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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44화 (4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44화

    반 르낙시아 동맹(3)

    고대 마족의 언어 살라브를 알고 있는 자라면 루칸다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루칸다의 어원은 윤왕 ‘루아 카날다’의 살라브식 표기법으로 ‘그림자 시해자’라는 의미다.

    인간들의 성왕을 살해한 후, 수 세기에 걸쳐 바체트 령에 군림했던 왕의 이름이다. 비록 후기에 힘이 쇠약하여 여덟 기둥의 군세에 무너지며 패배한 군주라고 할지라도.

    반 르낙시아의 존재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무력과 능력을 갖췄던 반신의 존재들이 바로 ‘3인의 윤왕’이다. 루아 카날다는 그 윤왕 중 한 사람이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일개 고블린 따위가 감히 가명으로 쓴다면 비웃음을 당하기 딱 좋은 이름이다. 어중간한 실력으로 루칸다의 이름을 사용했다간 윤왕 루아 카날다의 전설과 바로 비교당할 테니까.

    카가각-!

    철붙이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칼날을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사크바하의 몸이 크게 밀려났다.

    섬뜩할 정도의 괴력이었다.

    마치 고블린이 아닌 오거를 상대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루칸다는 단순히 괴력이 장기인 전사가 아니었다. 그가 ‘루칸다(그림자 시해자)’라는 가명을 쓰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역시 재빠르군.’

    루칸다의 특기는 ‘그림자 도약’이라 불리는 타르샬라류의 비술이었다. 일정한 명도 이하의 지대가 있다면 모습을 감출 수 있고, 최대 4미터의 거리를 일순간 이동할 수 있었다.

    그 잔혹하고도 정교한 비술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야전 지휘자들이 당했던가?

    이렇게 적으로 만나자 그 섬뜩함이 실감되었다.

    사크바하는 이빨을 질끈 물며 어둠 속에 숨어든 칼날을 시선으로 쫓았다.

    촤악!

    어둠 속에서 솟아난 칼날이 사크바하의 어깨를 사선으로 찢었다. 간발의 차로 몸을 틀지 않았다면 팔을 통째로 뜯길 뻔한 순간이었다.

    ‘같은 꿈을 바라보던 때와 비교해도 무엇 하나 녹슬지 않았구나. 아니, 오히려 그 이상. 루아 카날다에 비견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다.’

    사크바하는 옛 전우이자 현재의 적수를 솔직히 평가했다. 한 마리의 오크 전사로서 품을 수 있는 순수한 감탄이었다.

    사크바하를 보호하듯 사방으로 모여든 고블린 머스킷티어들도 루칸다의 공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사크바하는 얕게 베인 어깨의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폴암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이 정도의 병력을 혼자서 어떻게 해볼 작정이었다면 어리석었구나, 루칸다.’

    루칸다가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 촌락을 위해서 루칸다가 몸을 던져야 할 이유는 무엇 하나 없었다.

    게다가 이 촌락은 하이브 마인드의 군세에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 수 없는 상황. 홀로 이 불합리한 전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크바하는 루칸다가 올 것이라 믿었다.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수컷은 때때로 승산이 제로에 수렴하는 전장에 스스로 발을 들이니까.

    “루칸다! 이 전투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명성인가? 금화인가? 그것도 아니면 구원인가! 승산은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사크바하가 사뭇 고양된 어조로 소리쳤다.

    동시에 왼손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먹만 한 구체를 집었다.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하는군.”

    무엇 하나 얻을 것이 없는 전장이다.

    돈도, 권력도, 명성조차 무엇 하나!

    게다가 승산 따윈 0에 수렴할 만큼 절망적인 전장.

    어째서 스스로 파멸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루칸다와 사크바하는 똑같은 대답을 내뱉을 것이다.

    “그딴 질문은 암컷이나 하는 것이다.”

    “그래. 암컷, 혹은 암컷과 다를 바 없는 놈들이나 하는 질문이었군.”

    퍼엉!

    사크바하가 왼손으로 들고 있던 구체를 머리 위로 던지자, 폭음과 함께 허공으로 치솟았고.

    파아아앗!

    한밤중에 태양이 뜬 것처럼 새하얀 빛무리가 일대를 뒤덮었다.

    “다시 제대로 놀아보지, 루칸다.”

