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4/10)

밥을 먹고 나와 인태, 미자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거리엔 온통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사이사이 다양한 귀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최대한 그들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덕이는 노력했다. 괜히 알은척해서 들러붙으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웬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마을은 불빛 없이 어두컴컴했다. 가로등 몇 개가 있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불이 나가 들어오는 건 고작 한 개뿐이었다. 그 검은 집 중 오직 한 집만이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집을 보며 미자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저 양아치 조폭 놈을 오늘은 꼭 내쫓고 말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저 새끼, 엄청 질기네. 그때 꼬라지로 봐선 다신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게. 오늘은 꼭 쫓아내자.”

두 사람이 으쌰! 으쌰! 파이팅을 하는 사이 덕이가 동네를 둘러봤다. 여기저기 빨간 래커로 철거라고 칠해진 동네는 험악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그때 덕이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웬 꼬마 혼령 하나가 벽에 숨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쟤가 우릴 쳐다보는데?”

그 말에 미자가 고개를 돌려본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곳에 있었다.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려고 하자 인태가 귀찮은 일 만들지 말라면서 미자의 등을 떠민다. 그냥 들어가서 우린 우리 일만 하면 되는 거라고. 그러면서 덕이에겐 여기에 남아 기다리라고 했다. 만약에 놈이 도망치거든 네가 겁을 주라고.

“아까 봤지?”

덕이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저는 긴 머리카락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놀래킬 재주도 없는데. 손톱이라도 세워볼까 했지만, 손톱 역시나 툭하면 물어뜯어서 굉장히 짧다. 인간들은 이걸 뭐라고 부른다던데. 애정결핍이라나. 우림이 말해주었다.

“알았으니 다녀와….”

소심하게 대답하고 나자 미자와 인태가 그쪽으로 슥 들어간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덕이가 주위를 둘러봤다. 꼬마 귀신은 여전히 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말 섞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귀찮아지는데.

하지만 심심하기도 하고,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해 보였다. 꼬마가 눈치를 살피더니 곧 이쪽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온 꼬마를 보며 덕이의 눈이 잠시 커졌다.

팔다리는 꺾여있고 온몸이 멍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그게 너무나 잘 보여 덕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애써 모른 척하며 거기 앉으라고 했더니 바로 앞에 덕이과 같은 자세로 쭈그리고 앉는다.

“넌 여기 살아?”

꼬마 귀신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더니 곧 집 하나를 손으로 가리킨다. 철거라고 크게 글자가 적힌 파란색 대문집이었다. 가족들은 다 떠난 거 같은데. 어쩌다 이 꼬마는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어린 상대라도 처음 본 귀신에게 이것저것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관두고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앞에 앉은 꼬마가 그것을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봤다.

상철이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티브이에선 야한 영화가 한창이었다. 그걸 보던 상철이 바지 안으로 손을 넣더니 주물럭주물럭 만지기 시작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미자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아, 더러워. 인태 또한 못 볼 걸 봤다는 듯 찡그린 인상을 펴질 못했다.

“아무래도 오늘 날을 잘못 잡았나 봐.”

“가끔 나는 내가 왜 이 짓을 하나 싶다.”

미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다음에 올까. 술은 인간을 용감하게 만든다. 저놈이 지금 술을 처먹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자신들이 나타난다고 별 효과가 있을 거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을 서둘러 마치지 못하면 영신의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잠시 고민하던 미자가 인태를 툭 쳤다.

“그냥 시작하자.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어.”

순간 인태의 얼굴이 확 더 일그러진다. 아, 씨발. 하지 마. 야야, 저 새끼 고추 꺼냈어. 미자가 돌아봤더니 상철이 성기를 꺼내 벽에 바싹대고 문지르며 끙끙 신음을 내뱉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허리를 더 돌려보라는 둥 엉덩이를 더 세우라는 둥 음란한 말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미자의 얼굴도 인태와 똑같이 구겨졌다. 토할 거 같아. 입을 틀어막으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예주라는 소녀를 괴롭히는 일도 못 할 짓이지만 이런 일 또한 고역이긴 마찬가지였다. 미자가 시작하자며 손짓을 보내자 인태가 젖먹던 힘을 짜내서 전등 스위치를 내려친다. 꿈쩍도 하지 않는 스위치를 내려치고 또 내려치다 보니 어느 순간 팟 불이 나가버렸다.

벽에 대고 자위하던 남자가 행동을 멈추고 집 안을 둘러봤다. 뭐야, 시발. 한참 좋았는데. 바지를 추스르며 스위치 쪽으로 한걸음 떼는데, 쿵, 쿵, 쿵 무슨 소리가 들린다. 이게 무슨 소리지. 상철이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밝혔다. 집 안을 둘러보는데 냉장고 옆에 검은 형체가 서 있는 게 보인다.

“누, 누구야!”

악을 쓰자 그 검은 형체가 냉장고 옆에 서서 이마를 벽에 찧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상철이 힉.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고 라이터를 떨어트렸다. 주섬주섬 손으로 라이터를 다시 찾으려고 더듬었다.

겨우 찾아내 엄지로 부싯돌을 움직이는데 찰칵, 찰칵 소리만 날 뿐 불이 켜지지 않는다. 후룩, 순간 불이 켜졌고, 상철은 그 자리에 얼음장처럼 굳었다. 바로 눈앞에 머리 긴 여자가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며 저를 보고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덜덜, 라이터를 든 손이 마구 떨렸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상철의 등 뒤로 누군가 나타난다. 웃고 있던 미자의 눈이 커졌다. 훅, 어둠을 밝히던 라이터의 불빛이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쩍하더니 상철의 등에 내리꽂혔다.

끄아악! 상철의 소름 끼치는 비명에 놀란 미자가 다급하게 인태를 찾았다. 야! 불 켜! 인태야, 불!

인태가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마구 쳐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어둠 속에서 동시에 무언가 쳐대는 소리가 들린다. 푸슉, 푸슉, 푸슉.

미자가 얼른 켜라고 소리쳤지만, 실내등은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다. 아 씨발! 왜 안 켜져, 이게! 퍽, 퍽, 아악! 억! 어억... 어.... 남자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달칵, 불이 켜졌고 방 안은 환해졌다. 미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제 눈앞에서 벌벌 떨던 남자가 칼로 난자당한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스위치 옆에 있던 인태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검은색 우비를 입은 낯선 남자가 상철의 목에 박아둔 칼날을 훅 빼냈다. 컥. 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상철이 눈을 뜬 채 그대로 죽어버렸다.

뚝, 뚝, 피가 떨어지는 칼날을 제 바지 위에 닦은 남자가 장화를 신은 발로 상철을 슥 돌려 눕히더니 뒤쪽에 뒀던 가방 하나를 가져온다. 인태와 미자가 질린 얼굴로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더니 상철의 옷을 벗겨 내고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미자가 차마 더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고, 인태는 사내를 노려보며 그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곧 상철의 배에서 나온 장기 하나가 남자가 가져온 가방 안으로 들어갔고, 남자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걸 들고 일어서더니 문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 중 누구 하나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스쳐 가는 남자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번진다. 철컥, 등 뒤로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남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영신의 얼굴이 슬며시 구겨졌다. 일을 마치고 밤늦게 와보니 미자와 인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귀신인데 귀신 봐서 놀란 건 아닐 테고. 그리고 보니 덕이 옆에 못 보던 혼령 하나가 붙어있다.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쪽으로 다가가자 꼬마 혼령이 재빨리 덕이의 등 뒤로 숨어버린다.

“구더기. 너 이거 뭐야?”

구더기란 말에 인상을 확 구겼다가 성난 목소리에 곧 움츠러든다. 우물쭈물하더니 덕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얘… 밖에서 만났는데.”

“그런데?”

“오갈 곳이 없어서 내가 데려왔어.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이런 젠장. 영신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사정이 딱하다고 아무 혼령이나 데리고 오면 어떡하느냐고. 자신이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고. 봤어도 모른 척하고 함부로 말을 걸지 말라고 했는데 귓등으로 들은 거냐고 다그친다.

영신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꼬마 혼령은 겁을 먹고 덕이의 등 뒤로 숨어 바들바들 떨었다.

“…그렇게 화내지 마. 겁먹었잖아.”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내일 당장 있던 곳에 데려다 주고 오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너도 이 집에서 쫓겨날 줄 알라고 말이다.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있는데 미자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 말을 꺼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은 일을 다 털어놨다.

상철을 겁주려고 갔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사내가 나타나서 칼을 휘둘렀다고. 상철을 죽이고 그의 배를 갈라 장기 하나를 쏙 털어 가더라고 말이다. 그 말에 영신이 미간을 좁혔다. 장난해?

“농담 아니야. 정말이야. 지금쯤 경찰 오고 난리가 났을걸. 난 그런 장면 처음 봤다니까. 얼마나 무섭고 심장이 떨리는지.”

미자가 제 가슴을 부여잡았고, 인태가 진정하라며 그 손을 잡았다. 하지만 두렵기는 저도 마찬가지였다. 미자를 지나친 남자가 문 앞으로 다가왔는데 꼭 눈이 마주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태는 그게 제 기분 탓이길 바랐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서 자위하던 상철은 처참하게 죽었고, 곧 혼령이 되어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에 미자랑 인태가 기겁해서 집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도무지 어찌 된 영문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남자를 쫓아갔어야 하나.

“대체 누굴까. 그 남자는.”

“그놈 깡패에 전과도 많다며. 원한 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

“그럼 죽이기만 하면 되지. 장기는 왜 빼가냐 이 말이야.”

“낸들 알아. 먹으려고 빼갔나?”

“구미호냐?”

대화하던 미자와 인태의 시선이 꼬마 혼령과 놀고 있는 덕이에게로 향했다. 덕이가 왜 날 쳐다봐? 하고 졸린 얼굴로 물었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녔더니 피곤한 모양이었다. 으하암.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는 모습에 두 혼령이 다시 고개를 돌려 영신을 쳐다봤다.

“하여튼. 보통 일이 아니야.”

영신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저 말고 그쪽 부지에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 그들 중 하나일까 생각했지만, 장기를 빼간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굳이 그걸 빼갈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단 쉬라고. 그 일은 자신이 내일 알아볼 테니. 그러고 나서 덕이를 불렀다. 그만 자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덕이가 꼬마 혼령에게 인사를 했다. 내일 올 테니 여기서 이 아저씨, 아줌마와 잘 있으라고. 그 말에 인태와 미자는 발끈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사무실을 빠져나와 옆의 집으로 들어갔다. 영신이 슬리퍼를 갈아신고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네 마음대로 혼을 주워오면 어쩌느냐고 덕이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그 말에 덕이가 억울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데려온 건 맞지만, 처음에 따라온 건 걔라면서. 차마 매몰차게 뿌리칠 수 없어 데려온 거라고.

“네가 먼저 말을 걸었으니 그랬겠지.”

“아니 나는… 어린애가… 혼자 있으니까 딱하기도 하고…. 마음이 그래서….”

“네 그 어쭙잖은 동정심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 줄 알아?”

영신은 오늘 경찰서에 가서 진술한 일을 떠올렸다. 덕이를 만난 날 산에서 발견된 사체를 자신이 신고했는데, 가족들이 나타나서 절대 자살할 양반이 아니라고 부검 의뢰를 했단다. 그것 때문에 경찰은 최초 발견자인 영신을 다시 나오라고 한 거고 이것저것 묻는 바람에 낮 동안 계속 시달려야만 했다.

영신이 씻으러 가는데 덕이가 쪼르르 따라 들어간다. 그가 재킷을 벗는데 그의 옷에서 뭔가 하나 팔랑하고 떨어진다. 덕이가 몸을 숙여 그것을 줍자마자 영신이 무섭게 채갔다.

“내놔.”

입을 삐죽거리던 덕이가 아까 만난 꼬마 혼령에 대해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실은 걔가 거기 살다 죽었는데 부모가 방치하다가 집 마당에 파묻고 사라졌다고 말이다. 지금이라도 시신을 거둬 천도재를 지내줄 수는 없느냐고.

영신이 기막힌 얼굴을 했다.

“오지랖도 그 정도면 병이다.”

“불쌍하잖아. 어린데.”

“사연 없는 영혼이 어디 있어. 막상 밖에 나가 봐. 어릴 때 죽은 애가 걔 하난 줄 알아?”

“그래도….”

영신이 딱하다는 얼굴을 했다. 네 처지나 생각하라고. 지금 네 코가 석 잔데 남 걱정 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 있느냐면서 말이다. 그 말에 덕이가 슬그머니 영신의 곁으로 와 붙어선다. 영신이 눈을 가늘게 늘이고 내려다봤다. 뭐하는 짓이야?

“그래서 말인데, 영신아.”

은근슬쩍 몸을 붙이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무래도 또 수작질을 부리려나 보다. 영신이 그만 떨어지라며 이마를 옆으로 확 밀었더니 덕이가 두어 발짝 떨어져 입을 삐죽 내민다. 100억 벌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한 거 아니냐고.

평소 같으면 네가 꼬리가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한마디 쏘아붙였을 텐데,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사진 때문이었다. 거기에 분명 덕이의 꼬리가 정확하게 9개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흐릿하긴 하지만 그건 분명 꼬리였다. 그렇다면 정말 있다는 얘긴데. 게다가 100살도 안 됐는데 꼬리가 아홉이라니. 보통 몇백 년 넘게 산 여우들이나 가능한 거다. 근데 왜 구슬은 없을까. 하아. 차라리 꼬리마저 없었다면 그러면 그놈의 100억 깨끗하게 포기하고 물러설 텐데. 젠장. 빌어먹을.

벽에 기대서서 저에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는 덕이를 보며 영신이 못 본 척 몸을 돌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덕이가 또 쪼르르 쫓아오길래 욕실 문을 쾅 닫으려고 했더니 얼른 그 안으로 발을 집어넣는다.

차마 그대로 눌러 버릴 수는 없어서 힘을 뺐더니 문이 열리고 덕이가 배시시 웃었다. 할 말이 더 있다면서, 중요한 얘기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데.”

“나 전화기가 고장 나서 그러는데… 좀 고쳐 주면 안 될까?”

요금 안 내서 끊긴 건데 고장 난 줄 알았나 보다. 쯧, 당장 급할 때 아쉬운 건 저니 알겠다고 대답해줬다. 덕이가 고맙다며 입술을 꼬물거린다. 영신이 그 입술에서 눈을 떼고 몸을 돌렸다.

곧 문이 닫히고 덕이는 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았다. 혹시 무슨 소리라도 들리나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 세워 영신의 침대로 폴짝 뛰어올랐다. 팔다리를 쭉 뻗고 대자로 누워있으니 너무나 편하다. 몸도 노곤하게 늘어지니 눈이 저절로 감겼다.

영신이 씻고 나와보니 덕이가 제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누워 잠들어 있었다. 하아. 긴 한숨을 토해내며 가까이 다가가서 덕이를 툭툭 건드렸다. 야. 야. 나가서 자. 으음. 덕이가 이불을 돌돌 말며 몸을 웅크린다.

몇 번 더 깨웠지만 피곤한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꼴을 보니 자는 척을 하는 건 아닌 거 같고. 결국 영신이 포기한 채 의자에 앉았다. 아까 동연이 건네준 사진을 다시 꺼내서 유심히 들여다봤다.

꼬리가 보인다. 고개를 들어 침대에 누워있는 덕이를 보니 꼬리가 없다. 번갈아 꼬리가 있는 덕이와 없는 덕이를 쳐다보며 또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때 잠을 자던 덕이가 무슨 일인지 흐느낀다.

하지 말라고 때리지 말라고 애원한다. 아무래도 꿈에서 괴롭힘을 당하나 보다. 쯧, 영신이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어컨 바람이 찬 것 같아 돌돌 말고 자는 이불을 빼서 덮어주자 구겨졌던 얼굴이 펴지며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여우와 같은 공간에 잘 수는 없어 제 베개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텅텅, 위층 여자 귀신이 창문에 기대 또 머리를 찧어댄다. 요즘 들어 횟수가 잦아진 느낌이다. 그대로 날려버릴까 하다 관두고는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팔을 베고 높다란 천장을 바라봤다. 넓디넓은 집은 조용하다 못해 삭막하다. 하지만 영신은 이 삭막함이 좋다. 어릴 적부터 귀신을 보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이런 것들이 더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가만히 눈을 감고서 덕이에 대해 찬찬히 고민했다. 일단은 꼬리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나머지는 제 결정이다. 눈 딱 감고 한번 할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람도 아니고 여우와 그 짓이라니. 게다가 수컷이지 않은가.

어젯밤 석현이 데리고 온 강아지가 떠올랐다. 자연스레 그 강아지와 덕이가 겹친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정말 아닌 거 같아. 하지만 100억이 어디야.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거 해주겠다는데.

근데 하던 중에 녀석이 여우로 변하면 어쩌지. 시발. 아, 그만. 더는 상상하기 싫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밖으로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영신이 성기를 붙잡고 앞뒤로 문지르는 사이 덕이가 양손을 뒤로 뻗어 제 엉덩이를 벌렸다. 상체를 납작 엎드리고 엉덩이만 위로 치켜든 그 모양새가 참으로 볼만했다. 이윽고 성기가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작고 여린 구멍은 커다란 성기를 야금야금 잘도 먹어 삼켰다.

조여오는 느낌이 장난 아니다. 영신이 이를 꾹 물었다. 구미호라 그런 건가. 빨래 쥐어짜듯 애널 속살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큭. 끝까지 밀어 넣고 나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아.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뒤로 뺐다가 앞으로 콱 박을 때마다 덕이가 뺨을 시트에 비비며 자지러진다. 저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라 허리 움직임이 빨라진다. 덕이가 고개를 돌려 영신을 보는데 눈은 완전히 풀려 입에선 침까지 질질 흘러내린다.

영신이 엉덩이를 꽉 움켜쥐며 허리를 세차게 움직였다. 퍽, 퍽, 퍽,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난잡하게 들리는 가운데 덕이가 비명과 신음을 동시에 내질렀다.

“으응… 더, 더, 더더더.”

“씨발. 이래도, 만족이, 안 돼?”

덕이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리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우우우- 영신이 흠칫 놀라 동작을 멈췄다. 아우우? 기다렸다는 듯 덕이의 엉덩이 위쪽으로 새하얀 꼬리털이 생겨난다.

하나, 둘, 셋 점점 늘어나더니 꼬리가 아홉 개가 된다. 영신이 몸을 뒤쪽으로 물렸다. 성기가 구멍에서 쑥 빠져나와 꺼덕이다 푸시시 식어버린다. 뭐야 이게. 놀란 것도 잠시 덕이가 고개를 천천히 이쪽으로 돌린다.

조금 전까지 흥분에 들떠 신음을 내지르던 얼굴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그가 입꼬리를 올려 씩 웃는다.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러더니 번개처럼 영신을 향해 달려들며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순식간에 배가 갈리고 그 틈으로 제 주둥이를 집어넣어 내장을 미친 듯 뜯어먹는다. 저리 가! 살려 줘! 영신이 비명을 지르며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씨발. 뭐야. 이 개 같은 꿈은.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가 다시 한 번 흠칫했다. 덕이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영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손엔 아이스크림 통이. 한 손엔 수저가 들려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시선이 오가고 덕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깼네?”

영신이 입을 달싹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금 전 그게 꿈인 건 분명하다. 평소 꿈을 잘 꾸지 않는데 어찌나 생생하던지 제 성기가 덕이의 엉덩이 사이로 드나들던 그 느낌마저 실제 같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덕이의 가랑이 사이에 한 번 머물다가 떨어졌다. 이 자식이 요술을 부린 건 아닐 텐데.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자다 일어났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이거 아이스크림 나 먹어도 돼?”

