 숨어서 경계를 서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아무리 살펴도 어둠이 너무 짙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쳐죽일! 이럴 때 벼락이나 한 번 쳐줄 일이지’
욕설이 끝나는 순간 거짓말 같이 서쪽 하늘에 섬광이 구비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백상전 좌측 모퉁이에 서 있는 노송아래 두 명의 무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꿀꺽!
동천몽이 침을 삼켰다. 경계가 가장 소홀한 동문 근처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백상전 앞마당을 가로질러가야 한다.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나 콩을 볶듯 쏟아지는 빗소리와 먹물 같은 어둠이 놈들의 감각과 시야를 방해하니 시도해 볼 만 했다.
동천몽은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동천몽은 소리를 줄이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백상전 마당을 달리기 시작했다. 상체를 낮게 숙이고 달리는 동천몽의 모습은 필사적이었다.
“하늘이 뚫렸나. 드럽게 퍼붓는구만.”
띠로 엮은 우의를 뒤집어 쓴 두 무사가 쏟아지는 비를 보며 투덜거렸다.
휙!
백상 전 앞마당을 무사히 통과한 동천몽은 잽싸게 풍단목 아래 몸을 숨겼다. 백상전을 돌아보았는데 두 무사는 쏟아지는 비를 향해 계속 욕을 퍼붓고 있었다.
뛰는 가슴을 잠시 진정시킨 동천몽이 어둠저편을 노려보았다.
멀리 하나의 시커먼 담장이 절벽인양 버티고 서 있었다. 저 곳만 넘으면 밖이다. 담 밖은 늪지대이기 때문에 위험하긴 해도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오히려 좋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연신 훔치며 호흡을 조절했다.
오늘도 다섯 번째 탈출 시도였다. 실패했던 지난 네 번과 달리 이번 다섯 번째는 느낌이 좋다. 특히 날씨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인간 말종들!”
동천몽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하룻밤 꿈 같은 지난 한 달이었다. 악몽은 십 육회 생일을 맞이해 수하들과 거하게 한잔 마시고 있던 지난 달 초하루에 시작되었다. 동천몽은 형천파(兄天派)의 우두머리였다. 형천파는 하늘과 형님은 동일하다는 소주 저자거리 의 완력 패였다.
그 날 술자리가 무르익고 야월루에서 가장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기녀들을 불러들여 본격적으로 한판 놀려는데 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네 사람이었다. 우람한 덩치에 붉은 승포를 걸쳤는데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존엄 가득한 음성으로 대법왕님 하고 외쳐 불렀다.
이따금 술을 먹다보면 너무 취해 자신들의 방을 못 찾고 엉뚱하게도 남의 술 방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만 한 참 분위기가 익어 가는데 난데없이 중들이 들이닥쳤으니 부하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도 아닌 중생들의 번뇌를 씻어내고 제도해야 할 중들이 떼거리로 기루에서 술을 쳐 먹고 자신들 방도 못 찾는 것에 부하들은 분개했다.
그런데 일 당 백은 아니어도 소주에서만큼은 나름대로 위엄과 한 전설씩 갖고 있는 수하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모조리 뻗어버렸다.
부하들이 당했으므로 당연히 수장인 자신이 나서야 하는 법.
하지만 자신 또한 한 주먹 뻗지도 못하고 당했다. 하늘과 동격이라는 형천파의 두목은 그렇게 힘없이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콰아앙!
풍단목 아래를 벗어나려는데 또다시 한줄기 섬광이 피어났고 귓청을 찢는 폭음이 들려왔다. 동천몽이 반쯤 나간 몸을 잽싸게 거둬들이며 하늘을 보며 인상을 썼다.
‘드럽게 쳐대는군.’
아무리 빗소리가 크고 어두운 밤이지만 워낙 눈과 귀가 발달한 놈들이니 조심해야 한다. 놈들은 백리 밖에서 기어가는 개미 발자국 소리까지 듣는다고 했다. 물론 그 말을 믿지는 않지만 아무튼 보통 놈들은 아니었다.
사사삭!
순식간에 동천몽은 삼장 높이의 담장 아래 몸을 붙였다. 또다시 좌우를 살폈고 잠시 귀를 세워 주위 동정을 살폈지만 별 이상은 없었다. 휙!
옆구리에 차고 있던 줄을 담장 위로 던졌다. 줄 끝에는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타탁!
소리가 나게 줄을 당겨보았는데 꼼짝하지 않는 것이 쇠갈고리가 담장에 정확히 걸린 듯 했다. 동천몽은 줄을 잡고 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주르륵!
퍽!
절반쯤 올라가다 그만 미끄러지면서 무릎이 담벼락에 부딪혔다.
