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91화 (19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1화

    용의자들(1)

    “시시한 싸움만큼 삶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도 없지.”

    루칸다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태세를 갖춘 트롤 전사들을 응시했다. 남은 머릿수는 넷. 동네에서 깡패짓이나 하는 양아치 놈들보단 훈련이 되어 있는 수준이다.

    백주월은 도와줄 생각은 없는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1:4의 상황.

    게다가 트롤과 고블린은 신체 능력의 차이가 명확했다. 아무리 루칸다가 수백, 수천의 격전과 난전을 헤쳐 온 노련한 전사라고 해도 말이다.

    고블린이라는 종족이 지닌 육체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트롤과 고블린은 근력, 민첩성, 하물며 가죽의 두께까지 차이가 난다. 선천적인 능력이 명확하며, 머릿수까지 밀린다?

    만약 이 싸움에 돈을 건다면 백이면 백 트롤 전사 4마리에게 판돈이 모조리 걸릴 것이다.

    하지만 루칸다는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더군다나 긴장한 기색도 전무했다.

    오히려 시시해서 하품이 나올 것 같다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백주월의 눈에는 평범한 고블린에 불과하다. 그것도 한쪽 눈도 없는 늙은 고블린이다.

    이 상황이 의아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백주월과 달리 누자베스는 이런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자베스는 루칸다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칼베라가 재미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으니 서둘러야겠군. 한 번에 덤벼주겠나?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전우들과 다정하게 명계로 보내주지.”

    3인의 윤왕.

    슬레뷔네의 맹약에 의하여 영원한 윤회를 약속받은 배도자들. 스텔라의 용서를 모조리 거절하고, 머지 않아 도래할 최초의 밤을 군림하고자 했던 인간 군주들이다.

    그리고 루칸다는 3인의 윤왕 중 가장 잔인하고 치명적이라 평가되는 ‘루아 카날다’의 그릇이다.

    최초의 소녀 미아 나크랏을 목을 베어 처형한 것도.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의 군세를 세 번이나 물린 것도.

    현왕을 시해하고, 스텔라의 전령 다섯을 다시 천계로 돌려보낸 자 역시 모두 ‘루아 카날다’였다.

    루칸다는 윤회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태. 완성된 윤왕에 비하자면 그 능력은 새발의 피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윤왕의 능력을 새 발의 피 만큼이라도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트롤 전사들이 재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후 일제히 루칸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칸다는 가슴팍을 향해 날아드는 창날을 똑바로 직시하며, 담배꽁초를 손끝으로 튕겼다.

    손에서 벗어난 담배꽁초가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고.

    치익!

    정확하게 트롤 전사의 눈에 적중했다!

    “캬앗!”

    눈을 담뱃불로 지져진 트롤 전사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주춤거린 순간.

    콰앙!

    루칸다의 거친 발길질에 테이블이 빙글 돌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오우야.”

    백주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콱!

    창날이 허공에 뜬 테이블을 꿰뚫었고, 창에 꿰뚫린 테이블을 발판 삼아 루칸다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퍼억!

    낙하와 동시에 발꿈치로 트롤 전사의 정수리를 찍어버렸고, 화산의 분화구처럼 뇌수와 혈액이 폭발해 치솟았다.

    휘릭!

    서걱!

    은빛의 궤적이 옆에 서있던 트롤 전사의 목을 베어냈다. 정확하게 동맥이 절단된 목덜미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크, 크르윽!”

    지혈을 해보려는 듯 목을 움켜쥐며 트롤 전사가 발버둥을 쳤지만, 이내 풀썩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쓰러진 채 바들바들 떨던 트롤 전사의 곁으로 절단된 머리 두 개가 툭 떨어졌다.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군사로써 사용하기 위해 훈련된 트롤 전사 4마리가 당한 것이다.

    루칸다의 움직임은 가벼운 동시에 경쾌했고, 경쾌한 만큼이나 군더더기가 없었다.

    루칸다는 가볍게 마룻바닥에 착지한 후 트롤 전사들의 시체를 슬쩍 돌아봤고, 모두 죽었다는 걸 확인한 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냐아앙.”

