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천왕성 작전 (4)
아직 여명조차 보이지 않는 이른 새벽.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한 남자가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
그 남자,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 중장은 눈앞에서 흩어져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천왕성 작전이라···.’
며칠 전, 그가 스타브카로부터 극비리에 받은 명령은 지극히 간단했다.
- 남서 전선군은 11월 19일 아침, 돈강을 도하해서 루마니아군을 밀어내고 치
르강과 칼라치까지 진격한다.
- 이 과정에서 로스토프 방면과 스탈린그라드를 차단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 다음으로, 루마니아 군을 섬멸하고 철도를 차단하는 것을 차선 목표로 한다.
‘어려울 것도 없는 작전이다.’
이 명령을 처음 받았을 때, 로코솝스키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현재 남서 전선군에 집결한 병력은 보병 35만에 전차 500대. 그에 반해 적은
약체 루마니아군 10만에 불과하다.
게다가 작전 목표인 치르강까지는 100km, 칼라치까지는 고작 80km만 진격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진짜 싸움은 독일놈들의 대응이 시작된 후겠지만··· 이 정도 전력이라
면 놈들도 어찌하기 어렵겠지.’
그렇게 로코솝스키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뒤에서 부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각하, 포격 준비가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수고했네. 예정대로 개시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오전 5시 30분.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
저 멀리서 스탈린의 오르간이 울려 퍼진다.
“벌써 이런 시간이군.”
그 소름 돋는 소리를 들으며, 로코솝스키는 천왕성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자
신의 사령부로 돌아갔다.
*****
위잉- 위잉- 위잉-
요란한 바람 소리와 함께 수십, 수백 개의 불줄기가 등 뒤에서 강 너머로 날
아간다.
“정말 장관이군. 이반, 그렇지 않나?”
“예, 전차장 동지. 이게 그··· 그분의···.”
“그래, 서기장 동지의 오르간이지.”
제26탱크군단 소속, 112번 T-34의 전차장 미하일 중위는 포탑의 해치에 걸터
앉은 채 강 너머의 벌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평원은 곧 불꽃과 폭발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대단합니다, 동지! 마치 낮처럼 밝아졌습니다!”
“그래, 이제 슬슬 해치 닫아라. 출발할 시간이다. 류보프! 시동 걸어!”
“예!”
미하일은 좁은 포수석에 몸을 구겨 넣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잠시 뒤, 강철의 밀실 안에 우렁찬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전 개시 1분 전!”
미하일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조준경 너머로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불쌍한 루마니아군의 참호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이제 곧 저들의 얇
은 방어선은 우리의 T-34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겨 나가리라.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었다.
“전차 전진!”
“전진!”
중대장의 신호와 함께, 수백 대의 T-34가 돈강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미
하일의 112번 T-34 전차도 그 뒤를 따라서 우렁찬 소리를 내며 달려나갔다.
“이제 곧 강이 보인다! 수심이 얕은 곳을 미리 찾아놨으니까 앞차만 따라가!”
“알겠습니다, 동지!”
그렇게 T-34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돈강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112번 전차가 맞닥뜨린 가장 큰 저항은 조종수 해치를 통해서 밀려 들어오는
강물뿐이었다.
“···이상하군. 강변에는 분명 루마니아놈들의 참호가 구축되어 있을 텐데.”
“뭐, 우리 전차를 보고 다들 지레 겁먹어서 도망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좋으련만.”
그렇게 미하일 중위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저 앞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반격이다!”
“사주를 경계해라!”
‘역시,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하일은 포탑 측면에 붙은 페리스코프를 통해서 주변을 확
인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루마니아군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격파된 전차에서 탈출한 승무원들이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이쪽으로 다
가와 무언가를 외쳤다. 그 모습에 미하일은 해치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대전차 지뢰입니다!”
“빌어먹을···.”
그렇게 기갑부대가 발이 묶여서 기다리는 동안, 공병 부대가 투입되어서 대전
차 지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8기병군단이 먼저 투입되어서 정찰에
나섰다.
그동안 지뢰 해체 작업만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미하일 중위는 저 멀리서
돌아오는 기마병에게 담배 한 개비를 쥐여주며 물어보았다.
“전방의 상황은 어떤가?”
“말도 마시오. 우리가 페라조프스키까지는 다녀왔는데 루마니아놈들은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소. 게다가 이놈들이 지뢰를 얼마나 많이 심어놨는지 우리
부대원들도 몇 명 낙마해서 크게 다쳤소.”
기마병의 말에, 미하일은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 아무래도 오늘 진격하는 건 글러 먹었군.”
그렇게 북쪽에서 남서 전선군의 공세가 지연되고 있을 무렵, 스탈린그라드 남
쪽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루마니아군을 얕잡아 본 소련군은 이들을 금방 돌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
지만, 루마니아군은 지난 10월동안 참호와 대전차 장애물을 몇 겹으로 준비해
둔 상태였다.
“사령관 동지, 루마니아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거셉니다. 전차 부대의 투입을
허락해주십시오.”
“아무래도 루마니아 촌놈들이 손님맞이를 제법 철저하게 준비했나 보군. 좋
네, 놈들에게 T-34의 맛을 보여주게.”
