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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쿵!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하고 밖이 훤해진다. 한 남자가 창밖을 내다봤다. 남자는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등 뒤엔 조악한 문신이 여러 개 새겨져 있었다. 그가 한 손엔 술병을 들고 후우, 한숨을 내뱉었다.
철거를 앞둔 주택들은 대부분 주민이 빠져나가 휑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느낌마저 자아냈다. 유일하게 남은 남자만이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시팔. 욕설을 내뱉으며 커튼을 신경질적으로 닫고 소파로 다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리모컨을 들고 티브이를 트니 오락프로가 한창이다.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는데 어느 순간 화면이 멈추더니 리모컨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 퍽퍽, 낡은 테이블에 리모컨을 두드리고 버튼을 계속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리모컨까지 속을 썩이네.”
리모컨의 뒤를 열어 건전지를 확인하는데 갑자기 팟, 티브이 전원이 나간다. 건전지를 다시 끼워 넣고 전원 버튼을 꾹꾹 누르는데 이번엔 집 안의 모든 등이 꺼진다. 남자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댔다. 이 새끼들이 설마 전기마저 끊은 건가, 하는 마음에 욕이 튀어나왔다.
“네놈들이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보자!”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들고 있던 리모컨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집 안에 적막감이 맴돌았다. 밖이 어둡다 보니 실내를 밝혀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가 소파 옆에 던져둔 휴대폰을 주우려고 손을 더듬거렸다.
그때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멈칫해서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흥얼거리던 소리도 같이 멈춘다. 남자가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다시 팔을 뻗어 손으로 소파를 더듬는데 흥얼흥얼 소리가 시작된다.
“…누구야?”
남자가 물었다. 혹시 이것들이 사람을 보낸 건가. 시발, 내가 순순히 당해줄 줄 알고. 남자가 손으로 휴대폰을 찾으며 왼쪽 손을 허리춤으로 옮겨 칼을 잡았다.
숨을 죽인 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슥, 칼을 빼내며 휴대폰 액정을 터치하자 불빛이 생겨난다. 중얼중얼 말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칼을 앞으로 하고 휴대폰 불빛을 비췄다.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다른 쪽으로 돌리던 남자가 멈칫했다. 식탁 밑에 누군가 있다.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자 웬 여자가 식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다리를 끌어모은 채 얼굴을 푹 파묻고 있는 게 보였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긴지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쪽으로 칼을 겨누고 한발 더 다가섰다. 대체 누구지. 간혹 동네에 미친년이 돌아다니긴 했는데. 소싯적에 살인으로 징역도 살고 온 남자에게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쪽을 향해 칼을 겨누고 누구냐고 고함을 쳤다.
고개를 파묻고 있던 여자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새하얀 피부에 눈동자가 소름이 끼칠 만큼 크고 새까맸다. 등 뒤로 한기가 느껴진다. 남자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칼을 든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시발. 얼른 안 꺼져! 나가, 이 미친년아!”
여자가 느릿하게 다시 고개를 다리 사이에 파묻더니 몸을 옆으로 흔들흔들 움직이며 중얼거린다. 독이 오른 남자가 칼을 꽉 고쳐잡고 앞으로 다가갔다. 여자를 협박해 내쫓을 생각으로 의자를 걷어차려고 하는데 조금 전까지 제대로 들리지 않던 여자의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이리와 나랑 놀자 나랑 가자 상철아 나랑 놀자 저기 가서 놀자 이리와 얼른 와봐 이리와. 남자가 멈칫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여자가 저를 어떻게 아는 걸까. 바로 코앞에 다가간 순간 여자가 파묻고 있던 고개를 다시 든다.
시커먼 눈동자에서 먹물처럼 까만 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다고 느꼈던 여자의 입이 순식간에 좌우로 쫘악 찢어지더니 새빨간 잇몸이 드러나 보이도록 낄낄대고 웃는다. 그 입 안으로 시커먼 국물이 줄줄 흘러들어 간다. 남자가 기겁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자가 기어 나오며 남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다 큰 여자인데 목소리는 투정부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랑 노올자아 상철아아아-”
으아아악. 남자가 발버둥을 치며 그 손을 떼어냈다. 비명을 내지르며 들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 현관문 앞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려고 발악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꿈쩍도 하질 않는다.
바닥을 기던 여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남자가 문손잡이를 부서질 듯 흔들고 몸으로 내리치며 악을 썼다. 완전히 일어선 여자의 몸이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 상태로 여전히 입을 벌려 웃으며 남자를 향해 걸어온다.
삐걱삐걱 굳어버린 기계처럼 움직임 또한 이상했다. 여자가 사람이 아니란 걸 제대로 인지한 남자가 괴성을 지르자 눈과 코에서 타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텅, 순간 문이 열리고 남자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악을 쓰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끼이이, 소리와 함께 열렸던 문이 쾅 닫히고 집 안엔 정적이 찾아왔다. 몸을 옆으로 꺾고 있던 여자가 스르륵, 일어나자 그 옆으로 여태 보이지 않던 남자가 하나 더 나타났다.
여자가 허리를 곧게 펴더니 주먹으로 통통 허리를 두드렸고,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주물렀다.
“잘했어, 미자야.”
미자가 그 손을 쳐냈다. 얼굴에 얼룩진 것들을 닦아냈고 길게 풀어헤친 머리도 귀 뒤로 넘기자 조금 전과는 다르게 말끔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인태가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니 겁에 질린 남자는 이미 저만큼 달아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네. 질긴 놈이라길래 며칠 걸릴 줄 알았더니.”
“내 연기가 워낙 탁월했잖아.”
미자가 어깨를 으쓱했고, 남자가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관절 꺾는 건 안 하면 안 돼?”
“왜.”
“언제 적 유행이야. 시대에 뒤떨어지잖아.”
으스대던 미자가 눈을 흘겼다. 넌 몸치라 그런 것도 못하지 않느냐고 쏘아붙이자 인태가 얼른 딴청을 피운다. 요즘 들어 미자의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괜히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다 싶었다. 어쨌든 둘은 파트너고, 사람들을 겁주는 건 주로 미자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끼워진다. 곧 다른 손이 나타나 그 담배를 빼앗더니 그대로 분질러 쓰레기통에 넣어 버린다. 담배를 빼앗긴 김 여사가 눈을 새치름하게 뜨더니 커다란 가방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담배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린 남자가 돌아와서는 그녀에게 커피를 건넸다.
“드세요. 담배보다 나을 테니.”
“나 걱정해주는 건 박 대표밖에 없다.”
그녀의 말에 영신이 피식 웃었다. 키가 크고 몸이 다부진 그가 검정 슬랙스에 흰색 셔츠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커피 잔을 드는 모습은 마치 화보의 한 장면 같았다. 20년 아니, 10년만 젊었어도 어찌해 볼 텐데.
“김 여사님이 제 돈줄인데 잘해드려야죠.”
김 여사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저 말본새 하고는. 그녀가 영신을 본지도 10년 정도가 된 거 같은데 어쩜 저렇게 사람이 변함이 없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맺고 끊는 것도 확실했고, 능력 또한 두말할 것 없었기에 일적으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파트너였다.
그녀가 집 안 내부를 둘러봤다. 한강 바로 앞에 있는 맨션은 사내 혼자 살기엔 너무 넓었다. 가구와 가전들도 무채색이었고, 심지어 벽에 걸린 그림마저도 우울함을 자아냈다.
“집에 꽃이라도 좀 둬. 삭막하다. 아니면 여자를 두든가.”
영신이 대꾸 없이 서류를 집어 들고 내용물을 확인한다. 여태 잠잠하던 그의 눈동자에 잠시 동요가 인다. 김 여사가 차를 음미하며 그 표정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가능하겠느냐고 묻는 말에 영신이 슬며시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서류를 탁,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걸 어디 가서 구해요?”
“물론, 나도 안 된다고 했어.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고.”
“의뢰인이 누군데요.”
“몰라. 워낙 지체 높으신 양반이라.”
“그 사람이 이걸 원하는 이유가 뭐래요?”
“그것도 몰라.”
의뢰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일이라니. 영신이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의뢰 내용에 적힌 글자에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였다. 구미호.
“가능할까?”
영신이 고개를 저었다. 귀신을 이용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사람에 따라 퇴마의식도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구미호라니. 난생처음 받는 의뢰에 황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요. 저도 태어나서 본 적 없어요. 사라진 것도 아주 오래전인 데다, 찾아내는 방법도 모르는걸요.”
“그럼?”
“단념하세요.”
“아깝다. 조건이 나쁘지 않던데.”
“얼만데요.”
“10억.”
그 말에 영신이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라고 묻자 그녀가 양 손가락을 쫙 펴 보인다.
“의 다섯 배.”
영신이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 오십억이라. 그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번쩍였지만, 그렇다고 구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승산 있는 것에만 투자한다는 게 제 원칙이다. 있지도 않은 구미호를 위해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곧 단념한 그의 손에서 서류 봉투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못해요. 김 여사의 얼굴에 안타깝다는 미소가 생겨났다.
