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법왕-3화 (3/71)

제3장 사주호룡거

복도를 지나면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동천비는 후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풀잎에 맺힌 이슬이 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의 후원은 고요했다.

양손을 벌리고 길게 심호흡을 한 동천비는 천천히 연못가를 따라 산책하기 시작했다.

반월지(半月池), 연못의 이름이었다. 반월지는 철저히 인공 연못이다. 사대 조 때 유명한 풍수가가 찾아와 이곳에 반달 모양의 연못을 만들면 가문이 세세연년 융성할 것이라고 하여 만들었다. 어쨌든 그 풍수가의 말대로 연못을 만들어서인지 천상각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갔다.

“핫핫핫!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연못을 산책하는 동천비의 귓가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부친의 처소인 녹풍원(綠風院)에서 한 대의 마차가 나오고 있었다. 마차는 두 마리의 백마가 끌고 있었는데 네 기둥은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했고 뾰쪽하게 솟은 지붕 꼭대기에 배를 깔고 오만하게 엎드려 있는 붉은 대호상이 마차의 위엄을 한층 치켜세웠다.

‘사주호룡거(四柱虎龍車)’

사주호룡거는 한 집단을 상징하는 마차이다. 이 시대 최강의 단체이며 불멸(不滅)하고 불사(不死)하며 불패(不敗)한다하여 건곤무적(乾坤無敵)으로 불리는 무림맹의 호송거다.

부친이 사라지는 마차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차는 후원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정문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후원 옆으로 만들어진 포도를 따라가야 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흑의인이 마부석에 앉아 말고삐를 쥐고 있었는데 동천비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했다.

꾸뻑!

흑의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만 슬쩍 숙였다.

‘환도(幻刀) 가개묵(柯 墨)’

단순한 마부로 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 한 때 한 자루 칼로 대강남북을 종횡무진 쓸고 다녔던 칼의 거목이다. 무림맹주에게 패해 스스로 수하되길 자처한 인물이었다.

그동안 몇 번 지나치듯 만나긴 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얘기를 나눠 본적은 없었다.

“세우게!”

문득 마차 뒤쪽으로부터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마차가 멈추고 뒷문이 덜컹 하고 열리더니 육십 가량의 회의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헛헛헛! 동천비 대공자 아니신가? 도대체 이게 얼마만인가?”

회의노인이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동천비의 굳었던 표정이 신속하게 펴지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오랜만에 뵙는 군요.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동천비를 바라보는 회의노인의 시선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독산(獨山) 상관량(上官量), 무림맹의 모든 인사와 살림을 총괄 지휘하는 총관이다. 심기가 무척 깊고 자신의 진심을 좀체 드러내지 않아 은심자(隱心子)로도 불린다.

“부친께서 천상각의 차기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계시는 것 같더군? 잘해보세. 우리 무림맹이 뭐 도울 일은 없는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게 만사를 젖혀두고 자네를 돕겠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보겠네. 다음에 또 보세나.”

상관량이 한 손을 들어 보이고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덜컹 거리며 마차가 움직였는데 두 마리의 말이 몹시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도대체 이번에는 또 얼마를 가져가기에 말 두 마리가 저렇게 힘들어 한단 말인가’

마차를 바라보는 동천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차는 동천비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동천비는 한동안 움 직 일줄 몰랐다.

동천비가 발길을 돌렸다. 잠시 후 그가 멈춘 곳은 단층짜리 푸른 전각 앞이었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전각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무게와 위엄이 풍겼다.

녹풍각(綠風閣), 천상각의 초대각주인 녹풍상인이 직접 지은 건물이다.

멈칫!

전각 안으로 들어가려던 동천비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더니 발길을 돌려 전각 뒤쪽으로 돌아갔다. 전각 뒤로 돌아가자 한 명의 노인이 꾸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쭈그리고 앉아 두 마리의 닭이 싸우는 모습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퍼퍽!

흑 백의 두 닭은 갈기를 잔뜩 세우고 서로를 노려보다 벼락처럼 달려들어 양발로 상대를 할퀴었다.

흰 닭의 이름은 악계(鰐鷄), 싸움에서 이기면 패한 닭은 기어코 잡아 먹는 포악성으로 악명이 높다. 검은 닭의 이름은 살모(殺母)이다. 얼마 전 자신을 낳아준 어미 닭과 싸움을 벌여 이겼다. 이겼을 뿐만 아니라 기어코 목줄까지 끊어 버렸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죽였다고 해서 살모라고 붙여졌는데 두 마리의 닭은 서로를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푸푸푹!

