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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93화 (19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3화

    용의자들(3)

    “망할…… 나는 이런 거 싫어. 이런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지금의 발언은 의외로군. 언제부터였나? 계집애처럼 징징거리는 법을 배운 게 말이야.”

    “글쎄. 고블린 형씨가 앉아서 오줌을 싸는 법을 터득한 것보단 최근일 텐데.”

    백주월이 혀를 차며 대답하자, 루칸다가 킬킬 웃으며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언제 그런 은밀한 모습을 훔쳐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그런 시시한 사내도 멀쩡히 살아 숨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단 뜻이겠지.”

    “다행이네. 저 녀석들은 그런 흉측한 꼴을 안 보고 죽어서.”

    “동감이다.’

    뒤를 돌아보자.

    온통 시체로 가득찬 복도가 끔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흐 만테아의 거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성에 발을 들인지 고작 10분 만에 이뤄낸 참극이었다.

    아무리 정교하게 훈련받은 트롤 부대라고 할지라도, 루칸다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루칸다는 이미 흑요석 유물을 다섯 개나 소유한 루아 카날다의 그릇이다. 그 전투력은 일전에 포 힐케인 섬에서 만났던 류시혁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이미 외인 군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솔직히 백주월도 내심 감탄할 정도였다. 평범한 고블린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말도 안 되는 근접전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으니까.

    ‘누자베스 녀석이 괜히 루칸다를 데려왔어야 한다고 매일 같이 노래를 부른 게 아니군.’

    루칸다의 이름은 누자베스의 입을 통해 몇 번인가 들었다. 곤란한 일만 생기면 루칸다를 데려왔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나?

    누자베스의 휘하에 있는 챔피언 중 루칸다만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챔피언도 없었다. 루칸다는 일종의 만능열쇠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니까, 누자베스가 지니고 있는 루칸다에 대한 인식은 단 하나뿐이다. 그 무엇을 원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명검이다.

    단순히 싸움질을 잘한다거나, 못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여유와 노련함이 가벼운 손짓과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 어떤 격변이 일어나도 말이다.

    루칸다는 변함없이 권태로운 눈빛으로 여유롭게 하품을 하며, 당연히 생각해 놓았던 다음 수를 담담하게 이야기해 줄 것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상정하지 못한 상황은 존재할지라도.

    대응하지 못할 상황은 존재치 않는다.

    이것이 루칸다를 가장 적절하게 형언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이 작전이 뭐라고? 잠입이라며? 내가 잠입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나, 정문을 돌파해서 다 때려죽이는 걸 잠입이라고 하는 줄은 몰랐어.”

    “살아 있는 목격자가 없으면 잠입이지.”

    “궤변을 듣고 싶다고는 안 했잖아.”

    “뭐, 그렇게 투덜댈 필요는 없다. 녀석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이니까.”

    정문을 통해 루칸다와 백주월이 당당하게 입장한 후 깽판이란 깽판은 다 부리고 있는 상황.

    이미 둘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던 트롤 전사 일개 중대가 전멸했다. 루칸다는 말할 것도 없었고, 백주월 역시 고유 권능인 ‘에임페리얼 콜’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는 해도 용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나이프와 권총 한 자루면 트롤 수백 마리쯤은 한 손으로 엉덩이를 긁으면서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이 본거지에 ‘가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말이다.

    나흐 만테아 놈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총력을 다해 사수하거나, 빼앗기기 전에 밖으로 빼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고성에서 이어지는 모든 지하 수로와 지상의 통로는 루칸다에 의해 파악된 상태.

    만약 무언가를 들고 달아나려는 녀석이 포착된다면 바로 누자베스가 신호해 올 것이다.

    신경이 부분적으로 연결된 고양이를 경유하여 마인드 모드가 발동되어 있었으니까. 하이브 마인드의 감시망에서 완벽하게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존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깽판이나 쳐보지. 녀석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한 후 다음…….”

    휘익!