루마니아놈들이 아무리 저항해봤자 전차만 투입하면 속절없이 무너지리라. 그
렇게 생각한 소련군은 기갑부대를 아낌없이 투입했다.
그러나 위풍당당하게 진격한 T-34의 앞에는 예상 밖의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 독일군이다! 독일군 전차가 나타났다!”
그건 바로 파울루스가 배치해둔 4기갑군단과 48기갑군단이었다.
*****
“하하하, 저 녀석들. 깜짝 놀랐나 보군. 프란츠, 다음은 제일 왼쪽에 있는 놈
이다. 대충 조준해서 측면에 한발 쑤셔줘라.”
“알겠습니다!”
하버 상사의 말에 프란츠는 레버를 당겨서 포탑을 회전시켰다. 조용한 모터
소리와 함께 곧, 스코프 너머로 움직이는 T-34의 모습이 보였다.
놈들은 아마도 루마니아군의 진지를 궤도로 짓밟을 생각이었던 모양인지, 이
쪽으로 측면을 훤히 보여준 채 움직이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T-34의 측면은 40도에 45mm 경사 장갑. 이 거리라면 어디에 맞더라도 무조건
관통일 터였다.
‘그래도 첫 손님인데, 대충 할 수는 없지.’
프란츠는 포탑 하부의 넓직한 측면을 노렸다. 분명 교본에 적혀있던 대로라면
저기가 탄약고일 터였다.
“발사!”
쾅!
시원한 격발음과 함께, 포미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와 동
시에 저 앞에 서 있던 T-34는 엄청난 폭발에 휩싸여 포탑이 날아가 버렸다.
“···저 정도면 전원 즉사겠군. 발터, 탄종이 고폭탄이었나?”
“아닙니다. 제가 탄약고를 노렸습니다.”
“하하하, 잘했다. 그럼 다음 놈을 처리하자고.”
프란츠는 하버 상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른 T-34를 조준하고 있었다.
놈들은 여전히 프란츠네 104호 전차의 위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다들 이상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면 맞아야지.’
그렇게 104호 전차가 몇 번 불을 뿜자, 루마니아군 참호 앞에는 이제 고철이
되어버린 T-34 몇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수고했다, 프란츠.”
“저희 오늘 몇 대나 격파했습니까?”
“아마 4대일 거다. 아까 두 번째 전차를 격파했을 때부터 도망가기 시작하더군.”
“엔진룸에다가 꽂아준 게 2대였으니··· 그럼 4대가 맞겠군요.”
전투가 끝난 뒤 프란츠가 등받이에 기대 하버 상사와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보고 오지.”
하버 상사는 큐폴라의 해치를 열고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리고 밖에 있
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multumesc! multumesc!”
잠시 뒤, 하버는 라벨이 없는 와인을 한 병 가지고 전차장 석으로 내려왔다.
“상사님, 그게 웬 겁니까?”
“루마니아 놈들이 뭐라고 하면서 주더군. 뭐, 고맙다는 뜻 아니겠어?”
하버는 와인을 따서 한 모금 들이킨 뒤, 프란츠에게 내밀었다. 프란츠도 와인
병을 받아들고는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달콤한 포도향 뒤에 톡 쏘는 알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 제법 괜찮군요.”
비록 소련군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인 모양이었다.
*****
“사령관 동지, 보고입니다. 루마니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던 아군 기갑부대가
독일군의 기습에 당해서 퇴각했다고 합니다.”
“놈들의 규모는 얼마인가?”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보고를 취합해보면 최소 150여 대 이
상의 독일군 전차가 루마니아군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50대 이상이라면··· 최소 1개 기갑군단은 배치되었다는 거로군.”
대규모 독일군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는 참모장의 보고에, 스탈린그라드 남쪽의
공세를 맡은 57군 사령관 표도르 톨부힌 소장은 고민에 잠겼다.
‘스타브카의 명령대로라면 루마니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해서 칼라치까지 진격
해야겠지만, 독일군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면 얘기가 다르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명령대로라면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정
도로 막강한 전력이 기다리고 있는데 전선 돌파를 시도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일까.
‘아무래도 내가 판단할만한 일이 아닌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한 톨부힌 소장은 책상 위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 전화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부로 연결되는 직통 전화였다.
“톨부힌 소장. 갑자기 무슨 일이오?”
“예료멘코 사령관 동지, 아무래도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라···. 좋소, 말해보시오.”
“현재 아군의 공세가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혔습니다. 아무래도 놈들이
루마니아군을 지원하고 나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예료멘코의 물음에 톨부힌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공세의 방향을 바꾸거나 공세 목표를 축소하는 것이···.”
“톨부힌 소장.”
“예, 동지.”
예료멘코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기장 동지께서는 이번 작전과 스탈린그라드의 탈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전화는 끝났다.
톨부힌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참모장에게 곧바로 명령을 내
렸다.
“제기랄··· 현재 아군이 보유한 모든 기갑전력을 집결시키게. 무슨 수를 써서
라도 놈들의 방어선을 뚫어내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