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70화 (1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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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촛불 (2)

“백성들은 굶주림과 병마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왕과 귀족들은 그들을 돌보기를 제 새끼 돌보듯 하였다. 기사들의 검에는 정의로움이 있었으며, 마법사들의 노래에는 지혜와 진리가 가득했다.”

영웅시를 노래하듯 힘 있던 국왕의 음성은 금세 음울하게 변해버렸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노니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은 이방인이었다.”

그 묵직한 음성이 텅 빈 밀실에 울려퍼졌다.

“가장 찬란한 광영으로 이끌어주었던 것도 이방인들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풍요롭던 시절을 더 없이 암울한 절망의 시기로 밀어 떨어트린 것 역시 이방인들이었지.”

국왕은 말했다. 이방인들이 부르짖던 새로운 세상이 너무도 달콤해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어, 같은 꿈을 꾸기를 바랐노라고.

김선혁은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지만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테오도르 국왕의 설명을 듣고만 있었다.

“큰 전쟁이 벌어졌다. 이름난 장군들이 수도 없이 죽었고, 긍지 높은 기사들과 현명한 마법사들은 씨가 마를 지경이 되었다. 들판의 곡식들은 추수할 자가 없어 썩어 문드러졌다. 미처 태우지 못한 시체들이 온 들판에 가득해 역병이 창궐했고, 오랜 전쟁 끝에 왕과 귀족들은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영지에서 발견된 광산을 조사하기 위해 왔던 왕실 조사관, 아인스트 제네거가 들려주었던 대륙의 비사(祕史)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모든 게 광영의 시절 이전으로 회귀하였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었던 기술들은 사장되었고, 체제를 공고히 만들어주었던 이로운 법과 체계들은 전부 폐기되었다. 이방인들이 이 세상에 가져온 모든 것들을 이해를 따지지 않고 모조리 금기로 정해 언급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대전쟁 끝에 살아남은 왕국의 위정자들은 모든 것을 지우기로 작정했지.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상에 숨어든 이방인들이었다.”

테오도르 국왕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여전히 혼란이 가시지 않았던 시기, 몇몇 이방인들은 운 좋게 귀족으로 살아남았고, 또 그 중 몇몇은 일국의 군주가 되기도 하였노라.”

설마 하는 생각에 김선혁은 테오도르 국왕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았다.

“우리 아데스덴은 그렇게 살아남은 이방인들의 후예 중 하나다.”

“그게 무슨!”

설마가 아니었다. 예상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진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 패망의 길에 접어들었던 아덴버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나의 선조이며 200년 전의 숙청(肅淸)에서 살아남은 이방인이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르 국왕은 몇 번이나 거듭해 자신의 선조가 이방인이라 말해주었다.

“아….”

처음부터 이상했다. 아데스덴 왕실은 이방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과할 정도로 호의적이었고 차별이 없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차별이라고는 오직 귀족들의 견제만이 유일했다.

“설마, 그래서 아덴버그가 유독 다른 왕국에 비해 이방인들에게….”

김선혁은 그 모든 것이 단지 합리적인 왕실의 성향 때문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방인들을 배척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혈통을 부정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아데스덴 왕실 자체가 이방인들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나 또한 그대와 같노니, 나에게도 스테이터스와 스킬, 병과라는 것이 존재하노라.”

너무 충격을 받았던 탓일까. 이제 와서 새삼 테오도르 국왕이 스테이터스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을 내뱉고 말았을 뿐이었다.

“선조들은 그 능력으로 인해 흩어졌던 왕국을 하나로 규합하고, 과거의 성세를 되찾았을 수 있었다. 허나 욕심이 과해 오히려 독이 되었으니,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방인들과 그 후예들을 찾아내어 기어이 혈족의 관계를 맺었고, 그것이 나의 대에 와서는 독이 든 성배가 되고 말았다. 희석되어 옅게 변하고 만 아데스덴의 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노라.”

테오도르 국왕은 덤덤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것이 아데스덴의 혈족이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단지 죽음을 목전에 둔 현왕의 수명을 조금이나마 연장할 방법을 알려주고자 했을 뿐인데, 너무도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혼란스러웠다.

아데스덴 왕실이 이방인의 후예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런 중대한 비밀을 자신에게 알려주는 이유도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대가 나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은 필시,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으리라. 허나 정작 그대야말로 나에게 제안을 하기까지 심적인 부담이 상당했을 터, 나는 그 어려움을 이해하노라.”