    루칸다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날카로운 참격의 궤적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타닷!

    그리고 길게 늘어진 궤적이 지면에 착지한 후. 이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라, 이 무스벤노의 암습을 회피하다니. 칼베라 님의 말대로 어줍잖은 떠돌이 고블린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천과 가죽으로 이뤄진 가벼운 경갑을 걸친 리자드맨이 양손에 짤막한 곡검을 역수로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상체를 극단적으로 낮춰 지면에 거의 붙였고, 곡검을 역수로 쥐고는 팔꿈치를 바닥에 붙여 중심을 잡은 자세다.

    마치 도마뱀이라던가, 사마귀 같은 모습을 상기시키는 자세였다.

    “…….”

    “…….”

    물론 팔꿈치와 발끝으로 엎드린 자세란.

    엉덩이만 번쩍 들려서 상당히 꼴사나워 보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백주월은 저게 도대체 무슨 체술인지는 몰라도, 저런 준비 자세는 죽어도 하기 싫다고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린 순간.

    리자드맨 어쌔신 무스벤노가 입을 열었다.

    “크카캇! 오금이 저려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군! 방금 전의 기습을 허용했다면 네놈의 머리는 정확하게 양단되었을 것이다.”

    “그건 당연한 사실이고 애초에 맞지 않으…….”

    루칸다가 일반론에 대하여 말하려 했지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무스벤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몸은 무스벤노! 나흐 만테아의 두령 칼베라 님의 신임을 사고 있는 최정예의 살수라고 할 수 있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휘리릭, 휘릭!

    무스벤노가 곡검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긴 혀를 낼름거렸다. 꽤나 살벌한 파공음이 울렸고, 그 움직임 역시 현란했지만.

    “그래, 이 무스벤노와 조우했다는 것은. 주제도 모르고 나흐 만테아의 주둔지를 짓밟은 네놈들의 최후를 의미한다.”

    루칸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주월은 뭔가 굉장히 기괴한 걸 목격한 사람처럼 무스벤노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크카카-캇! 자, 누구냐! 누가 먼저 이 무스벤노의 가변도에 절삭되…… 칵!”

    타앙!

    짧은 총성이 울렸고, 무스벤노가 총탄에 꿰뚫린 어깨를 꽉 부여잡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백주월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권총의 총구를 거두며 무스벤노를 향해 말했다.

    “왜 안 피했냐? 뒤지고 싶어서 일부러 맞았나?”

    “비, 비겁…… 비겁한 놈! 경고도 없이…… 공격하다니!”

    탕, 탕! 타앙!

    백주월이 무스벤노의 머리를 향해 몇 번인가 더 방아쇠를 당긴 후 회전식 탄창을 열어 탄피를 쏟아냈다.

    무스벤노가 축 늘어졌고, 백주월은 탄환을 장전하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종족을 불문하고 병신 새끼들은 존재하는 법이구만.”

    “타당한 견해다.”

    루칸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앞으로 나섰다. 시답잖은 잡졸을 상대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 * *

    [누자베스 : 좋아, 제군들. 신경망 연결 양호합니까? 이런 소수 정예 작전은 시야가 좁아서 불편하네.]

    [루칸다 : 오랜만입니다, 각하. 아니 이제는 관현전하라 불러야겠군요.]

    [백주월 : 언제 그렇게 출세했어? 어울리지 않게도 귀족이었네.]

    [누자베스 : 주월아, 너는 형이 여기에 끌려와서 얼마나 부랄 빠지게 고생했는지 모르잖아. 뭐…… 실제로 몇 번 부랄이 빠지긴 했지, 하핫!]

    머리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누자베스의 목소리에 백주월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이브 마인드의 휘하에 들어오며 신경망이 연결된 덕분에 여타 다른 챔피언들처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하이브 마인드와 병력이 이렇게 물리적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면 마인드 모드로 지휘하는 건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하이브 마인드는 말이다.