“자기가 원하는 것도 들어준다는데.”
김 여사가 웃었다. 영신이 최근 새로 벌인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오래된 건물들을 허물고 그 위에 복합 쇼핑몰을 지으려고 했는데, 뛰어든 회사가 많다 보니 생각만큼 여의치를 않았다.
그 일을 해줄 만큼 힘이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영신은 이번엔 됐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동자가 조용히 흔들렸다. 구미호라….
***
“김영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차가 멈춰 섰고 운전석에 있던 중년의 사내가 저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기 때문이다. 덕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돌렸더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남자가 타라고 했기에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곧바로 안으로 올라타고 보니 차 안이 꽤 넓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차였다. 가만히 훑어보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안전띠 해.”
“답답해서 싫어요.”
그래도 해야지. 남자가 손을 뻗더니 덕이의 안전띠를 매주며 동시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겨낸다. 곧 뽀얗고 말간 얼굴이 드러났고 남자의 입가엔 슬며시 미소가 생긴다. 아무리 봐도 십 대처럼 보였다. 입맛을 다시며 운전대를 잡은 후 곧 차를 출발시켰다.
덕이가 창밖을 내다봤다. 저녁이 되니 더위를 피하려 들어갔던 사람들이 나와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손을 잡은 연인들, 아이를 안고 가는 젊은 부부들. 나이 지긋한 노신사까지.
“몇 살이야?”
덕이가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남자의 손이 제 허벅지를 은근히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박한 남자의 손가락 약지엔 번쩍이는 금반지가 보였다. 이런 건 팔면 얼마나 되려나. 이따가 이것도 몰래 훔쳐 달아날까, 생각하다 관두었다.
우림이가 그러지 않았나, 함부로 인간에게 해를 가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허벅지 안쪽을 만지는 손은 이제 더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덕이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남자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도로를 달리던 차가 속도를 줄이더니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알록달록 모텔들이 즐비했다. 그 길을 따라 제일 안쪽에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게 만든 구조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차가 멈췄고 곧 덕이가 내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다가오더니 덕이의 어깨를 감싸며 건물 안쪽으로 이끌었다.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커다란 화면에서 남자가 방을 고르더니 카드를 넣는다. 곧 키가 나왔다. 그걸 덕이가 유심히 봤다. 전에 갔던 곳들은 사람이 돈을 받던데 여긴 기계가 하는구나.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남자의 손이 다시 덕이의 어깨를 감싼다. 들어갈까?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덕이가 남자를 따라 탔다. 남자가 5층 버튼을 눌렀다. 덕이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내도. 참으로 안 어울리는 조합이란 생각을 하는데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고 사람 좋게 웃는다.
“몇 살이라고 했지?”
“말했잖아요. 열여덟 살이요.”
“어쩐지 살이 야들야들하네.”
남자의 손이 덕이의 뺨을 슥 만지고 나서 떨어진다. 덕이가 입가에 미소를 짓는 사이 5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붉은 조명과 붉은 카펫으로 꾸며진 기다란 복도가 들어온다. 그걸 보는 덕이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저벅저벅, 두 사람의 발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남자가 503호 앞에서 카드를 가져다 댔다. 띠릭. 문이 열리고 남자가 덕이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탕, 문이 닫히자마자, 남자가 덕이의 입술을 감쳐 물려고 덤벼들었다.
덕이가 인상을 슬며시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덕이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살을 매만졌다. 여태 어린 남자애들을 꽤 많이 안았다고 자부했지만, 이처럼 피부가 고운 이는 처음이었다.
쌍꺼풀 없이 눈꼬리가 길게 늘어진 것도 그렇고, 눈동자가 촉촉하니 젖은 것도 그렇고, 입술이 붉고 도톰한 것까지. 어지간한 여자보다 색기가 흘러넘쳤다.
손에 달라붙는 감촉이 너무나 매끄러워 만질수록 더 만지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가 헐떡이며 엉겨붙자 덕이가 가만히 그를 밀어냈다. 그가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덕이를 내려다봤다.
“왜? 지금 싫어?”
덕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돈 줘요. 남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너무 태평한 덕이의 얼굴에 자존심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은 들어가지.”
그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고 덕이도 덩달아 신발을 벗었다. 안쪽으로 들어오니 모텔 내부는 아주 깔끔했다. 흰색 소파가 있었고, 작은 냉장고, 정수기, 티브이까지 어지간한 건 다 갖춰져 있었다.
이런 집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덕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 사이 남자가 재킷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약속대로 오만 원짜리 여섯 장을 꺼낸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다 네 장을 더 꺼낸다. 총 50만 원을 꺼내 덕이에게 내밀었다.
“자, 50. 끝나고 마음에 들면 더 줄게.”
여태 무표정하게 있던 덕이가 생긋 웃었다. 혀를 한 번 핥더니 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돈을 이 정도로 준다는데 싫을 게 뭐 있겠느냐면서. 남자가 덕이를 끌어안았다. 허겁지겁 굶주린 사람처럼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목을 빨았다.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른 덕이는 으응, 야릇한 신음을 흘리면서 하체를 비비고 불을 지폈다. 하지만 남자가 제 엉덩이를 움켜쥐는 순간 손을 떼어내고 보란 듯 떨어져 나간다. 다급해진 남자가 다가오려고 하자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가 애타는 얼굴로 이번엔 왜 또 그러는 거냐고 물었다.
“씻고 와요.”
“하고 나서 씻으면 되지.”
“씻고 오면 환장할 정도로 해줄 테니까, 얼른.”
그 말에 남자가 콧김을 뿜어냈다. 야하게 생긴 얼굴로 야한 말을 하니 머리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강제로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가 싫다고 가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잘 달래서 이참에 애인으로 삼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눈앞의 소년은 매혹적이었다.
“알았어, 그럼. 얼른 씻고 올 테니까, 기다려.”
남자가 바지를 벗는다. 휘청 이미 발기한 그의 성기가 튀어 올랐다. 몸은 큰데 성기가 엄지만 한다. 덕이가 속으로 피식 비웃고 나서 남자를 향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벌리고 있을 테니까 얼른 나와서 박아줘요.”
그 말에 남자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다. 말 잘 듣는 종처럼 욕실로 몸을 돌리는데 그제야 남자의 등판이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용이 입을 벌리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덕이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야, 저게. 용이 왜 저기 있어?
그런 생각도 잠시 그가 들어가더니 문을 닫는다. 덕이가 그쪽을 흘깃 봤다. 반투명한 욕실 창으로 남자가 물을 틀어 놓고 씻는 모습이 보였다. 뭐 아무렴 어때. 덕이가 입가에 삐죽 미소를 머금었다.
슬그머니 남자의 외투로 가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갑이 잡혔다. 반지갑을 열자 남자의 신분증이 보인다. 1966년생이다. 덕이가 쯧 혀를 찼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더럽게 밝히긴.
지갑을 벌리니 수표와 오만 원짜리가 빼곡하다. 오오, 횡재했다. 손으로 그 돈을 빼내 드는 순간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남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타났다.
“애기야, 오빠 나왔,”
문밖으로 나오던 남자가 멈칫한다. 덕이의 손에 들린 제 지갑과 돈뭉치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나서 인상이 험상궂게 변했다. 남자가 머리에 올려진 수건을 거칠게 홱 집어 던지며 덕이에게 다가왔다.
“너 뭐 한 거야!”
뒤로 물러서던 덕이가 빈 지갑을 남자에게 던졌다. 갈색 지갑이 남자의 불룩한 배에 맞고 발밑에 떨어졌다.
“고마워, 잘 쓸게!”
남자가 이를 까득 물면서 거리를 좁혀 왔다. 덕이가 걸음을 멈췄다. 등 뒤로 창이 닿았다. 남자가 목을 좌우로 꺾었다.
“이 꽃뱀 새끼가.”
“에이, 왜 이래. 아까 내 입술 한 번 빨았잖아. 그걸로 퉁 치자.”
덕이가 들고 있던 돈을 흔들어 보이더니 그대로 뒷주머니에 꽂는다. 남자가 이리 오라며 고함치고 달려드는 순간 덕이가 창가로 풀쩍 뛰어올랐다. 남자가 멈칫했다가 다시 달려들자 그대로 창밖으로 몸을 날린다.
남자가 기겁하고 창가 쪽으로 뛰어갔다. 5층에서 뛰어내렸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래야 맞았다. 하지만 덕이는 조금 전 차를 주차했던 주차장을 유유히 걸어나가고 있었다.
몸을 빙글 돌리더니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뭐야, 저 새끼. 곧 정신을 차린 남자가 외투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냈다. 멀어져가는 덕이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
우림이 봉투를 열어 돈뭉치를 꺼내더니 한 장씩 세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곧 도장처럼 생긴 걸 꺼내 수첩을 펼친다. 거기엔 빈 동그라미가 반, 그리고 도장 찍힌 동그라미가 반이었다. 날짜와 금액을 적은 다음 빈 동그라미 위에 도장을 꾹 눌렀다.