밧줄은 비에 젖어 미끄러웠고 담장에 부딪힌 무릎이 깨질 듯 아팠지만 신음을 삼키며 다시 기어 올라갔다.
퍽!
퍼어억!
급히 서두르다 보니 자꾸 미끄러졌다. 무릎이 깨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동천몽은 더욱 힘을 다해 담벼락을 기어올랐다.
아으앗!
자꾸 미끄러지면서 체력이 떨어졌고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반 도 오르지 못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고 밧줄을 잡은 양팔에 힘이 빠졌다.
‘씨이…벌!’
힘이 빠지면서 밧줄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반드시 이곳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동천몽은 젖 먹던 힘까지 모조리 쏟아냈고 마침내 담장 위로 걸터앉는데 성공했다.
가슴이 터질 듯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잠시 숨을 진정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하얗게 변했다. 동천몽은 기겁하며 담장에 바짝 엎드렸다. 어둠이 다시 주위를 덮었고 상체를 일으킨 동천몽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니기미!’
속히 담장을 넘어가야 한다. 자주 번개가 쳤으므로 담장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은 위험했다. 담장 너머는 갈대와 가시나무들이 뒤엉켜 자라고 있는 늪지대였다. 몸을 날리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던 동천몽이 기겁 했다.
“허거억!”
일장도 채 안되는 좌측 담장위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 한 명이 우뚝 서 있었다.
‘저…저 인간은!’
팔 척이 넘는 신장에 족히 백관은 넘을 것 같은 살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했다. 어둠속인데도 우람함 덩치가 유난히 돋보이는, 언뜻 포악한 불곰을 연상케 한 그는 바로 한 달 전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온 자칭 사대법왕 중 한명인 천장금왕(天掌金王)이었다.
“아미타불! 위대한 대법왕이시여 이 악천후 속에 어딜 가시는 것이옵니까?”
동천몽은 눈앞이 노래졌다. 또 다시 실패를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를 맞으면 고뿔에 걸리기 십상이옵니다. 어서 돌아가시지요.”
“족까!”
동천몽은 그대로 늪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천장금왕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담장너머 늪지대로 떨어지던 동천몽의 몸이 무형의 흡인력에 의해 다시 날아왔다.
탁!
“뭐야 씨팔! 놔.”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천장금왕이 허리를 구부리며 말했다.
“진정하소서.”
“당신이나 진정해. 빨리 날 놔줘. 놔달라고!”
동천몽이 버럭 소릴 질렀다.
“이보시오. 땡초, 아니 스님, 제발 부탁 합시다. 날 돌려보내주시오. 이렇게 빌겠소.”
동천몽이 두 손을 합장하며 내밀었다.
천장금왕이 무거운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딜 가신다는 것이옵니까? 대법왕께서는 소승들의 스승이며 주인이시고 원수(元首)이시며 장차 본궁을 이끌어 가실 큰 어른이십니다. 대법왕께서 계실 곳은 이곳이라는 얘기 옵니다.”
동천몽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펴고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 돌아가고 싶소. 모른체 해주시오.”
“아미타불! 대법왕이시여 부디 깨우침이 부족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불쌍한 저희를 하늘의 지혜와 관음보살의 덕으로 이끌어주소서.”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자 동천몽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
“날 더러 뭘 이끌어 달라는 거야. 씨팔.”
다시 몸을 날렸다. 그러나 허리가 반쯤 숙여졌을 뿐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놔. 안 놔?!”
“고정하소서. 대법왕이시여.”
“대법왕이고 대밥왕이고 날 내버려 두라니까? 난 당신들 대법왕 아냐. 소주 사는 동천몽이란 말이야. 잘 봐. 내가 어떻게 당신들 대법왕이냐고. 내 얼굴 잘봐봐”
“대법왕이시여 불충한 속하를 용서하소서.”
푹!
천장금왕이 가볍게 동천몽을 옆구리에 끼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동천몽이 발버둥 치며 소릴 질렀다.
“호로 상놈의 인간아. 천벌을 받아 뒈질 중놈의 새끼야. 빨리 안 놔.”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지만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꼼짝 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자신을 끼고 있는 천장금왕의 팔뚝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콱!
“으윽!”
물어뜯던 동천몽이 비명을 질렀다. 마치 쇠몽둥이를 깨문 듯 이빨이 아팠다.
“당신들 이러고도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 착한 중생을 납치한 니들이 무슨 중들이야. 어서 날 고향으로 보내줘. 얼르은.”
비가 멈췄다. 비가 멈춘 것이 아니라 어느새 천장금왕이 실내로 들어선 것이다.
다시 일광전으로 잡혀 왔다.
