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1943년 (1) >
“자네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총통께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셨네.”
“···scheißen(젠장).”
나는 갑작스러운 할더의 말에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 아닐세. 자네도 나와 똑같은 심정일 테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미국 쪽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미국놈들도 원래부터 우리와 싸울 작정이었던 모양이야. 총통이 선전포고를 발표하기 무섭게 미국 상원 의원도 참전을 선언했네.”
“후···. 그렇습니까.”
미국의 참전이라.
사실, 할더의 말대로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미국이 참전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지도 모른다.
연합이니 동맹이니 하는 외교적 문제를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유럽 대륙이 단일 패권 국가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설령 언젠가 미국이 참전했더라도 우리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 일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나중에라도 화친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가능성을 남겨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지금 이대로라면 정말 베를린 상공에서 버섯 구름이 피어오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레벤스라움이라는 망상에 젖은 히틀러가 이제 와서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철회하거나, 다른 연합국과 강화를 맺을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조국의 패망을 막기 위해서,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빌어먹을···.’
한참 동안 고민하던 나는 창가로 다가가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2년 전, 내가 회귀하던 날 보았던 아직 파괴되지도 분단되지도 않은 베를린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비로소 오랫동안 미뤄왔던 결단을 내렸다.
‘···역시, 독일이 패망하는 것을 막으려면 히틀러를 제거하고 적당한 선에서 강화로 전쟁을 끝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할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뭔가 숙제를 남겨두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하네만, 자네라면 분명 잘 해낼 수 있을걸세.”
자리에서 일어난 할더는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이별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나는 할더의 마지막 인사를 받는 대신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각하, 혹시 아직도 베크 장군과 연락을 주고받고 계십니까?”
“···베크 장군이라면, 전 참모총장인 루드비히 베크 예비역 상급대장 말인가?”
“예, 맞습니다.”
그것은 바로 검은 관현악단의 수장, 루드비히 베크 장군에 관한 것이었다.
*****
그렇게 할더가 참모부를 떠난 뒤, 정식으로 육군 참모총장으로 취임한 나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 내가 가장 먼저 해결한 것은 바로 독일군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각하, 지시하신 내용들에 대한 보고입니다. 우선, 에니그마의 보안을 강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전자의 수를 늘리고 반복적인 문장을 생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에니그마를 대체할 암호체계의 개발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이 에니그마 기계는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눌러도 다른 글자로 입력되는 특유의 작동방식 덕분에 오랫동안 보안을 유지했으나, 2차대전이 시작될 즈음에는 이미 영국 암호팀에 의해 해독 당한 상태였다.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스탈린이 영국 첩보부의 보고를 의심하고 무시해준 덕분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내가 참모총장이 된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좋네. 이미 영국놈들은 에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한 기계를 확보하고 있으니, 신형 암호체계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판터의 개량점과 구축전차의 개발에 관한 부분입니다만, 기갑총감이신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께 각하의 견해를 전달했더니 상당히 흥미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내가 취한 조치는 바로 기갑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1943년이니, 그동안 T-34/76만 줄곧 찍어내던 소련 놈들도 슬슬 T-34/85나 Is-2 같은 신형전차들을 개발해낼 터.
그럼 기존의 4호 전차만으로는 우위를 점할 수 없고, 티거는 생산량이 부족해서 모든 전선을 커버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사이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신형전차 판터를 개발한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녀석에게는 구동계통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독일군이 이 녀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우선 병기국에서 조사해본 결과, 각하께서 지적하신 대로 정말 판터의 엔진과 구동계, 변속기에서 다수의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중 변속기의 설계 문제는 당장 해결하기 어렵습니다만, 엔진의 RPM을 제한하는 조치나 엔진의 오일 누수를 막는 정도는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마 그 정도만 해도 당장 전선에서 싸우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걸세.”
사실 이것도 완벽한 해결책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이 정도의 조치만으로도 전장에 투입되기도 전에 불이 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구식 전차의 차체에 고정식 전투실과 대구경 주포를 올린다는 구축전차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Pz.38(t)를 생산하고 있는 BMM사에서 관심을 보여왔습니다.”
“좋군. 병기국을 통해서 정식으로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곧바로 설계와 개발에 착수하라고 이르게.”
“알겠습니다.”
BMM이라면 회귀 전에도 단 6개월 만에 헤처의 개발과 양산을 마친 회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상세한 요구사항과 대략적인 설계 원리까지 전달한 이번에는 훨씬 더 빨리 양산이 이루어질 수 있을 터.