“자, 이제 반 남았어.”
앞에 앉아 음료를 마시던 덕이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만 믿는다. 나 속이면 안 돼.”
우림은 우리가 친구로 지낸 게 몇 달인데 자신을 못 믿고 그러냐고 서운한 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휴대폰을 꺼내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덕이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와 봐. 덕이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고, 곧 우림이 갤러리 폴더를 열었다.
곧 휴대전화 화면에 구슬이 나타났다. 푸른 빛을 내는. 빨대를 물고 있던 덕이가 입을 벌리고 넋을 놨다. 와 예쁘다.
“이게 네가 받게 될 구슬이야. 어때?”
덕이가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떠냐니, 두말하면 입 아프지. 딱 봐도 색이 영롱한 게 보통 구슬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걸 갖기만 하면 저도 꼬리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평범한 구미호로 살아갈 수 있겠지. 마음은 이미 들떠 꽃밭에서 훨훨 날고 있었다.
“다음에도 잘할 수 있지?”
응!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며칠 안으로 다 채우고 구슬을 건네받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를 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못해서 개털이 걸리면 안 된다고. 알짜배기를 고르는 게 중요하다며 우림이 늘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근데 말이야. 너 구슬 생기면 네 동네로 돌아갈 거야?”
우림의 물음에 덕이는 ‘글쎄….’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있을까. 벗이라고 생각했던 동무들은 물론, 가족이라고 남아있는 아버지와 이복형제들마저 저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슬이 생기면 다를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저를 창피하게 여기지 않을 테고, 친구들도 저를 무시하지 못하겠지. 그러면서 휴대전화에 속에 있는 구슬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딱 봐도 엄청난 기운이 화면을 뚫고 나오는 게 느껴진다.
“일단 구슬이 생기면. 그때 봐서.”
“그래.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우림이 덕이를 보며 웃었다. 덕이가 남은 음료를 쪽쪽 빨아 마시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진짜 구미호로 살아갈 날이. 들뜬 기분에 고개를 돌리다 흠칫 몸을 굳혔다.
창밖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무리가 길 건너편에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어제 봤던 그 사내가 있었다. 뭐지? 저 인간이 왜 저기 있지. 앞에 앉은 우림이 왜 그러냐고 물었고, 불길함을 느낀 덕이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게 카페 밖으로 나오는데 건너편에 있던 무리 중 하나와 시선이 마주친다. 하지만 남자는 곧 몸을 돌렸다. 나를 찾는 게 아니었나, 안심하던 찰나 사내들이 일제히 몸을 홱 돌리더니 이쪽을 향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한다.
으헉. 기겁한 덕이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
영신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미자와 인태가 티격태격 끝도 없는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하라고 손짓을 보냈는데도 둘은 들어먹질 않았다.
저것들을 처음 봤을 때 확 없애버렸어야 하는데. 순간 후회가 됐다. 곧 생각을 고쳐먹었지만. 지금 이렇게까지 돈을 벌 수 있는 건 두 사람, 아니, 두 영의 도움이 제일 컸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영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들 해. 난 들어갈 테니까.”
미자와 인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로 삿대질을 하기 바빴다. 저것들이 사람이 말하는데. 영신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몸을 돌렸다. 관두자 관둬. 그러다 문득 발길이 멈춘다.
“둘 다 천도시키기 전에 그만해.”
죽인다는 말보다 무서운 게 천도였다. 인태와 미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돌려 영신을 봤다. 영신이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너희 구미호 본 적 있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인태가 눈만 끔뻑였다. 구미호라면 여우 말이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우. 미자와 인태가 서로 쳐다보며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아니냐고, 세상에 구미호가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두 사람의 격한 반응에 영신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귀신은 왜 있는데.”
뚝 두 영이 웃음을 멈췄다. ‘그건 그러네.’ 하고 곧바로 수긍하더니 구미호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다. 말로는 들었지만 여태 본 적은 없다. 둘 다 고개만 갸웃거리자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됐다고 손짓을 하고 나서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는데, 미자가 손뼉을 딱 친다.
“나, 나 본 적 있어!”
영신이 물었다. 어디서? 미자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는데. 곰곰이 생각하는 걸 보니 전혀 기억 못 하는 게 확실하다. 하긴 자신의 이름도 어떻게 죽었는지도 기억 못 하는 그녀인데 뭘 알겠는가. 순간 그녀의 입이 쭉 찢어진다.
“맞아, 거기서 봤다.”
영신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디?
“티브이.”
이번엔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씨. 그녀가 인태에게 너도 보지 않았느냐고 했고, 인태가 그렇다고 낄낄대고 웃었다. 두 사람이 저를 놀린 걸 알고 영신이 이를 까득 물었다. 이제라도 없앨까 하다 관두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구미호는 무슨 얼어 죽을 구미호냐고 괜한 걸 물었다고 후회하며 바로 옆의 제집으로 들어가버렸다.
***
헉, 헉 덕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을 돌려 뒤를 봤더니 자신을 쫓던 무리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 멀리 웅성대는 소리는 여전했다.
“아, 질긴 놈들.”
카페에서 나오는 순간 놈들에게 발각되어 쫓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높은 곳에 오르거나 뛰어내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달리는 것은 잘하지 못했다. 덕분에 놈들은 끈질기게 쫓아왔다.
결국 마을 뒤쪽에 있던 산에까지 올라왔다. 이럴 때 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저는 반쪽짜리 구미호다. 기껏 해봐야 나오는 건 꼬리와 귀뿐이었다. 그것도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꼬르륵, 뱃속에서 밥 달라고 난리다. 아침부터 쫄딱 거른 채로 카페에서 음료 하나 마신 게 다였다. 가뜩이나 체력이 약한 데다 속이 허하니 달릴 힘도 없었다. 나무를 붙들고 위로 계속해서 기어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삐죽 내밀어 그쪽을 쳐다봤다. 남녀 두 명이 작은 상을 차려 놓고 있었는데 그 위에 떡과 과일 그리고 돼지머리 하나가 있었다. 그들이 그곳을 향해 절을 하고 손바닥을 비비며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덕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눈엔 오로지 먹을 것만 보였다. 꼬르륵,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그들이 사라질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덕이가 나무에 기대앉았다. 팔등이 나무에 찢기고 터져 곳곳에 핏물이 번졌다.
이럴 때 구슬이 있으면 이런 상처쯤 한 번에 치료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두 다리를 쪼그려 모았다. 드르륵,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전화가 울린다. 우림이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여보세요?”
[너 뭐야?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해.]
“그럴 사정이 있었어. 아! 우림아. 어제 만났던 그놈 말이야. 정체가 뭐야?”
[왜…?]
“그놈 패거리들이 날 죽이려고 쫓아오던걸. 살기가 멀리서까지 느껴지더라.”
수화기 반대편에서 어색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그랬어? 라고 묻는 우림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하다. 설마 알고 소개해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덕이는 께름칙한 걸 감출 수 없었다. 전에도 이상한 놈을 소개해줘서 죽다 살아날 뻔하지 않았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설마. 너 나를 그렇게 못 믿어? 우린 친구잖아.]
친구. 덕이가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인간 세상으로 처음 나왔을 때 저에게 잘해주고 잠자리를 주고 먹을 건 준건 우림이었다. 거기다 구슬까지 구해주려고 하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돈을 줘서 그런 거지만.
“알아….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너무 신경 쓰지 마. 다음엔 탈 없는 사람으로 소개해줄게. 조만간 연락할 테니 전화기 잘 챙겨다녀. 알았지?]
“…응.”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전화가 끊겼다. 끊어진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통화 목록을 누르니 온통 우림뿐이다. 지금 덕이에겐 있어 그가 유일한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괜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랬다간 구슬도 얻지 못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무에 기대 눈을 감았다. 한참을 뛰었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꼬르륵, 깊은 산중에 허기진 여우의 배곯는 소리만 들린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덕이가 그 상태로 잠에 빠져들었다.
***
둥, 둥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곧 꽹과리 소리가 고막을 찢어 놓을 듯 울렸다.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있던 새들이 소리에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사람들이 빙 둘러 모여 있는 가운데 한복을 입은 무당이 방울을 들고 춤을 추는 중이었다.
제사상에 올려둔 음식들과 그 주위를 사람들이 둘러싸고 앉아있었다. 딸랑딸랑 무당이 든 방울 소리가 요란하다. 가운데 앉아 있는 사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무당이 그 주위를 돌며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팥을 한 움큼 쥐어 남자의 몸에 뿌리고 복숭아 나뭇가지를 들고 와 남자의 몸에 대고 치기 시작했다. 초점을 잃은 남자는 미동조차 없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구경 중이었는데 거기엔 영신도 있었다.