    하지만 흡혈귀의 혈술을 구사할 수 있는 누자베스는 하이브 마인드의 능력을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누자베스와 신경이 연결된 고양이가 라우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주월 : 그래서 그 망할 부품은 어디서 구해야 되는데? 고성 바깥의 움직임은?]

    [누자베스 : 아직까진 쥐새끼처럼 튀어나온 놈은 안 보이네. 불이라도 질러봐라. 그럼 가장 값나가는 것부터 냉큼 들고 뛰쳐나오겠지.]

    [루칸다 : 각하께 말씀드리는 게 늦었습니다만, 이곳에 칼베라가 있을 확률이 낮지 않습니다.]

    [누자베스 : 칼베라? 아아! 전에 얘기했었지. 그래서 셋이서 해본 적도 있다고 했나?]

    [루칸다 : 없습니다.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자베스 : 왜?]

    [루칸다 :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곤혹스럽군요. 어쨌든 대수림의 여왕 유리아가 칼베라의 목을 원하고 있습니다. 시체를 회수하지 못하는 방법은 적절치 않습니다.]

    [누자베스 : 염병할 년…… 아주 텃새란 텃새는 다 부리는구만. 대기업의 횡포에 우리 같은 하꼬 등이 터지는 거야. 유리아는 생긴 게 귀여워서 다행이야. 귀엽지 않았으면 이미 내 손에 뒤졌을 테니까.]

    [백주월 : 못생긴 엘프는 상상하기 힘든데. 그래서 못생겼으면 뭐 어쩔 건데?]

    [누자베스 : 주월아 당연한 걸 묻지 마라. 그 망할 년이 얼굴까지 빻았다? 그러면 당연히 형아의 무자비한 파운딩으로 강냉이 모조리 아작냈을 테니까.]

    [백주월 : 오, 여자도 때릴 수 있어?]

    [누자베스 : 당연하지. 나는 매우 진지한 페미니스트니까. 남녀를 불문하고 피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백주월 : 예쁜 여자는?]

    [누자베스 : 여자를 때리다니 쓰레기 새끼냐? 미녀에게 해도 되는 주먹질이란 오로지 피스…… 아니, 어쨌든 부품부터 찾아보고 없으면 바로 다음 목표로 넘어가자.]

    누자베스가 지정한 구역을 향해 루칸다와 백주월이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잿빛털의 고양이는 고성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에 자리를 잡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제 가용 전투 병력은 루칸다와 백주월뿐이라.’

    나머지는 시야 확보를 위해 조잡하게 편성한 하급 마물 몇 놈을 주변에 풀어놨을 뿐이다.

    지금까지는 나흐 만테아의 거점에서 어려움 없이 안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나저나 위치가 썩 좋지는 않은데.’

    현재 나흐 만테아의 거점이 자리잡은 요나르 섬의 북쪽에는 ‘이시카니 섬’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이시카니 섬에는 현재 최강의 흡혈귀 집단 ‘인빅투스’가 채류하고 있는 중이라는 정보도 이미 입수한 상태.

    아무리 나흐 만테아라고 해도 인빅투스의 주변을 얼쩡거려서 콩고물을 얻어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괜히 눈에 띄었다가 한 대 얻어 맞는 일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는 무슨 꿍꿍이가 있을까, 칼베라.’

    누자베스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시신경이 연결되어 감시되고 있던 지하 통로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누자베스 : 루칸다, 사냥 시간이다.]

    [루칸다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누자베스 : 루칸다는 표시된 좌표로 향하여 추적 후 목표물 탈취. 백주월은 엄호를 향해 뒤를 쫓는 추가 병력을 차단한다.]

    누자베스는 빠르게 의식을 전환시켰다.

    장난기가 빠진 누자베스의 목소리가 루칸다와 백주월에게 동시에 전달되었다.

    [누자베스 : 아릿카사는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줘라.]

    중부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전쟁 군주 누자베스의 이름이 마르하바 서도에 전파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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