흑백의 닭털이 사방으로 날렸고 땅바닥에 서로에게서 떨어진 핏자국이 흥건했다.

두 마리의 닭은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보자 더욱 흥분했고 고개를 낮게 숙인 체 매서운 시선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화아악!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허공에서 서너 차례 발톱이 뒤엉켰다.

허공 가득 닭털이 날렸고 부친은 웃음 띤 얼굴로 쭈그리고 앉아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친인 귀상(鬼商) 동오룡(童傲龍)이었다. 천상각의 현각주이자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는 중원제일의 거상이었다.

부친의 유일한 취미는 닭싸움이었다.

꼬옥!

살모가 비명을 지르더니 득달같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악계가 쫓아갔다.

그것을 바라보는 부친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맺혔다.

쭈그리고 앉아 있던 부친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 가득한 얼굴로 동천비를 바라보았다.

“소 가주가 찾아왔다고 들었다?”

이미 여추량이 결과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이다. 알고 있을 텐데도 묻는 다는 것은 자신의 오늘 결정에 대해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즉 장사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상대 입장 따위는 절대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재차 가르치려는 것이다.

“아버님!”

동천비가 돌아서려는 부친을 불렀다.

부친이 돌아섰다.

“조금 전 무림맹의 상관량 총관이 다녀가더군요.”

부친의 안색이 굳어졌다.

동천비가 날카롭게 물었다.

“오늘은?”

“그만 가보거라.”

오늘은 얼마를 주었느냐고 물으려는데 부친이 말을 가로막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그들이 가져간 돈이 얼만줄 아십니까? 자그마치.”

“시끄럽다. 넌 그런 일에 신경쓰지 말고 내달 보름에 찾아오는 동영 상인들 영접 준비나 잘 하거라.”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돌렸다.

온 얼굴에 원숭이를 방불케 하는 붉은 털이 뒤 덮힌 거구의 장한이었는데 칼집도 없는 한 자루 녹슨 칼을 옆구리에 메고 있었다. 장한은 동우비를 발견하고 가볍게 목례로 예를 취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대공자님.”

적면금도(赤面禽刀) 오만상(吳萬上), 부친의 개인 시위이자 오랜 가신중 한 명이다.

“손님이 왔습니다.”

오만상이 부친을 향해 말했다.

부친이 동천비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다시 말하겠다. 그들이 몇 번을 찾아오던 얼마를 요구하든 우린 주면 될 뿐이다. 명심 하거라.”

부친이 단호히 뱉고 녹풍원 안으로 사라졌다.

동천비는 한동안 꼼짝도 않은 체 굳은 얼굴로 부친이 사라진 녹풍원을 바라보았다. 돈이면 불가능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직 한곳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무림(武林).

그들은 지난 세월 온갖 명목과 명분으로 돈을 가져갔다. 그들은 무소불위였고 천하를 움직였다. 그들의 비위를 거슬렸다가 는 살아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손을 내밀 때 마다 조금도 거부의사를 보이지 못한 체 주머니를 풀어야 했다. 그들은 어음 따위는 받지 않는다. 부정한데 사용해도 전혀 추적이 되지 않을 은자와 황금만을 원했다. 두 마리의 말이 거품을 무는 것으로 보아 오늘 가져간 액수 또한 족히 황금 수십 관은 되리라.

그 댓가로 중원의 수많은 상권을 넘겨주고 보호해준다지만 그들의 손은 갈수록 자주, 그리고 많이 내밀어지고 있었다. 증조부때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다간 궤멸의 위기에까지 몰린 적이 있었다. 그 이후부터 일체 불만이나 불쾌한 기색 없이 원하는 대로 내주었고 그들은 당연히 가져갈 돈을 가져가는 사람처럼 의기양양했다.

불끈!

동천비의 두 주먹이 거칠게 말려갔다.

언젠가 취중에 부친은 말했다. 선조때부터 무림에 받친 돈을 합하면 중원을 서너 번은 사고도 남을 것이라고.

그 날 이후 어떻게 해서라도 더 이상 그들의 주구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막강한 그들을 상대할 비책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을 바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꺾은 것은 아니었다.

‘난 절대 뺏기지 않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천비의 어금니가 물렸다.

두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 이글거리며 불거졌다.

동천비는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오자 여추량이 서류를 옆에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동천비가 원탁이 놓인 의자에 앉아 서류를 내밀었다.

여추량이 내민 서류를 대충 훑어본 동천비가 여추량 앞으로 서류를 던지며 물었다.