실내로 들어선 천장금왕이 동천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내려놓자마자 동천몽이 머리를 들이밀며 달려들었다.
“차라리 날 죽여라. 죽여”
하지만 두 걸음도 떼지 못하고 무형의 벽에 가로막혀 몸을 세워야 했다.
“팔용 있느냐?”
“부르셨나이까? 금왕님.”
문이 열리고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사십 가량의 승려가 들어섰다. 그런데 천장금왕을 쳐다보는 팔용의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이 넘쳐흘렀다.
“소…송구하옵니다. 잠시 뒷간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그만.”
팔용은 동천몽의 시위이자 감시자였다. 저녁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아랫배가 아파왔고 잠시 뒷간을 다녀오는 사이에 동천몽이 사라진 것이었다.
“네놈 죄는 천천히 추궁하기로 하고 속히 대법왕님의 의복을 갈아 입히거라. 비를 오래 맞아 고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빨리 서둘러라.”
“존!”
팔용이 잽싸게 밖으로 달려 나갔고 천장금왕이 씩씩거리고 있는 동천몽을 향해 정중히 입을 열어 말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소승의 말을 들어주소서.”
동천몽이 눈을 까뒤집었다.
“이봐,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들 지금 뭔가 크게 착각 하고 있어. 날 아주 만만하게 본 모양인데 이래 뵈도 소주땅에서 형천파 두목 구육(狗肉) 하면 날아가는 새는 몰라도 걸어가는 인간들 모두 피한다구. 좋게 말할 때 날 보내주는 게 좋을 거야. 나 뚜껑 열리면 그땐 내 행동 나도 책임 못 져.”
“다시 말하지만 이제 대법왕께서 계실 곳은 본궁이옵니다. 머잖아 일 만 이천 제자들의 뜨거운 경배를 받으며 정식으로 제 십 육대 대법왕으로 착좌하실 것이옵니다.”
카악!
흥분한 동천몽이 가래침을 바닥에 뱉으며 핏대를 올렸다.
“누구 맘대로, 웃기고 있어.”
그때 팔용이 휘황찬란한 금포 한 벌을 들고 들어섰다.
“대법왕이시여 어서 의관을 갈아입으소서.”
팔용이 허리를 구부리고 양손으로 금포를 내밀었다.
“누가 이딴 것 입는데.”
화락!
동천몽이 사정없이 금포를 방 한 구석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제발 자중하시고.”
팔용이 잽싸게 다시 금포를 주워와 내밀었고 동천몽이 다시 집어 던져 버렸다.
“개자식아, 너나 입어.”
“이리 가져오너라.”
팔용이 구석에 쳐 박힌 금포를 천장금왕에게 건네주었다.
천장금왕이 동천몽을 보며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천장금왕이 다가갔고 동천몽이 콧방귀를 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고 했다.
뚝!
하지만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을 하지 않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빨리 안 풀어?”
마혈에 제압되어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천장금왕은 동천몽의 젖은 옷을 벗겼다.
“오오! 백상왕(白象王).”
천장금왕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동천몽의 아랫배에서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동천몽의 불룩 쳐진 아랫배에 피부가 다른 곳과 달리 희었는데 코끼리를 닮아 있었다.
“트…틀림없는 대법왕의 표식인 백상왕이다.”
팔용이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자신의 아랫배에 난 흰 점을 보며 벌벌 떠는 두 사람을 보며 동천몽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아랫배에 난 흰 점은 백색증이라 하여 피부질환의 일종이었다. 어려서부터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니며 고치려 애를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한데 나이를 먹고 성장할수록 흰 점도 커졌고 어느 날부터인가 코끼리를 닮아 가기 시작했다.
하도 두 사람이 흰 점을 마주 쳐다보지 못하고 두려워하자 동천몽이 물었다.
“미친 놈들!”
천장금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법왕의 환생자이시면서 어찌 백상왕을 모른다 하옵니까? 백상왕은 만상(萬象)의 우두머리인 흰 코끼리이자 대대로 본궁을 다스려온 대법왕의 표징이…지…요.”
너무나 감격한 듯 마지막 목소리가 떨려나왔고 급기야 천장금왕이 눈물을 짰다.
“그…그토록 목메어 기다리시던 대법왕께서 이렇게 환생하여 오시다니 기쁘도다. 아아! 선대법왕들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감사하나이다.”
팔용이 따라 외쳐 말했고 천장금왕은 극도의 공손한 태도로 동천몽에게 금포를 입혔다.
“그…그럼 속하는 이만 물러가옵니다. 비를 맞아 추울 테니 아궁이에 불을 뜨겁게 넣거라.”
천장금왕이 팔용에게 명령을 내리고 사라졌다.