    잿빛의 고양이가 백주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자, 백주월이 잠시 허리를 숙여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목덜미를 긁어주며 루칸다를 향해 말을 걸었다.

    “대단하네, 고블린 형씨. 그런 소름돋는 재주는 어디 학원에서 배운 거야?”

    “원한다면 개인 과외로 가르쳐 주지. 각하보다는 배우는 게 빨라 보이는군.”

    “냐아아…….”

    물론 루칸다가 누구를 가르쳐도 누자베스보다는 습득이 빠를테니까. 솔직히 말해 누자베스의 육탄전 능력이라던가, 재능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루칸다와 스칼렛이 죽을 고생하며 가르친 결과, 자기 몸 하나 정도는 가까스로 지키며 줄행랑을 칠 정도는 됐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참사가 벌어진 술집에 계속 우두커니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루칸다는 대충 청소비 명목으로 금화 몇 닢을 꺼내 카운터 쪽으로 내던진 후 백주월에게 다가섰다.

    “각하를 데리고 다니는 걸 보니 심부름 중인 모양이군. 천천히 사정을 들어보지.”

    루칸다는 그렇게 말하며 백주월의 품에 안겨 있는 고양이의 뒷덜미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각하께 보고드릴 사안도 있습니다.”

    “냐, 냐아! 냐아앙…….”

    “그렇군요. 저도 저녁 식사는 나비탕을 먹고 싶었던 참입니다.”

    “냐-아아앙!!”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잿빛털의 고양이를 대충 외투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백주월이 루칸다의 뒤를 따라오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 녀석은 너네 대장 아냐? 너무 험하게 다루는 거 같은데.”

    “아직 잘 모르나 보군. 각하께서는 원래 살짝 거칠게 다뤄지는 걸 좋아히시지.”

    백주월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듣고 보니 그럴싸한 이야기다.

    어쨌거나 이 섬에서 해야 할 일을 공유할 차례였다.

    * * *

    루칸다와 백주월은 자리를 옮긴 후 빠르게 정보를 병렬화하였다. 애초에 백주월이 누자베스를 데리고 다니는 시점에서 견제나 블러프는 필요하지 않았다.

    루칸다는 필요한 만큼 간결하게 효율적으로 정보를 종합하여 전달했고, 백주월 역시 서론 없이 본론만 간단하게 전했다.

    이야기가 대충 정리된 후 루칸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양이의 뺨을 꼬집어 흔들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각하. 그 흡혈귀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한다면 볼만 하겠군요. 가끔 저는 각하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둥지가 조용하게 돌아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이 지랄을 하나 싶습니다.”

    “냐앙! 냐아앗!!”

    고양이가 루칸다의 손가락을 깨물며 바둥거리자, 백주월이 고양이를 슬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며 말했다.

    “발단의 책임을 묻는다면 나한테도 그 책임이 있으니까. 이 녀석 나름대로의 최선이었겠지.”

    “그렇다고 인간과 유대 관계를 맺나? 그것도 그냥 인간이 아니라 용사다. 아니, 이런 건 중요하지 않겠지. 나는 흡혈귀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그 흡혈귀라는 족속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프라이드와 전통이란 이름의 관습으로 똘똘 뭉친 놈들인지는 대충 알고 있다.”

    백주월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 식으로 변명하기엔 누자베스가 저지른 일의 스케일이 엄청났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이 스칼렛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끝장이었다.

    애초에 스칼렛이 외종인 누자베스와 유대 관계를 맺어준 것도 엄청 파격적인 선심을 쓴 결과다. 상속 신분의 위계를 허락해 줬더니, 또 엉뚱한 놈에게 같은 위계를 양도했다?

    그것도 그 상대는 인간이다.

    흡혈귀의 시점에서 보자면 인간이란 가축이나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미물이다.

    스칼렛의 입장에서 보자면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대충 비유하자면 그렇다.

    애지중지 키워진 귀족집의 아가씨가 집도 없이 방랑하는 천민 부랑자를 가엾게 여겨서 결혼해 줬더니, 그 부랑자가 어디 좀 다녀온다고 하고는 무슨 암컷 돼지와 바람을 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문의 전통에 의해 귀족 아가씨와 암컷 돼지가 같은 신분으로 취급받아야 한다. 스칼렛의 시점에서 보자면 딱 그런 상황이었단 말이다.

