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45화
반 르낙시아 동맹(4)
바체트 령을 모험하게 될 이세계 전이자들이 이후에도 있을지 모르니 미리 말해두겠다.
만약 길을 지나다 오거와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가?
자, 인생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꿀팁 공개다.
당장 보험사로 전화 걸어서 생명보험 큼지막한 걸로 하나 가입하고, 천당에 갈 수 있도록 회개의 기도를 올리면 된다.
거기까지 하면 할 일은 다한 거다.
설령 오거와 맞서 싸우겠다거나, 도망치겠다는 등의 아마추어 같은 생각은 때려치우기 바란다.
어느 쪽을 택하든 무자비한 몽둥이질에 떡갈비 반죽되는 건 확정이니까!
오거는 저래 보여도 고블린이라던가 오크와 달리 ‘정령급’의 마물이다.
무식한 똥멍청이에 행동도 굼떠서 레벨업용 경험치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란 말이다.
오거는 바체트 령 내에서도 근력만으로 따지면 탑클래스의 마물이다. 덩치에 비해 재빠르고 민첩하며, 전투에 관한 본능적인 판단 역시 기민하다.
‘이거 따돌릴 수도 없을 테고 둘로 나눠야겠군.’
누가 오거를 맡아야 될지는 명확했다.
[누자베스 : 언더 케이지, 고블린 서비스, 그레이브 야드 부대는 루칸다의 엄호와 촌락의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부대의 지휘권은 모두 스칼렛에게 위임한다.]
내가 그런 판단을 내리자, 스칼렛은 사뭇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스칼렛 : 귀공 꽤나 자신만만하군. 혹시 저 마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겐가?]
[누자베스 : ×발 알게 뭐야. 이세계 너비아니 셰프겠지.]
그리고 여기서 아비엥의 군세와 오거의 발을 묶는 역할은? 나와 비르겐슈타인 부대가 맡는다.
아주아주 간단하고 단순하며 명쾌한 양동 작전이다.
[누자베스 : 그리고 모처럼 쓰는 거니 포션이 잘 만들어졌는지도 검증해 봐야지.]
출전 직전에 드디어 ‘레드문 포션’이 처음으로 생산되었다. 혈루목을 손에 넣은 지 꽤 되었지만 정제 시설을 구비하고, 수액을 모아서 제조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이번에 생산된 레드문 포션의 개수는 7병. 나와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 살수들이 한 병씩 나눠 마시면 한 병이 남는 정도였다.
[누자베스 : 사크바하 쫓아내고 루칸다 확보하면 바로 돌아와야 된다? 괜히 딴청부리고 어디 들렸다 오면 안 된다?]
[스칼렛 : 알았네, 마음 약해지게 어린애처럼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지 말게.]
스칼렛이 부대를 이끌고 전선을 이탈하는 사이.
아비엥의 부대가 잠시 뒤를 쫓다가,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하이브 마인드인 내가 이곳에 남았으니 아주 정상적인 판단이다. 하이브 마인드만 죽이면 끝이다. 765호 둥지의 관리자인 내가 죽는 순간 모든 병력이 통제를 잃고 흩어지게 될 테니까.
“야, 솔직히 오거까지 내가 직접 상대하는 건 에바 아니냐?”
내가 그렇게 묻자,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 살수들이 대답했다.
“에바라고 생각합니다, 각하.”
“예, 에바입니다.”
“확실히 에바입니다.”
“좋아, 삼진 에바로 기각이다. 우리 애들이 돌아올 때까지 꽁무니 빠지게 도망쳐 다닐 준비나 하자.”
레드문 포션의 코르크 마개를 뽑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죽인다아아아!!”
오거 녀석이 5미터 앞까지 다가와 위협적인 기성을 내질렀다. 고막이 쩌렁쩌렁 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머리카락이 나부낄 정도다!
“그만 소리 질러 빌어먹을 오거 새꺄. 내가 겁먹고 바지에 오줌 지리면 어쩔 거야, 어? 이 나이 먹고 바지에 지렸다고 바체트 령 전체에 소문이 쫙 날 텐데.”
어느 정도 성장을 끝마치고 지역을 장악한 하이브 마인드는 마왕에게 직접 작위와 칭호를 수여받는다.