천장금왕이 사라지자 팔용 또한 허리를 구부렸다.
“소…소승 또한 이만 아궁이에 불을 지피러 가옵니다. 편히 쉬소서.”
탁!
문을 닫고 팔용이 사라졌다.
동천몽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참을 서 있던 동천몽이 문득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이건 꿈이다’
벽으로 다가가 사정없이 머리를 박았다. 무지하게 아프다. 절대 꿈이 아니었다.
다섯 번에 걸친 탈출 시도는 감시를 더욱 엄격하게 했다. 네 번째 탈출 시도 때까지는 일광전 밖으로 이따금씩 산책을 삼아 나다닐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이제는 전각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게 했다. 하루 종일 실내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상당히 넓은 일광전이었지만 안에 갇혀 있는 다는 것은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천몽의 하루 일과라는 것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어 달라는 외침으로 시작하여 온갖 기물을 부수고 방 안에 있는 책을 모조리 집어 던지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전부였다.
“이 인간들아, 문 열어.”
쾅쾅!
양발로 문을 걷어찼지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이러고도 부처님을 믿는 중놈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좋게 말할 때 문 열어.”
급기야 머리로 문을 들이 받았지만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편 난동을 부리고 있는 동천몽의 모습을 맞은편 전각에서 네 사람이 쳐보고 있었다.
우람한 체격에 마치 네 마리의 불곰을 연상케 하는 그들은 바로 천장금왕을 비롯한 포달랍궁의 사대법왕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성질 급한 것도 영락없는 전 대법왕이란 말인가?”
둘째 천검은왕이 놀라는 눈으로 말했다.
그러자 셋째 천권동왕이 중얼거렸다.
“똑같소이다. 참으로 똑같소이다. 열 받으면 아무한테나 쌍소리를 내뱉던 전 대법왕님과 하나도 다르지 않소이다.”
“아미타불! 다른 건 몰라도 욕 잘하는 것을 보면 전대법왕의 환생자임이 틀림없소. 아시겠지만 전대법왕님께서는 욕에 관해 얼마나 해박하셨소.”
“맞네. 우리의 대답소리가 조그만 늦어도 곧바로 발길질을 해대며 욕설을 퍼붓곤 했는데 정말로 전 대법왕이 살아 돌아오신 것일세.”
천장금왕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동천몽이 문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표독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더니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바람같이 내달리던 동천몽이 몸을 붕 띄워 출입문을 머리로 박았다.
콰아앙!
엄청난 폭음과 더불어 동천몽의 몸이 달려들 때보다 더 빠르게 퉁겨나가 복도를 나뒹굴었다. 충격에 쓰러진 동천몽은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어찌나 세게 박았던지 골이 덜렁거렸다. 몸을 일으켜 세워 문을 쳐다봤는데 여전히 그대로다.
‘내…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동씨가 아니라 똥씨다.’
이를 악물더니 조금 전 보다 더욱 멀리 물러났다.
양 주먹을 말아 쥐고 부릅뜬 눈으로 출입문을 노려본 동천몽이 아하합 하는 기합을 내지르며 문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발이 복도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속도가 빨랐고 문 앞 삼장쯤에 이르러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또다시 머리가 문을 받았다.
쿠쿵!
일광전이 지진을 만난 듯 흔들렸다. 동천몽이 개구리처럼 패대기쳐 졌다. 손 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시 깨어난 동천몽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문을 향해 돌진했다.
‘오늘 죽자!’
퍼억!
콰아앙!
박고 또 박았다. 문을 부수고 나가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동천몽의 머리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빵이 부풀어 오르듯 머리 여기저기가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호박만큼 커졌다. 머리가 부으면서 동천몽의 모습은 괴물처럼 변해버렸다.
그래도 동천몽의 머리박기는 멈추지 않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여기서 나가지 못할 바엔 살고 싶은 맘도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만 기절해 버린 것이다.
삐이걱!
갑자기 조용해지자 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팔용이 틈 사이로 빠꼼 쳐다보았다. 복도에 엎어져 있는 동천몽을 보며 팔용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동천몽에게 한두 번 속은 것이 아니었다. 어찌나 영리하고 교활한지 귀신같이 자신을 속이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로인해 윗사람들로부터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기도 했고 하마터면 경비승려로 강등될 위기까지 겪었다.
‘죄…죄송하옵니다. 대법왕이시여, 소승은 대법왕께서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요.’
탁!
팔용은 문을 힘차게 닫았다.
하지만 여전히 조용하자 반각쯤 지나 다시 문을 열었다. 그때까지 동천몽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흐흐흐! 죄송하옵니다. 그런다고 소승이 속을 줄 아십니까? 턱도 없지요’
팔용은 다시 문을 닫았다.
