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쿠릉. 오전부터 흐리기 시작한 하늘은 점심이 끝나갈 때쯤 굵은 장대비를 쏟아냈다. 무더위 속에서 아이들은 교실에 앉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느라 정신없었다. 그때 뒷문이 열리고 키가 커다란 남학생이 들어왔다. 뒤에 있던 여학생들이 그를 보고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눈짓을 교환했다.
남학생이 자리로 가서 앉자 쳐다보던 여학생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책상을 똑똑 두드린다.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던 남학생의 고개가 여학생을 향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여학생이 잠시 머뭇머뭇하다 입을 열었다.
“…영신아, 너 토요일에 뭐 해?”
남학생은 빤히 쳐다볼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여학생이 자신의 생일인데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여학생이 곤란한 얼굴로 뒤쪽에 있는 친구들을 쳐다봤다. 친구들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응원을 보냈기에 조금 더 용기를 내보려 했다.
“아니면,”
다시 한 번 묻기도 전에 영신이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더는 말을 시키지 말란 뜻이었다. 여학생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몸을 돌려 친구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곧 자리로 돌아갔고, 친구들은 익숙한 일인 듯 그녀를 위로했다.
사각, 사각, 영신이 노트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있을 시험에 대비해 요점정리를 해둘 요량이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종종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이만한 게 없었다.
그때였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잇데 구다사이. 분신사바, 분신사바,
영신이 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옆에 앉은 여학생 둘을 쳐다봤다. 앞뒤로 앉은 그들은 볼펜 하나를 서로 맞잡고 흰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영신은 다시 제 할 일에 집중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분신사바, 분신사바, 사각사각, 사각사각, 오잇데 구다사이.
“…오셨나요?”
여학생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볼펜은 미동조차 없다. 두 학생이 서로 잠시 눈을 맞추고 나서 다시 ‘오셨나요?’ 하고 물었다. 지직… 지직… 볼펜이 천천히 동그라미 쪽으로 움직였다.
여학생 중 하나의 미간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그러면서 앞에 앉은 친구를 쳐다봤다. ‘지금 네가 움직이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볼펜은 어느새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안경 낀 여학생이 어떤 질문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창문틀 위로 시커먼 물체가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곧바로 옆으로 다른 하나가 나타나더니 서서히 위로 올라오며 형체를 나타냈다. 쿠르릉, 쾅! 하늘이 진동하듯 벼락이 내리쳤고, 두 형체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하나는 검은색 바지에 셔츠를 입은 사내였고, 하나는 긴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였다.
창밖에 나란히 서 있는 그들은 바닥을 딛고 서 있지도 비에 젖지도 않았다. 스르르 창문을 통과하더니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발을 딛고 걸을 때마다 검은 자국이 찍혔다 사라진다.
그들은 분신사바를 하는 두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학생 하나가 이번에도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여자입니까?”
O에 있던 볼펜이 X로 움직였다. 지켜보던 남자가 옆에 서 있는 여자를 향해 건조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이런 건 왜 하는 거야?]
[글쎄.]
[너도 죽기 전에 이런 걸 했어?]
[기억이 안 나.]
여자의 말에 남자는 더는 묻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여자는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가족들을 온전히 기억하는 남자와는 달랐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죽었고, 저승 대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버렸다.
그때 여학생 중 하나가 볼펜을 쥔 채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귀신님, 귀신님. 제가 나중에 커서 잘생기고 섹시한 남자랑 결혼할 수 있을까요?”
지직…지직… 볼펜이 기다렸다는 듯 동그라미 쪽으로 움직였다. 질문한 여학생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감돈다.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지랄한다.]
볼펜 끝이 동그라미에 안착했고, 여학생은 입가를 헤벌쭉 벌리며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한다. 지켜보던 여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귀엽네.]
[사기 칠 게 따로 있지.]
[왜에. 귀여운데.]
그때 반대편 여학생이 같은 질문을 했다. 볼펜은 꿈쩍도 하지 않고 동그라미 가운데 서 있다. 질문한 여학생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진다.
“야, 우리 둘 다 잘생기고 섹시한 남자 만난대!”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손을 뻗어 볼펜 윗부분에 가져다 댄다. 옆에 있던 여자가 하지 말라고 툭 쳤지만 들어 먹을 그가 아니었다. 그가 힘을 주자 지직… 볼펜이 X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여학생이 맞은편 학생을 노려봤다. 볼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에 꽉 힘을 주자 볼펜이 X와 O 사이에 멈춘다. 여학생은 있는 힘을 다해 볼펜을 O 쪽으로 끌고 가려 했고,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 또한 볼펜을 X 쪽으로 끌고 가려 당겼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여자가 혀를 찼다.
[존나 잔인하다. 자라나는 꿈나무를 그렇게 짓밟고 싶냐.]
[난 세상에서 거짓말하는 애들이 제일 싫어.]
여자가 그만하라고 한 번 더 말하려는 찰나, 팅, 볼펜이 튕겨 오른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구른 볼펜은 옆 분단에 앉은 영신의 발 옆에 안착했다. 그는 발밑에 떨어진 볼펜을 보더니 발로 툭 쳐 버린다. 볼펜이 다시 여학생 쪽으로 굴러왔고, 영신은 아무렇지 않게 노트 필기에 집중했다.
볼펜을 놓친 여학생이 무안한 마음에 얼른 볼펜을 주워들고는 앞에 앉은 여학생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박주아! 너 일부러 힘줬지?”