“손님이 찾아왔다던데 누구요?”

“백쾌섬이라고?”

“백쾌섬.”

“아 마치 저기 가는군요. 저 자입니다.”

여추량이 창문 밖을 가리켰다

멀리 창밖으로 한 명의 백의사내가 걸어가고 있었다.

사내는 눈 같이 흰 백의를 걸쳤고 왼쪽 옆구리에 오색 수실이 달린 멋들어진 검 한 자루를 메고 있었다.

비록 거리는 조금 있었지만 사내의 용모는 관옥과도 같았다. 우뚝 선 콧날과 먹물을 듬뿍 묻혀 그어 놓은 듯한 눈썹, 특히 두 눈은 깊은 심연처럼 무겁고도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백의 사내는 여인처럼 양쪽 귀에 흑진주를 박은 귀고리를 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귀고리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렸고 긴 머리 또한 오색수실로 단정히 묶었다.

“당대제일 추적자로 알려진 자 이옵니다.”

흰 옷에 번개만큼이나 빠른 검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백쾌섬으로 불린다. 그의 출신사문이나 신분에 대해 드러난 사실은 제한적이었고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은 사람을 찾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쾌섬의 또 다른 이름은 당대제일의 현상금 추적자이다.

아무리 깊숙이 숨어 있는 인간이라도 일단 백쾌섬이 뛰어들면 금방 잡히고 만다. 자신만의 독특한 능력으로 지금까지 수백 건의 청부를 완벽히 해결하여 그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솟구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께서 몽이 놈을 찾기 위해 저자를 끌어들였다는 애기로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동우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여총관도 몽이 놈이 납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여추량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뜻이었는데 동천비가 단호히 자르듯 말했다.

“절대 아니오. 그놈은 납치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잠적한거요?”

여추량이 눈을 치켜떴다.

이유를 묻는 것이다.

“뻔하지.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납치 당한 척 스스로 잠적하여 아버지의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수작이지. 결국 자신에게도 큰 업종 하나 달라는 항의인거야. 하지만 그건 절대 안 돼. 그 놈은 장사꾼의 자질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쥐어줘도 망해 먹을 놈이야.”

여추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동우비가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일생에 보탬이 안되는 자식, 절대 그 자식에게는 은자 한 푼도 남겨줘서는 안 돼. 그건 내가 못 참아.”

여추량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으로 동천몽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헷갈렸다. 사내가 분명한데 차린 행색은 영락없는 계집이었다. 귀고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열 개의 손톱을 붉게 물들인 것과 몸에서 나는 냄새는 계집들이 풍기는 향기였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음식을 먹는 동작 역시도 계집들이 취하는 동작과 완벽하게 닮았다. 숟가락 절반 정도만 밥을 떠 넣고 소리 없이 우물거렸고 왼손에 쥔 흰 손수건으로 자꾸 입가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낸다.

‘허 참!’

삼식의 두 눈은 창가에 앉아 식사를 하는 백쾌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올해로 점소이 생활 팔년이 되었지만 도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연신 고개를 좌우로 기웃 거리며 백쾌섬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풀려고 할 때 그가 고개를 들더니 조용히 불렀다.

“잠깐 와 보겠는가?”

삼식이 잽싸게 달려가 넙죽 허리를 구부렸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손님.”

슥슥!

백쾌섬이 가녀린 손가락에 손수건을 쥐고 입을 닦으며 말했다.

“자네 혹시 동천몽이란 친구에 대해 잘 아는가?”

“아 천몽이 형님요?”

“아니 천몽이 형님이라니. 내가 알기로 그는 올해 열 여섯 밖에 먹지 않은 걸로 아는데 스물은 넘어 보인 자네가 어찌 형님이라고 하는가?”

삼식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세상사가 꼭 나이로 형님 아우 따집니까? 한데 천몽이 형님은 왜 찾는데요? 그분 지금 이 바닥에 없을 걸요?”

“이 바닥이라니?”

“여기 소주 말이예요. 이곳 소주에서는 독고 였죠.”

“독고?”

점소이가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독고도 몰라요. 누구도 적수가 없었다구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이제 갓 열 여섯살 막은 아이를 누구도 이기지 못하다니?”

점소이가 눈을 부릅떴다.

“이 손님 이제 보니 영 뭘 모르시네. 세상이 나이로 싸움 실력 따집니까? 손님 말대로라면 구십 백 살 먹은 노인들이 제일 쌈을 잘하겠네요?”

백쾌섬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점소이가 우기듯 말했다.