영신의 옆엔 카메라를 든 사내도 있었다. 이름이 김동연이었는데 영신의 대학 동창이었다. 현재는 케이블 프로그램의 작가였는데 주로 초자연적인 현상을 소재로 다뤘다. 예를 들면 빙의나 퇴마의식 이런 것들. 언젠간 영신에게도 나와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돈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곧 무당이 칼을 들고 의뢰인의 머리 위로 휘둘렀다. 보고 있던 영신이 쯧 혀를 찼다. 그의 눈에 비친 굿판은 굿판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오갈 곳 없는 영들이 모여 음식을 주워 먹느라 난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 있던 동연이 영신을 툭 건드렸다.
“뭐 보여?”
영신이 들고 있던 생수를 따 입으로 가져가서 목을 축였다.
“아니.”
한마디를 내뱉더니 본 척도 않는다. 그때 영신의 눈에 한쪽에 있는 아이가 보였다. 돌쯤 됐으려나.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가 넋을 놓고 굿판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눈앞의 귀신들이겠지만.
어린아이들은 삼신의 보호를 받으니 그나마 안전했지만, 문제는 그 옆의 여자였다. 딱 보기에도 정신적으로 피폐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 중 하나가 여자를 향해 다가온다. 타인의 몸에 들어가려고 하는 영들은 대게 질이 나빴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때 불쑥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안 도와줄 거니?”
익숙한 목소리에 영신이 고개를 돌렸다. 승복에 회색 모자를 쓴 승려가 옆에 섰다. 아버지의 동생이었으며 반평생을 불가에 몸담고 살아온 이였다. 오늘 이곳에 온 건 왜인지 모르지만, 영신으로선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미 가문에서 축출당한 후인지라 더 그랬는지 모른다.
“가서 도와줘.”
“왜요. 내 일도 아닌데.”
그녀가 혀를 찼다. 명색이 퇴마사란 녀석이. 그녀의 질책에도 영신은 꿈쩍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여자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눈을 까뒤집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무당이 곧 그쪽으로 가더니 여자를 향해 팥을 뿌리고 나뭇가지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양쪽으로 있던 사람들이 울며 어쩔 줄 몰라 난리를 피우는 사이 영신이 흥미를 잃은 얼굴로 굿판을 빠져나왔다.
***
어젯밤 음식이 있던 자리는 엉망이 돼버렸고 덕이의 얼굴은 울상이 됐다. 들짐승이 뜯어 먹은 건지 돼지머리와 과일들은 바닥에 나뒹굴어 더럽혀져 있었고, 그나마 멀쩡한 게 떡이었는데 들어서 냄새를 맡았더니 더운 날씨 때문인지 쉰내가 풀풀 풍겼다.
하아, 배고파. 울상을 하고 근처에 흐르는 계곡 쪽으로 가서 손으로 계곡 물을 떠 마셨다.
후룹, 후룹, 아무리 물을 마셔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아씨. 배고픈 데다 힘을 너무 써서 그런지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때 어디선가 북과 꽹과리 소리가 들렸다.
덕이가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서 잔치라도 벌어진 건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이끌리듯 걸어갔다. 위쪽으로 더 올라가자 커다란 공터가 나왔다. 덕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펄럭이는 흰 천들이 보였다.
먹음직스러운 과일과 커다란 고기도 있었다. 크기로 보아 돼지는 아닌데. 소인가? 입가로 침이 주룩 하고 흘러내렸다. 아, 고기다, 고기. 배고픔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달려나가 음식을 먹었다간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어쩐담. 그때 덕이의 눈에 저 멀리 멧돼지 여러 마리가 무리 지어 가는 게 보였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
“박 대표 벌써 가게?”
영신이 위를 올려다보니 동연이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귀찮게 날파리가 꼬였군.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봤다. 가까이 다가온 동연이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냈다. 뭔가 질문을 할 게 있단 뜻이었기에 영신이 그것을 받지 않고 가만히 내려보기만 했다. 머쓱해진 그가 곧바로 주머니에 챙겨 넣더니 웬일이냐 묻는다.
“뭐가.”
“너 이런 거 딱 질색하잖아.”
“근처 지나다 소리가 요란하길래 잠시 들렀을 뿐이야.”
“그래? 근데 아까 그 남자한테 뭐 보였어?”
동연이 말한 건 병굿을 받던 청년일 것이다. 무슨 의도로 그런 걸 묻는가 싶어 빤히 쳐다보자 동연이 뒤쪽을 한 번 흘깃 쳐다보더니 소리를 낮춘다.
“내가 사람들 하는 얘기를 얼핏 들었는데, 걔가 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대. 고등학교 땐 여학생 성폭행해서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데, 아버지가 준재벌이라 돈으로 덮었다고 하더라.”
그 말에 영신이 덤덤한 얼굴로 그러느냐고 했다.
“진짜 보이는 없었어? 예를 들면 원혼이라든가.”
“없어.”
“야, 그러지 말고. 소스 좀 주라.”
“소스는 식당 가서나 찾고, 귀찮게 할 생각이면 다음부턴 알은척도 하지 마.”
“매정한 놈.”
“그럼 난 바빠서 이만. 잘 가고.”
그러다 영신이 멈칫하더니 아! 하고 손가락을 딱 튕긴다.
“너. 점심때 짬뽕 먹었지?”
그 말에 동연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그게 보여?”
영신이 쯧, 혀를 차더니 입이나 닦고 다니라고, 더럽다고 한마디 쏘아붙이더니 그대로 몸을 홱 돌려 내려간다. 동연이 손등으로 입술을 슥 문지르고 나서 돌아서 가는 영신을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재수 없는 새끼. 이거나 먹어라.
그때였다. 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함께 있던 언덕 위에서 찢어질 듯 비명이 들려왔다. 동연이 그쪽을 쳐다봤다. 몇 걸음 앞서가던 영신 또한 멈춰 섰다. 조금 전 내려온 언덕을 올려다봤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한 그 언덕은 북과 꽹과리 대신 비명이 가득 찼다.
위를 올려다보던 영신이 헛웃음을 흘렸다. 가지가지 지랄들을 하는구만. 다시 차를 타기 위해 문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사람 살려! 찢어질 듯한 비명에 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다.
그의 눈매가 일그러지다 불현듯 크게 뜨여졌다. 무슨 예감 때문이었을까. 그가 몸을 돌려 언덕 위쪽을 향해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동연 역시 어깨에 카메라를 멘 채 덩달아 뛰었다.
굿판에 도착한 영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멧돼지떼들이 굿판을 뛰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 흩어졌고, 뒤늦게 도착한 동연은 영신의 뒤에 서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발. 이게 다 뭐야.”
그러더니 그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특종이다 특종. 굿판에 멧돼지떼라니. 입가엔 웃음마저 생겨난다.
한편 영신은 고모인 일월 스님을 찾기 바빴다. 이 노인네는 어디 간 거야. 그러다 상 위에 올라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우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어떤 사내 하나가 굿상 위에 올라가 음식을 주워 먹고 있었다.
처음엔 웬 미친놈인가 싶었는데 주위를 경계하느라 고개를 이쪽으로 힐끔 돌린다. 영신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래졌다. 붉은 눈. 뾰족한 송곳니. 주위에 있던 사람 중 누구도 사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옆에 있는 동연도 마찬가지였다.
제 눈에만 보이는 건가. 영신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허겁지겁 고기를 뜯어 먹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더할 나위 없이 새카맣다. 조금 전 본 것은 착각인가. 순간 다가온 영신을 보며 으르릉, 하고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낸다.
영신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덕이는 먹고 있던 고기를 들고 뒤로 물러선다. 옷 앞섶이 온통 음식물로 더럽혀졌다. 그대로 도망치려는 걸 영신이 목덜미를 낚아챘다.
덕이가 발버둥을 쳤지만 영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동연이 두 사람을 보고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카메라를 올리는 순간 멧돼지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고, 곧 그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영신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덕이를 끌고 차 있는 곳까지 내려왔다. 보조석을 열어 그곳에 밀어 넣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덕이가 풀쩍 뛰어올라 영신의 손등을 이빨로 꽉 깨물었다.
윽. 영신이 인상을 구기며 덕이를 제게서 떼어 던져버렸다. 바닥에 나뒹군 덕이가 그대로 푸다닥 달아난다. 뚝, 뚝, 물린 손등에서 피가 흘렀다. 영신이 피를 닦으며 멀어지는 덕이를 쫓기 시작했다. 거기서!
덕이는 능숙하게 산비탈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멧돼지떼들이 난장을 피우는 바람에 음식을 주워 먹긴 했는데, 웬 인간 하나가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제 멱살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한 것이다.
어제 봤던 그놈들과 한패인가. 하지만 냄새가 다르다. 더 위험한 냄새가 나는 놈이었다. 턱, 죽기 살기로 뛰어 내려가던 중 나무뿌리에 걸려 그만 아래로 데굴데굴 공처럼 굴렀다. 순간 돌부리에 정강이가 콱 찍혔다.