‘올해 6월에 헤처가 생산된다면··· 어쩌면 판터보다도 더 많은 활약을 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마지막입니다만, MKb42의 경우 현재 전용 탄의 문제만 제외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실전에 배치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총통 각하께서 워낙 강하게 반대하고 계시는 터라···.”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해결할 테니, 병기국에는 신형탄 개발을 계속하도록 지시하게.”
“알겠습니다, 각하.”
모든 보고를 마친 병참감은 경례를 한 뒤,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렇게 참모총장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온갖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참모총장도 정말 못 해먹을 짓이군.”
그러나 이렇게 쉬고 있을 틈은 없었다.
이제 곧, 내가 주관하는 첫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가 기다리는 회의실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
“다들 모여 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딱 정시에 맞춰 오셨소. 어서 들어오시오.”
내가 회의실로 들어가자, 다른 이들은 이미 모두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단상 앞에 선 나는 참석한 이들의 얼굴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부터 중부 집단군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 원수, 그리고 남부 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까지.
다들 내가 참모차관이던 시절부터 야전 사령관으로 내려갔을 때까지, 여러모로 인연이 닿았던 이들이었다.
나는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원수들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모두들 모이셨으니, 총통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는 현재 동부전선의 전황에 대한 브리핑부터 간략하게 전달한 뒤, 차후의 계획에 대한 논의로 넘어갔다.
“···해서 현재 아군은 북쪽의 레닌그라드부터 남쪽의 스탈린그라드와 카프카스까지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하하, 아주 좋소.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모스크바뿐이구려?”
그리고, 우리의 총통께서는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공세를 주문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사령관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의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략에 나설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
하지만 모두들 그저 침묵할 뿐, 그 누구도 감히 총통에게 모스크바 공략은 어렵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그런 회의실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총통 각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더 이상 공세에 나서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내 말에 지금까지 흐뭇하게 웃으며 지도를 살피던 히틀러는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파울루스 원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요? 방금 전 브리핑에서는 아군이 이겼다는 소식뿐이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공세가 어렵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지금까지 아군이 끊임없이 승리를 거둬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그 결과로 전선이 지나치게 길어져 버렸습니다.
현재 가장 북쪽에 있는 라도가 호수부터 남쪽의 그로즈니까지 아군 전선의 길이는 무려 2200km로, 이 드넓은 공간에 아군 병사들이 얇게 펼쳐져 있는 상황입니다.”
점령지가 너무 넓어져서 더 이상 공세에 나서지 못한다는 내 말에 히틀러는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그러나 잠시 뒤, 지도 위의 병력 배치를 면밀히 살펴본 총통은 이내 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설마 이런 식으로 아군의 공세가 막힐 줄이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소?”
“아닙니다. 지금은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파울루스 원수,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이대로 있어도 괜찮다니.”
나는 황당해하는 히틀러의 앞에 서서, 지도를 짚어가며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각하, 소련은 지금 아군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입니다..”
“소련이 포위를 당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현재 소련은 북쪽으로는 무르만스크가, 남쪽으로는 카프카스와 북해가 막혀 외부와의 교류가 모두 차단당한 상태입니다.”
“···오오, 그렇군! 극동은 우리의 동맹국, 일본이 막아주고 있으니!”
나는 일본이 군수품을 제외한 일반 물자는 통과시켜주고 있다는 말을 간신히 집어삼킨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군이 현재의 위치에서 버티기만 해도 놈들은 석유와 식량, 자원이 부족해서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 말에 히틀러는 비로소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상황이 참 재미있게 되었군. 저 거대한 나라가 포위를 당하다니!”
“예. 그러니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무리하게 공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놈들의 마지막 발악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오. 그럼, 소련놈들의 마지막 반격은 어디로 향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총통의 질문에 나는 말 없이 자리에 앉아있는 만슈타인 원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내 생각에는 놈들이 다른 곳으로 올 것 같단 말이지.’
과연 소련놈들은 어디로 올 것인가.
내 예상대로 카프카스로 올 것인가? 아니면 만슈타인의 예상대로 다른 곳을 노릴 것인가.
나는 내가 아는 역사와는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이 상황에,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어렵게 결론을 내렸다.
“···놈들은 분명 카프카스로 올 겁니다.”
< 57화. 1943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