“그렇잖아요. 지금 손님 말투가?”

백쾌섬이 환하게 웃었다.

“자네 말이 맞군. 싸움은 나이순이 아니지. 그 동천몽 형님이라는 분에 대해 말 좀 해주겠나?”

“사실 천몽 형님께서는 얼마 전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잡혀 가셨습니다. 좀 더 자세한 얘기를 알고 싶으면 필광이 형님을 찾아 가보세요.”

“필광이 형님? 그는 또 누군가?”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다섯 명의 흑의사내들이 이층에 나타났다.

그들을 발견한 삼식의 안색이 변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호랑이도 지 말하면 온다더니 필광이 형님입니다. 저들모두 천몽이 형님 밑에 있던 형천파 형님들입니다.”

그리고 잽싸게 사내들쪽으로 다가가 넙죽 절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형님들 오랜만에 오셨군요. 어서 앉으십시오.”

우당탕!

퍼퍽!

사내들은 거칠게 의자를 끌어당기며 주저앉았다.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어 앉으며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손님이 없느냐? 가서 시원한 계육탕 다섯 그릇만 가져오너라.”

“아 예.”

점소이가 꾸벅 절을 하고 신속하게 주방으로 달려갔다.

카악!

한 사내가 그냥 주루 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며 맞은편 코에 커다란 사마귀가 붙은 뚱뚱한 사내를 향해 물었다.

“필광이 형님 혹시 큰 형님에 대해 소식 들은 것 있습니까?”

퍼억!

필광이 점소이가 마시라고 가득 채워준 물 잔을 들어 맞은 편 사내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아이고!”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는데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이런 죽일 놈이.”

필광이 욕설을 뱉으며 일어나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들어 그대로 내리쳤다.

화악!

꽈직!

“허그아악!”

사내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사내의 얼굴은 피가 범벅이 되었는데 잽싸게 일어나 필광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엎드렸다.

“자…잘못했습니다. 큰 형님.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필광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내가 누구냐?”

“혀…형천파의 두목이시자 저희들의 큰 형님이십니다.”

필광이 코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너 조금 전 날 뭐라고 불렀느냐?”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습관이 되어 저도 모르게 그만 천몽이 그 자식을 큰 형님으로 부르고 말았습니다. 이제 큰 형님은 형천파의 하늘이십니다.”

필광이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똑똑히 들어라. 이제 형천파에 동천몽은 없다. 오직 나 필광이만 존재 할 뿐이다.”

“예!”

“명심 하겠습니다. 큰 형님.”

사내들이 일제히 허리를 구부렸고 그제 서야 필광이 분이 조금 풀린 듯 자리에 앉았다.

“뭐야, 이 새끼 코뼈가 아예 나가버렸잖아.”

동료 한 명이 얻어터진 사내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다 말고 흔들거리는 코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코…코뼈는 다른 뼈와 달리 한번 나가버리면 붙더라도 삐딱하게 휘어지는데 큰일났군.”

“어디, 어디.”

다른 동료가 코뼈 부러진 사내의 코를 만져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완전히 덜렁거리잖아.”

필광이 버럭 소릴 질렀다.

“새끼들아 숨만 쉬면되지 코뼈 부러진 것이 무슨 부상이라고 호들갑들이야. 시끄러.”

필광의 호통에 모두들 제자리에 앉았고 두들겨 맞은 사내의 콧구멍에 두 개의 휴지조각이 박혀 있었다.

“말 좀 묻겠소?”

그때 백쾌섬이 어느새 사내들 탁자 앞에 다가와 섰다.

사내들이 불량한 시선으로 백쾌섬을 바라보았는데 차림새에 모두가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뭐…뭐요?”

콧구멍을 종이로 막고 있는 사내 좌측으로 앉은 작달막한 체구의 사내가 물었다.

백쾌섬이 필광이를 보며 물었다.

“필광이라는 분이시오.”

누구냐는 듯 필광이 백쾌섬을 매서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백쾌섬이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천상각의 부탁을 받고 동천몽이란 사람을 찾아다니는 중이오. 몇 가지만 묻고 싶은데 대답 좀 해줄 수 있겠소?”

동천몽이란 이름이 나오자 필광이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더니 무뚝뚝하게 물었다.

“뭘 알고 싶다는 것이오?”

“동천몽이 납치될 당시 함께 있었다고 들었소?”

“사실이오.”

필광이 이마를 약간 찌푸리더니 맞은편 코뼈 부러진 사내를 보며 말했다.

“혁상이 네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 해줘라.”

