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46화 (46/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46화

결전(1)

“헬베르카요?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는 뜬금없는 질문이네요.”

페페가 여관의 방문을 열자, 카를린이 얇은 캐미솔 차림으로 그녀를 반겼다. 페페의 예상대로 카를린은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다. 카를린은 평소에도 고대 묵시록 해독에 매달리고 있었으니까.

“다른 마족들에 비해 알려진 정보가 별로 없으니까. 혹시 카를린 너라면 알고 있는 게 좀 있을까 해서…….”

페페가 자연스럽게 카를린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카를린은 의자의 방향을 돌려 페페와 마주보듯 앉았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헬베르카의 기원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계가 공허의 심연에서 분리되어 생성될 때 우연히 함께 질량을 얻게 된 의식체라는 가설이 가장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지만요.”

“외신들이 간섭한 흔적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아, 외신의 존재를 믿는 것 자체가 교단에서는 불경스러운 일이라……. 하지만 ‘바깥 고리의 왕좌’라고 불리는 초월 의식이 의도적으로 심어 놓은 유기생명체라는 가설도 있었네요.”

어쨌거나 그 기원이 확실치 않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나르시안이 스텔라 님께서 허락하신 용서의 기회를 세 번 다 거절하고, 스스로 영원한 고통을 택하기 이전. 그러니까…… 이 시대 이전이었으니까…….”

“아, 그건 나도 들어본 적 있어. 아마……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피를 마시고, 어머니와 누이의 몸을 통해 자식을 낳았다지?”

“맞아요. 나르시안은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를 세 가지나 범했죠. 스텔라 님께서는 그때마다 용서의 기회를 주셨지만, 나르시안은 모두 거절했구요.”

흡혈귀들의 시초라고 불리는 나르시안의 경우 명확한 사료가 남아 있었다. 고대 역사에 거의 무지한 페페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고 말이다.

어쨌거나 오늘 페페가 카를린을 찾아온 건 헬베르카에 대해 묻기 위해서다.

카를린은 금방 이야기를 본점으로 되돌렸다.

“나르시안이 죄인이 되기 전부터 헬베르카 가문이 존재했다는 게 요점이었어요. 현재 8대 마왕이라고 불리는 ‘여덟의 기둥’이나 ‘3인의 윤왕’이 나타나 이름을 떨치기 전부터 현계를 지배한 막강한 가문이었죠.”

이 유서 깊은 마족 가문은 언제나 총명하고 유능한 후계를 배출해냈다. 그리고 밤의 어머니 테네브레는 이 경이로운 혈족을 사랑하여 자신의 시중을 들 수 있는 특권까지 부여하였다.

덕분에 헬베르카 가문은 테네브레의 전령 역할을 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다른 마족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이때 헬베르카를 구심점 삼아 뭉친 다섯 세력.

나르시안의 자식들, 여덟의 기둥, 리케릴 성찬회, 3인의 윤왕, 사룡족 벤테인.

그리고 스스로를 ‘밤의 시종’이라 칭하던 헬베르카 가문을 포함하여 ‘반 르낙시아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헬베르카가 가문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예요. 동맹의 수장으로서 동대륙 정벌에 나서게 되었고, 이때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마물이 바로 헬베르카의 ‘오르키아나’인데 굉장히 재밌는 사실이…….”

“잠깐, 카를린. 나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었어.”

페페는 황급히 카를린의 말을 끊었다.

카를린이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시작하면 위험하다. 하마터면 오늘밤 잠도 못 자고 꼬박 앉아서 수백 년도 더 이전의 전쟁사를 들을 뻔한 것이다.

“지난 이야기는 됐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던 거야.”

페페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고, 카를린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이 섬까지 온 이유는 알고 있지?”

“하이브 마인드 카타쿨라와 그의 둥지를 박멸하기 위해서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왕도에서 소실된 헬베르카의 피를 찾아내 사용처를 밝혀내고, 그 뒷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지.”

카를린과 페페는 서로 다른 목적을 얘기한 것 같지만, 일단 그 의미는 상통했다.

수 년 전 왕도의 지하 서고에서 보관 중이던 헬베르카의 혈액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다. 도난당한 헬베르카의 혈액은 수백 년 이전의 유물이었다.

그 역사적, 주술적 의미도 상당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헬베르카의 혈액이 마족의 손에 들어가 사용될 경우였다.

특히 바체트 령에 군림하고 있는 마왕 아일라드는 혈액과 살점을 통해 ‘하이브 마인드’라는 인공적 합성생물을 창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페페의 팀은 왕명을 받아 움직이는 궁정 직계 특무대. 헬베르카의 혈액을 쫓을 단서를 수집하며 드디어 이 섬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었다.

페페와 그녀의 팀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헬베르카의 혈액은 하이브 마인드 생성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된 하이브 마인드는 시트란테 서도의 어딘가에 뿌려졌고.”