    사크바하 역시 루칸다와의 접전을 준비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 * *

    [아비엥 : 뭐냐, 저건! 저게 뭐냐고 묻고 있다!]

    마인드 모드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아비엥의 시야에 기괴한 것이 보인 순간이었다.

    마치 인간 소년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고작해야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765호 둥지의 병력과 동시에 나타났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기에 의복으로 소년의 정보를 읽어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소년만이 병력과 별개로 움직이며 아비엥의 머스킷티어 부대를 토막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브라 : 아, 아마도 765호 둥지의 관리자 같습니다! 765호의 관리자 누자베스입니다!]

    [아비엥 : 저게 하이브 마인드라고?]

    아비엥이 지니고 있던 관념이 산산이 부서졌다. 하이브 마인드란 애초에 저렇게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병력을 지배하고, 안전한 곳에서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그쪽 방면으로 특화된 합성생물이다.

    저렇게 최전선에서 미친개처럼 날뛰라고 있는 마물이 아니란 말이다!

    ‘길리도 녀석이 765호의 관리자가 별종이라고 귀띔을 해주긴 했지만…… 저런 해괴한 돌연변이였을 줄이야.’

    단순히 전열에 나서 날뛰기만 좋아하는 멍청이였다면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뛰쳐나오다 탄환에 맞고 벌집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누자베스는 도저히 하이브 마인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비엥은 다시 한 번 누자베스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췄다.

    ‘이번에도 같은 잔재주를 부릴 셈인가?’

    방금 전에 봤던 신기가 우연의 일치인지, 진짜 실력인지 확인해볼 작정이었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머스킷티어 부대가 누자베스의 접근을 눈치채고 총구를 겨눴다.

    60마리의 고블린이 3열로 정렬하여 진형을 갖추고 있는 상태. 사격이 개시되는 순간 20여 발의 탄환이 화망을 형성하여 면 타격을 가할 것이다.

    아무리 머스킷의 명중률이 절망적인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일제 사격을 통해 화망을 형성한다면 그중 한 발은 적중한다.

    ‘지금.’

    야전 지휘자의 발포 명령과 함께 1열의 일제 사격이 작렬했다. 굉음과 함께 새하얀 포연이 머스킷티어 부대를 뒤덮었다.

    카강, 카가강!

    [아비엥 : 말도 안 돼!!]

    이번에도 눈을 의심할만한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어디에 숨겨 놨던 건지 모르겠지만, 탄환이 격발된 순간 단검 수십 자루를 허공에 흩뿌려 탄환을 모조리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 마치 단검들은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탄환을 막아낸 뒤에도 수 초간 허공에 떠 있었다.

    누자베스는 그대로 내달리나 싶더니 다시 단검을 뿌렸고, 단검을 발판 삼아 허공으로 높게 도약했다.

    촤악!

    일격에 깔끔하게 야전 지휘자의 목을 쳐냈고, 고블린 머스킷티어들이 우왕좌왕하며 착검을 하는 사이에 일방적인 도륙이 시작되었다.

    처음 보는 기괴한 검술이다.

    구태여 닮은 검술을 거론해 보자면 먼 서쪽 대륙의 검술인 ‘벨 페커스’ 류와 닮아 있었다.

    그것도 초심자가 어쭙잖게 따라하는 것 같은 느낌. 투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무예라고 정의하기엔 너무나 폭력적이고, 마구잡이 폭력이라고 말하기엔 정교했다.

    어쨌거나 그런 건 아비엥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누자베스가 무슨 검술을 구사하든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아비엥의 눈에 비치는 광경이란.

    그저 765호 둥지의 관리자가 최전열에 뛰어나와 머스킷티어 부대 하나를 통째로 토막 내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아비엥 : 죽여, 당장 죽여!!]

    하지만 둥지의 관리자가 선봉에 선다는 건 아비엥에게 호재나 다름없었다.

    누자베스만 처리하면 765호 둥지의 군대는 통제를 잃고 흩어질 테니까.

    [분다 : 죽인다! 분다 죽인다!]

    쿠웅!

    오거 분다가 나설 차례였다.

    * * *

    “봤냐, 제대로 봤냐 햄토리? 형아가 총알도 막는 거 봤냐고!”

    “쮸쮸!”

    “그래, 형이 좀 개쩔잖냐! 이런 걸 영상으로 찍어놨다가 뮤튜브에 올리면 소설이고 나발이고 돈을 싹 긁어 모을 텐데!”