혁상이란 사내가 막힌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자 입을 떡 벌린 체 말했다.

“ 중들이었소.”

“중이라면?”

“혁상이 버럭 소릴 질렀다.

“니기미 중도 몰라. 머리 깎고 뻘건 가사 입고 다니는 그 중 새끼들 말이오.”

백쾌섬이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혁상이 말했다.

“어휴 그날 우리가 술만 취하지 앉았더라도 깨지지 않는 건데.”

혁상이 목구멍에 가득 찬 핏덩이를 뱉어내며 말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한참 열 내고 있는데 남의 술 방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쳐들어 오는데 눈이 확 돌더라고. 술 취하면 이따금 뒷간 갔다고 자기들 방을 못 찾고 남의 방으로 들어간 띨띨한 인간들 있잖수. 우리도 그런놈으로 알았지. 그런데 이 씨발놈들이 다짜고짜 천몽이 형님을 데리고 나가잖아. 그래서 붙었지. 그런데.”

잠시 말을 끊은 혁상이 다시 말했다.

“미치겠더라고? 어찌나 술이 취했는지 몸이 제대로 말을 들어야 말이지. 술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그때 깨달았지. 두 눈 뻔히 뜨고서도 당했지 뭐.”

“지금 중들이라고 했소?”

“그렇다니까 젠장.”

혁상이 버럭 소릴 질렀다.

백쾌섬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전혀 예상을 빗나간 대답이 나온 것이다. 동오룡을 통해 납치범들이 승려였다는 얘긴 들었다. 하지만 백쾌섬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납치범들이 승복을 걸쳤을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는데 아니라는 대답에 혼란을 느낀 것이다.

“틀림 없소? 확실히 승려들이었단 말이오?”

필광이 조용히 말했다.

“보아하니 승려로 위장한 사람들이 아니었느냐는 질문 같은데 그들은 중놈들이었소. 아무리 승복으로 위장해도 중놈에게서 나는 고유의 냄새까지는 어쩔 수가 없지.”

“냄새라면.”

“불향냄새, 알겠지만 불향은 일반 향과 다르다는 것쯤은 알 것이오?”

백쾌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필광의 말처럼 불향은 다르다. 조금만 냄새에 신경을 쓰다보면 일반향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들이 데리고 갔다면 사건은 의외로 복잡해진다.

“그런데 형장은 뉘시오? 왜 그렇게 자세히 묻는 것이오? 천상각에서 왔소이까? 천상각에서는 이미 수십 번 우릴 만나고 갔는데.”

툭!

백쾌섬이 조그만 주머니 한 개를 탁자위로 던졌다.

혁상이 멈칫 거리다 주머니를 주워 안을 들여다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은자 아냐?”

“내 질문에 대답해준 것에 대한 답례오이다. 고맙소이다. 그럼 맛있게들 드시오.”

백쾌섬이 천천히 주루를 걸어 나갔다. 필광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는 백쾌섬을 돌아보았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사내들이 혁상의 손에 쥐어진 주머니를 나꿔챘다.

“얼마야?”

“많아?”

앞 다투어 들여다보던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조…족히 은자 열냥은 되겠는요 형님.”

혁상이 백쾌섬이 사라진 입구쪽을 보며 말했다.

“누굴까요? 새끼 생긴 건 꼭 기생 오래비처럼 생겼는데 만만찮아 보이던데요.”

필광이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는 부하들을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이 자식들아 은자 첨 보냐?”

필광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사내들이 주머니를 밀어 놓고 조용해졌다. 필광이 근엄한 표정으로 주머니 안의 은자를 들여다보더니 조용히 자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욱한 수증기가 앞을 가렸다. 솥뚜껑을 열었을 때처럼 수증기는 뜨거운 열기를 내 뿜고 있었다. 그러나 동천몽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냄새였다.

동천몽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냄새를 흡입했다. 냄새가 코 속으로 빨려들어 가자 뱃속이 시원해졌고 머리 또한 시원한 찬물에 담근 듯 맑아졌다.

“흐흠!”

발정 난 산양의 수컷이 고개를 쳐들고 허공에 흩어진 암컷의 흔적을 맡듯한 참 동안 냄새를 맡던 동천몽이 물었다.

“이건 무엇이냐? 쥑이는구나.”

천장금왕이 수증기 너머에서 대답했다.

“좋습니까?”

“쥑인다고 하지 않았느냐?”

동천몽은 연신 코를 벌름거리며 천장금왕을 향해 다가갔다.

천장금왕은 거대한 욕조 앞에 우뚝 서 있었는데 향기로운 수증기는 욕조 안에서 흘러나왔다.

