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92화 (19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2화

    용의자들(2)

    이시카니 섬.

    요나르 섬으로부터 북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작은 섬이었다.

    해상 선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행정 중심지인 요나르 섬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섬의 크기에 비해 거주민의 밀도가 높은 지역이기도 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나르시안의 첫째 딸이자, 가장 짙은 피를 계승받은 상속 신분. 카르메네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게 내가 흡혈귀라는 족속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야.”

    로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역겹다는 듯 혼자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자코 있던 스칼렛도 별다른 이견이 없는지 커다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을 뿐이다.

    이시카니 섬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지면이 온통 진흙탕처럼 질퍽거릴 만큼 무수한 선혈이 흘렀다. 마을 곳곳에 설치된 단두대가 쉴 새 없이 절삭음을 울리며, 포박된 거주민들을 목을 절단하고 있었다.

    오열하는 소리와 비명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지만, 이미 섬을 점거한 흡혈귀들은 숙련된 도축업자처럼 무덤덤하게 작업을 계속했다.

    목이 잘린 시체에서 피를 뽑아냈고, 마을 전체를 뒤덮을 만큼 무성하게 늘어난 혈루목에 피를 뿌려 ‘테네브레의 눈물’을 정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수천, 수만의 목숨이 덧없이 죽게 된 것이다. 고작 몇 마리의 흡혈귀가 한 모금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말이다.

    애초에 흡혈귀는 ‘마족’이라던가 ‘인간’과 동질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종이다. 흡혈귀의 동족은 오로지 흡혈귀 뿐이다.

    흡혈귀 외의 종족은 그저 가축이라던가 벌레에 가까운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냐고 묻는다면, 흡혈귀의 입장에선 돌려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이었다.

    벌레를 비료로 만들어서 나무를 키우는데 무슨 죄책감이 있단 말인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탓인가.’

    혈루목의 피비린내가 역하게 코끝을 찔러왔다. 스칼렛은 붉게 변한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인식의 변화에 대한 단상을 떠올렸다.

    ‘그게 아니라면 주군과 함께 했던 시간이 굳어버린 인식을 변하게 만든 것인가.’

    만약 스칼렛이 ‘붉은 달’이라고 불렸던 시절이었다면. 이러한 풍경에 그 무엇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벌레와 가축에게 품을 동정심은 없다.

    고귀하고 고결한 존재는 오로지 원죄의 아버지 나르시안의 피를 계승한 상속 신분뿐이다.

    그 외의 존재는 자매들의 고귀한 삶을 영위시키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스칼렛 역시 상속 신분의 일원으로써 스스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자각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시금 이렇게 흡혈귀 본연의 모습과 재회하기 되니, 어째선지 가슴 안쪽이 술렁여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흡혈귀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내 앞에서 무슨 말을 하든 관여치는 않겠네.”

    스칼렛은 로아를 향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첫째 딸 앞에서 경솔한 발언은 삼가하게. 카르메네르는 그다지 자비로운 존재가 아닐세.”

    “알고 있어.”

    로아도 그 정도의 상식은 있었다.

    지금은 힘이 쇠락했다고 하나, 카르메네르가 나르시안의 첫째 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라면 지옥의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수 있는 흡혈귀가 수만, 수십만에 달했다. 그러니 이번엔 최소한 카르메네르의 눈에 찍히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아, 대모님. 말씀드리는 게 늦었습니다만.”

    앞장 서서 안내하고 있던 바르베라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서도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예전 만큼 성격이 불 같지는 않으시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상이 안 되는군. 이 세상 전부를 적으로 돌려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여자였는데.”

    바르베라는 쿡쿡 웃으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요즘은 언니가 조금만 모질게 말해도 곧잘 눈물을 보이실 만큼 약해지셨죠.”

    “네비올로가 이제는 말대꾸도 한단 말인가? 꽤나 얌전한 아이였는데…….”

    “대모님께는 저희가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로 보일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니도 저도 이제 어엿한 진조의 일원입니다.”

    “네비올로도 와 있는 겐가?”