“…이미 먹고 있잖아.”

“어? 그러네. 그럼 먹는다.”

덕이가 아이스크림을 한입 푸욱 떠서 입에 넣었다. 꽤 됐는지 걸쭉하게 녹아 손등으로 툭, 툭, 떨어진다. 새빨간 혀를 내밀어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핥으면서 영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마치 너도 이렇게 빨아 줄게, 하는 것처럼.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라 영신이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따구로 처먹는 건데. 몸을 일으켜 앉으니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찝찝한 마음에 씻으려고 일어서는데 덕이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덩달아 테이블에서 내려온다.

“어디 가?”

“씻으러.”

“일어나자마자?”

“응.”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렸어?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덕이가 손을 뻗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려고 하자 영신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세게 쳐냈다. 찰싹! 손등이 시뻘겋게 될 정도로 얻어맞자 덕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파!”

“손대지 마.”

영신이 몸을 돌려 욕실 쪽으로 갔고, 덕이가 그 뒤를 졸졸 쫓았다. 하지만 안방으로 가기 전에 문이 닫혀버렸다. 닫힌 문을 열려고 하니 이번엔 아예 잠가버린다. 덕이가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일어나자마자 반가워서 그런 건데, 되게 쌀쌀 맞네.

이래서야 정기는커녕 매나 안 맞으면 다행인데. 하아. 작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떠서 입에 쑥 넣었다. 서운함도 잠시 달콤한 딸기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아아, 달다. 너무 맛있어.

종잇장처럼 구겨진 영신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침을 먹고 덕이를 사무실에 데려다 주고 나가려고 했는데 어제 봤던 꼬마 귀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데려다 주라고 했으니 알아들었겠지, 하는데 덕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아이의 사체가 집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데 그걸 찾아줄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도 해주란다. 혹시 번거롭지 않으면 천도재도 지내주고. 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일을 다시 꺼내기에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그 얘기는 끝난 거 아니야?”

“진짜 안 돼?”

“저번에 산에서 발견한 자살자 내가 신고했지. 그것 때문에 어제도 경찰서에 불려갔다 왔어. 그랬는데 뭐? 이번엔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이 아이를 신고해달라고?”

“그게… 왜?”

“경찰이 과연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그 말에 덕이가 망설일 것도 없이 대답했다.

“신고 정신이 투철하구나?”

“씨발!”

영신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어지간하면 아침부터 화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지랄 같은 꿈부터 시작해서 말도 안 되는 걸로 제 시간을 빼앗아 먹으니 저절로 화가 들끓었다.

“좋아. 가서 내가 귀신을 보는 퇴마사라고 해. 거기까진 그렇다 치고.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여기 있는 구미호가 어린 혼령 하나를 데리고 집에 왔다. 그래서 알게 됐다고 그렇게 말할까?”

그 말에 덕이가 흠칫 놀란다. 제 얘기를 하면 잡혀갈지도 모르니 안 된다고 했더니 영신이 그것 보라며 싸늘하게 말을 이어갔다. 네가 피해받는 건 싫고, 내가 피해받는 건 아무 상관 없다는 거냐고 말이다.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건 줄 아냐고 해서 덕이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어린 혼령을 미안하다는 얼굴로 쳐다봤을 뿐이었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 그럼 너희 고모한테 말해서 천도재만이라도…. 아니면 사체라도 찾아서 제대로 수습해주는 건….”

“그만해.”

“찾아주면 좋잖아…. 신고까진 아니어도… 찾아서 제대로 묻어주기라도 하면 안 돼?”

영신이 손을 들었다. 그만. 그만해. 돌림 노래도 아니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더는 이 일로 에너지를 쏟기 싫어 인태를 불렀다. 둘의 싸움에 끼기 싫어 딴청을 부리고 있던 인태가 귀찮은 얼굴로 다가왔다.

“구덕이 대신 네가 데려다 주고 와.”

“박 대표. 나도 바빠.”

분명히 말했어. 영신이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 뒤에 대고 인태가 나도 바쁘다며 꽥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인태가 덕이를 확 째려봤다. 그러기에 왜 쟤를 데리고 와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느냐고 말이다.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꼬마 혼령에게로 가서 미안하단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꼬마 혼령이 그런 덕이를 올려다보며 씩 웃는다. 그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 덕이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냥 여기다 두면 안 될까? 영신이 오면 숨기면 되잖아.”

“숨긴다고 걔가 숨겨져? 너 박영신이 바보 등신인 줄 알아?”

“이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야. 거기서 혼자 있으면 무서울 텐데….”

덕이가 울상을 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고. 그러다가 미자가 없는 걸 발견했다. 미자라도 있으면 제 편을 들어줬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아침부터 어딜 바삐 가더라고, 따라오면 가만 안 둔다고 해서 더는 묻지 못했다고 말이다.

***

수학 문제를 풀던 여학생 하나가 손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뒤에 서서 소녀의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미자가 손가락으로 3번을 가리켰다.

곧 문제를 푼 소녀가 3번에 체크를 한다. 미자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자신이 어찌하여 답을 아는 건지 모르지만, 보는 순간 계산이 저절로 되면서 답이 풀렸다. 죽기 전에 어마어마한 천재 아니었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드르륵 뒷문이 열리면서 예주가 나타난다.

아이들이 웅성거렸고, 담임이 막대기로 교탁을 탁탁 두드렸다. 조용. 조용.

“…김예주. 보건실에서 더 있지. 괜찮아?”

담임이 예주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네… 괜찮아졌어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예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는다. 평소에 단정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앉아 책상을 쳐다보기만 했다.

옆에 앉은 짝이 책 꺼내라며 툭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랍 안에서 책을 꺼낸다. 대충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서는 또 멍하니 앉아있는다. 미자가 그리로 가서 예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책을 꺼낸 예주가 손을 책상 위로 모으고서 손톱을 딱딱, 뜯는다. 옆에 앉은 짝이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트고 갈라진 입술이 보였다. 눈 밑도 퀭하다.

며칠 괴롭혔더니 효과가 나타나긴 하나 보네. 이대로 가다가는 혜란인지 하는 그 여자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좋아하겠네. 보통 이런 경우엔 뿌듯한데 마음이 허한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미자가 다리를 굽혀 예주를 마주 보고 앉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왜 이 여학생을 신경 쓰는지,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에 대해서. 지금부터 조금씩 알아볼 생각이었다.

***

아침까지 비가 퍼붓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다. 덕이가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언덕을 올랐다. 걷다가 보니 어젯밤 미자와 인태가 들어갔던 집 밖으로 노란색 줄이 처져있는 게 보였다.

남자가 죽었다고 하더니 미자 말대로 경찰이 왔나 보다. 들키면 안 돼. 슬그머니 몸을 피해 파란색 문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삐그덕.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낡은 집기들이 이곳저곳에서 뒹굴었다. 그 뒤를 꼬마 영혼이 스르르 따라 들어왔다.

마당을 둘러보며 이곳이 네가 살던 곳이냐고 묻자 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이가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을 살펴봤다. 문이 덜렁거릴 정도로 낡은 집은 한눈에 봐도 엉망이었다. 방 안 역시도 살림살이가 제멋대로 나뒹굴었다. 어지럽혀져 있는 그것 중 아이가 쓸 만한 물건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집이 맞긴 한 건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선뜻 도와주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우물쭈물하던 덕이가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난 이만 가볼게. 안녕.”

걸어서 나가려 하자 꼬마가 덕이의 옷자락을 붙든다. 감자알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주먹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얬다. 올려다보는 얼굴에선 간절함마저 느껴졌다. 덕이가 그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하지만 너도 봤지? 영신이 말이야. 약속을 어기면 화낼 테니 그럴 수 없어.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거든.”

스륵,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덕이가 미안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파란색 대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는데 꼬마는 그 자리에 서서 덕이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텅 문이 닫히고 덕이가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발에 뭔가 밟힌다.

몸을 구부려 그것을 주웠더니 한 뼘 정도 크기의 작은 인형이었다. 낡고 헤지고 누가 버린 거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그 인형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래도 이 집에 살긴 살았었나 보네. 답답한 얼굴로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는데 저 멀리 남자 혼령 하나가 눈에 띈다.

어제 죽었다던 그 남잔가. 한눈에 봐도 사악해 보인다. 잠시 고민하던 덕이가 다시 몸을 집 쪽으로 틀었다. 영신이만 귀찮게 안 하면 되는 거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거만 하면 상관없겠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꼬마는 아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딘지 알아?”

꼬마가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킨다. 장독대가 있는 자리였다. 덕이가 그곳을 가만히 바라보다 주위를 둘러봤다. 저만치 구석에 삽이랑 곡괭이가 보였다. 우산을 한쪽에 내려놓고 가서 삽을 들고는 꼬마 유령이 말한 자리를 파기 시작했다.

서툰 삽질에 흙은 제대로 떠지질 않았다. 꼬마가 발로 삽 위쪽을 밟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하니 훨씬 쉬웠다. 100년 가까이 산 저보다 더 똑똑하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몇 번 하고 나서 삽자루가 손에 익으니 그나마 나았다. 퍽, 퍽. 흙을 팔수록 어깨며 손이 아팠다. 하여튼 이놈의 저질 체력. 하지만 한번 시작한 일이니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퍽, 퍽, 흙이 옆쪽으로 수북하게 쌓일 정도로 파 내려갔다. 이마에 땀이 맺히다 못해 뺨으로 뚝뚝, 떨어졌다. 한여름 뙤약볕에 삽질까지 하려니 여간 지치는 게 아니었다. 1시간 넘게 삽질을 한 거 같은데 아직까진 보이는 게 없었다.

꼬마에게 여기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잠시 멍한 얼굴로 있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이번엔 그 옆을 가리킨다.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이번엔 그 옆으로 갔다. 퍽퍽, 퍽퍽, 아무리 삽질을 해도 나오는 게 없다. 이번에도 아니냐고 했더니 꼬마가 또 고개를 갸웃한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먹밥이라도 싸오는 건데.

***

일하던 중 잠시 집에 들른 영신이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막 향하는 중이었다. 저 멀리서 덕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옷도 흙투성이에 한쪽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손엔 우산을 든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분명 집에 콕 박혀 있으라고 했는데 어딜 다녀오는 거지. 의문도 잠시 덕이가 먼저 영신을 발견하더니 흠칫 놀란다. 아무래도 수상쩍다. 엘리베이터가 왔고 영신이 타지 않은 채로 덕이를 기다렸다. 가까이서 보니 꼴은 더 못 봐주겠다. 얼굴에도 흙이 묻어 있다. 어디 파묻혀있다가 온 건가.

“어디 갔다 와?”

“…잠깐 산책하러.”

버튼을 누르려고 보니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위층으로 올라간 상태였다. 두 사람은 잠시 서서 엘리베이터를 다시 기다리기로 했다.

“근데 몰골이 왜 그래? 진흙밭에서 구른 거야.”

“…빗길에 넘어졌어.”

“정말?”

덕이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말. 말이 그렇지, 4시간을 넘게 삽질을 했더니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나마 겨울이 아니고 언 땅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덕분에 바지며 옷이 진흙투성이였다.

그때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누군가 와서 선다. 덕이가 혹시나 제 꼴이 이상하게 보일까 싶어 옆쪽으로 슬그머니 비켜나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위층에 사는 그 남자다. 수상한 남자.

등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고,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가 영신과 덕이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안녕하세요. 요즘 자주 뵙네요. 17층 사는 분들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무뚝뚝한 인사와 함께 영신이 곧바로 그를 외면했다. 하지만 덕이는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지 양손에 검정비닐도 있었고, 무엇보다 등에 멘 가방은 뭔가 들었는지 볼록하게 튀어나와있었다.

가방을 뚫어지게 보던 덕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머리카락이다. 남자가 맨 백팩 지퍼가 살짝 열려있었는데 그 사이로 사람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왜요? 제 등에 뭐라도 묻었나요?”

남자가 생긋 웃으며 물었고 덕이가 당황한 얼굴로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땡. 위층에서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사람이 내린다. 잠시 후 셋이 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남자가 버튼 옆에 서서 17층과 18층을 번갈아 눌렀다. 영신이 까닥 눈인사를 대신했다. 덕이가 남자의 짐가방을 흘깃거리자 영신이 한 번 슥 쳐다보며 눈빛으로 경고를 보낸다. 그만 쳐다봐.

영신도 저걸 본 거 아닐까. 어째서 사람 머리카락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거지. 혹시 저 안에 사람 머리가 잘려서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슬그머니 한발 더 앞으로 다가가서 보려는데 남자가 갑자기 홱 몸을 돌린다. 덕이가 흠칫 놀라 얼른 한발 뒤로 물러섰다. 순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17층에서 문이 열린다.

“들어가세요.”

남자의 인사에 영신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렸다. 뒤따라 내리던 덕이가 남자를 한 번 돌아봤다.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었는데 역시나 덕이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을 감시하는 걸 눈치챘나. 저번에도 그러더니 아무리 봐도 께름칙하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 덕이가 영신 쪽으로 뛰어갔다.

“영신아! 영신아! 큰일 났어.”

“이번엔 또 뭐야. 저번처럼 뭐가 붙어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저 남자가 맨 가방 속에 사람 머리가 들어 있어.”

우뚝. 영신이 걸음을 멈추고 덕이를 돌아봤다. 이게 뭔 개소리인가 하는 눈빛이다. 덕이가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전 자신이 봤던 것들을 설명했다. 가방이 조금 열렸길래 들여다봤더니 거기 사람 머리가 들어 있었노라고. 자신이 확인하려고 하니 남자가 눈치챘는지 몸을 돌리더라고 말이다. 흥분해서 떠드는 덕이를 보며 영신이 인상을 구겼다.

“병원 좀 가볼래?”

“저 남자 진짜 수상해! 저번에 그 혼령도 그렇고, 아무래도 살인마 같아. 혹시 모르니까 경찰에 신고를,”

영신의 시선이 덕이의 어깨너머로 향한다. 무슨 일이시죠? 덕이가 뒤를 돌아봤다.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 중간쯤에서 조금 전 봤던 그 남자가 가만히 서서 영신과 덕이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표정이 조금 서늘한 것 같기도 하고.

덕이가 흠칫 놀라 말을 멈췄다. 입을 벙긋거리고 남자를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남자가 천천히 아래로 한 발, 한 발 내려온다. 덕이가 주위를 두리번댔다. 갑자기 공격할 것에 대비해 뭔가를 휘두를 생각으로 말이다. 예상과는 달리 남자는 덕이를 향해 빨간색 우산을 내밀었다.

“엘리베이터에 두고 내리셨길래요.”

아. 저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하던 덕이는 할 말을 잃었다. 영신이 민망한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덕이를 향해 얼른 받아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덕이가 쭈뼛거리며 남자에게로 가서 우산을 건네받았다. 그럼, 들어가세요. 남자가 사람 좋게 인사하더니 위층으로 올라간다.

터벅. 터벅. 남자의 걸음 소리가 빈 계단을 울렸다. 덕이가 남자가 주고 간 우산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다 들었나. 다 들었겠지. 영신을 보고 이제 어떻게 하느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한심하단 얼굴로 혀를 차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어떡해. 들은 거 아니야? 진짜 어떡하지.”

“그러게. 이따 밤엔 널 죽이러 올지도 모르지. 하하, 즐거워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두고 보면 알겠지.”

픽 웃더니 방향을 튼다. 덕이가 기겁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서 농담이라고 말해. 장난이라고 하라니까. 종알거리면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현관 앞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있다. 고객이 보내온 과일이었다. 아침에 김 실장이 건네받았다고 하더니 이걸 여기다 뒀네.

“들고 따라와.”

뭘 말이냐고 묻자 영신이 바닥에 놓인 상자를 눈짓으로 가리킨다. 덕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가 좀 들지. 난 허리도 아파죽겠는데. 상체를 숙여 상자 양쪽을 잡고 끙, 하고 힘을 쓰는데 허리에 엄청난 통증이 생기며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악!

돌아보니 덕이가 바닥에 코를 박고 허리를 붙들고 낑낑대고 있었다. 영신이 한심한 얼굴로 대체 뭐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징징 우는소리를 해댄다.

“영신아. 나 허리 다쳤어!”

장난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쏘아붙이는데도 정말 일어나질 못한다. 지켜보던 영신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침대에 누운 덕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의 근육이란 근육은 다 아팠다. 삽질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전에 우림이 툭하면 삽질한다는 말을 썼는데 겪어보니 함부로 쓸 말이 아닌 듯싶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중에 허리가 제일 아팠다. 수컷의 생명은 허리라고 어디서 들었는데, 이제 내 생명은 끝나는 것인가. 하지만 아직 엉덩이가 남아있으니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는 와중 영신이 뜨끈한 핫팩을 가져오더니 돌아누우라고 했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몸을 뒤집어 시키는 대로 했다.

영신이 그 위로 찜질팩을 올려주고 나서 무슨 놈의 몸뚱이가 작은 과일 상자 하나 들다가 허리가 나갈 정도로 약하냐고 투덜거렸다. 저번엔 접촉성 피부염인지 뭔지 걸려서 가려워죽겠다고 난리를 피우더니만.

찜질팩을 올리자마자 덕이가 옷 때문에 별 효과가 없는 거 같다며 셔츠를 등 위로 돌돌 접고 바지도 슬쩍 내린다. 살짝 마른 듯한 몸에 비해 유독 통통한 엉덩이가 보이자 영신의 얼굴이 대번 찌그러진다.

“허리 찜질하는데 바지는 왜 내려?”

“이래야 더 효과적일 거 같아서.”

“좋은 말로 할 때 올려. 개수작은 안 통한다.”

치. 덕이가 슬그머니 바지를 다시 올렸다. 뜨끈뜨끈한 걸로 허리를 지지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입이 저절로 헤벌쭉 벌어졌다. 그러면서 아까 봤던 남자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 남자가 아무래도 수상해 죽겠다고. 분명 가방 안에 머리가 들어있는 걸 봤다고 말이다.

“경고하는데 그 남자한테 더는 관심 두지 마.”

“왜?”

“다 널 위해서야.”

“설마… 질투해?”

“아니.”

“질투하네. 맞네, 맞아. 나한테 정기도 안 주면서 내가 다른 놈이랑 짝짓기할까 봐 질투하는 거지, 지금!”

픽. 영신이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는다. 너 같은 게 나랑 가당키나 하냐는 듯한 얼굴이다. 차라리 성질을 내면 좋으련만. 그 태도를 보니 희망이 없는 것 같아, 덕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텄네, 텄어.

그때 꼬르륵, 뱃속에서 밥 달라고 요동을 친다. 영신이 저를 무시하는 마당에 밥 달라는 소리까지 하려니 아무리 구덕이라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눈을 꾹 감고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는데 눈치 없는 배는 자꾸만 꼬르륵 소리를 냈다.

“밥 줄까?”

“......”

“대답 안 하면 나 혼자 먹는다?”

“...배고파.”

배고프단 투정에 영신이 슬쩍 웃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덕이의 허리 아래쪽에 닿았다. 정확히는 꼬리가 나오는 그 지점. 전엔 하나가 튀어나오긴 했는데, 그 후로는 나온 걸 본 적이 없었다. 전처럼 궁지에 몰리면 다시 튀어나오려나.