팔용은 문 앞 계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나른한 햇살에 크게 하품을 했다.
전대법왕이 타계하고 온 제자들이 천하를 뒤졌다. 타계한 전 대법왕의 환생자를 찾기 위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십육 년이 지난 한 달 전 소주에서 환생한 대법왕을 찾아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벌떡!
팔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에서 천장금왕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용한 것을 보니 대법왕께서 마침내 뜻을 꺾으신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사옵니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전 대법왕님의 환생자인 만큼 보통 영리한 분이 아닐 것이니 각별히 신경 쓰거라.”
“염려 마소서. 이젠 절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천장금왕이 서너 걸음 걷다 멈춰 돌아보았다.
“한데 왜 이렇게 조용하느냐?”
팔용이 누런 이를 드러내놓고 웃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팔용이 들여다보라는 듯 출입문을 살짝 열어주었다.
천장금왕이 열린 문틈을 이용해 복도를 들여다보았다.
“왜 저러고 있느냐?”
쓰러져 있는 동천몽을 보며 천장금왕이 묻자 팔용이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작전입니다. 죽은 듯 누워 있다가 소승이 다가가 깨우거나 살피면 그때를 이용해 뛰쳐나오려는 수작이지요.”
“네 이노옴!”
느닷없이 천장금왕이 소릴 지르자 팔용이 깜짝 놀라며 자세를 추스렸다.
천장금왕이 눈을 치켜뜨고 소리쳐 말했다.
“감히 지고 무상하신 대법왕님께 수작이라는 속된 표현을 서슴치 않다니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팔용이 기겁하며 굽실거렸다.
“자…잘못 했사옵니다. 용서…용서.”
“한번만 더 그 따위 망언을 일삼는다면 당장에 수라옥에 처박힐 줄 알거라.”
수라옥(修羅獄)은 법규나 죄를 지었을 때 갇히는 뇌옥이었다. 하지만 일반 뇌옥이 아니었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기 어려운 천형의 땅이었다.
팔용이 벼락을 맞은 듯 떨며 말했다.
“며…명심하겠사옵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허험! 아미타불!”
가볍게 목소리에 힘을 주고 두 걸음 쯤 걸어가던 천장금왕의 발걸음이 또다시 멈췄다.
팔용이 깜짝 놀라며 풀어진 자세를 추스렸고 천장금왕이 다시 돌아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동천몽은 새우처럼 웅크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화악!
문틈을 들여다보던 천장금왕의 눈이 커졌다.
“아니, 대법왕님의 머리가 왜 저렇게 커졌단 말이냐?”
“옛?”
팔용이 깜짝 놀라며 문틈으로 쳐다보더니 눈을 부라렸다.
“어, 진짜네.”
“뭣 하느냐? 당장 문을 열라.”
팔용이 신속히 문을 열었고 천장금왕이 바람처럼 복도로 뛰어들어갔다.
“오오! 대법왕이시여.”
흉측한 동천몽의 모습에 천장금왕이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이보거라! 어서 대법왕님을 의각(醫閣)으로 모시거라.”
팔용이 동천몽을 어깨에 둘러메고 바람처럼 몸을 날렸고 그 뒤를 천장금왕이 따랐다.
동천몽을 옆구리에 낀 팔용이 짙푸른 낙석(絡石) 덩굴이 뒤 덮인 회색빛 삼층 전각으로 뛰어들었다.
“각주, 각주는 어디 계시오?”
뒤따라 들어선 천장금왕이 벽력 같이 소릴 질렀다.
의각은 포달랍궁 일만 이천 제자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의원이었다. 재색의 환자복을 걸치고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환자들이 천장금왕을 보고 소스라치며 예를 취했다.
콰앙!
천장금왕은 그들의 예를 무시하고 팔용을 추월하여 맨 끝에 있는 적색의 방문을 걷어차며 뛰어들었다.
“각주!”
사방 상장 정도 되는 방에는 온갖 약재와 치료기구들이 사면 벽을 채우고 있었고 버들가지마냥 호리호리한 육십 가량의 승려가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환자의 아랫배에 금침을 꽂던 의승이 천장금왕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더니 재빠르게 다가와 허리를 구부렸다.
“그…금왕님 아니십니까?”
의신(醫神)으로 불리는 만동승의(卍東法師)이다. 의각은 각주 만동승의를 비롯해 모두 일백여명의 의승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만동승의는 호법급 이상의 고위 간부들만을 치료한다.
만동승의로부터 침술 치료를 받던 승려 또한 천장금왕을 발견하고 벌떡 상체를 일으켜 예를 취했다.