악. 덕이가 비명을 내지르다 제 입을 틀어막았다. 쩔뚝이며 일어서려는데 발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대로 풀썩 주저앉으며 커다란 바위 아래로 몸을 숨겼다. 조금 전 찍힌 정강이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저벅저벅. 풀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놈이 느껴진다. 덕이가 바위에 등을 밀착하며 최대한 안쪽으로 웅크렸다.
영신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댔다. 더럽게 빠르네, 헉헉. 평소 운동이라면 자신 있었는데, 산비탈을 뛰어내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눈빛도 그렇고 잠시 드러냈던 송곳니도 그렇고. 더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예감이 맞는다면 녀석은 구미호다. 생전 오지도 않던 굿판에 발길이 저절로 향하더니 이런 횡재를 하려고 했나. 영신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진다.
휘- 휘- 휘파람을 불며 그가 앞쪽으로 걸어나갔다.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놀리듯 달래듯 낮고 짙은 목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영신이 하늘을 쳐다봤다. 산등성이에 걸려 있던 해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잠시 후면 숲에도 어둠이 찾아온다. 더 지체했다간 녀석을 놓칠 수도 있다. 분명 근처 어딘가 몸을 숨겼는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신의 손가락 사이로 노란색 부적 하나가 나타났다. 붉은 글자가 새겨진 부적을 공중에 띄우고 그대로 날렸다. 휘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부적이 바람을 타고 춤추듯 살랑살랑 날아 움직인다.
영신이 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따라 움직였다. 부적이 숲 안쪽으로 들어간다. 늘어진 나뭇가지들을 치우며 한참을 따라가던 그가 멈춰 섰다.
부적이 머문 곳에 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에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목을 맨 사내는 죽은 지 며칠은 되어 보였다.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고, 고약한 냄새가 사방에 풍겼다.
그 시체 밑에서 영 하나가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본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그 남자다. 영신을 보며 제발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영신은 남자에게서 후회와 원망을 느꼈다.
바닥엔 남자가 쓴 것으로 보이는 유서도 있었다. 영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여전히 서서 영신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저대로 두면 객귀가 되어 산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른다. 영원히 구천을 떠들게 될지도.
하지만 모든 일은 그가 선택한 것이다. 영신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왔던 길을 향해 몇 걸음 떼었을 때 툭, 무언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다시 나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금 전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줄이 끊어졌다. 아니 누군가 끊어 버렸다. 자신이 찾아 헤매던 그 사내가 나무에 올라앉아 영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덕이는 달아나지도, 그렇다고 덤벼들지도 않았다. 정강이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아 영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영신이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귀신을 포박하는 용도로 쓸 부적은 몇 장 있었지만, 녀석은 귀신이 아니다. 혹시라도 사탕이 있나 찾았지만 단 걸 싫어하는 제가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손에 잡히는 거라곤 휴대폰이 전부였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하던 그가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상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약간은 멍한 얼굴로 영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말을 못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던 영신이 주머니에서 제 휴대폰을 꺼냈다. 카메라 모드를 켜고 나서 덕이를 향해 흔들었다.
“이것 봐 봐. 신기하지?”
“…….”
“이리 와서 볼래?”
말없이 바라보던 덕이가 앞주머니로 손을 넣는다. 그러더니 거기서 구형 휴대폰 하나를 꺼내 영신이 한 것처럼 똑같이 흔들었다.
“나도 있다, 등신아.”
이런, 말을 할 줄 알잖아. 영신이 머쓱한 얼굴로 제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나서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럼 다른 거 줄까? 아까 보니 배고파 보이던데…. 나랑 고기 먹으러 갈래?”
“싫어.”
“왜? 고기 안 좋아해?”
“…나 잡아가려고 그러는 거잖아.”
“널? 내가 왜?”
“내가 네 친구 돈을 훔쳐서.”
“돈을 훔쳤어?”
덕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모르는 건가. 정말 그 패거리가 아닌 건가. 어쩌지. 괜한 이야기를 했나 싶어서 후회됐다. 우림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영신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상냥해졌다.
“난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돈을 훔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아주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거나.”
덕이가 놀란 얼굴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영신이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속으론 저게 여우가 아니고 그냥 바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일단은 달래서 데려가 보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그래야 여우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것 아닌가.
“그 돈 말이야. 내가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덕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거짓말. 영신이 곧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었다. 하지만 현금이 얼마 없다. 젠장. 카드를 보여줄 수도 없고. 보여준다고 해도 알아먹을 거 같진 않았다. 슬그머니 지갑을 다시 집어넣고 나서 자신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구슬렸다.
“어떻게?”
“내가 너 같은 사람, 아니… 뭐 그래. 하여튼 오갈 데 없는 애들을 데리고 사업을 하거든. 물론 월급도 주고.”
“월급?”
“일하면 주는 돈.”
“돈을 준다고?”
“그래.”
“얼마나?”
“일한 만큼. 때로는 것보다 더 많이.”
“나도?”
“물론. 일만 하면.”
“어떤 일인데?”
“네가 잘하는 거.”
내가 잘하는 거? 덕이가 잠시 고민했다. 그거라면 어렵지 않은데. 그러고 나서 남자를 유심히 봤다. 행색이 말끔하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되게 잘생겼다. 아까 부적을 쓰는 걸 몰래 훔쳐봤는데 보통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그러다 명이 할망구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인간 세상엔 인간인 듯하지만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넘쳐난다고. 설마 그런 놈은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썬 방법이 없다. 어제 그놈들을 피해 당분간 몸을 숨길 곳이 필요하기도 했고.
덕이가 고민을 하는 동안 영신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아까처럼 다그쳤다간 일단 튈 것 같아 방법을 바꾼 것이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덕이가 아래에 떨어진 사체와 그 옆에서 떠나지 못하는 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 영신을 쳐다본다. 무슨 말인지 알아챈 영신이 인상을 슬며시 찡그렸다. 사람인 저도 모른 척하는데 여우 주제에 나서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이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파야 하지 않겠는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기 시작하자 덕이가 폴짝 나무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천천히 영신에게로 다가왔다.
***
꽤 늦은 시간이었다.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작성하고, 연락처를 알려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괜히 번거로운 일에 휘말린 것 같았지만, 일단 구미호를 데려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문이 열리고 덕이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영신이 슬쩍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귀신의 해코지를 막기 위해 공사할 때 벽지 안에 부적을 발라놓았기 때문에 영들이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건 미자와 인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구미호는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거기, 슬리퍼 갈아신어.”
시키는 대로 덕이가 바닥에 놓인 슬리퍼에 제 발을 집어넣었다. 어둡던 집 안에 불이 켜지자 덕이가 입을 벌리고 실내를 살펴봤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집이었다. 몇 대가 한집에 모여 사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 집 안은 정적이 흘렀다.
두리번거리는 덕이를 보며 영신이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덕이가 슬그머니 영신을 향해 몸을 기대온다. 영신이 흠칫 놀라 손을 떼어내고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왜 그러냐는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봤다.
“씻고 와.”
“뭐?”
“뒤로 하는 게 좋아? 아니면 앞으로?”
영신의 눈매가 슬며시 일그러진다. 그러다 문득 아까 녀석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돈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도망쳤다고도 했다. 혹시 이 자식 몸을 팔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영신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혐오감이 깃든다. 하지만 곧 기색을 지우고는 덕이를 향해 상냥하게 웃었다.
“그런 걸 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
덕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아니라고? 그럼 왜? 돈 준다고 하지 않았어?
“이리와 봐.”
영신이 덕이의 손을 끌고 소파에 가서 앉혔다. 냉장고로 가서 뭘 마실 거냐고 묻자 덕이는 물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곧 영신이 컵에 물을 가득 따라서 가져왔다. 목이 말랐던 덕이가 그 물을 벌컥벌컥 남김없이 들이켰다. 크하. 시원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근데 다른 식구들은 어디 갔어?”
“식구들?”
“설마, 혼자 살아?”
영신이 웃으며 그렇다고 하자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심심하겠다.
“넌 이름이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덕이가 움찔한다.
“내 이름?”
“어. 네 이름.”
“나… 나는 덕이.”
“그냥 덕이?”
“…김덕이.”
김덕이라…. 제 이름을 읊느라 움직이는 영신의 입술이 묘하게 야해 보였다. 산에서 볼 때보다 집 안에서 보니 더 잘생기긴 했다. 잠시 얼굴을 보며 넋을 놓고 있는데 영신이 눈을 휘며 웃는다. 그 미소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있지도 않은 빈 물컵을 입에 가져가 먹는 시늉을 했다.
“난 박영신.”
아, 이름이 박영신이구나. 이름도 잘생겼네.
“넌 왜 그 숲에 있었어? 원래 거기서 사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도망치다 그렇게 됐다고.”
그렇구나. 그 밖에도 영신은 이것저것을 물었다. 어렵고 불편한 질문도 아니었기에 덕이는 성실하게 대답해줬다.