    “쮸! 쮸우-쮸쮸! 쮸! 쮸우 쮸.”

    “하핫! 그만해라, 햄토리. 무슨 거유 여캠하고 합방이냐. 아니, 합방은 할 수도 있지. 여기서 말하는 합방이란 합동 방송이 아니라, 조금 다른 의미의…….”

    “그렇게 떠들 여유는 없을 것 같네만.”

    스칼렛은 누자베스를 핀잔하듯 노려봤지만, 저 장난스럽고 가벼운 언행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일면을 목격한 후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여흥으로 가르친 것치고는 습득이 빠르군.’

    스칼렛이 수천 년 동안 취미삼아 체득한 검술은 수백여 종류였다. 그중에서 누자베스에게 가르친 검술은 ‘벨 페커스’ 검술의 원류격인 검술이다.

    벨 페커스가 무예의 일종이 되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검술이라면, 그 원류는 순수하게 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실효성 중시의 검술.

    그리고 누자베스에게 구태여 이 검술을 가르친 이유 역시 아주 약간의 흥미 때문이었다.

    이 검술의 고안자는 ‘밤의 시종 헬베르카’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 사내이니까.

    게다가 여덟의 기둥을 가장 오랫동안 괴롭혔던 동부의 사령관이자, 현재는 마왕 라바노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군단장 바하무트가 원류였기 때문이다.

    ‘역시 같은 피를 타고났다는 건가.’

    스칼렛은 지금까지 수많은 천재들을 만나봤다.

    그렇기에 누자베스가 아무리 검술의 습득 속도가 빠르다고 해봤자, 일일이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주 좋게 봐줘야 범재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신으로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던 누자베스의 옆모습은, 젊고 치기 어렸던 바하무트의 모습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게다가 그 방식이 경박하지만 자신이 흔들림 없는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증명해냈고.’

    수적 열세 상황에서 부대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병력의 질이나 훈련도와 상관없이 생물 본연의 본능이 그러했다.

    때문에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 선봉에 설 수 있냐 없냐의 차이는 크다.

    자신이 리스크를 감당할 수는 지휘관이며, 그것은 자신의 작전에서 동반되는 리스크가 감당할 수 있는 허용 범위라는 것. 동시에 지휘관이 리스크를 공유하고 있다는 신뢰감과 안도감.

    그러한 모든 요소가 부대의 사기에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765호 둥지의 부대원 모두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쮸쮸!”

    타당, 타다당!

    특히나 햄토리의 활약이 가장 빛나고 있었다.

    이번 세글리트 토벌 때  ‘세글리트의 미혹’을 얻었고, 이 전투가 첫 실전 사용이었다.

    웅크리면 몸 전체를 보호할 만큼 거대한 방패 면적 덕분에 머스킷 사격을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었고.

    “캬아악!”

    “키륵?”

    “캭!”

    햄토리를 향해 머스킷을 발포했던 고블린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세글리트의 미혹에 부여된 능력인 ‘피해 반사’가 발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물리 피해의 70%만을 반사하지만, 머스킷 탄환의 물리 에너지의 70%라면 별다른 방어구도 착용하지 않은 고블린을 꿰뚫기에 충분했다.

    ‘순조롭지만.’

    스칼렛이 멀리서 쏘아진 조명탄을 목격한 건 그 직후였다. 동시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면이 울렸고.

    쿠웅!

    쿠웅!

    멀리서 풍겨오는 역겨운 냄새에 스칼렛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보게, 저쪽에서 무언가가 뛰어오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아마도 내 소녀팬이겠지.”

    “소녀라고 하기엔 너무 육중한 것 같네만.”

    “그런 차별적인 언사는 옳지 않아, 스칼렛. 돼지처럼 살 뒤룩뒤룩 쪘어도 소녀는 소녀잖아.”

    쿠웅!

    무거운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졌고, 금방 어둠 속에서 거대한 마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분다!! 죽인다아-!!”

    “오…… 와…… 잠깐만. 아리카 섬에 오거가 있다는 얘긴 처음 들었는데. 잠깐, 잠깐만! 야이 씨, 진짜 이러지 마라. 오거는 좀 아니잖아…….”

    누자베스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도대체 이런 빌어먹을 전개는 누가 쓰고 있는 것일까. 잠깐의 단말마처럼 그런 원망을 해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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