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륵. 검은 차가 지하로 내려갔다. 택시에서 내린 덕이가 주머니를 탈탈 털어 택시비를 지불하고 주차장 쪽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은 낮인데도 텅텅 비어있었다. 빌어먹을. 이러면 숨는 게 어렵잖아. 덕이가 한쪽 기둥에 간신히 몸을 붙이고 나서 그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거리는 멀었지만, 보통 사람보단 잘 듣는 편이었다. 차에서 누가 내리더니 박 대표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트렁크 열리는 소리, 곧이어 발소리가 났다. 덕이가 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다. 어쩐담.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그래도 저를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준 사람인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과 구슬을 사고 난 후에 힘이 생기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된다는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서두르지 않으면 빼앗길걸.]
젠장. 눈을 질끈 감았다. 돈 훔치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게다가 아까 남자 귀신이 그랬지 않은가. 박영신한테 이 돈은 껌값이라고. 집도 여러 개고 침대도 막 내다 버리는 사람이니, 이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곧 눈을 반짝이며 차가 있는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인태와 미자가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예상대로 덕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트렁크에 옮겨진 돈을 털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영신의 전화가 조용한 걸 보면 실패했는지도 모르지. 그 생각을 하며 인태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좀 맹해 보이긴 해도, 담이 작아 보이진 않았는데.
“그래서? 그냥 나가게 뒀다?”
“급하게 화장실을 간다길래 그런 줄만 알았지.”
“젠장.”
영신이 관자놀이를 꾹 누른다. 고분고분하길래 잠깐 기다리겠지 하고 나갔다 온 게 실수였다. 10분 정도 된 것 같았는데 그사이 사라졌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아직 건물에 남아 있는 거 아닐까, 사람을 시켜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근데 걔 뭐야? 일하러 왔다는데.”
“몰라도 돼.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미자가 끼어들었다.
“저번에 말하던 구미호야?”
영신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인태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다른 느낌이 들긴 했지만 구미호라니. 생각도 못 했다. 근데 구미호면 꼬리가 있어야 하지 않나. 혹시 변신한 건가.
“에이, 설마. 구미호치곤 뭐가 좀 엉성하던데.”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선 녀석이 진짜라는 확증이 없다. 이렇게 된 마당에 그나마 믿는 두 사람에겐 털어놓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고민 끝에 김 여사가 제게 의뢰했던 일부터 시작해, 덕이를 만나게 된 일까지 모두 이야기해줬다.
“그냥 배고픈 거지 아닐까?”
인태의 말에 영신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제 욕심에 헛것을 본 건지도. 이젠 정말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미자가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반호이면 그럴 수도 있어.”
“반호?”
“반만 구미호인 거. 전에 왜 광심이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 기억나?”
광심이 할머니는 두 사람이 자주 가는 길에서 만난 노인네였다. 자식이 내다 버려 길에서 얼어 죽었다는데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아는 게 참 많은 양반이었다. 그녀가 두 사람을 붙잡고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았다.
인태는 질색했지만, 미자는 그 얘기를 늘 호기심 있게 듣곤 했었다.
“그 노망난 할망구 말을 믿는 거야?”
인태가 믿을 사람을 믿으라고 핀잔을 주자 미자가 눈을 흘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영신이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얼마 전에 구미호 하나를 만났다고. 엄마가 인간이고 아빠가 구미혼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대. 보통 구미호는 50살이 되면 꼬리 하나가 생기는데 얘는 10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겨우 꼬리 하나가 나왔대. 그것도 제대로 된 꼬리가 아니라지 뭐야. 그래서 무리에서 괴롭힘과 차별을 당하다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고 했어.”
“그게 아까 걔다?”
“추측이야. 머리가 새까맣고 눈동자도 새까만데 피부는 하얗다고 했거든.”
듣고 있던 인태가 대놓고 비웃었다.
“나도 그런 애 하나 알아. 이름이 뭐였더라. 백설공주라던가.”
빈정거리는 인태의 말을 무시하고 미자가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눈이 촉촉하니 젖어서 사람을 홀리게 생겼다고 말했지.”
듣고 있던 인태가 제 눈을 까뒤집어 보였다. 나네, 나. 봐봐, 엄청 촉촉하지. 미자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인태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인태가 눈을 붙들고 억 비명을 질렀다. 미자는 본 척도 안 하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생김새만 듣고 보면 딱 걔잖아?”
영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인태는 찔린 눈을 부여잡고 그 노인네는 노망난 할망구에 불과했다며, 구미호는 얼어 죽을 구미호냐고 말했다. 여태 몇십 년을 인간 세상에서 돌아다녔지만, 구미호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노라고 말이다.
“노망난 할망구라니까.”
“웃기지 마. 네 정신보다 멀쩡하거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영신이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 반호라. 입 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일까. 마침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김 의원이라고 적혀있다. 영신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전화를 귀로 가져갔다.
“예, 의원님. 물건을 잘 받으셨습니까?”
반대편에서 격앙된 노신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자코 듣고 있던 영신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자 지켜보던 인태와 미자가 슬그머니 눈짓을 주고받더니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저런. 어쩌죠.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염려하지 마세요. 그깟 몇 푼이나 된다고요.”
인태와 미자가 영신을 바라봤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굳어있던 그의 얼굴이 차츰 펴지더니 곧 미소를 띠었다. 화를 내고 펄펄 날뛸 줄 알았는데 평온하다 못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
주차장에서 덕이가 까만 가방을 낚아채 도망쳤다. 사과 상자가 더 컸지만 너무 무거워 보여 엄두가 나질 않았기 때문에 가방을 선택했다.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쫓아왔다. 원래부터 달리기는 젬병이라 얼마 가지 못하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나중엔 괴성을 지르며 젖먹던 힘까지 쥐어짰는데 그러다 보니 꼬리가 튀어나왔다. 순간 속도가 빨라졌고, 눈 깜짝할 새 사내들도 따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저를 보며 웅성거렸다. 뭐야, 코스프레 하는 건가, 저거 꼬리 아니야? 사진 찍을까? 재빠르게 골목 안쪽으로 몸을 숨기고 나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밖으로 튀어나온 꼬리는 도통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게 넉 달 전이던가. 오랜만에 보니 무척 반가웠지만, 그래도 지금은 없는 게 도와주는 거였다. 일단은 몸을 숨기고 나서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좁은 쓰레기통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검은 가방을 내려다봤다. 여기 들어 있는 게 다 돈이란 말인가. 무겁긴 오지게 무겁구나. 얼마나 들었을까. 가방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돈이면 구슬을 사는 데 충분하겠지.
덕이가 주머니에서 급하게 전화기를 꺼냈다. 전원을 켜고 우림을 찾아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고 잠시 후 우림이 전화를 받는다. 자다 일어났는지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여보세요?
“나야.”
[…뭐야? 벌써 약속 장소에 나간 거야?]
“그게 아니라, 돈 준비했어. 어디로 가면 돼?”
우림이 조용하다. 혹시나 끊어진 건가 싶어 덕이가 ‘여보세요?’ 하고 불렀더니 곧 그가 정말이냐고 묻는다. 덕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얼마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방을 열어보지 못했으니 그건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우림은 어디서 났느냐고 묻지 않았다. 일단 가방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한 후 덕이가 전화를 끊었다. 목을 쭉 내밀어 밖을 내다봤지만, 이쪽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쭈그려 앉은 채 숨을 고르는 사이 밖으로 튀어나온 꼬리가 스르르 사라진다. 휴우, 생각보다 빨리 들어가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쿠르릉, 쾅. 아까부터 어둑어둑했던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덕이가 가방을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제게 호의를 베풀어 줬던 영신에게는 너무 미안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 구슬을 갖고 요술을 부릴 수 있게 되면 그때 그에게 몇 배로 보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골목 밖으로 나가려는데 후두둑, 후두둑, 장대비가 쏟아진다. 이런.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원망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다시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돈이 젖으면 안 되니까. 그대로 두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데 톡톡, 누군가 어깨를 두드린다.
덕이가 고개를 들다가 흠칫 놀랐다. 검은색 반 팔 티셔츠에 검은색 긴 바지를 입은 사내를 보고 영신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란 걸 알고는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영신과 달리 얼굴이 창백했지만, 인상은 순해 보였다. 짙은 쌍꺼풀에 이목구비가 꽤 또렷했으며 입가엔 사람 좋은 미소를 내걸고 있었다. 그런 그가 우산 하나를 덕이에게 건네줬다.
“이거 써요. 비 맞지 말고.”
덕이가 사내의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훅, 바람이 불고 피 냄새가 진동한다. 눈이 커졌다. 대체 이게 어디서 나는 냄새지. 피도 그냥 피가 아니다. 고약한 피 냄새다. 차마 코를 틀어막을 수 없어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는데 다정하게 웃고 있는 사내가 어서 받으라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덕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괜찮아요.”
“사양하지 말고. 받아요.”
우산을 손에 쥐여주더니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는다. 덕이가 입을 꾹 다물고 그런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가 곧 방향을 틀어 골목 저쪽으로 걸어간다. 저벅저벅. 남자의 등 뒤로 언제 나타났는지 여자 하나가 따라 붙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바닥에서 한 뼘쯤 떠 있는 발을 보고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덕이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가 뒤를 돌아 덕이를 한 번 본다. 하지만 곧 그를 따라 눈앞에서 사라졌다.
쿠쿵. 땅을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들린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덕이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이상한 기분에 남자가 준 우산을 펼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
덕이가 가방을 끌어안고 폐창고 앞에 섰다. 텅텅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끼이이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하나 나왔다. 그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우림이었다. 인사를 하려는데 우림이 먼저 덕이에게 다가오며 두 팔을 벌린다.
“어서 와. 고생했어.”
그의 뱀 같은 눈이 덕이가 안고 있는 가방을 흘깃 봤다가 떨어져 나간다. 덕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밖에선 조용하더니 안에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팔에 그림을 그려 넣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사람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주춤하는 덕이를 우림이 끌고 가더니 의자에 앉게 했다. 거기엔 편의점 앞에서 볼 수 있는 파란색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우리 덕이 고생했어. 뭐 마실 거라도 줄까?”
“마실 건 필요 없고. 약속한 구슬이나 줘.”
그 말에 우림이 생긋 웃었다. 하여튼 급하긴. 일단 물건을 확인해야 할 것 같다는 말에 덕이가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퉁. 묵직한 소리가 났다. 흐음. 우림이 미간을 좁히며 뒤쪽에 있던 사내중 하나를 부른다. 사내가 다가오더니 가방을 살폈다.
“이거 따기 쉬워.”
“그래?”
“잠시만 기다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덕이가 주변을 살폈다. 영가가 꽤 많은 곳이었다. 다들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전에 불이라도 났었던 곳인가. 주변을 살피는데 잠시 후 아, 하는 신음 소리가 들린다.
두리번대던 덕이의 시선이 우림과 그 패거리들에게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테이블에 펼쳐놓은 가방이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덕이 또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돈이 들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다 5만 원권 지폐였다. 덕이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보려는데 우림이 그것을 슥 제 쪽으로 가져간다.
“이 정도면 되겠네. 수고했어, 덕아.”
덕이 손을 거두고 쩝 입맛을 다셨다. 돈을 확인하고 나니 영신이 더 마음에 걸렸다. 중요한 돈이었을까. 일단 구슬만 생기면 저 돈만큼의 대가를 꼭 치러주리라. 그렇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영신은 착한 사람이니 봐줄 거라고도.
“이제 구슬 줘.”
“그래야지. 잠시만 기다려.”
“여기에 없어?”
“바보냐. 그런 귀한 걸 이런 데다 둘 리가 없잖아. 조만간 내 부하가 가져올 거야. 이거나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
우림이 덕이에게 주스를 건넨다. 고기만큼 과일을 좋아하는 덕이였다. 사과 주스라니. 그것을 받아들고 뚜껑을 열었다. 가방을 들고 오면서 목이 퍽 말라있던 상태라 음료를 단숨에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후우, 빈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데 갑자기 명치가 타는 것처럼 뜨겁더니 눈앞이 어질하다. 어어? 왜 이러지? 주변의 모든 사물이 비현실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었더니 눈앞에 우림의 웃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우림아. 나 왜 이렇게… 갑자기 앞이…?”
“내가 늘 말하잖아. 남이 주는 거 함부로 먹지 말라고 말이야. 왜 말을 안 들어. 속상하게.”
큭큭대고 비웃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덕이가 눈을 비비고 크게 뜨려고 했지만, 여전히 시야가 뿌옇다. 불타는 것 같은 명치를 꽉 움켜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등 뒤로 누군가 꾹 밟는 게 느껴졌지만, 말을 할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죽었나?”
“왜? 진짜 여우라도 될까 봐?”
“아니, 아까워서. 죽기 전에 한번 먹어나 볼걸.”
“관둬, 새꺄. 상태 안 좋은 거 먹었다가 너도 같이 병 걸려.”
사내들이 웃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끼이익. 쇠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도 들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덕이가 실같이 가는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거야. 몸이 왜 이래. 속이 너무 뜨거워.
숨이 안 쉬어지는 거 같은데. 제발 누가 나 좀 살려줘. 엄마.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숨이 안 쉬어져. 끼이익- 쿵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코끝으로 온갖 냄새가 다 느껴졌다.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왈왈, 왈왈, 덕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사람 몸만 한 개 한 마리가 덕이를 보며 매섭게 짖어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인 거야. 벌컥 문이 열리면서 웬 남자가 들어온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왼쪽 가슴에 박석현이라고 글자가 보였다. 그가 깨어난 덕이를 보더니 맹렬하게 짖는 개를 진정시켰다.
“몽몽아, 착하지. 그만해, 그만. 손님 힘들어하잖아.”
도무지 진정을 않자 석현이 개를 밖으로 내보냈다. 탁 문이 닫히고 그가 덕이의 앞에 와서 앉았다. 괜찮아요? 정신 돌아왔어요? 그러더니 덕이의 얼굴을 붙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눈을 까뒤집어 보고 아 입을 벌려 보라고 시켰다가 잠시 후 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연락한다.
남자가 통화하는 사이 덕이가 제 얼굴을 만졌다. 실내를 둘러봤다. 대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처음 보는 곳이다. 자신이 누워있던 간이침대 옆으로 개 사료가 보였다. 아까 그놈이 먹다 남긴 것 같았다.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난다. 배고프다. 죽다 살아났는데도 배가 고프다니. 통화하던 남자가 곧 전화를 끊었다.
“근처래요. 다 왔다니까 잠시만 기다려요.”
영문을 모르는 덕이가 물었다.
“누구… 요?”
순간 석현의 뒤쪽으로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정체를 확인한 덕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영신이 못마땅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 돈 가방. 설마 그것 때문에 나를 잡으러 온 건가. 침을 꿀꺽 삼키며 슬그머니 눈을 피하자 석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영신을 바라본다.
“형. 나한테 사람을 맡겨놓고, 어딜 다녀오는 거야.”
“미안. 잠깐 일이 있었어.”
“하여튼, 바쁘다니까. 그리고 사람이 쓰러졌으면 병원엘 가지 동물병원엘 왜 데리고 와. 드디어 미친 거야? 이젠 동물이랑 사람도 구별 못 하는 거냐고.”
석현의 타박에 영신이 귀찮은 얼굴로 그만 나가보라며 손짓을 했다. 한마디 더 하려던 석현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어릴 때는 큰집 형이었던 영신과 꽤 친분이 있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선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저를 먼저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사내를 데리고서.
다른 것도 아니고 사내가 죽을 거 같은지 한번 봐달라는 것이었다. 개도 아니고 동물병원에 사람을 데리고 와서 죽었는지 봐달라니. 다행히 맥박도 혈압도 정상이라고 했더니 잠시만 나갔다 온다고 맡겨두더니 두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하여튼 어릴 때부터 별난 구석이 있어서 곁에 사람을 두는 법이 없더니. 그래도 저한테는 속을 내보이는 편인데 오늘 같은 경우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고 나서 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방 안엔 영신과 덕이 두 사람만이 남게 됐다.
덕이가 땅바닥만 쳐다보며 이불을 양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그런 덕이를 영신이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정적이 흘렀고,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덕이었다.
“미… 미안해.”
“뭐가.”
“네 돈… 내가… 훔쳐갔잖아.”
“괜찮아.”
그 말에 덕이가 고개를 들었다. 영신이 생긋 웃으며 의자를 끌어와 저를 마주 보고 앉는다.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저를 혐오스럽게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러다 문득 인태인지 뭔지 하는 귀신의 말이 떠올랐다. 박영신한테 그 돈은 껌값도 아닐 거라고.
“죗값이야 치르면 되는 거고.”
덕이가 생각을 멈췄다. 어? 하고 묻자 영신이 긴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등을 기댄다.
“뭐 자세한 건 경찰에 가서 말하면 되겠지.”
경찰이란 말에 덕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경찰? 그 반응에 영신이 뭘 그렇게 놀라느냐고 물었다.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경찰에 가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덕이가 입을 벙긋댔다. 우림에게 누누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경찰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무서운지에 대해서. 덕이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으며 영신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봐줘! 내가 돈은 어떻게든 찾아올게.”
그런 덕이를 영신이 같잖다는 얼굴로 내려다봤다.
“2억을? 네가 무슨 수로?”
그 말에 덕이가 입을 쩍 벌린다. 그렇게 많으냐고 묻자 영신이 입가에 조소를 머금는다. 얼만지도 모르고 훔쳤군. 것도 홀랑 다른 놈한테 뺏겼지만. 가방에 GPS가 달린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것일까. 물론 도착했을 땐 부서진 빈 가방과 정신 잃은 이 녀석뿐이었지만.