    “예, 언니는 먼저 도착해 어머님과 함께 있을 겁니다.”

    준비된 회장에 가까워지자 인빅투스의 문양을 목에 건 흡혈귀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한 마리만 나타나도 국가적 재난 상황이  걸릴 만큼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흡혈귀들이다.

    그런 인빅투스의 흡혈귀가 바르베라를 제외하고도 넷이나 더 있었다.

    인빅투스의 프리스커스들은 스칼렛을 목격한 것과 거의 동시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현존하시는 상속자의 존안을 뵙습니다.”

    “영겁의 밤을 걷는 일족에 영광과 번영을.”

    “……붉은 달 아닙니까? 진짜 붉은 달입니까?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조용히 해라, 멍청아. 입 닫고 가만히 있어.”

    스칼렛의 등장과 함께 회장의 구석까지 작게 웅성이는 소리가 울렸다. 이곳에 입장을 허락받은 흡혈귀들이라면 상당한 고위계이거나, 상속 신분의 직계 자손에 해당하는 고혈종일 테지만.

    그런 흡혈귀들 사이에서도 ‘붉은 달의 메를로’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존재였다.

    나르시안의 피를 이어받은 자매들 중 유일하게 죽음에서 자유로운 존재. 불사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불사 그 자체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전설적인 흡혈귀다.

    실제로 메를로가 긴 은거 생활을 끝마치고 군단을 집결시켰을 때는 카르메네르조차도 몸을 사려야 했을 정도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의 고귀하신 주인이시여.”

    붉은빛을 살짝 머금은 흑발.

    맹수의 눈을 연상시키듯 또렷한 안광이 새겨진 붉은 눈동자. 바르베라의 외견과 닮은꼴인 여성이 앞으로 나서서 스칼렛을 맞이했다.

    스칼렛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네비올로는 무릎을 꿇으며 정중하게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오랜만이네, 네비올로. 깜짝 놀랄만큼 커버렸어. 그 왈가닥 아가씨가 이렇게나 성숙해지다니 시간의 흐름이란 늘 새삼스럽게 느껴지는구나.”

    “대모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우십니다. 시간의 흐름이 무색할 만큼 말이죠.”

    네비올로는 고대의 예술 작품을 알현한 듯 황홀한 눈빛으로 스칼렛을 올려다봤다.

    메를로는 나르시안의 딸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이 난 흡혈귀다. 거기에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기품과 고혹적인 눈빛.

    게다가 아직까지도 유대 관계를 맺지 않은 유일한 상속 신분이 아니던가? 흡혈귀라면 스칼렛에게 욕정을 품어도 이상할 게 무엇 하나 없었다.

    나르시안의 종손에 해당하는 네비올로 조차도 욕심을 내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런 네비올로의 눈동자에 욕망과 아쉬움이 기묘하게 뒤섞였다.

    “어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뒤를 따라오려던 로아의 앞을 네비올로가 가로막았다.

    “외부인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비켜. 송곳니 부러져서 평생 죽 떠먹으면서 살고 싶지 않으면.”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듣지 못한다면, 여기까지 따라나선 의미가 없었다.

    로아도 물러날 기색 없이 으르렁거리자, 네비올로가 오른쪽 손을 들려고 했지만.

    턱.

    네비올로의 손목을 바르베라가 붙잡으며 다시 내렸다. 그리고는 그 찰나의 순간 움직이려 했던 흡혈귀들을 향해 경고의 시선을 흘렸다.

    네비올로가 아무리 나르시안의 3대 종손이라고 해도. 인빅투스의 총정관 바르베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네비올로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지금 뭐하냐는 눈빛으로 바르베라를 노려봤다.

    “내 손님이야. 함께 입장할 권리 정도는 있어.”

    “이런 외종이 무슨.”

    네비올로가 로아를 흘깃 노려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루스날인가?”

    “그래. 테르미어의 직계야. 아무리 언니라도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네비올로는 바르베라와 로아를 번갈아 노려본 후 작게 한숨을 내쉬며 포기한 듯 뒤로 돌았다.

    “혈족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두 번 다시 내 몸에 손대지 마.”