숨을 쉬느라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보였다. 베개에 얼굴이 반쯤 파묻혀 빨간 입술이 살짝 벌어진 것도. 붉다. 저대로 울면서 신음만 내지르면 꿈에서 본 그 얼굴인데. 영신이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씨발. 방금 무슨 생각 한 거야.

그대로 일어나서 방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미쳤나 보다. 이상한 꿈을 꾸고 나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그래 차라리 음식을 하자. 주방 쪽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어쨌든 잘 먹이고 챙겨야 꼬리가 나오는 데 한몫 보탤 거 아닌가.

한참 음식 준비를 하는데 덕이가 방 쪽에서 허리를 짚고 나온다. 왜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고기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말에 영신이 기막힌 듯 웃었다. 아파죽겠어도 고기는 먹고 싶은가 보네.

드륵, 덕이가 식탁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잠깐 사이 얼굴이 퀭해 보인다.

“그거 조금 들었다고 허리를 삐다니. 넌 진짜 손이 많이 가는 구미호야.”

그 말에 덕이가 발끈했다. 실은 그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라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난리를 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슬며시 포크를 들고 고기를 꾹 찍어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육즙이 입 안에서 퍼지는 건 좋았는데 고기가 어쩐지 덜 익은 느낌이다.

“덜 익었네….”

“주는 대로 먹어.”

“내가 개돼지도 아니고… 어떻게 주는 대로 먹어.”

“너 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덕이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너한테 100억을 벌어다 줄 귀한 여우?’라고 했더니 영신이 코웃음을 친다. 그건 나중 얘기고 지금은 내 돈 2억을 훔쳐간 도둑놈일 뿐이라고, 그러니 밥투정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내 돈을 갚을 것인지를 걱정하라면서 쏘아붙인다.

이렇게 대해주는 걸 황송하게 알라면서. 밖에 나가서 제발 이상한 것들 좀 주워오지 말라고도 했다. 듣고 있던 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 찜질도 해주고 다정하게 굴길래 기대했더니, 쳇.

***

현관문이 열리고 덕이가 나타나자 미자가 반가운 얼굴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곧 허리를 짚고 쩔뚝이는 덕이를 보더니 왜 그러냐고 묻는다. 아까 무거운 짐을 들다가 잠깐 삐었다고 하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몸이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해. 보약이라도 좀 먹든가 해야지.”

듣고 있던 인태가 대놓고 비웃었다.

“보약은 무슨. 여우가 몸 약해서 보약 먹는다는 소린 듣도 보도 못했는걸.”

“우리 덕이가 보통 여운 줄 알아!”

“보통 여우가 아니면?”

“엄청 귀여운 여우지. 흐흐.”

그녀가 덕이의 볼을 붙들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덕이가 귀찮은 얼굴로 그 손을 떼어내고 소파 쪽으로 갔다. 허리를 붙들고 소파에 앉으니 척추로 찌릿 통증이 타고 올라온다. 그냥 밥 먹고 잠이나 잘 걸 그랬나.

그런 마음이 들긴 했지만, 영신은 일한다고 방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고 혼자 티브이 보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 건데 둘이 있는 걸 보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너희 오늘은 일 안 갔어?”

“어제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도무지 마음이 진정 안 되잖아. 그래서 하루 쉬기로 했지.”

아.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어제 미자가 한 말을 들었기에 이해가 됐다. 눈앞에서 어떤 사람이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였다고. 그리고 배를 갈라 장기를 꺼내 갔다고. 무서운 세상이다. 전에 우림이 말하길 인간 세상에선 그런 식으로 사람의 장기를 빼가기도 한다고 했다.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이식해주느라고 말이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빼간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 거야. 보통 사람이라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정신과 치료도 받았을걸. 그런 의미에서 우리 셋이 영신이한테 산재 신청이라도 할까?”

산재 신청? 덕이가 묻자 인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셋 다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니 그걸 돈으로 환산해서 받자는 거지. 어때?”

덕이는 돈을 받는 것보다 그 셋에 자기도 포함된다는 사실이 어쩐지 기쁘면서도 울컥했다. 친구로 인정해주는 건가. 괜히 눈물이 날 거 같아 천장을 한 번 쳐다봤다. 살다 보니 정말 친구도 생기는구나.

“덕아, 왜 그래? 우는 거야?”

“방금 인태가 날 친구로 인정해줬잖아. 솔직히 기뻐서 그래.”

인태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친구가 아니라 팀이라면서. 이거나 그거나 같지 않으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친구는 동등한 입장이지만 팀은 서열이 확실히 정해져 있다고. 서열이란 말에 덕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서열?

“대장을 뽑자는 거지.”

“그런 건 어떻게 뽑는데?”

“글쎄. 아무래도 능력이 제일 뛰어난 사람이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미자잖아.”

인태가 움찔했다. 부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듣고 있던 미자가 자긴 그런 거 관심 없으니 니들끼리 정하든가 말든가 하라고 한다. 딱 봐도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곧 인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들었지? 미자가 우리끼리 알아서 하래.”

고민하던 덕이가 다시 말했다.

“그럼 나이순으로 할까?”

인태가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능력 순으로 하면 당연히 자기가 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뜬금없이 나이 타령을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은근 대장 자리에 욕심을 드러내는 덕이를 보며 그건 아닌 거 같다고 쏘아붙였다.

“직장은 무조건 짬밥이야. 너처럼 나이 많다고 유세 떨다간 꼰대 소리 듣는 거라니까!”

“꼰대가 뭔데.”

“존나 갑갑하단 소리지.”

덕이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대장이란 말에 그래도 한 번 욕심내본 건데 꼰대란 소리까지 들으며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 네가 하라고 하자 인태가 그제야 환하게 웃는다. 그럼 자기가 이제부터 대장이라면서.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말이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미자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 바보들.

인태가 다 같이 모여 파이팅이나 한번 하자며 손을 앞으로 척 내밀었다. 덕이가 그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좋아! 두 사람이 동시에 미자를 쳐다보자 마지못해 다가와 손을 얹는다. 인태가 먼저 각자 구호 한마디씩을 외치자고 했고, 미자가 꼭 그런 걸 해야 하느냐고 따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덕이가 주먹을 꾹 말아쥐더니 전투태세로 구호를 외쳤다.

“다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어머, 덕아.”

“구더기. 너 오버하지 마.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와선.”

“…어. 미안.”

“자 우리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돈 벌자. 파이팅!”

파이팅! 세 사람이 손을 높게 치켜들며 파이팅을 외쳤다. 순간 덕이가 다시 허리를 붙들고 으윽, 신음을 낸다. 미자가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한번 시작된 통증은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다.

“야 너 집에 가. 아프면 가서 쉬어.”

“그래, 그게 낫겠다.”

“아까 삽질을 너무 했더니 그런가 봐.”

삽질이란 말에 인태가 은근슬쩍 꼬마 귀신에 대해 묻는다. 영신이 저에게 데려다 주라고 했지만 덕이가 굳이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말리지 않았는데. 설마….

“잘 데려다 준거 맞지?”

덕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사고 친 거 아니냐는 인태의 말에는 아니라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이젠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일단 내일 만나자며 현관 쪽으로 도망치듯 향했다.

***

영신이 한의원 침상에 엎드려있는 덕이를 내려다봤다. 꾀병인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아침까지 제대로 일어서질 못해 급한 대로 동네 한의원에 데려간 것이다. 한의사가 진맥을 보자는 걸 허리가 아프니 침이나 놔 달라고 둘러 말했다.

침을 맞기 싫다고 도망가려는 덕이를 붙잡아서 눕혀 놓긴 했는데 한약 냄새가 진해서 제 머리가 다 띵할 지경이었다. 어릴 적 모친이 아픈 할아버지의 병 수발을 드느라 집 안에서 종일 한약을 달였는데, 그 생각이 나서 잠시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그때 커튼 너머로 박석현 씨? 하고 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이젠 익숙하게 대답했다. 네. 영신이 기막힌 얼굴로 그런 덕이를 쳐다봤다. 직접 치료를 받기 힘들어 석현의 주민등록번호를 잠시 빌려 병원에 등록한 거였는데, 저렇게 뻔뻔스럽게 본인인척하다니.

커튼이 젖히고 한의사가 들어왔다. 진료 때 본 젊은 남자 한의사였다. 그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어디가 제일 아프냐고 물었다. 덕이가 손을 뒤로 뻗어 아픈 부위를 꾹꾹 눌렀다. 여기랑 여기요.

“셔츠 좀 걷고 바지 좀 살짝 내려 보시겠어요?”

그 말에 덕이가 입고 있던 셔츠를 쭈욱 올린다. 가만뒀다간 바지까지 완전히 벗을 기세였기에 영신이 바지를 살짝 당겨 밑으로 내려줬다. 올라간 셔츠도 적당히 내려주자 한의사가 영신을 흘깃 한 번 쳐다본다.

“석현이 형입니다.”

“아… 네.”

대부분 부부가 와도 한 사람이 침을 맞으면 밖에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은데 치료실까지 와서 지켜보고 있으니 좀 이상했나 보다. 다시 한 번 흘깃 보더니 곧 옆에 있던 통에서 은색 침 하나를 꺼내 든다.

그걸 보는 덕이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많이 아프냐고 묻자 한의사가 아니라고, 그냥 따끔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하나씩 바늘을 꽂았는데, 정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괜한 걱정을 했구나.

덕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에 힘을 뺐다. 고개를 돌리니 옆 침상에 걸터앉아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영신이 들어온다. 쌀쌀맞게 굴면서도 은근히 챙겨주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를 조금은 좋아하는 게 아닐까. 착각하는 사이 의사가 마지막 침을 꽂고 시간을 확인했다.

“치료는 20분 정도 걸리고요. 이거 끝나면 찜질해드릴게요. 당분간 무리하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일주일 정도는 꾸준히 나오셔야 하고요.”

네.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를 마친 한의사가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영신은 나가서 기다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포기하고 의자를 끌어와 곁에 앉았다. 괜히 없는 사이에 사고라도 치면 뒷수습은 오롯이 제 몫이 될 테니까.

침이 꽂혀 있는 허리 아래쪽으로 엉덩이골이 슬쩍 보였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만약 한다면 저 아래 구멍에다 넣는 건가. 그러다 실소가 터졌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생각도 하지 마.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다. 꿈 때문인가. 아니다. 돈 때문이다. 그건 확실히 하자. 100억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 않은가. 저는 돈을 좋아하는 인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잠시 판단이 흐려지고 있을 뿐이라고.

덕이가 잠이 오는지 눈을 반쯤 뜨고 멍한 얼굴로 있었다. 졸리면 자라고 했더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꺼풀이 내려온다. 지켜보던 영신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김 실장에게 오후에 있을 약속 때문에 연락하려고 메일을 열다 문득 인터넷 기사로 시선이 옮겨졌다. 어린이 유골로 시작하는 그 기사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클릭했다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ㅇㅇ동 주택가에서 한 어린아이의 유골이 발견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경찰은 현재 이 유골이 이 집에 살던 김모 군이라고 추정하고 김 군의 부모를 수배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경찰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제보 전화를 한 의문의 시민에 대해서도 추적 중입니다. 그는 인근에 있던 공중전화를 이용해 ‘아이가 살해당해 묻혀 있는 걸 자신이 알고 땅에서 파냈다.’라고 신고를 했다는데요, 신고 지점 부근 CCTV를 확보해 이 제보자를 찾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영신의 얼굴이 대번 일그러진다. CCTV에 찍힌 모습은 자세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덕이가 분명했다. 빌어먹을. 이를 까득 물며 엎드려있는 덕이를 내려다봤다. 야. 살벌하게 부르자 덕이가 감겨있던 눈을 억지로 뜨고 영신을 쳐다봤다.

“…으어?”

영신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변에 듣는 귀가 많으니 괜히 여기서 떠벌려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일단은 나가서 얘기하자고 하자 덕이가 다시 스르르 눈을 감는다.

아아, 덕이가 악을 썼다. 영신이 덕이의 귀를 비틀어 잡고서는 차 쪽으로 끌고 갔다. 병원으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둘을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보조석에 덕이를 완전히 구겨 넣고서는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

시동을 걸고 곧장 병원을 나섰다. 덕이가 조금 전까지 붙잡혔던 귀를 만지며 문질렀다. 아파죽겠다고, 왜 귀를 비틀고 그러냐고 꽥 소리를 질렀더니 영신이 도로 한쪽에 차를 급하게 세운다. 끼익.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도 사납게 일그러졌다.

“솔직히 말해. 어제 어디 갔다 왔어?”

“…산책했다고 했잖아.”

“거짓말하지 마!”

“…….”

“내가 더는 일 만들지 말라고 했지! 그랬는데 보란 듯이 사고를 치고 다녀?”

덕이가 입을 벌린 채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어떻게 알았지.

“너 미친 거 아니야? 그래, 데려다 주려고 간 것까진 좋아. 그랬으면 그냥 두고 왔어야지. 신고까지 해?”

“그냥 두면 언제 발견될지도 모르고… 집도 곧 허물어 버린다고 하니까…. 거기 섞여서 쓰레기처럼 돌아다니게 둘 순 없었어.”

“덕아… 하아… 구덕아.”

“걔가 너무 딱해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분명히 말했지. 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 어설픈 동정도 하지 말라고!”

“아직 아이잖아. 걔가 그러는데 아버지란 사람이 걔를 마구 때렸대. 이유도 없이 마구마구 때렸대. 뼈가 부러질 때까지 밟고 때리는데, 엄마는 무서워서 말리지도 못했대. 그러다 정신 차려 보니 자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와 있더래. 다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 숨을 안 쉬니까 아버지가 뒷마당에서 불태워 묻어 버렸대. 자기 몸이 불타는 걸 봤대. 너무 무서웠다고 그랬어. 나한테 그 말을 하면서 엉엉 울었어.”

“야.”

“…내가 너한테 피해 준 건 맞아. 내 주제도 모르고 그런 짓을 했으니까 할 말은 없어.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못 본 척할 수가 없었어.”

“......”

“…다음부터는 약속 어기는 일 절대로 없을 거야. 이번 한 번만 봐줘. 진짜 안 그럴게.”

하아. 영신이 피곤한 듯 얼굴을 문질렀다. 덕이는 안전띠를 꾹 붙들고서 눈물을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그걸 보니 기가 막혀 웃음만 나왔다. 영신을 곤란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어찌 보면 사람인 저보다 더 사람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나.

CCTV에 찍힌 얼굴이 선명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의 부모도 추적 중이라고 하니 덕이의 신원이 파악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라도 안심하고 싶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너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야.”

“…알았어.”

덕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영신을 보며 배시시 웃는다. 눈물을 달고서 ‘정말 미안.’이라고 말해 영신은 더는 뭐라고 타박할 수도 없었다. 그대로 출발하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김 여사다. 휴대폰 소리를 최대한 줄여서 제 귀에 가져다 댔다.

[박 사장. 나야.]

“안녕하셨어요.”

[어때? 부탁한 건 좀 진척이 있어?]

영신이 덕이를 흘깃 쳐다봤다. 덕이는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요, 아직.”

구미호일지도 모르는 것을 구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낭패이지 않은가. 신중히 행동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구하는 대로 연락을 준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는 덕이이 한쪽 귀가 유독 빨갰다. 조금 전 자신이 쥐고 비틀어 그런 듯하였다. 피부가 금세도 빨개지는군. 꿈에서도 저렇게 빨갰지. 아, 또 그 생각. 훠이, 훠이, 물러가.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

예주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르륵, 드르륵,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담임이라고 찍혀있다. 잠시 고민하다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어두고 나서 다시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미자가 옆에 앉아 가만히 쳐다봤다. 지금쯤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소녀는 어쩐 일인지 학교 가는 버스를 타지 않은 채 2시간째 이러는 중이었다. 그래도 며칠 괴롭히질 않아서 그런지 얼굴이 전처럼 나빠 보이진 않았다.

또 다른 버스가 도착했고, 이번엔 예주가 그 버스에 올라탔다.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출퇴근 시간이 지난 후라 그런지 버스는 한산했다. 예주가 제일 안쪽 자리로 가서 앉았고, 미자가 그 뒤로 가서 앉아 예주를 지켜봤다.

버스 문이 닫히고 출발하자 거리의 풍경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지나갔다. 그걸 보던 미자는 문득 가슴 한쪽이 아련해지는 것 같았다. 거리로 보이는 사람들, 웃고 떠드는 얼굴 사이로 알 수 없는 먹먹함이 생겨난다. 그들을 보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하고 쓸쓸한지 모르겠다.

예주 또한 그 사람들을 저와 비슷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뺨으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미자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다 멈칫했고, 예주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궜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봐선 쉽사리 울음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망설이던 미자가 결국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였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

영신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한의원에서 나와 덕이를 곧장 집으로 돌려보내 놓고 나서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데 등 뒤로 발소리가 하나 더 들린다. 모른 척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니 잠시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요즘 자주 뵙네요.”

고개를 슬쩍 돌려 봤더니 18층 남자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했다. 안녕하세요.

“같이 다니시는 분은 오늘 안 보이시네요.”

“네.”

단답형 대답과 함께 영신이 몸을 완전히 돌려 남자와의 대화를 차단했다. 남자가 민망한 기색 하나 없이 생긋 웃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영신과 남자가 나란히 올라탔다. 17, 18층 버튼에 불이 들어오고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제가 퇴근 후에 작업을 주로 집에서 해서요. 혹시 시끄럽거나 그렇진 않던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다행이네요. 괜히 폐를 끼칠까 봐 걱정했는데. 아, 동생분한테도 여쭤봐 주세요. 귀가 밝으시면 아무래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영신이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동생이라고 말한 건 덕이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뒤에 한 말이 거슬렸다. 귀가 밝다고 했나. 괜히 먼저 아는 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관뒀다. 영신이 남자를 외면했고, 남자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남자는 덕이와 있을 때처럼 잘 가라며 인사를 건네오지 않는다. 그건 그것대로 거슬렸다. 영신이 몸을 틀어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희미하게 웃던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배고프다. 밥 먹자.”

아삭. 덕이가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아 오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영신이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치매 걸린 노인네도 아니고 저만 보면 밥 타령에 고기 타령 하는 덕이 때문에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이건 병 수발에 밥시중까지. 차라리 방을 얻어 내보낼까 싶었지만 그랬다가 괜히 사고를 치거나 사라져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였다.

“넌 내가 고기로 보여?”

“…잘 먹어야 꼬리 나오지.”

뻔뻔한 대답에 영신이 할 말을 잃었다. 꼬리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저번에 한 번 튀어나왔던 것도 그 후론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아니 나오긴 하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해져 있는데 덕이가 거실 창을 유심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댄다. 이상하다.

“뭐가?”

“그 귀신… 요즘 왜 안 보이지?”

영신이 창밖을 봤다. 며칠 머리를 쿵쿵 찧어대던 여자 귀신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한 모양이었다. 대꾸하지 않자 덕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예 그쪽으로 간다. 창밖을 내다보며 기웃기웃하길래 뭘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혹시나 해서 내다보는 중이란다.

“보이던 애가 안 보이니까… 궁금하기도 해서….”

그렇게 야단을 쳤는데도 혼령한테 또 관심을 보이니 기가 막혔다. 울면서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런다고 약속한 게 불과 하루 전인데 말이다.

“지나친 호기심은 독이야. 적당히 신경 끄고 사는 법도 알아둬. 인간 세상에서 살려면 말이야.”

“너처럼?”

“그래, 나처럼.”