그러면서도 흘깃흘깃 영신의 얼굴을 훔쳐봤다. 남들이 저를 보고 잘생겼다, 예쁘게 생겼다, 칭찬해줄 땐 몰랐는데 잘생긴 건 참 좋은 거구나. 기분이 좋아지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국에 살 때 인물 좋다는 이들을 많이 보긴 했지만, 영신은 그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인간이라 그런 건가. 게다가 성격도 무척이나 상냥했다. 처음에 저를 다짜고짜 끌고 갈 땐 나쁜 놈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집에 데려와 일자리까지 주려 하다니.
“어디에서 살다 왔어?”
“나는… 음, 그러니까 저어기 멀리.”
“얼마만큼 멀리?”
“아주 아주 멀리….”
“흐음. 그렇구나.”
그러면서 오늘은 많이 피곤할 테니 우선 씻고 자라고 한다. 그러면서 덕이가 머무를 방도 안내해줬다. 끝쪽에 있는 손님방이었는데, 말이 손님방이지 집에 누가 오는 일이 거의 없어서 늘 빈 상태 그대로였다.
방을 들어서던 덕이가 입을 떡 벌렸다. 크고 깨끗한 방은 여태 묵었던 어떤 곳보다 깨끗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걸까? 이런 호의를 다 받아도 되는 거야?
“…있잖아. 나 진짜 그냥 자도 돼?”
그 말에 영신이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물론. 그러면서 씻을 곳을 알려주었다. 갈아입을 옷을 앞에 놔줄 테니 일단은 씻으라고 말이다. 산에서 구르고 더러운 것도 만지고 그랬으니 아무래도 그게 낫지 않겠느냐고.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이 알려준 욕실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꽤 널찍했다. 세상에. 엄청 부자인가 보다. 입고 있던 옷을 벗으려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원 버튼을 켰지만, 우림에게 온 연락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 일자리를 찾았다고 말해야 할 거 같은데. 돈도 많이 준다고 하니 더 괜찮을 거 같다고 말이다. 먼저 연락할까 하다 늦은 시간이라 관두기로 했다. 옷을 벗어 옆에다 두고 뜨거운 물을 틀고 그 앞으로 가 섰다.
솨, 뜨거운 물이 몸을 적셔주니 피곤함이 싹 가신다. 윽, 그러다 다리에 느껴지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까 넘어질 때 돌부리에 정강이를 찧은 데가 욱신거리고 아려왔다. 구슬만 있었으면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며 몸 구석구석을 씻기 시작했다.
영신이 가만히 욕실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 씻으러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 녀석이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친 건가. 설마, 제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사방이 막힌 욕실에서 도망칠 재간은 없을 것이다. 영이라면 또 모를까.
영신이 팔짱을 낀 채 앞에 서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구미호는 처음 보는 데다 녀석이 구미호란 뚜렷한 증거도 기운도 느껴지질 않았다. 낮에 잠시 봤든 눈동자와 날카롭게 빛났던 송곳니도 지금은 멀쩡했다.
구미호에 대해서 잘 알 만한 사람을 찾아보는 게 나을까.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했지만 절대로 먼저 연락하고 싶진 않았다. 혹시나 미자와 인태는 알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종은 아니지만 카테고리는 비슷하니 말이다.
달칵 문이 열리면서 뿌연 김이 밖으로 새어나온다. 어지간히도 뜨거운 물로 지졌군. 밖으로 나오던 덕이가 영신을 보고 흠칫하더니 것도 잠시 앞에 놓여있는 옷을 무심하게 주워 천천히 입는다.
영신이 그런 덕이를 흘깃 봤다. 몸이 눈처럼 하얗다. 체모도 나지 않았을뿐더러 몸에 점하나도 없다. 꼬리며 구슬 같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영신이 덕이와 눈이 마주쳤다. 제 옷을 입혀놨더니 좀 커서 그런지 어깨뼈가 살짝 드러나 보인다.
“다 입었어?”
응. 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녁 먹을래?”
응. 덕이가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영신이 앞서서 주방 쪽으로 향했고 덕이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커다란 창밖으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주방 쪽으로 가던 덕이가 빛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그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창 앞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니 강물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게 보인다. 저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예쁘다.
“구슬 같아…. 갖고 싶어.”
“구경하고 있어. 저녁 준비하려면 조금 걸릴 테니 말이야.”
영신의 배려로 덕이는 창 앞에 서서 좀 더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다. 순간 텅, 텅, 유리창 맨 아래로 손 하나가 나타난다. 덕이가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손바닥이 위로 조금씩 조금씩 기어 올라왔다.
뭐야 저게? 덕이가 눈을 떼지 못하고 보는데 점점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 한쪽이 으깨진 여자가 밑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더니 덕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덕이가 눈만 깜빡였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아 목을 움츠리는 데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고개를 돌렸더니 언제 왔는지 영신이 제 뒤에 서 있었다.
“몇 달 전에 위층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야.”
텅, 텅, 텅 여자가 으깨진 머리를 유리창에 박았다. 텅, 텅, 텅, 일반사람이라면 듣지 못하였을 그 소리 때문에 덕이는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인상을 찡그리고 귀를 틀어막는데 순간 밝은 빛 하나가 날아가 유리창 밖 여자에게 꽂힌다.
여자가 그대로 뒤로 떨어지더니 추락해버린다. 덕이가 뒤를 돌아봤더니 영신의 손에 파란 불빛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걸 보고 덕이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그거?”
“무서워하지 마. 여우는 해치지 않으니까.”
덕이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영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주방 쪽으로 향했다. 멍하니 서 있던 덕이가 뒤늦게 그 뒤를 쫓아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아니야!”
“뭘.”
“나 여우 아니라고!”
“네가 여우라고 한 적 없어. 여우는 해치지 않는다고만 했지.”
“아….”
“싱겁긴.”
어쩐지 당한 느낌이다. 우림이 그랬는데,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네가 여우인 걸 말해서도 들켜서도 안 된다고. 그러면 다시 호국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혹시 낮에 잠시 변하려고 했던 모습을 본 걸까.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눈은 식탁으로 향했다. 방금 구운 듯 보이는 소고기가 접시에 놓여있었다. 덕이가 침을 흘리며 그것을 바라봤다. 고기다, 고기. 입가로 주룩 침이 흐르는데, 영신이 병 하나를 들고 온다. 그리고 잔 두 개도 함께.
그 모습을 보며 덕이가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근데 넌 뭐 하는 사람이야?”
“나?”
“귀신을 보는 것도 그렇고.”
영신은 말없이 와인을 잔에 따랐다. 피처럼 붉은 술이 찰랑거렸다. 그 빛깔이 너무 예뻐 덕이는 또 넋을 놨다.
“…혹시 퇴마사야?”
퇴마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영신이 슬쩍 웃는다. 하긴 휴대폰도 가지고 다니는데 그걸 모를까 싶어서. 불안해진 덕이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귀신도 아니고 여우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라고. 제 발 저려 자꾸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모습에 영신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무리 봐도 여우가 아니라 곰인데?
“알았어. 믿어줄게.”
“진짜야.”
“열 내지 말고 일단은 앉아. 종일 그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면 말이지.”
그 말에 덕이가 쭈뼛거리며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접시가 더 가까워지자 고기 냄새가 유혹한다. 벌어진 입으로 다시 침이 고여, 그것을 꿀꺽 삼켜버렸다. 영신이 그 접시를 가져가더니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아니면 손으로 들고 그냥 뜯어 먹을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덕이의 손에 포크를 들려주었다. 자 이걸로 먹어.
“잘 먹을게.”
“별말씀을.”
덕이가 포크로 고기를 마구 찍어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얼마나 육질이 부드러운지 그냥 넘어간다. 낮에 굿판에서 뜯어먹던 그 질긴 고기와는 전혀 맛이 달랐다. 본래 구미호란 날고기를 먹었지만, 덕이는 아니었다.
날고기는 비위가 약해 쉽게 입에 대질 못하였다. 아깐 너무 배고파 눈이 돌았으니 그랬던 거고. 씹을수록 고소함마저 느껴지는 고기 맛에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다. 그때 드르륵, 드르륵, 테이블에 올려둔 영신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덕이가 멈칫하자 영신이 계속 먹으라는 눈짓을 보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통화하며 거실 쪽으로 갔다. 덕이가 고기를 입에 욱여넣으며 그 모습을 유심히 봤다. 그는 씻고 나와서 그런지 더 근사하고 말끔했다. 긴 다리 하며 적당히 근육이 잡힌 몸까지.
이젠 다른 의미로 침을 꿀꺽 삼켰다. 돈도 벌게 해준다는데 그런 은인한테 다른 마음을 품으면 안 되지, 암. 그런 생각을 하며 남아있던 고기를 입 안에 모두 털어 넣었다. 그러다 옆에 커다란 잔이 보였다. 거기 안에 있는 핏빛 액체도.