“도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기에?”

동천몽이 욕조 가까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욕조에는 쌀뜨물 같은 흰 액체가 찰랑거리며 넘칠 듯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동천몽이 고개를 숙이고 가까이 냄새를 맡더니 탄성을 내뱉었다.

“키햐, 이게 뭐냐? 보약이냐? 보약이 이렇게 많을 리는 없을 테고.”

“궁금하십니까?”

천장금왕이 손을 움푹하게 만들더니 흰 액체를 떠서 입에 넣고 마셨다.

“드셔 보시겠습니까?”

동천몽이 잠지 멈칫 거리다 손을 움푹하게 만들어 흰 액체를 떠 입에 넣었다. 짭짭 소리를 내며 맛을 음미하던 동천몽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맛이지? 환상이로구나.”

어려서부터 머리에 좋다는 수많은 영약을 먹어 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눈앞의 흰 액체를 따를 수 없었다.

“국화공주민박석백유(?和恐主珉乳石白乳)이라는 것이옵니다. 본궁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삼천육백쉰다섯가지의 온갖 약재를 섞어 달인 영유(靈乳)이지요. 앞으로 백 팔 일 동안 국화공주민박석백유에 몸을 담그시면 체질이 완벽하게 변할 것이옵니다.”

동천몽은 연신 손으로 국화공주민박석백유를 떠서 쩝쩝 거리며 맛을 보았다.

“국화공주민박석백유은 오로지 대법왕님에게만 사용되는 영유로써 인세에서 가장 훌륭하고 뛰어나지요. 어서 옷을 벗고 들어가십시오.”

“먹기도 아까운 이 귀한 것으로 목욕을 하란 말이냐?”

“먹는 것 보다 담그는 것이 훨씬 큰 효과를 가져 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동천몽이 옷을 홀라당 벗었다. 몸에 좋다고 했으므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뭘 보느냐?”

동천몽이 인상을 썼다.

천장금왕의 시선이 하체의 중요부위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아…아미타불! 죄송스런 말씀이옵니다만 어떻게 그것까지 전 대법왕님 것과 똑같단 말입니까?”

“서…설마 그 사람 것도 내 것처럼 작단 말이냐?”

“아미타불! 예.”

“그냥 들어가면 되느냐?”

“그렇사옵니다. 목욕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동천몽은 가볍게 양손을 좌우로 돌리며 몸을 풀더니 곧바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는 제법 깊었고 바닥에 결가부좌하자 턱밑까지 차올랐다.

“아침 묘시에 들어가셔서 정확히 술시에 나오셔야 합니다. 식사는 때가 되면 팔용이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 안에서 밥을 먹으란 말이냐?”

“백팔일 동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 가지 외워야 할 거입니다.”

“흐흐! 어 좋다! 그래 뭐냐?”

“지금부터 소승이 불러주는 내용을 한자도 빠뜨리지 말고 외우셔야 합니다.”

화악!

흡족한 얼굴로 앉아 있던 동천몽이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뭐…뭘 외운단 말이냐? 설마 여기에 안에 앉아 공부를?”

“별것 아닙니다. 내용도 별것 없지요. 지금부터 속하가 불러줄 테니 기억을 하였다가 하루에 세 번씩 외우셔야 합니다.”

천장금왕이 심호흡을 하더니 느릿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듯 말했다.

‘도남라전 군성보벌 교고읍지 화중지천 목정지야’

‘아형발시 급시당명 세월부대 시불가상 독시무태’

‘연불가거 시불가지 종즉유시 일월파천 수라불타’

‘겸월불거 시혈여겸 아여세혈 진덕수수 핼우겸인’

‘천금미매 매청춘혈 일월진극 황하청혈 무위겸천’

천장금왕이 입을 닫고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외울 수 있겠습니까?”

동천몽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처…처음이 뭐라고 했더냐?”

“도남라전입니다.”

“음 도남라전, 도남라전, 도남라전.”

동천몽이 열심히 중얼거리며 외우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군성보벌이지요.”

“맞아. 군성보벌 군성보벌 군성보벌.”

그리고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눈치를 차린 천장금왕이 말했다.

“교고읍지.”

“어어! 그래, 교고읍지였지. 달빛이 교고하다 할 때 그 교고 아냐?”

천장금왕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건 교고가 아니라 교교입니다.”

동천몽이 인상을 쓰며 쏘아붙였다.

“네 번째나 말해봐라.”

“화중지천이옵니다.”