사락, 책장이 한 장 넘어갔고, 덕이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슬그머니 소파에 앉은 다음 엉덩이를 두어 번 움직여 영신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영신이 눈을 아래로 깔며 슥 쳐다봤지만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

이번엔 덕이가 제 몸을 영신에게 슬며시 밀착했다. 탁, 영신이 들고 있던 책을 덮어 테이블에 놓더니 고개를 돌린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덕이의 모습에 슬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새카만 두 개의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짓이야?”

“아직도 고민 중이야?”

“뭘?”

“나한테 정기 주는 거.”

“아니.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러니 꿈도 꾸지 마.”

덕이가 해맑게 웃으며 영신의 얼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영신이 피하지 않고 그런 덕이를 가만히 노려봤다. 사람의 체취도 짐승의 체취도 아닌 특이한 향이 난다. 달콤하고 끈적한 그런 향. 사람을 홀리는 여우라서 그런 건가.

덕이가 손을 들어 영신의 셔츠 앞섶을 위에서 아래로 쭈욱 훑어 내렸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 나 힘들어.”

탁, 그 손을 쳐내고 덕이의 이마마저 밀어내려 했다. 덕이가 갑자기 그 손을 잡아서 제 엉덩이 쪽으로 가져다 댄다. 영신의 인상이 확 일그러진다. 뭐 하는 짓이야?

“한 번만. 응? 한 번만 해봐. 눈 딱 감고 해보면 알잖아. 이렇게 꼬리 생길 때까지 허송세월 보낼 생각이야? 지치지도 않아?”

덕이가 영신의 손을 쥔 채로 제 엉덩이에 대고 문지른다. 바지를 입었음에도 탱탱한 감촉이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영신이 이를 꾹 물자 덕이가 이번엔 상체를 밀착해온다. 어차피 우리 둘 다 씻었으니까, 지금이라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영신이 책을 테이블에 위에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찰나 덕이가 바지를 훅 내리더니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영신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뭐 하냐?”

탱글탱글한 볼기 두 짝이 눈앞에서 봉긋하게 솟아오른 채였다. 덕이가 손을 뒤로 뻗더니 그대로 제 엉덩이를 벌렸다. 작은 구멍이 고스란히 보이자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꿈에서 봤던 그 장면이랑 흡사하다. 여우로 변한 구덕이가 제 내장을 파먹던 그 장면 말이다. 엉덩이를 노려보고만 있자 덕이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한번 넣어보기만 해봐. 응? 얼른.”

조르는 듯한 말투에 영신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100억. 그리고 자신의 미래. 저기다 넣고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되는데, 하아.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방 쪽으로 걸어갔다.

덕이가 실망한 얼굴로 그냥 가는 거냐고 묻자 방문 앞에서 영신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입을 두어 번 달싹이더니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다. 다소 비장해 보이는 그를 보며 덕이가 침을 꼴깍 삼켰고, 그의 입에선 곧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거실에서 하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가.”

덕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벌떡 일어나 얼른 바지를 추슬렀다. 방으로 따라들어가며 진심이냐고 묻자 영신이 고개를 끄덕인다. 달칵, 바지 벨트를 푸는 걸 보니 진심인가 보다. 덕이의 입이 기쁨으로 벌어졌다.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드디어, 드디어 나도 꼬리가!

바지에 닿아 있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에 시선을 한 번 뒀다가 펄쩍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가 바지를 내렸다. 영신이 다 벗을 필요 없으니 돌아누우라고 손짓을 보냈기에 그대로 엎드려서 엉덩이만 위로 치켰다.

상체를 납작 엎드리고 엉덩이만 최대한 높이 든 다음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입술을 한 번 핥았다. 지익,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덕이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몸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몸에 닿는 체온은 없었다.

시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옆을 보니 영신이 바지 버클을 다시 채우고 있었다. 그걸 본 덕이가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

“잠깐! 너 뭐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못해.”

“왜에! 왜! 해본다며. 해보겠다고 했잖아!”

“서질 않아.”

뭐? 덕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영신이 쯧, 혀를 한 번 차더니 서질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덕이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반쪽짜리 구미호였지만 사람 홀리는 재주는 타고났다고 자부했는데.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마음만 먹으면 저한테 넘어왔는데, 그런 저를 보고 서질 않는다니.

“말도 안 돼! 거짓말!”

“진짜야. 안 서!”

“거짓말!”

“믿기 싫으면 관둬.”

덕이가 바지를 휙 벗어 던지고는 똑바로 누워 다리를 양쪽으로 홱 벌렸다. 이래도? 동시에 영신의 얼굴이 완전히 찌그러진다. 추태 부리지 말고 입어. 덕이가 이번엔 제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며 아, 아아, 신음을 냈다. 이래도? 영신이 못 볼 걸 봤다는 얼굴로 등을 돌려 나가려 하기에 덕이가 황급하게 바지를 주워입고 영신을 쫓아나갔다.

“진짜 안 서? 진짜?”

“그래. 안 서.”

“너!”

“뭐.”

“고자였어?”

그 말에 영신이 살벌한 얼굴로 노려봤다. 뭐?

“내가 빨아 볼까? 빠는 거 싫으면 손으로 만져볼까? 그럼 서겠지.”

“아니. 안 서. 너한테는 안 서. 그러니까 없던 일로 해.”

“말도 안 돼!”

“그래. 애초에 이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여우랑 교접이라니. 시발, 내가 잠시 돈에 미쳤지. 그깟 100억 없어도 살아. 개발권이야 내 능력으로 따내면 돼. 그딴 놈들 도움 필요 없어. 그러니까 너도 그냥 여기 살면서 내 돈 갚을 생각이나 해. 아니, 아니다, 앞으론 잠도 옆집에 가서 자. 당장 오늘부터. 알아들어? 썩 꺼지라고!”

덕이가 기막힌 얼굴로 영신을 쳐다봤다. 갑자기 왜 불같이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제 방으로 들어가 쾅 문을 닫아버린다. 찰칵 문 잠그는 소리에 덕이가 걸음을 멈췄다. 저 또라이. 저 미친놈. 저 고자 새끼!

너무 열이 받아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박영신! 이 고자 새끼! 안 서는 게 내 탓이냐! 어! 내 탓이냐고!”

버럭버럭 악을 쓰던 덕이가 신발을 신고 현관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쾅 현관문이 닫히고 집 안엔 정적이 흘렀다.

욕실로 들어온 영신이 밑을 내려다봤다. 배에 붙을 정도로 발기된 성기가 꺼덕이고 있었다. 얼마나 꼿꼿하게 섰는지 뻐근하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그걸 내려다보는 영신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말도 안 돼. 하지도 않았는데 서다니. 그 자식 엉덩이만 보고도 서다니. 씨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찬물을 틀어 아무리 녀석을 잠재우려고 했지만, 한번 커진 놈은 좀처럼 줄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

여자가 남자의 몸 위에서 헐떡였다. 성기를 삽입한 채로 엉덩이를 움직이자 남자가 기분 좋은지 여자의 엉덩이를 잡아 비틀며 하체를 빠르게 움직인다. 스륵, 창문으로 들어오던 미자와 인태가 그 장면을 보고 멈칫했다.

“뭐야? 쟤네.”

“요즘 내 눈이 못 볼 걸 많이 보고 산다.”

미자가 일이 끝날 때까지 밖에 나가 있자며 인태를 툭 친다. 인태는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마지못해 미자를 따라 나갔다.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의 정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신음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존나 오래 한다.”

“우리 보고 놀라기 전에 복상사로 죽는 거 아니야.”

자기야, 나 죽을 거 같아. 여자의 간드러진 신음에 남자의 동작이 점점 빨라졌고, 두 사람은 어느새 사정을 맞이했다. 듣고 있던 인태가 안쪽을 다시 기웃거렸다. 끝났나 본데. 두 사람이 낄낄대고 웃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신음이 또 들린다. 인태가 질린다는 얼굴로 안쪽을 쳐다봤다. 와. 또 하네. 저것들 짐승이야, 사람이야.

미자가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스트레칭에 들어갔다. 오늘 바람잡이는 인태고, 저는 평소처럼 놀라게 하면 된다. 열심히 스트레칭에 매진하며 몸을 푸는데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밖으로 나온다. 누군가에게 온 전화를 받으면서였다.

“어, 여보. 나 미정이 만나고 지금 가는 길이야. 얼른 갈게.”

전화를 끊은 여자가 막 정사를 마친 남자를 돌아보며 아쉬운 얼굴을 한다.

“오늘따라 자꾸 전화하고 지랄이야. 재수 없어. 눈치챈 거 아니겠지?”

“그 새끼가 얼마나 곰인데. 내가 하루 이틀 보냐. 너보다 더 많이 알았어.”

그러더니 여자의 입술을 쪽쪽 빨며 내일 낮에 잠깐 들르라고 한다. 여자가 웃으며 남자에게 마지막 키스를 하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걸 지켜보던 미자와 인태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불륜이군.”

“나쁜 새끼. 친구 마누라랑 바람피우고 말이야.”

“열 내지 마. 네 부인도 아니잖아.”

하지만 인태는 참을 수 없었다. 자기 부친도 소싯적에 바람깨나 피워서 모친의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모른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울컥 치밀었다. 여자가 사라지자 남자가 기지개를 켜며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두 사람은 남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쉽게 잠들지 않았다. 한참 동안 어두컴컴한 침실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대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인태가 피곤한지 으하함, 하품하자 미자가 정신 차리라며 툭 친다. 남자가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더니 곧 잠에 빠져들었다.

인태와 미자가 눈짓을 주고받으며 행동에 들어갔다. 막 잠이 든 남자가 몸을 뒤척이다 벽 쪽을 향해 모로 누웠다. 순간 오한이 들었는지 이불을 끌어오려고 손을 뻗었는데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뭐야? 가위눌린 거야?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눈앞이 칠흑처럼 어둡다. 등 뒤로 끼이익 문소리가 들린다. 몸을 돌려 그쪽을 보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힘들었다. 누구지?

남자는 최근에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유부녀였고, 친한 친구의 아내였다. 남들이 돌아볼 만큼 빼어난 미모에 몸매까지 좋았으며 애교도 많았다. 그래서 안 되는 줄 알지만 욕심이 났다. 자신이 친구보다 인물, 배경, 뭐 하나 빠질 게 없는데 왜 그런 여자가 제 친구와 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늘도 한바탕 정사를 치르고 그녀는 돌아갔다.

혹시 그녀가 다시 돌아온 걸까. 여자의 이름을 부르려고 하는데 입술이 가늘게 떨릴 뿐 꿈쩍도 하질 않는다. 다시 끼이익, 소리가 들리고 다다다다- 누가 뛰는 것처럼 바닥이 울렸다.

윽. 남자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쓰는 사이 다시 다다다다- 하고 들리더니 바로 등 뒤에서 소리가 멈춘다. 누군가 자신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숨을 죽인 채 눈동자만 움직였다. 공포로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목덜미로 서늘한 숨결이 닿는다. 곧 히히 하고 웃는 낯선 목소리에 온몸의 털이 모두 곤두섰다. 그 차가운 숨결이 점점 귓가로 옮겨진다. 잠시 후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내 친구도 믿었기에…

공포에 질려 있던 남자가 한쪽 눈썹을 올린다. 뭐야, 이게? 몸을 뒤틀고 버둥대는 순간 가위가 풀린다. 남자가 그대로 팔을 뻗어 수면 등을 켰다. 방 안을 살피니 아무도 없다. 방금 들은 게 착각이었나. 양쪽 팔에 돋아나는 소름들을 털어내며 이번엔 방 안까지 환하게 불을 켰다. 불안에 떨던 남자의 얼굴이 점점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그걸 바라보던 미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인태가 머쓱한 얼굴로 다가오기에 냅다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얻어맞은 정강이를 붙들고 신음하는 인태를 두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인태가 쫓아오며 미자를 불렀다.

“미안. 내가 왜 그랬지. 정신이 나갔나 봐.”

“그래, 이 미친놈아. 다음엔 랩도 해라.”

“그래도 돼? 나 랩도 좀 하는데.”

“씨발, 닥쳐!”

“성질 내지 마. 미안하다니까.”

“동요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 노래가 안 되면 허밍이라도 해! 섬 집 아기 그런 거 얼마나 좋아!”

“솔직히 그 노랜 내 취향이 아니야. 듣고 있으면 나까지 우울증 걸릴 거 같다니까.”

미자는 다시 한 번 인태를 걷어차려고 하다 관두었다. 최근 며칠 쉬었더니 감이 떨어진 거냐고 쏘아붙였더니, 인태가 자기도 할 말이 있다고 받아친다. 요즘 정신 나가 있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너 낮에 그 여자애 찾아갔지?”

미자가 멈칫하더니 곧 몸을 돌려 집 쪽으로 향했다. 인태가 따라붙으며 대체 왜 그 여자애한테 집착하는 거냐고 캐물었다. 물론 어린 소녀니까 동정심이 생길 수 있다고 하지만, 미자의 태도에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

자신이 분명 영신에게 말해보겠다고까지 했는데 개인적으로 자꾸만 그 애를 찾아가니 아무래도 수상했다.

“걔만 보면 마음이 편칠 않아.”

“어째서?”

“지금 이유를 찾는 중이야. 그때까지만 모른척해.”

“좋은 생각은 아닌 거 같지만,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영신이한테는 말하지 마.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날 뭘로 보는 거야. 내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너도 알잖아?”

그 말에 미자가 대놓고 비웃었다. 영혼의 무게보다 가벼운 게 네 입 아니냐고. 인태가 아니라고 파르르 화를 냈지만 미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사람들이 그 둘을 지나쳤다. 쿠룽, 쿠룽,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곧 비가 쏟아질 기색이었다.

미자가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직접 비를 맞는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비 오는 날이 싫었다. 그만 돌아가자고 했고 인태가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

미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덕이가 소파에 앉아 훌쩍이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꾸가 없으니 답답했다. 자신이 인간 같으면 속이 타서 냉수라도 들이켤 텐데.

근처에 있던 인태에게 얘 좀 어떻게 해보라고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덕이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돼 엉망이었다.

“흑흑. 지가 하자고 그래 놓고서 서질 않을 거 같으면 미리 얘길 하던가. 사람 자존심 상하게 으흐흑. 고자 새끼, 흐흑….”

고자란 말에 미자가 슬그머니 인태를 다시 돌아본다. 인태가 자긴 아무것도 모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덕아. 지금 누구 말하는 거야?”

“있어. 완전 재수 없고 싸가지에 성격도 난폭하고 지만 아는 고자 새끼.”

그 말을 듣던 인태가 가만히 누군가를 떠올린다.

“고자인 것만 빼면 딱 박영신이네.”

미자가 설마 하는 얼굴로 덕이를 쳐다봤다. 설마, 너.

“영신이한테 자자고 했어?”

“내가 뭐 지 좋아서 자자고 한 줄 알아. 꼬리 때문에 그런 거지.”

“꼬리?”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어떤 스님이 말하길 법력이 강한 사람의 정기를 받으면 꼬리가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영신에게 부탁했는데 들어주질 않는다고. 눈 딱 감고 한 번만 짝짓기하면 되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말이다. 어차피 지는 나 팔아서 돈도 번다면서.

듣고 있던 인태가 코웃음을 친다. 설마 그 말을 듣고 영신에게 들이댄 거냐고 물었다. 맞아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면서. 걔는 여자도 잘 안 만나는데 남자인, 게다가 여우인 네가 들이댔으니 오죽하겠느냐고.

그 말에 덕이가 참고 있던 울음을 엉엉 터트렸다. 미자가 그만하라고 다독였지만 덕이의 울음은 쉽사리 그치질 않았다. 그때 미자가 그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말한다. 영신이만큼은 아니지만 법력이 강한 사람을 자신이 알고 있다면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바로 위층에 산다고 했다.

덕이가 잠시 두 눈을 깜박였다. 위층? 그러다 그 살인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그 살인마를 미자랑 인태도 만난 건가.

“너네 그 남자 봤어? 그 살인마 본 거 맞지?”

“살인마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그 이상한 남자 말이야. 조심해. 어제도 가방에 사람 머리를 넣어서 다니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그 말을 들은 미자와 인태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모양인데?

“덕아. 그 남자, 영신과 같은 퇴마사야.”

“뭐?”

“근데 주로 퇴마보단 떠드는 귀신들 천도 시켜주는 일을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 전에 우리와 몇 번 마주쳤는데 싫다고 했더니 그다음부턴 인사만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됐지.”

덕이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했다. 그럼 살인마가 아니란 말인가. 가방 안에 있던 여자의 머리카락은 뭐지. 분명 머리카락을 봤는데…. 이상하다?

“그 사람한테 부탁해봐. 영신이보단 훨씬 착한 거 같은데. 네 딱한 사정을 알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미자의 말을 듣고 있던 덕이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더러 정기를 나눠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는 어딘가 께름칙했다.

창 쪽으로 가 밖을 내다보니 야경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예쁘다. 홀린 듯 창가에 붙어 그것들을 쳐다보다 문득 궁금해진 게 있어 고개를 돌렸다. 인태와 미자는 소파에 앉아 서로 이야기 중이었다.

“너희들 혹시 이 근처에서 귀신 본 적 있어?”

“귀신이 한둘이야?”

“창문에 머리를 콩콩 찧는 여자 귀신 말이야. 내가 여기 오던 날에도 봤었는데 며칠 전부터 보이질 않아서.”

“아. 그 머리 깨진 애 말이지.”

“…응.”

“글쎄. 그러고 보니 요즘 안 보이네? 미자 넌 봤어?”

듣고 있던 미자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워낙 밖에 많은 게 귀신이니 별 관심도 없을뿐더러 영신이 다른 귀신들과 접촉하는 걸 싫어해서 어지간하면 말을 섞지 않았다. 게다가 그 귀신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근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냐고 물었다.

“저번에 봤을 때… 나한테 도망치라고 말했어.”

“그럴 리가.”

“어째서…?”

“걘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왜…?”

“못 봤어? 혀가 없잖아.”

인태의 말에 덕이가 슬그머니 인상을 찡그렸다. 혀가 없다니? 그런 건 못 봤는데. 그래서 소리가 안 들렸던 건가.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미자가 말을 잇는다.

“원래 없던 건지, 죽은 뒤에 누가 도려낸 건지 모르겠지만. 그때 봤을 때는 분명 없었어.”

“살해당했단 말이야? 영신이 말로는 자살이라던데.”

“표면적으론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생각해봐. 자기 혀를 자르고 자살할 사람이 어딨겠어. 물론 살아있을 때 혀가 잘렸다고 가정하면 말이지.”

덕이가 충격받은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영신이는 몰랐을까. 왜 그런 말을 저한테 안 해줬지. 이상하다고 했더니 인태가 영신인 원래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했다.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따위 관심 두지 않는다고.

덕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냉정하구나. 어쩌면 저한테 잠깐 잘해줬던 것도 모두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필요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려나.

소파에 앉아있다가 다리를 쭉 펴고 길게 드러눕자 인태가 여기서 왜 눕느냐고 가서 자라고 한마디 한다. 덕이가 고개를 저었다. 영신이가 이제부턴 여기에 있으라고 했다면서. 그 말에 인태가 혀를 찼다.

“얼마나 들이댔으면.”

“그런 거 아니거든….”

“자게 둬.”

미자의 말에 인태가 더는 뭐라고 하지 못했다. 덕이가 소파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미자가 뭐라도 덮고 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귀신 둘이 사는 이곳에 이불 같은 것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근데 너희는 졸리지 않아?”

“졸리면 그게 사람이지 귀신이냐.”