“수…수석 법왕님?”
“아니다 누워있거라.”
천장금왕은 일어난 승려를 향해 손을 들어주고 만동승의를 향해 말했다.
“큰일 났네. 어서 이분을 살피시게.”
팔용은 이미 동천몽을 좌측의 빈 침대에 눕혀 놓았고 만동승의가 다가갔다.
‘이럴수가!’
만동승의의 다가가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그의 두 눈은 동천몽의 부은 머리가 아니라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미타불! 어쩜 이리도 똑같단 말인가?’
만동은 동천몽을 살피고 또 살폈다. 얼굴을 비롯해 신체와 사지는 물론 의복 아래로 드러난 피부까지 뚫어져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파…판박이다!’
“어억!”
그때 치료를 받고 있던 승려까지 동천몽을 발견하고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저…저런!’
만동이 놀란 얼굴로 천장금왕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 아이가 누구냐는 표정이다.
천장금왕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눈알을 두어번 굴리더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어 말했다.
“대법왕님이시네.”
“헉!”
“저…정말이옵니까?”
천장금왕이 짧게 말했다.
“한 달 가까이 되었네. 아직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신변이 노출됨으로써 발생할 수도 있는 여러 위험적인 요소를 막기 위해 쉬쉬했던 걸세.”
사대법왕과 팔용을 제외하고는 궁 내에서 누구도 동천몽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철저히 그의 정체를 함구했던 것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위험 때문이었다. 전대법왕이 타계한 후 오랫동안 대법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적지 않은 분란이 있었고 그로인해 궁 내부에서는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동천몽이 전대법왕의 환생자로 선포되면 반대쪽에서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완벽한 준비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었다.
“입 조심하게.”
천장금왕이 만동승의와 치료를 받던 승려를 경고하듯 쳐다보았다. 만동승의가 알았다는 듯 가볍게 허리를 숙인 후 말했다.
“소…소승은 전대법왕께서 살아 돌아오신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생긴 것도 이렇게도 똑같단 말입니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의식을 잃고 있는 동천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와….완벽하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색깔까지 생전의 대법왕님과 똑같군요.”
“시간 없네. 어서 살펴보게.”
만동승의가 동천몽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물컹물컹!
바람이 들어간 풍선을 누른 듯 동천몽의 머리가 쑥쑥 들어갔다.
“어떻게 했기에 머리가 이토록 부었단 말이옵니까?”
천장금왕이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얘길 듣던 만동승의가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허허허허! 그러니까 자기 분에 못 이겨 쇠보다 강하다는 자정문에 머리를 박았단 말입니까?”
“괜찮겠는가? 생명에 지장은 없겠지?”
“전 대법왕께서도 화가 나면 아무데나 머리를 들이 받았는데 절묘하군요. 너무 염려 마십시오. 잠시 충격으로 인해 기절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놀랍습니다. 이만큼 부어오를 정도라면 일반 사람들 머리라면 아마 박살이 나고도 남았을 텐데 부푼 것으로 끝난걸 보면 보통머리가 아닌 것 같군요.”
만동승의가 길다란 금침 한 개를 소매 춤에서 꺼내더니 잘못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는 백회혈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쏙!
반자 가까이 되는 금침이 완전히 백회혈 속으로 박혔다.
천장금왕의 시선은 동천몽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만동승의는 별것 아니라고 말했지만 장차 포달랍궁을 이끌어갈 대법왕이기 때문에 결코 안도할 수가 없었다.
“끄응!”
그때 동천몽이 신음을 흘리더니 눈을 떴고 거의 같은 순간 만동승의가 백회혈에 박힌 금침을 뽑아냈다.
“정신이 드시옵니까? 대법왕이시여?”
동천몽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장금왕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어 좌우로 고개를 돌려 실내를 살폈고 코 속을 파고드는 약냄새와 온갖 치료기구들을 발견하고 의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화악!
갑자기 동천몽이 침상에서 그대로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동작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퍼어억!”
좌측 벽에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퍼퍼퍼퍽!
미친 듯이 자신의 머리를 찍으며 악을 썼다.
“죽어라. 제발 죽자아.”
“대…대법왕님이시여.”
“아니 되옵니다.”
천장금왕이 기겁하며 동천몽의 마혈을 짚었다.
마혈이 제압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동천몽이 악을 썼다.
“이렇게 날 가둬둘 바에야 차라리 내 목을 잘라라 이 개자식들아.”
동천몽은 천장금왕을 보며 악을 썼다.
“야 이 불곰 같은 놈아. 빨리 날 안 풀어줘. 니가 그러고도 부처를 믿는 놈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늘같은 사대법왕 중 수석 법왕인 천장금왕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는 동천몽을 보며 주위 사람들이 소스라쳤다.