제발 경찰에게 보내지만 말아 달라고 덕이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거기에 가면 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질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 껍질을 목에 걸고 다니며 으스대겠지. 우림이 사진으로도 보여준 적이 있다. 여우들이 얼마나 혹사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몸을 떨면서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는데 영신이 흐음, 입 안에서 혀를 움직인다.
“좋아. 그렇다면 한번 봐줄게.”
덕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엔 눈물이 그렁했다. 정말이냐고 물으니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짜고짜 영신의 손을 붙들었다. 고마워. 정말 감사해. 탁, 영신이 바로 쳐내더니 옆에 있던 물티슈를 뜯어내 손을 닦는다.
“대신 궁금한 게 있어. 솔직하게 말하면 널 용서할지 말지 생각해볼게.”
“뭔데.”
“거짓말하면 정말 혼나.”
“…말해 봐.”
“너 구미호야?”
구미호란 말에 멈칫한 덕이가 가만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영신이 슬며시 미간을 좁히더니 손을 닦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홱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협상 결렬. 그러더니 몸을 돌리며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잠깐만, 안 돼! 덕이가 영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고개를 들어 ‘실은….’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영신이 고개를 돌려 그런 덕이를 내려다봤다. 가련하게 저를 쳐다보는 얼굴을 보니 입가에 비죽 미소가 생겼다. 죄송하다고, 잘못 걸었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참 침묵이 오갔고 덕이가 결심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나 여우 맞아! 근데….”
“근데?”
“…꼬리가 하나야.”
“뭐?”
“그것도 어쩌다가 나와.”
영신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이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더 해보라고 하자 덕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뒷말을 덧붙인다.
“게다가… 구슬도… 없어.”
그 말에 영신의 미간이 슬그머니 일그러진다. 입 밖으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꼬리가 여덟도 아니고 다섯도 아니고… 하나? 그럼 그냥 여우잖아. 게다가 구슬이 없다니. 젠장. 미자가 떠들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자신의 힘이 모자라 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 없었던 거야. 빌어먹을.
“장난이지?”
“진짠데.”
“에이.”
“진짜야….”
“그럼 혹시… 인간의 피가 섞인 거야?”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덕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바람에 여태 자상하기만 하던 영신의 얼굴이 결국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아. 씨발.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줄래?”
덕이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라고. 그러면서 왜 그 돈을 우림에게 가져다줬는지도 다 털어놨다.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나와 처음 만난 게 그였다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자신이 구슬을 구해주겠다는 말에 남자들과 잤다고. 그리고 돈을 받아 그에게 다시 줬다고 말이다.
듣고 있던 영신의 얼굴에 지독한 혐오감이 깃든다. 덕이가 눈치를 살피며 이제 용서해 줄 거냐고 물었다.
“아니.”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를 보며 덕이가 하얗게 질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영신이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넌 그렇게 당하고도 사람 말을 믿어?”
“네가 먼저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잖아!”
“마음이 바뀌었어. 그만한 값어치가 없는 걸 방금 알아버렸거든.”
덕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영신이 밖으로 나가려 했기에 그의 발을 붙들고 늘어졌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청소나 그런 것도 잘해. 빨래도 그렇고. 시키는 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응?”
“이거 놔라. 난 동물 때리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용서해줘. 한 번만? 응? 제발.”
떼어내려고 발을 빼는데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뭐든 다하겠다고 애걸복걸하는데도 매정하게 떼어내고 나서 문을 열고 나왔다. 하지만 영신은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승복을 입은 자신의 고모가 개를 안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산속에서 떠도는 개나 고양이들 밥을 챙겨 먹였는데, 상처를 입은 녀석들을 데리고 가끔 이곳에 오기도 했다. 그게 하필 오늘이라니.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큰조카를 보고 그녀도 무척이나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곧 그녀의 시선이 영신의 뒤쪽으로 옮겨갔다.
“어쩐 일이세요? 여긴.”
영신이 슬그머니 몸으로 덕이를 가렸다. 하지만 가만있을 덕이가 아니었다. 제 앞으로 오더니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을 한다. 영신이 이를 뿌득 갈며 그런 덕이의 뒷덜미를 잡아채 제 뒤로 밀었다.
잠자코 보고 있던 일월이 영신을 지나쳐 덕이에게로 다가갔다. 유심히 들여다보는 눈빛에 덕이가 몸을 움츠린다. 영신과 같은 기운을 가진 여자다. 하지만 위협이 느껴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덕이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안고 있던 강아지가 매섭게 짖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내려놓고 멀리 떨어져 있던 석현에게 잠시만 안에 들어가 셋이 이야기를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석현이 그러시라고 대답하자마자 그녀가 덕이를 보며 살갑게 웃는다.
“잠깐 들어가서 얘기를 나눌래요?”
덕이가 당황한 얼굴로 영신을 쳐다봤다. 영신이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보다 법력이 센 사람이니 여우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을 것이다. 차라리 아까 경찰에 바로 끌고 가는 건데.
“영신이 너도 들어가자.”
“아니에요. 전 가겠습니다.”
그녀가 영신의 팔을 붙들었다.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구미호가 아니란 게 밝혀졌는데 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붙들린 이상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얼른 따라오라며 잡아끌었기에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곳은 석현이 숙직실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일인용 간이침대가 있었고, 옆에는 노트북과 꽤 많은 책이 있었다.
영신이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끌어내 삐딱하게 앉았다. 죄를 짓고 서 있는 가련한 구미호를 노려보면서 말이다.
덕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영신과 눈이 마주치고 흠칫 몸을 떨었다. 뼈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노려보는 바람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다 이번엔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보기엔 혈연관계인 거 같은데,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구미호네.”
그 말에 영신이 대놓고 비웃었다. 구미호는 무슨. 꼬리도 하나에 구슬도 없다는데.
“전에 말하던 그 아이구나?”
“네. 근데 구미호는 아니에요.”
“아니. 맞아. 지금은 감춰져 있지만, 본래는 아홉 개가 다 있어. 구슬도 있고.”
그 말에 영신이 몸을 바로 세운다.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이냐고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구슬이 워낙 작고 약해 보이지도 않고, 힘도 쓰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꼬리가 더디게 나오는 거라면서.
대체 그게 없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따져 물었다. 얼마나 더디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모르겠단다. 어쩌면 영영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글렀단 소리군.
“구미호란 본래 사람의 정기를 먹고 살았지.”
그 말에 덕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금은… 아니야. 고기랑 야채 먹어. 골고루.”
그 말에 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단다. 예전 구미호들은 인간에 대한 환상으로 인간이 되고 싶어 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은 인간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고. 그 뒤로 자취를 감췄다고 말이다.
듣고 있던 영신이 이야기 다 끝났으면 난 그만 가보겠다고 했다. 곧 경찰이 올 테니 저 녀석을 넘겨주라면서. 그러고 나서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다시 영신의 팔을 붙든다. 영신이 짜증 섞인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만 놔줘요.”
“이 아이가 너한테 간 것도 다 인연인 게야. 그러니 좀 보살펴주도록 해.”
“나라에서 보살펴 줄 거예요. 콩밥으로. 돈을 훔쳤으니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죠. 혹시 또 모르지. 사람이랑 다르다고 어디 연구실 같은데 끌고 가서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내 해부를 할지. 그때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저 녀석 배 속에 구슬이 있는지 말이야.”
짝. 영신의 뺨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고모가 놀라 덕이를 쳐다봤다. 여태 잘못했다고 빌던 덕이가 영신의 뺨을 냅다 후려친 것이다. 저도 당황했는지 때린 손과 영신의 뺨을 번갈아 보며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영신이 맞은 뺨을 붙들고 덕이를 죽일 듯한 기세로 노려봤다.
“너!”
“미, 미안해. 진짜 미안. 네가 갑자기 무서운 소릴 하니까,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헉!”
영신이 덕이의 멱살을 낚아챘다. 이 새끼가 정말. 이를 빠득 갈고 덕이를 벽에다 밀치는데 순간 살기를 느낀 덕이의 등 뒤로 꼬리가 살랑 솟아오른다. 영신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 꼬리가 영신의 뺨을 슥 간지럽힌다. 덕이가 당황해서 제 꼬리를 어떻게든 감추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뒤에 있던 영신의 고모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쁜 꼬리를 가졌구나.”
“진짜 미안. 왜 튀어나왔지. 아 얘가 왜 안 들어가.”
덕이가 울상을 지으며 꼬리를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고,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덕이의 멱살을 놓아줬다. 살랑, 살랑, 강아지풀처럼 생긴 흰 꼬리가 눈앞에서 움직였다. 진짜 여우가 맞긴 했구나. 그때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올라온다. 돌아봤더니 고모가 영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싫다면 내가 절로 데리고 가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덕이가 눈을 반짝였다. 차라리 그러겠다고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었다. 영신은 그 꼬리를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김 여사의 말을 떠올렸다. 십억의 다섯 배라고 했나. 오십억. 그것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사업을 할 수 있게 밀어준다고 했지. 그만큼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럼 내가 데려가도 될까?”
여전히 덕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영신이 입을 열지 않았다. 오십억. 오십억이라. 아니다. 이 도둑 여우가 2억을 홀랑 날려 먹었으니 52억을 받아내리라.
“고모, 혹시 말이에요.”
“응?”
“이 녀석 몸에 강한 정기를 주입하면 그게 꼬리를 나오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법력이 강한 인간의 정기를 받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는 힘들 거라고 했다. 그 정도의 강한 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고 말이다. 그 말에 영신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일단 빚 받을 것도 있고 하니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했다.
“영신아.”
“알아요. 못살게 안 굴어.”
“믿으마.”
“고모도 알잖아요.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동물을 좋아했는지.”
영신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덕이가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다. 아무래도 승려를 따라 절로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지만, 영신에게 빚진 게 있으니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등 뒤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는데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덕이가 차장 밖을 내다봤다. 마음이 안정되니 꼬리가 들어갔다. 전엔 잘 나오지도 않더니 갑자기 왜 시도때도없이 튀어나와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저 멀리 산 너머로 해가 피를 토하며 사라지는 중이었다. 온통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예뻤다. 그걸 보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돈은 빼앗기고, 구슬도 사라지고. 하아. 콧등이 시큰댄다. 훌쩍, 손으로 코를 한 번 문지르고 나서 자세를 바르게 했다.
고개를 돌렸더니 영신은 운전대를 잡은 채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다. 너무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대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고마워. 용서해줘서.”
“감사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돈 갚을 때까지 열심히 일할게. 뭐든 시켜만 줘.”
“당연히 그래야지.”
덕이가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꼬르륵. 배에서 우레같은 소리가 난다. 계속 굶었더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아깐 경찰에 끌려갈까 봐 무서워 모르겠더니 긴장이 어느 정도 풀어지니 뱃속이 다시 난리였다. 또 꼬르륵 소리가 나길래 영신을 쳐다봤다. 배고프다고 말하면 뒤지게 욕먹겠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영신이 먼저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응.”
“좋아. 그럼 밥을 먹으러 가자. 나도 허기지니까.”
그리고 또…. 더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어떻게든 몸을 튼튼하게 하면 꼬리가 나오긴 하겠지. 꼬리가 없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 일단은 믿어 보기로 했다. 아까 고모가 말하던 인간의 정기라는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영신이 덕이를 데리고 간 곳은 식당이 아니라 집이었다. 며칠 전 온 곳인데도 마치 제집으로 돌아온 양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일단 씻으라고 하길래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으며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림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눈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그래도 난 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인간 세상으로 나와 믿고 의지한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서서 울다 밖으로 나오니 영신이 문 앞에 두고 간 옷이 있었다. 물기를 닦고 그걸로 갈아 있었다. 바지 밑단이 길어 한 번 접은 상태로 거실로 나왔다.
영신은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는 중이었다. 욕실에서 한바탕 울고 나왔더니 요동치던 식욕도 사라졌다. 밥을 먹지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새벽에 깨는 것보다 억지로 허기를 채우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밥이 다 차려졌다고 영신이 불렀고 주방으로 간 덕이는 할 말을 잃었다. 거기엔 밥이나 반찬 대신 그릇 위에 시뻘건 생간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덕이가 슬그머니 인상을 찌푸리자 영신이 젓가락을 건네준다.
“자, 먹어.”
“…뭐야, 이게?”
“소 생간.”
일그러진 덕이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익혀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더니 그건 안 된다고 했다. 그제야 영신이 왜 흔쾌히 밥을 먹여준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구미호가 인간의 간을 주로 먹는다는 이야기 때문에 그런 건가. 그게 언제 적인데. 호국에 가서 그런 얘기를 했다간 야만인 취급을 당할 것이다.
“이런 걸 먹는다고… 꼬리가 생기진 않아.”
“그래도 먹어. 혹시 알아? 매일 먹으면 생길지.”
“…싫어.”
“왜.”
“날 거 먹으면 뱃속에 기생충 생긴다고 그랬어….”
영신이 인상을 찡그렸다. 전에 굿당에선 날고기를 잘만 뜯어 처먹더니. 그 정도로 배가 고프지 않다 이건가. 확 굶겨 버릴까 생각했지만, 고모의 말이 생각나 일단은 참기로 했다. 건강해야 꼬리도 나오고 구슬도 생기고 할 것 아닌가. 인내력을 발휘해 녀석을 살살 달래었다.
“일단은 먹어봐. 그렇게 이상하지 않아.”
그러더니 자신이 먼저 한 점을 입에 넣는다. 우물우물. 곧 목울대가 움직였다. 꿀꺽. 곧 혀를 내밀어 입가에 묻은 피를 핥더니 야릇하게 웃었다.
“이것 봐. 어때? 맛있어 보이지?”
그 매혹적인 모습에 덕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어. 네 입술 맛있어 보여.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바보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영신이 접시를 이쪽으로 민다. 그럼 먹어. 덕이가 한숨을 내쉬고 잘린 생간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양념이라도 좀 달라고 했더니 곧 소금이 앞에 놓인다. 그 위에 참기름도 뿌려줬다. 간을 거기에 살짝 찍은 후 입에 넣고 우물댔다. 씹히는 맛이 거의 없다. 물컹한 게 젤리 같기도 하고. 식감이 이상하다.
“많이 먹어.”
“…맛이… 별로야.”
“주는 대로 먹어. 네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진 아니잖아?”
“…속이… 울렁거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야? 그거라고 생각하고 먹어.”
“내가 좋아하는 건 배랑 오인데. 달콤한 돌배랑 아삭아삭한 오이.”
“그럼 그거라고 생각하든가.”
“하지만 맛이, 우욱.”
덕이가 입을 틀어막았다.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으려니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동시에 영신의 눈매도 사납게 올라간다. 덕이가 입을 틀어막은 채로 영신의 눈치를 살폈다. 다시 턱을 움직이며 어떻게든 먹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입을 틀어막고 거실에 딸린 욕실 쪽으로 뛰어갔다. 우엑, 구역질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산 사람 생간도 파먹는 게 구미호 아니던가. 무슨 놈의 구미호가 저렇게 비위가 약해. 영신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탁 내려놓으며 욕을 씹어 뱉었다. 젠장. 빌어먹을!
욕실에서 나오는 덕이는 얼굴이 퀭했다. 벌써 몇 번째 화장실을 들락였는지 모른다. 먹은 게 없으니 헛구역질만 했고, 나중엔 입 안에서 생간 냄새가 나는 거 같다며 잇몸에서 피가 날 때까지 양치질했다.
지켜보고 있던 영신이 신문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꼬리가 나오기는커녕 덕이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핼쑥해져 있던 꼬리마저 사라질 기세였다.
덕이가 눈치를 살피며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영신이 잠깐 와서 앉으라고 눈짓을 했기에 마지못해 소파 한쪽 끝에 어깨를 움츠리고 앉았다. 벽에 걸린 커다란 티브이에선 뉴스가 한창이었다.
“너 말고 다른 녀석은 없어?”
“뭐가?”
“호국에서 같이 넘어온 녀석이나, 아니면 네가 이곳에서 알게 된 구미호 없느냐고.”
“…응.”
“하나도?”
“응. 하나도.”
하아. 영신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냥 버릴 걸 그랬나. 이러면 아무 쓸모가 없잖아.
“…근데 왜 구미호가 필요한 거야?”
“몰라도 돼.”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내가 진짜 구미호가 되면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 줄게.”
“아휴, 감사해라.”
“진심이야….”
“됐으니까 그만 떠들고 들어가.”
응. 일어서던 덕이가 티브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낯익은 장소가 보여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낮 한 주택가에서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재개발로 인해 빈집이 많은 곳으로, 여성은 이곳과 3킬로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사는 유 모 씨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타살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올해 들어….]
“뭐 해? 안 들어가고.”
덕이가 티브이 화면을 유심히 바라봤다. 어디서 봤더라. 순간 머릿속에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자신이 비를 피하던 그곳이다. 이상한 남자에게 우산을 건네받았던 그 장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산을 폐창고에 두고 왔네.
“나 저기 알아.”
영신이 신문에서 눈을 떼고 뉴스를 흘깃 한 번 쳐다본다. 그래? 별 관심 없는 듯한 말투에 덕이가 그만 자러 가보겠다며 침실 쪽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와 문을 닫으니 거실의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그대로 침대에 풀썩 누워서는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하아. 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눈을 깜박였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국과 지옥을 오간 하루였다.