    “저는 이제 진짜 모릅니다. 그 흡혈귀가 제대로 열받아서 인빅투스 놈들을 모조리 집합시켜 각하를 찢어 죽여도 모릅니다.”

    “냐앙, 나아?”

    “농담 같습니까? 그 흡혈귀도 일단은 상속 신분입니다. 인빅투스 녀석들은 그 흡혈귀 말이라면 이 세상 전체와 전쟁도 벌일 수 있는 놈들이란 말입니다.”

    “냐아…….”

    “그런 울상을 지어도 소용없습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냥냥!”

    “귀여운 척 해도 소용없습니다! 솔직히 그냥 역겹습니다!”

    “냐앗! 냐아앗!!”

    “젠장, 아픕니다! 손가락 좀 그만 깨물면 안 됩니까!?”

    루칸다가 짜증스럽게 고양이를 털어내며 백주월 쪽을 바라봤다.

    “어쨌든 고대 유물을 복구할 부품을 구하러 온 것뿐이란 말이지. 미안하지만 나도 그리 한가한 몸은 아니라, 그런 시답잖은 수색을 도와줄 여유는 없겠군.”

    “냐아아, 냐아.”

    “싫습니다. 불만 있으면 계급장 떼고 한판 붙던가.”

    “냐앗!! 냐아아!!”

    “빌어먹을 농담입니다, 농담! 어차피 대충 짐작가는 곳도 있습니다.”

    백주월이 찾아야 하는 물건은 ‘마젤라나 곡면경’이라는 희귀 부품이었다. 괴조의 복구 작업에 사용될 예정이었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유통된 건 3년 전 이 요나르 섬이었다. 마왕군이 사용할 목적으로 수입해 온 것 같지만.

    “그 물건을 마왕군 제21예비사단이 철수할 때 본도로 가져갔다면 추적은 포기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마왕군이 요나르 섬에서 철수할 때 그리 많은 시간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상당한 군수 물자가 이 요나르 섬에 남아 있었다.

    마젤라나 곡면경 역시 이곳에 방치된 채 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돈이 되는 군수물자를 이곳의 마물놈들이 그대로 방치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냐앙.”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둘 중 뭐부터 듣고 싶습니까?”

    “냐앙, 냐아.”

    “좋은 소식입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좋은 소식부터 말하자면. 마왕군이 놓고 간 군수물자의 9할 이상은 누군가가 소중하게 모아 잘 간수하고 있다는 겁니다.”

    “냐앙?”

    고양이가 그렇게 되묻자, 루칸다가 킬킬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칼베라의 나흐 만테아라는 겁니다. 각하의 목적과 저의 목적은 일치하지 않지만, 행선지의 교집합이 여기서 생겨나는군요.”

    나흐 만테아의 본거지로 숨어 들어간 후. 마젤라나 곡면경을 찾아 챙겨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루칸다는 칼베라가 저지르려는 끔찍한 부활 의식을 저지할 단서를 찾고 말이다.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나? 내가 스타일에 어울려 주도록 하지.”

    루칸다가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토해내며 묻자, 백주월이 팔짱을 낀 채로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잿빛털의 고양이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백주월을 올려다 보며 앞발로 팔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백주월은 눈을 살포시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긁어주며 대답했다.

    “어울리진 않지만, 젠틀하게 가자고.”

    “의외로군. 모조리 때려 부수고 몰살시킨 뒤 송두리째 빼앗는 게 취미일 줄 알았는데.”

    “이쪽도 나름 골 아픈 사정이 있거든.”

    백주월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어깨를 으슥였다.

    일단은 나흐 만테아의 본거지에 잠입하여, 조용히 목적만 완수하고 돌아오는 걸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내일 해가 저물면 바로 착수하지.”

    이쪽의 일을 끝내면 바로 흡혈귀들이 무슨 꿍꿍이로 바체트 열도에 모였는지도 조사해야만 했으니까.

    지체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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