국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엄청나게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현명한 아데스덴의 지배자가 조금이라도 생을 연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렸고, 거래라는 형식을 빌어 최대한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어쩌면 그대의 제안이 단순한 정치적인 무지로 인한 무모함 때문이었을지라도, 나는 그대의 제안을 기꺼이 여기고 더욱 신뢰하려 하노라.”

하지만 이걸 어쩌나.

“드라흔이여. 그대는 아데스덴의 진정한 혈맹이다. 아니, 혈맹 그 이상이다.”

이쪽은 아직 거래할 물건을 꺼내들지도 않았는데, 선금이라고 하기에도 과한 대가를 듬뿍 받아버렸다.

“설령 그대가 제안한 비책이 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해도,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테오도르 국왕의 눈빛에는 전에 없이 신뢰와 친애가 가득했다.

“이는 아데스덴의 피를 걸고 하는 맹세요, 또한 내 영혼을 대가로 건네는 맹약이다.”

단지 말뿐이라고 하기에는 그 음성에 담긴 울림이 지독할 정도로 깊었다. 마치 정말로 영혼을 걸고 맹세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화악!

그런데 그게 단지 기분뿐만이 아니었다.

테오도르 국왕의 몸에서 갑작스레 빛이 흘러나오더니 실타래처럼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부드럽게 하지만 강렬하게, 장엄하고도 숭고한 의지가 빛을 통해 그의 영혼에 닿았다.

“나는 복수병과(Dual Class)의 소유자다. 그리고 이건 내가 지닌 수많은 병과 중 하나인 ‘군왕(君王)’이 지닌 스킬, 절대 어길 수 없는 약속이자, 절대적인 선포, ‘군왕의 맹세’이니라.”

이제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 여겼건만, 그 생각이 틀리고 말았다.

“아데스덴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모든 귀족들과 기사들, 그리고 수많은 맹우들이 앞으로 그대를 대함에 있어 나를 대하듯 할 것이다.”

국왕의 병과가 ‘군왕’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라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 광범위한 효과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쿨럭!”

갑작스러운 기침소리에 김선혁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창백하게 질린 국왕의 안색은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고, 연거푸 들려오는 가래 섞인 기침소리는 불길하기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국왕은 한참이나 기침을 하느라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침이 멎고 입을 열었을 때, 국왕의 파리한 입술에는 점점이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나는 간교한 자다. 하여 그대의 비책이 별 효과를 보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고자 한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 하지만 국왕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있었다.

“방금 전의 스킬은 나의 생명을 대가로 한 것, 그대라면 그 가치와 무게를 익히 알리라.”

기분 탓일까.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 국왕의 얼굴이 어쩐지 조금 전보다 푸석푸석하고 쇠약해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생명의 일부를 걸고, 나에게 충성을 바친 귀족들과 기사들로 하여금 그대를 거역하지 못하게 하였다. 인의로운 성정을 지닌 그대라면 필시 이에 대한 합당한 값을 치를 터, 뻔뻔하지만 나는 내가 받고자 하는 대가를 그대에게 요구하려 한다.”

얼결에 떠안은 것이었지만 왕실의 지지세력 전체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김선혁으로서는 대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오필리아를 잘 부탁한다.”

하지만 연이어진 테오도르 국왕의 요구는 그의 예상처럼 거창하지도 않았고, 대단하지도 않았다.

“오필리아가 세파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곁에서 끝까지 지켜주기를 바라노라.”

혹시라도 잘 못 들었을까 염려하여 몇 번이나 강조하는 국왕의 음성은 한 나라의 지배자이기보다 아비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 절절한 진심이 느껴져 김선혁은 절로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셈이 맞지 않습니다. 그건 제게 부탁이 될 수 없습니다.”

국왕의 표정이 잠시나마 굳어버렸다.

“왕녀께서는 제 약혼자이기도 하니까요.”

요구에 대한 수락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챙겨주겠노라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

테오도르 국왕도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는지 파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잠시 잊고 있었노라. 오필리아가 나의 사랑스러운 딸인 것처럼, 그대에게는 평생 함께 해야 할 배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백 번의 맹세보다 더욱 진실한 그의 대답에 국왕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새로운 대가를 요구하겠노라.”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아직 나오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용건이 국왕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내가 이 세상에 잠시나마 더 머무르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다오.”