아침까지는 구슬이 생길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이젠 빚쟁이에게 붙들려 언제 나올지도 모를 꼬리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구나. 그나저나 우림을 어디 가서 찾는담. 찾는다고 해도 구슬이 정말 있을까.
하아.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깜빡깜빡 눈앞의 천장이 점점 흐려진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복잡한데도 눈꺼풀은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
텅, 텅,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귀신이 창밖에서 머리를 찧으며 뭐라고 말을 했다. 오디오에선 경쾌한 선율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톡, 톡, 영신이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 박자에 리듬을 맞췄다. 텅, 톡, 텅, 톡 여자 귀신이 머리를 찧던 행동을 멈추고 영신을 빤히 쳐다본다. 영신이 옆에 있던 와인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쳐다보지 마라. 정들겠다.”
텅텅 머리를 더 빠르게 찧으며 뭐라고 중얼중얼 떠든다. 영신이 리모컨을 들어 음악을 끄고 창가로 파란 불꽃을 날렸다. 퍽, 불꽃에 맞은 여자 귀신이 그대로 사라졌다. 탁,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그만 방으로 가려는데 덕이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끙끙,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더니 덕이는 자는 중이었다. 이불을 턱 아래까지 꽁꽁 싸매고 누워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앓는 소리를 내는 거 보니 몸이 좋질 않아 보였다.
하여튼 사람 성가시게. 못 본 척 돌아나가려던 영신이 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하는 짓을 보면 저대로 죽게 내버려둬도 상관없지만, 녀석에게 받을 빚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고모 말대로 꼬리를 감추고 있는 여우라면, 그것을 꺼낼 방법만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친절하게 대해주는 거야. 그래야 녀석을 이용하기도 쉬울 테니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침대에 앉으니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올려 뜬다.
“…영신아.”
“어디 아파?”
“응. 몸살 난 거 같아.”
그 말에 영신이 속으로 비웃었다. 여우 주제에 편식하질 않나, 몸살까지 걸리다니. 지가 사람인 줄 아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마를 짚었더니 미열이 느껴진다. 해열제를 먹일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대로 쉬면 나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나서 손을 떼려는데 덕이가 그 손을 잡아채 제 이마에 다시 가져다 댄다.
“이렇게… 잠깐만 있어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이 손에 느껴져 영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씻고 싶다. 닦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덕이가 그 손을 이젠 아래로 가져가 제 뺨에 댄다. 시원하다. 진짜 시원해. 하고 웅얼거리면서 등도 만져달라면서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엎드린다.
영신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 하자는 거야?
“…얼른.”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등을 만져달라고 조르는 통에 영신이 대충 손을 가져다 댔다. 어차피 옷을 입고 있어서 살이 닿는 것도 아니니 어려울 건 없었다. 뒤척이느라 한 뼘쯤 말려 올라간 셔츠 때문에 속살이 보이긴 했지만, 딱히 그걸 내려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나 시간을 확인하는데 쌕쌕 숨소리가 들린다. 봤더니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뭐야, 곧 죽을 것처럼 끙끙거리더니. 꾀병이었어? 확 때려줄까 보다. 곧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엎드려 잠든 녀석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온다. 도톰하고 빨간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고, 콧대며 턱선이며 어느 곳 하나 모난 곳이 없었다. 여기저기 드러난 피부 또한 하얗고 매끈했다. 보고 있으니 녀석이 어떻게 사내들을 상대로 몸을 팔았는지 조금은 납득이 됐다.
한편으론 그 남자들과 잤는데도 꼬리가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 정도로는 택도 없단 소린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감겼던 덕이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법력이 강한 인간의 정기를 받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승려가 했던 그 말을 골똘히 떠올리면서 눈꺼풀을 떴다가 감았다 했다. 강한 정기라. 강한 정기. 검은색 눈동자가 잠시 반짝하다가 그대로 눈꺼풀 사이로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
인태와 미자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침부터 문이 열리기에 영신이가 싶었는데, 덕이가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박영신 돈을 훔쳤는데도 살아있다니. 놀랄 일이야.”
인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덕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젠 무척이나 신나 보였는데 지금은 어깨가 축 늘어진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영신에게 잡혀 온 걸 보니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했나 보다. 한심하긴.
잠자코 있던 덕이가 소파로 가서는 축 늘어진 빨래처럼 널브러졌다. 밤새 앓고 났더니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상태였다. 어제는 제 처지가 실감이 안 났는데 정신이 들수록 무력감이 몰려왔다. 믿었던 우림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돈은 돈대로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2억이라. 다 갚으려면 정말 뼈 빠지게 일해도 모자라겠군.
영신은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라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인태와 미자가 알려줄 테니 가서 배우라고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사무실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래 봐야 옆집이지만. 대체 귀신들에게 배울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근데….”
“응?”
“너희는 무슨 일 해?”
그 말에 인태가 잠시 생각하더니 여러 가지 일들을 한다고 대답해줬다. 주로 하는 일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덕이는 의문이 들었다. 저야 반은 사람이니 그렇다 치지만 귀신들이 돈을 받아 뭐에 쓰는지 말이다.
“돈을 받아서 어디다 쓰는데?”
“직접 쓰는 건 아니야. 난 가족들에게 보내. 아직 살아있는 내 가족들 말이야.”
인태의 말에 덕이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정말이냐고. 그 말에 인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에겐 남겨진 부모님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죽을 당시만 해도 정정 하셨던 분들인데 지금은 그 상처로 많이 쇠약해졌다고. 그래서 일을 통해 번 돈을 그분들에게 보낸다고. 물론 보내는 건 영신이 하고 있다고. 그 말에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너는? 너도 가족이 있어?”
곁에 있던 미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럼?”
인태가 불쑥 끼어들었다.
“얜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든. 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도 전혀 기억을 못 해. 그러니 당연히 가족도 기억을 못 할 수밖에.”
아. 덕이가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보자 미자가 애써 웃는다. 그럼 이름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처음 정신을 차린 곳이 미자 식당이었단다. 딱히 지을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미자라고 했다고.
혹시나 그 집과 연관이 있을까 싶어 살펴봤지만, 그건 아니었단다. 그래서 미자는 영신이 따로 적금을 들어준다고 했다. 나중에 혹시 기억이 나면 그 돈을 제 가족에게 보낼 생각이라면서.
귀신들의 세상도 인간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구나. 그러다 돈 떼먹고 도망간 우림이 생각났다. 영신도 그러지 않을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저라고 우림에게 배신당할 줄 알았나.
“…영신이가 돈을 떼어먹진 않을까?”
“설마. 내가 확인해봤는데, 여태까진 잘 보내주고 있었어. 걔가 성격이 더럽긴 하지만 죽은 놈 돈까지 떼어먹을 정도로 쓰레긴 아니야. 그렇지, 미자야?”
“그건 동감.”
덕이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돈만 갚으면 풀어주겠구나. 그럴수록 구슬을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사라졌다. 돈을 열심히 벌어 빚을 갚고 나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어차피 여기나 거기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진 것 같으니 말이다.
“근데 너 반호라며?”
덕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인태가 정말이냐고 다시 한 번 물었기에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인간의 피도 흐르는 거야?”
“…응.”
“어쩐지 냄새가 독특하더라.”
“…….”
“그럼 진짜 소문대로 구슬이 없어?”
덕이가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꼬리도 하나고?”
“…응.”
“에이, 그게 무슨 구미호야. 그냥 여우지. 안 그래?”
잠자코 있던 덕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어렸을 때부터 당한 설움과 요 며칠 고생한 게 떠올라 제 처지가 처량 맞게 느껴졌다. 툭, 뺨으로 눈물이 떨어지기에 급하게 손등으로 닦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미자가 그만하라며 인태를 툭 친다.
“왜 애를 울려.”
“울리긴 누가. 그냥 물은 거지. 그리고 인마. 넌 사내 녀석이 별거 아닌 걸로 울고 지랄이냐. 무슨 구미호가 이래?”
덕이가 코를 훌쩍이며 인태를 향해 눈을 흘겼다. 어제부터 느낀 건데 말을 참 얄밉게 하는 귀신이다. 미자가 다가와 울지 말라며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울지 마. 저 새끼 말은 신경 쓸 것 없어.
둘을 지켜보던 인태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달래줄 걸 달래주라면서. 도둑질한 여우 새끼 뭐가 예쁘다고 감싸느냐고 말이다. 덕이가 더 사납게 노려보자 인태가 인상을 팍 쓰더니 한 대 칠 기세로 다가왔다.
“이 자식, 위아래도 없네? 어디서 눈을 흘겨? 너 몇 살이야, 인마!”
“여든아홉.”
“…….”
인태가 멈칫하더니 그러냐며 오래 산다고 다 철드는 건 아니라고, 말을 돌렸다. 슬며시 딴청을 피우는 그를 보며 미자가 눈을 흘기고 나서 덕이를 달래주었다. 훌쩍이던 덕이도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있었다.
“박 대표는 또 어디 가?”
창밖을 내다보던 인태가 혼잣말을 중얼댔다. 영신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 쪽으로 진입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덕이와 미자도 어느새 그 옆으로 다가가서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차가 멀어지는 걸 보고 덕이가 입을 열었다.
“영신이는… 가족 없어?”
전부터 궁금하던 거였다. 병원에서 봤던 사람이 고모라고 했나. 그럼 가족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전혀 왕래하는 흔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말에 인태가 대놓고 웃음을 터트린다.
“쟤한텐 돈이 부모고 형제일걸.”
그 말에 덕이가 설마 하는 얼굴을 했다. 아무리 돈이 좋기로서니 가족보다 좋을까 하고. 저도 가족에게 사랑받고 자란 건 아니지만, 돈과 가족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가족을 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구슬을 갖고 싶은 이유 중 하나도 가족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떳떳한 일원이 되고 싶어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미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가족이 없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무슨 사연 때문인지 지금은 거의 왕래를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모친은 한 번씩 오긴 했지만, 그것도 영신이 없을 때 다녀가곤 했다. 여느 엄마들처럼 반찬을 해 들고 찾아온다고.
보기엔 영신을 무척이나 아끼는 것 같았다고 하자 인태가 엄마가 아니라 나이 든 여자친구 아니냐고 빈정거렸고, 곧바로 미자가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 새끼. 넌 사상이 글러 먹었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두고 덕이는 좀처럼 창가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영신의 차는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지만, 햇볕이 너무 따뜻해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차들과 녹색으로 반짝이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니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 놓고 읽던 영신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책장을 덮었다. 종일 처박혀서 도움이 될 만한 걸 알아내려 했지만 별다른 걸 찾아내지 못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커피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강한 햇볕에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저 멀리서 이쪽을 보고 있던 여학생 둘이 다가온다. 우물쭈물 서로 등을 떠밀더니 긴 머리를 늘어트린 여학생 하나가 먼저 말을 건다.
“저, 저기요.”
영신이 멈춰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혹시 전에 케이블 티브이에 나오셨던 분 아니세요? 퇴마 하시는….”
그녀가 말끝을 흐렸고 영신이 인상을 슬그머니 구겼다. 지인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고 사정을 하는 바람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꽤 오래된 것인데도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그때 무슨 흉가 가서 귀신 쫓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맞으시죠?”
아니라고 해봤자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저처럼 생긴 퇴마사가 흔한 것도 아니고. 미래의 고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고 접대용 미소를 만들었다.
“네. 맞아요.”
여자는 엄청 팬이었다고 직접 보니 더 잘생기신 거 같다고 말했고, 영신이 그러냐며 생긋 웃어줬다.
“그런 이야기 많이 듣습니다.”
“어쩜! 유머 감각도 있으시네요.”
입을 가리고 웃던 여자가 다이어리를 꺼내 사인을 부탁했다. 그녀가 펜을 꺼내 건네주는데 보니 위에 작은 여우 인형이 달려있다. 꼬리가 아홉 개다. 누군가 생각나서 기분이 슬쩍 나빠진다. 아침부터 팔자에도 없는 도서관에 틀어박히게 만든 그 누구 말이다.
“구미호?”
“아, 이거요.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나인테일이에요.”
“그래요?”
“네. 조금씩 진화해서 이렇게 된 거예요. 귀엽죠?”
그러면서 신나서 설명을 늘어놓는다. 대충 그러느냐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골칫덩이도 이 인형처럼 진화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모는 녀석에게 숨겨진 꼬리가 있다고 했지만 그건 확실치 않았다. 여학생에게 다이어리를 건네주니 그녀가 볼펜에 달린 인형을 떼어서 영신에게 준다. 영신이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선물이에요. 제가 아끼는 건데 드리고 싶어서요.”
영신이 됐다고 하는데도 손에 쥐여주고는 감사하다며 저쪽으로 후다닥 뛰어간다. 영신이 슬쩍 미간을 구기고 손바닥 위에 놓인 인형을 바라봤다. 버릴까 하다 관두고는 주머니에 넣고 그대로 카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크르응. 인태가 이빨을 드러내며 눈을 희번덕였다. 양손을 할퀴는 것처럼 세우고는 짐승 소리를 내며 눈을 허옇게 까뒤집었다.
덕이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간이, 아니 귀신이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감탄하며 쳐다봤다.
“어때, 잘 봤어?”
인태가 어깨를 으쓱이며 덕이에게 물었다. 따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덕이가 눈을 깜박인다. 왜 따라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까… 인간들을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이게 그거야.”
“겁주는 거 같은데?”
“누군가에겐 겁을 주는 거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걸로 인한 이득이 생기거든.”
“어떤 이득?”
“것까진 네가 알 거 없고,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자, 한번 해봐.”
덕이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잘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입을 벌리고 양손을 할퀴듯이 세운 다음 아아앙- 소리를 냈다. 옆에 있던 미자가 입을 가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세상에, 존나 귀엽다.
반면 지켜보던 인태는 울컥했다. 아침부터 여태까지 온갖 것을 다 시켜보는데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결국 관절을 마구 꺾으며 이런 거라도 해보라고 했더니 오징어처럼 흐물거리는 바람에 미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인태는 점점 울화가 치밀었다.
“아이, 시발! 더럽게 못하네, 진짜.”
“…….”
“안 되겠다. 넌 차라리 몸이나 파는 게 낫겠다.”
그 말에 미자가 인태를 노려봤다. 애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면서. 물론 인태는 이번에도 코웃음을 쳤다. 여든아홉 처먹은 애새끼 봤느냐고. 두 귀신이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덕이는 문득 궁금해졌다. 몸 파는 거야 제가 해오던 거니 어렵지 않은데, 과연 어떤 식으로 파는지 말이다.
“고객 중에 간혹 귀접을 원하는 인간들이 있거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고 말이야. 근데 넌 구미호잖아. 물론 꼬리는 하나지만. 아무래도 귀신보단 희소성이 있으니 홍보만 잘하면 찾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덕이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구슬 살 돈을 모으느라 남자들과 자긴 했지만 아프기만 하고 전혀 좋은 걸 느끼지 못했다. 나중엔 요령이 생겨 자기 전에 돈을 가지고 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건 싫다고 했더니 그럼 무슨 수로 영신의 돈을 갚을 거냐고 묻는다. 덕이가 다시 고민했다. 딱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자신이 잘하는 게 뭐가 있더라.
“청소라도 할까?”
“청소해서 그걸 어느 세월에 갚아. 차라리 구슬이라도 갖고 있든가. 그럼 쓸모라도 있을 텐데.”
“말했잖아…. 사기당했다고.”
“자랑이냐, 등신아.”
덕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등신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더니 인태가 그럼 빙신이냐고 받아친다. 귀신과 여우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미자가 그만하라고 빽 소리를 질렀다. 정신없어 죽겠다면서 말이다.
“그러지 말고 영신이 오기 전에 뭐라도 가르쳐 놔.”
“가르치긴 뭘 가르쳐.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그럼 그냥 데려가 보자. 하다 보면 늘겠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미자가 용기를 북돋았지만 덕이는 점점 시무룩해졌다. 가뜩이나 사기를 당해 기가 죽어 있는데 일까지 못한다고 구박을 받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얼른 일해서 돈을 갚아야 하는데, 잘하는 게 정말 하나도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시간은 저녁이 되어있었다.
***
씻고 나와 밥상을 쳐다보는 덕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간이다. 또 생간이야. 고개를 들어 보니 영신이 신문을 펼쳐 들고서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가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영신아. 나….”
“먹어, 얼른.”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려.”
“먹다 보면 익숙해져.”
오만상을 찌푸리던 덕이가 젓가락을 들었다. 마지못해 하나 집어 입에 넣으려고 하자 헛구역질이 먼저 올라왔다. 그 모습에 영신이 혀를 쯧 찼다. 저렇게 비위가 약해서야.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냥 구워 먹겠다고 했지만, 영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한테 왜 이걸 자꾸 먹이는 거야?”
“꼬리 갖고 싶다며. 혹시 알아? 그거라도 먹으면 생길지.”
“몇 번을 말해. 소용없다니까. 스님 말대로 인간의 정기라면 또 모를까.”
그 말에 영신이 들고 있던 신문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덕이가 젓가락으로 집었던 간을 다시 내려놓고 나서 영신을 빤히 쳐다봤다. 두 사람 사이에 시선이 오가다 덕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예전에 어떤 여우가 살았는데 나처럼 반호였대.”
“근데?”
“어느 날 법력 강한 스님을 만나서 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꼬리가 아홉 개로 늘어났다는 거야.”
“그래서?”
덕이가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며칠 전 승려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요력이 없는 자신이 느끼기에도 영신의 힘은 보통 인간의 힘을 뛰어넘었다. 그런 이와 관계를 맺고 정기를 빨아들이면 혹시 구슬이 생기진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됐다.