    “알았어.”

    그리고는 이내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내부의 풍경이 시야에 펼쳐졌다.

    나르시안의 첫째 딸 카르메네르가 기다리고 있는 연회장이었다.

    * * *

    “부활 의식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칼베라 님. 이제 남은 건…….”

    “그래, 마지막으로 왕녀 전하의 그릇으로 삼을 육체가 필요하겠군.”

    칼베라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수십 년에 걸친 노력에 대한 보상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거대한 유리관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점액질의 생물체를 지긋이 응시하며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왕녀 전하께서는 초극에 도전하기 위해 흡혈귀의 위계를 빌리셨지.”

    피르에나 왕녀는 나르시안의 성배를 이용해 초극의 자격을 얻었던 것이다.

    물론 그 결과 초극에 실패하여 끔찍한 말로를 맞이했지만 말이다. 유리관에 넣어 가까스로 생존시키고 있는 저 점액질의 물체가 바로 피르에나 왕녀의 유일한 잔재였다.

    어쨌거나 피르에나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그릇이 될 육신이 필요했다.

    그 그릇이란 피르에나가 마지막에 도달했던 위계에 근접한 생물체.

    즉 ‘상속 신분’이라고 불리는 고혈종의 육신이 필요한 것이다.

    “루칸다 그 배신자 놈이 왕녀 전하를 시해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어도 됐겠지만 말이야.”

    루칸다는 피르에나 왕녀가 초극에 실패했다고 멋대로 판단하여, 그녀의 육체를 파괴했다.

    하지만 피르에나는 이미 초극의 일부를 이뤄낸 상태였고, 끔찍한 형태가 되긴 했지만 유기 생명체로써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었다.

    초인에게 생과 사는 그 경계가 무색해진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유리관 안의 점액질은 지금도 활발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칼베라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피르에나 왕녀는 초극에 성공했다. 초극에 성공하였지만, 강림이 불완전했던 탓에 형태가 붕괴된 것에 불과하다.

    칼베라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루칸다는 그런 피르에나 왕녀를 난도질해 죽이고 도망친 배신자였고 말이다.

    칼베라는 유리관에 손을 뻗었고, 손끝으로 그 매끈한 표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왕녀 전하. 당신이 꿈을 꾸듯 들려주었던 만민의 낙원이 곧 도래할 것이라 믿습니다.”

    피르에나 왕녀의 순진무구했던 미소와 흔들림 없던 올곧은 눈빛.

    백성들의 옳음과 강함을 믿었기에, 그녀는 스스로 검을 들고 스스로 사지로 몸을 던졌다.

    낙원은.

    존재 이유를 신에게 양도하지 않는, 계몽된 인민들의 손에 의해 건국될 것이며. 왕녀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낙원이 세워질 기반을 닦으려 했다.

    “자유 의지를 지닌 인민들의 삶에서 그 어떤 편견과 혐오도 없을 것이며, 아이들은 주권에 따르는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계몽된 국민으로 자라날 것이라 믿습니다.”

    그 낙원에선 왕도 귀족도 천민도 노예도 없을 것이며, 모두가 평등하게 나라의 주인일 것이며. 모두가 주권의 책임을 짊어질 것이며. 마족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비롯되는 혐오와 차별도 없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라 뜨거운 눈물이 흐를 만큼 아름다운 낙원의 모습이었다.

    칼베라는 긴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해 있었다. 피르에나 왕녀가 부활한다면 그녀가 약속했던 낙원을 지상에서 구현해낼 것이다.

    마지막 단계인 그릇 준비도 밑작업이 끝난 상황이다. 이곳 요나르 섬의 북쪽에 위치한 ‘이시카니 섬’에 심어둔 내통자가 있었다.

    피르에나 왕녀의 그릇이 될 상속 신분을 구해오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콰앙!

    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트롤 한 마리가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카, 칼베라 님! 침입자, 침입자입니다!”

    물론.

    찬물을 끼얹으려는 쥐새끼 한두 마리 정도는 있을 것이다.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클라이막스에는 아주 약간의 긴장감도 필요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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