김선혁은 대답했다.

“흐트러진 균형을 바로잡는 것. 감당하지 못할 힘을 버리는 것. 그게 바로 폐하의 상세를 변화시킬 유일한 길입니다.”

**

밀실을 나선 김선혁의 표정은 더없이 무거웠다.

‘어째서입니까!“

방금 전에 있었던 테오도르 국왕과의 대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검을 잡으면 검력이 절로 일어났고, 주문을 읊으면 그게 마법이 되었지. 그래서 검을 잡지 않았고, 마법을 외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내게 허락된 모든 능력들을 모두 억제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나에게 남은 것은 군왕 병과뿐, 그런데 그것마저 봉인하라 하는 것은 나에게 범인이 되라 말하는 것과 같노라.’

테오도르 국왕은 스스로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무능한 아비로 살아남아 왕녀에게 짐이 되느니, 군왕으로 죽겠다. 그것이 내가 그대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니라.’

일국의 왕이 된 신분으로서 무능한 것은 세상에 더할 것 없는 죄악이라며, 자신은 그런 죄인이 되고 싶지 않노라 말했다.

김선혁은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오필리아를, 아덴버그를 잘 부탁한다.’

마치 유언처럼 들리는 한마디를 끝으로 테오도르 국왕은 짙은 피로를 호소하며 그를 돌려보냈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군왕의 맹세’라는 스킬이 가져온 여파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됐어?]

“폐하는 내 제안을 거절했어.”

숙소로 돌아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게하임니스가 물었다.

[그럴 줄 알았어.]

마치 처음부터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해오는 작은 아룡의 태도, 그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폐하는 왜 제안을 거절한 거지?”

[삶과 죽음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인간에게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음마저 불사하지.]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 그렇게 자기 딸이 걱정되면 살아남아서 직접 챙겨주면 될 거 아냐!”

이해할 수 없는 결정, 안타까움에 저도 모르게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버럭 소리치는 그에게 게하임니스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네왔다.

[그자가 혈육을 돌보는 방식은 마치 그녀의 것과 닮아있어. 직접 이끌고 돌봐주는 것보다는 스스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고 기다리는 것, 그게 어리석거나 나쁜 건 아니란다.]

게하임니스의 몸에서 신비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빛과 닿은 김선혁은 방금 전의 격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스스로의 감정이 다소 격앙되었었음을 깨달은 그가 낮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너를 보면 알 수 있잖니. 그녀의 양육법은 틀리지 않았단다. 그리고 아마 그자의 혈육 역시 너처럼 훌륭하게 스스로의 길을 가겠지.]

안타까운 마음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전부 짐작하고 있었으면서, 왜 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줬지? 설마 내가 나설 줄 몰랐던 건 아닐 테고.”

스스로가 말한 바와 같이 테오도르 국왕이 그런 선택을 할 것을 알고 있었다면, 왜 자신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었냐는 것이었다.

[자물쇠가 채워진 내 입을 대신해 그자가 너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기를 바랐으니까.]

“뭐?”

이건 또 무슨 말인지, 김선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소환. 너희 이방인들이 이 세상에 오게 된 이유, 그 진실에 네가 조금이라도 다가가기를 바랐단다.]

“그게 용이 바라는 건가?”

그의 질문에 페어리 드래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왔다.

[아니. 이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나의 바람. 그리고 수많은 용의 아종들이 바라는 것이란다.]

**

왕도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김선혁은 그간 테오도르 국왕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국왕은 그날의 맹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를 진정한 가족으로 대했고 거기에 어떤 제약도 없었다.

마치 후계자라도 대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왕도의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머물던 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왕실의 사위이자 차기 왕위 계승자의 남편이 될 자라고 해도 테오도르 국왕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친근하고 격의가 없었던 탓이다.

거기에 더해 국왕파의 귀족들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이를 따르고 지지하기까지 했으니 귀족파의 귀족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의문을 갖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두문불출하던 왕녀 오필리아가 칩거를 깨고 모습을 드러냈다.

“어?”

마침 테오도르 국왕의 곁에서 대화를 나누던 김선혁은 왕녀의 모습을 보고는 또 한 번 얼이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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