“넌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필요하다며… 혹시 알아? 네 정기를 나한테 나눠주면 내가 꼬리가 아홉 개로 늘어날지.”
그 말에 영신이 비릿하게 웃는다. 이 곰 같은 여우가 머리를 굴리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내 정기를 빼앗아 꼬리를 아홉 개로 늘리겠다? 그래서 어젯밤에 물기 어린 눈으로 저를 쳐다본 건가, 생각하니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럴 마음 없어.”
“왜에.”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야.”
“이렇게 간 먹이는 것보단 효과가 나을지도 모르지.”
“글쎄. 네가 예쁜 구미호면 생각해봤겠지. 하지만 넌….”
“난?”
“사내잖아.”
“왜 이래! 나도 구멍은 있어!”
“어쩌지? 난 네 구멍 따위엔 관심 없는데. 것도 이놈 저놈 다 맛본 건 더더욱.”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한 번 더 설득하려는데 영신이 신문을 촥 펼쳐 들더니 완전히 얼굴을 가려버린다. 입을 떼려다 그만 꾹 다물고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간을 빼놓고 나머지 것들을 집어 먹으려는데 영신이 편식하지 말라고 한마디 한다. 보이지도 않는데 어찌 아는 건지 기가 막혔다. 배가 고프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텅텅, 엊그제 본 여자 귀신이 또 유리에 제 머리를 찧어댄다.
덕이가 그것을 바라보며 물을 들이켰다.
“…쟤 또 왔어.”
“놔둬.”
“들어오진 못해?”
“응.”
덕이가 유심히 그쪽을 쳐다봤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혼령은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 같아 눈을 가늘게 늘이고 그 입 모양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별다른 수가 없었다.
“…서…려…”
영신이 신문 너머로 덕이를 흘깃 봤다. 덕이는 물컵을 든 채로 여자의 입 모양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먼 거리에서 그게 보이는 게 더 신기했지만, 여우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서워… 살…줘? 살려달라는 건가?”
툭, 영신이 신문을 식탁 위에 접어 던지더니 그대로 일어선다. 다 먹었으면 치우고 자라고 하더니 몸을 돌려 제 방 쪽으로 간다. 곧 파란 불꽃이 그대로 날아가 귀신을 또 날려버린다. 덕이가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너무해.”
“뭐가.”
“도움이 필요한 거 같았단 말이야.”
“난 귀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야. 쫓는 사람이지.”
그렇다고 쫓지도 않으면서. 돈벌이로 이용하면서.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삼켰다. 어쨌든 돈까지 날려 먹고 얹혀 있는데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영신이 사라지진 후 덕이는 반찬을 정리하고 그릇을 대충 치웠다.
뽀득뽀득 소리 나게 설거지를 깨끗하게 한 다음 물기를 완전히 닦았다. 손을 탁탁 털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 나서 영신이 있는 방 쪽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영신은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글자 읽는 거 정말 좋아하는구나. 옆으로 다가가서는 침대에 살포시 엉덩이를 걸쳤다.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어?”
슬며시 몸을 그쪽으로 밀착하고 기울이는데 영신이 이마를 손으로 밀어낸다. 걷어차기 전에 내려가. 내 침대에 함부로 올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덕이가 입술을 삐죽이고는 마지못해 내려왔다.
손님 방보다 두 배는 큰 영신의 방은 썰렁하리만치 가구가 없었다. 안락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러다 문득 덕이의 눈에 뭔가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인형이었다.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 그것을 주워들고 보는데 영신이 책에서 눈을 떼고 이쪽을 쳐다본다.
“갖고 싶으면 가져.”
덕이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가져도 되는 거냐고, 날 위해 산 거냐고 물었더니 개소리하지 말라며 딱 자른다. 덕이가 눈썹을 축 아래로 늘어트리고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넌 좋겠다. 꼬리도 아홉 개라.
부러움을 가득 담은 얼굴로 제 엉덩이 위쪽을 더듬었다. 나도 여기 아홉 개 꼬리가 달려 있으면 좋으련만. 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는 그 인형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고마워.”
영신에게 말했지만 그는 책에 빠진 건지 아니면 개무시 하는 건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선 잘 자라고 인사를 한 후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탁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된 영신이 책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법력이 강한 인간의 정기를 받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스읍. 입술을 말아 깨물며 잠시 생각하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도 아니고 여우랑 그 짓을 하다니. 그건 수간이랑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저는 인간의 존엄성은 지키고 싶다. 내려놓았던 책을 들고 다시 읽기 시작했지만, 복잡한 마음 때문인지 글자들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
덕이가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 좌우로 움직였다. 손에 든 인형을 높이 치켜들었다.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였다. 너는 어디서 왔어. 나는 호국에서 왔는데. 미친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인형의 꼬리를 가만히 만졌다. 좋겠다, 넌. 꼬리가 아홉 개라.
서글픈 얼굴로 그것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구슬이 있어야 꼬리가 나올 텐데. 어떻게든 꼬드겨 정기를 좀 흡수해볼까 했는데. 아까 영신의 태도를 보면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확 박영신을 잡아먹어 버릴까. 그럼 그 힘을 얻지 않으려나.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안 될 일이야. 사람을 해쳐선 안 돼. 게다가 상대는 너무 세잖아. 덤비기도 전에 사망일걸.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한숨만 쉬었다.
며칠간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더듬다가 우림이 스치듯 한 말이 떠올랐다. 친척이 부산 어디에서 가게를 한다고 했다. 조만간 그곳으로 낚시하러 갈 거라고. 회도 실컷 먹고 올 거라면서 말이다.
횟집 이름이 뭐였더라. 용왕…? 뭐였는데. 아무리 떠올려 봐도 모르겠다. 손으로 머리를 팍팍 쳤더니 그제야 생각난다. 아! 용궁횟집! 거기에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를 꺼내 우림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역시나 받질 않는다. 그럼 그렇지. 작정하고 튄 놈이 전화를 받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잡히기만 해봐라. 머리통을 떼서 엉덩이에 붙여 버릴 테니까. 개자식. 이를 까득 물며 휴대전화를 다시 꺼버렸다.
우선 돈을 찾아 박영신에게 돌려주는 거다. 그러고 나서 정기 좀 나눠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지금은 돈 때문에 더 화가 나서 안 해주는 걸지도 모르니까, 일단 돈을 찾아주자.
그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슬그머니 나왔다. 영신의 방 쪽 불이 꺼져 있는 게 보였다. 살금살금 걸어서 현관 앞으로 갔다. 운동화를 신고 문을 당겼는데 잠겨있다. 뭐야. 이거 어떻게 여는 거였더라.
이것저것 버튼을 누르니 잠시 후 띠리릭,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아 깜짝이야. 얼른 뒤를 돌아봤다가 꽥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언제 나왔는지 박영신이 뒤에 서서 팔짱을 끼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밤중에 어디 가?”
“…쉬… 하러.”
하아. 씨발. 영신이 한숨과 욕을 동시에 내뱉었기에 덕이는 움찔 몸을 떨었다. 들어오라고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이자 덕이가 신발을 벗고 그대로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화장실이… 안에도 있는 걸 깜박했네.”
능청스럽게 하하 웃는데 영신이 살벌하게 노려보는 바람에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인간인데 왜 귀신보다 더 무서울까. 차라리 귀신이 낫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거실에 딸린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은 피하고 볼 생각으로.
아! 순간 몸이 뒤로 확 딸려갔다. 영신이 덕이의 손을 낚아채 잡아당긴 것이다. 어머, 이 박력 좀 보소. 그러더니 덕이를 이끌어 제 침실 쪽으로 향한다. 인간 세상에 반년 정도 있으면서 영화라는 걸 좀 봤는데 이런 장면이 나오면 다음은 안 봐도 뻔했다. 곧 침대로 던진 후 둘이 쿵떡쿵떡, 으쌰으쌰하던데?
덕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혹시 생각이 바뀌었나. 정기를 나눠줄 요량인가. 방으로 들어온 영신이 그대로 덕이를 침대에 내팽개쳤다. 풀썩 침대로 쓰러진 덕이가 얼굴을 시트에 파묻으며 으응, 하는 신음을 냈다. 그리고 다리를 적당히 벌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질 않는다. 뭐야. 고민하는 거야. 괜찮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발목에 철컥, 이상한 게 채워진다. 덕이가 벌떡 일어서며 그것을 내려다봤다. 무슨 검은색 팔찌 같은 거였는데 발목에 딱 들어맞았다.
“…뭐야, 이게?”
“당분간 차고 다녀.”
“…뭔데?”
“악한 것들로부터 널 보호해줄 거야. 절대 풀지 마. 엄청 비싸고 귀한 거거든. 그리고 푸는 순간 펑! 터질지도 몰라. 다리 잘리기 싫으면 곱게 차고 있어.”
덕이가 미간을 구겼다. 두꺼운 팔찌 같은 그것은 불이 반짝반짝 들어오고 있었다. 싫다고, 답답하니 풀어달라고 애원했지만, 영신은 빚을 갚을 동안만이라고 못 박았다. 그것도 싫으면 자신의 돈을 지금 당장 토해내라고. 아니면 너를 실험실로 넘겨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덕이는 더 따지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지를 벗어 유혹이라도 해볼까 고민했지만, 영신이 그만 꺼지라고 손짓을 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
덕이는 옆집 사무실로 향했다. 영신이 오늘 일이 있어 나가볼 테니 인태와 미자에게 일을 배우라고 했기 때문이다. 문 앞에 카드를 대니 삐리릭 하고 열린다. 그대로 잡아당기고 들어갔더니 음악 소리가 들린다.
뭐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쿵작쿵작 신나는 음악에 맞춰 미자와 인태가 댄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덕이가 그 모습을 기막힌 표정으로 쳐다봤다. 참 즐겁게들 산다. 지치지도 않나, 이 더운 날씨에. 귀신은 밤에만 활동한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 뙤약볕에도 저렇게 팔팔하니 말이다.
조용히 소파에 가서 앉자 뒤늦게 덕이를 발견한 그들이 동작을 멈춘다. 곧 음악이 팟 꺼지고 둘은 덕이에게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또 어쩐 일이야.”
“영신이가 가라고 해서.”
덕이가 발목을 문질렀다. 저를 보호해 주느라 발찌를 채운 건 좋았는데 어쩐지 발목이 근질근질 가려웠기 때문이다. 잠시 벗어두려 했지만 풀면 터진다는 영신의 말이 생각나서 그럴 수도 없었다.
긴 바지를 입어서 더 그런가. 영신에게 빌려 반바지라도 입고 올 걸 그랬나. 후회하며 바지 밑단을 둘둘 말아 종아리까지 올렸다. 발찌를 발견한 인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냐? 그거.”
덕이가 발을 들어 보이며 부끄럽게 웃었다. 검은색 발찌에선 여전히 빨간 점처럼 불이 깜박이는 중이었다. 이래 봬도 영신이가 저를 생각해서 마련해 준 게 아닌가. 겉으론 틱틱거렸지만 속으론 저를 좋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것도 일부러 구해줬겠지. 잘 보이면 정기도 주지 않을까.
“영신이가 선물로 줬어. 멋지지?”
그런데 인태의 표정이 이상하다.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면서도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차마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 아마 덕이가 도망갈까 싶어 어디서 구해온 거 같은데. 하필 그게 성범죄용 전자 발찌랑 비슷할 건 뭐람. 일부러 저런 걸 고른 건가. 에이, 설마. 두 사람은 슬며시 몸을 돌리며 숙덕거렸다.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하지 마. 박 대표 승질 낸다.”
“저건 너무 비인간적이잖아. 모르는 거 같은데.”
“어차피 인간도 아니잖아. 여우한테 무슨 그런 걸 따져.”
미자가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다고 했다. 어쨌든 덕이도 반은 인간이지 않으냐며. 그러면서 말해주려고 하기에 인태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 말라니까.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더니 덕이가 웃었다. 다 들리는데. 대체 이게 뭔데 그래. 혹시 영신에게 선물을 받았다니 부러워서 그런가. 귀신만 아니면 빌려줬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희도 차볼래?”
아니. 둘이 동시에 합창하듯 입을 모았다. 덕이가 애써 웃었다. 역시 귀신이 차기엔 좀 그렇지. 그리고 터질지도 모르니까, 자신이 차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보다 못한 미자가 혹시라도 밖에 나가서 그걸 내보이지 말라고 했다.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려고. 귀한 거니까 도둑맞을지도 모르잖아.
인태가 저 바보 좀 보라며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고, 미자가 하지 말라며 옆구리를 세게 퍽 찔렀다.
“참, 덕이 너 연습했어?”
“뭘?”
“어제 집에 가서 연습하라고 했잖아.”
아. 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제 인태가 제게 가르쳐준 몇 가지 기술들을 집에 가서 해보라고 하긴 했는데 막상 그럴 시간이 없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인태가 맞은편에서 사나운 기세로 노려본다.
“내 말을 무시한 거야?”
“…하려고 했는데 어젠 너무 바빴어.”
“둘이 뭘 했는데 바빴어?”
인태의 말속에 은근히 가시가 박혔다. 자신들은 귀신이라 영신의 집 근처에 한 발도 들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붙어있었지만, 영신은 자신들에게 온전히 곁을 내주지 않았다. 물론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가끔 인태는 그런 것들이 서운했다.
“밥 먹고 잤어.”
“설마 같이?”
“…따로.”
“박 대표 알몸 봤어?”
이번엔 미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덕이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한 번도 못 봤다고 하자 아쉬운 얼굴을 한다. 대충 보기에도 몸이 참 좋더라고. 자신이 살아있었다면 그런 남자랑 질펀하게 사귀었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 말에 인태가 비웃으며 남자는 좀 후덕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처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덕이가 발찌가 채워진 부분을 긁었다. 어째 이걸 찬 후부터 다리가 근질근질 가려운 느낌이다. 왜 이러지. 손으로 주위를 긁는데도 가려움은 가시질 않았다.
“왜 그래, 덕아?”
“피부가 가려워.”
“그러게. 빨가네. 여름이라 짓무르나 보다. 좀 풀고 있어.”
“풀면 터진대.”
“…누가?”
“박영신이가.”
미자와 인태가 다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실대로 말해줘. 네가 말하든가. 저 어린 것이 딱하지도 않아. 여든아홉이라고 몇 번을 말해, 이 건망증 귀신아. 그래도 말해줘. 저 자식 껍데기에 속지 마. 이미 도둑질까지 했잖아. 두 사람이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덕이는 쉬지 않고 다리를 긁었다. 어느새 피부가 빨갛게 짓무르고 있었다.
“접촉성 피부염입니다.”
의사의 말에 영신이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연고를 바르면 금방 나을 거라고. 굉장히 심한 경우라며 최대한 바지나 이런 것들이 닿지 않게 하라고 덧붙였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에 간 덕이가 이것저것 구경을 하는 동안 영신은 약사에게 약을 탔다. 그렇게 약을 챙겨 빠져나오고 보니 덕이의 손에 뭔가가 들렸다. 어린이들이 먹는 영양제였는데 그걸 왜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요즘 먹는 게 부실해서 하나 챙겨왔단다. 하여튼 이 도덕성 결여된 여우 새끼 같으니.
“돌려주고 와.”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쳐다본다. 하나만 먹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영신이 가져가서 계산했다. 황당해 하는 약사의 얼굴을 뒤로하고 약국을 빠져나와 차로 향했다.
아무래도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집어오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할 것 같았다. 떠도는 객귀를 보면서는 불쌍하다고 하면서 남의 물건을 가져오는 데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동안 습관들이 몸에 밴 탓인가. 그나마 제 돈 잊어버린 건 미안해하니 그건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근데 접촉성 피부염이 뭐야?”
덕이가 물었고 영신이 그런 게 있다고 대답해줬다. 차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차에 탔다. 영신이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자 덕이가 몸을 기울여 그곳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아, 살 것 같다. 오늘 날씨 정말 더웠어.
그 모습을 보고 영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든아홉 살이나 처먹었으면 거북이 등껍질은 아니어도 어지간한 면역력은 가지고 있는 게 정상 아닌가. 이건 뭐 아기 피부도 아니고 그거 조금 차고 있었다고 피부염이라니. 일할 놈을 데려온 게 아니라 무슨 신줏단지를 모시고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곧 영신의 전화가 울린다. 김 여사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 차 안에 그녀의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박 대표, 나야. 지금 어디야? 식사는 했어?]
“아직이요. 이른 시간부터 어쩐 일이세요.”
[전에 말했던 그거, 혹시 구했나 해서.]
영신이 보조석에 앉은 덕이를 흘깃 쳐다봤다. 덕이는 아까 가져온 영양제를 야금야금 까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요. 아직입니다.”
[그쪽에서 가격을 두 배로 올렸어.]
끼익. 막 출발하던 영신이 차를 옆으로 멈춰 세우고 휴대전화를 빼서 제 귓가로 가져갔다. 덕이가 입에 영양제를 잔뜩 문 채로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어때? 구미가 좀 당겨?]
한 대 맞은 얼굴을 하고 있던 영신의 시선이 옆에 앉은 덕이에게로 향했다. 슥 입술을 물고 나서 눈을 가늘게 늘였다. 구미가 당기다 뿐이겠는가. 옆에 50억, 아니 100억짜리 구미호가 앉아있는데. 근데 그러면 뭐해. 정작 중요한 꼬리가 없는데, 빌어먹을.
“살짝 당기긴 하네요.”