“화중지천, 다섯 번째는?”

“한 번에 다 외우시려고 하지 말고 처음부터 하나씩 외우시지요. 그럼 처음 대목을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동천몽이 입을 열었다.

“도…도리…도리.”

“도리가 아니라 도남입니다.”

“아 그렇지. 도남…도남라면, 이건 아니고 도남라사…이것도 아닌데.”

천장금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동천몽이 천장금왕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도…도리짓고…아니고.”

천장금왕의 안색이 급기야 흑빛으로 변했다.

‘아… 아미타불! 머리 나쁜 것 까지.’

동천몽은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중얼 거렸다.

“도…도남 삼봉, 이건 아니야. 도남육백 …아냐 아냐.”

“밖에 팔용이 있느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수증기를 뚫고 팔용이 들어섰다.

천장금왕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당장 습기에 젖지 않는 양피지에 불사심법(不死心法)을 적어 오너라.”

“명을 받사옵니다.”

팔용이 나갔다.

동천몽은 여전히 도남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불러드리겠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십시오.”

“불러 보아라.”

동천몽이 눈을 빛냈고 천장금왕이 불사심법의 구결을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동천몽은 귀를 바짝 세우고 들었다. 모든 구결을 다 읽고 난 천장금왕이 묻자 동천몽은 또다시 더듬거리며 헤매기 시작했다.

“도남…도남…아유 미치겠구만.”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괴로워하는 동천몽을 보며 천장금왕은 속으로 중얼 거렸다.

‘본궁의 역사를 담은 포랍불서에 보면 수많은 대법왕의 환생자가 있었지만 이정도로 완벽하게 똑같은 환생은 없었다.’

완벽히 닮은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타계한 전 대법왕이 워낙 머리가 나빠 크게 이루어 놓은 일이 없었으므로 은연중 걱정이 되었다.

“가져 왔사옵니다.”

팔용이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 한 장의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천장금왕이 양피지를 살피더니 동천몽에게 건네주었다.

“국화공주민박석백유가 묻어도 젖거나 찢어지지 않을 테니 이걸 보면서 외우십시오.”

동천몽이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도남라전, 맞아 이거야. 군성보벌 교고읍지.”

동천몽이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고 잠시 염려스런 얼굴로 쳐다보던

천장금왕이 허리를 구부린 후 밖으로 나왔다.

침통한 표정으로 나오는 천장금왕을 보며 팔용이 조심스럽게 물어 말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후유!”

천장금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쳐다보는 팔용을 바라보았다.

“팔용아.”

“하명하소서.”

“넌 대법왕님을 어떻게 보느냐?”

팔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박거리고만 있었다.

“말해보아라. 네가 느낀 대로.”

팔용이 한참 천장금왕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같은 놈이 감히 대법왕님께 대해 어찌 평가를 내릴 수가 있단 말이옵니까. 단지 너무 놀라울 만큼 닮았다는 것이 속하는 기쁠 뿐입니다.”

천장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 너무 닮았다는 것이 걱정이구나.”

“……”

“타계하신 전대법왕께서는 본궁의 수많은 궁주님들 중 가장 무공이 낮으셨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팔용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기만 했다.

천장금왕이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이것이다. 두뇌가 떨어졌기 때문이지. 그분은 아침에 가르친 것을 점심때면 잊어 버렸다. 그런데 환생하신 대법왕님 또한 머리가 상상을 벗어날 만큼 나쁘구나.”

“그럼 어찌되는 것입니까? 대법왕님이 배우셔야 할 무공은 엄청 어렵고 난해하여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도 손쉽게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아미타불! 흉인지 복인지.”

나직이 중얼 거리며 천장금왕이 천천히 지하계단을 올라갔다.

축 쳐져 올라가는 천장금왕을 보며 팔용이 중얼 거렸다.

‘도대체 얼마나 머리가 나쁘시기에 수석법왕님께서 저렇게 고민 하신단 말인가’

지하석실을 벗어나와 서너 걸음 걸어가던 천장금왕이 걸음을 세웠다. 잠시 우울한 낯빛으로 서 있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해는 어느덧 중천을 향해 오르고 있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햇빛 때문일까 천장금왕의 인상은 잔뜩 찌푸러져 있었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 그렇게 하늘을 노려보느냐?”

약긴 비아냥대는 듯한 음성이었다.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천장금왕의 표정이 멈칫 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파악한 듯했다.

천천히 소리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숙을 뵈옵니다.”