하긴. 덕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암, 크게 하품을 했다. 눈을 비비는데 쓰라리다. 아까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가 보다.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가만히 누워 아까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영신이는 저한테 정기를 나눠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있을까. 내일 짐을 싸서 가버릴까 보다. 아쉬우면 붙들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온다.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싶다. 이불이랑 베개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끔뻑끔뻑, 그러다 보니 어느덧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미자와 인태가 눈을 감고 누워있는 덕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중얼중얼 뭐라고 떠들었는데 금세 조용해진다. 가까이 가서 살펴봤더니 정말 잠이 들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잠든 모습이 귀여워 미자가 그만 큭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있던 인태가 뭘 보고 그렇게 좋아 웃느냐고 물었다.

“엄청 빨리 잠드네. 귀엽다.”

“귀엽긴.”

“너도 인정해. 귀엽잖아.”

“아니. 그냥 살짝 모자란 애 같아.”

“그러지 마. 애가 순박해서 그래.”

“순박한데 돈을 훔치냐.”

“그건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습관이 잘못 들어서 그런 걸 거야.”

편들 걸 들라는 인태의 핀잔에도 미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예 턱까지 받치고 잠든 덕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귀엽다면서, 누가 얘를 여든아홉으로 보겠느냐고. 어서 빨리 꼬리가 나와야 할 텐데, 걱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듣고 있던 인태가 네 걱정이나 하라고 퉁을 놨지만, 미자는 한참이나 잠든 덕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

침대에 누워있던 영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눈꺼풀은 무거워 죽겠는데 벌써 몇 시간째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머리맡 시계를 확인하니 4시가 지났다. 조금 있으면 동이 터 오를 것이다. 빌어먹을. 컨디션을 망치기 싫어 어떻게든 자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다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일하잔 생각으로 거실로 나왔다.

불을 켜고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로 가려는데 발에 무언가 툭 차인다. 고개를 숙여보니 덕이에게 줬던 인형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꼬리가 아홉 달린. 그걸 주워들고서는 가만히 내려다봤다.

설마 했는데 진짜 발기가 됐다. 아무리 남자가 자극에 약한 동물이라고 해도 그렇지. 사람도 아닌 여우한테 서다니…. 드디어 미쳤구나. 스스로 책망하며 아까 있었던 일을 지우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도 해도 아니야. 백억이 다 무슨 소용이야. 그 두 배를 준다 하면 또 몰라.

순간 물을 따라 마시려던 영신이 멈칫한다.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컵을 쥔 채로 한참을 서 있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될 리가 없잖아?”

비죽이며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지만, 머릿속은 조금 전 떠오른 새로운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 말이 안 되는 일도 아니었다. 일단 해봐서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슥, 아랫입술을 핥은 다음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는 조금 전 주머니에 넣었던 인형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입가에 묘한 미소가 생기고 눈빛은 다른 의미로 번뜩였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꽉 으스러지게 움켜쥐고는 한동안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

밖으로 나오던 영신의 얼굴이 슬며시 구겨졌다. 문 앞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는데 거기 빨간 글씨로 박영신 고자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짓인지는 안 봐도 훤했다. 기막힌 얼굴로 그걸 뜯어내고 몸을 돌리는데 사무실 문 앞에 덕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보인다.

그쪽으로 가서 내려다보니 까만 머리통이 고개를 들어 저를 쳐다본다. 울었던 건지 눈이 퉁퉁 부었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꾸도 안 하고 벌떡 일어나 그대로 홱 하고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얼씨구? 저게.

영신이 인상을 쓰며 따라들어가니 신발을 홱홱 벗어 던지고 제 방 쪽으로 간다. 따라가 봤더니 종이가방에 몇 개 되지도 않는 제 옷을 챙기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물었다. 대체 뭘 하는 짓이냐고.

“보면 몰라? 나가려고 짐 싸고 있어.”

“왜.”

“넌 나한테 아무것도 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 말에 영신이 비웃었다. 머리가 나쁘니 기억력도 달리는 거냐고. 네가 도둑질해간 2억은 어찌할 거냐고 물었더니 덕이가 멈칫한다. 표정을 보니 그건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2만 원도 아니고 남의 돈 2억을 가져가 놓고 저런 태도라니.

영신이 못마땅하게 쳐다보자 덕이가 가방 안에 넣어뒀던 옷을 주섬주섬 꺼내 다시 옆에다 정리해둔다. 그걸 지켜보던 영신이 덕이의 앞으로 가서 섰다.

“뻔뻔스러운 데다 참을성까지 없구나? 정기를 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지, 네가 보챈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어차피 넌 안 선다며. 줄 마음도 없다며.”

“어젠 내가 너무 피곤했어. 그러니까 입 다물고, 며칠만 기다려.”

여전히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게 무슨 뜻인 거야. 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정확하게 말하라고 하자 영신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좋아, 줄게. 됐지? 너무 선뜻 그러겠다고 하니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덕이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정말이냐고 물었다.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대신 아무한테도 말해선 안 돼. 그랬다간 죽여버린다.”

응, 응! 덕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화냈던 것도 잊고 정말이냐고 몇 번을 물었다. 기쁜 나머지 입이 벌어지고 볼이 씰룩거렸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얌전히 기다리겠다고 하자 영신이 머리를 한 번 만져 준다. 착하네.

뜻밖의 행동에 덕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보며 영신이 입가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췄다. 역시 멍청해. 오늘따라 덕이가 예뻐 보이는 건 그가 정말 예뻐서가 아니었다.

일단 딜을 하려면 꼬리 하나 정도는 만들고 시작하는 게 낫겠지. 투자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 아껴서 뭐해. 하지만 돈은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돈이 더 위대한 거지. 암만.

그때 덕이의 배에게 꼬르륵 소리가 난다. 영신이 배가 고프냐고 물었고 덕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하도 울었더니 체력을 너무 소모했나보다고. 뭘 먹고 싶으냐고 묻자마자 덕이가 ‘고기!’라고 외치는 바람에 영신이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그놈의 고기 사랑. 그래, 실컷 먹여주지. 넌 그만한 가치가 될지도 모르는 여우니까.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였다.

***

지잉- 지잉- 청소기 소리에 방에 있던 덕이가 고개를 쭉 빼고 거실 쪽을 바라봤다. 영신이 가고 난 후 10시가 넘어가자 처음 보는 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덕이를 보고 인사를 하더니 곧 청소를 하기 시작하였다. 영신이 미리 말했던 건지 누구냐고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 멀뚱멀뚱 서 있기도 민망하여 자신이 도울 일이 없느냐고 했더니 아니라며 단번에 거절당했다.

결국 덕이는 청소기를 밀고 있는 그녀를 피해 영신의 다른 방까지 피난을 왔다. 그곳은 영신이 평소에 입는 옷과 시계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양이 얼마나 많은지 옷 가게 하나를 통째로 옮겨온 듯싶었다.

뒷짐을 지고 그것들을 하나씩 구경했다. 투명한 진열대 안쪽으로 시계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밑 칸을 열었더니 거기도 시계다. 엄청 많네. 아무것도 모르는 덕이가 보기엔 다 그게 그것 같았다. 왜 비슷한 걸 이렇게나 많이 사들이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방을 둘러보며 구경하다 밖으로 나와 이번엔 반대편 서재로 들어갔다. 그 안엔 책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 위엔 작은 액자도 있었는데 가족사진 같아 보였다.

웃지도 않고 뚱한 얼굴이 지금이랑 별로 다를 게 없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풉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엔 몸을 돌려 책장을 구경했다. 하나씩 책을 빼내다 사진이 가득 들어 있는 앨범도 발견했다.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사진이 얼마 없었다. 대부분 어릴 적 모습이었는데, 지금과 다른 듯하면서도 많이 닮아 있었다. 부모님 두 분을 골고루 빼다 박은 것도 신기했다.

넘기다 보니 어릴 때 사진 말고는 커서 찍은 건 없었다. 학교 졸업식 때 찍은 것처럼 보이는 게 전부였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됐다. 사진찍기 좋아하는 박영신은 상상이 가질 않았으니까.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똑똑,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면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이쪽 방 청소해야 하는데 지금 해도 될까요?”

덕이가 황급하게 앨범을 덮어 제자리에 넣어두었다.

“여긴 웬만하면 들어오면 안 돼요. 대표님이 싫어하거든요.”

그녀의 말에 덕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다 보니 이쪽까지 왔다고, 영신이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방을 빠져나오려다 문득 청소가 언제 끝나는지가 궁금해졌다.

물어봤더니 오후 늦게나 되어야 끝난단다. 반찬도 만들고 해야 한다면서.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거실로 나왔다. 조금 전 청소를 했다고 하지만 워낙 깔끔한 집이라 그런지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날씨가 쨍쨍한 게 정말 맑았다. 현관으로 가 신발을 챙겨 신고 밖으로 나왔다. 어쩐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다 사무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인태와 미자도 함께 가자고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 발길을 돌렸다. 밤에 일하는 두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진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린다. 아무 생각 없이 타려던 덕이가 멈칫했다. 위층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망설이는 덕이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안 타세요?”

덕이가 주변을 살폈다. 더 탈 사람이 없나. 둘이 타기 찝찝한데.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올라탔다.

[그 사람 퇴마사잖아. 그 사람한테 부탁해봐.]

문이 닫히고 덕이가 남자의 모습을 흘깃 살폈다. 오늘은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반바지에 깔끔한 흰 티. 남자와 눈이 마주치곤 황급하게 피했다. 정말 퇴마사일까.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말이 되긴 했다. 정말 그가 오갈 데 없는 귀신을 천도해주는 사람이라면.

띵. 문이 열리고 덕이가 내리려고 하는데 남자가 덕이의 손을 붙든다. 놀란 덕이가 그 손을 뿌리치며 악! 소리를 질렀다. 예민한 반응에 남자가 더 놀란 듯 보였다. 남자가 덕이의 손을 놓고 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에 표시된 층수를 가리켰다. 여기 5층이에요. 누가 눌러놓고 갔나 본데요.

아. 층수를 확인한 덕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남자에게 잡혔던 손목을 슥 문질렀다. 처음부터 안 좋게 생각해서 몸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걸까. 정말 이상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가방 안에 있던 그건 뭐였지. 아무리 봐도 사람 머리카락 같았는데.

띵. 이번에는 1층에서 문이 열리고 덕이가 내렸다. 남자도 뒤따라 내린다. 덕이가 걸음을 빨리해서 제 갈 길을 가는데 남자가 뒤에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쫓아온다. 슬쩍 돌아보면 걸음을 멈추고, 또 슬쩍 돌아보면 걸음을 멈추고.

덕이가 잠시 멈춰 서서 딴짓을 하며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남자는 덕이를 지나쳐 앞으로 나간다. 휴우. 날 따라오는 게 아니었구나. 그런데 남자가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춰 선다. 덕이가 슬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하필.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데 마침 목적지에 갈 버스가 도착했다. 덕이가 도망치듯 버스에 오르며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얼굴이 굳었다. 이런. 돈을 안 가져왔네. 작은 천 주머니에다 돈을 넣어뒀는데 그걸 집에 두고 온 것이다. 미치겠군.

“탈 거예요? 말 거예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덕이를 보며 버스 운전기사가 물었다. 덕이가 입술을 꾹 물었다. 그냥 태워달라고 졸라봐야 소용없겠지. 그대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성인 두 명이요.”

삑. 소리와 함께 덕이가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어느새 18층 남자가 버스에 올라타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뭐 해요? 가서 앉아요. 덕이가 몸을 돌려 버스 뒤쪽으로 걸어갔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으니 남자가 덕이의 바로 앞자리에 가서 앉는다. 동그란 뒤통수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하얀 귀와 하얀 목덜미도.

덕이가 제 팔을 내려다봤다. 저만큼이나 하얀 사내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덕이를 보더니 어딜 가느냐고 묻는다. 덕이가 입을 달싹였다. 말 섞어도 될까. 진짜 위험한 사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왜 나를 따라와?”

“이런.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데. 난 그냥 산책하러 나왔는데 그쪽이 버스비가 없어서 곤란해 하는 걸 보고 도와주려다 어쩔 수 없이 여기 탄 거예요.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죠.”

가르치는 듯한 말투에 덕이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고마워, 하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곧바로 남자가 귀를 덕이 쪽으로 기울인다. 뭐라고요? 잘 듣지 못했어요.

덕이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흘겼다. 다 들어놓고서. 남자가 픽 웃더니 자세를 고쳐 앉는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덕이가 벨을 누르고 내리기 위해 뒷문 앞으로 가서 섰다. 남자는 버스 차창에 기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자는 건가.

[헤매는 영혼들을 천도시켜 주기도 한다더라.]

덕이가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으며 남자를 불렀다. 저기. 남자가 대답이 없다. 덕이가 이번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야. 18. 그 소리에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뜬다. 18?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남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소리냐고 하는 것처럼. 아. 못 들었나. 괜한 부탁을 하는 건가, 뒤늦게 고민을 하는 사이 버스가 멈춘다. 뒷문이 열리고 덕이가 버스에서 내렸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덕이를 따라 내린다. 버스가 사라진 정류장엔 덕이와 남자 둘만이 덩그러니 남게 됐다. 덕이가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내렸어?”

“그쪽이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잖아요.”

아. 듣긴 들었구나.

“무슨 부탁인데요?”

덕이가 동네 위쪽을 바라봤다. 아직 거기 있으려나. 남자의 시선이 그대로 따라 움직인다. 저 위에 뭐가 있느냐고 물었고 덕이가 잠시 망설였다. 남자를 믿어도 될까. 미자와 인태의 말만 믿고 그래도 될까. 하지만 저대로 두면 안 될 텐데.

일단을 가자고 하고 앞서 걸었다. 남자가 덕이를 뒤따랐다. 여기저기 쓰러질 것 같은 집들을 지나쳐 파란색 대문 앞에 도착했다. 덕이가 주위를 둘러봤다. 저번에 봤던 그 험악하게 생긴 남자 귀신은 보이지 않았다.

파란색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아이를 불렀다. 꼬마야.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꼬마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찌 된 일이지. 다급해진 마음에 집 주변을 다 뒤졌지만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딜 간 거야.

그때 남자가 장독대 사이로 걸어갔다. 장독대 사이로 삐죽 꼬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덕이를 보고 눈을 깜박이더니 손을 흔든다. 덕이가 입을 활짝 벌리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다행이다. 있었구나.

“사라진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꼬마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와서 제 몸을 거둬갔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가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다 덕이가 기다리라 한 말을 떠올려서 여기 남았다고. 덕이가 잘했다며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덕이를, 아니 정확하게는 꼬마를 보고 있었다. 덕이가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여?”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이네요. 미자와 인태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구나. 덕이가 안심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혹시… 네가 얘를 천도시켜 줄 수 있을까?”

“천도?”

“응. 이대로 여기서 떠돌게 할 순 없거든. 좋은 곳으로 보내줘.”

흠. 남자가 꼬마를 본다. 여기저기 멍투성이에 몸이 엉망이다. 새카만 눈동자는 슬픔으로 가득 찼다. 이 상태로 오래 떠돌다 보면 악귀가 될 확률도 높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말에 덕이의 입이 활짝 벌어진다. 얼른 남자한테로 가서 두 손을 잡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18. 진짜 고맙다.”

“…….”

“내가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그. 왜 나를 18이라고 부르죠?”

“18층에 사니까.”

남자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 18이었군. 웃음을 멈추더니 덕이와 눈을 맞춘다. 하얀 피부색만큼이나 눈동자도 투명했다.

“내 이름은 강지훈입니다.”

“강지훈?”

“네.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지만 18보단 낫겠네요.”

“아… 미안.”

“사과할 거 없어요. 근데 당신은 이름이?”

덕이가 망설일 것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김덕이.

“김덕이?”

“…응.”

“좋아요. 덕이씨. 그럼 우리 이제 이 친구를 데리고 가볼까요?”

덕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꼬마가 잠시 망설이며 눈치를 살핀다. 덕이가 괜찮다는 얼굴로 웃었다. 걱정할 거 없다면서. 꼬마가 덕이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파란 집 대문을 나와 골목길을 내려왔다.

***

대낮인데도 카페 안은 한산하기만 했다.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인다. 그 옆에 차를 주차 시킨 영신이 팔을 보조석 쪽으로 뻗었다. 글러브 박스를 열어 서류 봉투 하나를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저 멀리 김 여사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쪽으로 향했다. 영신을 발견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는다. 왔어? 영신이 의자에 앉으며 서류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 봉투에 닿는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는 그것을 보고 꽤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영신이 먼저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어쩐 일인지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 구미호에 관한 일이라면서.

“그거 내 거야?”

영신이 웃으며 서류 봉투를 김 여사 쪽으로 밀었다. 보세요. 김 여사가 봉투 안쪽으로 손을 넣는다. 곧 종이 한 장이 달려 나온다. 그것을 꺼내 확인하던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영신을 쳐다본다

“진심이야?”

영신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렇다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찾기도 힘든 구미호를 구해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됐다고. 그러므로 수임료를 올렸을 뿐이라고.

김 여사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영신을 가만히 쳐다본다.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니 뭘 찾긴 찾은 모양인 듯싶었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니 물어도 솔직하게 대답해주진 않을 테지만.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쉰다.

“적은 금액은 아니네.”

“내 몸값에 비하면 많다고는 못하겠네요.”

몸값이란 말에 김 여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지만 영신은 슬쩍 인상을 찡그릴 뿐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엔 그건 걱정 말라고 못 박는다. 그녀가 서류를 챙겨 자신의 명품백 안에 넣었다.

“알았어. 그쪽에 일단 전해줄게.”

“기다릴게요.”

“근데 누군지 안 물어봐?”

그 물음에 영신이 피식 웃었다. 상대가 누군지, 여우를 어디다 쓸 건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 돈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인지, 그게 궁금할 뿐.

“어차피 모른다고 대답하실 거잖아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필요한 것만 받으면 돼요. 그 사람이 설령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한테 돈을 주면 상관없어요.”

김 여사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알겠다고 대답한 그녀가 슬그머니 영신에게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를 묻는다.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묻는 그녀의 속셈을 영신이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

들어볼 것도 없이 안 만난다고 딱 자르자 그녀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괜찮은 조건이라는 말에도 영신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누굴 만나는 것도 그런 걸로 감정을 낭비하는 것도 피곤하다고 느껴졌다.

남들은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었지만, 저는 그냥 이게 좋았다. 아무도 곁에 없는 것. 그래서 상처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그런 삶 말이다.

***

덕이와 꼬마가 지훈의 집 안을 살펴봤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많았고, 소파도 가구도 모두 밝은색이라 아래층에 사는 영신이랑 비교하면 마치 흑과 백 같았다. 그러다 장식장 위에 놓인 인형에 시선이 멈췄다.

사람과 매우 흡사한 모양의 인형이었다. 얼굴뿐 아니라 머리카락 또한 그랬다. 예쁘면서도 너무 비슷하니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전에 가방 사이로 봤던 사람의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설마. 그건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주방으로 갔던 지훈이 차와 과일을 내온다.

“덕이 씨. 이리 와서 차 마셔요.”

덕이가 그쪽으로 갔다. 소파에 앉으니 폭신하다. 영신의 소파는 주인만큼이나 딱딱한데. 그 느낌이 좋아 엉덩이를 두어 번 튕기고 나서 배시시 웃었다. 옆에 있던 꼬마도 똑같이 하더니 따라 웃는다. 둘이 마주 보고 웃는 걸 보고 지훈이 말을 꺼냈다.

“인형 예쁘죠?”

“네 거야?”