[바쁜 건 알지만 부탁할게. 도울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내가 박 대표 덕분에 먹고 살잖아. 얼마든지 도와야지.]
영신이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옆에 앉은 여우는 제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영양제를 까먹는 중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100억이라…. 100억. 하하. 시발, 미치게 환장하겠군.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덕이가 영양제를 입에 문 채로 우물거리면서 물었다.
“100억이 무슨 소리야?”
일단은 집에 가서 생각하려 차를 출발시키던 영신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허를 찔린 표정으로 덕이를 쳐다봤다. 설마 통화하는 걸 다 들은 건가.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더니 덕이가 다시 묻는다.
“내 얘기 한 거지?”
“아니.”
“…에이, 거짓말쟁이.”
“마음대로 생각해.”
“나를 팔아넘기고 100억을 받기로 했어?”
“하. 네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주제 파악이 빨라서 좋네.”
“…물론 꼬리가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러더니 피식 웃는다. 가뜩이나 빨간 입술이 딸기 맛 영양제를 주워 먹느라 더 빨개졌다. 혀로 입술에 남아있는 단맛을 느끼려는 듯 자꾸 날름거리더니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단다. 네 정기를 나눠달라고. 그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냐고 말이다.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이게 맹해 보이면서도 여우 같은 짓을 한단 말이지. 사람 열 받게.
“차라리 다른 놈을 붙여줄게. 난 싫어.”
“세상에. 아무 노력도 안 하면서 100억을 홀랑 먹겠다는 거야? 나를 팔아서?”
“말하지만 난 사람이랑만 해. 그것도 여자 사람. 게다가 넌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지 못해. 왜냐하면, 구슬이 없으니까.”
“그럼 간은 왜 먹였는데.”
그건… 영신이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먹였고, 두 번째부턴 질색 싫어하길래 골려주려는 마음으로 먹였다. 단지 괴롭히고 싶어서. 그런다고 해서 녀석한테 나올 것도 없는데 말이지.
“하여튼. 구슬 없인 안 돼.”
“스님이 그랬잖아. 아예 없는 게 아니라 너무 작고 힘이 약해 보이지 않는 것뿐이라고.”
“그게 없는 거랑 뭐가 달라?”
“네가 정기를 나눠주면 내 구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그러면 없던 꼬리도 나올 거 같은데?”
“하. 꿈도 야무지네.”
“치사하다, 정말. 안 해. 돈 준다고 해도 너랑은 안 할 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마. 나한테 싹싹 빌면서 한 번 하자고 애걸복걸을 해도 안 들어줄 테니까.”
덕이의 협박에 영신이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꿈 깨, 여우야. 난 너한테 내 몸을 줄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흥. 덕이가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을 내다봤다. 잠시 차가 멈췄고,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카페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커다란 팥빙수 그릇을 놓고 수저로 퍼먹는 모습에 덕이가 창가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 입을 벌렸다.
“저거 먹고 싶다….”
방금 전까지 지랄하더니. 또 먹을 거 타령이냐. 영신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기에 결국 덕이의 입은 댓 발 튀어나오고 말았다.
***
예주가 가방을 메고 대문 앞에서 서성였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일하는 아줌마가 저를 맞았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가족들은 식사 중이었다.
혜란과 그녀의 자매들이었다. 그녀들은 툭하면 이곳이 제집인 양 드나들었다. 혜란이 예주를 흘깃 보더니 왔느냐고 물었다. 예주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네….”
그녀의 옆에 있던 형제들도 예주를 소 닭 쳐다보듯 하더니 곧 자기들 대화에 집중했다. 오늘 낮에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얼마짜리 가방을 샀는데 그게 정말 예뻤다고, 그런 이야기들이 주 대화였다.
예주가 어찌할까 망설이는데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밥은 먹었느냐고 묻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후우 한숨을 내쉬는데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간만에 학원도 쉬고 일찍 왔는데 마음 놓고 식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서글펐다. 아버지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는 중요한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간 지 벌써 이 주째였다. 짧다면 짧은 그 시간이 예주에겐 지옥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아버진 10살이나 어린 혜란과 재혼을 했다. 상실감과 배신감이 동시에 들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 엄마의 유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아빠 편이어야 한다고. 그 말을 지키려고 했지만 날이 갈수록 힘에 부쳤다.
교복을 갈아입으려고 보니 옷장이 열려있다. 전에도 몇 번 혜란이 제 방을 뒤진 적이 있길래 또 그랬나 싶어 한숨이 저절로 났다. 내버려두고 옷을 갈아입는데 순간 옷장 안쪽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아무도 없다. 기분 탓일까.
블라우스를 마저 벗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또다. 또 그 여자 짓이야. 아무리 한여름이지만 찬물이 몸에 닿으면 질색하는 예주였다. 어떻게 하지. 나가서 다시 온수를 틀까. 고민하다 결국 관두기로 했다.
차라리 빨리 씻고 나가자. 단념한 채로 흐르는 찬물에 머리를 적셨다. 등골이 다 서늘하다. 눈을 감고 손을 더듬어 샴푸를 찾는데 순간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게 닿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다. 역시나 기분 탓인가.
잠시 물을 잠그고 샴푸를 짜서 손바닥에 덜었다. 거품을 내서 머리를 문지르는데 샤워부스 밖에 누군가 서 있다. 뿌옇게 김이 서렸지만 분명 사람의 그림자 같았다. 머리를 헹구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가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다.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아났다. 최근에 자주 이런 경험을 했다. 혹시 시험 때문에 밤을 새웠던 탓인가. 얼른 씻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을 틀어 머리를 마저 헹궜다. 거품이 얼굴로 흘러내렸지만 밀려오는 공포심으로 인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급하게 머리를 헹구는데 어쩐지 자신의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아니 길어지는 중이었다. 가슴 위에 닿던 머리는 점점 길어져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예주가 숨을 멈췄다. 손이며 몸이 덜덜 떨렸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고개가 먼저 들렸다.
꺄아- 찢어질 것 같은 비명과 함께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꺽. 꺽.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경련하듯 떨며 쏟아지는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았다. 욕실 천장에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자가 매달려 무서운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자가 대궐 같은 집을 나서자 마당에서 있던 커다란 개가 왈왈 짖기 시작했다. 그 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대문 쪽으로 스르르 향했다. 밖으로 나오니 그 옆에선 인태가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보며 감탄하는 중이었다.
“야, 미자야. 이거 봐.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얼마짜리면 뭐. 끌고 다니게?”
“살아있을 때 이런 차라도 한번 타봤어야 하는 건데. 쯧.”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일이 잘 끝났느냐고 물었다. 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돈 때문에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여자애를 놀라게 해 정신병자로 몰아갈 생각을 하다니.
“확 때려치울까 봐.”
“때려치우면? 갈 데는 있고?”
“영신이한테 천도재나 부탁해볼까.”
“아서라. 박 대표가 우리를 곱게 보내줄 거 같냐. 그리고 너 뭐라고 했어? 기억도 찾고 남겨진 가족도 찾기 전엔 저승으로 가기 싫다며?”
그건 그렇지만. 미자가 말끝을 흐렸다. 시무룩한 얼굴로 옷을 갈아입던 여자아이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아이의 비명을 듣고 방문 뒤에서 미소를 감추지 못하던 새엄마의 모습도.
“생각할수록 너무하네. 애가 싫으면 지가 나가야지.”
“그게 쉽냐. 이미 돈의 맛을 알았는데. 게다가 쟤 외동이라며. 쟤만 없으면 이 재산 다 저 여자 껀데. 눈이 뒤집힐 만하지.”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저런 것들 안 잡아가고.”
미자의 말에 인태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 동정심 따위는 갖지 말라면서. 아무렴 이유도 모르고 죽은 너보다 쟤가 더 불쌍하겠냐고. 그 말에 미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도 그러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영신과 덕이가 탔다. 17층을 누르고 막 닫히려던 찰나 밖에서 ‘잠시만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열림 버튼을 누르며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잠시 후 웬 사내가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한 남자가 18층을 누른다. 손가락이 길고 하얗다. 순간 덕이가 흠칫 놀라며 엘리베이터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자기도 모르게 영신의 손을 툭 건드렸다. 영신이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그런 덕이를 봤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다.
덕이가 남자에게로 시선을 이동했다. 정확히는 남자의 등에 붙어 있는 혼령에게로 말이다. 다시 영신을 보는데 영신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저게 안 보일 리가 없는데.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는데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하얀 얼굴에 꽤 곱상하게 생긴 남자는 누가 봐도 호감형이었다.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면서 18층에 이사 왔다고, 저번에 떡 돌리러 갔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하면서 인사를 한다.
영신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그러시냐고 대답했다. 팅.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영신이 그럼 가시라고 인사를 했고, 덕이가 그 뒤를 후다닥 따라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덕이가 영신을 쫓아가며 조금 전 봤느냐고 물었다.
영신이 문 앞에 멈춰 서서 카드를 대자 띠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대답하지 않자 덕이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남자 등에 혼령이 붙었어.”
“그게 왜.”
“왜라니. 저거, 나쁜 거 아냐?”
“모른 척해. 괜히 마주쳤을 때 나불거리지 말고.”
영신이 주방 쪽으로 가 물을 마시는 사이 덕이가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목소리며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물을 마시던 영신이 왜 그러냐고 묻길래 사실대로 말했더니 피식 웃는다.
“네가 잤던 놈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네.”
덕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등에 저런 걸 매달고 다니는 남자는 없었다.
“영신아… 너.”
“뭐.”
“질투하니?”
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웃더니 그대로 제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덕이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근데 18층이면 밤마다 문 두드리는 그 여자가 살던 곳 아니야?”
“모르겠네.”
모르겠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영신이 바로 위층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라고 하지 않았나. 이 아파트는 18층밖에 없는데 위에서 떨어져 죽었으면 18층에 살았던 거겠지. 그걸 모르다니. 영신이 바본가.
“혹시 저 남자가 그 여잘 죽인 거 아닐까.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 수도 있잖아.”
영신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망상도 병이라고. 없는 소리를 지어내는 것도 재주니 차라리 그걸 살려 드라마 작가나 하라고 말이다.
그러더니 윗옷을 벗었다. 몸에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근육이 잘 만들어져 있었다. 깨끗하게 세탁된 흰 티셔츠로 갈아입는데 근육들이 꿈틀꿈틀 움직인다. 헤에. 덕이가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쳐다봤다.
“너 몸이… 야하다.”
영신이 인상을 슬며시 구겼다. 저번부터 느낀 건데 저 바보 같은 구미호는 뇌에서 떠오르는 말을 입으로 생각 없이 내보내는 경향이 있었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냥 뒀으면 남자에게 뒤에 붙은 게 뭐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야. 김덕이. 말할 때 3초 정도 고민하고 뱉어.”
“일, 이, 삼. 너한테 정기 받고 싶어.”
하아, 이 새끼가. 빠드득 이를 갈더니 덕이를 향해 침대에 있던 베개를 들어 홱 집어 던졌다. 덕이가 손을 뻗어 막으려고 했지만 얼굴에 먼저 맞고 튕겨 나갔다. 아, 이놈의 운동신경. 그것을 주워 품에 안으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하면 안 되냐고. 해보고 꼬리가 안 생기면 마는 거고, 생기면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거 아니냐고 말이다.
당장 꺼지라고 하려던 영신이 멈칫했다. 100억이라. 게다가 자신이 추진하는 일을 도와주겠다니. 근데 그렇게까지 구미호가 필요한 이유가 뭘까. 원래 의뢰인에게 자세한 사정 같은 건 캐묻지 않았다. 저는 그저 일을 해결해주고 돈을 받으면 그뿐이니까.
하지만 이번엔 어쩐 일인지 궁금했다. 차라리 포기하면 마음이 편하련만, 금액이 금액이다 보니 마음이 비워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남자랑 한 번도 안 해봤으면 넌 그냥 누워만 있어. 내가 올라가서 다 할게.”
덕이가 아랫입술을 슥 빨아당겼다가 놓는다. 눈을 요염하게 접어서 웃는 꼴을 보니 여우가 맞다. 하도 멍청한 짓을 잘하길래 곰탱인 줄 알았더니. 영신이 됐으니 나가라고 손짓을 해 보였다.
생긋거리던 덕이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알았어. 나가면 될 거 아냐. 몸을 돌려 두세 발짝 떼는가 싶더니 아! 하고 손뼉을 쳤다. 바지를 벗으려던 영신이 왜 그러나 싶어 쳐다봤더니 방금 생각났다며 아까 엘리베이터서 본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다고 했다.
“저번에 내가 비를 맞고 있는데 그 남자가 우산을 줬어!”
어쩐지 낯이 익는다며. 근데 저를 알아보지는 못한 거 같더라는 말도 해주었다.
“그때도 뒤에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저 여잔가. 고개를 갸웃한다. 영신이 시큰둥한 얼굴로 그만 떠들고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덕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결국은 밖으로 나와야 했다. 인태의 말대로 영신은 돈 말고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덕이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봤다. 영신이 바지를 막 내리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머리를 디밀고 기웃대는데 귀신같이 알아챈 영신이 쾅! 하고 문을 닫아버린다. 놀란 덕이가 뒤로 물러서며 가슴을 쓸었다.
“아, 놀래라. 머리통 잘릴 뻔했네.”
소파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서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원을 켜고 우림의 번호를 찾아 눌렀더니 이제는 아예 없는 번호라고 나온다. 받을 리가 없지, 멍청아. 긴 한숨을 토해내며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텅, 텅. 익숙한 소리에 몸을 빙글 돌려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쳐다보니 매일 찾아오는 그 여자가 창문 앞에 서서 머리를 찧고 있었다.
“안녕.”
덕이가 손을 들어 인사를 하니 귀신이 한쪽 손을 든다. 뭐야. 알아듣는 건가, 신기한 마음에 든 손을 살짝살짝 흔들었더니 똑같이 흔든다. 덕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여자가 입을 움직인다. 유심히 그 입 모양을 보면서 제 입으로 따라 소리를 냈다.
“망…치?”
망치가 뭐지. 누가 망치로 때렸다는 건가. 아니다, 영신은 분명 여자가 투신자살했다고 했는데. 흐음. 눈을 부릅뜨고 다시 여자의 입 모양을 따라 하려 했다. 더… 망… 벌컥 문이 열리면서 영신이 나오길래 얼른 창문에서 떨어졌다.
팅, 파란 불꽃이 날아와 창문 밖 여자를 날렸다. 덕이가 그런 영신을 눈치를 살피며 제 방 쪽으로 걸어가다 멈춘다. 분명 자려고 옷을 갈아입은 걸 봤는데 다시 외출복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잔말 말고 넌 들어가서 잠이나 자란다. 그러더니 곧 그가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뭐야.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냥 가는 거야. 진짜 이대로 도망칠까. 하지만 도망친다고 해도 딱히 갈 곳도 없다.
제힘으로 구슬 파는 곳을 알아내는 것도 어림없는 일이고. 아니, 애초에 정말 그 구슬이라는 게 있었던 건지 이젠 의심이 들었다.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잠을 청하러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영신이 병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응급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지나가던 간호사에게 설명하자 한쪽을 가리켜준다. 그쪽으로 가서 환자의 얼굴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친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간이침대에는 자신의 조모가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모친이 영신을 보고 왔느냐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셔서는 쓰러지셨지 뭐야.”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네 아버지도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고 말이다. 영신이 의자를 끌어와 할머니 곁에 앉았다. 거진 3년 만에 보는 건데 얼굴이 전보다 많이 쇠약해지셨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자신이 여기 있을 테니 들어가시라고 하자 모친은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는 급한 마음에 아들에게 연락했는데 아무래도 노인네가 눈을 뜨면 영신을 보고 역정을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 얼른. 엄마가 너한테 괜히 연락했어.”
“됐어요. 할 일도 없는데, 있다가 갈게요.”
그때 할머니가 끙, 신음을 내며 눈을 뜬다. 주름지고 늘어진 눈꺼풀이 파르르 올라가더니 곧 영신에게 향한다. 지금 막 깨어난 와중에도 눈빛엔 못마땅한 기색을 잔뜩 내비치고 있었다.
“네놈이 여긴 왜 왔어.”
“제가 연락했어요. 영신이가 어머니 걱정돼서 온 거예요.”
“걱정은 무슨!”
할머니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필요 없으니 가라고 쏘아붙인다.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모는 여전히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가업을 이을 줄 알았던 손주가 귀신을 돈벌이로 이용하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프시다고 해서 보러 왔어요.”
“애미 너! 내가 뭐라고 했니. 저 물건 집에서 나갈 때 분명 말했을 텐데. 나 죽어도 내 집에 한 발짝도 들이지 말라고 말이야. 내 말을 허투루 들은 게냐.”
야단맞은 모친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곧바로 영신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겉모습은 쇠약해졌을지 몰라도 성격은 여전히 괄괄했다. 걱정했는데 되려 안심이 됐다.
“어머니 잡지 마세요. 갈 테니까.”
몸을 일으키는데 할머니가 이쪽을 다시 쳐다본다.
“네놈이 요상한 걸 집에 들였구나.”
영신이 멈칫했다. 덕이의 이야기가 노인네의 귀에까지 들어간 건가. 고모가 말했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할머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보내. 너한테 득 될 거 하나도 없는 물건이야.”
“제가 알아서 해요. 갈게요.”
모친에게 눈으로 인사를 한 후 옷매무시를 고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쯧쯧 못마땅해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저벅저벅 응급실 주변으로 죽은 영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게 보였다. 그들이 영신을 쳐다봤지만, 영신은 그저 모른 척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
가운을 입은 덕이가 방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새벽에 어디를 갔다 왔는지 모르지만, 영신은 아침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지친 얼굴이었는데 괜찮은 건가.