아까 영신이 이걸 살짝 맛보던데. 그렇게 맛있나? 살짝 입에 댔다가 인상이 팍 구겨진다. 굉장히 쓰다. 에퉤퉤. 옆에 있던 물로 입을 헹구고 나서는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
덕이가 휴대전화를 켰다. 하루에 세 번 켜서 확인하라는 우림의 말을 지키려고 말이다. 예상대로 그에게 메시지가 도착해있다.
[내일 저녁 00역 6시. VIP 손님이니까 늦지 않게 와.]
VIP라는 건 돈이 많다는 뜻이었다. 전화를 든 채 한참을 망설였다. 다른 일자리를 구했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다. 일은 여러 개 할수록 더 좋은 거다. 그래야 돈도 더 빨리 모을 테니 말이다. 잠시 후 문자 하나가 더 들어온다.
[마지막 구슬을 갖겠다는 구미호가 나타났어.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하마터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조급한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누르니 꺼져있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덕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알겠다고 얼른 돈을 모을 테니 제발 구슬을 다른 구미호에게 넘기지 말아 달라고 문자를 보내놓고 나서 휴대전화를 한쪽에 올려뒀다.
침대에 털썩 앉았다가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워 천장을 봤다. 놀란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너무 편안하다. 돌아다니다 보면 질 나쁜 귀신들이 쫓아다니거나 괴롭히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곳에선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덕이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고, 곧이어 영신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 작은 컵이 들려 있었다.
“미안. 내가 자는 걸 깨웠어?”
“아니….”
덕이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슬며시 이불 밑으로 넣었다. 우림이 저와의 관계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영신이 들고 있던 컵을 건넸고, 덕이가 그것을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봤더니 연한 갈색을 띠는 차다.
“이건….”
“차야.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피곤함을 좀 가라앉혀 주지.”
“난… 차 별로 안 좋아하는데.”
“먹어봐. 물 같아. 아무 맛도 안 나는 거야.”
덕이가 고개를 들어 영신을 바라봤다. 의자에 앉아 다정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보고 차를 다시 내려다봤다. 뭘 타지 않았으려나 의심이 들었지만, 집 안에 들어와 고기까지 다 얻어먹은 상황에서 그런 의심을 하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독약을 타려면 음식에다 섞으면 되는데, 뭐하러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살짝 맛을 보았는데. 으엑. 덕이가 인상을 확 찌푸리고 그것을 떼어냈다. 고약한 향이 났다. 구역질이 올라와 저도 모르게 입까지 틀어막자 영신의 눈빛이 슬그머니 변한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한 투였다.
“왜? 별로야?”
“고약한 냄새가 나잖아.”
“냄새라니. 난 전혀 못 맡겠는데?”
“이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으윽,”
그러더니 헛구역질을 한다. 들고 있던 찻잔을 영신에게 건네주며 저리 치우라고 인상을 찡그렸다. 덕이를 쳐다보는 영신의 눈빛이 미묘하다. 곧 눈을 슬쩍 휘며 웃더니 알았다고, 아무래도 너한테 맞는 건 아닌가 보다며 찻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뒤로 좀 물러섰다. 그제야 덕이의 표정이 한결 나아진다. 속이 뒤틀리는 줄 알았다.
“그럼 어쩌지. 다른 걸 가져다줄까?”
다정하게 묻는 영신을 향해 덕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영신이 알겠다며 그럼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자라고 말한다. 잠깐만. 덕이가 문밖으로 나가려는 영신을 불러세웠고, 조금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고마워. 먹을 것도 주고, 재워주고, 돈도 준다고 해서.”
“나도 필요해서 하는 일이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감사는 나중에 해도 돼. 잘 자.”
“응. 너도.”
문이 닫혔다. 영신이 사라진 방 안은 다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덕이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조금 전 맡았던 향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긴 했지만, 기분은 평소보다 괜찮았다. 이렇게 좋은 집에 저런 좋은 마음씨를 가진 남자라니. 근데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뭐지.
이불을 둘둘 말아 끌어안았다. 좌로 굴렀다가 우로 굴렀다가 그리고 엎드렸다가 하는데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다른 구미호가 먼저 구슬을 채가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아무래도 내일 일찍 우림에게 연락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졸음이 몰려왔다.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고, 어느덧 새근새근 잠이 들어 버렸다. 그때 문이 빠끔히 열리고 적은 양의 빛이 흘러들어온다. 열린 문틈으로 영신이 잠든 덕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달칵 일부러 문소리를 내자 덕이가 움찔하더니 몸을 뒤척인다. 빌어먹을. 영신이 터져 나오는 욕을 삼키며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그의 손에는 아까 덕이가 마시려고 했던 차가 들려 있었다.
일종의 수면제 효과가 있는 차였다. 마시게 한 후 몸 구석구석을 살펴볼 요량이었다. 뭔가 구미호라는 증거가 있을까 해서 말이다. 하지만 특이한 차 향 때문에 일을 망쳐버렸다. 차라리 진짜 수면제를 먹일 걸 그랬나. 후회하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 들고 베란다 쪽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딱, 맥주 뚜껑을 젖히는 순간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로 전화기를 가져다 댔다.
“네. 저예요.”
[그래. 어때?]
수화기 건너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굿판에서 만난 일월 스님이었다. 덕이를 데려오고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모인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녀는 멧돼지가 나타나기 전 절로 돌아가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구미호란 말에는 꽤 흥미를 보였다.
“심증은 가는데 정확히 보이는 게 없어요. 부적을 썼는데도 듣질 않고요.”
[네가 잘못 본 건 아니고?]
선뜻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처음엔 확신했는데 갈수록 모르겠다.
“글쎄요.”
[힘을 숨길 정도로 요력이 센 녀석일까?]
“모르겠어요. 겉으로 보기엔 인간과 다를 것 없었고요.”
흠….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그녀가 알았다며, 내일 잠시 들르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영신이 미간을 꾹 눌렀다. 그녀가 사무실에 들르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였다. 시간을 내서 자신이 찾아가겠다는 말에 그녀가 그럼 그러라며, 올 때 그 아이도 함께 데리고 오라고 덧붙인다.
“알겠어요. 그럼 주무세요.”
[영신아….]
“네.”
그녀가 침묵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집에 발길을 끊은 지가 벌써 몇 년인지 모른다. 다른 가족들은 영신을 비난했고, 가문의 수치라고 여겼다. 오직 그녀만이 전처럼 조카를 대할 뿐이었다.
[아니다. 이만 끊자. 다음에 이야기하마.]
뚝, 전화가 끊어졌다. 영신이 끊어진 전화를 보다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발코니에 몸을 기대고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늦은 시간이지만 차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는 게 보인다. 불빛들이 반짝였다. 물에 비친 빛들이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구슬 같아…. 갖고 싶어.]
잠시 멈칫했다. 아까 덕이가 한 말이 떠올랐지만, 곧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그럴 리 없지.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아 씁쓸하게 웃고 나서 남은 맥주를 마지막까지 꿀꺽꿀꺽 들이켰다.
꿈에서 덕이는 쫓기고 있었다. 저를 괴롭히던 다른 여우들에게 쫓기다가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안간힘을 쓰며 어떻게든 살려고 버둥대는데 팔다리가 맘처럼 움직여주질 않는다.
그 와중에도 아랫배가 뻐근할 만큼 쉬가 마렵다. 끙끙 신음을 내다가 눈을 번쩍 떴을 때 앞에 보인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눈을 느리게 두어 번 깜빡이고 나서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어젯밤 자신이 잠든 방이 맞긴 하다. 근데 어째서 팔다리가….
“이게… 뭐야?”
덕이가 인상을 구겼다. 자신의 팔다리가 침대 모서리에 단단하게 결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팔다리를 마구 당겼지만, 도무지 줄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밖에 아무도 없어? 이봐! 여기 좀 들어와 봐! 좀 들어봐 보라고!
목이 터져나가라 악을 썼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새하얀 손목과 발목엔 금세 시뻘겋게 자국이 생겨났다. 덕이가 울상을 지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요의도 참을 수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
“오줌 쌀 것 같아! 쌀 것 같다고!”
그때 문이 열리고 영신이 나타났다. 다급한 덕이와는 달리 그는 느긋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덕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좀 풀어줘, 당장!”
“네 힘으로 풀어봐. 할 수 있잖아?”
“내가 이걸 어떻게 풀어! 어서 풀지 못해! 오줌 쌀 것 같단 말이야!”
“못 풀면 싸야지. 다 큰 어른이 이불에 오줌싼 걸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릴까. 안 그래?”
덕이가 인상을 구겼다. 제발 풀어달라고 애원하다 소리치다 지랄 발광하다 또 애원했지만, 영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문에 기대서 커피를 홀짝일 뿐이었다. 갑자기 덕이가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끄아악 괴성을 지르고 상체를 들썩인다.
영신의 눈빛이 반짝였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순간 덕이가 풀썩 다시 눕더니 망연자실한 얼굴로 흐흐 웃는다. 영신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뒤늦게 자신이 빌려준 백만 원짜리 트레이닝복의 가랑이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걸 보고 영신이 이를 까득 갈았다.