“아니요. 조카 선물인데 고향이 부산이라 아직 못 갔어요. 직접 만나서 주려고요. 주문 제작이라 저거 받는 데 한 달 걸렸지 뭡니까.”

아아. 덕이가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봐도 사람 같다. 남자는 그 인형이 꽤 비싼 거라고 말해주었다. 조카가 하나뿐이라 사주긴 하는데 대체 저걸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사과가 담긴 접시를 덕이 쪽으로 밀어준다.

“근데요.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덕이 씨랑 같이 다니는 남자는 누구예요?”

손으로 사과를 집어 입에 넣으려던 덕이가 영신이? 하고 물었다. 그 인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겠지.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어. 그냥 차라리 거짓말을 하자.

“애인이야.”

남자가 컵을 입에 댄 채 그대로 굳는다. 덕이가 사과를 오물거렸다. 이 정도면 내가 여우라는 건 눈치 못 챘겠지. 근데 표정이 왜 저따위야. 옆을 보니 꼬마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덕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왜들 그래?

“영신이한테는 알은척하지 마. 엄청 부끄러워하거든.”

그 말에 지훈이 입만 벌려 하하, 하고 웃었다. 덕이가 사과를 하나 더 집어 입에 넣었다.

“놀랐어?”

“아뇨. 뭐 그런 건 아닙니다. 요즘 세상에 많으니까요.”

덕이가 그러냐며, 웃었다. 그래도 의심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사과를 먹으며 창밖을 보니 해가 저 멀리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 벌써 저녁때인가. 영신이가 오기 전에 집에 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만 가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꼬마가 덕이의 옷자락을 잡는다. 덕이가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지훈을 돌아봤다.

“그 천도라는 건… 언제 하는 거야?”

“해가 들어가면 그때 시작합니다. 보고 갈래요? 이제 슬슬 준비할 참인데.”

덕이가 잠시 고민했다. 더 지체했다가 늦으면 영신에게 한 소리 듣지 않을까. 그렇지만 제 옷자락을 붙든 감자알만 한 손이 마음에 걸려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늦는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바로 아래층인데 뭘.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지훈이 곧 준비할 테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덕이가 소파에 앉아 사과를 먹으며 꼬마 귀신의 손을 꼭 붙들어 주었다. 산등성이에 걸쳐있던 해가 완전히 사라지는 중이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지훈이 나왔다.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셔츠까지 갖춰 입은 그는 조금 전 그 남자와 다른 사람 같았다. 흰 얼굴은 더 창백해 보여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한쪽에 향을 피웠다. 특유의 향냄새가 집 안에 퍼졌고, 곧 여러 개의 초에 불을 밝혔다. 어두워지는 집 안에 은은한 촛불이 켜지니 조금 전까지 아득하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초를 모두 켠 그가 한쪽에 놓아둔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손으로 집는다. 바닥에 뿌리는데 보니 흰 가루였다. 그걸 거실에 둥글게 뿌려가며 모양을 만들었다.

동그랗게 만든 그 주변으로 초들을 세운다. 덕이가 긴장된 얼굴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는 매우 신중해 보였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준비를 마친 남자가 꼬마에게 원 안으로 들어와 서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꼬마가 망설였다. 덕이가 그를 데리고 원 안으로 들어갔다.

“덕이 씨는 거기 있으면 안 돼요.”

덕이가 잠시 망설였다. 원 밖으로 벗어나려고 하자 꼬마가 덕이의 옷자락을 붙들더니 손짓을 한다. 덕이가 상체를 숙여 꼬마의 얼굴 옆으로 가져갔다. 꼬마가 손을 동글게 말아 덕이의 귀에 붙였다.

“…고마워.”

그러더니 덕이의 목을 꼭 끌어안아 준다. 덕이가 입술을 꼭 물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이 시큰거렸다. 코를 훌쩍이며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좋은 곳으로 가. 꼬마가 웃으며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아줬다.

덕이가 뒤로 물러서 원 밖으로 나왔다. 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지훈이 한 손에 방울을 쥔 채 의식을 시작했다. 품 안에서 부적을 꺼내더니 그걸 아이의 몸 쪽으로 던진다. 부적이 공중에 뜬 채 아이의 몸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맞춰 촛불이 춤을 추듯 일렁인다. 어느 순간 아이의 몸이 투명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빛이 생기더니 그 빛은 온몸을 감쌌다. 덕이가 경외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꼬마가 제 몸을 내려다보다 덕이를 바라보며 살포시 웃는다. 조금 편안해진 얼굴이다.

덕이가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다음번엔 고통받지 않고 살기를. 정말 좋은 부모 밑에서 사랑받으며 자라길. 그렇게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 꼬마의 몸은 어느새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밝아지더니 그대로 압축되듯 작아져 사라져버렸다. 밝은 빛에 덕이가 팔등으로 눈을 가렸다. 훅, 순간 방 안의 촛불이 꺼졌다.

집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조용한 가운데 향냄새만이 코끝으로 밀려들어 온다.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떼어내고 보니 아이가 서 있던 자리엔 재가 되어버린 부적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덕이가 먹먹한 얼굴로 그 자리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제 어깨를 짚는 게 느껴졌다.

“좋은 데로 갔을 겁니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요.”

***

인태와 미자가 지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벌써 몇 시간째 남자와 여자가 몸을 섞고 있었는데 끝이 날 줄을 몰랐다. 불륜이라 더 불타오르는 건가. 인태가 그냥 다음에 올까 물었지만 미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일단 일을 마치고 들러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앉아 있던 미자가 벌떡 일어나 침실 쪽으로 향했다. 안에선 신음이 마구 뒤엉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뭐야? 들어가게?”

“일단 해보고.”

스륵, 닫힌 방문 안으로 미자가 사라졌다. 혼자 남은 인태가 집 안을 둘러봤다. 저번에 왔을 때는 그냥 단순히 불륜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둘의 사이가 꽤 깊어 보였다. 곳곳에 둘이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누가 보면 신혼집인 줄 착각할 만큼 다정스러워 보였다.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 닫힌 방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여자가 두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감쌌다. 남자가 거칠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자궁벽까지 내리찍는 기분이었다. 그 황홀감에 눈을 감고 신음을 내지르다 더 해달라고 목소리를 내는데 문득 누군가 저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순간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천장에 웬 여자가 매달려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가 제 얼굴에 닿을락 말락 했다. 헉. 너무 놀라니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위에 올라타 허리를 움직이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오빠! 오빠! 하고 숨 끊어지는 소리를 냈다. 남자가 그 소리에 허리를 세차게 더 움직였다.

“시발, 좋지? 좋아 죽겠지? 나랑 살래? 인철이 버리고 나랑 살자? 응?”

“그게, 아니라, 오빠, 잠깐, 잠깐 저기!”

“그래. 나도 좋아. 아! 자기야! 너무 좋아 죽겠어.”

“그게 아니라 귀! 귀이!”

“귀 빨아줘?”

남자가 여자의 귀를 혀로 문지르고 입 안에 넣고 난리도 아니다. 여자가 그게 아니라고 남자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허리만 움직였다. 허공에 매달려 있던 여자가 그대로 천천히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머리카락이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을 점점 뒤덮기 시작했다. 남자의 어깨 뒤까지 내려온 여자의 얼굴은 마치 남자의 어깨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은 흰자위만 있고 입 안은 치아도 혀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버둥대다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남자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가 입에 거품을 문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놀란 남자가 여자를 흔들었다. 급하게 성기를 빼내려고 하는데 어쩐 일인지 성기가 빠지질 않는다.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눈 좀 뜨라며 여자를 흔들었다. 가까스로 눈을 뜬 여자의 눈에 다시 남자의 어깨 위에 붙은 얼굴이 보인다. 여자가 꺅! 비명을 지르며 다시 혼절해버렸다. 남자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여자를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

카드를 대자 문이 열렸다. 덕이가 안으로 들어가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영신이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긴 했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거실로 향하는데 영신이 소파에 기대앉아 긴 다리를 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 테이블엔 술이 가득 든 잔과 술병이 놓여 있었다.

술을 먹은 건가. 최대한 거슬리지 말아야지. 덕이가 살금살금 걸어 제 방 쪽으로 향하는데 영신이 어디 갔다 오는 거냐고 묻는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영신이 그 자세 그대로 눈만 뜬 채 덕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산책하러….”

영신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픽 웃는다. 무슨 산책을 12시간 동안 하고 오냐면서. 그 말에 덕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영신이 인터폰을 가리킨다. 집에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이 저기에 모두 찍힌다면서. 덕이가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영신이 이리 오라고 손을 까닥였다. 싫다고 고개를 저었더니 인상이 험상궂게 변한다. 좋은 말로 할 때 와. 쭈뼛거리면서 바로 앞까지 걸어가자 영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팔을 뻗어 덕이의 멱살을 낚아채더니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놀란 것도 잠시 덕이가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뽀뽀하려는 건가 싶어서.

영신이 욕을 작게 씹어 뱉었기에 아니라는 것을 알고 눈을 떴지만.

“너 어디 갔다 와?”

“…말했잖아…. 산책.”

“향냄새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데?”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덕이가 할 말을 잃었다. 코를 제 옷소매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조금 전 위층에 있을 때 향냄새가 배었나 보다. 뭐라고 둘러대지. 머리를 굴린다고 굴리는데 영신이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아준다.

“18층에 다녀왔지?”

덕이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영신의 눈매가 매서워진다.

“경고하는데 가까이하지 마.”

“너 질투하는 거지?”

“뭐?”

“내가 다른 놈이랑 짝짓기할까 봐 지금 걱정하잖아.”

그 말에 영신이 기막히다는 얼굴로 비웃었다. 질투가 뭔지나 알고 떠드는 거냐면서, 자기가 그렇게 할 일 없어 보이냐고 물었다. 덕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면 말라지.

“네 정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생각 아니라면 내 말 들어.”

“내가 여운지 모르던데?”

“정말 모르는 거 같아?”

그 말에 덕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제 예감이 그렇다는 거지. 한편으론 어제까지 나쁜 놈 취급했는데 그가 영신과 같은 퇴마사고 꼬마 귀신을 천도시켜 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마음이 바뀔 수 있구나 생각하니 조금 우스웠다.

영신의 마음도 저처럼 쉽게 바뀌면 좋으련만. 기가 팍 죽어 제 방 쪽으로 가려는데 영신이 테이블에 올려둔 술잔을 잡으며 덕이를 부른다. 야. 여우.

“왜.”

“씻고 나와.”

“말 안 해도 씻을 거야. 나갔다 오면 씻는 거 정도는 나도 알아!”

“씻고, 내 방으로 와.”

멍청한 얼굴로 서 있던 덕이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영신이 내려놓은 술잔을 다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만큼 걸어갔던 덕이가 후다닥 달려와서는 영신의 팔을 붙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이미 알아챈 듯 덕이의 뺨이 씰룩이는 게 보였다. 영신이 기막혀 웃었다. 어쩐지 덕이의 등 뒤로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곰이려면 끝까지 곰이든가. 이런 건 기차게 알아듣네.

“알면서 뭘 물어.”

“진심이야?”

“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며칠 기다리라고 해서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덕이가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좋은 일만 생기려나 보다. 꼬마도 좋은 곳으로 보내줬고 영신이한테 꼬리도 받게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것이 있었다. 어제 본 바로는 영신의 고추가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듯한데.

“근데 너 고자잖아?”

“스읏.”

“아니야?”

“아니야. 그러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떠들기만 해.”

덕이가 찔끔했다. 벌써 미자랑 인태에게 다 말했는데. 그러면서 영신의 허리를 확 끌어안는다. 영신아, 고마워. 마음 바꿔줘서. 영신이 질겁을 하고 떼어내려고 했지만 얼마나 찰떡같이 들러붙는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중엔 포기하고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제 가슴팍에 머리통을 폭 파묻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이건 여우라기보다 개에 가까운데. 덕이가 영신의 허리에 감고 있던 제 팔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내면서 얼른 씻고 오겠다며 방 쪽으로 후다닥 튀어간다.

그 모습을 보며 영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자, 해. 시발 한번 하면 될 거 아니야. 후우. 옆에 있던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아무래도 맨정신으론 안될 것 같아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 다시 술을 채워 들고 제 방 쪽으로 걸어갔다.

방으로 간 영신이 술잔을 만지작대고 있는데 휴대전화의 문자가 울린다. 책상 위에 있던 그것을 들어 확인하는데 김 여사다.

[상대방이 받아들인대. 하여튼, 수완 좋아.]

됐군. 영신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잠시 후 덕이가 들어왔다. 물기가 남은 뽀얀 얼굴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말이다. 영신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거꾸로 뒤집어놓고 나서 다시 술잔을 들었다.

덕이가 그런 영신을 보더니 침대 쪽으로 가서는 납작 엎드린다. 후우. 그걸 보는 영신이 들고 있던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덕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안 해?”

“기다려. 맨정신으로 못하겠어서 그래.”

치. 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하기 싫은가, 생각이 들어서 조금 서운해지기도 했고, 정말 한다고 하니 들뜨기도 했고. 바스락거리는 침대 시트를 손끝으로 만지작대고 있는데 아무래도 감감무소식이다. 다시 고개를 돌렸더니 영신이 또 술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술만 먹을 거야?”

자꾸 보채자 영신이 이를 까득 물며 이것만 마시고 갈 테니 닥치고 기다리라고 한다. 덕이가 엉덩이를 든 채로 투덜댔다. 계속 있으니 허리며 다리가 다 아팠다. 발끝도 저리고. 결국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영신은 술잔을 든 채 뭘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덕이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럴 줄 알았어. 저 고자 새끼. 박영신 고자 바보 등신 새끼. 속으로 욕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와 그냥 밖으로 나가려는데 영신이 덕이의 손목을 붙든다.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이 어찌나 비장한지 보는 사람까지 긴장됐다. 덕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속으로 욕했는데 들었나 싶어서. 하지만 영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테이블 잡고 엎드려.”

그 말에 덕이가 슬그머니 미간을 구겼다. 허리도 아프고 침대에서 하고 싶다고 했더니 영신은 싫다고 딱 자른다. 침대 더럽히기 싫다면서. 그 말에 덕이가 하는 수없이 테이블을 잡고 그대로 상체를 숙였다.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데 지이익-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테이블을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허벅지로 발기하기 시작한 성기가 닿는 게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려고 하자 그가 상체를 누른다.

잠시 후 영신이 옆에 두었던 술병을 들더니 그대로 덕이의 엉덩이에 들이붓는다. 차가운 감각에 덕이가 화들짝 놀라 몸을 퍼덕였다.

“뭐 하는 거야!”

“소독. 너한테 무슨 병이 있을 줄 알고.”

덕이가 인상을 팍 구겼다. 나 병 같은 거 없다고 꽥 소리를 질렀지만, 영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그 독한 술을 다 붓고 나서는 반쯤 발기한 성기를 앞뒤로 문질렀다. 오늘 일을 치를 줄 알았으면 젤이든 뭐든 사오는 건데.

영신이 뒤늦은 후회를 하는 사이 성기는 완전히 꼿꼿하게 발기했다. 기둥을 손으로 잡고 입구 쪽으로 가져가는데 덕이의 몸이 흠칫 굳는 게 느껴진다.

“왜 그렇게 긴장해. 처음도 아니면서.”

영신의 목소리가 낮고 서늘했다. 술이 들어가면 사람이 좀 풀어질 법한데, 이건 뭐 맨정신일 때보다 더 쌀쌀맞네. 하지만 아쉬운 여우가 땅을 파는 법이라고 했어. 일단은 기분을 맞춰줘야지. 덕이가 입술을 꾹 물고 최대한 몸에 힘을 뺐다. 아프면 저만 손해니 말이다.

잠시 후 영신의 성기가 꾹꾹 애널을 누르다가 안쪽으로 천천히 밀고 올라간다. 덕이가 입을 벌리며 테이블 끝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통증이 상당했다.

“씨발. 이게, 진짜 들어가네.”

영신이 욕을 뱉으며 작은 구멍이 야금야금 제 성기를 먹어치우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뿌리 끝까지 쑤셔 완벽하게 박아넣고는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때 꿈에서 느꼈던 그것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다.

덕이가 고개를 돌려 자꾸 뒤를 본다. 눈이 축축하고 빨갛게 젖어서는 저를 쳐다보는데 시선이 얼마나 끈적한지 몸을 다 핥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못 참겠어서 옆에 있던 수건을 집어 그의 얼굴에 덮어버렸다. 뭐하는 짓이냐고 수건을 치우려고 하길래 손을 뒤로 꺾어 붙들었다.

“치우기만, 해.”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가 앞으로 쿡, 쿡 가볍게 찔러 넣자 덕이의 몸이 움찔거리면서 떨린다. 수건 안쪽으로 아, 아아, 신음을 내뱉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나쁘지 않다.

이번엔 조금 더 뒤로 멀리 뺐다가 콱, 하고 넣으니 아응, 하고 콧소리를 낸다. 영신이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다. 안에다 대고 비비면 비빌수록 벌어지는 게 아니라 내벽이 오므라들면서 제 성기를 씹어먹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아,”

“영, 신아, 더 해줘. 더… 으으응.”

그 와중에 더 해달라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지금은 또 얼마나 야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손을 앞쪽으로 뻗어 수건을 치우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거둬들였다. 점멸하는 머릿속 퓨즈를 간신히 붙들고는 기계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퍽, 퍽, 제 허벅지에 엉덩이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수건을 덮었다고 투덜대던 덕이는 이제 신음만 내지르기 바빴다. 그 소리가 귀를 자극하고 온몸의 세포들을 들쑤셔놨다. 당장에라도 저 수건을 걷어내 쾌락에 절어버린 얼굴을 마주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테이블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신음이 난잡하게 뒤엉키는 가운데 마지막 속도를 올리던 영신이 그대로 안쪽까지 박아넣으며 숨을 멈췄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를 까득 무는 순간 울컥울컥 성기에서 정액이 쏟아져 안을 적셨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던 덕이가 몸을 축 늘어트렸다. 성기를 완전히 빼내자 구멍 밖으로 흰 정액이 흘러나와 허벅지를 타고 바닥에 툭툭, 떨어진다.

바닥은 영신이 뿌려놓은 술과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그때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내려보니 덕이가 제 손으로 수건을 걷어내며 웃고 있었다. 쾌락으로 눈이 빨갛게 짓물러서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야한 얼굴로.

그걸 보는 영신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사정을 마치고 수그러들던 제 성기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꿈틀거리며 다시 발기를 시작했다.

덕이가 바닥에 엎드려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신음을 냈다. 뒤에선 영신이 덕이의 허리를 붙들고 난폭하게 움직였다. 빨갛고 작은 구멍으로 끊임없이 성기가 들락이는데도 힘들어하기는커녕 더 해달라고 보채기 바빴다.

영신이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달을 냈다. 영신이 이를 까득 물며 악에 받쳐 허리를 움직였다. 엉덩이를 공중에 띄운 상태로 마구잡이로 쑤셔대니 덕이가 자지러지며 바닥을 다시 기어 다닌다. 그러다 등 뒤로 몸을 포개며 울컥울컥 정액을 쏟아 내자 눈앞에서 꼬리 아홉 개가 거짓말처럼 흔들린다.

영신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드는 것도 잠시 대리석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덕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주둥이가 진짜 여우처럼 툭 튀어나와서는 눈이 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대로 몸을 날려 영신에게 달려들었다. 팔다리를 움직여 벗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덕이가 손톱으로 영신의 배를 가르고 뱃속을 헤집어 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을 큼지막하게 벌려 그 간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 입에 피를 묻힌 채 깔깔대고 웃는데, 그 웃음소리에 어찌나 큰지 뇌가 쪼개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영신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들썩였다.