문 앞에서 기웃기웃하는데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후다닥 소파로 가서 드러누웠다. 문이 열리고 샤워를 마친 영신이 막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거실을 둘러보며 덕이를 찾았다. 뭐야. 들어올 때까지 있더니.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덕이가 소파에 누운 채로 다리를 살짝 세웠다. 가운이 흘러내리며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발소리가 멈추고 머리 위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으음. 왜 조용하지. 이번엔 벌려 볼까. 슬며시 한쪽 다리만 옆으로 눕히고 나서 몸을 비틀었다. 덮쳐라. 제발 덮쳐. 이래도 안 덮칠래?
바람과는 달리 삭막할 만큼 조용했다. 고민하는 건가. 차라리 아예 홀딱 벗고 있을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하며 살그머니 실눈을 뜨는데 영신이 세상에서 제일 무심한 얼굴로 발치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냐.”
덕이가 일부러 크게 입을 벌려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 하암.
“깜빡 잠이 들었네.”
“기면증이야? 조금 전까지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더니.”
덕이가 그런 것 같다고 웃어넘겼다. 실은 기면증이 뭔지 몰라서 더 대꾸를 못 한 거였지만. 그러고 나더니 영신의 아랫도리를 쳐다보며 눈을 크게 뜬다. 어어? 영신아. 너 바지에 뭐 묻었다.
영신이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뭐가 묻었나 찾는 거 같았다. 새 옷이라 묻을 리가 없는데. 덕이가 늘씬한 다리를 뻗어 영신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이거, 얼룩 아냐? 영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런 덕이를 빤히 쳐다봤다. 이때다 싶어 발을 더 옆쪽으로 움직여 사타구니를 슬그머니 문지르자 영신이 덕이의 발목을 콱 움켜잡는다.
“뭐야?”
으득, 잡은 채로 비트는 바람에 덕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다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덕분에 대리석 바닥에 쿵 머리도 찧었다. 아이 씨, 발목과 머리통을 번갈아 붙잡으며 씩씩대고 일어나 앉았다.
“뭐 하는 짓이야!”
영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덕이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알려주려고.”
“뭘!”
“개수작 부리면 어떻게 되는지.”
덕이는 할 말을 잃었다. 개수작까진 아니었지만 수작을 부린 건 맞지 않는가. 영신이 일어나라며 손을 내민다. 뭐야 엿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덕이가 그 손을 탁 쳐내고 소파를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목이 부러진 건 아니었지만 욱신거리는 게 상당히 아팠다.
영신은 손을 거두더니 그대로 주방 쪽으로 가버린다. 덕이가 이를 뿌득뿌득 갈며 그 뒤를 따라갔다.
“너무한 거 아니야.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과연 장난일까.”
그깟 정기 좀 나눠주면 어때서. 덕이가 구시렁대며 식탁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영신이 냉장고를 열더니 무언가를 꺼내온다. 설마 했는데 오늘도 간이다. 젠장. 또야, 또. 덕이가 이제 간 비슷한 것만 봐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며 제발 다른 것 좀 달라고 애원했다.
“잔말 말고 먹어.”
“…몇 번을 말해. 소용없다니까.”
“뭐든 해보면 알겠지.”
“죽은 동물에선 아무것도 얻지 못해.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야. 알면서 왜 이래? 날 괴롭힐 심산인 거야? 바보 같은 짓 그만하고 쉬운 걸 택하면 되잖아. 왜 힘들게 돌아가려고 해?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영신이 물컵을 든 채로 덕이에게 다가오더니 턱을 가볍게 움켜쥔다. 그러더니 좌우로 돌려가며 유심히 살핀다.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더니 그대로 손을 놓는다.
“저녁까지 얌전히 기다려. 네게 정기를 나눠줄 만한 사람을 구해 볼 테니.”
그 말에 덕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정말? 대체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단다. 혹시 잘생겼느냐고 묻자 영신의 눈 밑이 슬그머니 일그러진다.
“얼굴도 따지시겠다?”
“잘생기면 좋지. 너처럼.”
“꿈도 야무지군.”
“기왕이면 몸 좋은 남자를 데려와 줘. 너처럼.”
“몸 팔 때도 그런 걸 따졌나?”
“당연하지. 못생기면 돈만 갖고 튀었는걸. 잘생긴 놈들은 자고 나서 튀고.”
쯧. 영신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다. 아니면 옆 사무실에 가서 인태에게 일이나 더 배우라고. 그에게 듣기론 덕이가 사람 놀라게 하는 덴 영 소질이 없다고 했다. 차라리 다른 쪽으로 일을 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덕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토스트에 손을 뻗었다. 본대로 한입 베어 물고서는 우물우물 씹어 먹는다. 맛있다. 이번엔 영신이 한 대로 잼을 발라서 먹더니 길죽한 눈을 초승달처럼 접는다. 으음. 맛있다. 간보다 훨 낫네.
***
아삭. 아삭. 덕이가 오이를 깨물며 길을 걸었다. 한여름 볕이 얼마나 따가운지 머리카락이 벗겨질 것만 같았다. 영신이 집에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방에 오이를 몇 개 챙겨 넣고는 우림과 자주 가던 곳을 하나씩 뒤졌다.
맨 마지막으로 간 곳은 우림이 드나들던 당구장이었다. 계산대로 가서 사장에게 알은체하며 그의 행방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모른다였다.
허탈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밖으로 다시 나오려다 멈칫했다. 흡연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사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림과 셋이 본 적 있는 남자였다. 덕이가 오이를 들고 그에게로 갔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자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남자가 몸을 돌린다.
덕이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사내였다.
“안녕. 나 누군지 기억하지?”
남자가 덕이를 알아보고 피식 웃는다. 너? 우림이랑 같이 다니던 걔잖아. 이름이 덕이라고 했던가.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사내치곤 야릇하게 생겨서 한번 보면 쉽게 잊힐 외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저를 알아보자 덕이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우림이 본 적 있어?”
“글쎄. 못 본 지 꽤 오래라. 왜? 무슨 일로 찾는데?”
남자의 뱀 같은 시선이 덕이의 어깨를 시작해 허리와 엉덩이 쪽을 끈적끈적하게 훑어 내려갔다.
“걔가 내 돈 가지고 도망갔어.”
“그래?”
“어디 있는지 알면 가르쳐줄래?”
혹시 알진 않을까. 덕이가 간절하게 바라는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남자가 턱을 문지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의 시선에 덕이의 얼굴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우림이 어디 있는지 알 것도 같다고 말하자 덕이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원하면 데려다 줄 수도 있는데.”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그게 실은 내 돈이 아니라서 말이야. 남자가 웃더니 일행들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노라고 말하고 덕이의 어깨를 붙든다. 덕이가 그 손을 보고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아삭. 오이를 한입 베어 물고는 남자의 손을 떼어내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픽 웃더니 곧 뒤를 따라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에 도착하니 평일 대낮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저 멀리 구석에 남자의 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쪽으로 가서 차에 올라타자 남자가 안전띠를 매준다며 덕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덕이가 됐다고, 내가 한다고 하는 순간 슥 남자의 손이 덕이의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덕이가 그 손을 떼어내며 뭐 하는 거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남자가 입술을 핥으면서 다시 손을 덕이의 가랑이 사이로 밀어 넣으려고 애썼다.
“왜. 너도 좋잖아? 돈 줄게. 나랑 한번 하자.”
하지 말라고 남자를 밀어내는 순간 문이 잠기고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간다. 순식간에 남자가 덕이의 몸 위로 올라오더니 바지 위로 성기를 쥐고 문질렀다. 워낙 체격 차이가 나니 몸을 버둥거려도 소용없었다.
남자가 입술을 빨려고 하자 덕이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악을 썼다.
“비켜! 꺼지란 말이야!”
“하아, 시발 좀 가만있어. 사람 꼴리게 쳐다본 게 누군데.”
남자가 고무줄로 된 바지를 끌어 내리는 순간 똑똑 누군가 차창을 두드린다. 남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창가를 노려봤다.
덕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언제 왔는지, 아니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영신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자가 영신을 죽일 듯 노려봤다.
잠시 후 창문을 내리자 영신의 얼굴이 조금 더 자세하게 보였다. 여전히 덕이는 남자의 몸 아래 깔린 상태였는데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영신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영신은 본체만체였다.
“뭐야, 너. 안 꺼져?”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영신이 눈짓으로 덕이를 가리켰다. 그거 내 건데? 순간 덕이의 입이 쫙 벌어진다. 박영신이 조금 전 저를 가리켜 내 거라고 한 건가. 그렇게 튕기더니. 드디어 나한테 마음을 열 작정인 거구나. 남자한테 깔려서 좋다고 입을 헤벌쭉 벌리자 여태 냉랭하던 영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남자가 개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사나운 기세로 윽박질렀다. 영신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이 씨발!”
남자가 바지를 추키며 의자 아래쪽으로 손을 넣더니 운전석으로 내린다. 덕이의 눈에 남자가 쥔 칼이 보였다. 덕이가 바지를 올리고서 부리나케 보조석 쪽으로 내려 영신의 앞을 막아섰다. 칼을 든 남자가 사나운 기세로 덤벼들었다.
“야! 구덕이 너 안 비켜?”
남자의 말에 잠자코 있던 영신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다. 구덕이? 덕이가 작게 욕을 내뱉었다. 망할 개자식. 곧 남자가 칼을 들고 이쪽으로 달려들었고, 덕이가 영신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도망치기도 전에 영신의 몸이 앞으로 먼저 튕겨 나갔다. 칼을 쥔 남자의 손목을 비틀더니 남자의 복부를 무릎으로 가격 했다. 그러고 나서 쓰러지는 남자를 잡아채서는 몸이 날아갈 만큼 발로 걷어찼다.
아. 영신이 멋지다. 넋 놓고 보던 덕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뜯어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미친 황소처럼 날뛰는 그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덕이가 차창에 뺨을 대고 밖을 구경했다. 노을이 지는 한강은 평소보다 더 예뻤다. 자신이 살던 호국에도 이런 강이 있었는데, 어릴 적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저녁때가 되면 다른 여우들은 엄마가 데리러 오곤 했는데, 오직 저만 홀로 남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렸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니 콧등이 시큰거렸다.
영신이 슬쩍 덕이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차창에 코를 박고 한강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처먹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안 봐도 훤해. 앞을 보니 차가 길게 늘어서 빠질 생각을 않는다. 집이 코앞인데 차가 막혀 가질 못하다니. 짜증이 슬슬 밀려오기 시작했다.
덕이가 얼굴을 떼고 운전석에 앉은 영신을 흘깃 바라봤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 아래로 반듯한 이마가 참 예쁘다. 콧대도 탐스럽다. 뭔가 짜증이 나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도 섹시하다. 잘생겼는데 섹시하고 거기다 싸움도 잘한다. 후후. 덕이가 입가로 퍼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영신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이름이 구덕이야? 김덕이가 아니라?”
이런 젠장. 덕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봤자 어차피 나중에 들통 나면 더 우스울 것 같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니 영신이 대놓고 비웃는다.
“어울리는 이름이네.”
“그냥 덕이라고 불러줘. 구 자 붙이지 마.”
“알았어, 구덕아.”
“씨….”
“혹시 별명이 구더기?”
“아니!”
“맞구나?”
영신이 자꾸 피식피식 웃는다. 덕이가 참다못해 영신의 팔을 툭 쳤다. 웃지 마.
“내가 네 이름 가지고 박영신이 아니라 박등신이나 박귀신이라고 놀리면 좋겠어?”
“상관없는데?”
덕이가 눈을 흘겼다. 그럼 이제부터 박등신이라고 부른다니까 마음대로 하란다. 정말 불러버릴까 하다 금세 포기했다. 놀리는 것도 상대가 열 받아야 재미있는 건데, 영신인 눈 하나 깜짝 안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구미호는 다 구씨야?”
뜬금없는 영신의 질문에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다른 형제들은? 너와 같은 반호인가?”
덕이가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병으로 죽고 아버지는 새 부인을 맞았다고. 그 부인도 구미호고, 그래서 배다른 형제들은 모두 제대로 된 구미호라고 말해주었다. 듣고 있던 영신이 가족이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덕이는 고개만 흔들었다.
“다들 날 찾지 않을 거야. 원래 난 필요없는 존재거든.”
말속에 외로움이 묻어난다. 영신이 흘깃 봤더니 덕이가 손을 아래로 내려 영신이 준 구미호 인형을 만지작댄다. 몇 개 안 되는 제 물건 중 하나라 그런지 빼놓지 않고 챙겨다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혹시 몰라 도망칠 때를 대비해 저 안에 위치추적기를 심어놨는데 덕분에 손쉽게 덕이를 잡을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도와주는 데 썼지만 말이다.
“…종일 어디 갔다가 왔어?”
덕이가 물었고 영신이 웃었다. 꼭 저를 기다린 것처럼 말하니 그냥 웃음이 났다.
“일 때문에 사람들 만나러 다녀왔어.”
“넌 같이 일하는 사람 없어?”
“있어. 김 실장.”
“그 사람 말고는?”
“없어.”
“왜? 일하는 사람이 많으면 너도 좋잖아. 편하고.”
“곁에 사람 두는 걸 안 좋아하니까.”
“…너도 나만큼 외롭겠구나.”
덕이가 푸념처럼 늘어놓은 말에 영신이 조용하게 웃었다. 살면서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혼자가 편했고, 지금도 역시나 혼자가 편하다. 성욕이야 하룻밤 만남으로 풀면 그만이었고, 누구보다도 지금 생활에 만족했다.
그때였다. 영신의 허벅지로 슬그머니 덕이의 손이 올라온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외로운 사람들끼리… 어때?”
입술을 핥으며 묻는 덕이를 보며 영신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아침에 다리로 모자랐느냐고 이번엔 손을 비틀어주느냐고 묻자 덕이는 얌전히 손을 거둬 제 허벅지 위에 다소곳하게 올려놓는다. 그러고 나서 창밖을 보니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다. 차가 옆길로 빠져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디 가?”
“저녁 먹고 들어가자.”
그 말에 덕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며칠 동안 간 먹으라고 강요를 당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 고기! 고기 먹고 싶어.”
“그래. 먹어.”
선뜻 먹자고 하는 영신의 말에 덕이가 환한 얼굴로 웃었다. 어쩐지 둘이 밥을 먹는다고 하니 데이트하는 기분도 들고, 너무 좋아서였다. 해는 이제 완전히 넘어가 사방이 어둑해졌다. 창문을 살짝 열었더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덕이가 폐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눈을 감았다. 비 냄새다. 아무래도 곧 비가 올 모양이었다.
덕이가 입술을 꾹 물고 상 위를 노려봤다. 거기엔 새빨간 간이 놓여 있었다. 불판 위에선 일 등급 한우가 막 구워지는 중이었다. 덕이가 젓가락을 소고기에 대자 탁, 영신이 제 젓가락으로 밀어낸다. 턱짓으로 눈앞에 있는 소간을 가리켰기에 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해!”
“그거 다 먹으면 먹게 해줄게.”
덕이가 젓가락으로 생간을 뒤적였다. 박영신은 돌대가리일지도 모른다. 분명 효과가 없다고 그렇게 얘길 했는데 왜 이걸 또 먹이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혹시 누군가 괴롭히면서 쾌락을 느끼는 스타일인가.
하긴 전에도 비슷한 놈을 한 번 본 적 있다. 허리띠를 풀어 저를 때려 달라던 미친놈을. 다시 슥 젓가락을 가져가서 얼른 고기 한 점을 낚아챘다. 아싸. 입에 쏙 넣고 우물대는데 영신이 피식 웃는다.
“마음껏 먹어. 농담이니까.”
그러더니 잘 익은 고기를 덕이의 앞쪽으로 놓아준다. 계속 구박만 하더니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설마 이러고 나서 또 지랄하는 거 아니야? 덕이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엿 주고 약 주는 게 주특기이니 말이다.
상추에 깻잎을 겹치고 고기를 올려 야무지게 싸서 먹는데 영신이 조금은 신기하단 얼굴로 바라본다. 구미호 하면 육식 아닌가. 저번에도 그렇고 아까도 가방에 오이를 싸 가지고 다니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이 여우는 잡식인가 보다.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
볼이 터질 정도로 욱여넣고서는 또 고기를 욕심낸다. 영신이 천천히 먹으라고 말하자 알겠다고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저와 짝짓기를 할 사내를 찾아본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혹시 찾은 건가 싶어서 물을 한 컵 들이켜고는 물었다.
“혹시 찾았어?”
“누굴.”
“나한테 정기 나눠줄 사람.”
아니. 영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잖아도 이쪽에서 일하는 몇 명을 찾아가서 부탁해보려고 하다 관두었다. 다짜고짜 사내랑 자 달라고 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상대가 구미호란 걸 밝힐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괜히 소문이라도 나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될 텐데. 그건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덕이가 쌈을 싸더니 영신의 입 앞에 디밀었다. 아, 벌려. 영신이 그 쌈을 쳐다만 보고 있자 다시 아아, 해보라고 제 입을 벌린다. 새빨갛고 촉촉한 혀가 보였다. 영신이 쌈과 그것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아까 구해준 거 고마워서 그래. 이깟 쌈이 뭐라고 마다하냐.”