우측 십여 장 쯤에 칠층석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탑을 등지고 한 명의 비쩍 마른 고승이 맨발로 우뚝 서 있었다. 얼굴은 새끼줄을 칭칭 동여매 놓은 듯 주름살이 가득했고 키는 아주 작았다. 걸치고 있는 승포 또한 닳고 닳아 헝겊을 잇대어 꿰맨 바느질 자국이 빼곡했다.

만경선불(萬敬仙佛), 올해 세수 백오십으로 궁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며 천장금왕에게는 사숙이 된다.

“말해봐라. 왜 하늘을 보고 한숨을 내 쉬었는지?”

만경의 움푹 패인 두 눈에서 푸른 섬광이 뻗어 나왔다.

“아니 이놈이 내 말이 말 갔지 않단 말이냐? 왜 하늘을 보고 한숨을 지었느냐고 묻지 않느냐?”

천장금왕이 대답을 하지 않자 몇 가닥 남아 있지 않는 눈썹이 파동을 쳤다.

비록 자신의 나이가 백 살이 넘었지만 사숙이면 하늘과 같은 존재이다.

“그…그렇잖아도 지금 사숙님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네놈이 날 왜?”

만경이 쏘아 붙이듯 물었다. 사실 만경과 천장금왕의 관계는 그다지 원활하지 못했다. 항렬로는 사숙이 되지만 직분은 자신이 높다. 사대법왕 중 수석이면 대법왕에 이어 궁내 서열 이 위인 것이다. 그래서 대법왕이 타계하고 난 지난 십육 년 동안 적지 않게 만경과 부딪혔다.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만경이 대법왕자리를 노골적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자신은 막았다. 포달랍궁의 대법왕은 아무나 올라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대법왕이 타계하기 전 자신이 미리 다음 대법왕을 지목한다. 혹 지목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대법왕의 환생자로 생각되는 사람을 찾아 천하를 뒤져 찾아내는 것이다.

아무튼 자신이 대법왕 자리에 앉겠다는 요구를 가로막은 천장금왕 사이에는 이미 메울 수 없을 큰 고랑이 파여 있었다.

“대법왕님의 환생자를 찾았사옵니다.”

“뭐…뭐라고 했느냐? 대법왕의 환생자를 찾았다고 했느냐?”

“예 사숙.”

믿을 수 없다는 듯 만경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게 정말이냐?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송구하오나 말씀해 드릴 수 없사옵니다. 분명한건 궁내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네 이놈. 노납은 포달랍궁 최고의 어른이다. 전 대법왕의 환생자인지 아닌지 나 또한 직접 확인할 의무와 자격이 있다는 얘기니라.”

천장금왕이 허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주소서. 찾으려 하시지 않아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대법왕께서 친히 사숙을 뵈러 갈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 보여줄 수 없단 말이냐?”

“용서하소서.”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만경의 오른손이 반쯤 쳐들려 올려 졌고 소맷자락이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금방이라도 천장금왕을 향해 살수를 펼칠 기세였다. 천장금왕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만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파파파팡!

소맷자락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고 한참을 노려보던 만경이 오른손을 내렸다.

“그럼 소질은 이만.”

천장금왕이 가볍게 허리를 구부리고 천천히 만경을 지나사라졌다.

한동안 분노를 거두지 못하고 석상처럼 서 있던 만경이 천천히 몸을 돌려 사라지는 천장금왕을 노려보았다.

천장을 바라보는 만경의 두 눈에서는 매서운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일목 있느냐?”

휘이이!

한줄기 미풍이 불어오더니 어느새 만경 앞에 한 사내가 우뚝 섰다. 사내의 키는 호리호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내의 눈이 하나뿐이었다. 두 개의 눈 중에서 한쪽을 상실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미간과 코 중간에 주먹 크기로 한 개만 박혀 있었다.

“금왕 이놈이 환생한 대법왕을 찾았다구나.”

파앗!

하나뿐인 사내의 눈이 발광했다.

푸른 녹광이 번개처럼 피어났는데 쇠라도 꿰뚫을 만큼 강렬했다.

“찾아라.”

“……”

“죽여라. 아니 산채로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예 주인.”

“궁 안에 있다고 했으니 샅샅이 뒤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걱정 놓으십시오. 아무리 깊이 감춰 두었다고 해도 한 달이면 찾아낼 자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뒤지겠습니다.”

일목이 나타날 때처럼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만경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건방진 놈들, 절대 묵과하지 못한다.’

만경의 두 눈에서 바늘 같은 한기가 뻗어 나왔다. 꼼짝 않고 분노의 표정으로 서 있던 만경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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