그때 내가 받게 될 칭호가 ‘오줌싸개’라거나 ‘골드샤워’ 혹은 ‘야외실금맨’ 같은 게 될지도 모르잖나?
‘골드샤워 누자베스 남작이라니…… 끔찍하잖아.’
그래, 이번엔 오거를 상대하며 바지를 뽀송뽀송하게 유지하는 걸 목표로 삼자.
벌컥벌컥.
플라스크에 들어 있던 레드문 포션을 주저 없이 모조리 들이켰다.
입과 식도 그리고 뱃속까지 모조리 불타는 듯한 작열감이 덮쳤고, 그와 동시에 의식이 몽롱해졌다.
적당한 취기와 같은 고양감.
뇌의 시냅스가 모조리 곤두서는 감각.
손끝의 신경 세포까지 송두리째 활성화되며 인지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후우!”
짧고 깊게 숨을 토해냈다.
어느덧 오거가 내 몸뚱이보다 더 거대한 나무 몽둥이를 치켜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
색이 번진 듯 흐릿해진 전장의 풍경을 응시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자, 액션활극의 인트로 신을 두들겨 보자.
* * *
부웅!
사크바하의 폴암이 큰 원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폴암의 자루 부분이 정확하게 루칸다의 어깨를 후려쳤다.
“커헉!”
루칸다는 쇳소리를 토해내며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일순간 의식이 사라질 정도의 통증이 덮쳐들었다. 비명을 참듯 루칸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퍼억!
다시 한 번 사크바하의 발길질이 루칸다의 가슴을 가격했다. 뼈가 으스러지고, 안의 장기가 찢어질 정도의 위력!
루칸다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곱게 죽이진 않겠다, 루칸다. 죗값을 치르기엔 고통이 부족하지 않나?”
사크바하는 주변에 널려 있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둘러봤다. 루칸다를 제압하기까지 14마리의 고블린 머스킷티어가 당했다.
솔직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실력이다.
사크바하를 상대하며 동시에 고블린 머스킷티어의 머릿수를 착실하게 줄여나간 것이다.
그런 루칸다를 살려서 돌려보냈다간 후환이 생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사크바하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승패는 기울었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루칸다와 경미한 상처를 입은 것이 고작인 사크바하.
이제부터는 승부가 아닌, 승자의 일방적인 폭력과 보복의 시간이다.
“네놈의 영혼은 용서받지 못한 채 황천을 떠돌 것이다. 태양의 어머니께서 허락하신 권리조차 네놈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하, 하하……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나…… 컥!”
퍼억!
사크바하는 쓰러져 있는 루칸다를 거칠게 걷어찬 후 상체를 숙였다.
“어째서 죽였나, 루칸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피르에나 님의 은혜로 이 비루한 삶을 용서받을 수 있었다. 피르에나 님께서 제시하신 낙원은 코앞이었다!! 그분께서 네놈을 용서하셨고, 네놈에게 과분한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 낙원에서, 낙원에서…… 다시 한 번…….”
사크바하의 목이 턱 막혔다.
응어리져서 맺혔던 뜨거운 눈물이 거친 뺨을 타고 흘렀다.
고기의 잡내가 진동했던 조잡한 스프의 맛이 잊히지 않았다. 의미 없이 나눴던 멍청한 대화도, 서툴렀지만 따스했던 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로의 웃음을 마주할 때마다 과거의 악몽도,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 잊을 수 있었다.
사크바하의 기억은 낙원의 틈새에 닿아 있었다. 그 기억은 사크바하에게 낙원의 명확한 형태를 제시하고 있었다.
“말해라, 루칸다!! 어째서 피르에나 님을 죽여야만 했나! 그분께서 죽어야만 할 이유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고, 그분을 죽일 명분은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사크바하가 울부짖으며 루칸다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고, 그대로 루칸다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루칸다아!!”
“누군가는…… 짊어져야 했을 죄업이다…… 사크바하, 피르에나 왕녀님께선…….”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얼어붙은 밤공기를 갈랐다.
퍼억!
철구슬이 사크바하의 어깨를 꿰뚫으며 파열음을 울렸다. 총격 덕분에 사크바하에게 붙잡혀 있던 루칸다가 지면에 떨어졌다.