감고 있던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보인다. 영신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씨발. 꿈 한번 진짜 좆같네. 밀려드는 두통에 더는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이마를 감싼 채 몸을 일으키다 테이블 위에 있는 술병을 발견했다. 바닥이 엉망이다. 여기저기 튄 말라버린 정액을 보고는 그만 인상이 저절로 써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7시다. 어젯밤 더 하자고 달려드는 덕이를 떼어놓고 방으로 보냈다. 망할. 진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두 눈 딱 감고 했더니 생각만큼 나쁘진 않아서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갈아신고 방 밖으로 나왔다. 거실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직 잠든 건가. 덕이가 자는 방으로 걸음을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젯밤 제 밑에 깔려 헐떡이던 여우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영신이 성큼성큼 다가가서 이불을 확 젖혔다. 알몸으로 엎드려 자는데 엉덩이가 탐스럽게 솟아 올라와 있다. 그 위로 꼬리는커녕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덕이가 몸을 뒤틀며 눈을 부스스 떴다. 영신이 제 방에 온 걸 확인하고선 팔을 쭉 뻗는다.

“영신아아.”

영신이 그 팔을 툭, 쳐냈다. 덕이가 곧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젯밤 거친 정사를 치렀는데도 어쩐지 몸은 개운했다. 양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는데 영신이 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또 하게? 나 누워?”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꼬리 안 나왔어?”

덕이가 제 엉덩이를 돌아봤다.

“그러게. 한 번으론 부족했나.”

씨발. 영신이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더 심해지는 기분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두세 개도 아니고 하나도 안 나온 걸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덕이가 손을 뒤로 뻗어 제 엉덩이 위쪽을 만지더니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 투덜댄다.

“영신아. 너 정기가 별로 강하질 않은가 봐.”

“…….”

“아니면 정말 고자인가.”

“닥쳐.”

“그래도 어제는 진짜 좋았는데. 또 하자.”

손을 뻗어 영신의 허벅지를 슥 문지르면서 눈을 새치름하게 뜨고 배시시 웃는다. 빨간 그 입술을 보고 영신이 몸을 홱 돌려 버렸다. 성큼성큼 나가버리는 그의 뒤를 덕이가 졸졸 따랐다. 거실까지 따라 나와서는 더 하자고 징징거리고 조른다.

영신은 골이 흔들리는 기분에 머리를 감싸 쥐고 주방 쪽을 향했다. 덕이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하자아아. 한 번만 더 해보자아아.”

“아, 좀 시끄럽다니까!”

그만하라고 꽥 소리를 지르는데도 제 팔에 매달려 하자고 조른다. 영신이 뒷목을 잡았다. 어제야 술김에 한 거고 지금은 맨정신인데 그게 되겠느냐고 쏘아붙였다. 보채는 덕이를 떼어 내고 혹시 몸에 이상한 느낌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상한 느낌?”

“그래. 꼬리 부분이 간질간질하다든가, 뭐 그런 느낌말이야.”

“음… 배가….”

“배?”

“고파. 배고파.”

영신이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으며 정말 아무 느낌도 없느냐고 다시 한 번 묻는다. 덕이가 발끝을 들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영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뭐하는 짓이지?

“뽀뽀해주면 말해줄게.”

까득. 영신이 이를 물고서 그 입술을 잡아 그대로 비틀었다. 덕이가 우웁 하며 팔을 휘둘렀지만 영신에게 붙들린 채로 거실까지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잡은 채로 소파 쪽으로 던지니 그대로 나자빠진다.

“옷이나 입어. 이 변태 여우 새끼야.”

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영신아 넌 바보야. 그냥 정기만 준다고 그 꼬리가 나오는 줄 알아? 진심으로 대해주면서 짝짓기를 해야지.”

영신이 노려보며 수 쓰지 말라고 쏘아붙였지만 덕이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배려해주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정기를 나눠줘야 꼬리도 생기는 거라면서. 그렇게 거지 적선하듯 하면 꼬리가 나오겠느냐고.

영신이 콧방귀를 뀌더니 그대로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린다. 가서 문을 열려고 봤더니 벌써 잠겨있다. 문밖에 서 있던 덕이의 얼굴이 잠시 시무룩해졌다가, 다시 배시시 웃는다.

“짜식. 부끄러워하긴….”

***

미자와 인태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아침에 영신이 출근하고 나서 덕이가 놀러 왔는데 밤새 얼굴이 봄꽃처럼 하얗게 폈기 때문이다.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면서 이상한 춤을 추고 난리가 났기에 살짝 맛이 간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덕아. 무슨 좋은 일 있어?”

그 물음에 덕이가 비밀이라고 했다. 절대 가르쳐줄 수 없다면서. 미자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지만 덕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영신이 누구한테라도 발설하는 날엔 꼬리고 뭐고 네 목숨을 끊어놓겠다고 협박을 했으니 말이다. 살려면 입을 다무는 수밖에. 마음 같아선 동네방네 떠들고 싶지만 참아야겠지.

“보나 마나 별거 아닐 테지.”

그 말에 덕이가 발끈해서 아주 별거라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인태는 배까지 잡으면서 비웃었다. 미자가 오늘따라 왜 그렇게 오버하냐며 인태를 말렸지만, 그는 웃는 걸 그치지 않았다. 덕이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영신의 입장이 난감해질까 봐 관두었다.

끝끝내 입을 다물고서는 말을 하지 않자 인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오더니 진짜 무슨 일이냐고 슬그머니 묻는다. 이 어리숙한 여우가 좀 놀리면 입을 열 줄 알았는데 끝내 말을 안 하니 말이다.

“진짜 뭔데. 궁금하잖아.”

“아무것도 아니야. 넌 몰라도 돼.”

“혹시 윗집에 가서 부탁했냐? 정기 나눠달라고.”

인태가 갑작스레 위층 남자 이야기를 꺼냈고 덕이가 어제 그 남자를 만난 이야기를 해줬다. 만나서 대화했던 일과, 꼬마 귀신을 천도시켜 줬다는 얘기를 꺼내자 듣고 있던 미자가 그러느냐며 잘됐다고 제 일처럼 기뻐해 줬다.

“만나보니 어때? 정말 살인자 같았어?”

덕이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오해한 거 같다면서.

“가방 속에 있던 것도 사람 머리가 아니더라. 괜한 사람을 오해했어.”

“거봐. 잘 알아보지도 않고. 내가 봐도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았어.”

“다행이다.”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던 그 여자도 그 남자가 좋은 곳으로 보내준 거 같더라.”

“어쩐지. 그래서 안 보였구나.”

응. 그랬나 봐. 고개를 끄덕이던 덕이가 문득 생각했다. 근데 그 여자 귀신은 왜 저한테 도망치라고 했을까. 위험하다고 말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아니면 박영신을 조심하라는 경고인가.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을 거 같기도 하다. 영신이 귀신들한테는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는데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흐려진다. 잔뜩 가라앉은 회색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덕이가 양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때 미자가 인태를 돌아보며 물었다.

“인태 너 오늘 그날 아니야?”

그 말에 창밖을 내다보던 덕이가 뒤를 돌아봤다. 인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고. 궁금해진 덕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날이 무슨 날인데.”

“알려고 하지 마, 구데기. 너도 나한테 말 안 해줬잖아.”

“치사하다!”

“인태가 부모님 보러 가는 날.”

“부모님이 계셔?”

“그럼 난 뭐 하늘에서 떨어졌겠어.”

“어디 계시는데?”

“예전 살던 집에 아직도 계셔. 좀 이사 가라니까….”

인태가 뒷말을 흐렸다. 영신을 통해 돈을 보냈지만, 자신의 부모는 예전 살던 그 낡은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었다. 연세가 꽤 드셨는데, 위로 형과 누나가 넷이나 있었지만 다들 자기 먹고사는 것도 바빠 부모님을 돌볼 시간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처음엔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올 것 같은 생각에 떠나지 못했고, 그 후로는 그런 생각들이 습관으로 굳어져 그곳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평생 자식 걱정만 하고 살던 양반들인데, 죽어서도 제 걱정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럼 내가 같이 가 줄까?”

덕이의 말에 인태가 슬그머니 미간을 구긴다.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서 노인네 뒷목 잡게 하려고? 황천길 보내드리게?”

“그런 거 아니야!”

덕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잠시 고민하던 인태가 그럼 그렇게 하라며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미자가 그럼 저도 가겠다고 말했다. 인태의 부모님 얼굴도 궁금하다면서. 망설이던 인태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외출 준비라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집을 빠져나왔다.

덕이가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미자와 인태가 그 앞에서 덕이를 지켜봤다. 돈을 떼먹은 누군가한테 전화를 건다고 했는데, 몇 번을 해도 받지 않는지 그냥 끊더니 부스 밖으로 나온다. 볕이 얼마나 뜨거운지 두피가 벗겨질 정도로 쨍쨍 내리쬈다. 시무룩한 덕이의 얼굴을 보고 미자가 연락이 안 되느냐고 먼저 물어봤다.

“없는 번호래.”

“나쁜 새끼네. 친구 등이나 처먹고.”

“그러게.”

어깨를 축 늘어트린 덕이를 향해 미자가 어깨를 다독여줬다. 그런 놈은 빨리 잊으라고 말이다. 덕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몰래 가져간 영신의 돈도 찾고 구슬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는데. 정말 다 거짓말인 건지. 구슬 같은 거 애초에 없었는지 말이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얼른 가자. 늦겠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태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투덜댔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평소 그와 다르게 살짝 들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미자가 어린애 같다며 웃었고, 덕이도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골목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슈퍼마켓 하나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간 덕이와 인태가 과일 판매대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인태가 잘 익은 걸 하나 골라줬고, 곧 덕이가 돈을 내고 제 머리통보다 커다란 수박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인태의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고 했다.

낑낑 그걸 들고서 가파른 골목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여간 무거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집도 제일 꼭대기 집이고.

“인태야. 나 너무 힘들어.”

“야, 1분도 안 걸었거든.”

덕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조금 전 수박을 사서 가지고 나온 슈퍼가 바로 등 뒤에 있었다. 엄청 많이 걸은 거 같은데 아직 이것밖에 안 왔단 말이야? 그러고 나서 정면을 보는데 인태가 말한 집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덕이가 한숨을 푸욱 내쉬니 옆에 있던 미자가 기운 내라고 다독여준다.

“마음 같아선 내가 들어주고 싶다.”

“말이라도 고마워, 미자야.”

“무슨 사내자식이 수박 한 통을 들고 힘들어 하냐.”

인태의 구박에 덕이가 눈을 흘겼다. 그냥 안 가져가고 확 굴려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인태가 지랄할 것 같아 그건 관두기로 했다. 이마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수박을 들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제일 꼭대기 집 앞에 도착했다.

덕이가 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퉁퉁, 퉁퉁. 그러자 인태가 덕이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소용없어. 그냥 들어가. 덕이가 맞은 엉덩이를 붙들고 다시 눈을 흘겼다. 때리지 마라. 나도 싸움 잘해.

수박을 챙겨 들고 안으로 들어가니 웬 나이 든 노인 한 분이 평상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덕이를 보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잔뜩 굽은 허리는 그가 얼마나 고단하게 살아왔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노인이 덕이를 가만히 쳐다보며 말을 않더니 곧 손짓을 한다. 덕이가 눈을 깜빡였다. 왜 손으로 저러는 거지?

“말을 못해.”

그러더니 인태가 손짓을 해 보이며 덕이에게 따라 하라고 한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설프게 그 동작을 따라 했더니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덕이의 양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이다.

덕이가 인태를 돌아봤다. 인태의 표정이 어쩐지 이상하다. 여태 보아오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노인이 덕이를 놓아주었고, 곧 인태가 손짓을 해 보였다. 또 따라 하자 이번에는 노인이 덕이를 안아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끼이이,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온다. 봤더니 머리를 바글바글 볶은 할머니였다.

그녀가 들어오며 덕이를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누구?”

“아… 나 인태 친구.”

덕이가 말을 하는데 인태가 툭. 친다. 야 반말하지 마. 우리 엄마야. 엄마란 말에 덕이가 그녀를 자세히 훑어봤다. 아무리 봐도 인태랑 안 닮았다. 아들의 친구란 말에 그녀가 들고 있던 목욕 가방을 내려놓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이고, 우리 인태 친구구나. 반가워. 여긴 어쩐 일이야.”

그러면서 밥은 먹었느냐고, 인태랑은 어찌 아는 사이냐고, 마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맞아준다. 지켜보고 있던 미자가 인태를 쳐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데. 너희 부모님은 친구라고 하니 다 믿으시네.”

“…그러게.”

쓸쓸하게 웃는 인태의 얼굴이 조금 안쓰러워 보여 미자도 더는 아무것도 묻지 못하였다. 인태의 부모님이 수화로 대화를 주고받더니 곧 덕이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차나 한잔 하고 가라면서. 덕이가 인태를 봤다. 어떡해? 들어가?

인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앉았다 나와. 그렇게 셋, 아니 다섯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곳곳에 인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어릴 적부터 시작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늦둥이라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더니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두 노부부만 살던 집에 활기가 돌았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주방 쪽으로 갔다. 곧 달가닥 달가닥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덕이가 인태의 어릴 적 사진들을 살펴보며 웃었다. 미자도 그 옆에 서서 같이 구경했다. 어릴 때부터 뺀질뺀질 하게 생긴 게 말도 더럽게 안 들었을 거 같다고 하자 덕이가 그만 혼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태는 주방에서 제 모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과일을 깎고 차를 타면서도 내내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그걸 보는 인태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엄마. 그렇게 좋아? 아들도 아니고 아들 친구가 온 건데….”

그 말을 하며 인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녀가 정성스럽게 깎은 사과와 차를 가지고 인태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선 덕이와 미자가 사진 구경에 한창이었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요.”

덕이가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잘 먹을게…요.”

사과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먹는데 그녀가 와줘서 고맙다고, 우리 인태가 알면 좋아할 거라고, 그런 말을 해준다. 그러면서 사진을 하나씩 설명해줬다. 언제 찍었고, 어디서 찍은 것까지.

덕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냐고 대답했다. 사과를 먹으면서 저를 뿌듯한 얼굴로 쳐다보는 인태의 모친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제 가족에게선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관심이었다.

“얼굴이 참 곱게 생겼네. 우리 인태 친구가 아니라 한참 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

덕이가 보기엔 이래 보여도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고 말해주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이상했는데 자꾸 말을 하다 보니 조금 편안해진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하는데 인태의 모친이 넌지시 점심을 먹고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덕이가 한쪽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인태를 쳐다봤다. 인태가 고개를 끄덕였기에 덕이가 곧바로 고기 있느냐고 물었다. 인태가 이번엔 인상을 구겼다. 저 새끼가 남의 집에 와서 고기 타령을.

“고기 좋아하는구나. 기다려요. 저번에 사다 둔 거 있어. 당신도 고기 괜찮아요?”

모친이 수화로 묻자 인태의 부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수화로 뭐라고 얘기한다. 모친이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켜보던 미자가 방금 네 아버지가 뭐라고 했느냐고 하자 인태가 인상을 슬그머니 구겼다. 소고기 사오라고.

모친이 부엌으로 다시 들어가자 덕이가 쪼르르 따라 들어가더니 도와드릴 게 없느냐고 팔을 걷어붙인다. 그 모습을 보며 미자가 피식 웃었다.

“덕이 넉살 되게 좋다. 처음엔 좀 어색해 하더니, 금방 적응하네.”

“그러게.”

“너네 부모님도 좋아하시네. 잘됐다.”

응. 인태가 대답을 한 후 책상 쪽으로 갔다. 후원 증서가 있었다. 자신이 나온 모교에 부모가 제 이름으로 장학금을 기증했다는 증서였다. 그걸 보며 마음이 씁쓸해졌다. 언젠가 영신이 딱 한 번 인태의 부모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인태도 같이 왔었다.

물론 부모님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때 모친이 인태가 보내오는 돈의 일부를 모교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태는 그러지 말라고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모친의 말을 듣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좋은 일 많이 하면, 우리 인태도 좋은 데 가지 않을까 해서요.]

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그렇다고 돈을 안 보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하는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기부 증서를 먹먹한 얼굴로 보다가 벽에 걸린 제 사진을 무심한 얼굴로 쳐다봤다.

손을 뻗어 그 얼굴을 가만히 만졌다. 어릴 적 늦둥이라고 제 아버지가 저를 업고 다닌 기억이 난다. 나이 많은 부모님이 창피해서 학교 앞에서 기다리면 멀리 도망치던 기억도. 인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미자가 못 본 척하며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주방 안쪽에서 깔깔 웃는 인태 모친의 목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무슨 말인가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몸을 돌리던 인태가 한참을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

강아지를 안고 달래던 석현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입구 쪽을 쳐다봤다. 오늘 진료가 다 끝났는데 손님이 왔나 싶어서.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건 뜻밖에도 영신이었다. 한 손에 작은 쇼핑백을 들고서 말이다.

“형이 어쩐 일이야?”

“근처에 볼일 보러 들렀다가 잠시 온 거야.”

“볼일?”

석현의 시선이 영신이 들고 있는 작은 쇼핑백에 꽂힌다. 혹시 휴대전화 바꾸러 나왔느냐고 물으니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에 석현이 픽 웃어 보였다.

“애인님 거구나?”

“아니라고 했다?”

“다 이해해 형.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형도 알잖아.”

“아냐.”

“근데, 혹시… 원조는….”

영신이 소파에 앉더니 그만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더는 얘기도 꺼내지도 말라면서. 석현이 알겠다고 웃으며 안고 있던 강아지를 내려놓자 녀석이 영신에게 달려가 폴짝폴짝 뛰며 낑낑거린다. 왜 그러나 싶어 쳐다보자 곧 다리에 달라붙어서는 헐떡인다. 그걸 보는 영신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고, 석현이 곧바로 녀석을 떼어놓았다.

“미안. 이 녀석이 요즘 발정기라 그래.”

영신이 제 바지를 내려다봤다. 그새 개털이 묻었다. 쯧, 혀를 차면서 그걸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집에 가면 바지를 버릴까 생각하면서도 옆에 있던 소독제로 손을 소독하고 물티슈로 씻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어젯밤 제 밑에 깔려 헐떡이던 덕이가 떠올랐다. 더 해달라고 보채던 몸짓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야한 표정을 짓던 것이.

“무슨 생각해?”

석현의 물음에 영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쳐다봤다. 사 달라고 해서 사 오긴 했는데 뒤늦게 후회가 됐다. 대충 통화만 되는 걸로 살 걸 그랬나. 그 자식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좋은 걸 사줬나 싶어서.

“아,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할머니 많이 편찮으신가 보더라. 전에 병원 다녀오신 뒤로, 계속 그러신가 봐.”

“…그래.”

“엊그제 갔는데 형 안부를 물으시던데?”

그 말에 영신의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간다. 노인네 성격상 먼저 누구에게 영신의 안부를 물을 사람이 아니었다.

“뭐라고 하셨는데?”

“최근에 형 집에 갔었는지, 누가 있지 않으냐고 물으시더라고.”

“그래?”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게 그때 봤던, 걔 맞지? 덕이였나?”

“알 거 없어.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형이랑 약속한 대로 말했어. 아무도 없었다고.”

“잘했어.”

