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바르바로사 작전 (3)
“이제 슬슬 레닌그라드를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나?”
“레닌그라드를··· 말입니까?”
1941년 9월 20일, 현재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부터 스몰렌스크, 폴타바, 크림반
도로 이어지는 동경 33도 선까지 도달해 있었다.
9월 20일 바르바로사.png
비록 원래의 목표였던 A-A라인(아르한겔스크부터 아스트라한까지)을 점령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승리는 이제 거의 기정사실
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모스크바에 깃발을 꽂기만 한다면 소련은 붕괴
하고 전쟁은 끝나리라.
그렇기에 할더는 총통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기회를 내버려 두고 다 잡은 물고기나 다름없는 레닌그라드를
공략한단 말인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할더에게 히틀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할더,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한 지 이미 12주가 지났
네. 그리고 파울루스 장군이 예견했던 대로 우리는 아직도 레닌그라드, 모스
크바, 하리코프 중 한 군데도 점령하지 못했지.
그러니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토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제서야 할더는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만약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12주 안에 우리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모스크
바, 하리코프 중 단 하나라도 점령한다면, 제가 사임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때까지도 중간 목표를 점령하지조차 못한 상태라면, 그때는 제
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 분명히 파울루스가 그런 말을 했었지.
그렇다면 저 녀석이 총통에게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은 것인가?
그래서 총통이 갑자기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파울루스, 이 멍청한 놈. 승리라는 대의가 바로 눈앞에 있건만, 전공에 눈이
멀어 끝까지 나를 방해할 작정이냐.’
할더는 히틀러의 뒤에 서 있는 파울루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희가 중간 목표지점을 단 한 군데조차도 점령하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합니
다.”
그래, 분명 파울루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작전 목표에 비해서 일정이 지나치게 촉박했던 것도, 수송과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그리고 소련군의 동원 능력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
던 것도.
모두 다 파울루스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들은 그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승승장구해왔지 않나.
그렇기에 할더는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희들이 이루어낸 승리를 보십시오. 다소 일정이 틀어졌을
지언정, 저희는 이미 소련을 쓰러뜨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총통 각하, 저희
는 레닌그라드가 아닌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의실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자리에 앉은 지휘관들은 할더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는커녕 모두 심각한 표정
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더 장군, 이건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만한 문제가 아닌 것 같소만.”
바로 그때, 누군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는 바로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였다.
“룬트슈테트 원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확실히 장군의 말대로 우리가 놀라운 승리를 거둬왔던 것은 사실이오. 하지
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소.”
“···어째서입니까?”
“왜냐하면 진격을 거듭할수록 아군의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오.
지금껏 우리는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소. 그 과정에서 병사들은 지쳤고 보
급은 바닥났으며, 장비는 손상되었지. 그 결과, 날이 갈수록 진격 속도가 떨
어지고 있지 않소?”
“하지만 지금의 소련군은 사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비도, 병력도 부족한 상태로 병사들을 전선으로 밀어 넣으라는 거
요? 그러고도 지금까지처럼 승리하기를 바라시오?”
할더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 전투를 거듭할수록 부대의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상태가 심각한 것은 적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저런 놈들과도 싸울
수 없을 정도로 보급의 문제가 심각하단 말인가?
그러나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야전사령관들의 입장은 달랐다.
적이 아무리 약하다고 한들, 그 수가 수십만에 달하면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아군의 상황은 빈말로도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처럼 쉽게 이길 것이라는 할더의 말은 흘려듣기 어려운 것
이었다.
둘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려 하자, 히틀러가 화제를 돌렸다.
“좋소, 그럼 일단 보급의 문제는 차치하고 보크 원수의 의견부터 한번 들어봅
시다.
보크 원수, 현재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공략이 가능한 상태인가?”
“물론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현재로서는 불안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
실입니다. 만약 모스크바를 주공으로 삼으실 생각이라면, 확실한 승리를 위해
병력을 더 증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증원이라면 얼마나 필요한가?”
“제4기갑집단을 임시로 중부집단군에 배속시켜주시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트 원수가 반발하고
나섰다.
“각하, 만약 제4기갑집단을 차출해간다면 레닌그라드 공략은 사실상 불가능합
니다.”
“레닌그라드의 공략은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지 않소? 이미 포위망 안에 갇혔
으니 보병으로 천천히 소탕해 들어가면 될 텐데 굳이 기갑 부대가 필요하단
말이오?”
“현재 남쪽과 북쪽으로 포위망을 형성한 상태이긴 하지만, 소련놈들은 라도가
호수를 통해서 계속 보급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레닌그라드를 완벽하게 포
위하려면 우리도 진격해야 합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회의는 결국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모두의 시
선은 결국 한 사람, 총통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히틀러는 내심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이거다.
바로 이거야말로 그가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누가 상
황을 정리하겠는가? 그건 바로 총통인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랍군. 12주 차에 이런 상황에 빠지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
측할 줄이야.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유능한 놈일지도 모르겠어.’
히틀러는 이 상황을 정확히 예견한 그 친구, 파울루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
렇게 된 이상, 그의 작전을 한번 믿어봐도 좋겠지.
총통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즐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에는 파울루스 장군의 의견도 한번 들어보고 싶군. 장군이야말로
이 모든 사태를 미리 예견한 사람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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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번에는 파울루스 장군의 의견도 한번 들어보고 싶군. 장군이야말로
이 모든 사태를 미리 예견한 사람이지 않나.”
“알겠습니다.”
총통의 부름에 나는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지난번 총통 회의 때처럼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날, 내 발언을 무시하고 깎아내리던 이들이 지금은 기대와 긴장이 섞인 눈
으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꼴이 우습게 되었군.’
물론 저들이 기다리는 것은 내 말이 아니다. 내 입을 통해서 나올 총통의 뜻
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또한 바라던 바다.
총통을 등에 업어서라도 내 의지를 관철시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이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그들을 향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레닌그라드를 가장 먼저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모두의 희비가 엇갈렸다.
레프 원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보크 원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할더는 여전히 증오와 불신에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서인가?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킨다 한들 소련을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보크 원수의 지적은 타당했다.
레닌그라드가 러시아의 정신적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이긴 하지만,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모스크바나 경제적 가치가 높은 우크라이나에 비하면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맞습니다. 저곳을 함락시킨다 한들 소련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반대로?”
“예. 반대로 그곳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군. 보급인가.”
“맞습니다.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발트해를 통해 대량의 물자를 최전방까지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중부집단군도, 남부집단군도 공세를 계속
지속할 새로운 추진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 말에 모두들 지도를 들여다보며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선뜻 동의하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결국, 내 주장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핵심인 ‘단기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전제
한 것이었으니까.
“파울루스 장군. 자네는 아직도 이 전쟁이 장기전, 소모전의 양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하지만 할더 참모총장의 주장대로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이 전쟁을 끝낼 수 있
다면 그쪽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이군.’
결국,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모스크바를 점령해서 올해 안에 전쟁을 끝낸
다는 저 환상을 깨부숴야 했다.
하지만 3개 기갑집단을 동원하고도 모스크바 공방전이 아군의 참패로 끝난다
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내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총통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동시에 공략해보는 것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