“네…네 이놈 감히 이분께서 뉘신…으악!”
치료를 받던 승려가 말을 다 뱉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날아갔다.
천장금왕이 구석에 쳐박힌 승려를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았다.
“감히 대법왕님을 놈이라고 했더냐?”
“사…살려 주십시오. 소승이 잠시 흥분하여 그만 나도 모르게 욕을 해버렸사옵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대법왕님은 우리의 스승이시고 위대한 활불이시며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다. 당장 무릎 꿇고 사죄 하지 못하겠느냐?”
“홍산의 주인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대법왕이시여 이 못된 제자를 벌하여 주소서.”
침을 꽂은 체 동천몽 앞에 바짝 엎드려 머릴 조아렸다.
“바다와 같이 넓은 자비로 용서를 해주신다면 제자는 평생 대법왕님의 큰 은혜를 가슴에 지니고 살 것이옵니다.”
“웃기고 자빠졌네. 시끄러.”
만동의 입술이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믿을 수가 없도다. 자극적이고도 능숙한 욕설과, 특히 자신의 분을 못 이기면 아무곳에나 머리를 박고 자해하는 것까지 어찌 이리도 닮았단 말인가. 오오! 마침내 십오 년 전에 타계하신 대법왕님께서 확실하게 환생하셨구나.’
“두 사람.”
“예!”
“하명하소서. 수석 법왕님.”
만동과 치료받던 승려가 허리를 숙였다.
천장금왕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말한다. 오늘 있었던 일을 함구해라. 전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한 일이니라 알겠느냐?”
“아미타불!”
“명심 하겠나이다.”
“만에 하나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말에서는 살기까지 짙게 풍겨졌다.
천장금왕이 팔용에게 눈짓을 했다. 팔용이 마혈이 제압된 막종오를 다시 옆구리에 끼고 일광전으로 돌아갔다.
“후우!”
만동과 승려 모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닮아도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다른 건 몰라도 욕 잘하는 것만큼은 완전히 대법왕님의 재림이오.”
두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앞으로 십오 년 전에 죽은 대법왕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대법왕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 심각한 표정들이었는데 벌써 사흘째 원탁에 앉아 토론 중에 있었다. 화제는 당연히 동천몽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를 어떻게 해야 고분고분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만들 것인지 갖은 묘안을 짜냈지만 선뜻 떠오르는 계책은 없었다.
기회만 주어지면 도망을 치려하고 틈만 나면 자해를 하는 그를 무슨 수로 달래어 온순하게 만드냐는 것인데 난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미타불!”
“거참!”
사흘 동안 머리를 맞댔지만 올린 소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네 사람이 굳은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팔용이 급히 뛰어들었다.
“크….큰일났사옵니다. 대법왕님께서.”
어찌나 황급히 뛰어 왔는지 헐떡거리느라 팔용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이…이젠 식사를 거부하고 있사옵니다.”
“이러어언.”
네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광전을 향해 날아갔다.
동천몽의 방문을 열고 사대법왕이 들어섰다. 부어 오른 머리는 아직 가라앉지 않아 거대한 바위를 이고 있는 듯 했는데 벽을 보고 돌아 앉아 있었다.
또다시 머리를 박는 자해를 할까봐 사방 벽을 연와토로 발랐다. 연와토는 고무처럼 물렁물렁하여 머리를 박아도 충격이 세게 전달되지 않는다.
“처음 이틀 정도는 입맛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천장금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법왕시이여.”
천장금왕이 큰 소리로 불렀지만 동천몽은 돌아보지도 않았고 나머지 삼대법왕들이 돌아가며 불러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대답이라도 좀 하시면 안되겠사옵니까?”
그러나 동천몽은 오연했다. 바위처럼 꼼짝 하지 않는 동천몽을 보며 천장금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요. 소승들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머지 사람들이 쳐다보자 천장금왕이 일단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했다.
밖으로 나온 삼대법왕과 팔용이 천장금왕을 쳐다보았다.
“왜 그냥 나오신 것입니까?”
천검은왕이 물었다.
천장금왕이 정색하여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굶주림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못 봤네. 두고 보게 몇 일 저러다 포기 할 걸세. 그러니 적당히 사정하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물러서게. 넉넉잡고 닷새 정도면 밥 달라고 소리칠 테니까. 대신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 냄새 좋고 향 진한 반찬을 집중적으로 상에 올려야 하느니라.”
“예!”