“시트란테 서도에 배치된 하이브 마인드들 중 두각을 나타내며 크게 성장한 하이브 마인드는 단 하나.”

“바로 이 아리카 섬의 카타쿨라였죠.”

이미 헬베르카의 혈액은 소실되었고, 하이브 마인드가 되었다면 페페와 그녀의 팀이 해야 될 일은 하나뿐이었다.

헬베르카의 피를 이어받은 하이브 마인드가 더 이상 성장하기 전에 짓밟아 놓는 것.

헬베르카는 본래 우수한 혈질을 지닌 마족이다. 그 피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하이브 마인드를 방치했다간 바체트 령 전체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카타쿨라가 헬베르카의 혈액을 사용하여 만든 하이브 마인드라는 건 정황상 추측일 뿐이지만. 뭐, 그 녀석인 게 거의 확실하지?”

“정말 낮은 확률이지만, 헬베르카의 혈액을 이어받은 하이브 마인드가 철저하게 세력을 숨기고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카를린. 헬베르카의 약점 같은 건 몰라? 아니면 녀석에게 특별하게 위험한 요소라거나.”

페페가 그렇게 묻자, 카를린은 잠시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헬베르카는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마족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지략이나 술수에 아주 뛰어난 모습을 보인 적도 없죠. 몇몇 특별한 개체를 제외하곤 말이에요.”

“그럼 뭐야? 무슨 능력이 있어서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건데?”

카를린도 그 질문에는 확실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 기록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헬베르카의 후예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성격이요.”

“성격?”

“예, 끝도 없이 탐욕스러운 성격이요. 잔혹하고, 무자비하며, 거짓말에 능하다나 봐요. 이 간단명료한 행동 원리를 24시간 365일 유지할 수 있는 건 헬베르카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었겠죠.”

그렇기에 스텔라 교단에서 ‘기만’의 죄악을 나타내는 백합꽃 문양은 본래 헬베르카 가문의 상징에서 따온 것이었다.

“아, 그리고 헬베르카는 대대로 미형의 후예들을 배출했다는데. 그게 인간을 현혹하기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한 흔적이라네요.”

“그래? 카타쿨라가 빌어먹게 잘생긴 미남이면 죽이기 아깝겠네.”

페페는 농담으로 이야기를 끝마쳤다.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카를린을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일찍 자게요?”

카를린이 물었고.

“아니, 잠이 안 와서. 이 주변이나 한 바퀴 돌면서 산책하고 올게.”

페페는 침대에서 가볍게 일어나 카를린의 방을 나섰다.

왠지 밤바람이 소란스러웠다.

* * *

머릿속이 탁했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그대로 실신할 만큼 의식이 흐려져 있었다.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도.

쉴 새 없이 토해지는 거친 날숨도.

피안개가 낀 듯 뿌옇게 번진 시야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 듯 멀게만 느껴졌다.

“하아…… 하, 스칼렛은 아직…… 멀었나……?”

반쯤 으깨진 왼팔을 부여잡으며 시선을 들어 봤다. 먼 산등성이 너머에서 총성이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아직도 사크바하의 부대와 교전 중인 것이다.

“……이대로, 쿨럭! 오늘밤에…… 뒤지겠는데.”

주르륵.

방금 전 분다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이 승패의 분기점이 되었다. 아무리 하이브 마인드의 몸이 인간보다 튼튼하다고 해도 그 몽둥이질을 버틸 수는 없었다.

단 한 방을 허용한 것만으로 이쪽은 전투를 속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산산이 으스러진 왼팔과 부서진 늑골.

그 충격이 내장까지 닿았는지 쉴 새 없이 검붉은 핏물이 입 밖으로 토해졌다.

“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매음굴이나 한 번 다녀오는 건데…….”

무릎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서있기도 힘들다.

이대로 쓰러져서 잠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죽음의 달콤한 속삭임이 점점 뇌리를 잠식해 나갔고, 눈이 점점 감겼다.

쿵.

이미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 살수 2마리가 당했다. 내가 유효타를 허용한 순간부터 이쪽은 수세를 유지하기도 힘들어졌으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 비르겐슈타인의 부대원 두 마리가 목숨을 내던져 시간을 벌은 것이다.

쿵, 쿵.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이번엔 진짜 끝이다.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최종 국면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발버둥치거나, 발악을 해봤자, 결국 쓸데없는 지면 낭비다.

이 이야기에 종지부가 찍힌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이해했고, 납득했다.

쓸데없는 저항을 해봤자 결국은 첨삭되어 간결하게 정리되지 않겠나?

“후우…… 데드 엔딩인가.”

뭐, 결말 방식이 살짝 맥 빠지긴 하지만, 이 정도로 노력했으면 작가로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 그렇게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여전히 작가 한주호라면 말이다.

빠드득!

어금니를 꽉 물며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었다.

“마음에 안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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