뭐야? 진짜 쌌어? 컵을 내려놓고 옆으로 가서 내려다보는데 덕이가 눈물을 그렁하게 달고 노려본다.
“죽여버릴 거야!”
협박과는 달리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엉엉 울기까지 한다. 구겨진 영신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어제 자신이 보았던 새빨간 눈과 날카로운 이빨은 정말 착각이었나. 귀신에게 홀렸던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침대에 누워 아이처럼 엉엉 우는 덕이를 내려다봤다. 곧 손을 뻗어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웃었다.
“미안. 내가 장난이 좀 심했다.”
“이게 장난이라고?”
“원래 이러면서 친해지는 거야. 내 친구들도 한 번씩 다 겪었는걸.”
영신의 말에 덕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팔다리를 묶고 오줌을 싸면서 친해질 수 있단 말인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쏘아붙이자 영신이 사실이라며 다정하게 웃는다. 눈빛이며 잘생긴 얼굴은 모두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싸한 느낌이 든다. 대체 이 자식 정체가 뭐야.
아침을 먹는 내내 덕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이불에 오줌을 싼 것도 그렇지만 영신이 어쩐지 하룻밤 새 태도가 좀 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젠 다정하기만 하더니, 오늘은 좀 차가워졌달까.
밥을 먹으면서 눈치를 살폈더니 다 먹었으면 갈 데가 있으니 나오란다. 이불 빨래 걱정을 했더니 일하는 사람이 올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침대는 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에 덕이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나와서 따라간 곳은 바로 옆집이었다. 어디 멀리 가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사무실이란다. 세상에. 그렇다면 이 넓은 집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단 말인가.
문이 열렸고, 그의 뒤를 따르던 덕이가 멈칫했다. 거실에 웬 남자 귀신과 여자 귀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이를 발견한 그들의 표정이 슬그머니 일그러졌다. 귀신이야 뭐 세 발짝만 나가도 지천으로 널린 게 귀신이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 귀신입네 하고 힘을 내보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남자 귀신은 인상이 아주 험악했다. 덕이가 슬그머니 영신의 뒤로 숨자 인태의 얼굴이 깡통 구겨지듯 하더니 코를 벌렁거리면서 킁킁 냄새를 맡는다.
“뭐야, 이건.”
“얘 우리가 보이나 본데?”
두 사람의 반응에 영신이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으며 네들 눈엔 저게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묻는다. 인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냄새가 함께 난다. 킁킁거리면서 가까이 다가가자 덕이가 몸을 더 움츠린다.
미자가 비켜보라며 그런 인태를 떠밀더니 덕이의 얼굴을 붙들고 빤히 쳐다본다. 검은 보석을 박은 것처럼 새카만 눈동자에 그린 것처럼 예쁜 콧대, 사내치곤 붉은 입술도 그렇고. 이것은 필시….
“왜? 뭐가 다른 게 느껴져?”
인태의 말에 미자가 덕이의 뺨을 꾹 누른다. 흰 얼굴이 찹쌀떡처럼 일그러졌다.
“응. 느껴져. 내 이상형이야. 존나 귀엽다.”
지켜보던 인태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나잇값 못하고 그저 어린놈만 보면 좋아서 침을 질질 흘린다고 했더니 미자가 눈을 빛내며 그럼 늙은 놈을 보면서 기분이 나겠느냐고 받아친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영신이 자세를 고쳐 잡고 덕이를 바라봤다.
덕이는 두 귀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본래 구미호라면 귀신들이 무서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사무실로 데려와 인태나 미자에게 보여주면 뭔가 다른 게 보일까 싶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아침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정말 아닌 걸까.
차라리 쫄쫄 굶겨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본성을 드러내려나. 자리에서 일어나니 덕이가 이쪽을 쳐다본다. 영신에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있잖아. 할 말이 있어.”
역시나.
“나 일하는 거 말이야….”
“그래.”
“내일부터 할 순 없을까? 내가 오늘은 급한 약속이 있어서.”
“무슨 약속?”
“전에 일하던 곳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영신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치거나 하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아직 확인이 안 되지 않았나. 어디서 만나느냐고 거기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자 덕이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친다. 우림이 절대로 이 일을 하는 걸 남들이 모르게 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 그럴 필요 없어. 내가 혼자 가도 되니까.”
괜히 더 캐물었다간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굳이 데려다 주지 않아도 사람을 시켜 뒤를 밟는 방법도 있었다. 영신이 상냥한 얼굴로 웃으며 그럼 내일부터 일하라고 하자 덕이도 그제야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드르륵, 드르륵, 영신의 재킷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영신이 그대로 전화를 받으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영신이 사라진 사무실엔 인태와 미자 덕이만 남게 됐다. 덕이가 영신을 쫓아가려고 하자 인태가 턱 가로막았다.
“어딜 가?”
“왜?”
“왜? 어린놈이 반말은.”
옆에 있던 미자가 귀여운 것한테 왜 시비냐고 놔두라고 구박했지만, 인태는 마뜩잖은 시선으로 덕이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인간과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났다. 그렇다고 그가 박영신처럼 신을 업고 사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럼 대체 이것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너, 여기 왜 왔어?”
“박영신이 데리고 왔는데.”
“그러니까 박 대표가 널 왜 데리고 왔냐고.”
“몰라. 재워주고 일도 시켜준다고 해서 따라왔어. 돈도 주고.”
“일? 너한테?”
인태가 팔짱을 낀 채 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미자가 정신없으니 좀 앉으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인태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로운 멤버인가.”
“설마. 박 대표가 얼마나 사람 못 믿는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
그 말에 미자도 가만히 덕이를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요상한 기운을 뿜어내긴 했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껍데기는 완벽한 인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귀신도 아니고.
“그건 그래. 걘 우리도 믿지 못하잖아. 그럼 대체 얘를 어디다 쓴다는 거지? 되게 어린 것 같은데. 경호나 운전을 하기에도 빌빌해 보이는데.”
“쓸모가 있으니 데려왔겠지. 안 그래? 애기야?”
미자가 말을 하며 덕이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덕이가 슬며시 몸을 뒤로 물려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손이 얼마나 찬지 얼음장 같았다. 보통 구슬이 있었으면 귀신들이 제게 무서워 달려들지도 못할 텐데. 여기서나 저기서나 얕잡아 보는 건 매한가지였다.
슬그머니 그들에게서 도망치다 결국엔 베란다까지 나가게 됐다. 밑을 내려다보는데 영신이 차 앞에 서 있고, 처음 보는 사내가 그 옆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저건 뭐지? 덕이가 유심히 쳐다보는데 미자가 곁으로 와 섰다.
“뭘 그렇게 내려다봐?”
“지금 영신이가 누굴 만나고 있어.”
“아, 김 실장 왔구나.”
그 말에 덕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영신의 손발 노릇을 해주는 사내라고 했다. 골치 아픈 일은 도맡아서 처리해주는. 그 사내가 영신의 차에서 검정 가방을 꺼내 제 차에 싣고 있었다. 그리고 상자도 있었다. 겉에 큼지막하게 사과가 그려진.
“영신이… 사과 장수였어?”
“파하하. 이 자식이 뭐래. 인마 저거 돈이야.”
그 말에 덕이의 눈이 커다래진다. 뭐?
“돈 몰라? 머니.”
인태가 손가락으로 돈 표시를 해 보였다. 덕이가 그걸 가만히 보다가 다시 밑을 내려다봤다. 저기 들어있는 게 다 돈이란 말인가. 대체 얼마나 부자란 소리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혼잣말을 중얼댔다. 저렇게 옮기다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 말에 뒤에서 인태가 낄낄 웃는 소리가 들린다.
“저건 박 대표한테 껌값일걸.”
“껌?”
“신경도 안 쓴단 소리야. 돈을 쌓아 놓고 사는 인간이니까 말이지.”
돈을 쌓아 놓고 산다고. 덕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지막 상자가 트렁크 안에 들어가고 실장이라는 남자가 문을 닫고 영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마지막 구슬을 갖겠다는 구미호가 나타났어. 서두르지 않으면 뺏기고 말걸.]
차를 내려다보는 덕이의 얼굴이 더는 평온함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창가에 기대선 채 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아랫배를 붙들고 울상을 했다. 돌아보니 인태가 왜 그러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중이었다.
“나 배가 너무 아파서.”
쯧. 인태가 혀를 차더니 얼른 다녀오라고 말한다. 덕이가 아무래도 체한 거 같다며, 영신의 집에 약을 두고 왔다면서 후다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소파에 있던 미자가 닫힌 문을 봤다가 인태를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왜 그랬어?”
인태의 얼굴에 피식 미소가 생겨난다.
“내가 뭘.”
“알면서. 박 대표 열 받게 하려는 거지?”
“설마.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입가에 머문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렀고 약을 가지러 옆집으로 간 덕이는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