앞에 앉은 여학생은 갑자기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당황해 하며 무슨 소리냐고, 네가 장난친 거 아니었냐고 도리어 따졌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여자가 따분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만 가자.]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 그의 시선은 여학생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가자고.]
그는 묵묵부답이다. 조금 전 발밑에 볼펜을 두고도 모른 척했던 남학생을 가만히 쳐다볼 뿐.
[쟤를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야?]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긴 눈썹이 살랑이는 게 보인다. 앞모습도 잘생겼지만, 옆모습 또한 그려놓은 것처럼 반듯하다. 영신을 보던 여자의 얼굴이 슬며시 구겨진다.
[너 그런 취향이었어?]
여자의 물음에도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시선이 더 지독해졌다.
[어쩐지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
여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이 마주쳤어.]
[뭐?]
[조금 전에, 쟤가 나를 쳐다봤다고.]
[설마.]
[진짜야.]
[기분 탓이겠지.]
[……]
[그만 가자.]
여자의 말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신의 앞으로 걸어갔다. 여자가 짜증 섞인 얼굴로 그냥 가자고 성질을 부리는데도 남자는 그 앞에 서서 영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새카만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노트에 정갈하게 쓰이는 글자들도. 곧 그 위로 음산한 남자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나 봤지?]
사각, 사각 수학공식들이 노트 위에 적힌다. 영신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다. 글자를 쓰는 속도가 규칙적이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늘이며 상체를 천천히 옆으로 숙였다.
몸을 거의 ‘ㄱ’ 자로 만들자 기이한 형태가 된다. 남자의 눈에 얼굴만큼이나 깔끔한 교복 상의와 반짝이는 명찰이 들어온다. 박영신. 그가 섬뜩한 기운을 내뿜으며 노트필기를 하는 영신의 코앞까지 제 얼굴을 디밀었다.
[영신아. 봤지?]
그가 입을 벌리자 서늘한 온기가 영신의 콧등에 닿았다. 하지만 영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 필기까지 마치더니 볼펜을 내려놓고 깍지를 낀 채 팔을 위로 쭉 뻗어 몸을 이완시키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 방향을 따라 남자의 얼굴도 춤추듯 까닥까닥 움직였다.
[본 거 알아. 겁먹지 말고 말해 봐.]
검고 깊은 영신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덤덤한 얼굴로 책을 덮더니 몸을 일으킨다. 교실 뒤쪽으로 나가는 영신을 남자가 쫓아가려고 하자 여자가 와서 팔을 붙들었다.
[보긴 뭘 봐. 가자고 좀!]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빠르게 중얼거렸다. 봤어. 나 봤어. 눈동자가 마주쳤어. 분명히 봤어. 봤어. 봤어. 봤어. 그러면서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뒷문을 향해 걸어간다. 쳐다보던 여자가 기막힌 얼굴을 했다. 남자는 무언가에 꽂히면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문밖으로 나가자 저 멀리 걸어가는 영신의 뒷모습이 보였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복도는 밤처럼 어두웠다. 쿠르릉. 쿠르릉. 천둥소리가 들리고 번개가 또 번쩍한다. 남자가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영신의 뒤를 쫓았다.
[봤어. 우리 영신이 나 봤지? 말해봐. 나 봤지? 본 거 맞지?]
뚝, 영신이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멈춘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뒤쫓아온 여자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순간 남자의 몸이 서서히 앞쪽으로 기운다. 그걸 보는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야, 야. 아무래도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다른 인간들과 달라. 어떤 놈인지 알아봐야겠어.]
[그러지 말라고!]
[혹시 알아?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몸일지. 어린놈이면 더 좋잖아?]
남자가 웃더니 몸이 당겨진 화살처럼 그쪽으로 날아간다.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빙의란 건 쉽지 않았다. 자신들 같이 귀기가 약한 귀신들에겐 더더욱 어려웠다. 날아간 남자의 몸이 곧 영신의 몸에 닿았다. 그대로 통과할 것이다, 생각한 찰나 시퍼런 빛과 함께 그가 복도 끝까지 튕겨 나간다.
남자는 빈 깡통처럼 바닥에 나뒹굴며 고통스러워 했다. 놀란 여자가 입을 벌리고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뭐야, 방금 그건?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복도 한가운데 서 있는 영신을 노려봤다.
조금 전까지 뒤돌아있던 영신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표정하고 따분하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정하던 검은색 눈동자는 기이한 색을 띠었고,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었다.
여자가 질린 얼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몇 번 빙의를 시도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격한 반응은 처음 봤다. 바닥에 뒹굴던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다 풀썩 쓰러지더니 경련하듯 몸을 떨어댄다. 여자의 등 뒤로 복도 끝 벽이 닿았다. 그냥 이대로 도망칠까.
[…너 정체가 뭐야.]
여자의 물음에도 영신은 대답이 없었다. 그들을 향해 서서히 보폭을 좁히며 다가올 뿐. 눈빛은 서늘했고, 그의 긴 검지와 중지 사이로 나무로 만든 작은 구슬 하나가 나타났다.
그걸 알아본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몸을 돌려 창문 밖으로 도망치려던 순간 구슬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무표정하던 영신의 입가에 처음으로 생긋 미소가 생겨났다.
“씨발. 적당히 하고 갔어야지. 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