“난 원래 남이 주는 걸 안 먹어.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우림이가 툭하면 하는 말이랑 비슷했다. 남이 주는 걸 함부로 먹지 말라고. 뭐가 들었을지 모른다고. 괘씸한 녀석. 그래놓고 나한테 독약을 먹이고 죽이려 들어. 잡히면 정말 혼내줄 테다.
“그래도 먹어…. 성의를 봐서….”
덕이가 서운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하지만 쌈을 거두진 않았다. 보다 못한 영신이 그 쌈을 제 손으로 가져와 직접 입에 넣었다. ‘됐지?’ 하고 묻자 덕이가 살포시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맛있어?”
어. 영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덕이가 또 쌈을 싼다. 됐으니 너나 먹으라고 하자 또 입가로 가져와서는 아아, 소리를 낸다. 영신이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노려보자 덕이가 새카만 눈동자를 똘망똘망하게 빛내며 이것만 먹으라고 성화다.
결국, 그것마저 받아먹었더니 입을 헤에 벌리고 좋아라 한다. 그러더니 다시 고기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영신이 그 모습을 가만히 봤다. 아무리 봐도 여우치고는 어리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한 번씩 잔망을 떨 때면 이래서 여우구나 싶긴 하지만. 덕이가 고추를 하나 와삭 베어 물더니 기겁을 하고 물을 벌컥벌컥 따라 마신다. 입을 벌리고 눈 주위가 새빨개져선 어떻게 할 줄을 모르더니 안 되겠다며 또다시 물을 따라 들이킨다.
“영신아! 이거 고추 먹지 마. 엄청 매워.”
“그냥 보기에도 매워 보여.”
“그래? 난 맛을 봐야 아는데, 넌 보기만 해도 아는구나.”
그러면서 영신을 보고 눈을 길쭉하게 접어 웃는다. 그 표정에 영신이 인상을 굳혔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따위 표정을 짓느냐고 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집에 가면 다른 고추도 맛보게 해주는 거냐고 물어 영신은 하마터면 집게를 덕이의 머리통에 집어 던질 뻔했다.
“개소리하지 말고 고기나 먹어.”
“치.”
“그리고 너, 내가 없을 때는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마.”
“하지만 난 그 돈을 찾아야 해.”
“어째서.”
“네 돈이니까.”
“됐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집에 있어. 어떻게든 꼬리를 만드는 방법도 알아낼 테니까.”
덕이가 입술을 씰룩였다.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고생길을 사서 가는지 모르겠다고. 그 정도로 내가 마음에 안 드나 싶어 조금 서운해졌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이해도 해봤다가, 마음이 어쩐지 오락가락한다. 아침부터 돌아다녔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니 영신이 졸리느냐고 묻는다. 덕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자고 싶어.”
“그만 먹고 가자.”
으응.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밤에도 깨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낮에도 늘 피곤했다. 일어서며 상추에 고기 몇 점을 챙겼다. 영신이 그걸 왜 가져가냐고 물었기에 이따 배고프면 간식으로 먹을 생각이라고 말해줬더니 두고 가라고 한마디 한다.
결국 그것을 고기 판에 다시 올려두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고깃집을 나와야 했다.
***
“그래서? 여기서 자겠다고?”
혜란의 가시 돋친 음성에 예주가 몸을 움츠렸다. 방에만 있으면 자꾸 이상한 일들이 생겨 1층에서 혜영과 함께 자겠다고 했더니 그녀가 바로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친 것이다. 아니면 거실 소파에서 잔다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단다. 가사도우미 아줌마가 보면 뭐라고 하겠느냐고. 정 무서우면 불이라도 켜고 자라는 말에 예주는 더는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너 참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구나. 네 아버지가 오냐오냐 키운 탓이 크겠지만, 나한테 그런 거 안 통해. 그러니 그만 올라가도록 해.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예주가 아랫입술을 슬쩍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슬쩍 아래를 내려봤을 때 어쩐지 웃는 듯한 새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곧 표정을 지우고 안방 쪽으로 몸을 홱 돌리긴 했지만.
2층으로 올라온 예주는 방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제일 먼저 불을 켰다. 환한 방 안은 전과 다름없이 조용했다. 아빠가 사준 인형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고, 침대며 바닥이며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방 안을 살피던 예주가 반쯤 열린 옷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곳을 노려보다 앞으로 가서 홱 열어젖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등을 환하게 밝힌 채 침대로 가서 누웠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꾸 이상한 일들을 겪었더니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낮에도 친구와 별거 아닌 일로 다투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길 수 있었을 텐데. 어쩐지 울컥 짜증이 치솟아 저도 모르게 화부터 냈다. 당황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저를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무서워서 불을 켰지만, 실내가 너무 밝으니 잠이 오질 않는다. 팔등으로 눈을 가렸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낮에 아빠가 전화해 별일 없느냐고 물었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었으니까.
아빠와 돌아가신 엄마, 그리고 단란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다 보니 마음이 안정되고 조금씩 수마가 몰려왔다. 꿈을 꿨다. 엄마가 나왔고, 예전처럼 저를 안아줬고, 괜찮을 거라고 등을 토닥여줬다. 설움이 복받쳐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에 예주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여전히 실내는 환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주위를 둘러보니 욕실 쪽에서 소리가 난다. 침대에서 내려와 그쪽으로 갔다. 욕실 문을 열고 안을 살피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아. 뭐야. 한숨을 내쉬고 나서 욕실 불을 끄는 순간 거울에 비친 제 모습 뒤로 다른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인다.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다. 욕실을 불을 켜고 안을 다시 살폈다. 두려움에 손끝이 덜덜 떨린다.
새엄마의 말대로 요즘 공부에 지쳐서 심신이 고단한 탓인 걸까. 차마 욕실 불을 끄지 못하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방 불을 모두 켠 채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괜찮다. 다 괜찮을 거야. 다시 눈을 감았다. 차라리 잠들고 싶다. 꿈속에서 엄마를 만나고 싶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똑, 똑, 똑…. 또 그 소리다. 예주가 눈을 감은 채 눈동자를 움직였다. 이번엔 제 얼굴 위로 축축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불이 모두 꺼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 분명 잠들기 전 불을 모두 켜뒀는데. 톡, 톡, 뺨 위에 떨어지는 그게 무언지 알 순 없었으나 몸은 이미 공포로 인해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굳어진 상태였다. 숨도 내쉬지 못하고 이불을 가슴까지 덮은 채 달달 떨고 있는데 뺨에 서늘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가.
[예주야….]
덜덜 떨던 예주가 멈칫했다.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다. 순간 반가운 마음에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하지만 곧 예주는 둘도 없는 공포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천장에 붙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돌처럼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석고상처럼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덜덜 떨었다. 큭, 큭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여자가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온다.
축축하게 젖은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예주의 이마로 톡, 톡 물이 떨어졌다. 점점 아래로 내려올수록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눈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고, 입은 웃고 있었지만, 치아도 혀도 없었다.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데 여자의 얼굴이 한 뼘 앞까지 내려온다. 예주가 눈을 뜬 채로 눈물만 줄줄 흘렸다. 순간, 탁, 불이 켜지고 방 안이 환해지더니 눈앞에 있던 여자가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예주가 멈추고 있던 숨과 동시에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미자가 이층집을 올려다봤다. 곁에 있던 인태가 미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생했어. 하지만 미자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금 전 자신이 머물던 방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소녀의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긴 한숨을 내쉬자 인태가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야. 이거 그냥 하지 말자고 박영신한테 말하자.”
“그럼 다른 팀한테 시킬걸. 영신이 성격 알잖아. 돈 되는 일이면 다 하는 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저 어린애가 무슨 죄야.”
미자가 투덜거렸고, 인태가 그렇게 신경 쓰이면 다음엔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그 말에 미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전엔 안 그랬는데 어째서 저 소녀에게 마음이 이토록 쓰이는지 모르겠다. 혹시….
“내가 쟤 엄마는 아니겠지?”
그 말에 인태가 기막히단 얼굴로 웃었다. 왜 막장 드라마를 쓰느냐고 물었지만, 미자의 표정은 정말 심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마음이 쓰일 리가 없다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확인을 해보겠다는 말에 인태는 그건 아닐 거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미자가 누구의 엄마인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네가 정 그러면 박 대표한테 말이라도 꺼내보자.”
미자가 반색하며 진심이냐고 물었다. 인태도 영신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는 편이었기에 선뜻 그러자고 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팀플레이는 파트너와의 합이 중요한데 네가 이렇게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하는 건 나도 원치 않아.”
자식이. 미자가 인태의 등을 퍽 친다. 고맙다고, 매일 다투긴 하지만 그래도 너만 한 짝은 없는 거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하는데 저 멀리 지박령 하나가 그 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게 보인다.
몰골이 보아하니 차에 치여 죽은 것처럼 처참했다. 둘에게 다가오길래 슬쩍 피하며 제 갈 길을 서둘렀다.
“참 덕이인가 걔는 어떻게 된 거야.”
“덕이가 왜?”
“오늘 아침엔 통 안 보여서. 설마 박 대표가 벌써 팔아넘긴 건가?”
“걔가 포주냐. 팔아넘기긴 뭘 팔아넘겨.”
“그때 말하는 거 못 들었어? 김 여사가 구해달라고 했다잖아. 이유가 뭐겠어?”
“글쎄.”
미자가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을 했다. 구미호를 구해달라는 이유가 뭘까. 혹시 애완용으로 키우려고? 그 말에 인태가 정신 나간 소리라고 쏘아붙였다.
“너 그거 몰라?”
“뭘?”
“구미호 간을 꺼내 먹으면 영생을 누린다는 이야기가 있잖아.”
“야. 간이 아니라 구슬이겠지.”
미자가 비웃자 인태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닌가. 분명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었는데. 미자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귀신으로 오래 지내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판단력도 흐려지고 기억력도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근데 덕이는 구슬이 없다며.”
“몰라. 무슨 꿍꿍이인진 모르지만 필요가 있으니 데리고 있는 거겠지.”
두 사람이 대화하며 집 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도심 거리는 한마디로 난리법석이었다. 귀신 반 사람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덕이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영신은 차에 두고 온 게 있다며 키를 건네주고 먼저 가 있으라고 하더니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15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데 뒤쪽으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전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먼저 인사를 해 왔다. 덕이가 끄덕 인사를 하고 나서 뒤로 시선이 움직였다. 오늘은 저번에 봤던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저번에 봤죠? 저희 아래층 사시는.”
남자가 물었고, 덕이가 네, 하고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남자의 등 뒤쪽을 자꾸 흘깃댔다. 진짜 없어졌네. 어디 갔지? 남자가 그런 덕이를 보더니 가볍게 웃는다.
“뭐 찾으세요?”
덕이가 당황해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더니 문이 열렸고 남자가 들어갔다. 덕이가 주차장 쪽을 쳐다보는데 영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기다릴까 하다 먼저 가 있으라는 말이 떠올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서서히 위층으로 움직였다. 층수가 바뀌는 것을 바라보던 덕이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무심코 봤다가 흠칫 놀랐다. 남자가 엘리베이터 한쪽에 기대서서 덕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기분 나쁘게. 슥 시선을 피하는데 남자가 픽 웃는 소리가 들린다.
“꼬리 나왔어요.”
덕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곧바로 제 엉덩이를 돌아봤다. 거기 말고 여기요. 남자가 웃으며 덕이의 주머니 쪽을 가리킨다. 고개를 움직이니 영신이 준 구미호 인형이 주머니에서 반쯤 튀어나와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쿵쿵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애써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팅.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도망치듯 내렸다. 이상하게도 뒷골이 서늘하다.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남자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신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덕이는 보이지 않았다. 손님 방에 있나 싶어 살펴봤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 방으로 갔을 때 욕실에서 첨벙첨벙 물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었더니 덕이가 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반신욕을 즐기는 중이었다. 얼마나 입욕제를 많이 넣었는지 거품이 흐르다 못해 욕조 밖으로 넘쳐났다. 와락 인상을 구기니 뻔뻔스럽게 손까지 흔들며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투덜댄다.
“말했지. 내 욕실은 쓰지 말라고.”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싶은데, 저기 욕조는 너무 작아서 말이야. 혹시 알아? 내가 기분이 좋아지면 꼬리가 더 생길지.”
얼른 나오라고 쏘아붙이고 나서 문을 닫으려는데 덕이가 엇!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다시 문을 열어 봤더니 곤란한 얼굴로 탕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뭐 해?”
“내가 너 주려고 가져온 게 있는데, 탕 안에 빠진 거 같아. 좀 찾아줘.”
“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씻고 나와. 거품 다 치우고.”
“정말이야. 구슬 만드는 데 정말 중요한 거라 내가 찾아온 건데. 왜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지만 영신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럼 와서 등 좀 밀어달라고 팔이 닿지 않는다고 했더니 영신이 이번엔 한쪽에 걸려 있던 샤워 타올을 덕이의 얼굴에 냅다 집어 던진다.
철썩. 얼굴에 타올이 날아와 떨어졌고 바로 걷어내고 보니 영신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덕이가 긴 한숨을 내쉬고 욕조에 몸을 뉘었다. 첨벙, 첨벙 발장난을 치며 거품을 모아 제 머리에도 얹고, 뺨에도 붙이고 장난을 쳤다.
오늘 영신이가 좀 다정하게 굴길래 빈틈을 파고 들어가려고 했더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냥 밖에서 일을 치를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탕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순간 머리가 핑 돌더니 몸이 휘청인다.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 건가. 몸을 숙여 욕조를 붙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바닥이 미끄럽다. 문 앞으로 가기도 전에 미끄러져 몸이 휘청 뒤로 넘어갔다.
쾅. 소리와 함께 뒤통수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욕실 천장이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콰당 소리와 짧은 비명에 옷을 갈아입던 영신이 욕실 쪽으로 향했다. 이번엔 또 왜 그러는 건데. 하고 문을 열었더니 덕이가 대짜로 뻗어 끙 끙 신음을 내뱉는 중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몸은 여전히 거품투성이었다.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제대로 일어나질 못한다.
“구더기. 너 장난 그만하고 일어나.”
끙끙. 덕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몸이 안 움직인다고 하소연했다. 영신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표정을 보니 진심인 거 같았다. 빌어먹을. 가까이 다가가 덕이의 몸을 살피는데 뒤통수로 피가 흥건하게 배어 나온다. 그제야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전화기를 꺼내 119에 연락을 하는데 덕이가 그 손을 꽉 잡는다.
“안 돼!”
“왜.”
“병원 갔다가 여우인 거 탄로 나면 어떻게 해. 끌려가기 싫어. 실험당하기 싫어.”
아픈 와중에도 절대 안 된다고 울고 난리다. 영신이 고민하다 결국 석현에게 연락했다. 무슨 일이냐고 걱정하는 석현에게 일단 좀 와줄 수 있느냐고 와서 살펴볼 동물, 아니 사람이 있다고 하자 눈치 빠른 석현은 혹시 저번에 봤던 그 사람이냐고 물었다.
거짓말을 할 순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버럭 성질을 냈다. 대체 병원을 가지 왜 자길 부르는 거냐면서. 혹시 불법 체류자냐고 묻길래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 불법 체류자 맞나. 마지못해 오겠다는 말에 전화를 끊고 나서 덕이의 어깨 안쪽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허리가 나간 거 같아.”
“그러게 왜 거품을 범벅해놓고 난리를 피워!”
“소리 지르지 마. 귀까지 아프잖아.”
후우. 영신이 간신히 화를 누그러트리고 덕이를 안아 올렸다. 그러자 팔로 영신의 목을 끌어안으며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다시 던져버릴까 고민하다, 피까지 흘리는 마당에 매몰차게 내칠 순 없어 관두었다.
거품을 대충 닦아내고 욕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물기를 마저 닦아냈다. 침대에 눕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영신아. 혹시 내가 죽거들랑….”
“시끄러워.”
“내 육신을 고향 마을에 묻어주오.”
“…….”
그러더니 눈을 스르르 감는다. 고개를 옆으로 홱 떨구는 시늉까지 하길래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쳐다봤다. 조금 있으면 석현도 올 테고 아무래도 옷을 입히는 게 나을 것 같아 드레스룸 쪽으로 향했다. 대충 사이즈가 맞을 만한 걸 챙겨서 돌아와 보니 덕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일어나. 연기 그만하고.”
묵묵부답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데 숨결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코밑에 손을 댔는데 아무런 온기가 없다. 영신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깨를 붙들고 살짝 흔들었다. 야. 구덕이. 여전히 그 상태다. 심각한 얼굴로 다시 어깨를 흔드는데 고개가 정말로 툭 떨어진다.
“장난하지 말고 일어나.”
여전히 응답이 없다.
“알겠어. 원하는 대로 해줄게.”
덕이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정말? 그 모습에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설마 했는데 이 새끼가. 잠깐이었지만 조금 놀라긴 했다. 어찌나 연기를 감쪽같이 하는지. 하지만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진 감추지 못했다.
“정말이야? 얼른 줘. 얼른.”
덕이가 이불을 걷어치우고 제 다리를 벌렸다. 가운데 덜렁거리는 그것을 보고 영신의 미간이 꿈틀하고 일그러졌다. 이불을 다시 끌어와 덮어줬더니 이번엔 몸을 홱 돌려 침대에 엎드린다.
“이렇게 하면 너도 좀 편할걸.”
“아니. 안 해.”
“방금 해준다며.”
“거짓말이었어.”
덕이가 몸을 바로 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아무리 봐도 상태가 멀쩡하다. 아까 그건 꾀병이었군. 석현에게 연락해 오지 말라고 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내는데 침대에서 내려온 덕이가 알몸인 채로 영신에게 매달린다.