“아이고, 이거 늙으니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맞는구만. 분명 머리를 노렸는데 말이야?”
어둠 속에서 그 붉은 눈동자는 선명히 보였다. 사크바하가 뒤를 돌아본 것과 동시에 머스킷티어 부대가 언덕 위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붉은 눈동자 아래로 초승달처럼 치켜 올려간 붉은 입술이 비쳤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악의를 형상화한다면 저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섬뜩한 존재였다.
“이야기를 엿들어 보니 대략적인 가닥이 잡히는군. 인간 계집이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저질렀던 게야. 그리고 그 필멸종은 그 처참한 실패의 뒷수습을 맡았을 뿐이고. 그렇지 않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칼렛이었다. 머스킷 한 자루를 어깨에 걸친 채 여유롭게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흡혈귀…….”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흡혈귀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크바하 역시 브람스의 영지에서 전투를 치렀던 유격대의 일원이었으니까.
어쩌면 브람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위계를 지닌 흡혈귀일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군. 어떻게 인간 주제에 시험의 권리를 얻었지?”
지금 당장 생각해봤자 정답이 나올 리는 없다. 스칼렛은 개인적인 호기심은 잠시 접어두고, 당장 해야 할 공적인 업무를 떠올렸다.
“뭐, 어쨌거나 이 늙은이가 그 슬픔을 끝내주도록 하지. 오크여, 지금이라도 서두른다면 지옥의 유황불 밑바닥에서 그 계집의 유해라도 찾을 수 있지 않겠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더 케이지 부대의 렛맨 전사들이 뛰어나왔다.
동시에 고블린 서비스 부대와 그레이브 야드의 일제 사격!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서 씹어 먹어주마아!!”
사크바하가 오열하듯 외쳤다.
노련한 오크 전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워크라이’ 스킬이었다.
순간, 그의 주변에 밀집해 있던 고블린 머스킷티어 부대가 흡혈귀의 압도에서 벗어나 재빠르게 총알을 장전했다.
아직 밤의 사투는 계속될 기미였다.
* * *
콰앙!
몽둥이가 꽂힌 곳이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 충격 때문에 돌과 자갈이 튀어 올라 산탄총처럼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저런 빠따질에 한 방이라도 당하면 떡갈비 수준에서 끝나지 않겠는데!’
비유하자면 그렇다.
20센티면 아헤가오 선에서 그치겠지만, 60센티쯤 되면 총체적 장기파열로 사망이란 말이다.
미안하다.
이런 비유밖에 안 떠오른단 말이다.
진짜 눈앞에서 한 방만 제대로 맞으면 골로 가는 방망이가 날아다니고 있으면, 적절한 비유도 안 떠오르는 법이다.
게다가 아슬아슬하게 분다의 공격을 피해냈는데도 몸은 이미 만신창이에 가까웠다.
튀어 오른 돌멩이와 자갈에 맞고, 긁혀서 아프지 않은 곳이 하나 없다.
“죽인다! 분다 죽인다-!! 죽인다아!!”
“우왁!?”
쿠웅!
다시 한 번 분다의 공격이 덮쳐들었고, 이번에도 가까스로 어떻게든 피해냈지만.
‘공격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속도뿐만이 아니다.
분다는 내 움직임을 읽으며 학습하고 있었다. 저런 저능아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지껄이는 건 일종의 페이크다. 진짜로 저 페이크에 속아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끝이란 말이다.
오거는 전투에 대한 감각만큼은 여타 종족 못지않게 뛰어난 종족이다.
게다가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오거의 종족적 특성인 ‘전투 고양’이다. 전투 지속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거는 점점 힘과 민첩을 얻게 된다.
이쪽은 내 부대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되는 입장인데…… 상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니.
‘어떤 또라이가 오거한테 저런 특성 넣은 거냐…….’
바로 나다!
내가 넣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집필 중이던 내 뒤통수를 각목으로 후려치고 설정을 고쳐 쓰고 싶을 정도다.
오거는 그냥 둔하고 멍청한 레벨업용 경험치 마물이라고 말이다.
“후우…….”
다시 분다와 거리가 벌어졌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릿속을 비웠다.
더 이상 녀석이 날뛰기 전에 수를 취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