천장금왕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절간의 음식이라고 해봤자 거의가 나물이지만 팔용은 가장 맛있는 반찬을 준비하라고 주방에 일렀다. 배가 부른 사람도 식욕이 당길 만한 반찬으로 가득 채워진 밥상을 들여왔다. 그러나 동천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온갖 진수성찬으로 동천몽을 유인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느덧 천장금왕이 자신했던 닷새가 지났다. 그러나 동천몽은 처음 그대로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팔용이 말을 시켜도 일체 응대를 하지 않았다.
“대…대법왕님 제발 식사를 하시옵소서. 이러다가 굶어 죽사옵니다.”
엿새째, 아침 일찍 팔용이 밥상을 들고 들어와 또다시 사정했다.
여전히 침묵이었다. 반드시 굶어 죽고 말겠다는 듯 의지를 드러낸 듯 태산 같다.
팔용이 몇 번 사정하다 방을 나갔다. 그러자 동천몽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으로 온갖 음식이 떠올랐지만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천장금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닷새면 항복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열흘이 지나고 있었다. 천장금왕은 이틀만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만약을 대비해 만동승의를 비롯한 의각의 의승들을 비상 대기시켰다.
동천몽의 얼굴이 점차 말라가기 시작했다. 두 눈이 퀭하니 들어가기 시작했고 광대뼈가 불거졌다.
금방이라도 밥을 갖고 오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남아가 칼을 뽑았으니 확실히 찔러야 했다. 이제야 말로 기호지세이고 물러난 쪽이 지는 것이었다.
또다시 이틀이 지났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동천몽의 눈이 더욱 흐리멍덩해졌다. 완전히 기력이 바닥난 사람의 표정이었다.
예상대로 천장금왕이 나타났다.
천장금왕이 멍한 시선으로 헐떡거리며 앉아 있는 동천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식사 하시옵소서.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천장금왕이 하소연 하듯 외쳤다.
“대법왕님께서는 본궁 일만 이천 제자들의 어버이십니다. 제발 옥체를 보중하소서.”
하지만 동천몽은 반응하지 않았다.
천장금왕의 입술이 물렸다. 뭔가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인간이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열 이틀을 버텼다는 것은 거의 사경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소…속하를 용서 하소서.”
천장금왕이 허리를 구부리고 합장을 하더니 느닷없이 동천몽의 마혈을 제압했다.
후훕!
동천몽의 몸이 꼿꼿해졌고 뒤이어 연거푸 천장금왕의 오른손이 뻗어나왔다.
파팟!
턱밑 두 곳의 혈도에 지력이 격중되자 동천몽의 닫힌 입이 쩌억 벌려졌다.
“아아! 이…개장싱드라. 빵리 몽푸어.”
입을 닫지 못한 상태로 말을 하자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천장금왕이 팔용에게 말했다.
“먹이거라.”
팔용이 한쪽에 놓여 진 죽 그릇을 가져다 떠 넣기 시작했다.
팔용이 한 숟가락을 벌려진 동천몽의 입에 넣으면 천장금왕이 목 밑 혈도를 탁 쳐서 죽이 넘어가도록 했다. 그런 식으로 십여 차례 반복했고 순식간에 죽 한 공기가 비워졌다.
천장금왕이 손을 뻗어 제압된 동천몽의 혈도를 해혈 했다. 혈도가 풀리자마자 동천몽이 돌아서서 길길이 악을 썼다.
“이런 날강도 같은 새끼들아. 내가 그런다고 밥을 먹을 줄 아느냐?”
버럭 소릴 지르던 동천몽이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목구멍 속으로 푹 집어넣었다.
으웨에에!
단 한순간에 먹었던 죽을 모조리 토해버렸다.
그 모습에 천장금왕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을 다시 가져오너라.”
팔용이 잽싸게 문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김이 피어나는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이번에도 마혈을 제압했고 입을 벌린 후 죽을 부었다. 그러나 앞서 했던 것과는 달리 마혈을 풀지 않았다. 마혈을 풀면 다시 손가락을 집어넣고 토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잽싸게 손가락을 집어넣어 먹었던 죽을 토하려던 동천몽이 눈을 부릅떴다. 마혈이 제압되어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쳐 죽일 땡초가?”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동천몽은 온갖 욕을 퍼부었다.
“차라리 날 죽여라. 이 천하에 못된 중놈아. 날 죽여.”
핏대를 올리며 욕을 퍼부었지만 천장금왕은 일체 대꾸를 하지 않고 문을 닫고 사라졌다.
홱!
동천몽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려지자 입구 좌측으로 서 있던 팔용이 깜짝 놀랐다.
“풀어, 빨리.”
팔용이 더듬거렸다.
“안됩니다. 풀어줬다가는 난 죽습니다. 제발 그냥 계십시오.”
동천몽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쏟아져 나왔고 팔용은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