영신이 인상을 팍 구기며 떨어지라고 버럭 성질을 내는데도 듣질 않았다. 끈질기게 매달리며 정기 좀 달라고 애원을 한다. 나중엔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마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억지로 떼어 내려고 하자 다리까지 칭칭 감고서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알몸으로 달라붙어 문지르니 아무리 상대가 남자라고 해도 영신은 아랫도리가 자극되는 걸 느꼈다. 빌어먹을. 가까스로 떼어내고 침대에 내던졌지만, 곧바로 다시 엉겨붙어 결국엔 포기해 버렸다.
그때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던 영신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언제 왔는지 석현이 문 앞에 서서 둘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형이 그런 취향인 줄은 몰랐어.”
“시끄러워.”
석현은 더는 묻지 않았지만 덕이와 영신이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했는데도 좀처럼 믿지 않았다. 벌거벗은 채로 끌어안고 뒹굴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냥 웃기만 했다.
“큰엄마 아시면 난리 나겠다.”
“아니. 너만 입 다물면 그럴 일 없어.”
“형 하는 거 봐서.”
그 말에 영신이 눈을 찡그렸다. 곧바로 석현이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민다. 투명 파일에 들어있는 그것은 대충 봐도 유기견 관련 후원 서류였다. 전에도 몇 번 부탁하는 걸 모른 척했는데 이 상황에서 이걸 꺼내 줄은 몰랐다. 하여튼 치밀한 새끼.
“나한테 두 번 도움 받았잖아. 그럼 보답을 해야지.”
한번 살펴보겠느냐고 서류를 꺼내는 걸 영신이 알았다고 돈 보낼 테니 그냥 두고 가라고 손짓을 했다. 석현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하게 번진다. 오늘 본 일은 절대로 함구한다면서.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노라고. 그때 달칵 문이 열리면서 덕이가 나오더니 석현을 보고 꾸벅 인사를 한다. 석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격식을 갖춰 인사했다.
“저번엔 몰라봬서 죄송했어요. 형수, 아니… 형님…?”
그러면서 영신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다. 영신이 이를 뿌득뿌득 갈며 노려봐서 더는 묻지 못했지만 어쩐지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다. 머리는 괜찮으냐고 묻자 덕이가 뒤통수를 내보인다. 피가 난 거에 비해 상처는 경미했다.
그때 텅, 텅, 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창밖을 내다봤다. 여자 귀신이 다시 나타났다. 텅텅, 머리를 찧는 소리가 이젠 정겹기까지 하다.
낑… 낑…. 이상한 소리가 난다. 영신이 소리가 난 쪽을 봤더니 석현의 발아래 작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아픈 녀석이 있는데 오늘 치료가 끝나 주인에게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막 출발하려는데 형한테 전화가 온 거라고. 한번 보겠느냐고 묻자 영신이 꺼내기만 해보라며 엄포를 놓았다. 석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지를 열어 흰 강아지 한 마리를 꺼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아지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석현이 의아한 얼굴로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쪼꼬야. 왜 그래? 이 녀석 왜 이러지? 겁먹었네.”
덕이가 강아지를 보더니 후다닥 뛰어온다. 우와! 짱 귀엽다. 석현이 한번 안아보겠느냐고 했고, 덕이가 손을 내미는 순간 강아지가 기겁하고 뛰쳐 내려와 구석에 박혀 오들오들 떨었다.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손을 거둬들였다. 석현이 다정스레 강아지를 다시 안아 올렸지만, 겁을 먹은 건 여전했다. 덕이가 나는 그만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제 방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석현이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 혹시?”
“뭐.”
“미성년자는 아니지?”
그 말에 영신이 인상을 썼다. 구미호 나이로 치면 미성년자일지 모르지만 녀석은 엄연히 여든아홉이나 처먹은 여우다.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할아버지겠지. 설명하기도 귀찮아 그냥 가라고 손짓을 하니 석현이 강아지를 케이지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알았어, 갈게. 하여튼 나중에 봐.”
“가, 얼른.”
일어서던 석현이 덕이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한다. 이번엔 다른 의미였다. 그 모습에 영신이 등을 떠밀었다. 석현이 법력을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니지만 집안의 피가 흐르는 건 사실이다.
더 있다간 눈치챌지도 몰랐기에 얼른 가라고 재촉했다. 그가 사라지고 난 집 안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
“덕이 왔어?”
미자의 반가운 인사에 덕이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미자. 아침에 눈 떠보니 영신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돌아올 때까지 꼼짝 말고 있으라는 종이 한 장을 남겨두고서 말이다. 어젯밤 그러고 나서 부끄러웠던 것일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일을 치렀을지도 모르는데. 망할 개장수 동생이 나타나서.
“너 원래 이름이 구더기라며?”
덕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인태가 낄낄대며 구더기가 뭐냐고 놀린다. 구덕이라고 정확하게 발음해줬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부른 게 확실했다. 대체 저건 어디서 들었지. 참 소문이 빠른 동네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구를 빼고 덕이라고만 부르라고 했더니 그렇게 싫으면 구더기 말고 누더기는 어떠냐고 농담을 던진다.
덕이가 이를 으르릉 드러냈다. 구슬만 있으면 혼내주는 건데.
“대체 뭐가 부끄러워서 이름을 숨겼어?”
“숨긴 거 아니거든!”
“근데 왜 김덕이라고 했을까?”
“잠깐 헷갈렸어.”
“파하하. 너도 미자 닮아가?”
미자가 어린애 그만 놀리라면서 타박했고, 인태가 어리긴 누가 어리냐고 너 그 정도면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 아니냐고 이번엔 타겟을 바꿔 미자를 놀렸다. 미자가 무시하고 다른 쪽으로 가버리는데 인태가 덕이에게 전에 알려준 건 연습했느냐고 묻는다.
덕이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들 겁주는 걸 연습하라는데 딱히 자신이 누구 겁주는 외모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귀여움 받는 게 더 좋은데.”
인태가 콧방귀를 끼었다. 먹고 살려면 귀엽기만 해선 안 된다고. 그러면서 미자에게 시범을 보여달라고 했다. 창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미자가 귀찮은 얼굴로 됐다고 하자 인태가 그녀를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우리 미자가 겁주는 덴 선수지. 성공률 99.9 프로를 자랑하거든. 이 바닥에서 얘처럼 사람들 겁 많이 준 귀신 없을걸. 전에 어떤 남자는 오줌을 싸면서 뛰쳐나갔다니까.”
뭘 그렇게까지. 미자가 무안한 얼굴로 하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옆에 있던 덕이가 존경의 눈빛으로 미자를 쳐다봤다. 어떻게 하면 겁을 잘 주느냐고 물었더니 네가 잘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 덕이가 잠시 고민하다 혀를 쭉 내밀고 동글게 말아 보였다.
“이근으데?”
지켜보던 인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이번엔 눈을 가운데로 모은다.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하고 눈동자를 각자 따로 움직이기도 하고. 마치 도마뱀 같았지만 무섭진 않았다.
“뭐야, 그게?”
덕이가 엄지를 뒤로 꺾어 팔에 붙여 보았다. 이건 좀 신기하냐고 물으니 인태가 콧방귀를 낀다. 쩝. 덕이가 그럼 없다고 했더니 이번엔 미자가 몇 가지 기술을 선보인다. 머리를 풀고 스르르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 등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 그리고 소파 옆에 쭈그리고 앉아 상대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몸을 뒤집어 거미처럼 기어오는 것까지.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은근히 뒷골이 서늘해진다.
“미자… 쩐다.”
“갑자기 확 튀어나오고 이런 건 잠깐이야. 은근히 무서운 게 진짜 무서운 거거든.”
“은근히?”
“그래. 보일 듯 말 듯. 들릴 듯 말 듯. 아,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닌데 분명히 봤는데. 그러면서 서서히 조여오는 그 공포가 정말 공포지. 상상하니까 무서운 거라는 말이 있어. 바로 이 심리를 이용하는 거지. 무조건 왁! 하고 놀라게 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효과적이야.”
아아. 덕이가 메모할 기세로 경청하는데 인태가 말 나온 김에 공포 영화나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자기가 엄선한 영화가 몇 개 있는데 거기 나오는 기술만 습득해도 평타는 칠 거라고 말이다. 덕이가 잠시 고민했다.
“나… 무서운 거 별로 안 좋아해서….”
“괜찮아. 누나가 있잖아.”
재빠르게 다가온 미자가 덕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뺨을 만졌다. 아유, 요 볼살 탱탱하고 매끈한 것 좀 봐. 누가 너를 여든아홉으로 보겠니. 완전 아기 피분데. 덕이가 그 손길을 슬그머니 떼어내고 두어 발짝 옆으로 비켜났다.
미자가 더 옆으로 다가오며 혹시 여자 친구가 있었는지를 묻는다. 덕이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여자친구는커녕 친구도 별로 없었다고, 자신은 반쪽짜리 구미호라 어릴 때부터 따돌림을 많이 당했다고 말이다.
듣고 있던 미자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네 친구 해줄게.”
친구는 무슨. 인태가 어떻게 귀신이랑 구미호랑 친구가 되느냐고 투덜댔다. 덕이 역시 잠시 고민했다. 친구라고 하면 우림이 먼저 생각나서였다. 또 친구를 만들어도 되는 걸까. 상처받지 않을까. 배신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미자와 투덜투덜하면서도 은근히 챙겨주는 인태를 보고 있으니 어쩌면 이번엔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알겠다고 하자 미자가 환하게 웃는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말에 덕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흰색 고급 승용차가 카페 주차장 한쪽에 멈춰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영신이 내렸다. 한낮의 더위는 찌는 듯했고, 불쾌지수 또한 높아 에어컨 없이 버티긴 힘든 날이었다. 카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매우 불만족스러웠다.
고객을 만나는 중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동연에게 할 말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없다고 딱 자르니 보여줄 게 있단다. 시답잖은 방송 얘기라면 집어치우라고 했더니 그날 일을 언급했다. 구덕이를 처음 만난 그 날 말이다. 동영상인데 이상한 게 찍혔다면서, 네가 보면 꽤 흥미로워할 거라는 얘기에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속 장소로 오긴 했는데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저를 낚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가 쪽에 앉아 커피를 음미하는 동연의 모습이 보였다.
먼저 영신을 발견한 그가 손을 흔들며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영신이 그리로 가서 의자를 끌어냈다. 선글라스를 벗어 한쪽 주머니에 꽂아 넣은 후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 그러고 나서 왜 불렀느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사람 보면 좀 반가운 척이라도 해라.”
“안 반가운데 어떻게 반가운 척을 할까. 가증스럽게.”
그래, 너 잘났다. 동연이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왜 오라고 한 거야. 바쁘니까 10분 이내로 말해.”
“차라도 마셔.”
“아니. 됐어.”
하여튼, 성미하곤. 동연이 가방을 뒤적인다. 뭐 보여줄 게 있다면서. 그의 손에 잡혀 나온 건 작은 봉투였다. 그가 봉투를 열어 테이블 위에 쏟자 사진 몇 장이 딸려 나온다. 대충 봐도 그날 굿판에서 찍힌 것들이었다. 동연이 그것들을 영신 쪽으로 밀었다.
“이거 영상 캡쳐한 건데, 봐봐.”
영신이 사진들을 하나씩 살폈다.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그날 굿판에서 찍은 것들. 그러던 중 사진 한 장에서 멈칫한다. 자신과 덕이가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정확히는 굿상 위에 올라가 음식을 집어 먹던 덕이와 마주친 그 장면이다.
“뭐가 보여?”
영신이 코웃음을 쳤다. 저는 뒤통수만 보이고 덕이는 멀어서 그런지 제대로 뭐가 나오지도 않았다.
“심령사진이야? 내가 뭐 찾아야 해?”
영신의 태도에 동연은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그러더니 다음 장을 넘겨보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뒤로 넘기니 이번엔 자신이 덕이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는 사진이다. 조금 전보다 더 클로즈업된. 이게 뭐, 하던 영신이 멈칫했다.
덕이의 어깨 위로 무언가 하얀 것이 솟아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건 하나가 아니었다. 영신이 눈으로 그것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아홉…?
“그게 뭔 거 같아?”
“…….”
“혹시 혼령인가?”
영신이 사진을 쥔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찍혔지.
[지금은 감춰져 있지만, 본래는 아홉 개가 다 있어.]
정말 꼬리가 아홉 개 있다니.
“혼령 맞지?”
동연의 물음에 영신이 그를 쳐다봤다. 놀란 기색을 지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잘 모르겠다고, 사진으로만 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인쇄할 때 다른 것과 겹쳐지면서 생긴 거 같다고 둘러댔다.
“얼핏 꼬리 같지 않아?”
하. 영신이 입가에 비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꼬리 같네. 혹시 모르지, 구미호일지도.”
그 반응에 동연이 쩝 입맛을 다신다. 역시 혼령은 아니구나. 하고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다. 영신의 말을 농담쯤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그가 사진을 챙겨 봉투에 넣으려고 하길래 영신이 마지막 사진을 손으로 탁 잡아챘다. 이건 내가 가져가지.
“왜.”
“내 잘생긴 얼굴이 찍혔잖아.”
인상을 슬며시 구기던 동연이 그러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프로그램 개편하는데 그때 게스트로 나와줄 수 없느냐고 묻는다. 영신이 아는 선배의 프로그램에 한 번 출연한 걸로 인터넷에서 떠들썩하게 유명 인사가 된 적이 있는데 그 유명세를 좀 이용해볼 참이었다.
하지만 영신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런 거 취미 없다면서. 그러면서 시간을 확인한다. 점심이 훌쩍 지났다. 혼자서 밥은 먹고 있으려나.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왜 그 이상한 여우 생각을 하는지 의아해졌다. 툭하면 사람한테 들러붙어 정기나 빼먹으려고 하는 여우 자식인데 말이다.
그만 가볼게. 예의상으로라도 나중에 보잔 말을 하지 않는 영신을 보며 동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정 없는 친구 아닌가. 영신이 사진을 품 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왔는데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가.”
“됐어.”
“애인이 기다려?”
“아니. 그리고 난 애인 따위 안 만들어. 그 시간에 돈을 버는 게 훨씬 좋거든.”
동연이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돈이 없는 집 자식도 아닌데 왜 저렇게 돈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럼 차라도 마시라고 했더니 영신은 그마저도 거절한 채 선글라스를 쓰고 카페를 나섰다.
그는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며 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자신이 없는 사이 또 사고를 치는 건 아닐까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랬는데 고객의 사정으로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우림인가 뭔가 그 친구가 해줬다고 휴대폰이 드디어 정지됐나 보군.
운전석에 앉으며 시동을 켰다. 설마 별일 있겠냐는 생각으로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낯선 번호다.
“네, 여보세요.”
[여기 남부경찰섭니다. 박영신 씨 되시죠? 일전의 그 일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이런 젠장.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알겠다고 곧 가겠다고 통화를 마친 그의 얼굴이 어둡다. 요 며칠 번거로운 일이 자꾸만 늘어나는 기분이다. 그게 누구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으악. 덕이와 미자, 인태가 소파에 앉아 물고기처럼 파닥이며 비명을 질렀다.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나니 무서운 장면이 지나간 후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보니 저도 모르게 소파에 셋 다 올라온 상태였다.
서로 머쓱해져서 눈치를 살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덕이가 미자와 인태를 번갈아 쳐다봤다. 전에도 봤다고 하지 않았나. 저는 원래 겁이 많으니 그렇다 치고 얘들은 귀신인데 왜 이걸 보면서 무서워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른 거 볼까?”
“무, 무슨! 기술 습득하려면 이게 최고야.”
미자의 말에 덕이가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영화는 대충 이러했다. 같은 반 친구가 주인공을 질투해서 살해하는데, 그 죽은 주인공이 귀신이 되어 복수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귀신이 나타나는 곳은 주로 침대 밑이나 벌어진 장롱 틈, 문틈이 많았다.
인태가 말하길, 이 영화의 배울 점은 ‘돌아보면 없고.’라고 했다. 아까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면서, 절대 처음부터 보여주지 말고, 천천히 옷 벗듯이 보여주는 게 관건이라고. 공간을 활용해 놀라게 하는 기술이 핵심이라고도 설명해줬다.
귀신과 주인공이 어쭙잖게 마주쳤다가는 서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막말로 똥 싸고 있는데 갑자기 확 나타나면 놀라긴 해도 무서움은 덜 하다고. 그 말을 들으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미자는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누군가 생각나서 마음이 뒤숭숭했다. 내일 또 그 집에 가야 하는데…. 겁에 질린 소녀의 얼굴을 마주하자니 편치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때, 꼬르르, 소리가 들린다. 인태와 미자가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덕이가 민망한 얼굴로 배를 부여잡고 끙, 소리를 낸다. 아침 말곤 여태 아무것도 먹질 못했으니 아까부터 배에서 밥 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난리였다.
“가서 밥 먹고 와.”
“너희들도 같이 갈래?”
“아니. 우린 영신이네 못 가. 거긴 귀신 출입 금지거든.”
덕이가 그러냐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혼자 있는 건 싫은데. 영신이는 언제쯤 오려나.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만 더 있다가 간다고 하자 인태가 우리도 일하러 가야 한다면서 너는 가서 밥이나 먹으란다.
“일하러?”
“어. 일해야 돈을 벌지.”
꼭 누구처럼 말하네. 덕이가 중얼댔다. 인태가 혹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현장 체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면서 덕이를 설득했다. 고민하던 덕이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 영화의 남은 부분을 마저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