“나 잘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현이 옆으로 손을 뻗더니 곧바로 서류 한 장을 슥 내민다. 이번에 충주에 유기견 센터가 들어서는데 혹시 후원할 마음이 있느냐고 말이다. 영신이 이를 끄득 물었다. 이건 툭하면 저한테 돈 뜯어낼 생각만 한다면서. 석현이 양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한번 도와주실 순 없겠느냐고 묻자 영신이 바로 몸을 뒤로 기댔다.

“치워.”

“그러지 말고, 읽어보기만이라도 해.”

“아주 제대로 뜯어먹으려 작정을 했구나?”

“형 돈 잘 벌잖아. 그 돈 벌어 다 뭐 할 건데. 불쌍한 동물들 구제하는 셈 치고 좀 나눠쓰면 좋잖아?”

“이미 구제하는 중이니까, 저리 치워.”

‘형 개 키워?’라고 석현이 물었고, 영신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개는 아니지만 개과 동물이긴 하지. 그나저나 대체 그놈의 꼬리는 언제 생기려고 감감무소식인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한 번 하고 나면 아홉 개는 아니어도 하나 정도는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생기질 않으니 한편으로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누가 안 생긴다고 귀띔이라도 해주면 쉽게 포기할 텐데. 하아, 씨발. 시시각각 변하는 영신의 표정을 보며 석현이 무슨 걱정 있는 거냐고 묻는다.

“없어. 하여튼 할머니 뵙거든 괜히 허튼소리 하지 마. 만약 무슨 일 생기면 다 네 입에서 새어나간 말인 줄 알 테니까.”

석현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했지만 영신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았던 휴대전화 상자를 챙겨 일어서는데 석현이 억지로 쇼핑백 안에 서류를 접어서 넣는다. 일단 한번 읽어나 보라면서. 우리나라에 버려지는 개가 몇 마리고, 안락사를 당하는 유기견들이 얼마나 많은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길래 그만하라고 쏘아붙이고는 그대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

덕이, 미자, 인태 셋이 나란히 공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한강 옆 공원은 무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사람들 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덕이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봤다.

“덕아. 심심하면 저기서 맥주 하나 사 마셔.”

“그래. 이런 날은 잔디밭에서 맥주 마시는 게 최고지.”

덕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난 술이 싫더라. 그 말에 인태가 나이만 먹었지, 인생 헛살았다고 놀려댔다. 덕이가 들은 척도 안 하고 있는데 마침 작은 공 하나가 발 앞으로 굴러왔다. 덕이가 그것을 주워드는데 작은 아이 하나가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이에게 덕이가 공을 건네줬다. 감삽니다. 혀 짧은 소리로 인사하더니 짧은 다리로 총총거리면서 제 부모에게로 다시 뛰어간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옆에 있던 미자가 꺄악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저 팔다리 짧은 것 좀 봐. 너무 귀엽지 않아?”

듣고 있던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애들은 귀엽긴 하다. 물론 울고 떼쓰면 좀 귀찮긴 하지만 말이다.

“미자는 귀여운 걸 참으로 좋아하는구나.”

“응. 난 세상에서 귀여운 게 제일 좋아. 덕이 너도 그래서 좋아.”

덕이가 뺨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귀엽다는 말이 듣기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오늘 인태의 부모님을 봐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미자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고 말이다. 슬며시 말을 꺼내며 조금이라도 기억 나는 게 없느냐고 했더니 미자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없어. 아무것도.”

“저런….”

“근데 말이야….”

미자가 잠시 망설이더니 자기에게 애가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고 했다. 최근에 예주라는 소녀를 만나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도 그렇고. 혹시 자신이 그 애의 엄마가 아니었을까 그런 기분이 든다고 말이다.

듣고 있던 인태가 대놓고 비웃었다.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엄마냐고. 그리고 걔가 널 봤는데 엄마였으면 진작 알아보지 않았겠냐고 말이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미자는 더는 반박하지 못했고, 덕이는 그런 미자가 안쓰러웠는지 어깨를 토닥여줬다.

“미자는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었을 거야. 말도 예쁘게 하고 항상 다른 사람도 챙기고 그러잖아.”

뿌듯해진 미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마워. 덕이가 최고다. 인태가 놀고들 있다며 비아냥거리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온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였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덕이에게로 와서 말을 건넸다.

“저기… 혼자 오셨어요?”

덕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서 혼자 왔느냐고 물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옆에 있던 인태와 미자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혼자 오셨으면 저랑 같이 노실래요?”

그 말에 덕이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 아닌데.

“셋이 왔는데….”

“네?”

“셋 몰라? 삼.”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댄다. 혼자 앉아서 뭐라고 중얼중얼 떠들길래 술 취한 줄 알았는데, 일행이 있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덕이의 어깨에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그러지 말고, 어디 가서 한잔할래요?”

덕이가 그 손을 슬그머니 떨어냈다. 남자가 자기한테 왜 이러는지 대충 느낌이 왔다. 애써 웃으며 아니라고, 자긴 친구들과 있겠다고 사양하자 남자의 얼굴이 조금 싸늘해진다. 있지도 않은 친구들 핑계를 대니 저를 놀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걸 보는 인태가 미자에게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얘가 지금 덕이한테 작업 거는 것처럼 보이지?”

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만 봐도 그러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태가 손을 받치고 우엑 토하는 시늉을 하는데 남자가 덕이에게 장난하지 말고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한 번 더 물어온다. 대충 말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더니. 덕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한데, 난 이제 아무나 만나서 짝짓기 안 해. 박영신이랑만 할 거야.”

뭐? 미자와 인태가 동시에 덕이를 쳐다봤다. 덕이가 아차 싶어 입을 틀어막았다. 영신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미친 거 아냐,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저쪽으로 가버린다. 덕이가 입을 틀어막은 채로 일어서자 미자와 인태가 동시에 일어서며 덕이를 다그친다.

“말해봐, 구데기. 너 진짜 박 대표랑 했냐?”

“세상에. 덕아, 그러지 마.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하는 거야.”

“맙소사. 박 대표가 드디어 미쳤구만. 돈에 환장해서 맛이 간 게 분명해.”

“아무리 꼬리가 갖고 싶어도 그렇지. 근데… 영신이 거시기 커?”

“야 지금 거시기 큰 게 문제냐?”

“중요하지.”

아, 몰라, 몰라. 덕이가 입을 가린 채로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둘은 끈질기게 따라오며 물었고 덕이는 나중엔 미친 듯 달리면서 도망쳐야만 했다.

씻고 나온 영신이 덕이를 쳐다봤다. 오늘 뭘 했는지 모르지만, 소파에 대자로 완전히 늘어져서는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배고프다고 난리일 텐데. 어째 조용하니 더 수상하다.

“왜 시체처럼 늘어져 있어? 자려면 네 방에 가서 자.”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오늘 돌아다녔더니… 너무 힘들어.”

“너. 설마 저번처럼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 건 아니겠지?”

덕이는 늘어진 채로 그게 아니라고, 인태네 집에 다녀왔다고 설명해줬다. 인태 부모님도 보고 맛난 것도 얻어먹고 왔다고 말이다. 종종 놀러 오라고 하셨다면서. 인태랑 달리 부모님은 엄청 친절하시더라고.

그 말에 영신이 픽 웃었다. 저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었다. 인태가 보내는 돈으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돕는다고 들었다.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 안 가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말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제 손을 떠난 돈이기에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었다.

턱, 그때 테이블 위에 뭔가 올려진다. 덕이가 눈동자만 움직여 그것을 쳐다봤다. 작은 크기의 종이가방이었는데 밖엔 휴대전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번에도 눈동자만 움직여 제 머리맡에 서 있는 영신을 쳐다봤다.

“뭐야?”

“휴대폰 해달라며.”

엇. 그 말에 덕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손을 뻗어 쇼핑백을 가져와서는 안을 살폈다. 상자를 열어보니 정말 휴대전화가 들어있었다. 전에 쓰던 건 오래된 거라 통화랑 문자만 됐었는데 이건 영신이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했다.

“우와. 좋은 거다!”

“그래. 비싼 거야. 잃어버리지 말고 잘 쓰도록 해.”

고마워, 영신아. 덕이가 두 팔을 뻗어 안으려고 하자 영신이 슬쩍 뒤로 물러선다. 덕분에 덕이의 모양새가 어정쩡하게 됐다. 쳇. 뻘쭘한 얼굴로 팔을 내리고 나서 덕이가 휴대전화를 살폈다. 뭔가 있는 게 많다. 이것저것 눌러보고 하다가 카메라를 꺼내 제 얼굴을 찍었다. 능숙하게 브이까지 만드는 폼에 영신이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냐?”

“셀카 찍어. 와, 이거 사진도 잘 나온다. 봐봐, 같이 찍을래?”

“됐어. 너나 실컷 찍어.”

덕이가 휴대전화를 만지는 사이 영신이 몸을 돌린다. 어디 가느냐고 묻자 피곤해서 먼저 잔다는 말에 덕이가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는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오늘도 하자.”

문 앞으로 가던 영신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뭘?

“짝짓기.”

너무도 당당하게 짝짓기하자고 말하는 덕이를 보며 영신의 얼굴이 슬그머니 일그러졌다. 어제 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어쩌면 그 정기를 통해 꼬리가 생긴다는 것도 다 속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숨은 꼬리가 있기는 한 걸까, 의심마저 들었다.

“안 해.”

“왜에. 힘들어?”

하. 영신이 코웃음을 쳤다. 힘들다니? 뭐가? 내가 그 정도로 힘들어할 줄 아느냐고 쏘아붙이려다 관두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은가.

“아니. 힘은 안 들지만 하고 싶지 않아.”

“내가 하고 싶어지게 만들어줄게.”

덕이가 손을 뻗어 영신의 바지 앞섶으로 가져갔다. 영신이 그 손을 탁 쳐내는데도 다시 만지려고 든다. 하지 말라고 인상을 쓰자 그제야 손을 거둬간다.

“너 이런 거 추행이야.”

“그게 뭔데.”

“하여튼 남의 몸에 막 함부로 손대는 거 아니야. 알겠어?”

“치.”

“치?”

“알았어. 그럼 안 해. 안 하면 되잖아.”

덕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면서도 선뜻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걸 보는 영신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서 잠시 고민했다. 혹시 여러 번 하면 생기려나 하고 말이다. 한번으론 부족했나 혹시 한 번 할 때마다 꼬리 하나씩인가. 그럼 아홉 번을 해야 한다는 소린데.

하아. 누가 방법이라도 좀 가르쳐주면 좋으련만. 복잡한 머릿속을 달래고 있는데 덕이가 영신의 셔츠 끝자락을 잡는다. 정말 하면 안 되느냐고 간절하게 쳐다보며 묻는 얼굴에 영신이 작은 신음과 한숨을 토해냈다.

“좋아.”

“야호.”

“대신, 조금 기다려. 맨정신으론 못하겠으니.”

그 말에 덕이가 인상을 팍 구겼다. ‘또 술 먹게?’라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그러더니 밖으로 나가서 어느새 투명한 글라스에 얼음을 넣어 술병과 들고 왔다. 영신의 방 소파에 앉아 기다리던 덕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 혹시… 술 없으면 안 커져?”

“시끄러워. 그런 거 아니야.”

“나랑 맨정신으로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그럼 쉽겠냐.”

글라스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몇 번 흔들고 그 독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덕이가 인상을 슬며시 구겼다. 그러더니 한잔 더 따른다. 덕이가 아예 소파 위로 올라가 다리를 모으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내 꼬리가 나오기 전에 네가 술병으로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걱정되면 꼬리가 나오게 힘 좀 써봐.”

“말했잖아. 내 마음대로 되는 거면 얼마나 좋겠어.”

석 잔을 연거푸 들이켠 영신이 작게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잔을 내려놓는다. 그러면서 저와 이런 걸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까지 한다. 덕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인태랑 미자한테 말하긴 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니 괜찮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윗집 남자한테도 애인이라고 말했는데. 근데 짝짓기한다는 말은 안 했으니 그것도 괜찮으려나. 에이, 몰라.

“됐어. 이제 하자.”

영신이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이도 일어서며 침대 앞으로 가 옷을 벗으려고 하는데, 영신이 턱짓으로 욕실을 가리킨다. 티셔츠를 벗으려던 덕이가 왜에? 하고 물었다.

“침대 더러워질까 봐.”

그 말에 덕이가 슬그머니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더러워지는 게 싫어서 그런 거군. 허리도 아프니 그냥 침대에서 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싫단다.

“내가 말했잖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해줘야 꼬리가 나온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

영신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탄탄하게 쪼개진 배와 팔 근육들을 보며 덕이가 넋을 놓고 감탄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을 손등으로 대충 닦고 나서 이번엔 바지를 벗는 걸 유심히 쳐다봤다.

“그만 쳐다보고 벗고 들어와.”

등 돌리고 있으면서 어떻게 알았지. 박영신은 아무래도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게 분명했다. 덕이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입고 있는 셔츠를 벗었다. 바지도 벗고 그런 다음 영신을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유리로 된 샤워부스가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원형 욕조도 있었다. 어디에서 할 거냐고 묻자 영신이 귀찮은 얼굴로 아무 데나 자리를 잡으란다. 덕이의 눈이 욕실 안을 훑었다. 좀 편하게 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려나 해서.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다. 죄다 딱딱해 보여 등판이 아플 것 같았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영신이 한쪽 벽을 가리킨다. 덕이가 그 앞으로 가서 등을 돌리고 섰다. 벽을 짚고 서서 다리를 벌리자 영신이 뒤로 와서 선다. 그의 손에는 튜브로 된 젤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걸 쭉 손에 짜서는 제 성기에 문질렀다.

혹시 몰라서 오는 길에 하나 사두긴 했는데, 느낌이 영 좋질 않다. 금세 부풀어 오른 녀석을 붙들고 구멍 입구에 가져다 댔다. 덕이가 몸을 움찔 떨더니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귀두로 입구를 꾹꾹 누르는데 어쩐지 어제보다 더 빡빡한 느낌이다. 자세 때문인가.

“힘 빼. 엉덩이 더 벌리고.”

덕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손을 뒤로 뻗어 제 엉덩이를 붙들고 구멍이 훤히 보이도록 만들었다. 영신이 그 작은 구멍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어제 보았던 건데도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나 모르겠다. 성기를 쥔 채 구멍 입구에 대고 꾹꾹 눌러주자 조금 전보단 수월하게 들어간다. 그대로 안쪽으로 밀고 올라가자 엉덩이를 벌려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으응….”

“소리 내지 마.”

그 말에 덕이가 고개를 뒤쪽으로 돌려 영신을 흘겨봤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인 줄은 알겠지만,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 보면서 하면 안 되느냐고 묻자마자 콱, 하고 성기가 때려 박듯 치고 올라온다.

학. 덕이가 벽을 짚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뱃속을 가득 채운 느낌에 제 성기에선 벌써 말간 액이 뚝뚝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영신이 너무 느긋하게 앞뒤로 움직이는 통에 애가 닳았다.

“영신아. 좀, 아아, 빨리….”

영신이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시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핏줄이 파랗게 돋은 제 성기가 느리게 구멍 안을 들락날락하는 걸 지켜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어제 그렇게 했는데도 처음인 것처럼 조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움직일수록 몸에 찌릿찌릿 전류가 흐르는 기분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콱! 하고 쑤셔 넣으니 덕이가 팔을 공중에서 허우적대며 신음을 내뱉는다.

“아아응.”

신음과 함께 안이 제대로 조여진다. 이번엔 허리를 단단하게 붙들고 난폭할 정도로 움직이니 벽을 짚고 있던 덕이의 손이 떨어져 나간다. 박으면 박는 대로 몸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응하응 신음을 내면서도 그만하라는 말을 안 하니 더 못되게 굴고 싶어졌다.

그대로 덕이를 일으켜 세우고 나서 몸을 앞쪽으로 움직여 벽에다 밀어붙였다. 덕이의 뺨이 욕실 타일에 문대졌다. 발딱 일어선 성기도 같이 문질러지며 자극이 됐다. 덕이가 손을 뒤로 뻗어 영신의 허리를 붙들었다. 더 해달라는 뜻이었다.

비빌수록 내벽이 엉겨붙는 느낌에 영신이 욕을 뱉었다.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해서 그런지 자극이 두 배가 됐다. 빠른 속도로 퍽퍽 박아가며 덕이의 어깨를 앞니로 꾹 깨물었다. 피부가 달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부위를 혀로 진득하니 핥았다.

예기치 못한 행동에 덕이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입술이 점점 위로 올라오더니 이번엔 귀를 문다. 덕이가 입을 벌리고 신음을 내질렀다.

“아아.”

철썩철썩 속도를 높일수록 구멍은 점점 좁혀졌고, 마지막엔 뇌까지 같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씨발. 씨발. 영신이 연신 욕을 뱉으면서 마지막 속도를 올리다 뱃속을 뚫을 기세로 뿌리 끝까지 밀어 넣고 나서 숨을 멈추었다.

뱃속이 뜨끈해지는 느낌에 덕이가 발끝을 오므렸다. 제 성기에서 나온 정액이 벽에 뿌려져 흘러내렸다.

사정하자마자 빼버렸던 첫날과는 다르게 꽤 오랫동안 그 여운에서 헤어나오질 못한 채 두 사람은 한참을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띠링. 띠링. 영신이 몸을 뒤척이며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메시지가 울려대는 통에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관계를 끝낸 후 씻고 혼자 자려고 하는데 덕이가 날름 제 옆으로 와서 누웠다. 그대로 쫓아냈더니 다른 방으로 건너가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 사람을 귀찮게 하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휴대폰을 사주는 게 아니었는데.

[영신아, 자?]

[자는구나.]

[냉장고에서 오이 꺼내먹어도 돼?]

[오이 꺼내 먹었어.]

[네 방 가서 자면 안 돼?]

[안 된다고. 알겠어.]

[잠이 안 와.]

[심심해 죽겠어.]

[영신아, 심심해!]

[심심하다! 심심해!]

하아. 영신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술까지 먹었더니 더 피곤했다.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당장 가서 휴대전화를 빼앗아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무음으로 바꿔놓고서 잠자리에 다시 누웠다.

수면 등을 켠 채 천장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아까 했던 섹스가 떠오른다. 덕이의 몸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댄 건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들을 머릿속에서 털어내고 나서 눈을 감았다. 내일은 꼬리가 하나쯤은 나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덕이가 휴대전화를 가만히 노려봤다.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영신에게선 연락이 없다. 그럼 그렇지. 답장해줄 때까지 보낼까 하다 관두고는 베란다로 나가 밖을 구경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차들이 꽤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그때 아파트 입구로 사람 하나가 나가는 게 보였다.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위층에 사는 지훈과 흡사했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어딜 가는 거지. 천도해줄 귀신들을 구하러 가나. 되게 바쁘게 사는구나.

이름을 불러 볼까 하다 관두고는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왔다. 급할 때 연락하라며 지훈이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준 게 떠올라 그것을 서랍에서 찾아 휴대폰에 저장했다. 그런 다음 침대에 다시 누웠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아까 영신의 성기가 제 엉덩이 사이로 들락이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괜히 손을 뒤로 뻗어 거길 슬쩍 만졌다가 얼굴이 붉어져선 그대로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하아. 영신이랑 자고 싶다.”

푸념처럼 내뱉었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서글펐다. 이불을 둘둘 말아 박영신이라고 생각하고 꼭 안고 나서 그대로 옆으로 껴안았다. 잘 자, 영신아. 인사까지 마치고 나니 점점 눈이 감긴다. 입가에 스리슬쩍 미소가 번졌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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